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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위한 예수 - [예수에게 솔직히](로버트 펑크 지음․김준우 옮김; 1999)에 대한 논평

[세계의 신학] 44(1999 가을)에 게재되었고, 나의 책 [예수 역사학 - 예수로 예수를 넘기 위하여](다산글방, 2000)에 재수록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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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위한 예수

예수에게 솔직히(로버트 펑크 지음, 김준우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1999)에 대한 논평

 

 

 

1

 

아마 1988년쯤일 거다. 대학원 시절 예수 비유 세미나라는 과목을 수강할 때 로버트 펑크의 언어, 해석학, 하느님 말씀[각주:1]이라는 책을 읽게 된 것이 저자와의 첫 대면이다. 이 책에 수차례 반복되는 은유라는 말을 접하면서, 예수의 비유가 직유면 어떻고 은유면 어떤가, 참 서양 학자들은 할 일도 없다, 라고 무식한 불평을 털어놓던 낯 뜨거운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예레미아스(J. Jeremias)를 넘지 못했던 당시의 인지 능력으로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예수의 비유를 확대된 은유로 이해하는 관점이 인식론적 혁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만큼 대단한 주장이란 걸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다. 그만큼 펑크의 연구사적 위상을 깨닫게 된 것도 매우 나중의 일이다.

한편, 그 당시 세메이아(Semeia)라는 미국성서문학협회(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SBL)의 분과 모임 정기간행물의 제1(1974)에서 최근의 비유 연구들이 수록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그 책을 구하려 안달하다 그만 포기했던 안타까운 기억이 있다. 당시엔 외국에서 책을 구입한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을 만치 촌스런학생에 불과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미국 성서문학협회의 비유 연구 분과가 만들어진 것이 바로 펑크의 업적이었다. 1970년대 비유 연구의 부흥기가 이 연구 분과의 활약에 크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은 펑크의 비유에 관한 학제사적 위상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신약학계에서 그의 위치를 비유 연구에 한정해서 이해하는 것은 결코 충분하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설립한 웨스타 연구소(Westar Institute)의 핵심 프로젝트인 예수 세미나(Jesus Seninar)가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예수 연구의 부흥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는 오늘날 역사의 예수 연구의 흐름을 주도하는 리더의 한 사람인 것이다. 특히 예수 세미나형성의 모체가 된, 1985년부터 시작된 기획 사업인 역사의 예수의 말씀과 행위에 관한 확실성 연구 프로그램은 학계뿐 아니라 일반 대중사회에까지도 예수 연구의 붐을 조성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1991타임의 커버스토리를 장식할 만큼 화제거리였던, 독특한 방식인 4색 투표를 통한 확실성 결의법[각주:2]은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또 적지 않은 논란의 소용돌이의 핵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많은 매스컴의 이목을 집중시킴으로써 대중에게 예수 연구의 부흥을 감지하게 하는 포교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 공동연구 프로그램의 결과로 드디어 1993년 제1권인 다섯 권의 복음서: 예수 말의 확실성 연구(The Five Gospels: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Words of Jesus, 1993)가 출간되었으며, 1998년 제2권인 예수의 행적들: 예수 행위의 확실성 연구(The Acts of Jesus: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Deeds Jesus, 1998)가 나왔다. 이 두 권의 저술들이 개별 학자의 연구 성과물이 아니라 2백여 명이나 되는 예수 전문 연구자들의 학문적 견해를 결집한 것이라는 점에서, 가히 이 책들은 역사의 예수에 관한 현대 학계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역사의 예수 연구 제3기라고 불리는 최근 경향을 대표하는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고 해도 별 이의가 없다고 감히 평할 수 있으리라. 물론 이 야심찬 작업을 기획한 장본인이 바로 펑크다. 나아가 그의 이 기획, 특히 그가 착안한 확실성 측정법은 2백 명이 넘는 전문 학자들의 다양한 연구 성과를 그의 자의적인 창작물의 부속품으로 활용한 셈이 된다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위상은 가히 르네상스기를 맞이한 현대 예수 연구라는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명지휘자에 비견할 만하다.

그런데 펑크에 관한 이러한 소개만으로 그를 다 이야기했다고 하는 것은 넌센스다. 그의 학문적, 혹은 학제적 이력의 핵은 무엇보다도 그의 작업의 실천적 함의에 있다. 그는 현대사회에서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의 유의미성을 상실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만약 세계 속에 신앙의 적절한 개입 지점을 여전히 찾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교의 미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가 예수의 역사적 재건을 추구하는 데는 현대사회에서 존재 의의를 상실해버린 그리스도교와 교회의 혁신에 예수라는 화두가 절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는 예수의 삶과 실천을 재건하고 이것을 널리 전파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모든 현대인들의 윤리적 판단에 예수의 빛을 씌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신학하기는 곧 지구와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 존재의 윤리적 실천론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지난해 우연히 예수에게 솔직히: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위한 예수(Honest to Jesus. Jesus for a New Millennium, 1996)를 읽을 기회를 갖게 되었다. 미국의 독특한 배경을 알지 않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구문들이 많아서 독해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만큼 그의 이 저술은, 이제까지의 다른 작업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속한 사회 특유의 위기에 관한 일관된 그의 실천적 문제의식을 강하게 담고 있다. 퍽 재미있고 감동스러웠기에, 기회가 닫는다면 번역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번역 중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너무 반가웠는데, 송구스럽게도 이 책의 서평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번엔 번역된 책을 다시 두 번에 걸쳐 정독했다. 그 감동스러움은 조금도 왜소해지지 않았지만, 현대 학계를 대표하는, 화려한 이력의 노학자의 책을 논평하는 일이 얼마나 벅찬 일인가,를 비로소 깨달았고, 서평 요청에 쾌히 응답한 것을 깊이 후회했지만, 이미 원고청탁서가 도착한 뒤였다. 그러므로 서평을 본격 시작하기에 앞서 이 논평의 한계를 짓는 것부터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학계에서 누군들 펑크 같은 대가의 검법을 익히 파악할 수 있겠나마는, 더구나 학문적 수련을 전문으로 하는 연구자가 아닌 나로서는 더더욱 충분한 이론적인 평가에 기반을 둔 내용 소개를 독자에게 선사할 능력이 없다. 다만 제2장에서는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같은 분야를 공부하는 덜 준비된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글을 소개하는 데 할애할 것이다. 어쩌면 이런 나의 부족한 조건이 소개자로서는 더 나은 조건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동료 목회자든 신학도든 혹은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독자든 간에, 이 책의 독자들은 펑크보다 내가 훨씬 익숙하게 알고 있는 대중이기 때문이며, 대부분의 독자들은 펑크 같은 대가가 아니라,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에 속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서평(물론 이 표현은 나와는 동떨어진 것이겠지만)이라도 책을 직접 읽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다. 그러니 여기서의 내용 소개는 이 책이 얼마나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평하는 의의 소개에 치중하는 게 나을 듯하다. 가급적이면 길지 않게.

한편 마지막 장에서는 부족하나마 이 책에 대한 비평을 시도할 것인데, 이미 말했거니와 나로선 너무 벅찬 일이다. 다만 민중신학 연구자로서 그가 주도하는 연구 의제에 대해 몇 가지 이의가 있는데, 여기서는 그것을 중심으로 이 책에 대한 문제제기를 논하고자 한다.

 

2

 

예수에게 솔직히라는 제목 자체가 암시하는 것처럼, 이 책은 로빈슨(J.A.T. Robinson)의 문제작 신에게 솔직히(Honest to God, orig.1963)를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로빈슨의 책은 하늘을 보며 더 이상 신의 나라를 상상하지 않는 현대인에게서 신에게 솔직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도전적으로 질문하고 있다. 요컨대 그는 세속사회의 신이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복음의 비종교적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펑크는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탈속적이고 신화적인 신앙에 몰입해 있는 그리스도교와 교회를 비판적으로 보면서 자신의 책을 저술하였다. 세계를 위해 유의미한 윤리적 개입을 할 수 없는 종교가 도대체 무엇에 필요한가? 그러나 이런 문제의식을 담는 신앙적 혁신의 열쇠를 펑크는로빈슨처럼 타자적 존재로서의 신이 아니라역사의 예수에게서 찾는다. 이 점에서 펑크의 윤리학적 요청은, 로빈슨에 비해 한결 성서학적 과제와 맞물려 있다. 예수를 역사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관한 현대의 연구 성과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면 예수에게 솔직히라는 신앙적 혁신의 부호는 무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현대적 연구 성과란 주로 그가 추동하고 조율하는 예수 세미나의 작업과 연계되어 있다.

이 책의 서론후기는 바로 이러한 견해를 총론적으로 담고 있다. 서론부에는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위한 예수를 찾는 저자의 학문적 여정을 고백적으로 술회하고 있는데, 그 속에서 독자를 향한 저자의 메시지가 메아리치고 있다. 그것은 곧 현대 사회를 향한, 펑크가 재현한 예수의 목소리다. 결론부라 할 수 있는 후기에는 이러한 메시지를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위한 스물 한 가지 테제의 형식으로 제안되고 있는데, 그것은 신앙과 교회 혁신의 구체적 내용이요, 그러한 신학의 학문적 과제를 담은 언표들이다.

이 저술의 본론부는 역사의 예수에 관한 학문적 논의가 무려 15개 장, 4백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걸쳐 다루어져 있다. 그만큼 여느 안내서에서 쉽게 볼 수 없을 만큼 상세하고 충분히 예수에 관한 고급 정보를 접할 기회를 저자는 제공해 주고 있다. 더욱이 교회나 신학교를 거쳐야만, 그리하여 그 종파적 언표들에 숙달되어야만 해독될 수 있는 암호들로 가득한 대개의 전문서적들에 비해 이 책은 교회와 신학교 밖의 일반독자들도 자신의 상식적인 지식을 동원해서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대중적 언어로 쓰여졌다. 물론 그렇다고 이 책이 저급한 속류 예수론을 펼치는 저작들에 비견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최고의 권위를 갖는 학자의 한 사람인 펑크만이 할 수 있는, 교권이나 학계의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깊은 학문적 소양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그만의 자유로움이 한껏 발휘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여기에서 매우 고급의 정보들을 비교적 손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부는 나사렛으로 되돌아가는 길이라는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역사의 예수에 관한 저자의 입장을 본격적으로 펴기 이전에 반드시 검토해야 하는 일종의 준비운동 같은 내용들이다. 일곱 장에 걸쳐, 예수에 관한 물음의 인식론적 지평은 어떠해야 하는지, 역사적으로 오독되어온 교회사적 이해의 과정을 역진적으로 거슬러가 역사의 예수를 재건하는 작업은 어떤 장애물을 넘어가야 하는지, 텍스트의 언어 및 범위 선정의 문제들은 이해에 어떤 가능성과 한계를 주는지 등등, 시간의 흐름 속에서, 특히 교회의 역사 속에서 굴절된 예수상의 해체를 위한 예비적 지식들이 어떤 것들인지가 비교적 소상하게 다루어져 있다. 여기서 신약성서 정경의 해체 및 확대 재구성을 제안하는 그의 도전적인 문제제기에서 미국의 독자들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마도 한국의 독자들은 훨씬 더 강렬한 저자의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의 말대로, 만약 이러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책을 덮어버리지 않고 계속 읽어내려가는 독자가 많다면, 한국의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희망을 가져볼만 하리라.

2예수의 복음은 저자가 재현한 역사의 예수가 어떤 존재인지를 네 개의 장에 걸쳐 설명한다. 예수의 말임이 확실한 것들은 수사학적으로 어떤 특징을 지니는지를 이야기하고, 예수 말의 가장 두드러진 장르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비유를 통해 역사의 예수의 캐리커처를 그려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자신의 다른 저술들에서 이미 상세하게 다룬 바 있던 두 편의 비유(‘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탕자와 큰아들의 비유’)를 여기서 소개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이 비유들은 저자의 논지를 위해 가장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에 속할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저자의 준비된 해설을 통해 평이하면서도 결코 평범치 않은 그의 예수 그리기를 효과적으로 소개받을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저자는 예수가 전통적으로 이해되어온 종말론적 예언자라기보다는 비종말론적인 현자로서, 내세보다는 현재의 일상적 삶에 윤리적으로 개입한 존재였음을 강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하느님나라는 매우 구체적이며 실감나는 현상이었고, 신의 독백적 구상물이라기보다는 그 나라 백성과의 소통적 실재였으며, 이러한 대화를 통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적 구상물이라는 것이다. ‘은유로서의 비유는 그 자체로 완성적이기보다는 청자/독자의 관여를 통해서 비로소 완성될 수 있는 예수 특유의 대화적인 언술의 테크닉이라 할 수 있다. 즉 대중은 예수의 전복적인 지혜를 통한 윤리적 도전에 직면해서 참여에의 부름에 직면하게 되며, 따라서 예수가 도래를 선포한 하느님나라를 완성해야 할 과제를 부여받게 된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복음은 내세에의 보증서가 아니라, 역사에로의 윤리적 개입을 통한 일종의 내재적 초월성의 유토피아주의에의 요청/약속이라 할 수 있다.

3복음서들의 예수에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메시아적 칭호들에 관련된 복음서들의 종말론적 요소들에 관한 논의에 네 개의 장을 할애하고 있다. ‘복음서들의 예수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러한 종말론적 기억들을 저자는 초기그리스도교회의 언술 전략의 결과물로서 이해한다. 이것은 예수 세미나를 포함한 북미의 다수의 예수 연구자들의 견해이기도 한데, 예수가 처형당했다는 사실 이외에 더 이상의 역사적 재현이 불가능할 만큼 교회의 정교한 가필로 온통 윤색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상파괴자인 예수가 또 하나의 우상으로서의 신앙의 대상으로 변모된 것에서 교회의 선교적 성격을 비판적으로 읽으려 한다. 예수 승계자들의 선교란 한 마디로 마케팅이었다는 것이다. ‘마케팅이라는 것은 장인적 아우라(예술혼)보다는 소비자의 욕구를 우선시하는 생산자의 태도를 함축한다. 그리하여 예수 승계자들은 또 하나의 우상으로서의 예수라는 종교 상품을 마케팅하는 데 열중했고, 여기에서 역사의 예수는 치명적으로 각색되어버렸다는 것이다.

한편 저자는 이러한 각색의 과정에서 수난-부활 신학을 비롯한 예수의 메시아적 이미지가 구성되었을 뿐 아니라, 앞의 제2부에서 언급한 바, ‘예수의 복음이 담긴 비유를 포함한 말들이 그 전복적 폭발력을 잃고 순화되었다(domesticated)고 주장한다. 이때 그가 사용한 이 단어는 의미심장하다. ‘가족의 질서에 규율됨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가족이라는 전통적 경계를 전제한다. 이것은 예수와 그의 승계자들 간의 차이를 단적으로 드러내주는데, 즉 예수가 경계화의 규율인 인습적 가치체계를 해체하려 했다면, 그의 승계자들은 그것을 다시 복원시켰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오늘날 우리 시대의 인습적 가치체계를 내면화하고 있는, 그리고 탈역사적인 신앙적 코드(특히 종말론)에만 몰두해 버린 그리스도주의자들에게 예수에게 솔직하라고 충고하는 저자의 통렬한 비판이 담겨있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인습적 가치를 전복하는 현자로서 재현되어야만 우리는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위한 희망의 메시지를 우리의 신앙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최근 한국교회의 유력한 지도자들이 신문지상에 한국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패덕스런 일련의 행태들에 대해 회개하는 광고를 게재했다. 사회에 대한 도덕적 불감증에 빠진 교회의 신앙이 이제 한계에 도달했으며, 그리스도교에 대한 대중적 혐오감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다는 교계 지도자들의 문제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들은 펑크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의 실패에 대한 진단에서 양자는 중대한 차이를 노정하고 있다. 회개 광고를 낸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그리스도 교회의 전통이 담고 있는 복음의 진리 위에 다시금 굳게 서자고 권고하지만, 펑크는 예수의 복음을 마케팅하는 데 치중했던 교회의 전통을 넘어서 상품화되지 않은예수에게로 돌아가자고 한다. 후자는 문제를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되물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여기에는 교회 자체 내에서는 자기 혁신의 동력이 소진되어버렸다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발본적인 자기반성의 근거를 최근의 역사의 예수 연구의 성과에서 찾는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실패를 넘어서는 근거를 그는 교회 전통의 복원에서가 아니라 교회 전통 자체를 해체시키는 이론적 성과에서 찾는다. 이러한 이론적 개입의 관점은 실천이론을 지향하는 민중신학의 반신학적 문제설정과 유사성을 갖는다. 특히 역사의 예수의 복원이 이론적 개입의 준거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양자는 일치된 관점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민중신학은 펑크와 여러 가지 이론적인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여기서는 이 차이를 중심으로 펑크의 이론적 개입의 한계와 민중신학적 대안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1) 첫째로, 우리는 펑크의 '역사 인식론'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분명 예수의 실재성(reality)에 접근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예수가 실제로 한 말과 행위가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데 주력했던 예수 세미나의 십여 년에 걸친 공동 작업의 결실로 탄생한 두 권의 저술이 바로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때 펑크가 말하는 역사학이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복원하는 시간의 재현 이론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역사학의 자료로 활용되는 텍스트 속에 들어 있는 언어가 항구불변의 의미를 갖는다는 관점을 수반한다. 이러한 역사 인식론에 의거할 때, 역사학적 방법론은 후대적 가필의 흔적들을 제거하는 기술들(technologies)을 의미하게 된다. 예수 세미나가 바로 그러한 방법론을 추구하였는데, 이는 특히 포스트불트마니안들이 발전시킨 진정성의 표준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런 점에서 예수 세미나가 (연구의 제3기라고 명명되곤 하는) 최근의 예수 연구의 붐을 조성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방법론적으로 혹은 인식론적으로 예수 세미나가 포스트불트마니안들로 대표되는 제2기 연구와 질적인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는 평가를 내린 바 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가장 신뢰할만한 것으로 인정된 것이 바로 비유들을 포함한 어록들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행위들은 역사적 실재성을 갖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때 말과 결합된 행위들은 말의 공시적 맥락으로 취급되었다. 즉 말이 우선적이고 행위는 말의 부속물인 것이다. 그리하여 행위라는 공간적 맥락은 후대적 가필(시간적 맥락)의 결과라는 기묘한 결론이 도출되었다. 이렇게 하여 역사의 예수를 재현하기 위한 주요 텍스트는 맥락이 거의 사상된 채 전승된 말들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러한 실재론적 역사 인식론에는 다음 두 가지 가정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말과 행위의 이분법이며, 다른 하나는 이러한 이분법 위에서 말만이 실재하는 것이고, 행위는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차등화 논리는 정신과 육체의 관계 담론과 비견할 수 있다. 정신이 탈물질적이며 보편적이라면, 육체는 물질적 특수성을 존재의 속성으로 한다. 요컨대 육체는 구체적인 물질화된 조건의 세계 속에 자신을 드러내야만, 그러한 맥락과의 상호 관계 속에 진입해야만 비로소 존재성을 획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면, 정신은 물질적 조건과는 관계없이 실재하는, 세계의 외부자로서만 세계와 관계 맺을 뿐인 존재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말이 탈물질화된 진리담론으로서, 탈시간적인 보편적 실체라면, 행위는 그러한 진리 담론에 몸을 입혀(corporalized) 시간 속에 투여하는 요소로서만 유의미한 것이라고 가정되는 것이다. 즉 행위는 말의 공간적 맥락화의 요소인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명멸하는 시간 속에서 말을 표상시키는 시간적 맥락화의 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행위라는 것은 그것이 일어났던 순간에만 유의미한 것이고, 다른 시간대에서는 진리의 발현을 훼방하는, 한갓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텍스트 속에 나타나는 예수 말의 시공간적 맥락화의 요소인 행위들을 제거하는 역진적 과정을 거쳐서 진리 담론을 찾아내는 방법이 역사적 비평방법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맥락이 사라진 말이 복원된다고 해서 그 의미가 복원된다고 볼 수 있는가? 가령, 오 나의 크리스탈!,이라는 어떤 남자의 말을 가지고 그가 말한 것의 의미를, 나아가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낼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여기서 크리스탈은 보석인가? 혹시 그가 사랑하는 그녀의 이름/별명은 아닐까? 혹은 보들레르 시에 나오는 크리스탈 궁전, 세상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색유리가 결여된 유리의 세상, 즉 번영하는 화려 찬란한 비정의 도시 파리를 보며 외치는 예언자의 탄식이라고 볼 수는 없는가? 이때 그의 언표는 이 중 어느 의미를 갖도록 우리의 인식을 강제하고 있는가?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데, 펑크는 그것을 알까?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상상으로 상황을 구성해보자: 크리스탈은 그 남자의 아내를 가리키는 언표였다고 하자. 처녀 시절 지금의 남편은 그녀를 늘 이렇게 불렀었다. 하지만 지금 남편은 더 이상 그녀를 그렇게 호명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그것은 이젠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남아있는 애칭이었다. 그런데 요즈음 남편은 다른 여자가 생겼다. 아내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아내의 의혹을 눈치 채고는, 아내의 생일인 그날 유난히 일찍 퇴근하면서 장미 한 다발을 그녀에게 안겨주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라고 가정하자. 맥락을 이렇게 구성하고 나니, 오 나의 크리스탈!,이라는 언표로 상상했던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것은 아름다운 보석에 대한 감탄도, 연인에 대한 사랑의 정서도 아니다. 또 자본주의적 대도시 문명에 대한 저주도 아니다. 그것은 바람난 남편의 교활한 속임수였던 것이다. 따라서 만약 펑크를 포함한 대다수 성서학자들이 상상하는 대로, 행위가 제거되고 말만 예수의 것으로 인정될 수 있다면, 우리는 실제의 예수에 대해 아무 것도말할 수 없다.

우리는 펑크의 실재론적 역사 인식론이 서구적 인식론의 한계인 말 중심주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본다. 한편 민중신학은 태초에 말이 있었던 게 아니라, 사건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민중신학의 사건론은, ‘예수는 주변의 대중과 더불어 사건을 일으켰다는 명제와 더불어 시작한다. 이 명제에서 예수는 맥락화된 요소들로부터 분리된 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암시되고 있다. 존재하는 것은 탈역사적 실재로서의 단독자 예수가 아니라, 예수와 주변의 대중이 더불어 일으키고 있는 사건인 것이다. 이때 사건은 관계의 개념임이 드러난다. 또한 그것은 공시성뿐 아니라 통시성을 함축한다. , 예수와 사건을 일으키는 주변의 대중은 후대의 시기에 예수를 읽으며 예수운동을 일으키는 상이한 시간대의 존재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때 예수와 예수 읽기를 하고 있는 대중은 시간적 대화의 관계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존 마이어가 한 주변적 유다인(A Marginal Jew, 1991)이라는 저술에서 실재 예수(real Jesus)와 역사의 예수(historical Jesus)를 구분하면서, 전자가 아니라 후자가 역사학의 과제라고 했을 때, 분명 그는 실재론적 역사 인식론의 한계를 문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예수 역사학의 해석 단위가 말이 아니라 사건임을 통찰하지는 못했다. 샌더스는 예수와 유다교(Jesus and Judaism, 1985)[각주:3]라는 문제작에서 사건을 예수 연구의 단위로 사용하는 놀라운 통찰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의 저작에서 사건은 공시적 관계성만을 가정하고 있었다. 한편 현대의 포스트주의적 역사가 라카프라(D. LaCapra)는 역사학에서 텍스트를, ‘전통과 시대가 교차하는 장소이며, 그 교차의 시공간적 위치에 따라 의미가 달리 재현될 수 있는 다양한 의미망으로 규정한다.[각주:4] 이것은 현대의 역사학이 재현 불가능한 과제인 실재론적 역사관을 폐기하고, 관계론적 역사관을 대안으로 채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놀랍게도 1970년대 중반에 출발해서 1980년대 중반 이전까지 가설의 완성도를 점차 높여 갔던 안병무의 오클로스론[각주:5]은 이러한 관계론적 역사 인식론의 기반 위에서 텍스트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예수 역사학에 있어서 가히 혁명적이라 할만한 진전을 이룩했다비록 안병무 자신도 그의 사건론적 가설이 예수 역사학 패러다임의 일대 전환을 이룩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간파하지 못했음에도. 그는 행위가 배제된 텍스트인 어록자료보다는 말과 행위의 복합체적 텍스트인 마르코복음서에서 역사의 예수를 묻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현대 예수 연구의 주류를 빗겨가고 있다. 문제는 마르코복음서에서 어떻게 역사의 예수를 복원하느냐의 문제인데, 여기서 그의 독창적인 사건론적 방법론이 활용된다. 그는 마르코복음서를 민담적 텍스트로 보면서 유언비어(rumer), 즉 비공식적 대중매체를 통해서 이야기가 전승되었음을 가정한다. 이 말은 전승자가 누구인가에 관한 논의에로 물음의 초점이 모아짐을 뜻한다. 그는 마르코복음서의 언술 용법에 따라, 비자발적인 이탈로 특징지워지는 배제된 사회적 대중을 가리키는 오클로스가 바로 그 전승자라는 가정을 내놓는다. 여기서 예수-오클로스라는 대화의 코드가 형성되며, 이것은 예수 동시대의 예수-주변의 대중이라는 담론 형성의 코드와 가족적 유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인다. 그것은 두 코드화가 계급적 민족적 성적 배제라는 공유된 박탈의 체험에 의해 추동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예수와 마르코복음서 사이에는 시간적 근접성과 공간적 근접성이 다른 텍스트보다 더욱 강하게 관철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의미 연계의 물음을 예수 역사학적 과제로서 다룰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사건론적 예수론은 역사학의 과제를 넘어서 윤리학의 과제와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말했듯이 사건은 시공간적인 대화 과정을 내포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태일이 예수다,라는 민중신학적 명제는 전태일 사건이 예수사건의 재현을 위한 해석학적 준거임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신앙적 개입의 지점이 어디인가를 보여주는 윤리적 결단의 문제로서 기능한다. 요컨대 민중신학이 예수-마르코복음서의 오클로스 사건-전태일 사건이라는 시간적 계열의 의미의 연계성을 주장할 때, 이 계열의 전진적 읽기 과정은 윤리적 해석의 문제이며, 반면 역진적 읽기 과정은 예수 역사학의 문제인 것이다.

(2) 한편, 이러한 민중신학적 사건론과 비교할 때, 우리는 펑크의 또 다른 한계를 지적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의 연구가 엘리트주의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제기다. 여기서 엘리트주의란 그의 저작이 지성사의 성과물이라는 것을 지적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지성사적 성과와는 무관한 속류 대중서들의 사이비 이론들에 대해 더 강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우리가 그의 저술에서 엘리트주의적이라는 혐의를 갖는 것은, 그가 여전히 계몽적 시각을 견지하려 한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예수의 진리 가르침에 우리를 대면하도록 하는 문제설정으로서 윤리를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윤리가 기성의 인습적 가치에 대한 전복적 윤리라고 할 때, 여기에는 단순히 개인적 결단의 요청이라는 계몽주의적 주장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 인습적 가치는 이미 선악의 분별지만이 아니라, 하나의 욕구체계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서 인습적 가치는 이미 무의식 속에서 내재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윤리는, 계몽주의적 주장처럼 미리 주어진 진리가 아니다. 아니 그것은 반진리요, 일탈의 진리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하다. 그것은 미리 알고 있는 대안을 추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그것을 믿는 순례자적 실천이다.

펑크의 이러한 엘리트주의는 역사의 예수 재현 작업에서도 나타난다. 그의 역사학적 작업은 지속적으로 텍스트의 대화 가능성을 소거시키는 데 맞추어져 있다. 즉 그는 의미가 고정된 지점을 찾아, 더 이상 해석의 여지가 없이 분명한 의미를 가졌다는 그 원점을 찾아 역진적 과정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그는 시간적 대화의 이해 과정을 부정하고 있다. 이제까지의 대부분의 예수 연구사가 그랬던 것처럼, 기본적으로 예수와 부활절 이후의 그리스도교는 단절적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의 과정을 연속이냐 단절이냐,라는 이분법적 잣대를 가지고 평가하는 조야한 해석학적 시각은 전승의 무제약적인 해석자라는 창조적 글쓰기를 전제한다. 예컨대 그는 마르코의 수난 설화는 호교론적 텍스트로서, 민담적 요소를 완전히 각색한 초기 교회의 프로파간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민담적 구술 전승 과정과 문필가의 창조적 글쓰기 사이에 내용에서나 구성에서 완벽한 단절이 존재한다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그는 마르코복음서를 포함한 신약성서의 모든 텍스트들이 예외 없이 구술적 문서임을 간과하고 있다. 이 글들이 문자 사용층이 전 인구의 5% 미만인 사회에서 저술된 텍스트라는 것이다. 더구나 문자사용층과 비문자층이 각기 별도의 주거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고대의 사회에서, 비문자적 공동체의 구성물인 마르코복음서가 맞이하는 문자계층의 구성비는 훨씬 낮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문헌적 창조성을 통해 지식을 구성하는 게 아니라, 반복적 기억을 통해 모든 사유 대상을 독해한다. 그런데 대중의 일반적 기억과는 무관한 완전한 창작물이 고대의 대중사회 한 가운데서 존재했다는 가설은 그가 얼마나 엘리트층의 능력을 과신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3) 한편 펑크는 예수를 종말론적 예언자라기보다는 반종말론적 현자라고 본다. 이것은 실은 위의 엘리트주의적이라는 지적과 맞물려 있다. 위에서 시사했듯이 펑크는 설화적 텍스트로부터 역사의 예수에게로 가는 거의 모든 경로를 부정한다. 이렇게 설화적 가능성이 해체된 뒤 남은 역사학적 대안은 뿐이다. 매우 오래된 어록자료가 존재했다는 개연성 있는 가설은 이러한 대안에 대한 희망을 더욱 북돋았다. 이제 남은 것은 가설적인 어록 텍스트에서 예수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의 문제인데, 텍스트에서 종말론적 요소를 소거해 가는 것이 그 대안이었다. 이렇게 해서 반종말론적 현자 예수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결론에 이르는 데는 비교문학적인 분석이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는데, 특히 견유철학자들의 어록과 예수의 어록이 유사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과, 이들 견유철학자들이 비종말론적이라는 점이 예수 어록 연구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 과정에는 기록된 텍스트만이 비교의 준거로 활용되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기록된 텍스트 속에서 비문자적인 구술적 담론의 흔적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거의 기울여지지 않았다.

여기서 종말론적이라는 단어와 지혜적이라는 단어는 비일상적이냐 일상적이냐,라는 말과 일대일 대응관계에 있다. 이때 종말론의 비일상성이 종종 탈세적 특성과 혼돈되고 있다. 그러나 종말론은 전 세계적으로 탈세적 차원이 아주 강렬한 유형에서 매우 현실 개입적인 데까지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다. 물론 예수 시대 팔레스틴도 예외가 아니다. 그럼에도 종말론을 단순하게 생각하게 된 데는 종말론적 언술의 특성에 대한 몰이해와 관련된다. 종말론적 언술은 다음 두 가지 중요한 특성을 갖는다. 하나는 염원하는 것의 실현을 현실공간 외부에서 추구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탈세적 실현이 매우 급격한 방식으로 현실에서 좌절된 그의 삶에 개입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자만을 주목하다 보니, 종말론의 현세적 실천의 효과가 무시된 것이다.

한편, 종말사상과 지혜사상의 대립을 두 학파의 대립처럼 생각하는 오류가 펑크의 책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문제시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종말론적 사유의 요소와 지혜적 사유의 요소는 사람에게 공존해서 나타날 수 있다. 아니 실은 그게 일반적이다. 다만 정도의 문제에 있어 매우 종말론적인 사람/집단이 있기도 하고, 매우 비종말론적 사람/집단도 있다. 요컨대 두 사유의 공존이 불가능하다는 전제 아래서, 예수를 종말론과 분리시키고, 종말론적인 초기 그리스도교와 분리시키며, 예수 동시대의 종말론적인 여러 운동들과 분리시키는 것은 개연성이 적은 근거를 가지고 너무 정교하게 역사적인 재구성을 모색한 셈이 된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이러한 무리한 해석의 배경에는 펑크를 포함한 많은 연구자들이 오늘날 서구의 문제의식을 성서 읽기에 단순하게 개입시킨 결과로서 보인다. 즉 그리스도교 전통의 종말론과 윤리의 이율배반적 갈등을 넘어서기 위해서 반종말론적 신학이 요청되었던 결과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요청에 따른 해석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하나의 해석의 계열이 다른 이해의 여지를 잠식하는 결정론적 언술의 형식을 띠고 제안되었다는 데 있다. 그것은 그가 실재론적인 역사 인식론적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펴고 있기 때문에 불가피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여기서 사건론적 해석의 유의미성을 주목하게 된다. 요컨대 펑크나 우리 양자 모두는 예수 역사학과 현실 개입적인 윤리학의 상관성을 중요시하고 있지만, 민중신학의 사건론적 이해는 펑크의 실재론적 인식론의 입장보다 훨씬 성찰적인 차원을 담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상의 문제제기들을 통해 펑크의 책을 읽는 하나의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고 싶었다. 그것은 이 책이 우리가 경원시해야할 요소보다는 비판적 대화를 모색할 요소가 훨씬 많은 훌륭한 저술이라고 보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우리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교 신앙에 유의미한 도전을 가하고 있는 매우 드문 저술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 Robert W. Funk, language, Hermeneutic, amd the Word of God: The Problem of language in the New Testament and Contemporary Theology (New York: Harper & Row, 1966). [본문으로]
  2. 이제는 많이 알려져 다시 소개할 필요도 없지만, 노파심에서 간략히 이야기하면, ‘예수 세미나’에 참석한 2백여 명의 학자들이 네 가지 색깔의 구슬을 상자에 넣음으로써 예수의 말과 행위의 역사적 확실성을 측정하는 방식이다. 붉은색 구슬은 예수의 말/행위임이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경우를 나타내며, 반면 검은색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이는 경우를 뜻한다. 또 핑크색은 개연성이 높은 경우를, 회색은 매우 개연성이 낮은 경우를 나타낸다. 이렇게 해서 말과 행위의 진정성을 가리는 책이 출간될 때, 그 여부가 4가지 색으로 표기되어 출간되었다. [본문으로]
  3. 이 책은 이정희에 의해서 《예수와 하느님나라》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본문으로]
  4. 라카프라, D. & 카플란, L. 엮음, 《현대유럽지성사》(강원대출판부, 1986) 참조. [본문으로]
  5. 이에 대하여는 나의 글 〈민중신학 민중론의 성서적 기초.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을 중심으로〉, 《예수 민중 민족》(한국신학연구소, 1992)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