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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민중신학의 문화정치학적 지평 확대를 위하여 - 〈‘베드로전서’의 집 없는 나그네들과 가부장주의적인 ‘하나님의 집’〉(박경미)에 대한 논평

이 글은 박경미(이화여대 교수/신약학)의 <베드로 전서의 집 없는 나그네들과 가부장적인 '하나님의 집'>에 대한 논평글로, 한국민중신학회 연구기획위원회 3차 연구발표회(1995.9.14) 때에 제출된 것입니다. 박경미 교수의 글은 [신학사상] 90(1995 가을)에 게재되었고, 나의 논평글은 [시대와 민중신학] 3(1996)에 게재되었습니다.
박경미 교수의 글과 나의 글을 올립니다.


민중신학의 문화정치학적 지평 확대를 위하.pdf

박경미_베드로전서의 집 없는 나그네들과 가.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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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의 문화정치학적 지평 확대를 위하여

베드로전서의 집 없는 나그네들과 가부장주의적인 하나님의 집(박경미)[각주:1]에 대한 논평

 

 

 

 

1

 

종교공동체라는 공간은 포괄적인 의미에서 공통된 종교적 담론을 갖는다. 그러나 이 포괄적 담론이 종교공동체 성원들 각자의 삶 속에 바로 개입해 들어오는 것(실감나게 종교성이 체험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공동체 성원들 각자가 포진하고 상호 관계를 맺으며 의사소통하는 시공간적 장소(현장, locale)에서 어떻게 재현(representation)되느냐의 문제와 결부된다. 그런데 현실의 시공간적 장소가 관력관계로 구성되어 있는 한, 이 재현 과정은 어떤 형태로든 권력담론과 절합(분절적 접합; articulation)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 포괄적 담론의 재현을 둘러싼 제 주체간의 투쟁은 문화정치학의 기본적 내용을 구성한다.

성서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공동체의 가장 대표적인 포괄적 담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서 해석의 문제는, 비정치적인, 의사소통 이전의 시공간을 전제하는 [정태적인] 계시적 담론을 향한 끊임없는 동일화과정이 아니라,[각주:2] 미래의 사회역사적 전망과 현실의 삶을 접맥시키려는 역동적인 진리형성 과정이다. 그러므로 상이한 해석 간의 차이, 무중력 상태의 진리에 대한 거리 간의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정치학의 장에서 삶의 문제를 둘러싸고 각축하는 권력담론과의 [피할 수 없는] 관계맺기의 문제다. 따라서 민중신학이 실감나는 신학적 위상을 확보하는 문제는, 단순히 반지성주의적인 담론 하방운동[각주:3]이나 과거의 한국적(?) 이미지의 현재적 재현이라는 언술 전략[각주:4]만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문화정치학적 지평 속에서 얼마나 효과적인 신학적 담론을 구성하느냐의 문제, 즉 현재의 시공간적 장소에서 다양하게 전개되는 다중적 주체들의 실천들과의 담론 절합에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느냐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민중신학은 성서 해석에 있어 다양한 텍스트들이 민중신학적 고리에 의해 매개되면서도 차이다양성을 포괄하고 있음을 해명해 내는 것을 하나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

박경미의 논문은 바로 이런 취지에 부합하는 모범적인 시도라 평가할 만하다. 나는 그 이유를, 이 논문에 대한 다음의 세 가지 전반적인 평가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⑴ 〈베드로전서를 민중신학적 시각에서 조명하는 최초의 이론적인 시도라는 점; 학제간 연구를 시도함으로써 단순한 관점의 전환을 넘어서 방법론적인 진전을 도모하였고, 특히 이 학제간 연구를 시도한 성과물 가운데 가장 탁월한 저작에 속하는 엘리어트(J.H. Elliott)의 연구[각주:5]에 기초함으로써, 이론적으로 확고한 입지점 위에 서 있다는 점; 이 텍스트의 실천적 함의로서 외국인노동자 문제를 제시하고, 이 텍스트에 대해 성해방주의적 관점의 질문을 던짐으로써, 민중신학 민중론의 폐쇄된 공간적 경계(boundary)라는 암묵적인 국수주의적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민중론적 문제설정이 암시되어 있다는 점(이것에 대해서는 뒤에서 보다 심도 있게 논의하고자 함).

그럼에도 이 글은 몇 가지 점에서 보완되거나 해명되어야 할 사항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엘리어트의 논의에 대한 나의 이견을 포함한다. 여기서는 이 논문의 서술 순서를 따라가며, 서로 연관성이 있다고 보이는 문제만을 제기하고자 한다.

 

2

 

텍스트 해석 방법론에 대하여

 

이 글의 머리말(1)은 텍스트 해석 방법론에 대한 간략한 논술을 제시한다: 종래의 편집사적 연구가 저자 개인의 사상/신학에 과도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면, 1970년대 이후 연구 경향은 수용자(독자) 공동체에 대한 연구와 맞물리게 되었고, 이것은 분석의 초점을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 두게 함으로써 자연히 사회학적 물음을 추구하게 된다. 이런 연구사적 요약은 이 글의 방법론적 입지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준다.

저자의 신학과 사상에만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하나의 텍스트의 대한 이해를 추구했던 종래의 편집비평은, 텍스트의 의미가 저자의 구상에 따라 고정된 것이라는 전제를 갖는다. 그러나 텍스트의 이해 주체는 일차적으로 수용자 공동체이며, 이 수용자 공동체는 저자의 상황에서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상황에서 텍스트를 읽는다. 이것은 발화-수신의 과정에서 의미 변용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런 점에서 수용자 공동체의 사회적 상황에 주목하는 것은 1970년대 이후의 편집사적 연구의 성과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발전된 편집비평 연구는, 공동체에 대한 연구만으로 텍스트를 보는 해석학적 안목을 단정하기보다, 이런 상황 이해에 기초해서 저자의 언술전략까지를 해명하려 한다. 이것은 저자의 집필 자체가 일방적인 의미화 과정이 아니라 상호간의 의사소통에 기반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그것은 저자와 수용자 간의 의사소통은 이해의 공동지반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각주:6] 그런데 최근의 편집비평적 연구 성과들은 이 이해의 공동지반을 찾아내는 데 깊이 천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저자도 특정한 시공간적 배경 속의 인물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역사사회학적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저자와 수용자 공동체 간의 사회학적 공동지반을 찾아내는 것은 양자간의 이해의 공동지반을 추적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부분이다. 이 논문의 경우 이런 관점의 결여는, 저자에 대해 전혀 주목하지 않으면서 저자의 언술전략을 밝히려는 시도(5)에서 나타난다. 또한 엘리어트의 연구에서는 저자에 대한 그의 다각도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언술적략을 밝혀내는 데 이것이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의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엘리어트에 따르면 저자는 로마시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원이며, 사도계 전통에 선 인물이다. 그렇다면 로마서나 클레멘트 1서 등을 통해 로마시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한 분석 및 사도계 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저자의 사회적 상황과 신념체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윤곽을 그려내어, 베드로전서수용자 공동체와 저자 사이의 사회학적인 또는 신념체계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조명할 수 있다면, 이것은 저자와 베드로전서수용자 공동체 사이의 최소한의 이해의 공동지반을 밝혀내는 데 유용한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파로이코이(paroikoi)와 파레피데모이(parepidēmoi)의 분석에 대하여

 

이 논문의 제23절은 paroikoiparepidēmoi에 대하여 분석하고 있다. 2절은 성서에서의 용례를 다루고, 3절은 고대로마 시대의 세속적 문헌에서의 용례를 다룬다. 이에 기초해서 이 용어들이 특정한 사회적 함의를 갖는 전용어임을 밝혀낸다. paroikoiparepidēmoi는 모두 거류지역 출신이 아닌 외부인을 가리키는데, 전자가 영속적 거류민이라면, 후자는 일시적 거류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이 고대로마 시대의 사회적 계서체계에서 하향이동의 결과로 떠돌이가 된 고난의 담지자라는 가정으로 이어진다.

4절에서는 이들이 베드로전서의 수용자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왜 특별히 이런 류의 사람들이 베드로전서의 수용자 집단을 형성하게 됐느냐를 해명하기 위해 이 글은 소종파에 관한 종교사회학적 연구를 활용한다. 나아가 소종파 운동의 일반적 특성에 비추어 일반 대중과 이 집단 사이의 단절된 관계를 설명한다. 일반 대중은 이 집단의 사회적 출신성분 때문에 편견을 가졌지만, 이들의 소종파적 폐쇄성 때문에 더욱 강한 편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박해의 원인으로 제시된다. 이것이 베드로전서수용자 공동체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5절에서는 이런 상황에 있는 공동체에게 저자는 어떤 언술전략을 펴고 있는지를 밝힌다. 저자는 사회적으로 강제된 이탈(떠돌이)이라는 고난상황을, 신앙을 통해 자발적인 이탈로 전이시키고자 한다. 나아가 사회가 빼앗은 /가정, 새로운 공동체의 성원이 되었다는 정체성을 통해 새로운 형식으로 다시 얻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이로써 고난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성원으로서의 자부심과 소공동체적인 비타협적 실천을 북돋우려 했다는 것이다.

paroikoiparepidēmoi가 사회학적 함의를 갖는다는 사실은 중요한 지적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글이 의존하고 있는 이 용어들에 대한 엘리어트의 사회학적 분석은 어느 정도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너무 적은 정보로 너무 강한 결론을 도출해 내고 있다. 고대의 문헌들을 통해 알아낼 수 있는 paroikoi에 관한 비교적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현재] 시민권을 갖지 못한 자들이라는 것과,[각주:7] 해방노예보다 법적 신분이 상위에 있다는 것[각주:8]이다. 그들이 토착주민 또는 농민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laoi와 비교되는 증거는 전혀 없고, 종종 동의어로서 사용된 로마어인 incolae시민권을 갖지 못한 자라는 사실임은 분명하지만, 그들이 단순한 거류민인지 타지역 출신 거류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각주:9] LXX의 용법도 이들을 외지 거류민 또는 떠돌이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한 것인지(TDNT의 해석처럼), 불안정한 기층대중의 상황에 강조점이 있는 것인지는 본문들에 대한 보다 신중한 사회학적 분석을 필요로 한다.

엘리어트가 활용하는 또 다른 논거인 어원적 증거는 그의 강한 결론에 더욱 부합하지 않는다. 여기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외부인이라는 것인데, 전통이라는 상징을 공유하는 전() 자본주의사회의 일반적인 촌락공동체에서 내부인(insiders)외부인(outsiders)이라는 것은 [타지역 출신인지의 여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촌락사회의 공공자산을 활용하는 보험 및 복지제도의 전형적 수혜자격의 여부(정치경제학적 접근법) 혹은 촌락사회의 상징적 가치체계가 포섭하는 대상인지의 여부(도덕경제학적 접근법)에 따라 구분되는 존재다. 예컨대 조선사회의 경우 상민과 천민 사이의 유교적인 신분제적 구분법은 각각 촌락사회 일반의 내부인외부인에 대응한다. 그런 의미에서 외부인은 타지역 출신이라는 점을 포괄하기는 하지만, 그것에 한정되기보다는, ‘주변적 존재라는 포괄적 함의와 더욱 친화성이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언급해야 할 것은, ‘내부인외부인이라는 이념형(ideal type)적 구분은 실제에서는 그리 명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고대 농경사회에서 농민의 일반적인 삶은 지극히 불안정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엘리어트는 사회적 유동성(social mobility)을 지리적 유동성에 한정하는 너무 협소한(강한) 의미로 해석하여 paroikoi를 보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paroikoi는 사회적 계서체계 상에서 농민, 특히 하향 분해에 강조점을 두는 농민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각주:10]

박경미의 논문은 paroikoi외지인으로 단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의 다른 부분의 논조가 이들을 그렇게 보아야만 하는 필연성을 안고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이 글이 필요로 하는 paroikoi의 사회학적 함의는 일반인보다 더욱 소외자이며 일반 대중으로부터도 경원시되었다는 사실뿐이다. 요컨대 paroikoi를 보다 포괄적으로 농민, 특히 하향분해에 초점을 둔 농민으로 보아도 이 글의 전체 논지에 큰 손상이 가지 않는 것 같다. 단 일반 대중과 이들의 관계는 경원의 대상인 동시에 대지주 같은 상위의 외부인보다는 가까운 대상이라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한편 소아시아의 paroikoi가 그리스도인이 된 근거로 이 글은, ‘궁핍화상황이 소종파 운동을 활성화시키는 조건이 됐고, 궁핍화의 최대의 피해자인 paroikoi가 대대적으로 소종파 운동으로서의 그리스도교로 전향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윌슨(B.R. Wilson)의 소종파 이론을 베드로전서에 적용한 결과다. 그런데 집합행위의 문제는 궁핍화집합행위라는 원인-결과의 단순 도식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간단한 게임이론으로도 이것은 반증될 수 있다.[각주:11]

농민의 집합행위를 야기하는 조건에 대하여, 농경사회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접근법의 대표적 논객의 한 사람인 팝킨(S. Popkin)의 주장에 대한 김용학의 도식화는 주목할 만하다.[각주:12]

 

 

RP = (CB)×P + (SB×L) - C

RP : 개인이 혁명에 참여할 확률 / CB : 배제 가능한 집합이익(대체로 극히 작음)

P : 혁명의 성공 확률이 개인의 참여에 의해 증가되는 부분 / SB : 선택적 보상

L : 정치적 리더쉽과 신뢰성 / C : 혁명에 참여하는 데 드는 비용

 

요컨대 팝킨은 농민의 집합행위의 주 요소로 선택적 보상을 창출하는 운동조직의 정치적 지도력을 들고 있다.[각주:13] 김용학은 이것 외에 슈퍼게임[각주:14]을 통해 [배반의 전략보다는] 협동의 전략이 유용하다는 판단이 공유되는 상황과, 행위자로 하여금 협동의 도덕적 규약에 동화되게끔 하는 지도자의 역할을 든다. 한편 여기에는 촌락공동체라는 상징공동체의 상징적 자원을 어떻게 재해석하느냐의 문제가 전제된다. 그러므로 소종파 이론만으로는, paroikoi가 박해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위험스런 소종파운동인 그리스도교에로 전향하게 되는 것을 설명하는 충분한 알리바이가 되지 못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농민의 집합행위 이론을 차용하면 보다 내실 있는 논거를 제시할 수 있으리라 보인다.

한편 이 글은, 그리스도교 박해의 원인을 제국차원의 박해와 동일시했던 시대착오적 과오를 피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종 우리들이 범해 왔던 착각을 지양하고 있다. 제국차원의 박해는 주후 251년 데시우스 황제에 의해서 비로소 시작된다. 그런데 이 글은 지방차원의 박해의 원인을 일반 대중의 편견과 결부시킨다. 이 글에서 일반 대중은, paroikoi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대중을 시사한다. paroikoi외부인으로 본다면, 일반 대중은 내부인으로 분류될 만한 서민을 주로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의 편견이 지역의 정치적 사회적 엘리트의 집단의 공권 행사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느냐에 달려 있다. 대체로 일반 농민은 정상적 상황에서는 여론 형성 집단의 역할을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 농민 자체에서 유래한 담론이 공시성(publicity)을 갖는 경우는, 즉 대중 공시가 형성되는 경우는 묵시적 담론이 농경사회의 일상 담론을 주도하고, 반체제적 문자계층이 등장할 때가 전형적이다. 그러나 이 글 어느 곳에서도 대중적 여론이 지역 엘리트 계층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적절한 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는 것 같다.[각주:15]

이 문제는 베드로전서가 소종파운동이라는 초기그리스도교 운동의 일반적 맥락에 부합하여 일탈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저자의 메시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회에서 비자발적인 배제를 자발적인 일탈로 전이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베드로전서는 확실히 그런 관점을 지닌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초기그리스도교 운동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기성사회와 타협의 모습이 베드로전서에서 엿보인다는 점을 이 글은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베드로전서저자가 강변하는 공동체 윤리는, ‘탈가정 무소유 반가족이라는 예수의 급진적 에토스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오히려 지역사회의 윤리의 관점에서도 흠잡을 수 없는 생활 태도를 강조한다(2,1213-17; 3,15-16; 4,15-16). 특히 바울처럼 공권에 복종할 것을 권고한다(3,16). 이 서신은 일반적으로 신약성서 문서들 가운데 가장 현실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문서에 속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지역에서 유포된 신약성서 문서인 묵시록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진다. 이것으로 보건대 베드로전서는 소종파 운동적인 초기그리스도교의 일반적 경향처럼 기성사회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타협의 전략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점과 관련해서 저자공동체의 상황이나 신념에 대한 문제제기를 다시 한 번 거론하고자 한다. 여기서 로마서 공동체의 사회적 성격을 상세하게 논하는 것은, 나의 준비가 부족한 탓에, 불가능하다. 다만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 간의 갈등 상황이 시사되어 있다는 점(로마서14)이나 약자의 사회적 위치를 옹호하는 전략 담론인 의인론이 여기서도 중요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 등은 이 공동체에 대한 필요 이상의 사회적 우울감을 불식시킨다. 어쩌면 로마제국으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은 몇 안 되는 민족적 종교적 결사체인 유다교 회당체제의 엘리트 가운데 일부는 이 공동체의 성원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또한 초기 공교회 운동의 주역인 사도계 공동체의 상징적 대표격인 베드로와 결부되었다는 점은 이 공동체의 신념적 위상을 추정케 한다. 베드로전서에서 로마서와 비슷한 공권에 대한 언술이 나타난다는 점은 베드로전서수용자공동체와, 로마공동체나 그 지도자인 베드로전서저자의 신념체계 사이의 이해의 공동지반이 어떤 내용으로 형성되었을지를 암시한다. 엘리어트는 베드로전서를 초기의 에큐메니칼 정신의 기원과 전망이 뚜렷한 궤적을 보인 문서로 평가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베드로전서저자와 수용자공동체 사이의 이해의 공동지반(물론 이런 추정은 아직은 위험성이 크다. 더 많은 정보와 분석을 요한다), 협소한 paroikoi 정의나 지역사회에 대한 강한 일탈적 비타협성의 관점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실천적 함의에 대하여

 

이 글은 베드로전서새로운 가족에 대해서 성해방주의적인 한계를 비판한다. 정당한 지적이라고 판단되지만,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나의 문제제기에 의거한다면, 다른 평등주의적 에토스에 비해 이례적으로 나타나는 베드로전서의 성적 편견이라기보다는, ‘타협의 전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공유하지 않을 수 없었던 윤리의 통속화의 한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사회의 윤리에 동화되면서도 그것에 더욱 철저할 것을 강조하는 타협적 전략, 예수일행과 같은 떠돌이 혁명집단의 비일상적 윤리에서 유래한 철저한 급진적 에토스에 대한 보다 유보적이고 점진적인 재해석과 연관되었으리라는 추정을 향해 열려 있다. 그러므로 살아남기 위해 본질을 잃어야 하느냐를 묻기보다는, [진리가 고정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서] 진리에 어느 정도의 거리에 있는냐를 묻기보다는, 예수운동의 계보에 서 있으면서도 타협의 전략을 추구했던 베드로전서의 언술 전략의 효과와 한계를 묻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한편 맺음말(7)에서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거론한 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민중신학은 민중을 종종 대문자로 시작하는 고유명사인 Minjung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한국적 특수성을 강조하려는 취지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국이라는 시공간적 경계에로 우리의 시각을 가두는 역기능을 하기도 했다. 이것은 민중신학의 담론이, 민주화나 통일 등과 같은 국가적(전국적/일국적) 차원의 해방지향적 담론과 용이하게 담론절합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되었지만, 미시 지방적(local) 공동체인 교회나 거시 지역적(international/regional) 차원의 문제인 인종문제나 환경문제, 국제 유랑민 문제 등과는 잘 조화되지 않는 한계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거론한 것은, 민중을 구체성을 상실한 용어인 people로 환원시키지는 않으면서, 한국적이면서도 그 경계를 넘어서는 시각을 함의하는 minjung으로 재정의할 수 있는 성서적 기초를 제시한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3

 

민중신학은 지금까지, 의도한 것은 아니더라도 그리고 명확한 규정을 제시한 것도 아니지만, 한반도라는 폐쇄적 공간성과 전통문화라는 폐쇄적 시간성의 문화정치학적 지형 안에서 논의를 전개해 온 경향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1980년대적 발전은 문화정치학적 지형을 계급적 문제로 환원함으로써, 보다 명확한 이론적 지반을 갖추게 된 대가로 더욱 협소화된 지형에 같히게 됐다. 이것은 강한 강령과 비타협주의를 필요로 했던 그 시기의 비판세력의 정치경제학적 문제의식과 용이하게 절합될 수 있음으로 해서, 일정한 실천적 함의를 갖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수많은 차이들이 온갖 편견과 갈등을 낳고, 배제주의와 정복주의를 야기시키는 현상에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이른바 포스트모던적 현상을 마주하게 됐다.

나는 박경미의 논문을 접하기 전, 왜 지금의 상황에서 그녀가 베드로전서에 주목하는지를 상상해 보았다. 그것은 베드로전서가 지금까지의 민중신학의 관점에서는 잘 손이 가지 않는 텍스트라는 생각 때문이다. 더욱이 민중신학의 전통적 논점이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텍스트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무언가 시사하는 바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 논문을 읽은 뒤, 나는 그녀가 민중신학적 지평의 확장을 의도하고 있으리라는 나의 추정이 단순한 착오가 아니라는 심증을 갖게 됐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베드로전서가 민중신학적으로 재해석되는 한, 민중신학의 민중 개념은 확장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논문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논문은 다양한 박탈집단의 해방적 담론과 절합되기에 보다 용이한 논거를 제공해 주는 효과를 갖는다. 그렇다면 나는 그녀의 취지에 공감한다. 이 논평의 글은 바로 이런 취지를 보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1. 박경미(이화여대 교수/신약학)의 이 논문은 〈‘베드로전서’의 집 없는 나그네들과 하나님의 집〉, 《신학사상》 90 (1995 가을), 131-151쪽에 게재된 논문을 성해방주의적 차원에서 보완한 것으로, 한국 민중신학회 연구기획위원회 제3차 연구발표회(1995.9.14) 때에 제출된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나의 원고는 박경미의 논문에 대한 논찬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본문으로]
  2. ‘절대타자’나 ‘계시’라는 신학적 이미지는 의사소통 이전의 ‘순수한 진리’라는 것을 신학적 사고 과정에까지 개입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이런 경우 성서 해석이란, 단순하게 말하면, 이 순수성에 궁극적으로 어느 정도 근접하느냐의 문제로 귀착된다. 이런 점에서 절대적인 순수한 진리의 존재를 상정했던 논리실증주의의 진리관과 유비를 이룬다. 비록 후자가 협소한 의미의 과학적 담론으로 진리의 문제를 귀속시켰지만 말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최근 이런 신학적 진리관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진리의 다원성, 상대성에 귀기울이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통주의적인 신앙적 정체성을 시류적인 다원성과 교묘하게 타협시킨 이른바 ‘정통주의적 다원주의자’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의 다원성 문제가 패러다임 전환을 통한 새로운 문제설정과 양자택일적 관계임을 망각하거나 회피하고 있다. [본문으로]
  3. 이야기신학의 속류적 형태가 여기에 속한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이야기성의 회복은, 이른바 ‘과학주의’에 질식할 지경인 담론 수용자를 배려한 언술전략의 문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럴듯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의 애매함에 있다. 요컨대 그들은 인간 존재에게서 ‘지식’과 ‘이야기’를 구분할 수 있다는 ‘신비한’ 이원론을 전제한다. 정반대의 지향을 갖고 있지만,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신념처럼 말이다. 이런 주장은 사회의 정합성, 논리적 인과성을 과도하게 추구했던 속류 과학주의에 대한 저항을 즉자적으로 추구한 결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런 이야기신학은 탈구조주의를 넘어서 해체주의를 지향하게 된다. 남는 것은 일체의 계몽적 가치에서 이반된 미시공간적 담론뿐이다. 그리고 쟝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그것처럼 ‘냉소’의 전략만이 실천의 공간에서 유일한 정당성을 갖는다(《시뮬라시옹》, 서울: 민음사, 1992). 그럼에도 속류적 이야기신학을 주장하는 이들은 여전히 ‘민중해방’이라는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듯한 천진성을 보인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의 모순에 떨어지고 만다. 이런 모순에 대한 그들의 전략은 ‘사유의 애매한 유보’다. 반면 우리는 이야기성의 문제를 ‘사건성’의 회복의 문제로 본다. 이것은 거시담론과 미시담론의 절합문제, 즉 삶의 구체적인 영역에까지 드리워진 권력을 문제 삼는 생활정치학의 문제며, 여기서 정치경제학을 생활정치학과 결합하려는 또 다른 지식의 영역인 문화정치학적 사고가 요망된다. [본문으로]
  4. ‘신학의 토착화’라는 이름하에 수행된 수많은 연구 가운데 다수가 이런 경향을 갖는 듯이 보인다. 이런 연구들은 토착화의 문제가 마치 한국적 전통이라는 ‘과거적’ 이미지를 현재화하는 것에만 연관된 문제로 본다. 그러나 현재라는 문화공간은 과거적 이미지의 재현을 둘러싸고 투쟁하는 장인 동시에 미래적 전망을 둘러싼 투쟁의 전쟁터다(시간적 차원). 또한 한국이라는 문화공간은 민족 단위의 공간에서의 담론의 형성만이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한국이라는 민족적 공간은 지방적 미시공간들의 단순한 합이 아니며, 동시에 지구적 거시공간의 단순한 수학적 미분의 결과물도 아니다. 복합적인 미시공간들과 거시공간들 간의 절합의 결과물이 한국이라는 민족적 공간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토착화를 묻는 시좌는 현재 한국이라는 복합적 관계성의 시공간인 것이다. 한편 다수의 토착화론자들은, 재현의 문제를 기본적으로 문화적 차원의 것이고, 정치와의 절합은 이차적인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것은 생활공간이 권력의 그물망(networks) 속에서 규정되고 있다는 점을 배제한 순진한 관념주의적 소치다. 포스트모던이라는, 최근 유행하는 담론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문화’와 ‘정치’의 소박한 이분법에 대한 경고에 있다. 여기서 생활세계 속에서 권력에 대항하여 해방적 지식을 추구하는 ‘문화정치학’이 요청되는 것이다. [본문으로]
  5. John H. Elliott, A Home for the Homeless. A Sociological Exegesis of 1 Peter. Its Situation and Strategy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1). [본문으로]
  6. 아마도 실제의 의사소통 과정은 이해의 공동지반에 기초한 ‘상호이해’(Harbermas)와 이해 지반의 차이에 기초한 수용자의 ‘새로운(엉뚱한) 해석’(Derrida)이 교차되는 과정일 것이다(홍기수,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의 해석학적 기반에 대하여: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의 수용과 비판의 관점에서〉, 한국해석학회 엮음, 《해석학은 무엇인가》, 서울: 지평문화사, 1995; 정기철, 〈해석학과 해체주의〉, 같은 책 참조). 이것은 역사적 연구방법의 근본적 한계를 노정한다. 그 이해과정을 엄밀하게 추적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역사연구의 새 지평이 열린다. 역사는, 담론 중심주의에 빠짐으로써 상실하게 된 ‘실제 세계’(real world)의 축조과정이 아니라(이것은 불가능하다), 담론과 담론 외부가 맺는 담론의 계보학을 추적함으로써 ‘실천적 위상의 계보적 전형성’을 재구성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역사학적 가능성에 대하여는 M. Foucault, 《담론의 질서》 (서울: 새길, 1993) 참조. [본문으로]
  7. 고대아테네 시대에 metokoi는 전용어는 아니지만 대체로, 원래는 어느 도시의 [또는 그 도시의 영역에 속한 지역의] 시민이었으나, [정치적 추방 따위와는 달리] 자발적인 의지에 따라 다른 도시로 이주해서 거주하지만, 여기서는 시민권을 갖지 못한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여러 용어로 대체되어 사용되는 경향이 있지만, 후대에 오면 주로 paroikoi로 대체되어 쓰이는 경향이 있다. [본문으로]
  8. 로마 치하의 소아시아에서 발굴된 한 비문에 따르면 다음의 6개의 계서적 질서가 언급되어 있다: ① 귀족의회 의원; ② 장로들(geraioi); ③ 지방회의의 회원(ekklēsiastai); ④ 평범한 시민; ⑤ paroikoi; ⑥ 해방노예. 또 주전 133년에 페르가뭄 제국은 paroikoi와 다른 사람들(주로 군인들)을 시민으로 승격시키고, 공공노예, 해방노예 등등을 paroikoi로 승격시켰다. [본문으로]
  9. 끄로아(G.E.M. de Ste. Crox)는 incolae를 특정 계층을 가리키는 전용어로 볼 수는 없지만, 시민권이 없는 비특권 계급을 ‘폭넓게’ 지칭하는 용어라고 본다. 그런데 2세기 중반 즈음에는 농장(formland; agrum)을 가진 사람에게도 사용되었으나, 후대로 갈수록(3세기 중반경) 토지 소유권이 없는 사람들로 간주되었을 수 있다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표명한다. G.E.M. de Ste. Crox, The Class Struggle in the Ancient Greek World from the Archaic Age to the Arab Conquests (Cornell Univrsity Press, 1981), 540-41쪽의 주 15)와 544쪽의 주 30) 참조. [본문으로]
  10. 물론 도시의 비시민적 하층민(상인이나 장인을 포함한)이나 어민, 목축민 등도 포함할 수 있다. [본문으로]
  11. 가령 뷰캐넌(Buchanon)은 ‘혁명’(‘하느님나라’도 마찬가지)같은 ‘공공재화’가 이룩되기를 바라더라도 혁명에의 불참이 참여보다 터 큰 대가를 치룬다는 것을 어떤 형태로든 인지하게끔 하는 공리적인 기재가 없는 한, 노동자들은 혁명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A. Buchanan, “Revolutionary Motivation and Rationality”, M. Cohen 외 엮음, Justice, and History (Princeton, 1980); 그리고 김용학, 《사회구조와 행위》 (서울: 나남, 1992), 187-208쪽; William H. Shaw, 〈마르크시즘‧혁명, 그리고 합리성〉, 데렌스 볼 & 제임스 파 엮음, 석영중 옮김, 《마르크스 이후》 (서울: 신서원, 1991) 참조. [본문으로]
  12. 김용학, 같은 책, 197쪽. [본문으로]
  13. 왜냐하면 CB와 △P는 극히 작은 양으로 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4. 이것은 동일한 또는 유사한 게임의 반복적 상황을 가리킨다. 김용학, 같은 책, 198쪽. [본문으로]
  15. 내 생각에는 지방적 영역에서 엘리트들(지방 행정 당국, 유다교 회당 체제 등)이 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해 일반적인 부정적 편견을 갖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박해’의 원인을 찾는 데 보다 유용하리라고 본다. 이 점에서 G.E.M. De Ste. Croix, 〈기독교도 박해의 원인〉, 지동식 엮고 옮김, 《로마제국과 기독교》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3)는 중요한 시사를 준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