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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고통스런 쉼 쉬기’ 신학자의 영원한 안식(安息)

출처는 알 수 없고, 1999년 경 안병무 선생을 애도하는 글로 쓰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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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런 쉼 쉬기신학자의 영원한 안식(安息)

 

 

 

 

18일 아침 선생님이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10년간 선생님을 가까이 하면서 거의 매년 한두 차례씩 듣는 소식인데, 10월엔 벌써 세 번째다. 심상치 않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그래도 막연히 이번에도 괜찮겠지생각했다. 일정표가 짜인 대로 일을 마친 뒤 저녁때가 돼서야 선생님이 계신 병원 중환자실로 향했다. 심각했다. 아니, 의사들과 가족들은 이미 포기한 상태다. 저녁 7시경, 선생님을 뵈었다. 눈이 풀어져 있다. 입에는, 아마도 강제로 숨을 쉬게 하는, 기구가 물려져 있고, 약하나마 가쁜 숨을 몰아쉴 때 가슴이 가냘프게 들썩인다. 땅을 향해 내리 누르는 대기의 중량이 너무나 무겁다는 듯이. 1210분경 기구를 입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난 시각, 선생님은 가장 깊은, 아무도 가슴의 들썩임을 감지할 수 없이 깊고 평안한 숨을 들이마셨다.

내게 “1년만 교회를 맡아줘라고 부탁하신 뒤, 선생님은 거의 매주 빠짐없이 예배에 참석하셨다. 집에서 100미터 가량 걸어 버스를 타고, 버스를 내려 다시 100미터쯤 가야 교회다. 주일 아침 마다 어깨를 심하게 들썩이는 선생님을 만났다. 제자를 도와야겠다는 애틋함 반, 당신이 만드신 교회에 대한 책임감 반. 아마도 이런 마음이 숨 쉬는 고통을 애써 감수하셨던 이유리라.

숨쉬는 것이 고통인 사람. 결핵으로 세 번이나 사형선고를 받아야 했던 나의 아버지가 그랬다. 연구소 근무 시절, 목포 애광원의 결핵환자들을 만난 날, 일생에 처음으로 오바이트할 정도로 술을 퍼마셨고, 일생에 처음으로 술 마시면서 울었다. 아버지 생각에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내 사상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살다 가셨다. 고통스럽게 숨쉬며.

선생님의 고통스런 숨쉬기는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면서부터라고 한다. 그때 심근경색이라는 질환을 얻으셨다. 그리고 그 해 민중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신학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71전태일 분신 사건을 접하면서 선생님은 그것을, 그리고 그것이 드러내려 했던 감추어진 진실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하셨다. ‘숨이 막힌 세상’, 이것이 그 청년이 외치고자 했던 진실이었다. 자신의 숨을 끊으면서 세상이 숨 쉬게 하라는 절규가 그 청년이 외치고자 했던 진실인 것이다. 식민지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추방자들의 땅인 간도에서 자라고 학병 징용을 피해다니는 도망자의 여정을 거치며 살았으면서도, 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독일 유학을 다녀올 수 있었으며 대학교수직을 맡을 수 있었던 자신 같은 사람에게 이 청년의 이야기는 크나큰 충격이었다고 한다. 신학자의 회심의 계기였다.

숨이 막혔다고 한다. 문뜩 세상을 보니 숨을 쉴 수 없었다고 한다. 증언을 위한 신학적 탐구가 필요했다. 1973, 한국신학연구소를 창설하고 자신처럼 강단에서 쫓겨난 지식인들의 토론의 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1975, 비로소 증언해야 할 이름이 지어졌다. ‘민중’.

세상을 보며 쉼쉬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한다. 고통스런 쉼쉬기. 바로 민중의 눈으로 성서 읽기’, ‘민중과 더불어 신학하기. 고통스런 신학자의 과업이 본격화된 것이다. [후에(1979) 아시아신학자협의회 참석자들이 이런 신학을 민중신학이라 부르게 된다.] 바로 이 해(1975)에 선생님은 몸으로도 고통스런 쉼 쉬기를 해야 하는 운명을 맞이했던 것이다.

예수님과 주변의 대중이 만나서 사건을 일으킨다. 어느 한 편이 없으면 그것은 사건이 아니다. 독백일 뿐. ‘만남이 필요하다. 신과 인간의 만남, 인간과 세상의 만남, 나와 그것의 만남. 이 만남은 그것로 변환시킨다. 신과 인간을 합류하게 한다. 그리하여 세상과 함께 숨쉬는 진리를 배우게 한다. 그것은 살림의 사건이다. ‘죽임을 넘어선 살림의 사건이다. 그래서 이 사건을 구원사건이라고 한다. 이 만남을 통해 구원사건의 주체가 된 이가 바로 민중이다. 민중은 만남 속에서 자신을 욕망을 비워야 한다. 아니 그것을 향한 욕망 비움이 바로 만남이다. 그것이 신의 죽음이요, 전태일의 죽음이며, 민중의 죽음이다. 바로 고통스런 숨쉬기.

선생님의 신학 여정은 고통스런 숨쉬기’, 숨이 막힌 세상에서 고통스럽게 숨 나눠쉬기, 바로 그 자체가 신학하기(doing theology)의 본질임을 발견해가는 과정이었다. 16권의 저술과, 수십 편의 논문, 그리고 수백 편의 에세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설교들. 이 방대한 신학 업적에 기록된 신학자의 이 여정은 당신의 삶 자체가 바로 이런 쉼 쉬기임을 보여주는 흔적들이다.

1994, 선생님 주도로 만들어진 민중신학회의 소식지 제호로 선생님은 󰡔󰡕이라는 이름을 지으셨다. 그리고 표지에 제호 옆에 해설을 붙이셨다. 마치 선생님의 삶의 표상인 30여 년간의 민중신학을 몇 줄로 줄여놓듯이.

 

숨은 소식(消息)의 우리말이다. 숨 쉬는 것을 알리는 것이 소식이고 숨을 나누는 행위가 숨이다. 성서의 루아흐, 프뉴마는 기()와 더불어 숨과 같은 말이다. 산 담은 숨 쉼이다. 그런데 그 자체는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을 움직여 살게 한다.

 

재작년 겨울, 민중에 관한 이야기로 당신의 어머니에 관해 쓰시겠다고 했다. 선천댁이 당신의 70여년의 마지막 종지부를 찍는 작업으로 여기셨던 듯하다. 선생님이 종종 말씀하셨던 어머니의 의 이야기를, 그 고통스런 숨쉼을.

올봄 선생님의 건강 상태는 퍽이나 좋았다. 지난 10년 동안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올 일 년간, 응급실로 실려 갈 때까지 선생님은 꼬박 신약성서를 번역하고 계셨다. 어깨를 들썩이도록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성령(프뉴마)의 번역어로 生氣라는 단어를 발견한 것에 참을 수 없이 기뻐하던 표정을 떠올려 본다. 이런 일은 숱하게 많았으리라. 니체가 자아 고문의 쾌락이라고 한 것처럼, ‘고통스런 숨쉬기의 쾌락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머니 이야기로도 못 다한 선생님의 쉼 쉬기는, 하지만 민중의 눈으로 성서 읽기라는 신학자의 이 고통스런 숨 쉬기골로사이서에서 멈춰야 했다. 우리도 함께 그런 숨쉬기에 참여해야 한다는 얘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