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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홀로코스트 신학’과 ‘홀로코스트 너머의 신학’

글을 쓰다 인용하기 위해 찾다 보니 이 글을 여기에 올리지 않았군요.

이 글은 개혁을 위한 종교인 네트워크(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우리신학연구소, 참여불교재가연대) 주최로 지난 2009년 2월 5일에 열린 긴급토론회 <홀로코스트 종교를 넘어서 -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적대는 어떻게 생산되는가>에서 발표된 원고입니다.

이 토론회는 그 전해인 2008년 12월 27일부터 팔레스타인을 향한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1천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사망한 사건을 문제제기하기 위해 긴급하게 기획된 것입니다.

이 심포의 자료집을 올립니다.

 

자료집_홀로코스트 종교를 넘어서 -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적대는 어떻게 생산되는가(2009 02 0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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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신학과 

홀로코스트 너머의 신학’*

 

 


 

 

 

19세기 영국의 극우주의였던 브리티시 이스라엘리즘(British-Israelism)의 상상적 세계관에 의하면 이스라엘 왕국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할 때 사라진 10개 지파의 후손들 중 에브라임 종족 유민들이 브리튼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반면 유다 왕국의 이스라엘인들, 즉 유다 종족은 이방인들과의 잡혼을 통해 혈통적 순수성을 상실하였고, 결국 유다 족속의 후손인 오늘날의 유대인들은 진정한 유대인이 아니라는 주장을 편다. 한편 미국의 극우파 목사인 조셉 와일드(Joseph Wilde)는 미국인이 므낫세 족속의 후손이라고 하면서, 앵글로색슨 미국인이야말로 순수성을 보존한 진정한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순혈주의 담론은 야훼신앙의 내적 속성이 아니라 특정 분파의 이데올로기가 역사적으로 야훼신앙을 대체한 결과다. 즉 그것은 유대교의 발생맥락을 정초했던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의 유민인 느헤미야-에스라의 유대 재건기획에서 유래하며, 이후 재건유대 사회를 이끌었던 사제귀족집단의 정체성의 핵이었다. 이들에 의해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야곱의 열 두 아들로 이어지는 상상적인 혈통적 계보가 구성된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족보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들 사제귀족집단의 자기 해석체계가 민족의 보편적 신념으로 정착된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모든 유대인들은 이 선사시대 조상들의 족보에 속함으로써 야훼가 약속한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존재로 주체화된다. 이 시기 이후 자주적 민족국가가 존속했던 기간이 거의 부재했던 유대사회에서 종교적 요소가 가장 유력한 통합의 기재였다 점을 감안하면, 혈통주의가 유대사회를 결속시키는 가장 안정된 제도적 요소로 장기간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이 그리 이상하지 않다. 강하든 약하든 초기 유대주의에는 이렇게 순혈주의적 요소가 어떻게든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순혈주의적 주체가 유대주의와 거기에서 파생된 갱신운동 모두를 아우른 것은 아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중간지점에 있던[각주:1] 바울은 아브라함 후손의 진정성을 혈통에서 찾는 유대주의의 언약관 속에 내포된 기득권집단의 배타주의를 비판한다. 나아가 경계 저편 혹은 주변부의 노예, 여자, 비유대인에게 열린 새로운 혈통을 제시한다. 그것은 땅의 예루살렘이 담보하는 질서가 아니라 하늘의 예루살렘이 약속한 질서다. 요컨대 그는 유대 순혈주의 전체에 대한 반제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의 정치를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견들에도 불구하고, 순혈주의의 잔재는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모두에서 주된 주체화의 요소로 작동하고 있다. 순혈주의는, 초기 유대교나 북미의 일부 근본주의적 그리스도교 분파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종파들에서,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변형된 형태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순혈주의는 위에서 보았듯이, 행위자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스스로를 해체하는 효과가 있다. 이스라엘의 유대 순혈주의, 영국의 에브라임 순혈주의, 미국의 므낫세 순혈주의 등, 서로가 각기 진짜 정통계보의 후예임을 강조하는 확고한 믿음이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격하시키고 배제하기 때문이다. 우리와 저들, 안과 밖의 경계가 너무 높고 견고하기에 완충지대는 없고 포섭과 배제의 이분법만 강조되는 것이다.

물론 브리티시-이스라엘리즘이나 미국 극우파의 주장은 터무니없어 보일만큼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순혈주의는 과연 타당한가. 우선 느헤미야-에스라 시대 이후 재건유대 사회의 순혈주의를 추동하던 세력인 사제귀족들의 족보를 보자. 식민화되기 이전 이스라엘 사회, 그러니까 기원전 10~8세기 이스라엘국과 유다국의 시대, 혹은 그 이전(지파동맹시대. 대략 기원전 13~11세기)부터 존재했던 사제들의 대표적 범주들로 레위계 사제, 아론계 사제, 사독계 사제가 있다.[각주:2] 한데 느헤미야-에스라 시대와 그 이후에 레위 계열이 기축이 되는 거대계보 역할을 하고 다른 두 계열이 족보상 여기에 흡수된다.


 

레위계 사제가 어떤 사회역사학적 특성을 지니는지는 성서 역사학의 난제중의 난제다. 그러나 대체로 이들은 군주제 시대나 식민지 시대 내내 권력을 장악해보지 못한 비특권 사제집단의 계보였다.[각주:3] 그럼에도 야곱의 아들 중 하나이고 열두 지파의 하나인 레위라는 이름이 시사하듯 이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폭넓은 상징적 대표성을 지닌 사제계열이다. 하여 여러 성서역사학자들은 식민지 시대의 헤게모니 세력인 사독계와 아론계 사제들이 레위의 상징성을 업고자 그 족보 속에 자신의 족보를 연계시킴으로써, 점차 거대담론 속에 두 족보가 레위 족보 속에서 하나의 혈통으로 통합되었다고 해석한다.이것은 페르시아 시대에 유대 인근 지역(예후다 지방)으로 귀환한 집단의 자기보전 전략과 깊은 관련이 있다. 즉 보다 안정된 기반을 가진 이웃 정치세력인 사마리아나 암몬보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권력기반을 가진 귀환세력이 유대 지역의 자치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혈통의 순수성 문제를 의제로 활용하면서 순혈주의 이데올로기는 제도화되기 시작된 것이다.

이민자 공동체는 종종 본토 공동체보다 혈통적 순수성에 대한 강한 집착을 제도화하곤 한다. 낯선 타지에서 이민자들은 생존을 위해 그 낯선 이들의 세계에 적응하며 살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낯선 언어, 낯선 문화 등을 자신의 몸에 체현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동질집단과 강한 결속력을 갖는 폐쇄적 공동체를 형성하곤 한다. 존재조건이 외부에 대해 개방적이면서 동시에 폐쇄적인 이중성, 그 모순상황을 심리적으로 조절하는 과정은 자기기만(self-decepton)을 통해 가능해진다. 가령 자기 자신은 그 누구보다 종족 순수성, 특히 문화적으로 이방적인 것에 침식당하지 않은 존재성을 충실히 견지하고 있다고 믿는 것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믿음, 아니 자기기만이 사실이라고 스스로 확신할 수 있게 하는 특정한 행위()에 집착하게 한다. 혈통순수성에 대한 집착이 바로 그러한 행위에 속한다. 반면 본국의 경우, 외부로부터 이민자들이 대대적으로 유입되는 상황에 직면할 경우 훨씬 개방적으로 종족 주체성이 형성되곤 한다. 특히 엘리트 계층의 정략결혼은 지중해 사회에서 일반적이었고, 팔레스티나의 토착엘리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식민시 시대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가장 지배적인 집단은 사마리아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토착세력이었다. 그런데 유대 산지, 특히 폐허가 된 예루살렘 지역으로 귀환한 귀향집단은 이 지역에 대한 자주권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곳은 사마리아에 복속되어 있었지만, 워낙 황량한 데다, 유다 왕국이 멸망하던 무렵 바벨로니아 군의 무차별한 파괴로 인구도 희박하고 농지 거의 대부분이 황폐해진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었기에, 사마리아 당국은 이곳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귀환자 집단이 성전을 건립하고 무너진 성벽을 재수축하는 등의 행보를 하자 상황은 달라진다. 인구가 늘기 시작했고, 예루살렘 인근 지역이 점차 농지로 개간되었다. 이에 사마리아, 암몬 등의 압박이 거세졌고,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유대 지역의 귀환자 엘리트들은, 토착엘리트들의 대중포섭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혈통 순수성을 의제로 제기하면서 유대 지역 대중의 폐쇄적 결속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러한 성공의 기억은 더 강력한 순혈주의에 대한 신념으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유대주의는 자폐적 근본주의 집단으로 주체화된다. 요컨대 광의의레위계 사제 족보는 마치 지파동맹 시대부터 유래한, 좀더 앞으로 가면 출애굽 공동체로부터 유래한, 아니 상상적 조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유래한 언약백성의 사제로 선택되어 단선적으로 계보화된 것이다. 이러한 상상의 단선적 계보는 식민지 시대 유대사회 거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어 유대사회를 단일 혈통집단으로 둔갑시켰다. ‘집단적 자기기만이 유대인들을 주체화시키는 동력이 된 것이다.

한편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서구사회에서 유대인을 정의하기를, “유대인은 다른 사람들이 유대인이라고 간주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유대 정체성은 반()유대주의로 인해 서구의 역사에 등장한 것이라는 얘기다. 이는 유대인 정체성 담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최창모는 반유대주의는 기원전 3세기 고대그리스 시대부터 존재했고, 그리스도교의 지중해지역으로의 확산은 반유대주의를 더 깊고 더 폭넓게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신학자 로즈메리 류터(Rosemary R Ruether)는 반유대주의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보편적 주체성의 요소였다는 것을 제2성서(신약성서) 텍스트에서 추론해낸다. 또한 그녀는 교부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반유대주의 담론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조명한다. 전체적으로 서구사회에서 반유대주의를 의제화하고 제도적으로 구축하는 데 그리스도교가 가장 적극적인 행위자였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유대인은 지중해 지역의 남유럽뿐 아니라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 그리스도교로 통합된 유럽 전역에서 경멸과 배제의 대상으로 범주화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유대인의 경험을 지배하였던 것은 아니며, 유대인 가운데는 사회 각 영역에서 굉장한 성공을 거두며 높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렇게 엘리트로의 사회적 진입이 가능했던 것은 반유대주의가 촘촘하게 담론화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교적 매체가 사회를 촘촘히 통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유대주의적인 그리스도교 체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던 시기보다는 사회적 무질서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배제의 인종담론은 대단히 폭력적으로 작동하곤 했다. 즉 유대인은 반유대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도 인적 물적인 기반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 가능했다.

지속적인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에 직면한 존재들은 종종 자존성을 갖지 못한 하위주체(subaltern)로 전락한다. 하지만 인적 물적 기반이 잘 갖추어진 유대 공동체는 반유대주의를 경험하면서 특유의 정체성으로 무장한 비교적 잘 짜인 집단으로 결속하게 된다. 한데 여기서 유념해야 하는 것은 이들 유대인 공동체들의 결속은 지역 단위의 차원에서는 강한 결속을 보여주지만, 다른 지역의 공동체들과의 광역의 결속은 그다지 강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 간의 문화적 이질성을 통합할만한 체험의 균질성을 공유하기에는 유럽 사회를 아우르는 잘 발달된 미디어를 갖추지 못했기에 타지역 공동체들, 특히 원거리 공동체들 간의 연대는 대단히 형식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것일 뿐, 그 이상의 높은 수준의 통합으로 표현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잘 갖추어진 지역의 유대인 커뮤니티는 여전히 소수자집단에 지나지 않았고, 이는 지역의 정치, 사회, 문화적 조건에 이들이 더 많은 규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긴 디아스포라의 역사 속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갔다. 위에서 말했듯이 유대인 범주에 대한 배제와 폭력이 적지 않던 상황에서 유대인의 생존 여건은 꽤나 어려웠다. 하여 유대인은 대체로 지역사회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에 급급했고, 유럽의 유대인을 결속시키는 거대 담론을 유념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요컨대 현실의 유대인은 결코 동질적이지 않다. 반면 담론 속의 유대인은 통일적이다.

그런데 19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시오니즘 운동은, 수많은 이견과 분파들 간의 논쟁과 갈등 속에서도, 점차로 유대인 공동체들 간의 광역의 동질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된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유대인이라는 것은 하나의 범주로 묶어서 생각해도 될 만큼 거대한 공통감각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비교대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반유대주의적인 인종적 배제를 겪으면서 그것의 직간접적인 체험이 전 지구적으로 유대인을 동질적 집단으로 범주화시킨 것이다. 노르만 핀켈슈타인(Norman G. Finkelstein)이 주장하는 바(홀로코스트 산업 한겨레신문사, 2004), ‘홀로코스트 산업은 이러한 유대인 주체의 사회역사적 장치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유대인이라는 것의 함의는 바로 이렇게 형성된 역사적 산물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지해야 하는 것은 서구, 특히 독일신학계에서 일어난 아우슈비츠 이후(post-Auschwitz)라는 신학적 사유 범주의 등장이다. ‘아우슈비츠 이전까지의 (근대)신학은, 키스 휘틀럼(Keith W. Whtielam)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교 사회인 유럽의 자기 뿌리에 대한 욕구를 역사화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고대 이스라엘 역사는 유럽중심주의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것이다.(고대 이스라엘의 발명 이산 2003) 이 역사에서 고대 유대주의는 극복의 대상이다. 물론 이것은 현대 유대주의에 대한 시선과 병행한다.

한데 아우슈비츠 이후라는 문제설정은 유럽중심주의를 위해 신과 성서를 호출했던 이제까지의 신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구체화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성찰이 유대인 학살에 대한 뼈아픈 기억에 의해 압도되었다는 데 있다. 수없이 많은 다른 고통은 회수되거나 유기되었고, 단지 하나의 기억 속으로 모든 것이 흡수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성서 형성의 시공간적 맥락인 팔레스티나의 역사는 유대교를 이해하기 위한 역사로 안착한다. 그것은 유대교가 그리스도교의 뿌리라고 보는 시선의 변화와 상응한다. 요컨대 자기 뿌리에 대한 탐구라는 점에서, 즉 서구인의 신앙적인 자기 주체성의 탐구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고대의 유대주의를 극복의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상생의 대상으로 보게 되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아우슈비츠 이전과 이후를 관통하는 공통된, 역사를 대하는 태도가 있다. 그것은 팔레스티나의 역사를 상상의 이스라엘을 조명하는 역사로 환원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휘틀럼이 정교하게 들춰내고 있는 것처럼 팔레스티나의 다른 종족들의 역사는 배제된 것이다. “성서 시대의 팔레스티나의 과거는 그들 자신의 국민국가와 닮은 고대였던 것이다.(고대 이스라엘의 발명, 323) 가령, ‘1성서시대 고대사 연구, 특히 지파동맹 시대와 군주제 시대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서 가장 효과적인 사료인 고고학적 정보를 위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연구비와 탐사팀이 팔레스티나 곳곳을 샅샅이 조사하고 있지만, 실은 그 조사의 절대다수가 고대 이스라엘의 거주지역으로 추정되는 중부 산지에 몰려 있다. 반면 비이스라엘 지역으로 보이는 서부 해안 지역은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 그나마 이 지역의 조사도 군주국 이스라엘의 요새 같은, 이스라엘적 지역에 몰려있다. 즉 이스라엘 이외의 여러 족속들에 관한 연구가 배제된 채 역사 재구성 논쟁이 펼쳐지고 있는 게 팔레스티나 고대사 연구의 현주소다.

이것은 역사학의 비전문가인 신자대중이나 성직자는 물론이고 전문학자들조차 착각에 빠지게 한다. 마치 제1성서 시대 팔레스티나의 역사에서 비이스라엘 사람들은 거의 부재한 존재인 듯이 역사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인용한 휘틀럼의 말처럼 그것은 현대 이스라엘의 국민국가와 병행적인 것처럼 그려진다. 나아가 근대서구의 국민국가를 위해 성서의 역사가 해석된다. 이러한 비대칭적인 역사 이해는 은연중 오늘날의 팔레스티나인들은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대상처럼 타자화한다. 그들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발명된 고대 팔레스티나의 역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여기서 그 내용을 충분히 얘기할 수 없으니 일부만 언급하기로 하겠다. 먼저 다윗-솔로몬의 군주국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그리스도교와 현대이스라엘 역사 해석에서 모두에게 공히 높은 중요성을 지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우선 다윗-솔로몬의 국가는 인근 족속들을 병합하여 영토가 시리아-팔레스티나 전역으로 팽창한 제국으로 묘사된다. 국력은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건축기술도 뛰어났고, 관료체계도 잘 짜였고, 문서 활동도 활발했으며, 야훼신학도 매우 발달했다.

그런데 이러한 다윗-솔로몬의 제국은 팔레스티나에서 부족동맹시대가 해체되고 군주국 시대의 문을 연 첫 국가이다. 이 지역에 철기문명을 처음 도입한 것은 블레셋 족속이지만, 그것을 꽃피워 체제의 형식이나 문명의 내용을 극대화한 것은 바로 다윗-솔로몬 치하의 제국이 이룩한 치적이었다. 하여 이 제국은 팔레스티나 사회에 진보를 선사했고 전대미문의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이후 군주국에서 모든 왕은 다윗(과 솔로몬)에 비교해서 평가된다. 1성서에 대한 그리스도교와 이스라엘의 지배적인 해석은 이상과 같다. 심지어 전문연구자들도 대부분 이러한 이해에서 그리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시기를 입증할 고고학적 자료가 거의 없다는 점이 이러한 상상의 과거를 보는 이해를 균열시킨다. 발굴된 다윗과 솔로몬의 도성은 너무 작고 보잘 것 없어, 과연 이런 규모의 도성으로 팔레스티나 거의 전역과 시리아 일부지역을 병합한 제국을 운영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게다가 발달된 국가라면 반드시 필요한 문자기록의 흔적도 전혀 발굴되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솔로몬이 지었다고 하는 이스라엘 지역의 요새 몇 개(게셀, 무깃도, 하솔 등)가 발굴 조사되었는데, 그것은 예루살렘을 압도하는 규모였다. 또 건축양식도 훨씬 선진적이었다. 요새들이 도성을 압도하는 규모와 건축 양식을 가졌다는 얘기다. 실은 최근의 보다 발전된 탄소연대측정조사를 통해 보면 이 요새들은 다윗-솔로몬의 시기보다 한 세기 후대의 건조물임이 드러났다. 많은 학자들은 이스라엘국의 최전성기를 구축한 오므리 왕조 때에 건축된 것으로 이해한다. 이집트까지 병합하고자 했던 아시리아의 살마네셀 3세가 동방원정에 실패하고 되돌아가면서 허세부리며 건조한 비문에는 자신의 원정을 가로막은 시리아-팔레스티나 연합군의 명단과 병력의 수가 묘사되어 있는데, 오므리 왕조의 아합 왕은 마전차가 2천 승, 보병이 1만 명이었다고 한다. 이는 이 연합군 가운데 가장 강력한 군사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제1성서는 솔로몬의 병력으로 마굿간이 4천 칸, 말이 12천 마리라고 말한다.(열왕기상 5,6; 역대기하 9,25) 하지만 솔로몬 시대의 유물 가운데 아직까지 그만한 규모의 마굿간터가 발굴된 바 없다. 하여 누군가 후대에, 아마도 이스라엘국이 멸망한 이후에 유다국의 누군가가 오므리 왕조의 성과물을 다윗-솔로몬의 업적으로 날조해서 전유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제기되었다.

또한 논리상으로도 다윗-솔로몬 제국설은 설득력이 약하다. 부족동맹사회와 작은 성읍국가들밖에 없던 팔레스티나에 갑자기 잘 발달된, 심지어 이후의 모든 역사에서 비교대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충분히 발달된 국가가 갑자기 탄생했다는 것은 비약이 너무 심하다. 기술 축적이 안 된 사회에서 어떻게 갑자기 발달된 건축물을 세우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게다가 다윗-솔로몬의 나라가 입지한 유대 지역은 척박한 산지여서 인구도 농지도 턱없이 적다. 그런 지역에서 갑자기 등장한 국가가 빠른 시간 내에 대국으로 성장했고, 높은 수준의 군사기술 건축기술 관료제도 등을 발전시켰다는 건 가능한 상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터무니없는 가정이 오랫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거의 대다수의 연구자들과 성직자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성서의 묘사를 곧이곧대로 이해한 결과다. 아니 실은 성서의 묘사 자체가 일관성이 있는 것이 아니니 성서의 묘사 가운데서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은 결과가 바로 이러한 허황된 역사가설이 보편화된 것이다.

1성서는 오랜 시간 동안 구술되고 문서화되고 편찬에 편찬을 거듭하면서 만들어진 문서다. 그러므로 이 텍스트들은 내적으로 모순적인 내용들이 적지 않다. 그렇지만 큰 틀의 내러티브는 편찬자의 몫이다. 한데 몇 차례의 시대를 달리하는 대대적인 편찬 활동은 큰 틀의 구성조차 일관성을 부여할 수 없게 했다. 더욱이 세계적인 제1성서 연구자인 노먼 갓월드(Norman K. Gottwald)의 추정에 의하면, 최종 편찬 과정조차도 짧은 시기에 단일 집단에 의해 수행된 것이 아니라, 이해를 달리하는 헤게모니적 경쟁집단 간의 제휴와 타협의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오랜 역사의 뼈대를 일관성 있게 추려내는 일은 자명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역사가의 상상력과 역사적 개연성의 게임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역사가와 신학자와 교회의 역사 발명품으로 이야기할 두 번째 후보로 선택될 만한 것은 무엇일까. 다윗-솔로몬의 국가가 그리스도교와 현대 이스라엘 모두에게 팔레스티나의 결정적인 성공을 가져다 준 역사적 계기로 해석되었다면, 팔레스티나에 그러한 성공의 축복을 선사한 이스라엘 족속이 등장하는 계기를 이야기하는 가나안 진입 이야기는 중요한 위상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1성서의 서사에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등장한 계기에 관해 두 부류의 모순된 설화가 얽혀 있다. 하나는 정복자로서 가나안에 진입했다는 얘기이고, 다른 하나는 평화롭게 들어왔다는 얘기다. 하여 오랫동안 학계에서는 이를 각기 논증하는 두 개의 가설이 주도했다. 정복가설과 이주가설이 그것이다. 이 두 견해는 공히 외부에서 들어온 족속이 팔레스티나 전체를 대체하게 되었다는 입장을 가진다. 하여 급진적인 유대 시오니스트들은 유럽의 여기저기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팔레스티나로 와 정착하게 되는 현상을 이에 연관시켜 이해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또 서구의 제국들이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 등을 침탈할 때도 이러한 성서 이해를 연관시켰다. 그것은 다윗-솔로몬 제국 설화와 이어지면서, 이스라엘 국가가 혹은 기독교 제국들이 그 지역에 진보와 풍요를 선사할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탄생시켰다.

특히 정복가설은 보다 노골적인 인종주의적 언사들을 쏟아내며 이스라엘 종족의 우월성을 강변했다. 심지어 도덕적 타락이니 문화적 천박성이니 하는 논증할 수 없는 편견들을 마구 적용했다. 여기에 일신교 전통의 이스라엘 신앙의 우월성을 다신교 전통의 토착민의 천박함과 대비시켰다. 한데 과연 이스라엘은 일신교 전통의 사회였는가. 그렇다고 한다면 언제부터인가. 최근의 연구자들은 군주국 시대 말기 혹은 식민지 시대의 산물로 해석한다. 물론 그러한 신앙적 주장이 등장한 것이 이 시기라는 얘기가 아니라, 제도화가 추진되는 시기가 그렇다는 얘기다.

지파동맹 시대의 판관인 기드온은 이 시대 대표적인 야훼파의 하나다. 한데 므낫세 지파에 속한 한 가문의 가장인 그의 집안엔 바알신상과 아세라여신의 신상이 모셔져 있었다. 한데 그가 그 신상을 파괴하고 야훼신의 이름으로 부족동맹 지도자로 나선다.(사사기 6,25~35)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 내에서도 바알과 아세라 신앙이 일상적으로 수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신들이 사람들에게 일상에서 풍요와 안전을 선사해주었는데, 그 신상을 집에 모시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집안이 그 씨족 혹은 부족의 중심이었음을 시사한다. 한데 씨족 혹은 부족의 유지인 그와 그의 가문이 지파동맹의 신인 야훼를 모시는 집이 되었다. 그것은 그와 그의 집안이 이스라엘 지파동맹의 중심이라는 선언이자 퍼포먼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요컨대 바알과 아세라는 일상에서 사람들의 안보를 지켜주는 신으로, 야훼는 전시에 지파동맹 차원의 안보를 지켜주는 신으로 이 시기에 이스라엘과 함께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과 비이스라엘은 명료하게 나뉘지 않는다. 그러한 구분은 이데올로기적이며 강령적인 것일 뿐, 일상 영역으로 가면 구분이 모호해진다.

1970년 후반에 노먼 갓월드가 제시한 사회적 재부족화 가설(theory of social retribalization)은 그런 점에서 전통가설보다 이스라엘의 등장에 관한 보다 개연성 있는 설명에 이른다. 그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외부에서 팔레스티나로 진입하여 원주민을 대체한 이들이 아니다. 팔레스티나 내부의 사회적 모순으로 성읍국가의 예속민들이 성읍국가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산지로 흩어지는 현상이 기원전 14~12세기경에 활발하게 일어났다. 같은 시기에 산지에 저수기술이 개발되었고, 계단식 농법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산지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노동력의 이탈을 막으려는 혹은 이탈한 노동력을 회수하려는 평지의 성읍국가들을 비롯한 외부의 정치세력들의 침략이 계속되었고, 이때 방어를 위한 지역 결속체가 형성되는데, 그 과정에서 점차 부족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사회적 재부족화설의 내용이다. 여기에 부족간의 방어동맹이 결성되는 데 그것이 지파동맹이라는 것이며, 이 지파동맹의 형성에 야훼신앙을 가지고 여기에 들어온 일단의 이집트출신 유민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들을 갓월드는 모세집단이라고 명명한다. 하여 사람들은 팔레스티나 토착민이었기에 토착문화와 신앙을 일상에서 견지하고 살았으며, 지파동맹 차원의 활동이 필요할 때는 야훼가 부상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텍스트나 고고학적 발굴물에 대한 충실한 연구보다는 연구자의 너무 많은 자의적인 해석의 산물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고, 하여 갓월드의 수정가설은 이후 다른 많은 연구자들에 의한 2차 수정가설을 통해 재구성된다. 한데 이 2차 수정가설은 특정한 가설적 설명으로 모아지지 않고 다양한 설들이 난무한 상태이다. 하지만 문헌이든 고고학적 유물이든 역사적 자료에 보다 충실하다는 점에서 이전의 자의성이 강한 가설들보다 훨씬 역사적 해석에 다가간 견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이 가설들은 성서를 하나의 역사적 사료로 보고 있으므로 성서의 거대 서사 자체에 큰 신뢰를 두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연구자들의 이데올로기적 성향과 무관하게 이스라엘과 비이스라엘의 이분법 자체를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많은 발굴물들을 통해 조명된 주민의 일상은 이스라엘과 비이스라엘 간의 차이를 명료하게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특정한 계기보다는 훨씬 다양한 이유들로 서서히 팔레스티나 중부 산지로 유입된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들이 서서히 부족으로 결속하게 되며, 부족동맹으로까지 결속의 범위가, 비록 낮은 수준이지만,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사의 발전은 아직 많은 신학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 공유되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이라는 외부에서 유입된 역사의 주체가 비이스라엘, 즉 팔레스티나의 원주민을 대체한 것이라는 견해가 여전히 지배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이 원주민들의 시대는 미개한 문명의 시대였고, 역사 이전의 시대였다. 반면 이스라엘은 경험을 역사화한 최초의 주역이고 문명의 창건자라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빈약한 논거들로 채워진 성서 이해는 이스라엘 이외의 팔레스티나 사람들을 타자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렇게 다윗-솔로몬의 황금시대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티나에 유입됨으로써 가능했다. 그것을 위해 정복가설은 대량학살의 이야기를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그래야만 이 지역에 대한 신의 축복은 비로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의 축복과 세속적 성공 사이의 거리는 사라진다. 그리고 이러한 성속 연동의 틀은 이주가설이나 심지어 사회적 재부족화가설에서도 어느 정도 계속된다. 또 최근의 2차 수정가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에게서도 세속적 성공이 중요한 평가의 잣대로 작용하고 있다. 하여 세속적 역사의 실패자인 팔레스티나 사람들은 역사의 대상이지 주역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역으로 거슬러 형성된 역사 발명의 주역은 유다 왕국 말기인 히즈키야 혹은 요시아 왕 시대이거나 식민지 시대의 서기관들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앞으로 올라가서 아브라함에 이르는 전설상의 조상들에 관한 설화와 연결된 장구한 거대서사가 바로 이러한 역사화 작업을 통해 구성된다.

그런데 성서 역사학에 대한 메타적 연구를 수행한 휘틀럼은 이러한 고대 이스라엘에서 수행된 성서의 역사화가 서구의 그리스도교 제국주의와 현대 이스라엘 국가의 자기중심주의 이데올로기에 ()의식적으로 연동되어 있음을 밝혀냈다. 그리고 이것은 이들 이외의 존재가 팔레스티나 역사의 무대에서 발언할 수 없게 했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것이 서구의 세속적 성공주의와 신앙적 축복을 단순 결합한 욕구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아우슈비츠 이전의 신학들은 이러한 성공주의 신앙을 추구했다. 그리고 오늘날 근본주의적 그리스도교 분파들과 현대 이스라엘 국가 또한 이 점에서 인식을 공유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은 서구 문명이 대표했던 성공주의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하고자 했지만, 그러한 자기성찰을 유대교에 한정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유대교>그리스도교의 도식이 유대교<그리스도교도식으로 역전됨으로써 가능했던 반유대주의가 결과적으로 대량학살이라는 최악의 범죄로 이어졌다는 문제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압도된 나머지, 그들의 신학논리에서 서구의 유대교 엘리트나 현대 이스라엘 국가가 수행하는 타자에 대한 배타적 행태에 문제제기 하는 발언을 거의 하지 않았다. 실은 유대인을 비난하는 것 자체가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에서 금기시된 것이었기에 그런 문제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하는 게 낫겠다.

노만 핀켈슈타인은 이러한 서구인들과 유대인들의 논리가 제도화되는 양상을 홀로코스트 산업이라고 비난하였는데, 나는 현대 서구신학 역시 이러한 홀로코스트 산업에 포섭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러한 신학을 홀로코스트 신학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그런데 1948년 현대 이스라엘 국가가 설립된 이후 유대인은 더 이상이 역사의 희생자가 아니다. 또한 서구사회의 유대인 커뮤니티 역시 마찬가지다. 홀로코스트는 유대인이 자신의 고통을 특화시키는 순간 더 이상 희생자의 담론이 아니며, 또 다른 희생자를 부르는 제국의 담론에 지나지 않는다. 하여 이제는 홀로코스트 너머의 신학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이 가자를 침공한 순간, 바로 유대인들에 의해 아우슈비츠는 역사에서 사라진 것이다. 대신 가자 이후를 묻는 일만이 신학의 과제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한국 개신교 지도자들이 여기저기에서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은 정당방위라는 발언을 서슴치 않고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부시의 미국이 아프간과 이라크를 침공할 때도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그들의 생각에는 정당한 전쟁과 정당하지 않은 전쟁이라는 이분도식이 작동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정당한 전쟁일까.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어느 성서학자는 방어를 위한 전쟁은 정당하다고 한다. 그런데 예방적 공격이라는 미국의 전쟁 논리는 이 연구자의 정당한 전쟁논리를 무색하게 한다. 예방적 공격이라는 이름의 선재공격도 방어를 위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러한 논리를 펴는 신학자나 성직자들은 대체로 복음주의자든 근본주의자든 미국의 전쟁을 지지하거나 문제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요컨대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교 지도자들과 많은 신자들은 미국이나 이스라엘에 대해 우호적인 생각을 가지고 그네들의 행위를 해석하고자 했고, 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나 이슬람 사람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을 선험적으로 갖고 있었다.

왜 그러한 선험적 편견을 가지고 있는가. 앞에서 얘기한 현대 서구 신학이나 근본주의 신학이 그 대답이 된다. 그 속에는 무의식적으로 서구 중심주의적 성공에 예속된 식민화된 자의식이 깔려 있다. 그것을 성찰할 지적 준비도 신앙적 의지도 없다면 한국그리스도교가 팔레스티나 사람들이나 전 지구의 고난당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정당하게 판단할 신학적 신앙적 사유의 가능성은 없다.

 

  1. 바울 당대는 아직 제도로서의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던 시대였다. 후에 유대교와 변별된, 제도화된 종교적 실체로서 그리스도교가 등장했을 때(1세기 말에서 2세기 초 무렵), 바울이 던진 실천적 의제들은 제도화의 신학적 토대로서 작용한다. 하지만 바울 자신은 아직 새로운 종파로서의 그리스도교 지도자가 아니라 유대교 내의 그리스도파의 지도자였다. [본문으로]
  2. 물론 이 족보와 무관한 사제계열의 흔적은 제1성서(구약성서) 속에서 여럿 발견된다. [본문으로]
  3. 반면 다른 두 범주의 사제 계보는 늘상 권력 중심부에서 존재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