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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체험된 소통의 기록들 - ‘긴 1986년’ 안병무의 설교 분석

향린교회 60주년 기념도서 [자유인의 교회 - 향린교회를 말하다]에 실린 글입니다.

취지에 맞지 않는 글을 쓴 탓에 또 한 편을 새로 써야 했습니다.

해서 두 편이 실리게 되었습니다.

벌칙 치고는 너무 과한 벌칙이예요.

너무 많은 시간이 들었고 체력은 바닦가지 소진되어버렸지요. 

그래도 나의 선생님인 안병무의 수많은 글을 다시 읽고 감동받았고 새로 깨닫게 된 것도 많았으니 

부질없는 것은 아니었지요.  

아무튼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쓴 안병무 선생님에 관한 두 편의 중 두번째 글입니다.


체험된 소통의 기록들 - 긴 1986년 안병무의 설교 분석__향린교회 60주년기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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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된 소통의 기록들

1986안병무의 설교 분석

 

 





 

 

1986’, 체험된 소통의 시간

 

향린교회의 1970125일자 설교에서[각주:1] 안병무 선생은 비인간화한 대중이라는 표현을 썼다. 독재체제에 의해 장악된 매스미디어에 이용당하고 있는 대중을 가리킨다. 대중에 대한 이와 비슷한 기조가 1972년에 쓴 글 우상화[각주:2]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 대중은 매스미디어에 호도되는 존재이며 수동적으로 순응하는 대상으로 표상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독재정부와 우상화의 기재를 간파하는 지식인의 예언자적 역할이 시사되고 있다.

이후 1972년 유신체제가 등장하자 이러한 독재정부와의 불화는 고조되었고, 특히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을 거치면서 선생의 신학적 문제제기의 담론 형식은 극적인 도약을 하게 된다. 19753.1절 기념예배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기독자교수들인 김찬국, 김동길의 석방을 환영하는 모임을 겸했는데, 이날 강연 겸 설교를 맡은 안병무 선생의 글 민족민중교회[각주:3]는 사실상의 민중신학의 출범선언이었다. 여기서 선생의 대중/민중에 대한 생각은 이전 시기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성서에는 민중을 표시하는 두 가지 다른 개념의 용어가 있다. ...... ‘라오스는 오늘의 국민이라는 말과 통하는 것으로서 어떤 집단권내에서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 민중의 칭호인데 반해서, ‘오클로스는 권외의 대중이다. ...... 그런데 주목할 것은, 가장 처음 씌여진 마르코복음에서는 예수가 싸고돌았고, 또 예수를 무조건 따르며 그에게 희망을 건 사람들을 라오스라고 하지 않고 오클로스라고 했다는 사실이다.[각주:4]

 

또한 같은 해 5월 정권에 의해 강제해직당한 이후,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구속되었다 출소한 이들과 해직당한 이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갈릴리교회의 817일에 했던 창립예배 설교에서 선생은 수난당하는 자, 눌린 자,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신음하는 자의 편에 서고자 한다고 말했다.[각주:5]

이러한 극적인 도약은 대중/민중에 대한 어법의 전환을 수반한다. 이전의 대중이 우상에 호도되는 자였다면, 이후의 대중은 수난당하는 이로 표상된다. 그런데 이 두 어법은 공히 대중을 대상화된 수동적 존재로 보고 있다. 이들은 소통의 상태편이 아니라 지배권력에 의해 호도되거나 지식인들과 선각자들에 의해 구출되는 대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75년 태동한 민중신학은 민중을 위한신학의 성격을 지닌다. 한데 이러한 대상화된 수동적 대중에 대한 생각은 1970년대 말경부터 점차 바뀌기 시작한다. 그러한 생각의 전조를 보여주는 글은 1979년에 발표된 전달자와 해석자[각주:6], 그리고 이듬해 발표된 그리스도교와 민중언어[각주:7]. 앞의 글은 예수전승이 구술(oral)로 되었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구술전승의 전달자는 지식인이 아니라 민중임을 말하고 있고, 뒤의 글은 그러한 민중의 이야기의 독특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이 두 글이 예수 이야기의 진정한 계승자는 바로 오클로스로 표상되는 무지렁이 대중이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문제제기하는 계기였다는 사실이다.

이런 생각의 발전에 힘입어 1984년 저술한 예수 사건의 전승모체[각주:8]는 선생의 민중예수론의 결정판이다. 이 글의 특기할 점은 예수 사건의 전승 형식인 민중언어의 성격을 유언비어(루머)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가 처형당한 이후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예수 사건은 유언비어로 유포되었고, 그것을 유포한 이들은 다름 아닌 오클로스였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오래된 복음서인 마가복음의 예수는 오클로스가 기억한 예수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여기서 오클로스의 기억이 없으면 예수도 없다. 가장 오래됐고 다른 두 복음서의 원본인 마가복음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예수는 오클로스의 경험과 관심을 통해 보존된 예수라는 것이다. 하여 예수와 그 주변의 대중인 오클로스를 분리하면 예수는 우리의 시야를 벗어난다. 그 둘이 함께 어우러져 일으킨 사건 속에서만 예수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주변의 대중으로부터 예수를 분리하려 했던 주객 이원론을 극복해야만 진정 예수를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방법론적 주장은 신학적 인식론으로 이어진다. 즉 예수는 오늘 우리 사회의 민중사건 속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영으로 그 사건 속에 함께 있다. 지금 여기서 예수와 민중이 더불어 일으키고 있는 민중사건은 원사건인 예수사건이 지금 여기서 재현되는(incarnated) 양식이다. 이것이 선생의 민중예수론의 골자다.

한데 이러한 생각은 한국의 정치현장에서 얻은, 곧 당신이 얽혀 있는 당대의 역사 속에서 체험된 것이라고 선생은 토로한다.[각주:9] 사석에서 한 얘기에 따르면 그 정치현장은 바로 광주사건이다. 광주사건이 신군부에 의해 장악된 언론에 의해 철저히 은폐, 왜곡 보도되고 있을 때, 그 진실이 전달된 것은 유언비어 형식의 말이었고, 그 말의 전승자는 민중이었다는 것에서 예수사건의 전승에 대한 선생 특유의 생각이 발전하게 된 것이라는 얘기다.

이것은 역사비평학적 사유의 일반적 전개 형식과는 정반대다. 실증주의 역사학의 산물이자 결정판인 역사비평학은 후대의 역사적 기억들에 의해 첨삭된 것을 제거하여 순수한 예수를 발견하려는 경로로 연구가 수행되었다. 이것은 체험된 것의 제거가 곧 순수한 예수의 발견 원칙이라는 것이다.

한데 선생은 그와는 반대로 역사적 기억들을 통해서 예수를 읽어낸다. 선생은 자신의 역사적 체험에서 복음서, 특히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저자의 역사적 체험을 읽는다. 여기에는 광주사건의 진실을 전한 오늘 한국의 대중/민중의 기억과 예수 사건을 유포한 1세기 팔레스티나의 오클로스의 기억이 유비를 이룬다. 이는 (역사적 체험의 제거가 아니라) 역사적 체험을 통해서 비로소 역사의 예수가 조명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아무튼 이제 선생에게서 대중/민중은 더 이상 수동적이고 대상화된 존재가 아니다. 오클로스(민중)가 전승했기에 우리는 마가복음을 통해 예수를 알 수 있게 되었고, 대중/민중이 전달해준 덕에 광주사건의 진상도 역사 속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대중/민중은 예수와 소통하는 존재로서 역사 속에서 행동했다. 1세기 팔레스티나에서 일어난 그 예수사건에서 예수는 민중(오클로스)과 소통하며 사건을 벌였다. 그리고 예수가 권력에 의해 죽임당하자, 그이가 죽지 않았다고 외치면서 그 부활한 그이와 소통하는 이들, 그 오클로스가 전해준 이야기가 채록된 것이 마가복음이다. 마가복음은 예수 사후 부활한 예수와 민중이 소통하며 벌인 사건의 기록이다. 한편 부활한 예수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대중/민중과 만나기 위해 이 되었다. 하여 영으로서의 예수가 전태일 사건으로 1970년의 한국에서 대중/민중과 소통하며 사건을 벌였다. 또한 1980년 광주사건으로 그 소통의 역사가 재현되었다.

예수사건의 전승모체와 같은 해(1984)에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아시아 그리스도론 워크숍에서 발표한 “Jesus and People"[각주:10]에서 선생은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다.

가톨릭교회당 앞 금관을 쓴, 시멘트로 된 예수상 밑에서 구걸하는 거지들을 바라보며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눈물 흘리는 예수, 그 눈물방울이 머리에 떨어진 거지, 하여 예수와 거지들이 대화한다. 예수는 자신이 시멘트 감옥에 갇혀 있다고 말하면서 머리에 쓰인 금관을 벗겨달라고 한 뒤 이렇게 말한다.

 

내 힘만으로는 안 된다. 너희들이 나를 해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 네가 내 머리에서 금관을 벗겨내는 순간 내 입이 열렸다. 네가 나를 해방시켰다. ...... 내겐 금이 필요 없고, 금은 네게 필요하다. 금을 가져다 네 벗들과 함께 나누어라.[각주:11]

 

김지하의 생각을 빌어서 선생은 예수사건의 전승모체의 문제의식을 신학적으로 더 급진화시켰다. 민중이 예수를 구원시킨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예수가 민중을 구원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요컨대 양자의 소통은 구원사건의 관점에서 필연적이다. 예수가 없으면 민중의 구원이 없고 민중이 없으면 예수의 구원도 없다. 하여 소통은 서로의 구원사건이다. 이 쌍방 구원사건이 바로 예수사건/민중사건인 것이다.

그러나 아직 선생은 예수사건/민중사건의 관찰자이며 증언자로만 남아 있다. 선생의 생각은 이 소통 과정에 참여하고 있지만 몸은 아직 소통하고 있지 않다. 여전히 선생 자신에게서 대중/민중은 거리감이 있다. 그 거리감의 해소가 신학적으로 표명된 책이 바로 선생의 민중신학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민중신학 이야기.[각주:12]

1985년 어간부터 선생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글을 쓰는 것이 여의치 않게 되었다. 이후 선생의 글은 대필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19802차 해직 즈음 선생은 당대 최고의 논객의 한 사람이 되었고, 기자들과 편집자들은 선생의 글을 얻기 위해 언제나 선생 주위를 맴돌곤 했는데, 그런 필력의 소유자가 글을 쓰는 것이 여의치 않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은 고육지책으로 선생의 말을 글로 옮기는 작업을 기획했다. 10명 미만의 제자들이 모여서 워크숍을 하고 거기에서 만들어진 질문들을 선생을 만나 질의하는 방식의 대담을 기획한 것이다.

첫 번째 대담은 1985년 말 아니면 1986년 초 선생의 수유리 자택에서 있었다. 그것이 민중의 교회라는 제목으로 신학사상에 실렸고,[각주:13] 같은 해에 2회의 좌담이 더 실시되었고 같은 잡지에 게재되었다. 그리고 이것 외에 가상대담으로 엮은 글들을 모아 민중신학 이야기가 출간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을 기획한 이들의 생각은 선생의 건강이 악화되어 글을 쓰는 것의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해서든 글을 쓰게 하려는 것이었다. 한데 이 기획은 선생 자신에게서 뜻밖의 성과를 낳았다. 대담을 하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에 생각이 이르게 된 것이다. 이후 선생은 사석에서나 공적 자리에서 종종 질문이 대답을 만든다.”는 말을 하곤 했다. 실존주의자였던 선생에게 이런 말이 그리 낯선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여 표출할 수 있던 때에는 절감하지 못했던 것이 몸이 글쓰기를 허용하지 않게 되자 보다 절절하게 체험된 것이다. 즉 역사적 체험만이 아니라 몸의 체험도 이 소통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제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를 언급했던 이태 전의 문제의식, 곧 시멘트로 박제된 예수가 꼼짝하지 못한 채 굶주린 거지에게 금관을 벗겨가라고 하소연하던 것, 그것이 예수의 구원이라는 생각이 자기 자신에게 대입되게 된 것이다. 심하게 악화된 몸은 타인의 말과 행동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이들의 물음이 선생의 성찰을 낳게 했고, 그이들의 정리가 그 성찰을 글로, 책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생의 모든 글 가운데 가장 빛나는 역저인 민중신학 이야기.

하여 시멘트에 박제된 예수와 권력의 법적 경제적 체계에 의해 꽁꽁 묶여버린 대중/민중이 각기 개별적으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서로 만나고 소통함으로써 서로의 구원이 가능해지는 사건이 예수사건/민중사건이듯이, 선생도 몸이 질병의 포로가 됨으로써 비로소 그 소통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고 그 결과 구원에 동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선생에게서 이 소통은 지각된 소통이 아니라 체험된 소통이다. 그리고 이 체험된 소통에서 선생은 구원사건을 체감했다.

이러한 체험된 소통의 결과 선생의 신학은 예수사건/민중사건의 관찰이자 증언인 동시에 자기 자신의 구원체험에 대한 간증의 기록이 된다. 하여 예수-대중/민중과의 거리감이 신학적으로 해소되었다. 그러한 신학적 인식의 보고서가 바로 민중신학 이야기인 것이다.

이렇게 1970년대 말을 출발점으로 하여 1986민중신학 이야기에서 절정에 이르고, 소천한 1996년까지 계속된 선생 말기의 신학적 사유를 나는 역사적으로 체험되었고 몸으로 체험된 소통의 시간의 관점에서 읽고자 한다. 또한 그 사유의 결정판이 출간된 1986년은 그 전후의 20년 가까운 긴 시간의 인식을 표상한다고 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그 시기를 1986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체험된 소통의 효과로서의 1986’, 이것이 내가 이 글에서 전제하는 선생의 신학에 관한 작업가설이다. 나는 이 글에서 그 시기 선생의 설교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 속에서 1986이 어떻게 신앙과 신학의 기록으로 남겨지고 있는지를 이야기할 것이다.

 

자료들

 

안병무 선생은 보통 메모로 설교를 한다. 그리고 그 설교들의 일부가 후에 원고로 작성되어 글로 발표되었다. 이것은 선생의 설교를 연구하는 데 있어 부딪치는 첫 번째 난관이다. 설교 자체로 남은 글이 거의 없으니 그 많은 선생의 글 가운데 어느 게 설교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큰 과제다. 선생 자신은 그것에 관한 정보를 명시적으로 남기지 않았다. 간혹 편집자가 설교 원고임을 밝히고 그것의 날짜를 기록하기도 했고, 그 중에는 간략한 정보가 더 들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므로 글들 속에서 설교임을 찾아내는 문헌비평적 작업이 필요한데, 선행 작업이 거의 없으니 그 과제는 매우 많은 시간과 노고를 필요로 한다.

한편 메모가 한 편의 글로 완성되는 과정에서 많은 보충과 수정이 있었음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문제는 얼마나 어떻게 첨삭되었는지를 추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게다가 1986년 어간 이후에는 메모를 글로 만들 때도 대필자가 선생이 불러주는 것을 옮겨 적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것은 그 원고를 완성된 형태로 만드는 과정에서 편집자가 훨씬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뜻한다. 이렇게 되면 원래의 설교 문제뿐만 아니라 선생이 구술한 초고가 어느 정도인지를 찾아내기조차 어려워진다. 이 점이 두 번째 난관이다.

향린교회의 주보에는 그 전 주에 행했던 설교들의 요약이 들어 있다. 선생의 많은 설교들도 요약 형태로 주보에 수록되어 있다. 주보를 통해 그 설교의 날짜와 정황을 추론할 수 있어 이 자료는 매우 소중하다. 한데 이 요약본은 주보의 안쪽 면을 4등분하여 수록한 것이니, 실제 설교를 상당부분 축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설교를 그대로 채록한 자료를 보면 공책에 빽빽하게 적은 손글씨로 10쪽을 훨씬 넘는다. 또 거의 축약하지 않고 문장만 정리하여 녹취하여 출간된 것으로 보이는 원고들은 대개 12쪽 내외가 된다. 그러니 향린교회 주보의 요약본은 요약자의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이 세 번째 난관이다.

하지만 많지는 않아도 설교의 원본들이 일부 보존되어 있다. 우선 소천 이후 살림에 실린 선생의 설교들 중 많은 것들이 거의 축약되지 않고 문장만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또 선집에 실린 일부 설교들은 선생의 설교 음성 테이프를 모아서 채록하고 정리한 것들이다. 이때 수거한 테이프 대부분은 유실되었지만 그것을 채록하여 글로 옮긴 것들이 상당수 선생의 선집에 수록되어 있다. 생명을 살리는 신앙[각주:14]구걸하는 초월자[각주:15]에 많이 수록되었고, 그밖의 선집에도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다행히도 이 글들은 대개 년도와 날짜 정보가 포함되어 있고, 간혹 어느 교회인지 명시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 설교들은 대개 1960~1970년대의 것들이고, 추적해보면 향린교회의 것들이 압도적이다. 민중신학적 사고가 담긴 1980년대의 설교들은 선집에서 별로 찾아볼 수 없고, 다른 어디서도 그다지 많지 않다. 특히 1987~1989년에는 향린교회의 설교가 거의 없는 반면, 한백교회의 설교가 많았는데, 그 일부를 녹음한 테이프가 선집 제작 시 수거되었으나 녹취원고로 남겨지지 않고 대부분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향린교회 문서고에 손으로 녹취한 선생의 설교 19('자료I')이 발견되었는데, 주로 1973년의 것들이다. 이것들은 보존 상태가 매우 훌륭한데다 선생의 설교 전체를 거의 가감 없이 채록한 것이어서 대단히 중요한 자료 가치가 있다. 또 향린교회 웹사이트에서 11편의 설교 녹취 원고(자료 II)가 발견되었는데, 19861, 19916, 19922, 19932편 등이다. 이것 역시 자료 가치가 매우 훌륭한 글들이다. 특히 모두 선생의 민중신학적 사유가 꽃피우던 시기의 것들이어서 선생의 민중신학적 설교를 살피는 데 있어 결정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앞서 언급했듯이, ‘1986이 어떻게 신앙과 신학의 기록으로 남겨지고 있는지를 설교를 통해 살피려 한다. 이 경우 시점을 언제로 하여 설교를 검토할 것인지가 문제인데, 우선 드는 생각은 1984년 혹은 1986년 이전과 이후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그 전후 사이에도 생각의 변화를 추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각주:16] 연구할 시간적 여유가 부족한 탓에 이 글에서는 그 작업을 포기하기로 했다. 하여 잠정적으로 여기서는 1986년 이후의 설교만을 참고하기로 했다.

1986년 이후의 설교 원고를 찾아낸 것은 총 25편이다. 앞서 말한 자료II’11편 중 5편은 살림, 1편은 구걸하는 초월자, 1편은 살림한국 민족운동과 통일에 동시 수록되었다. 한데 살림구걸하는 초월자, 한국 민족운동과 통일에 실린 글보다 자료II’의 것이 더 원래의 설교에 가까워 보이므로 여기서는 자료II’를 사용하였다.[각주:17] 그밖에 살림에만 실린 설교 원고가 5, 선집들인 구걸하는 초월자, 불티,[각주:18] 생명을 살리는 신앙, 우리와 함께 하는 예수,[각주:19] 구원에 이르는 길,[각주:20] 한국 민족운동과 통일에만 실린 글이 각 1편씩 총 6편 등이 있다. 또한 향린교회 설교집인 광야의 소리3편이 있으며, 설교음성파일(한백교회 설교)[각주:21]1개가 있다.

 





불통의 시대, 유실된 체험

 

1991220일 홍근수 목사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강제 연행되었다. 이에 향린교회는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했고, 특히 33일 교인들이 성가대 가운을 입고 십자가가 그려진 마스크를 쓴 채 노상기도회 겸 가두행진을 했다.

안병무 선생은 이 가두행진이 있던 날로부터 보름 후에 한 설교[각주:22]에서 국가보안법이 공정한 법치를 왜곡시키는 주된 장치임을 문제제기한다. 국가와 사회를 위기에 빠뜨릴 만한 큰 범죄가 처벌되지 않고, 죄라고 할 수 없는 것을 중죄로 처벌하는 법적 장치라는 것이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이 법이 사람들을 특정한 증오에 고착시켜 버린다는 점이다. 하여 사람들은 모두를 위기에 빠뜨릴만한 큰 범죄에 무감각하고 사소한 것에 흥분하곤 한다. 이것은 체험의 유실이다. 체험된 것을 직시하지 못하고 왜곡되게 느끼고 행동하게 하는 장치, 곧 일상의 망각의 장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 즈음 직면한 향린교회의 분열 위기도 바로 그러한 체험의 유실 현상에 속한다.

선생은 이를 기가 막힌 것이라고 명명한다.[각주:23] 여기서 는 히브리어 루아흐(רוּחַ)와 그리스어 프뉴마(πνεύμα)에 대한 선생의 번역어다.[각주:24]이라는 통상적인 번역어는 그 개념을 인격화했고, 동시에 지극히 숭고한 위치(위격)의 존재로 해석하는 경향을 담고 있어 이 단어의 함의를 왜곡시킨다는 것이다. 왜냐면 그리스어 프뉴마로 번역된 히브리어인 루아흐는 바람, , 교류하는 힘, 에너지 같은 의미를 갖는데, 인격적이고 위격적인 함의를 갖는 의 뉘앙스는 범접할 수 없는 신의 위상의 하나임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으로 쓰는 순간 신과의 소통은 사라지고 군림하는 신만이 남아버린다는 주장이다.

한데 사도행전21~13절의 설화에 따르면 프뉴마가 불의 혀처럼 제자들 몸 위로 내려앉는 순간 그들은 각기 그들 주위에 모인 여러 나라 사람들의 언어로 말하게 되었다. 즉 자기의 언어가 아니라 그들이 소통해야 하는 낯선 이들의 언어로 말하게 되는 사건이 바로 프뉴마 도래 사건이라는 것이다. 즉 프뉴마는 소통이 일으키는 담론 효과를 의미한다. 선생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가장 적절하게 담은 표현을 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기가 막혔다는 것은 소통의 부재를 상징한다. 곧 국가보안법으로 인한 법치의 왜곡은 그 사회가 소통의 부재, 즉 불통의 세계임을 말해 준다.

선생은 다른 설교에서 이러한 불통의 세계의 특징을 좀더 체계적이고 거시적으로 정리하여 제시한다. 즉 불통의 세계는 두 가지 형식을 지니는데 하나는 국가보안법처럼 부당하게 사람들을 구속하고 생각을 왜곡시키는 국가체제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욕구들이 무분별하게 충동되게 하는 시장체제다.[각주:25]

국가와 시장은 근대사회의 두 개의 지배체제적 요소다. 국가주의냐 시장주의냐 식의 이분법은 적절치 않다. 근대 이후의 어느 시대도 국가가 완전히 퇴각한 적이 없으며 시장도 완전히 퇴각한 적이 없다. 어느 사회든 국가와 시장 간의 힘의 균형이 어느 지점에 맞춰지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서로 담합하면서 지배체제를 구성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체제 아래서 늘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그 사회의 시민으로 포섭되고, 또 어떤 부류는 비시민으로 배제된다. 이러한 시민 대 비시민의 틀은 안병무 선생의 라오스 대 오클로스의 틀과 유비되는데, 여기서 오늘의 오클로스는 이러한 국가와 자본의 동맹을 통한 근대체제의 희생자들이다.[각주:26]

하여 선생은 이러한 국가-시장적 체제를 제물, 곧 희생양을 요구하는 신[각주:27]들의 체제라고 규정한다. 그 체제는 눈먼 아비를 치료하기 위해 딸 심청을 희생시키는 체제이고,[각주:28] 선왕의 공덕을 위한다는 이유로 거대한 성덕왕 신종(에밀레종)을 제작하려 혹은 국가방위의 이유로 만리나 되는 장성을 쌓으려 백성(맹부인)의 고혈을 짜냈던 죽임의 체제다.[각주:29]

선생은 오늘의 지배체제를 이렇게 규정한다. 그 체제는 대중/민중을 희생양 삼아 존속하는 체제이고, 그 소통망에서 그이들을 배제하는 체제다. 소통망에서 배제되었다는 것은 그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망각이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그이들의 희생은 시민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혹은 보이긴 하더라도 왜곡되게 보인다. ‘왜곡되게 보인다는 뜻은 그이들의 고통이 지배체제의 가학성 때문이 아니라 그이들 자신이 게으르고 불온하며 부정한 탓이라고 생각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각주:30] 하여 시민들의 체험의 기록에서 대중/민중의 기억은 유실된 것, 그것이 선생이 보는 오늘의 세계다.


소통의 시간, 체험의 복원

 

막달라 마리아의 응시하는 눈길을 의식하면서 예수는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사랑하는 그녀에게 마지막까지 의연하고 싶었던 남자의 자존심, 이것이 예수로 하여금 십자가를 짊어지게 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잔을 내가 받지 않을 수 있게 해 주소서.’ 바위 같던 예수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최후의 순간을 절감하며 이렇게 기도했다. 불과 하루 전이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을 뒤로 하고 예수는 다짐했다. 그 십자가의 길을 가겠노라고.

1988년 한백교회에서 했던 선생의 설교는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각주:31] 1988년 겨울, 크리스마스 직전에 했던 설교다. 한데 이런 선생의 해석은 중요한 한 가지 논점을 입증해야 한다. 이 설교는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연인 사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의 응시를 의식하며 죽음의 길을 가야했던 청년 예수의 심정은 잘 설명되지 않는다.

선생은 예수가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간 것을 전태일이 몸을 불사르기로 작정하고 실행에 옮긴 것과 연결시켜 해석하곤 했다. 즉 선생에 의하면 예수는 죽기 위해 예루살렘에 간 것이다. 그것을 그이는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들 누구도 마지막 때에 누가 주님의 오른 편에 앉을 것인가를 두고 서로 언쟁할 만큼 그이의 죽음의 행보에 대해 무감각했다. 한데 한 명의 제자만은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선생의 해석에 의하면 말이다. 그이가 바로 막달라 마리아다.

왜 그녀만은 그것을 알고 있었을까? 이 해석을 위해서는 다른 전제가 필요하다. 선생에 의하면 그녀는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자 바로 그녀다. 요한복음121~8절에 의하면 그녀는 마르다의 자매이고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다. 그녀가 값비싼 향유가 든 옥합을 깨드려 예수에게 부을 때 제자들 혹은 주변 사람들은 값비싼 것을 낭비한 그녀를 나무랐지만 예수는 그녀를 두둔했다. 누가복음을 제외한 세 복음서(마태복음 26,6~13; 마가복음14,3~9; 요한복음12,1~8)는 모두 그녀의 이 행동이 곧 죽을 예수의 장례를 예비하는 행위로 해석했다. 선생은 질문한다. 도대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던 예수의 죽음의 길을 어떻게 그녀만은 절감하고 있었을까? 그녀와 예수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것을 소통하는 사이였다는 것이 선생의 해석이다.

한데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는 자리에 함께 있었고, 그이가 안장된 무덤에도 제일 먼저 간 사람이다. 그녀는 죽음의 자리에 처한 예수, 그리고 죽임당한 예수와도 소통하고 있었다. 선생은 그녀의 이런 행동과 향유 부은 여자의 행동 사이의 유사성을 사랑이라고 보았다. 그 텍스트들 속의 소통의 양상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그것이라는 얘기다. 해서 선생은 향유 부은 여인=마르다의 자매 마리아=막달라 마리아라는 등식을 유추하면서, 예수와 사랑을 나누는 여인 막달라 마리아가 그이를 응시하고 있다는 상상을 편 것이다.

이 설교의 결론은 이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그와 소통하고 있는 이와의 관계 속에서 실행된 것이다. 예수가 ()이고 주위 사람을 ()으로 보며, 예수의 행동이나 말을 의 요소와 무관한 독백적 언행으로 해석하고자 했던 기존의 해석에 대해 선생은 그 주객 이분법이 해체되어야만 역사의 예수를 읽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의 행보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이 죽음이라면, 그것조차도 그를 사랑한 한 여인의 응시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지금까지의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적 해석에서 그녀는, 아니 예수 주변의 대중은 예수를 해석하는 데 전혀 유용한 변수가 아니었다. 해서 그이들과 예수가 얽힌 체험들을 간과했다. 요컨대 예수 전승에서 주변의 대중의 체험은 해석자에게서 유실된 기억에 속했다. 마치 지배체제, 그리고 시민에게 비시민의 기억이 유실되었듯이 말이다.

하지만 선생의 해석은 이들, 예수 주위 대중의 체험을 복원시켰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냐 하면, 먼저 선생 당대의 민중의 행동에서 민중의 체험을 선생이 공감하게 되는 것으로 출발한다. 가령 전태일 사건이 그렇다. 전태일 사건에서 선생은 자기 자신에게서 망각된, 유실된 민중의 체험에 관한 기억을 복원하고 그것에 공감하게 됐다. 그리고 나서 성서의 민중, 곧 예수 주변의 대중의 체험과 선생 당대의 민중의 체험을 유비시킨다. 체험의 공감을 통한 시간의 소통이 가능해진 것이다. 하여 예수와 대중 사이의 공통된 체험에서 예수의 언행을 읽어내는 방식으로 선생은 역사의 예수를 해석하였다.

바로 이런 해석이 1986시기의 선생의 설교들에서 엿보인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의 언행이 선생으로 하여금 유실된 체험을 복원하게끔 했을까? 선생의 대답은 이렇다. 첫째가 박해를 당하는 자, 둘째가 불의를 보고 견딜 수 없는 자이다.[각주:32] 한국과 중국의 두 편의 설화가 그 실례를 보여준다. 앞서 얘기한 에밀레종 설화와 맹부인 설화가 그것이다.[각주:33]

에밀레종 설화만 살펴보자. 이것이 주류 담론에서는 신라 성덕왕 신종 이야기로 남겨져 있다. 선왕인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인 경덕왕이 제작을 명한 것인데, 무려 12만 근, 72톤에 해당하는 구리를 녹여 만든 거대한 종이다. 한데 에밀레종 설화는 이 신종이 소리를 내기 않아 시주를 바치지 못하는 가난한 아기를 함께 녹여 만들었고, 그제서야 종은 소리를 내었는데 그 소리가 에밀레라고 했다는 얘기다.

선생은 이것을 주류기억에 대한 일종의 반기억(counter-memory)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다.[각주:34] 즉 왕의 허튼 종교심과 효심 때문에 고혈이 빨리는 민중의 저항의 기록이라는 주장이다. 주류 기억에는 경덕왕의 지극한 효심과 강력한 신라의 국력이 칭송되고 있지만, 그 속에는 고혈이 빨리는 민중의 고통이 망각되어 있다. 소리를 내지 못하는 종은 수탈당하면서도 강요당한 민중의 침묵, 그 소통부재의 침묵을 상징한다.

반기억의 설화 속에 등장하는 에밀레 에밀레하고 울리는 종소리는 고통에 신음하는 민중의 신음소리이고 주류기억 속에 삭제된 민중의 체험을 삽입시키는, 그러한 민중 체험의 복원을 호소하는 소리다. 하여 오늘의 대중은 이 반기억의 설화 속에서 삭제된 민중, 그이들의 체험에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반기억의 설화는 비시민과 시민 사이의 소통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광주사건을 유언비어로 유포한 민중의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반기억의 설화다. 그 설화를 듣는 시민은 비로소 지배적 기억에서 삭제된, 아니 왜곡된 광주의 민중, 그이들의 체험을 복원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그이들은 피 흘리고 목숨을 빼앗긴 주검들이고, 철사줄에 묶인 채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힌 자들이지만, 패배당한 수동자였지만, 그 반기억의 설화 속에서 그이들의 침묵의 절규가 되살아나 많은 시민들로 하여금 광주사건의 증언자가 되게 했다.

하여 선생은 묻는다. 그렇다면 누가 당신, 시민들의 이웃인가?[각주:35] 죽이고 고문을 가하고 감옥에 수감하는 군부체제의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그 불의함을 미처 알지 못하고 민중의 고통 체험을 망각한 이들이 반기억의 설화를 접하면서 수난자의 고난에 공감하고 그 고난을 증언하며 어떤 방식으로든 동참하게 하였다면, 불의에서 벗어나게 하고 정의를 위한 이의 대열에 서게 한 저이들, 수난당하는 광주의 민중이 우리와 체험을 공감하게 되고 소통하게 된 진정한 이웃이 아닌가.

선생은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누가복음1036절의 강도 만나 부상당한 사람에게 누가 진정한 이웃인가?’라는 예수의 물음을, 독자이자 해석자인 우리에게 되묻는다. “누가 당신의 이웃인가?” 강도에 의해 부상당해 사경을 헤매는 그이가, 그이의 신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이를 돌보지 않으면 안 되게끔 이끌었고, 그이처럼 고통에 신음하는 이를 위해 행동하게 했다면,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라고 말이다.

이러한 반기억의 설화 속의 민중은 자신이 수난당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저항이 되는, 일종의 존재론적 저항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존재론적 저항은 그 고통의 신음으로 시민들의 기억에서 삭제된 민중의 체험을 복원하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

한데 다른 설교들에서 선생은 민중의 저항을 인식론의 차원에서도 이야기한다. 유대인 대 이방인, 남자 대 여자, 그 분단의 장벽을 허무는 운동을 그리스도 평화운동이라고 한다면, 그런 운동을 벌인 이들은 누구인가? “높이 높이 두터운 벽 가로놓여 있으니 아하 누가 나의 손을 잡아주면 좋겠네라고 노래하는 김민기처럼, 손을 마주잡고 서로 소통하게 하는 피스메이커는 누구란 말인가? 고린도전서410절 이하에 의하면 그이들은 어리석은 자, 약한 자, 천대받는 자,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 없이 떠도는 자, 고된 노동을 하는 자,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만물의 찌꺼기처럼 된 자. 바울 자신이 그런 자이고, 바울의 동료들이 그런 자들이다. 곧 민중이다. 그런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 평화운동의 주체다.[각주:36]

독일의 통일에 관한 해석에서 선생은 민중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단언한다.[각주:37] 정권은 통일을 원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실현된 것은 바로 민중이 밀어붙였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선생은 한반도의 통일도 그렇게 얘기한다. 마태복음처럼 수동적으로 당하는 자로서 신음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민중, 그들이 하지 않으면 한반도의 통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각주:38] 여기서 선생이 말하는 민중의 저항은 인식론적이고 윤리적선택을 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한편 흥미롭게도 1986의 선생에게서 민중은 심지어 해석자이자 증언자이기도 하다. 1991년 초 어느 날, 한 민중교회 목사가 원고 뭉치 하나를 선생에게 건네주었다. 경기도 군포의 민중교회인 돌샘교회에서 노동자들인 교인들과 목사(이대수)마가복음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눈 채록원고다. 선생의 성서 해석 방법도 역사비평적 방법을 무시하곤 하지만, 선생이 보기에 깜짝 놀랄 만큼 기발하고 과감한 성서 읽기 방법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이들의 그런 이야기 나눔이 성서학 연구자인 선생의 생각들을 훌쩍 넘어서곤 한다는 점이었다. 선생은 이 원고에 끼어들어 지면으로 그 대화에 참여했다. 해서 그해 책으로 출간되었다. 우리가 만난 예수노동자와 함께 읽는 마가복음[각주:39]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선생은 해석권이 ...... 점점 평신도에게로 옮겨지고, 그것도 별로 생각할 시간도 없는 노동자에게로 ...... 옮겨진 것을 보고탄복했다고 말한다. 이제 민중은 해석의 주역이 되기까지 했다. 하여 체험된 소통의 기록은 민중 자신에 의해서도 수행되었던 것이다.[각주:40]

이렇게 존재론적으로 저항하든 인식론적 윤리적으로 저항하든 민중의 행동은 불통의 시대를 너머 소통의 시간을 도래하게 했다. 그것은 부재하는 민중의 체험을 복원시키고 시공간을 넘어서는 공감을 낳았으며, 그러한 공감의 실천을 가능하게 했다. 시민들, 지식인들이 민중을 이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가로막는 체제에 저항하게 한 것이다. 하여 이들 해석의 주역들이 반기억의 이야기를 생산하게끔 하였고, 동시에 반기억의 이야기는 다른 시민들을 소통의 공론장으로 초대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심지어 민중 자신이 해석의 주체로 부상하기까지 했다. 그이들의 해석은 때로 해석의 전문가들을 놀라게 할 만큼 빛나는 것이었다. 이렇게 1986’, 선생의 민중신학이 꽃 피우던 시절, 선생의 설교도 그랬다.

  1. 《구걸하는 초월자》(한국신학연구소, 1998)에는 제목이 〈단 둘〉인데, 향린교회 주보에는 ‘단 둘이 마주섰을 때’로 되어 있다. [본문으로]
  2. 《현존》 31(1972.5-6합본), 50~52쪽. [본문으로]
  3. 《기독교사상》 (1975.4). [본문으로]
  4. 〈민족⋅민중⋅교회〉, 24쪽. 이것은 위의 《기독교사상》의 글을 재수록한 NCC 신학연구위원회 엮음, 《민중과 한국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82)을 인용한 것이다. [본문으로]
  5.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구걸하는 초월자》(한국신학연구소, 1998), 427쪽. [본문으로]
  6. 동일한 글이 1986년 선생의 글 모음집으로 출간된 《역사 앞에 민중과 더불어》(한길사)에는 〈민중의 설교자〉로 수록되어 있고, 선생 사후 안병무 선집 형식으로 편찬된 책의 하나인 《기독교의 개혁을 위한 신학》(한국신학연구소, 1999)에는 〈전달자와 해석자〉로 수록되었다. 필경 같은 글이 두 개의 제목으로 떠돌고 있었는데, 두 책의 편찬자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한데 이 글이 처음 출간된 것은 《현존》 101(1979.5)에서고 그 제목은 〈전달자와 해석자〉다. 하지만 이 글은 그 전 해인 1978년 5월에 갈릴리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원고로 만든 것인데, 그 제목은 ‘민중의 설교자’다. 설교와 그 이듬해의 원고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같은 글이 두 제목으로 떠돌아다녔던 이유는 이런 사연을 갖고 있다. [본문으로]
  7. 〈전달자와 해석자〉가 제목이 다르지만 같은 원고의 예라면, 〈그리스도교와 민중언어〉는 제목이 같지만 다른 글인 예를 보여주는 사례다. 즉 선생의 글 가운데 〈그리스도교와 민중언어〉라는 제목의 글이 두 편이 있다. 하나는 《현존》 108(1980. 1-2합본)에 처음 게재된글이고, 다른 하나는 1985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에서 주제강연으로 발표된 글이다. 이 두 글은 《역사 앞의 민중과 더불어》에 같이 수록되면서 전자는 〈그리스도교와 민중언어 1〉로, 후자는 〈그리스도교와 민중언어 2〉로 구분되어 있다. [본문으로]
  8. 이 글은 한글판으로만 무려 6회나 재수록된 글이고 영문저작으로도 여러 차례 재수록된 글이다. 이 글이 처음 발표된 것은 1984년 10월 12일에 했던, 전국신학대학협의회가 주최하고 한국신학연구소가 후원한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 신학자대회>에서였다. 한국신학연구소 엮음, 《1980년대 한국민중신학의 전개》 (한국신학연구소, 1990) 참조. [본문으로]
  9. 같은 책, 239쪽의 주33). [본문으로]
  10. 이 글은 〈예수와 민중〉이라는 제목으로 이듬해 《신학사상》 50집(1985 가을)에 번역 게재되었다. [본문으로]
  11. 김지하, <금관의 예수>. 안병무, 〈예수와 민중〉, 645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2. (한국신학연구소, 1990). [본문으로]
  13. 53(1986 여름). 《민중신학이야기》에는 ‘민중의 공동체’로 수록되었다. [본문으로]
  14. (한국신학연구소, 1997). [본문으로]
  15. (한국신학연구소, 1998). [본문으로]
  16. 또한 선생의 민중신학적 사유의 출발시기인 1974/1975년부터 1970년대 말과 1970년대 말부터 1984 혹은 1986년 이전까지의 설교를 비교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본문으로]
  17. 이 글에서는 ‘자료II'에 편의상 적은 글의 일련번호를 붙여서 인용할 것이다(자료II-01~자료II-11). [본문으로]
  18. (한국신학연구소, 1998). [본문으로]
  19. (한국신학연구소, 1997). [본문으로]
  20. (한국신학연구소, 1997). [본문으로]
  21. 이것은 《갈릴래아의 예수》(한국신학연구소, 1990)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글인 여덟째 마당 〈예수와 여인〉에 도달하기 전의 중간단계의 사유를 보여주는 설교다. 하지만 이 글과 그 설교의 선후 관계는 알 수 없다. 다만 논리상 설교는 완성된 글의 전 단계를 보여준다. 이에 대하여는 나의 글 〈고통 공감의 열린 공동체를 향해―막달라 마리아와 민중 메시아론 다시 읽기〉, 김진호 이정희 차정식 최형묵 황용연 공저, 《죽은 민중의 시대 안병무를 다시 본다》(삼인, 2006) 참조. [본문으로]
  22. <작은 도둑, 큰 도둑>(1991.3.17./ 자료II-03) [본문으로]
  23. <예수, 통일의 기수>(1991.6.16./ 자료II-06) [본문으로]
  24. <잔치>(1991.5.19./ 자료II-05)와 <숨>(1990.5.20../ 《살림》 117. 1998.10) [본문으로]
  25. <마라나타>(1986.12.24./ 《우리와 함께 하는 예수》) [본문으로]
  26. 오늘의 오클로스와 안병무의 오클로스에 대하여는 나의 글 〈민중신학과 ‘비참의 현상학’〉, 《한국문화신학회 논문집》 (한들, 2010) 참조. [본문으로]
  27. <산제물>(1986.9.21./ 자료II-02) [본문으로]
  28. 같은 설교. [본문으로]
  29. <예수가 메시아라는 의미>(1993.1.24./ 자료II-11) [본문으로]
  30. 앞의 주 26)의 논문 참조. [본문으로]
  31. 주21)의 글 참조. [본문으로]
  32. <마라나타> [본문으로]
  33. <예수가 메시아라는 의미> [본문으로]
  34. ‘반기억’에 대하여는 명연남, 〈집단학살의 기억과 서사적 대응〉, 《현대소설연구》 제46호 (2011.4) 참조. [본문으로]
  35. <누가 이웃이냐>(1989/ 《불티》) [본문으로]
  36. <분단의 담을 넘어려는 바울의 투쟁>(1991.9.15./ 자료II-08) [본문으로]
  37. <숨>(1990.5.20./ 《살림》 117. 1998.10)과 <해방과 제사>(1990.8.12./ 《살림》 115. 1998.8) [본문으로]
  38. <전에는 ...... 그러나 지금은>(1992.6.28./ 자료II-09) [본문으로]
  39. (형성사, 1991) [본문으로]
  40. <잔치>와 <절망을 넘어선 희망>(1991.7.21./ 자료II-07)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