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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나누기(설교)

묵시록의 지혜

이 글은 한백교회에서 2018년 3월4일에 했던 하늘뜻나누기 원고입니다.


18-03-04_ 묵시록의 지혜_마가복음 13,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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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의 지혜

 

 

또 너희는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일어난 소식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을 듣게 되어도, 놀라지 말아라.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그러나 아직 끝은 아니다.

―〈마가복음13,7

 


 

부지런하고 순박한 시골머슴 재룡이가 서커스 구경 갔다가 얼떨결에 군대로 끌려갑니다. 그는 이념과 이념이 맞붙은 치열한 전쟁의 한복판에 아무런 주의(-ism)로도 무장하지 않은 채 군인이 되어 살상무기를 들고 무자비한 야수성을 발휘하며 싸워야 했습니다. 무수한 아군과 적군이 쓰러져갔지만 그는 용케 살아남아 제대군인이 되어 동두천으로 귀향합니다. 한데 그는 더 이상 예전의 재룡이가 아닙니다. 난폭해졌고 게을러졌으며 폭력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김승옥의 단편소설 재룡이(1968)가 그리고 있는 한국전쟁의 직후의 한 남자의 모습입니다. 전쟁이라는 완력지상주의적 남성성의 서바이벌 게임은 순박한 청년을 아무도 제지할 수 없는 괴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전쟁의 서바이벌 게임을 통과한 그 시대 청년들은 전후, 급작스럽게 변화된 새로운 게임의 룰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재룡이의 시골마을은 기지촌 도시가 되었고, 머슴살이 대신 노동자로 살아야 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약삭빠른 이들이라야 겨우 얻을까 말까 하는 바늘구멍 같은 취업시장에서 야수적 완력만 과잉성장한 청년이 있을 자리는 없었습니다. 결국 그에게 허용된 얼굴은 광폭한 괴물 그것뿐이었습니다.

1950년대 청년들은 전쟁이라는 저 혹독한 터널을 지난 뒤, ‘전후라는 새로운 터널 안으로 빨려들어 갔습니다. 거기에는 또 다른 잔혹한 서바이벌 게임이 벌어지고 있었지요. 전쟁의 시간에 그들을 생존자로 만들었고 조국의 전사가 되게 했던 그 원리가 여기선 그들을 괴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전후에 괴물이 되어 버린 그들을 가리키는 전형적인 대상은 전쟁으로 몸과 정신이 잘려나간 상이군인과 순결한 육체성이 도륙된 아프레 걸이었습니다.

공지영은 후일담류의 단편소설인 인간에 대한 예의(1993)에서 “80년대의 한 길거리에서 우리와 함께 달리다가 ...... 고꾸라진 그들을 두고 나 혼자 ...... 그 긴 터널을 빠져나와버렸다는 생각에서 좀처럼 자유로울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체제의 악마성과 벌인 격렬한 싸움의 시간이 지나가고, 문민정부와 함께 시작된 평범한 생활인으로 아등바등 살아가는 자신의 비루함이 잠시 잊었던, 혹은 잊으려 했던 시간의 터널 속으로 그들을 되돌려 놓은 것입니다.

수많은 의로운 죽음들에 관한 기억들을 역사의 타임스케줄에 기입해두며 기념식을 열어왔던 1980년대, 해서 그 장례식의 사회는 기어이 악마적 체제를 전복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장례식의 사회는 불가피하게 살아남은 자를 죄인으로 소환하게 됩니다. 타자가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자인하는 그리스도교식 고백은 그를 내면의 전쟁으로 몰아갑니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에 대한 죄책고백일까요. 물론 죽은 자()에 대한 미안함입니다. 하지만 말했듯이 그 고백 속에는 현재의 자신의 삶에 대한 죄의식이 오버랩되어 있습니다. 독재의 터널이 지나자 거칠게 밀고 들어온 소비자본주의의 터널, 그 달콤함에 취해버린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그는 지난 날 죽은, 죽임당한 동지들의 상징 앞에서 죄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소비자본주의적 사회의 하수인으로 앞 세대의 누구보다도 더 열렬히 그 질서에서 서바이벌하려 사력을 다했던 자신을 봅니다. 문뜩 자기의 얼굴이, 지난 시절 그토록 타도하려 했던 적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기가 바로 괴물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그는 죄책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여 이제 괴물은 내면으로 들어옵니다. 마치 1980년대 말에 1편과 2편이 개봉되었던 헐리웃 영화 에얼리언을 연상시킵니다. 여기에선 미친 공격력으로 인간의 뇌를 빨아먹고 몸을 숙주 삼아 번식하는 잔혹한 외계 생명체와 사투를 벌이는 인간 전사 앨런 리플리(시고니 위버)의 영웅담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한데 1990년대 초에 개봉된 3편에 가서는 리플리 자신이 에얼리언의 씨를 잉태하였다는 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 괴물과 동거하는 존재, 그래서 영화에서 리플리는 자살을 감행합니다. 그런 것처럼 후일담 소설들은 소비자본주의의 하수인이 되어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자신을, 지난 시간에 죽은 자와 동일시하는 방식으로 수행되는 상상적 자살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상상적 자살의 속죄의식을 감행한 이들이 만든 세계는 어떨까요?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면의 괴물이 속삭이는 유혹과 그것을 파괴하려는 상상적 자살 사이에서 동요하는 이들이 만든 세계는 어떤 모습을 하게 되었을까요? 여기엔 나도 포함되었을 테니 우리라고 하는 게 더 맞겠지요.

1997년과 2008, 두 번에 걸쳐 잔인하게 고지된 신자유주의의 지옥의 묵시록한국전쟁전후라는 서바이벌 터널, 독재체제와 소비자본주의체제라는 새로운 서바이벌의 터널에 비해 더한지 덜한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분명 잔혹한 서바이벌의 터널임에 분명합니다.

어느 때건 시대에 대한 감수성이 누구보다도 빠르고 시대가 일으키는 고통의 레짐에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반응하는 이들은 청년들입니다. 그러므로 청년의 자기 진술을 보면 시대의 양상을 더 잘 살필 수 있기에, 오늘의 시대도 청년의 반응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알다시피 오늘의 청년들은 자신들을 일컬어 삼포세대(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세대), ‘오포세대(삼포+취업+주택), ‘칠포세대(오포+인간관계+희망)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스펙을 보유한 세대입니다. 그렇게 전례 없는 능력을 점점 배가시킨 세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신을 부르는 방법이 획득이 아니라 포기입니다. 이러한 절망의 이력서가 그들을 집단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것이지요.

한데 그 연장선상에서 그들이 자기를 좀비라고 부른다는 점이 특히 주목할 만합니다. ‘좀비(zombie)라는 말의 어원은 부두교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는데, 오늘날 이 용어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괴물표상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 의미는 걸어 다니는 흉측한 시체(grotesque walking dead)를 가리키는데, 특히 인간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존재, 이성이나 지성을 갖고 있지 않고 오직 식욕만을 위해 허우적대며 움직이는 욕구의 존재입니다. 청년은 바로 이런 좀비처럼 서바이벌의 매뉴얼에 따라 허우적대며 가기만 하면 되는 존재입니다. 그 길 위엔 경쟁에서 밀린 무수한 동료들의 시신이 즐비하게 쓰러져 있는 길입니다. 마치 요즘 TV에서 수없이 방영되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가령 가수가 되고자 하는 이는, 노래 속에 삶의 깊이를 녹일 필요도 없고 동작 속에 영혼을 담을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뛰어난 대중음악의 기술을 습득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런 서바이벌의 과정에서 무수한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1950년대의 청년들은 스스로 괴물이 되어 버렸지만 그런 자신을 성찰할 여유가 없었던 듯 합니다. 또 괴물로 지목된 누군가를 저주했습니다. 1980~90년대 청년들은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된 자신을 돌아보면서, 내면의 괴물성을 성찰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찰은 실패한 듯 합니다. 그들은 괴물이 된 세상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렇다면 2천 년대의 청년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아직 첫째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괴물이 내면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괴물임을 토로합니다. 하여 많은 이들은 내면의 싸움조차 불필요한 존재로 자신을 규정짓습니다. 그것은 실제적 자신을 죽이는 행위로 나타나기도 하고, 자신의 몸을 혹은 정신을 저주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몸의 병증과 정신의 병증으로 표현되고 있지요.

마가복음공동체도 서바이벌의 터널 속에 있었던 듯합니다. 일종의 묵시록인 13장은 그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절절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한데 13장의 모든 구절 가운데 가장 고통스런 구문은 7절의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니다.”입니다. 견딜 수 없는 절망적 재앙이 대를 이어 끝없이 계속되고 있지만 묵시록의 끝은 아직 아니(우포, oupo)라는 것입니다.

우포라는 그리스어는 요한묵시록에도 두 번 등장합니다(17,1012). 종말의 때, 7개의 봉인이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처절한 재앙이 밀어닥칩니다. 마지막 봉인이 떼어지고 이제 끝인가 했더니 일곱 나팔이 차례로 울리며 더 혹독한 재앙이 몰려옵니다. 그리고 일곱 번째 나팔이 울린 뒤 다시 일곱 대접이 엎어지면서 차례로 더더욱 강렬한 재앙이 밀려옵니다. 그렇게 기나긴 종말의 터널을 지난 뒤인데도 아직 끝이 아닙니다. ‘거대한 음녀로 묘사된 큰 바빌로니아(mystērion BABYLŌN)가 멸망해야 하고, 거기에서 나온 7개의 나라와 10개의 나라가 아직다 멸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어 우포는 그렇게 참혹한 묵시록 중 가장 참혹한 표현입니다.

그 기나긴 과정의 서바이벌의 시간을 견뎌내는 것, 아니 이겨내는 것, 이것이 바로 마가공동체의 자기 고백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기가 괴물로 변하기도 하고, 그 괴물로 변한 자기를 저주하기도 하고, 나아가 실은 자기 자신이 괴물 자체였다는 것에 견딜 수 없이 힘들지라도, 그것으로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 것, 그것이 묵시록의 지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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