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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사건론과 민중신학의 예수역사학

해암신학연구소의 반연간지 [신학과교회] 18(2022 하반기)에 수록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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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론과 민중신학의 예수역사학

 

 

 

 

예수역사학, ‘사건 텍스트를 기각하다

 

근대 이후 예수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예수의 말에 초점을 둔 연구와 사건에 초점을 둔 연구로 양분된다. 아주 단순화해서 정리하면, 이 두 연구 경향은 복음서 형성사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적 자료로 간주된 두 텍스트, ‘예수어록(이하 Q)마가복음(이하 Mk) 중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따라 갈린다.

한데 19세기 말, 근대역사학이 재현의 위기를 겪으면서 Mk를 제1사료로 간주하는 예수역사학은 퇴조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1) 반면 Q를 중심으로 하는 역사적 연구는 상대적으로 큰 상처를 받지 않았다. 그것은 Q가 서사(narrative)가 결여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서사의 결핍은,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적 연구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시간공간’, ‘행위자라는 서사적 요소가 있어야 역사적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Q를 통해 역사적 논의가 가능했던 것은 근대역사학 이전부터 그리스도교가 추구해온 역사적 인식의 틀 때문이다. ‘보편사적 문제설정이 그것이다. 거대한 역사 전개의 원리가 압도적으로 중요하기에 시공간이나 행위자 같은 세세한 정보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교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제자 오로시우스(Orosius)가 발전시킨 구속사(Salvation history)를 통해 예수를 해석해 왔다. 여기서 중요한 역사의 거대원리는 피조물을 구원하려는 신의 의지. 그것을 해독하는 데 있어서 시공간과 행위자에 관한 물음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해서 근대역사학적 관점에서는 반칙에 가까운 이러한 예수역사학은 역사학의 재현 위기를 우회할 수 있었다.

이러한 보편사적 인식론에 기반을 둔 예수역사학 논의는 흥미로운 연구방법론적 대원칙을 개발해냈다. ‘비유사성의 원리(criteria of dissimilarity)가 그것이다. 이것은 복음서 텍스트들의 삶의 자리와 실제 예수(real Jesus)(2)의 삶의 자리가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해서 복음서의 삶의 자리를 반영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면 실재 예수를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한데 이렇게 비유사성의 원리를 통해 후대적 요소를 지우고 나니 남는 것은 서사적 요소가 사라지고 흐름을 파악할 수 없는 일부 단어나 문장, 혹은 문단 정도만 남았다. 이 점에서 1980년대 이후 북미 예수역사학에서 사회적으로 센세이셔널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예수세미나는 비유사성의 원리가 도달한 한계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물론 이 연구 프로젝트는 보편사로서의 구속사적 관점으로 예수역사학을 논하는 것에 반대했다. 오히려 이 프로젝트는 실재했던 예수의 모습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전제 아래에서 진행되었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많은 사료를 활용하게 되었고 그것을 해독하기 위해 유용한 간학문적인 이론들과 비교자료들을 연구자들이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

한데 과연 그런가. 예수세미나는 1983년에 시작되어서 십여 년에 걸친 장기 프로젝트를 마감하면서 두 권의 저작을 발간했다. 정전(Canon)의 네 복음서와 도마복음를 포함한 다섯 권의 복음서들을 네 가지 색으로 표기한 책이다. 1권은 예수 말텍스트를, 2권은 예수의 행적텍스트를 다루었다.(4) 빨간색은 예수가 했을 것이 거의 확실한 것을, 핑크색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진정성(authenticicy)이 더 높아 보이는 것을, 회색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진정성이 낮다고 판단되는 것을, 검은색은 예수와 무관한 것으로 확실시되는 것을 나타냈다. 이 세미나의 참여 인원은 최대 2백 명이 넘었지만, 네 가지 색으로 판별하는 일은 30~40명의 전문연구자들이 투표로 결정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업에서 빨간색으로 표기된 부분은 전체 텍스트에서 불과 1.6%, 핑크색 부분은 12.2%에 불과했다. 특히 서사가 중요한 문서인 Mk 전체에서는 단 한 문장(12,17)만이 붉은색으로 표기된 반면(0.5%),(5) 서사가 없는 텍스트 모음집인 Q도마복음은 훨씬 많은 부분이 붉은 색으로 표기되었다(18%, 21% 정도).(6) 이것은 최근의 전문적 예수역사학 연구자들이 실재 예수를 발견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을 때조차 서사적 요소가 없는 텍스트를 주로 역사적 진정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몇 안 되는 진정성 높은 텍스트들 내에 서사적 정보가 담겨 있지 않으니 그것으로 실재 예수를 해독하려면 텍스트 밖에서라도 역사적 정보들을 보완해내야 한다. 하여 최근의 학자들은 경제학적, 지리학적, 비교문예학적 사료들과 이론들을 활용하기도 했고, 통계학의 외삽법(extrapolation)을 논거로 하여 비교역사사회학적 사료를 예수시대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또 전근대 농경사회의 사회생태학적 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예수 시대와 복음서 시대 사이의 시공간적 거리가 크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사료들과 이론들은 그만큼 가까운 시공간적 차이를 해독할 만큼의 유의미한 논거를 제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예수 말에 치중했던 대부분의 예수역사학 분야 연구자들은 역사학적으로 성공 혹은 실패했다는 주장만을 반복할 뿐, 역사학의 재현 위기를 돌파할 만한 설득력 있는 새 패러다임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민중신학, 사건적 텍스트를 재소환하다

안병무의 예수역사학의 관점에서

 

이 점에서 민중신학은, 비록 정교한 분석을 내놓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패러다임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학적 개가를 이룩한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그것은, 주류 예수학계가 역사학적 유의미성을 기각시킨 사건 텍스트를 역사학의 영역으로 성공적으로 재소환한 것과 관련이 있다.

흥미롭게도 에드워드 샌더스(E.P. Sanders)는 기념비적인 예수연구서인 예수와 유대교(Jesus and Judaism)에서 예수의 역사성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8개의 사건적 텍스트를 제시하면서 복음서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진행한 바 있다.(7) 이데올로기적으로 보수적 성향의 학자가 연구방법론적으로는 더 발본적인 쇄신을 도모했다. 이 저작은 학계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안타깝게도 사건사(eventful history)라는 역사학 방법론의 관점에서 그의 책을 주목한 이는 거의 없었다. ‘예수의 역사성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텍스트라는 그의 단언을 예수학계의 많은 학자들이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철저히 문헌적 관점에서만 사건 텍스트를 읽고 있었기 때문에, 문헌 연구 방법을 통해서는 복음서 공동체와 실재 예수사이의 비유사성이라는 질곡에 도달한 예수역사학계의 문제의식을 해소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요컨대 샌더스는 사건 텍스트를 역사학의 분석 단위로 불러냄으로써, 맥락적 요소가 결여된 말 텍스트의 함정을 벗어나려 했다는 점에서 역사학의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어놓았지만, 문헌연구의 한계를 불식시키지 못함으로써 역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한편 주1)에서 소개한 베르너 켈버 등은 Mk를 구술복음서로 봄으로써 예수역사학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나아갈 출구를 제시하였다. 불트만도 문헌연구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구술을 주목했지만, 그는 Mk가 구술텍스트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Mk에서 추출해낸 보다 이전 단계의 구술 양식(oral forms)을 분석할 때도 구술성에 대한 고려 없이 문헌 텍스트를 다루듯이 분석했기에 역사학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적 비평학을 찾아내지 못했다. 반면 켈버 등은 Mk를 구술문학으로 보았고, 구술 텍스트가 문서보다 원사건과의 사회적 유사성(social similarity)이 더 강한 속성이 있다는 최근의 구술성 연구 성과에 기대어서 구술복음서인 Mk에서 역사의 예수를 읽는 비평학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건이란 시공간적 요소와 행위자의 요소를 담고 있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시간은 시계가 표시하는 시간처럼 균질적인 시각들의 흐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지나간 시각은 과거가 되고, 그것과 그 이후의 시각은 겹쳐지지 않는다는 이러한 시간 이해는 사건의 시간 개념의 극히 일부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권위주의 정권 아래 있던 시절 매년 4월과 5월의 시간에는 대학생들이 분신을 하고 가열찬 반정부 투쟁이 이어진다. 또 매년 11월만 되면 노동자가 분신을 하고 치열한 노동쟁의가 일어난다. 1960년과 1980년의 4월과 5, 그리고 1970년의 11월은 그런 정치적 시간의 기원이 되고, 그 기원적 시간의 정서는 이후 오랫동안 45월과 11월을 규정짓는 시간성이었다. 공간도 마찬가지로 원근법적 거리에 의해 규정되는 것만이 아니라 공간을 특성화하는 기억들이 연속되는 곳이다. 행위자 또한 그렇다. 사건이란 바로 이런 기억의 유사성과 반복성을 함축하는 맥락적 요소인 것이다. 하여 시공간과 행위자를 균질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읽는 텍스트 비평은 역사적 해석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바로 그런 한계를 켈버 등은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사건론을 편 안병무의 예수역사학에 주목하게 된다. 그의 예수 연구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사건의 전승모체(1984)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태초에 케리그마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건이 있었다!”(8) 이것은 그의 역사의 예수론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한 마디로 요약해주는 구문, 곧 그의 예수역사학의 아포리즘(aphorism)이다. 여기서 케리그마라는 용어 속에는 서사적 요소를 통한 구구절절한 일체의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여 모든 사건적 텍스트를 통한 역사적 물음을 기각하는 주류 예수학계의 신학적 태도가 함축되어 있다. 즉 신학적 어젠더로서의 케리그마라는 것은 예수역사학에서 서사를 제거해도 되는 신학적 알리바이 역할을 한다. ‘예수의 말만으로도 역사학적 연구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병무는 그런 반역사적인 신학적 도그마 이전에 사건이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케리그마의 신학적 의제를 전복시킨다.

이 아포리즘에서 말하고 있듯이 안병무의 예수역사학은 사건에 대한 문제설정에서부터 시작한다. 물론 안병무의 사건론이 주목하는 예수연구의 제1사료는 Mk. 그런데 베르너 켈버와 조안나 듀이처럼, 안병무도 Mk를 구술텍스트로 간주하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 하면 유언비어.(9) ‘유언비어(rumer)란 구술전승(oral tradition)의 일종으로, 기존의 담론의 장에서 위태로운 것으로 간주하는 소문을 말한다.(10) 해서 ()소문이 얼마나 체험의 진정성을 담아내고 있는가의 문제가 그것의 역사성 논의의 핵심이다. ‘구술이라는 표현이 다소 중립적인 늬앙스를 갖고 있다면, ‘유언비어는 질서의 관점에서 위태로운 것으로 간주되는 이야기를 의미한다. 아무튼 유언비어라고 하든 말든, 안병무와 켈버 등은 Mk를 구술문학이라고 보고 있다는 점에서 입장을 같이 한다.(11) 물론 그들은 서로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또 그들이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된 배경 또한 다르다. 켈버나 듀이는, 매체학자 마샬 맥루한(Herbert Marshall McLuhan)의 제자로 예수회 사제인 월터 옹(Walter Ong)의 구술성 논의에 영향을 받았다. 또한 그들은 맥루한과 옹의 영향을 받아 전개된 신민속학운동(neo-folklore movement)의 구술문학(oral literature)에 대한 연구를 알고 있었다.

반면 안병무의 구술성에 대한 착상은 광주민중항쟁 당시 구술전승이 갖는 담론의 힘을 체감하면서 시작된다. 안병무의 출발은 지성사가 아니라 대중의 정치적 기억에서다. 아마도 그는 맥루한이나 옹의 주장을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맥루한의 매체학 연구에 영향을 받아 저술된 유언비어론에 관한 글을 참고한 흔적이 있고,(12) 옹의 구술성과 문자성에 관한 매체학 이론을 몰랐던 것으로 보이지만 옹 이후의 구술성 논의를 예수역사학 연구에 적용한 게르트 타이쎈(Gerd Theißen)의 주장을 알고 있었다. 타이쎈은 Q에서 무소유와 유랑의 급진주의적 에토스를 간직하고 있는 텍스트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초기 예수운동사에서 유랑하는 카리스마적 예언자(Wander Chrismatiker)들이 있었다는 점을 추론해낸다.(13) 이것은 예수 말, 비록 서사적 정보를 결여하고 있음에도, 역사적 실재를 추론하는 데 유용한 정보라는 것을 뜻한다. 이런 분석은 이제까지 예수 말을 통해 역사학적 해석을 시도했던 어느 연구보다도 역사학적 개연성을 갖고 있다. 특히 예수 말의 역사성을 읽기 위해 텍스트 자체에는 결여된 서사적 요소를 텍스트 바깥에서 성공적으로 추론해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타이쎈은 이러한 논증을 위해 한 가지 요소를 더 고려한다. 만약 그것이 문서를 통한 것이라면, 삶의 자리, 특히 사회적 실천에 있어서 예수와 유사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것이 가능하다. 왜냐면 문자는 정보의 저장능력을 극대화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시공간적 맥락이 달라도, 또 청중의 삶이 그 문자의 정보와 굳이 부합하지 않아도, 그런 문서가 일단 기록되면, 그리고 그 문서의 주인공이 중요한 존재로 받아들여진다면 그에 관해 기록된 정보는 잘 전달될 수 있다. 반면 구술은 구술자가 전달하는 말의 내용과 구술자 자신의 삶이 부합할 때만 전승되는 매체다. 해서 타이쎈은 구술단계의 유랑하는 카리스마적 예언자 유형을 추론한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 점이 타이쎈의 가설이 갖는 함정이라는 데 있다. ‘말과 삶의 일치라는 구술성의 원리는 설화 텍스트를 연구한 결과로 도출된 것이다. 하여 신민속학운동 계열의 연구는 이야기꾼의 연행(performance)을 강조한다. 타이쎈도 유랑하는 카리스마적 예언자라는 이야기꾼을 주목했는데, 그는 연행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꾼이 이야기의 대상인 존재와의 삶의 자리, 특히 실천의 유사성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신민속학의 연행과는 다소 다른 함의를 갖는다. 여기서는 이야기꾼의 삶의 양식이 그들이 전한 존재의 삶의 양식과 반드시 부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이야기꾼이 전한 이야기 자체가 청중의 삶의 양식과 부합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 해서 구술성을 활용한 연구는 설화 같은 서사성을 갖는 텍스트여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조선의 구술문학인 춘향전처럼, 양반에 의해 서민 여성의 성이 유린되고 버려지는 일이 허다한 사회에서, 대중은 그런 현실을 공감할 때 춘향전이라는 구술 설화를 받아들인다. 또 거기에서 대중을 배신하지 않았던 양반도 있을 거라는, 그리고 그이가 유린당하는 서민의 고통을 해소시켜 준다는 메시아적 해피앤딩 스토리가 대중의 염원으로 공유되어야 그 설화가 대중 사이에서 유통되는 것이다. 이야기꾼이 그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연행하는 것에서 말과 삶의 일치라는 구술성의 원리가 도출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이 신민속학연구가 새로운 역사학적 탐색의 길을 열게 한 결정적인 이유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구술이 연행되는 현장의 사건과 그 구술 내용 속의 원사건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서 역사학자는 그 유사성의 역사사회적 함의를 읽어내는 작업을 할 수 있으며 원사건을 역사적으로 조명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한데 타이쎈은 서사적 요소가 없는 말이 구술성의 원리에 의해 전승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청중과 예수 사이의 기억이 공유되는 것에 관한 정보를 발견할 수 없다. 해서 그는 전달자와 전달 대상 간의 유사성만을 이야기했다. 그런 점에서 만약 이 주장이 설화 연구의 기반을 둔 해석적 타당성을 가지려면 타이쎈은 무소유와 유랑의 급진적 에토스가 담겨 있는 예수 말이 실제로는 어떤 서사의 일부였음을 입증해야 했을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안병무는, Q가 아니라, Mk 연구에 타이쎈의 가설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실패를 공유하지 않을 수 있다.

잠시 이제까지의 내용을 요약해보자. Mk는 예수 말 중심의 문서가 아니라 사건 중심의 문서다. ㄱ런데 사건 중심의 문서가 예수역사학에서 외면당했던 것은 그 문서 속의 서사적 요소들이 예수의 맥락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서공동체의 맥락을 이야기할 뿐이라는 것, 그리고 양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험한 강이 흐르고 있으며, 역사학은 그 강을 건너는 다리를 만들 수 없다는 것 때문이다. 해서 예수학계는 근대역사학의 논점으로 들어가지 않는 전략을 통해 그 강을 우회하는 길을 찾으려 했고, 그것은 예수 말을 주목하는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학일 수 없다. 하지만 불트만을 제외한 대부분의 예수역사학자들은 여전히 역사비평학으로 예수를 이야기한다고 주장했다. 한데 사건적 텍스트로 예수역사학을 전개하려는 시도가 1980년 어간에 다시 재개되었다. 특히 켈버 등과 안병무는 Mk를 문자문학이 아니라 구술문학으로 봄으로써, 역사학의 새로운 가능성의 길이 열렸다. 그것은 구술이 말과 삶의 유사성이라는 전승 원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역사비평학의 비유사성의 원리 대신 유사성의 원리가 중요하게 활용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사건이라는 말을 서사적 요소가 들어 있는 텍스트라는 점만을 가정하면서 이야기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샌더스나 켈버 등은 사건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사건 텍스트를 분석하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병무는 그들과는 달리 사건의 문제의식을 전면화하면서 그 개념을 좀더 철학적으로 사유한다.

안병무에게서 사건이라는 용어는 불트만에게서 영향받은 것이다. 불트만은 실재 예수라는 역사학적 본질주의에 빠져 있는 예수역사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차용한다. 하이데거는 시공간에 귀속된 현존재(Dasein)와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Sein)의 마주침을 통해서, 본질이 아니라, 실존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즉 실존은 타자와의 마주침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현존재와 존재는 고착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각자 끊임없이 운동한다. 그러면서 마주친다. 그것이 실존이다. 하여 실존은 사건적이다. 불트만은 이 실존사건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사건으로 재해석한다. 이렇게 역사내적 사건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와 초역사의 마주침이 일으키는 신앙사건은 역사적으로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역사의 예수는 단지 신학의 전제일 뿐이다.(14)

안병무도 불트만처럼, 본질주의적 이데아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타자와의 마주침을 통해서 실존하는 예수를 묻는다. 본질주의적 예수론을 역사학적을 번안하면 실재 예수. 말했듯이, 그 예수에 도달하기 위해 대부분의 예수역사학 연구자들은 텍스트에서 타자적 요소들을 지우는 역사적 실험을 필요로 했다. 안병무는 이러한 본질주의적 예수역사학을 주객이분법이라고 비판했다.(15) 이것은 (subject)(object)이 나뉜다는, 아니 이 해석에 미치는 영향사를 제거해야만 진정한 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다. 반면 실존주의적 문제의식에 따르면 주와 객, 자아와 타자는 분리할 수 없다. 그것은 아직 실존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아직 의미를 발현하지 않은 상태다. ‘과 마주쳐야만 의미가 발현된다. 즉 사건이 일어난다. 해서 존재가 된다. 특히 Mk, 안병무에 의하면, ‘’, 곧 타자성을 오클로스의 시각에서 읽는다.(16)

하여 안병무의 Mk 연구는 오클로스(οχλος)를 키워드로 해서 진행된다. 이 그리스 단어는 한글성서들에서는 무리로 번역되었고, 영어성서들은 대부분 ‘crowd’로 옮겼다. 필시 무정형의 대중을 가리키는 단어로 읽은 것이겠다. 한데 일본의 맑스주의 신학자 다가와 겐죠(田川建三)1966년에 출판된 박사학위논문에서, 2성서에 사용된 오클로스들은 대체로 그렇게 쓰였지만, Mk의 오클로스(17)는 예외적으로 무정형의 대중이 아니라 매우 강한 사회학적 함의를 가진 무리를 지칭하고 있다고 주장했다.(18) 안병무는 1975년 이후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한데 안병무도 다가와처럼 Mk의 오클로스가 특정한 사회학적 함의를 가진 대중이라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다가와는 Mk의 오클로스 용법을 문자문학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고, 해서 이 단어를 역사의 예수를 읽는 데 활용하지 않고 Mk 공동체의 신학을 해석하는 데 활용하고 있지만, 안병무는 오클로스라는 타자적 존재와 예수의 마주침을 예수사건으로 보면서 이것이 구술문학인 Mk에서 역사의 예수로 올라가는 실마리로 해석하고 있다.

1975, 안병무가 오클로스를 처음 사용한 글인 민족민중교회는 민중신학의 출범을 선언하는 글로 평가된다. 즉 이 글의 주제가 민중신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강력한 시사를 담고 있다는 얘기다. 이 글의 본론을 시작하는 첫 문장 우리 역사에서 민족은 있어도 민중은 없었다.”(19)는 바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 말의 배후에는 김지하가 있다.(20) 그의 민중론의 상대개념은 민족이다. 특히 불의한 권력이 민족을 유린하는 과정에서 민족에서 밀려난 이들과 외국인 같은 민족의 일원으로 편입되지 못한 이들을 민족의 일원으로 편입시키는 사회적, 정치적 개혁을 주장하는 저항적 민족주의에 대해 비판하면서, 민중은 민족주의적 운동에 동원되어 무수한 희생을 당했지만, 어떤 체제도 민중을 역사의 기념비에 기입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주로 옥중서신을 통해 제기된 청년 김지하의 논점을 받아서 안병무도 우리 민족사에 민중은 기입된 적이 없다는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특히 이 글에서는 Mk 해석을 끌어들임으로써 김지하의 민중론은 안병무의 민중신학으로 재탄생하였다. 바로 오클로스라는 단어가 Mk를 통해 역사의 예수를 읽는 키워드임을 주장한 것이다.

오클로스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밝혀내기 위해 안병무는 Mk에서 단 두 번 사용된 그리스 어휘 라오스(λαος)와 대비시킨다. 안병무는 이 단어를 오클로스와 비교하면서 오클로스의 정체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를 찾아내려 한다. Mk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 단어를 굳이 오클로스와 대조되는 대상으로 읽으려 했던 것은, Mk의 채록자(21)가 이 단어를 잘 알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채록자가 잘 아는 단어라는 근거는 이러하다. Mk는 이 단어를 제1성서의 인용문에서만 사용하고 있는데, 인용한 본문은 히브리성서의 그리어역본인 셉투아긴타에서 가져온 것이다. 한데 이 헬라어 성서본에서 라오스는 무려 1750회 정도나 나온다. 매우 높은 빈도로 사용되는 단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채록자는 이 단어의 사용을 피하고 있는 것일까. 바로 오클로스가 그의 구술문서의 청중이기 때문이다. 채록자는 청중의 예비검열을 받아 어휘나 내용을 선별하는 것이다. 오클로스가 라오스를 싫어한 이유는, 평소 그들이 라오스의 낙인찍기의 대상으로 내몰려 사회적 따돌림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자처럼 간주되었고, 간혹 존재감을 드러낸 오클로스는 잔혹한 처벌의 대상의 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오클로스적 구술문서인 Mk가 라오스를 굳이 명시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소극적 미러링인 셈이다. 폭력적 처벌 대신 기억의 처벌을 가한 것이다.

라오스는 누구일까. ‘셉투아긴타에서 이 단어는 백성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עם)의 번역어로 쓰였다.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백성에게 반포할 때 거기에 모인 백성을 지칭하고 있는 히브리어 콰할(קהל)과 비슷한 의미의 단어다. 라오스는 법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오클로스법 밖의 대중’, 곧 법의 바깥으로 내몰린 자들을 가리킨다. 민족의 기념비에 기입되지 못한 자를 민중이라고 말하는 김지하의 어법과 딱 들어맞는 개념이다.

안병무는 바로 이들의 시각에서 Mk를 읽는다. 거기에는 예수와 오클로스가 함께 벌인 사건들이 채록되어 있다. ‘그 사건들 속에서 예수는 나와 마주친다. 마주치면서 나와 갈등을 일으킨다. 왜냐면 내가 익히 상식으로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닌 존재로 예수가 나와 마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마주침 속에서 내가 예수를 향한 결단을 하고 신앙을 고백할 때, 예수는 나와 함께 신앙사건을 일으키는 이가 된다.’ 이것이 안병무의 예수론이다. 여기에는 예수와 Mk를 연결하는 사건이 있다. 그 사건 속에서 는 예수를 읽는다. 그리고 예수와 Mk는 오클로스적 기억의 계보 위에 서게 된다. 그렇게 읽는 예수를 역사학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역사의 예수다. 역사의 예수는 이런 기억의 계보를 통해서 해독되는 역사학적 존재인 것이다.

아래에서는 민중신학의 사건사적 관점으로 Mk의 텍스트 분석을 시도해보려 한다. 특히 사건 텍스트 간의 연결고리로 사용된 구절들을 살펴보려 한다. 이것들은 주류 예수학계에서 역사비평학을 수행할 때 제일 먼저 지우는 구절들이었다. 하지만 사건사적 해석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 안병무는 그중 한 구절을 통해 역사적 해석을 시도한 바 있는데, 아래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이 시도는 성공적인 해석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건사는 사건1’, ‘사건2’, ‘사건3’ ...... 이라는 미시적인 사건 텍스트들을 1차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한데 그것들이 연결되어 보다 큰 사건 텍스트가 될 때 그것 또한 역사적 분석의 대상이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사건과 사건을 연결되는 요인에 대해 역사적 필연성을 강조하는 시각과 우발성을 강조하는 시각이 있다. 전자는 현대적인 보편사적 이론들이 개입해 들어온다. 가령 테다 스코치폴(Theda Skocpol)은 프랑스, 러시아, 중국의 사회혁명 간의 차이를 구조적인 거시적 요인으로 국가의 성격을 제시한 바 있다.(22) 타이쎈도 예수와 그를 추종한 제자들의 자발적 떠돌이생활에 대한 연구에서 사회적인 뿌림뽑힘(social rootlessness)이라는 거시적 현상을 결정적인 구조적 요인으로 가정하며 논지를 펴고 있다.(23) 한데 그러한 거시적인 구조적 요인이 강조되면 자발적 유랑과 비자발적 유랑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는 인과적 주장만 가능하다. 당연히 이런 주장은 현상을 너무 단순화하는 문제가 있다.(24) 특히 구조적 요인들과 상충하거나 최소한 인과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 요소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질문도 제기하지 않는다.

반면 우발성을 강조하는 시각은 사건 텍스트에 대해 보다 미시적이고 충실히 질문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특히 사건과 사건 사이의 전개를 다룰 때 의도하지 않은 결과(unintended consequences)도 고려되고 이른바 정치공학적 선택도 다루게 된다. 그런 분석을 우발성 분석이라고 한다.

아래에서는 Mk의 사건과 사건을 매개하는 연결구절에 대한 우발성 분석을 통해 예수운동의 역사성을 조명하는 시도를 하고자 한다.

 

사건들 사이의 시공간적 연결부에서 역사적 흔적을 찾다

 

오클로스 관점에서 구술된 사건 텍스트들은 Mk의 갈릴래아 활동에 관련된 이야기들로 보존되어 있다. 대략 1~9장이 그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사건 텍스트들을 연결짓는 두 개의 시공간적 구절이 나온다. 이제까지 예수역사학계에서 역사적 진정성이 없는 대표적인 것으로 간주해서 역사학적 해석에서 버려졌던 구절들이다. 1,143,6~7이 그것이다.

 

(1) Mk 1,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1,14)

 

사건 텍스트들을 연결하는 이 구절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안병무의 선행작업이 있다.(25) 그는 요한의 처형과 이스라엘의 반로마항쟁의 좌절, 이 두 사건이 시기를 달리하는 오클로스의 기억 속에서 겹쳐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구절이 역사적이라고 가정한다. 요한의 처형은 추정컨대 서기 20년대 말 혹은 30년대 초쯤이었다. 요한을 처형한 이는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방의 통치자인 안티파스에 의한 것인데, 오클로스는 안티파스를 유사로마인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Mk는 서기 70년경에 형성된, 갈릴래아계 그리스도파 공동체의 문서로, 이 공동체 구성원들인 오클로스들은 반로마항쟁의 좌절을 로마에 의한 이스라엘의 처형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시기를 달리하는 오클로스의 기억 속에서 이 두 사건은 겹쳐져 있는다는 것이 안병무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러한 유사성의 원리를 적용하여 Mk의 서사적 요소를 예수의 역사성 해석의 근거로 활용할 수 있었다. 이것은 요한이 처형된 이후 그의 추종자였던 예수가 갈릴래아로 갔다는 구절이 Mk의 오클로스에게는 반로마항쟁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고 예수의 투쟁을 이어간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한데 이러한 오클로스론에 기반을 두고 Mk의 신학을 분석하겠다고 한 민중신학마가복음을 중심으로는 매우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이스라엘사회를 해석하고 로마에 적대적인 민족적 감정을 오클로스도 공유했다는 주장을 편다. 해서 1,14의 역사성을 다루는 단락에서도, 위에서 정리한 것처럼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반로마항쟁을 벌인 이스라엘의 죽음을 연계시킨다.

고대지중해 사회의 위험한 군중에 대해 연구한 저스틴 욘 슈와브(Justin Jon Schwab)에 의하면 고대문헌들에 등장하는 오클로스의 가장 특징적인 함의는 제멋대로 뭉친 근본 없는 자들(an unruly, unauthorized gathering of people)이었다.(26) 여기서 근본 없는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이 민족적 정체성도, 게급적 자의식도 결여된 자들이라는 의미다. 고대아테네의 시인 에우리피데스(Euripides)는 오클로스라는 단어를 예외적으로 자주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아테네식 민주주의가 쇠퇴일로에 있던 필로폰네소스 전쟁의 와중에서 애국심도 계층적 동료애도 없이, 폭력을 일삼는 자들이 정치적으로 세력화되는 것에 우려를 표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27) 이런 현상에 대해 좀더 심도 깊은 분석을 시도한 니콜라스 라우 등은 해상무역과 전쟁이 활발해지는 로마공화정 말기에 오면 바다의 오클로스(οχλος ναυτικος)라는 표현이 종종 나오는데, 고린도나 카르타고, 알렉산드리아 같은 국제적 해양도시들로 떠밀려온 수많은 노예와 난민, 몰락한 소시민 등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한데 종종 그들이 그 사회의 전통적 질서에 포섭되지 않은 채 사회의 무질서와 폭력을 심화시키는 자들로 나타나곤 했다는 견해를 편다.(28) 주류지식인들은 평소엔 이런 이들을 거의 주목하지 않았고 언급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런 자들이 문화적 주체가 되고 정치적 세력으로 전화되었을 땐 매우 부정적인 기조로 그들에 대해 비평을 가했다. 바로 이런 비판의 맥락에서 오클로스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즉 문서 속의 오클로스는 대개 그들이 자신들을 배제하는 질서에 순응하는 노예적 주체로 살지 않을 때 나타난다.

이렇게 고대 지중해 사회의 오클로스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은 Mk의 용레를 통해 추론한 안병무의 오클로스 분석과 잘 부합한다. 한데, 자신의 오클로스론에 기초해서 Mk의 신학을 이야기하려 했던 글에서는 뜻밖에도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오클로스를 해석하려 했다. 해서 1,14에 대한 정치적 함의를 보다 타당성 있게 해석하는 데 이 글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요한이 죽임당한 뒤 갈릴래아로 전략거점을 옮긴 예수의 행동은 예수의 죽음 이후 다시 갈릴래아로 간 일단의 그리스도파 공동체의 자기 서사와 더 부합한다. Mk 16,1~8, 죽임당한 예수가 안장된 동굴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건을 묘사하면서 한 청년의 입을 통해서 그이가 갈릴래아에 먼저 갔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이렇게 갈릴래아는 부활한 요한의 장소이자 부활한 예수의 장소다. 그런 점에서 Mk가 주장하는 예수운동은 반로마항쟁을 벌여서 이스라엘을 새로운 다윗이 통치하는 자주적 민족국가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 엘리트들의 생각이지, ‘제멋대로 뭉친 근본 없는 자들인 오클로스가 꿈꾸는 하느님나라가 아닌 것이다. Mk가 전하는 예수는 병자를 치유하고 죄인으로 낙인찍힌 자를 사면하며 근본없는 자들과 함께 밥상을 나누는 존재로 나온다. 바리사이의 눈에는 무법자 같은 자들인데 예수에게는 한없이 공감되는 자들인 것이다. 민중신학이 당파적으로 환대하는 민중은 이렇게, 주류의 질서체계에 도덕적으로 적응한 이들만이 아니라 무법자로 낙인찍힌 그로테스크한 민중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 더, 요한의 장소인 베레아 지방의 요르단 강가에서 갈릴래아로의 거점 이동은 하느님나라 운동 양식의 전환을 의미하기도 했다.(29) 요한의 운동은 사람들을 자신의 장소로 불러 모았고 그들에게 죄사함의 세례를 베풀었다. 한데 갈릴래아에서 예수는 대중의 공간인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즉 요한의 운동이 대중을 일상의 바깥으로 소환하는 것이라면 예수의 운동은 일상 안에서 벌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해서 요한의 운동이 성전체제 비판 같은, 거대담론 일변도의 운동이라면, 예수의 운동은 안식일 정결례 같은 일상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문제와 대면하는 운동으로 전환되었다.(30) 하여 전자는 이스라엘 민족주의적 성격이 보다 강한 운동이고, 후자는 배제와 편견으로 괴로움 당하는 오클로스의 일상적 해방에서 시작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전환은 의도한 것이라기보다는 장소이동이 낳은 의도치 않은 성찰의 결과일 수 있다. 아래 내용은 그것을 보충한다.

1,14 이전의 사건 텍스트를 보면, 세 가지 역사적 정보가 담겨 있다. (a)요한은 다시 올 예언자로 갈망의 대상이 된 엘리야의 분신처럼 행동하면서 세례를 베풀고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했다. (b)갈릴래아 나자렛의 예수가 이곳으로 와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c)예수는 그곳 광야에서 수련을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b)(c). 즉 예수가 요한의 추종자로 그에게 세례를 받은 뒤,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 다수의 대중과는 달리 그곳에 남아서 추종자의 다음 단계에 진입했다. 광야의 수행이 그것이다. 이는 예수가 요한이 주도한 운동의 내적 집단(inner circle)의 일원으로 가입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데 이것은 예수가 요한과 매우 연속성이 강한 예언운동가였음을 의미한다.(31) 한데 요한이 당국에 체포되고 처형되는 불의의 사건으로 인해서 일단의 요한운동의 활동가들은 그곳을 피해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예수도 그중의 하나다. 그는 아마도 요한의 추종자로 함께 수련했던 다른 동료들이 있던 가버나움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변경(frontier zone)에 위치한 마을일 뿐 아니라 복잡한 가옥구조 덕에 은신에 유리한 곳이다.(32) 그리고 이곳을 거점 삼아 조심스레 활동을 재개했다. ‘가버나움어느 마을가버나움’, 이런 패턴이 갈릴래아 활동기 전반부의 특징적인 방식이다. 한데 이런 방식은, 위에서 보았듯이, 요한의 방식이 아니다. 운동의 형식과 내용이 바뀌었다. 그렇다면 사건1’에서 사건2’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1,14은 필연적인 전개라고 할 수 없다. 여기에는 우연이 개입한다. 이 우연성이 예수운동에서 보다 깊고 보다 근원적인 권력과의 투쟁으로의 심화확대라는 창의적 전환을 낳았다. 1,14의 역사적 흔적을 통해 우리가 사유할 수 있는 역사적 예수의 가능성, 그중의 하나는 바로 이러했다.

 

(2) Mk 3.63,7

(3,6)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3,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닷가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많은 사람이 따라왔다.

 

여기서 시공간적 요소란 3,6에선 회당이었고, 3,7에선 (갈릴래아) 호숫가. 그리고 예수 주위의 행위자적 요소는 3,6에선 바리사이들과 헤롯 당원들이고, 3,7에선 많은 사람들이다. 3,6이 포함된 단락에는 갈릴래아의 촌읍에서 예수가 대중을 만나서 하느님나라를 가르치고 병자를 치유하는 활동들이 한 회당에서의 이야기로 압축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회당은 도시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촌읍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말했듯이 갈릴래아는 안티파스의 영토였다. 하지만 당시의 통치자들은 촌읍까지 직접 관리하기는 어려웠다. 촌읍까지 왕에게 절대충성하는 관료를 파견하려면 군주는 훨씬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관료를 양성하는 시스템이 작동해야 하고 토호나 촌락이 군주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충성하게 하는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정착되어야 했다. 그러려면 타국가에 대해 배타적인 국가종교가 잘 작동해야 하는데, 당시 팔레스티나는 국가의 경계와 종교의 경계가 일치하지 않았다. 이런 것들이 여의치 않았기에 군주가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은 압도적 군사력이었다. 그 정도의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당시 군주가 할 수 있는 통치의 최대치였다. 해서 군주는 관리들을 파견하는 대신 군주에게 공납물을 정상적으로 바치는 한 촌락의 자치를 존중했다.

한편 촌락은 군주처럼 군사력으로 질서가 유지되는 공간이 아니다. 여기서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관습이 중요했다. 팔레스티나의 경우 동서남북 사방에서 밀려오는 제국의 군대에 무수한 촌락들이 사라지다시피 했다. 그 시간이 지나고 다소 안정기에 들어서는 시간이 왔을 때 촌락을 이끄는 이들은 관습법을 성전 사제들의 규범인 율법과 연계시켜서 일종의 생활율법운동을 일으킨 신흥중간층의 인사들이었다. 아직 잘 정의된 이름을 갖지 못했던 시기에 그들을 지칭하는 용어는 다양했다. 마스킬림(מַשְׂכִּיל, 다니엘서 11,33: 지혜 있는 지도자들), 하시딤, 바리사이 등이 그런 이들로 보인다. 그들은 도시에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조상의 얼이 서려 있는 시골마을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시간이 흐르면서 바리사이라는 이름이 그런 이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던 것 같다.(33) 그들은 회당을 거점으로 해서 촌락의 질서를 관장하는 자들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Mk에 나오는 촌락의 바리사이가 그런 이들이다. 물론 도시의 바리사이도 있었다. 아마도 바리사이들의 정신적 지도자들은 도시에서 활동했을 것이다. 한데 Mk는 그들을 바리사이가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τινες των ελθοντες απο εροσολυμων)라고 부르고 있다.(34)

해서 안티파스 당국은 촌락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구구절절 알 수 없었다. 요한을 체포하고 처형한 안티파스 당국은 분명 요한의 잔당을 색출하려고 눈알을 번뜩이고 있었겠지만, 촌락 안으로 들어가 활동하는 예수의 행보를 직접 알아낼 길은 없었다.

그런데 촌락 안 회당에서 예수는 바리사이들과 관습법의 해석을 두고 갈등을 벌였다. 안식일 거룩하게 지키는 것에 대하여, 죄인 같은 불결한 자들과 접촉하는 것에 대하여, 바리사이가 보기에 그다지 신실하지 않은 자들의 병을 고쳐주고 죄사함을 선포하는 것에 대하여.

갈등은 점점 깊어갔다. 그 사이 예수의 소문은 널리 퍼져나갔다. 당시 사람들이 존경해 마지 않았던 광야의 예언자 요한이 부활한 이가 그이라는 유언비어가 확산되자, 바리사이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예수가 눈에 가시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바리사이의 반응을 한글새번역성서는 이렇게 옮기고 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Mk 3,6) 헤롯당원이라고 번역된 어구는 헤롯에 속한 자들(των ρωδιανων)이라는 어구를 옮긴 것이다. ‘나치당원같은 이데올로기적 추종자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시골 곳곳에 설치된 헤롯의 요새들에 주둔하고 있던 헤롯의 군대쯤으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모의하기 시작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쉼불리온 에디둔(συμβουλιον εδιδουν)을 번역한 것이다. Mk 15,1에는 대제사장이 체포한 예수를 대제사장들이 장로들과 율법학자들로 구성된 회의를 통해 빌라도에게 넘겼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때 회의’, 곧 산헤드린 의회 회의를 가리키는 단어가 쉼블리온이다. 하지만 3,6에는 그런 제도화된 상설회의가 아니라 공조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군주와 촌락은 각자 독자적인 권력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었기에, 보고한다거나 제보한다거나 하는 식의 위계적 관계의 양상이라기보다는 두 권력이 공조하여 예수를 적대하기로 했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겠다.

그 구절 바로 다음에 예수의 시공간과 행위자 요소가 바뀐다. 예수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갔다. 이것은 회당이 없는 곳, 바리사이가 통제하지 않는 공간을 뜻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많은 사람(πολυ πληθος)이 있었다. 이들은 촌락의 바리사이나 그들에 의해 통제되는 마을사람이 아니라, 거기에서 배제된 사람들, 그 율법 밖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3,9에는 그들을 무리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 번역어의 그리스어가 바로 오클로스. 이 어휘는 Mk에서 이런 자들, 마을공동체의 질서 밖으로 내몰린 자들을 가리킨다.

예수가 호숫가로 밀려나간 것은 촌락의 지배자들인 바리사이와 갈등을 일으켜서 그들이 안티파스 당국과 함께 반예수전선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촌락은 안티파스의 공권력으로부터 안전한 장소가 아니다. 해서 예수는 이 구절 이후에는 촌락에서 활동하지 않는다. Mk에 의하면 유일한 예외가 고향인 나자렛의 회당이다. 촌락을 벗어나서 예수가 간 곳은 호숫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국경지대인 갈릴래아 호수 언저리 공터였다.

이때 예수 주위에 새로운 대중이 모였다. Mk는 그들을 오클로스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들이 촌락 안에서 활동하는 대목에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단 한번뿐이다.(Mk 2,4) 그것도 회당 안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즉 그들은 마을 안에서는 잘 보이지 않으며 회당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이다. 반면 그들이 주로 나오는 대목은 촌락 바깥이다. 율법이 포용하지 않는 자들의 공간에서 말이다.

해서 3,6을 기점으로 주요 대중이 달라졌다는 것은 유의미한 정보다. 촌락, 특히 회당은 이스라엘 사회의 정상 vs 비정상의 이분법이 작동하는 공간이다. 정상의 바깥으로 내몰린 자들, 그들은 무수한 질병에 걸려 있었고,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자들이었으며 늘상 굶주림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해서 이 시기 예수 활동의 핵심은 그들을 치유하고 식사를 베풀며 축복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많은 사건들 중 그런 이야기들이 살아남아서 전승되었다. 대중은 그런 이야기를 특별히 기억했다. 해서 Mk에서 살아남은 전해진 예수의 이야기들은 주로 오클로스가 기억한 예수이야기다. 해서 Mk의 사건 텍스트는 예수와 오클로스가 함께 벌인 사건 텍스트인 셈이다.

 

글을 맺으며

 

사건사는 이렇게 사건텍스트들과 그것들의 엮임을 통해 역사성을 해독하는 작업이다. 구술 텍스트를 역사학적으로 해석하는 데 사건사적 관점은 역사적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하여 사건 텍스트에서 주와 객, 예수와 주변의 대중, 그리고 적대하는 자들을 지우는 일은 역사적 해석의 가능성을 지우는 것이다. Mk의 텍스트들 속에는 예수와 오클로스가 함께 벌인 사건이 들어 있다. 오클로스들의 예수 기억은 후대에 다른 오클로스에게 전승되었다. 그리고 한 오클로스 공동체에서 그 기억이 채록되었다. 예수의 관한 구술문학 Mk는 이렇게 탄생했다. 하여 구술의 말과 삶의 일치라는 전승의 톡성은 사건사를 통해 역사를 읽어내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하나 더, 사건사적 역사 해석은 기억의 겹침 현상을 포함함으로써 역사적 담론이 된다. 즉 오늘 여기서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들여다보는 이는 과거를 바라보고 있지만 현재라는 사회역사적 공간에 발을 딛고 있다. 또한 그는 어떤 식으로든 현재의 질곡을 넘어서고자 미래를 꿈꾸며 서 있다. 여기서 사건의 역사성 속에는 역사적 연구의 대상과 역사적 사료, 그리고 사료를 통해 역사적 대상을 읽는 역사가 사이의 시공간 겹침 현상이 일어난다. 에드워드 카는 이것을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만남이라고 표현했다. 해서 우리의 역사의 예수는 오늘 우리의 신앙의 예수이기도 하다. 민중신학은 그것을 오클로스의 눈으로 읽는 신앙고백의 담론이다.

 

 

주제어 / 구술(전승), 민중신학, 사건, 사건사, 실제 예수, 예수역사학, 오클로스

Key Wards / oral, minjung theology, event, eventful history, real Jesus, history of Jesus, ochlos

 

 

개요

이제까지 예수역사학은 예수어록(Q)을 제1사료로 하는 연구와 마가복음(Mk)를 제1사료로 하는 연구로 양분되어 왔다. 이 연구들은 각각 예수 말예수 사건에 초점을 두면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이후 근대역사학의 재현의 위기로 Mk는 사료로서의 위상이 심각하게 추락하였다. 그 결과 Mk 중심의 연구는 쇠락했고, Q 중심의 역사적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서사적 요소(시공간과 행위자적 정보 등)가 결여된 Q를 통한 연구는, 엄밀히 말하면, 역사적 해석이 불가능하다. 이런 난제 때문에 예수 말중심의 연구는 구속사라는 보편사적 관점으로 진행되곤 했다.

한데 1980년 어간부터 Mk를 구술문학으로 보는 주장들이 여기저기서 제기되었다. 이것은 사건 텍스트 속의 서사적 요소들의 역사적 해석의 방법론적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중 민중신학의 사건론은 가장 주목할 만한 역사학적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민중신학은 문제제기 이상의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이 글에서는 최근의 역사사회학의 사건사적 방법을 활용해서 Mk를 통한 예수역사학적 해석을 시도하려 한다. 특히 Mk의 사건 텍스트들을 매개하는 두 개의 연결구인 1,143,67에서 예수역사학적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Abstract

The history of Jesus has thus far been divided between studies based on the sayings of Jesus (Q) and the Gospel of Mark (Mk). These studies focused on the "words of Jesus" and the "events of Jesus," respectively. Since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Mk's status as a historical source has deteriorated significantly, owing to the crisis of representation in modern history. As a result, Mk-centered research declined, and Q-centered historical research became the norm. However, if the investigation is limited to Q, a historical interpretation is impossible because it lacks narrative aspects such as time, space, and agent. Due to this difficulty, studies based on the words of Jesus were frequently performed from the perspective of the "universal" history of redemption. Since 1980, scholars have seen Mk as oral literature, which has enabled them to examine the narrative aspects of the text through historical interpretation. While the event theory of Minjung theology demonstrates the most remarkable potential among them, Minjung Theology has not accomplished much beyond presenting a possibility thus far. This paper uses the theory of eventful history in historical sociology to understand Mark's account of historical Jesus. I highlight, in particular, the historical interpretation of Jesus in Mark 1,14 and 3,6-7 as connecting phrases that mediate Mk's event texts.

 

 

[후주]

(1) Mk를 통한 역사적 연구는 19세기 말 사실상 파산상태에 이른 뒤 베르너 켈버(Werner Kerber)가 이 문서를 구술문학의 관점에서 다루게 되는 1979년 이후에나 제한적으로나마 재가동되었다. 이것은 마샬 맥루한의 영향을 받은 매체학, 민속학, 인류학에서 일어난 새로운 연구 경향이 성서 연구에 활용됨으로써 일어난 현상이다. 켈버 외에, 조안나 듀이(Joanna Dewey), 폴 악테마이어(Paul Achtemeier) 등이 Mk를 구술문학의 관점으로 해석했다. L. W. Hurtado, “Greco-Roman Textuality and the Gospel of Mark: A Critical Assessment of Werner Kelber's The Oral and the Written Gospel”, Bulletin for Biblical Research vol. 7(1997), pp. 91~106; Werner Kerber, The Oral and the Written Gospel: The Hermeneutics of Speaking and Writing in the Synoptic Tradition, Mark, Paul, and Q (Indiana University Press, 1997); Joanna Dewey, “Oral Methods of Structuring Narrative in Mark”, Int. 43/1(1989), pp. 32~44; Paul J. Achtemeier, “Mark as Interpreter of the Jesus Traditions”, Int. 32/4(1978), pp. 339~352 참조.

(2) ‘실제 예수’(real Jesus)라는 표현은 루크 티모시 존슨(Luke Timothy Johnson)이 예수세미나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비판하면서 사용한 용어지만, 많은 예수연구자들은 실증주의적 역사의 예수 연구가 목표로 하는 예수를 지칭하는 데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말했듯이 이런 연구는 19세기 말 이후 헤어나올 수 없는 한계에 봉착했다. 이 문제를 돌파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거치면서 20세기 역사학은, 에드워드 카(Edward H. Carr)가 제기한 명제처럼 역사는 (과거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새로운 문제설정을 도입하게 된다. 한데 성서역사학, 특히 예수역사학은 아직까지도 실재 예수의 복원에 집착하고 있다. 티모시 존슨은 역사학을 통한 실재 예수를 발견하려는 것에 반대하지만, 그 역시 연구의 목표를 실재 예수에 두고 있다. 이러한 예수역사학계의 집착은 오늘의 역사학적 관점에서는 시대착오적 논쟁에 지나지 않다. 루크 티모디 존슨, “예수의 인간성역사적 예수 연구 무엇이 위기인가”, 신학사상133(2006 여름), 8~49.

(3) 로버트 펑크, 김준우 옮김, 예수에게 솔직히(한국기독교연구소, 1999), 99~128쪽 참조.

(4) The Jesus Seminar, The Five Gospels: What Did Jesus Really Say?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Words of Jesus (Macmillan, 1993); , The Acts of Jesus: What Did Jesus Really Do? (HarperSanFrancisco, 1998)

(5)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이 구문만이 역사적 진정성이 있다고 결정한 학자들은 여기서도 예외없이 서사적 정보를 제거하였다.

(6) 송봉모, “예수세미나(The Jesus Seminar)의 역사적 예수 탐구와 이에 대한 비판”, 신학과 철학(2002)(in https://theoinst.sogang.ac.kr/theoinst/journal/journal_4/4-1.pdf)

(7) E.P. 샌더스, 예수운동과 하나님나라유대교와의 갈등과 예수의 복음(한국신학연구소, 1997), 14~31. 한편 성서학계에서는 사건’(event)보다는 행위’(acts)라는 표현에 더 익숙하다. 샌더스도 8개의 텍스트를 행위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하지만 복음서에서 말 텍스트, 위에서 말했듯이, 서사적 요소가 결여된 것을 지칭하는 반면, ‘행위 텍스트는 서사적인 것을 가리켰다는 점에서, ‘행위라는 단어는 그 의미를 살리는 데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이 점에서 역사학계에서 최근 부상하고 있는 사건사’(eventful history)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복음서의 예수의 행위 텍스트 같이 서사적 요소가 있는 미시적 사료를 해석의 기본 범주로 삼아 역사적 해석을 도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예수역사학의 분석 단위로서의 행위 텍스트라는 표현보다는 사건 텍스트라는 용어가 학문적 용어로 적절해 보인다. ‘사건사에 대하여는 김동노, “거시이론에서 사건사로, 그리고 다시 거시이론으로역사사회학의 연구 경향과 새로운 길의 탐색”, 사회와 역사100(2013), 73~102; 채오병, “사건사의 인식론과 방법론”, 사회와 역사83(2009), 157~185쪽을 참조하라.

(8) 안병무, “예수사건의 전승모체”, 김진호김영석 엮음, 21세기 민중신학(삼인, 2013), 61.

(9) “예수사건의 전승모체”, 70.

(10) 니콜라스 디폰조, 곽윤정 옮김, 루머사회. 솔깃해서 위태로운 소문의 심리학(흐름출판, 2012) 참조.

(11) 반면 대부분의 예수연구자들은 Mk를 문자성의 시각에서 해석하고 있고, 그것의 구술적 요소를 주목했던 불트만조차 그런 인식의 한게를 벗어나지 못했다

(12) 같은 글, 70.

(13) G. 타이센, 원시그리스도교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대한기독교서회, 1986)에 수록된 그의 논문들 종교적 전승들에 대한 사회학적 평가원시그리스도교의 예에서 살펴본 그 방법론과 문제들원시 그리스도교의 예수 말씀 전승에 관한 문학사회학적 고찰”.

(14) 역사학적 탐구 실패 이후 그의 실존주의적 신학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약성서신학의 첫 문장 예수의 선포는 신약신학의 전제이지 신약신학의 일부가 아니다.”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불트만, 허혁 옮김, 신약성서신학(성광문화사, 1965), 1쪽의 문장을 조금 다듬어 인용했다.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Die Verkündigung Jesu gehört zu den Voraussetzungen der Theologie des. NT und ist nicht ein Teil dieser selbst.”

(15) 안병무, “민중신학마가복음을 중심으로”, 21세기 민중신학, 135~137.

(16) 안병무, “예수와 민중마가복음을 중심으로”, 같은 책, 92~115.

(17) 2성서에서 오클로스는 175회 사용되었는데, 이중 38회는 Mk에서 나온다.

(18) “Miracles et Evangile, la Pensée personelle de l'évangéliste Marc”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66). 이 논문을 조금 다듬어 출간된 책이 原始キリスト教史一断面 福音書文学成立(勁草書房, 1968)인데, 이것이 김명식에 의해 번역되어 한글로 출간된 책 마가복음과 민중해방원시 그리스도교 연구(사계절, 1983)의 원본이다.

(19) 민족민중교회”, 21세기 민중신학, 160.

(20) 김지하의 민중론에 관해서는 안지영, “김지하의 역사의식과 '민중'의 의미 양상”, 한국학연구47(2017.11) 참고.

(21) 문자문학의 기록한 이를 저자’(author)라고 하고, 구술문학을 기록한 이를 채록자’(採錄者, recorder)라고 부른다.

(22) 테다 스코치폴, 국가와 사회혁명: 혁명의 비교연구(까치, 1982) 참조.

(23) 타이센, “‘우리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마가 10,28)AD 1세기 유대-팔레스틴 사회에서의 예수를 따르는 것과 사회적 무근성”, 원시그리스도교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 134~171.

(24) 에드워드 샌더스는 이런 유의 주장은 역사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시대 이스라엘은 사회경제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고 나날이 악화일로에 있다는 가정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시대의 사람들 모두가 그런 위기를 공유하고 있다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사료적 근거도 역사적 개연성도 부실한 이런 주장은 다분히 이데올로기적 역사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E.P. Sanders, “예수의 역사적 배경에 관한 논쟁”, 시대와 민중신학3(1996), 219~220.

(25) 안병무, “민중신학마가복음을 중심으로”, 128~130.

(26) Justin Jon Schwab, “The Birth of the Mob: Representations of Crowds”(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2011년 박사학위논문)

(27) 같은 논문, p. 68.

(28) Nicholas K. Rauh, Matthew J. Dillon and T. Davina McClain, “Ochlos Nautikos : Leisure Culture and Underclass Discontent in the Roman Maritime World”, The Maritime World of Ancient Rome, Vol. 6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008), pp. 197~242

(29) 이하의 내용은 나의 글 요한이 잡힌 뒤, 갈릴래아 촌락에서'일상권력'과의 충돌”, ᄆᆞᆷ울림(2021.12)에 의존하고 있다.

(30) Mk 10,1 이후 예수의 활동은 예루살렘이 중심이 된다. 그리고 이 대목 이후부터 오클로스는 담론의 흐름을 주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부정적 늬앙스로 등장한다(예수를 체포하러 온 오클로스,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친 오클로스 등). 아마도 그것은 예루살렘의 예수 이야기 형성에 오클로스가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할 것이다.

(31) 이것에 대해서는 나의 글 또 한 명의 광야 수행자, 같거나 다른”, 공동선(2020.05+06)을 참조.

(32) Matthew J. Grey, “Simon Peter in Capernaum: An Archeological Survey of the Fisrst-Century Village”(in https://rsc.byu.edu/ministry-peter-chief-apostle/simon-peter-capernaum-archaeological-survey-first-century-village)

(33) 바울의 서신들을 보면 바리사이의 용법이 다르다. 바울은 유다계 원리주의자들을 바리사이라고 부르고 있다. 한편 두 번에 걸친 반로마항쟁을 겪으면서 팔레스티나의 유다계 공동체를 종교적 율법적 규범체제가 등장한다.제이콥 노이스너가 형성기의 유대교라고 불렀던 이 현상은 또 다른 바리사이를 주체화시켰다.

(34) 다른 복음서들에는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Mt 15,1; Lk 5,17)라는 표현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