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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포스트세계화 시대, 공안정치와 살림정치 - 민중신학적 비평

한국민중신학회와 한신대교역협력센터가 주관한 <평화를 위한 민중신학 포럼 1 - 민중신학으로 본 국가보안법>(2023/04.17 / 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발제한 원고.

발제1_ 국가보안법에 관한 인권신학적 비판 (발제자_최형묵 / 논평자_김민아)
발제2_ 포스트세계화 시대, 공안정치와 살림정치 - 민중신학적 비평 (발제자_김진호 / 논평자_송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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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세계화 시대, 공안정치와 살림정치

민중신학적 비평

 

 

 

 

신애치슨라인?

 

전광훈과 같은 교단 출신 목사이고 광고 마케팅 전문가로서 이명박 전 대통령의 홍보기획비서관을 지낸 추부길은 자신이 발행인으로 있는 극우 인터넷매체 와이타임즈(WhyTimes)201849일자 기고문(1)에서 일본의 극우 인터넷매체 자크자크(zakzak)331일자 기사 하나를 소개한다. 이 일본 기사는 신애치슨라인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 주장이 제기된 시점은 판문점 선언(이하 ‘4.27선언’) 직전이었다. 남북정상이 만나서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아시아 탈냉전의 가능성을 천명한 이 선언은 427일에 있었다. 이 선언이 공포되자 전 세계적인 환호가 쏟아졌다. 세계화 이후 분배구조는 후진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복지가 발달한 선진국에서조차 퇴조하고 있었다. 민주주의는 헤어나올 수 없는 위기를 맞고 있었고, ‘증오의 정치를 표방하는 극우정치 세력이 많은 나라들에서 약진했다. 과거 산업화 시대에 사회의 진보적 변화의 쌍두마차였던 노동조합과 진보정당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정치적 패배를 거듭하고 있었다. 한데 한국에서 펼쳐진 대대적인 시민행동이 극우적 선거연합을 분쇄시키는 개가를 이룩했다. 이른바 촛불혁명이라고 불린 이 시민행동에 세계 유수의 진보적 매체들은 아낌없는 찬사를 늘어놓았다. 노동조합이나 진보정당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음에도 시민행동은 피 흘리지 않는 변혁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그런 환호 속에서 등장한 문재인 정부는 ‘4.27선언으로 표상된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아시아 탈냉전이라는 선물세트를 펼쳐놓았다. 또 한 번 세계적인 찬사가 쏟아졌다. 동아시아는 초강대국들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대립적으로 얽히고설킨 적대적 공존의 질서가 견고히 작동하는 장이었다. 그 속에서 수동적으로 생존의 좁은 문을 찾아내려 했던 것이 이제까지의 한국의 국제정치적 행보였다. 한데 ‘4.27선언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잘 절충되어 평화공존의 시너지를 일으키게 될 것이 기대되는 절묘한 기획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여 세계 유수의 진보적 미디어들은 한반도 운전자론(Korean Peninsula Driver Theory) 운운하며 국제정치 무대에서 벌인 한국정부의 적극적 행보를 환호해마지 않았다. 이것은 한국 시민사회의 국뽕담론의 주요 근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4.27선언을 둘러싼 국제정치학적 메커니즘을 좀 더 살피면 이와 같은 멋진 포장지 속 맨살의 정치학은 그렇게 기대 만땅의 미래 기획으로 간주할 수만은 없다. 이에 대해서는 이 글 결론부의 민중신학적 비평 대목으로 미뤄두고, 여기서는, 위에서 언급한 자크자크기사의 시점에 집중해보겠다.

국내외적인 기대와 찬사를 넘치게 받게 될 ‘4.27선언이 있기 직전, 남한과 북한 정부의 고위급 전문가들은 329일과 414, 두 번에 걸쳐 준비 및 실무 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위의 자크자크의 기사는 329일의 준비회담 이틀 뒤에 게재되었다. 준비회담은 남측의 통일부장관과 북측의 조평통위원장을 포함한 6인이 모여서, 남북정상회담을 427일에 판문점 남측 구역에서 갖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정상회담의 의제와 의전, 보안 등에 대해서는 실무회담을 통해 구체화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 준비회담은 전광석화 같이 끝났다. 인사말 같은 입에 발린 말들을 제외한 실제 회담 시간이 단 11분이었다. 그런데 이런 준비회담 이후 불과 이틀 만에 게재된 자크자크의 기사는 놀랍게도 거의 한 달 후에 있을 ‘4.27선언의 내용을 미리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이 정상회담이 초래할 문제들에 대해 여러 전문가들의 입을 빌리면서 매우 구체적인 비판을 가했다.

이 비판의 개요는 이렇다. 남한이 북한과 러시아, 중국을 연결하는 공산진영 동맹에 견인될 것이고, 이는 한미일 삼각안보동맹의 좌초를 의미한다. 이에 미국의 트럼프 정부는 새로운 삼각안보동맹을 구축하려 할 것이다. 여기서 한국을 대신해서 새로 연결된 나라는 대만이다. 하여 1950년에 대만과 남한을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제외한다는 (원조) 애치슨라인이 있었다면, 2018년 즈음 남한을 제외하고 대만을 포함시키는 새로운 애치슨라인이 구축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추부길은 자크자크의 기사가 실린 지 9일 뒤인 49일에 쓴 기고문에서 이 기사를 소개하면서 문재인 정부의 오판이 한국의 안보위기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기고문의 시점 역시 ‘4.27선언이 있기 전이고 그 의제를 두고 합의하는 실무회담이 열리기도 전이다. 그러니까 자크자크필진이나 추부길은 아직 ‘4.27선언의 구체적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미 그 회담의 결과에 대해 명확한답을 내리고 있다. 신애치슨라인의 구축은 한국 안보의 심각한 위기라는 것이다.

신애치슨라인 운운하는 말을 일본에선 자크자크가 처음 제기한 것이 아니다. 또 추부길이 한국에서 이것을 얘기한 첫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2018년 남북정상회담 국면이 일으킨 세계적 반향과 엇물리는 이 주장의 임팩트가 극우파들에게 강렬하게 다가왔던 듯하다. 빠르게 이 용어는 극우파 사이에서 확산되었고, 한국과 일본의 극우파가 공유하는 공통의 국제정치적 인식의 키워드가 되었다. 그 연장선상에 윤석렬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의 회담이 있다.

그러니까 2023년 한일정상회담 국면에서 드러난 윤석렬 대통령의 행보를 국제정치의 문외한이 외교에 달통한 기시다의 암수에 걸려든 결과라고 단순폄하할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물론 이런 분석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윤석렬 대통령과 측근의 외교안보 참모들의 빈약한 경력에 비해 기시다는 일본 정부 최고의 외교통 인사였으니 회담의 디테일에서 많은 불이익을 당했을 것은 충분히 예상되고도 남는다. 하지만 회담 내용이 거의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디테일을 두고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해서 현재로는 이번 회담을 한미일 안보동맹을 위한 포맷 전략이라는 관점에서 논평하는 것이 좀더 현실적이다.(2)

이 포맷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의 퇴조 및 종말 이후 세계 질서를 반중반러의 신냉전체제로 재편하려는 기획을 구현하는 아시아태평양 버전의 국제정치학적 디자인에 관한 것이다. 이것을 앞의 자크자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의 반공주의적 포맷이 될 뻔 했던 애치슨라인에 빗대서 포스트세계화 시대의 새로운 포맷이 될 수 있는 신애치슨라인을 디자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신애치슨라인의 디자인은 반중반러의 냉전질서를 위해 미일, 그리고 대만을 연결하는 삼각안보동맹에 관한 것이다. 이 기사를 인용한 추부길은 1950년의 애치슨라인이 그랬던 것처럼 이 포맷이 한국에겐 심각한 안보위기를 초래할 수 있으니 한미일 삼각안보동맹을 훼손하는 정치를 방어하기 위해 극우세력이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윤석렬 정부는 문재인 정부가 훼손했던 한미일 삼각안보동맹을 복원시키기 위해 일본에 대한 선재적 양보(preemptive unilateral concessions)를 실행에 옮긴 것이라고 주장했다.(3)

윤 정부의 이 선재적 양보 전략에 대해 한국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비평은 크게 두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이러한 외교전략이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포맷이 냉전적 안보정치라는 거대한 맥락이 구현되는 전략이라는 점에서, 안보정치가 초래할 낡은 공안몰이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비평이다.

 

국제정치적 실효성의 문제

 

윤 정부의 선재적 양보가 실효성을 가지려면 그것이 일본에게 압박요인으로 작용해야 한다. 현재 일본 자민당 내 각 파벌들의 세력분포를 보면 극우세력인 아베파가 27% 정도의 지분을 갖고 있다. 반면 중도계열은 4개의 파벌들로 나뉘어 있는데 이 파벌들 전체를 합하면 거의 50%에 달하지만 각 분파별로는 단일대오의 아베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채 나뉘어 있다.(4) 하여 지난해 7월 참의원 선거 직후인 8월에 단행한 개각은 중도파인 기시다 세력이 다수파인 아베세력을 등에 업은 양상이다. 하여 단기적으로 보면 기시다 정부는 아베 정권 때와 대동소이하게 극우 편향을 드러낼 것이라는 얘기다. 아베파의 위상이 축소되고 기시다의 지지율이 높아지지 않는다면 일본 정부의 극우편향성은 좀더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최근 아베 국장(國葬) 문제가 붉어졌다. 기시다 정부가 국장 비용으로 16억엔을 사용하겠다고 발표하자 무려 60%의 일본 국민이 국장 반대의견을 폈다. 아베가 총리로 재직하는 동안 앤화를 위험스러울 만큼 찍어댔던 양적완화조치는 앤저 현상을 통해 수출증대효과가 있을 것을 기대한 것인데, 실상은 일본 기업들의 기술경쟁력만 약화시켜 구조적 취약성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게다가 최근 미국 달러의 금리인상 정국을 맞아 앤고 현상이 위험스러울 만큼 계속되자 일본 사회는 위기감이 팽배해졌다. 그런 위기감이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장례비용보다 더 고비용의 장례를 치루겠다는 정부의 발표와 맞물리면서 반아베 여론이 결속된 것이겠다. 이것은 일본 안팎에서 일본 극우의 몰락을 예견하는 분석들이 잇달아 제기되게 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한일 정상회담이 열렸다.

알다시피 윤석렬 정부가 선재적으로 양보한 사안들은 자민당의 각 파벌 중 특히 아베파가 주장했던 것에 집중되어 있다. 즉 윤석렬 정부의 선재적 양보안들은 일본 극우의 요구들에 맞추어져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아베 사후 계파 수장을 두고 내분의 조짐이 있는 아베파에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중도의 한 계파 수장인 기시다는 좀더 길게 일본 극우를 등에 업은 정치를 펼 가능성이 커졌다.

하여 윤석렬 정부의 선재적 양보는 일본의 극우정치를 후퇴시키기는커녕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정부는 윤 정부가 먼저 만찬상에 올린 잔의 절반을 채울 이유가 없어졌다. 그리고 일본의 극우적 정치행보의 수명만 더 길어졌다. 다른 변수들이 없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윤석렬 정부가 선재적 양보를 하면서까지 일본과 협력하고자 했던 이유는 한미일 삼각안보동맹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 안보동맹에서 한국이 배제될 경우 더 심각한 안보위기가 초래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근데 이런 위기론은 앞에서 언급한 자크자크같은 일본 극우파의 해석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극우파는 그 관점을 받아들여, 1950년 애치슨라인에서 배제되었을 때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다시 동맹의 바깥으로 내몰린다는 것은 절체절명의 안보위기가 된다고 주장했다.

 

신애치슨라인 담화, 페이크전술이거나 S&C전술이거나

 

여기서 잠시 애치슨라인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보자. 에치슨라인을 소환한 일보 극우의 신애치슨라인 담론은 우리가 안보동맹에서 퇴출될 만한 행보를 해서는 안 된다는 국제정치학적 문제제기와 연결되어 있다. 즉 문재인 정부의 남북정상회담 같은 행보는 안보동맹에서 한국이 배제되는 빌미가 될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안보를 위해서 그런 행동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함축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소환한 애치슨라인은 한국의 전략적 행동 때문에 제기된 것이었을까. 재선에 성공한 트루먼에 의해 신임국무장관으로 임명된 딘 애치슨은 미국신문기자협회(NPC)에서 행한 강연(이하 NPC 강연. 1950.01.12.)에서 한반도와 대만을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제외한다고 해석될 수 있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은 애치슨의 이 발언을 방어선에서 제외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스탈린과 마오쩌뚱, 김일성도 그렇게 읽은 결과 전쟁을 일으킨 것이라고 해석했다.

여기서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한반도가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제외되었다면 북한군의 남침에 대응하는, 놀라울 만큼 빠른 파병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이미 626일에 미 공군이 전투에 참여했고(비록 자위 차원이지만), 30일에는 미국 정부가 극동군 사령관에게 지상군 투입을 명했다.

사실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1947312일 하원을 장악하고 있던 공화당 의원들을 포함한 정치권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트루먼 독트린이라고 알려진 기념비적 연설을 하원에서 단행했다. 고립주의를 천명했던 먼로 독트린(1823)이 철회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질서를 반파시즘에서 반공으로 전환시키는 미국판 개입주의가 시작되었다.

한데 이 독트린이 실효적인 선언이 되려면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다. 이미 마샬 플랜에 의해 대규모 원조정책을 펴고 있었지만 세계는 점점 공산화되거나 될 가능성이 많은 나라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이에 트루먼 정부는 친미반공세력(5)의 집권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필요에 직면했다. 한데 그렇게 하려면 국방예산을 대규모로 증액해야 한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으니 다른 나라들에 돈을 퍼주는 정치도 끝내야 한다는 공화당의 주장이 다수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해서 트루먼 정부는 국방예산 증액이 왜 미국의 이익이 되는지를 공화당 의원들에게 설명해야 했다. 그런 취지로 만들어진 문서가 ‘NSC-68’(1950.04)이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국무장관에 임명된 직후의 에치슨이 이 문서 작성을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이 기획이 성공적으로 실현되었으니 그는 미국의 냉전 프로젝트의 총괄기획자인 셈이다. 한데 이 문서를 작성하고 있을 바로 그 무렵 그는 NPC 강연에서 한반도를 극동방어선에서 제외한다고 읽힐 소지가 다분히 있는 발언을 했다. 도대체 이건 뭔가.

이에 대해 학자들은 의견이 분분하다. 그 주장들을 단순화하면 제외시켰다는 주장과 제외시키지 않았다는 두 갈래의 입장으로 나뉜다. 첫 번째 입장은 당시 미국 국제정치의 기획자인 애치슨이 더 이상의 공산화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주장을 해왔는데 왜 NPC 강연에선 제외시킨다는 발언을 했는지를 해명해야 한다. 이에 대한 그럴 듯한 해명은 반공의 대치선을 지켜내기 위해선, ‘NSC-68’이 말하고 있듯이, 3~4배나 국방예산을 증액해야 하는데, 이 문서가 제작되는 단계에서 미국의 국제정책은 선택과 집중(selection and concentration tactics, 이하 S&C전술)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의 개연성을 보충해주는 근거의 하나가 종종 방어선으로 번역된 ‘defensive perimeter’라는 애치슨의 용어다. perimeter이 아니라 구역을 가리키는 단어다. 그러니까 defensive perimeter방어선(defense line)이 아니라 일종의 방어구역이다. defensive perimeter로 거명된 지역들이 모두 섬과 관련된 곳들이니 해군이 정박하고 이동하는 거점구역으로서 용이한 곳들이다. 그런 점에서 defensive perimeter로 가장 적합한 번역어는 방어거점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애치슨의 NPC 강연이 제외시켰다는 말은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공산화를 내버려두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원과 물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방어를 하겠다는 적극적 의지의 표현이라는 얘기다.

한편 제외하지 않았다는 입장은 제외한 것처럼 표현한 것이 일종의 페이크전술(fake tactics)이라는 것이다. 소련과 공산중국, 북한 등으로 하여금 오판하게끔 유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을 직접적으로 입증하는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만약 페이크전술이라면 그런 문서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니 직접적 증거가 없다는 것이 입증의 결정적 증거가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하지만 반증의 결정적인 논거도 아니다. 195378, 프린스턴대학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애치슨은 (이때는 국무장관에서 퇴임한 이후인데) 한국전쟁의 휴전협정 조인 직전, 그러니까 휴전을 위한 공식적 문건이 거의 확정된 뒤에 이렇게 말했다. “코리아가 나타나 우리를 구했다.”(Korea came along and saved us) 한국전쟁 덕에 불가능할 것 같았던 ‘NSC-68’의 국방예산 증액론은 미국 의회를 통과했고, 미국이 추구했던 냉전체제를 실현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훗날 냉전은 미국의 국제정치상의 위상뿐 아니라 경제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바로 이 점에서 일부 논자들은 애치슨의 NPC 강연은 일종의 페이크전술이라고 해석했다.

이것을 둘러싼 지리한 논쟁을 더 이야기하는 것은, 적어도 이 발제글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강조할 것은 어느 주장이든 그것은 미국의 이해관계와 얽힌 문제라는 것이다. 한반도의 어떤 정치세력이나 시민의 집단행동과는 무관하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의 남북정상회담 기획에서 애치슨라인 담화를 소환해서 신애치슨라인론을 유포시킨 일본과 한국의 극우는 논점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한마디로 무리한 해석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런 무리한 적용을 감수하면서까지 과거 역사를 소환해서 벌인 윤석렬 정부의 국제외교가 한반도의 안보에 유효한 것일까.

 

신냉전 프로젝트, 이도 저도 아닌 포스트세계화

 

세계의 많은 미디어들은 우크라이나전쟁의 여파로 모스코바의 맥도널드 1호점이 폐점(2022.03.08.)한 사건을 세계화 종말의 신호탄이라고 보도했다. 소비에트 연방체제가 붕괴되고 러시아연방국(State Anthem of Russian Federation, 1991)이 출현한 것은 포스트냉전체제의 등장을 의미했다. 그리고 포스트냉전체제를 가장 명확하게 이끌어간 것은 세계화였다. 1980년대 거의 전 기간 동안 영국과 미국의 최고통치자였던 마가렛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이 자신들의 새로운 정치의 철학적 기조로 호출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는 이 시기에 세계화의 이데올로기적 문법으로 발전했다.

그들이 추구했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포스트냉전체제를 대체할 만한 성과를 이룩했다. 2차 세계대전 이래 강력한 경쟁세력이었던 소비에트 연방체체제가 199112, 역사에서 사라졌다. 바로 그 전 해인 1990131일에 맥도널드 모스코바 1호점이 문을 열었다. 바야흐로 세계화 시대가 활짝 열렸다. 그런데 그것이 30여 년 만에 문을 닫은 것이다.

한데 세계화 종말의 조짐은 좀더 일찍 나타났다. 경제학자인 더글라스 어윈(Doublas Irwin. 다스머스대학)이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에 제출한 보고서에 의하면 GDP 대비 무역량은 2008년에 정점을 찍은 뒤 빠르게 추락하고 있다.(6) 하지만 어윈의 GDP 대비 무역량 추이보다 좀더 명확한 세계화 종말의 징후가 있다. 생산공정의 타국 이전을 가리키는 오프쇼어링(off-shoring) 현상이 2011년 이후 점차 둔화되고 리쇼어링(reshoring)이 증가추세에 있으며, 코로나 국면을 맞아 급격한 퇴조의 조짐을 보인다는 것이다.(7)

리쇼어링이 새로운 세계 질서의 추동자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이 시장을 개방함으로써 나타난 효과였다. 핑퐁외교로 죽의 장막이 걷히면서 엄청난 중국의 노동력과 공산주의 정부다운 선택적인 집중적 인프라 구축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계화는 공급과 수요의 정교한 망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마치 2천년 전 실크로드를 따라 동서양 간의 지구적 교류가 가능해졌던 것처럼 이른바 글로벌 벨류체인(global value chain)을 따라 리쇼어링이 실현됨으로써 세계화는 엄청난 초과이윤을 발생시키면서 세계의 변화를 이끌어갔다.

그런데 문제는 세계화로 인해 가장 성공한 나라가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사실에 있다. 아니 성공했다기보다는 너무나성공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미국의 세계패권구조에 심각한 균열이 일어날 조짐이 명확해진 것이다. 이것은 워싱턴이 반세계화 컨센서스의 중심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지기반과 성향의 차이에도 공화당이나 민주당은 공히 중국을 고립시켜서 그 성장 잠재력을 꺾어버려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한데 그것은 미국이 주도했던 세계화의 지향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물론 세계화 종말의 근거를 미국의 국가주의적 욕구로만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세계화로 인해 전 지구에서 양극화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더욱이 전 세계를 초대형 재앙에 빠뜨렸던 코로나 팬데믹 사태, 그리고 그 이상의 재앙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기후재앙과 지진, 화산폭발 등의 사태, 이 모든 위기가 한꺼번에 터져버릴 수 있는 퍼펙트 스톰담론이 세계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전 지구적으로 폭넓게 형성되고 있다.

마침 자본 자체의 모순과 국가주의의 자폐적 퇴행성이 발흥하면서 세계화 종말의 징후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렇지만 세계화 이후 어떤 질서가 세계를 추동하게 될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런 시대를 포스트세계화 시대라고 하자. 한데 최근 포스트세계화 시대를 구상하는 하나의 프로젝트가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다. 바로 신냉전이다. 소련을 고립시켜 그 팽창주의를 제지하겠다는 ()냉전의 아이디어를 소환해서 이번에는 중국을 고립시키겠다는 기획이다. 물론 이런 기획의 제공자는 워싱턴의 정치권이다.

2018104, 극우파 정치인으로 트럼트 정부의 부통령이던 마이크 팬스(Mike Pence)가 중도우파 편향의 싱크탱크인 허드슨연구소(Hudson Institute)에서 행한 강연을 더글러스 딜런(Douglas Dillon) 하버드로스쿨 교수는 신냉전 선언으로 평가했다.(8) 그러나 팬스는 세계화 시스템을 재구축하는 데까지 생각을 확장하지는 않았다. 반면 바이든 정부는 훨씬 더 강력하게 대중국봉쇄정책을 펴면서 세계화의 해체와 신냉전을 연결시킨다. 바이든 정부의 재무장관인 재닛 옐런(Janet Louise Yellen)은 안보동맹과 글로벌 벨류체인을 연계시키는 프랜드쇼어링(friend-shoring)을 제시했다. 그런 정책의 일환으로 유럽과는 미국-EU무역기술위원회(TTC. US-EU trade and Technology Council), 아시아와는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Indian-Pacific Economic Framework), 라틴아메리카와는 미주 경제번영파트너십(APEP. Americas Partnership for Economic Prosperity) 협상이 추진되고 있다.

그러니까 최근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신냉전 프로젝트는 세계화의 상징인 글로벌 벨류체인을 반중 안보네트워크 내부로 재편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전통적 냉전과는 결이 다르다. 아니, 실은 이것도 충분한 설명이 못 된다. 미국은 안보동맹국들에게는 중국과 탈동조화(decoupling)하도록 강도 높은 압박을 가하면서도 2022년 미중 교역량은 역대최대치를 기록했다. 즉 세계화가 주는 자본증식 효과를 자국은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맹국들에게는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신냉전 프로젝트는 미국 우선주의와 안보동맹 그리고 세계화, 서로 절충하기 어려운 이 세 요소들이 엉성하게 조합되어 있다. 이것은 바이든 정부의 신냉전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음을 시사한다.

사실 미국의 야심찬 대중타격함인 바이든-신냉전(warship)에 승선하지 않고 있거나 하선하려는 국가들이 적잖다. 최근 국제정치의 중요한 변수로 떠오르고 있는 글로벌 남반구(globla south), 특히 가장 중요한 국가로 부상하고 있는 인도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과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으면서도 중국 중심의 경제공동체인 브릭스(BRICS)에 적극 참여하고 있근대 국가 담론의 인적 자본 재배치다.(9) 또 전통적 친미국가들인 사우디아라비아와 UAE가 독자노선으로 돌아서고, 이스라엘이란투르키에 등과 함께 중국과의 경제적 네트워크를 확대하는 중에 있다.(10) 그밖에 EU의 반발도 드세다. 이런 상황에서 바이든 정부의 엉성한 신냉전 프로젝트가 이들 나라들을 설득하기는 현재로선 요원하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의 극우정권은 미국의 이도 저도 아닌 엉성한 기획에도 불구하고 신냉전에 집중하면서 적극 참여의지를 표방하고 있다. 한국은 북한을, 일본은 중국을 견제하는 반공주의적 안보동맹으로 결성된 선거연합이 그들의 정권안보에 가장 중요하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 정부의 적극적 동참에도 불구하고 미국 바이든 정부의 신냉전 프로젝트가 과거 트루먼 시대 냉전 프로젝트 만큼 미국의 정치경제적 위상을 절대화하는 데 유의미한 정책으로 기능하게 될지 의심스럽다. 문제는 그러는 사이에 안보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한국과 일본의 경제적 자생력이 얼마나 지속가능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추락 중인 일본을 물론이고, 성장세를 타고 있던 한국까지도 2022년 현재 심각한 수준으로 몰락하고 있다.

중앙일보와 서울대 아시아연구소는 신애치슨 시대라는 컨셉으로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한국 외교의 방향을 모색하는 기획 시리즈를 마련해서 20231월부터 연재했는데, 그중 하나가 빅데이터 분석이다.(11) 202011일부터 2022930일까지 한4개국 824개 언론사의 기사 550만여 건의 빅데이터 분석을 다룬 것이다. 이 분석에 따르면 공급망(supply chain)의 확보와 안전한 유지 문제가 압도적으로 안보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밖에도 다양한 요소들이 안보와 링크되어 있었다. 조사자는 이것을 포괄안보(comprehensive security) 시대로의 전환이라고 명명했다. 한데 한미일 삼각안보동맹에 참여한 한국과 일본 정부의 공통된 관심은, 포괄안보가 아니라, 좁은 의미의 군사안보(military security)에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아마도 미국정부는 한국과 일본 극우정권의 이러한 성향을 활용하기 위해 대중국 봉쇄의 포괄주의적 정책을, 군사안보를 연상시키는 신냉전프로젝트로 둔갑시킨 것으로 보인다. 애치슨의 NPC 강연처럼 일종의 페이크 전술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미국은 냉전적 동맹논리와는 부합하지 않는 자국중심주의적 이해관계를 군사동맹을 명분 삼아 마구잡이로 연계시키고 있다. 그리고 한국은 그런 페이크 전술의 최대 피해자일 수 있다.

 

안보정치의 문제. 신냉전의 국내정치적 효과에 대하여

 

윤석렬 정부의 대일외교에 대한 두 번째 비평은 국내정치로서의 공안정치와 관한 것이다. ()냉전적 정치의 인식론적 기저에는 우리라는 이분법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인식론 아래서 은 대화의 상대일 수 없다. 아니 은 절멸의 대상이다. 하지만 국제정치에서 이러한 절멸의 정치학은 충분히 강력하게 추구되지는 않는다. 왜냐면 그것은 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절멸의 정치학을 추구하는 냉전적 안보정치 세력은 에 대한 배타성을 골격으로 하는 분절의 정치를 편다. 해서 신냉전체제라는 장벽이 국제정치의 마당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얼마만큼 장벽 속에서 대화의 틈새를 만들어낼지는 각국의 외교적 능력에 달려 있다.

아무튼 이렇게 국제정치 영역에서는 제한적으로나마 대화의 공간이 존재한다. 한데 국내정치에서는 훨씬 더 비타협적이고 공세적인 정치가 펼쳐지곤 한다. 이른바 공안정치가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냉전을 이끌어간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함께 반파시즘 전선의 혈맹이이었는데 트루먼 독트린 이후 느닷없이 이 되었다. 이 극적인 전환의 로드맵으로 정치권을 설득하기 위한 문서가 NSC-68이었다. 아무튼 트루먼을 부통령으로 임명했고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는 그의 최대공적인 뉴딜 프로젝트에서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조합, 그리고 평화주의자들의 생각을 대거 받아들였었다. 한데 트루먼이 독트린을 발표한 1947년부터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대통령(1953~1961)이 퇴임할 때까지 미국에선 대대적인 빨갱이 사냥이 전개되었다.

여기서 다시 애치슨라인 담화에 주목해보자. 말했듯이 한국을 미국의 아시아 극동지역의 defensive perimeter에서 제외하겠다는 애치슨의 연설은 그가 주도하고 트루먼 대통령이 밀어붙인 냉전주의적 개입주의 정책(트루먼 독트린)과 상반된 내용일 수 없다. 특히 트루먼 독트린의 실행기획인 NSC-68의 하위 전술을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크자크나 추부길, 그리고 윤석렬 정부는 신애치슨라인 운운하면서 애치슨라인의 서사를 소환하지만, 우리는 트루먼 독트린과 그것의 효과에 주목하면서 윤석렬 정부의 국제정치와 국내정치, 특히 공안정치와의 연관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1947312일에 발표된 트루먼 독트린 당시 세계 곳곳에서 공산화 현상이 유행병처럼 확산되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이 이런 현상의 배후조종자라고 보았다. 해서 미국이 나서서 공산화를 막을 필요가 제기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미국 중심의 전후체제가 위태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전쟁을 벌일 수는 없다. 해서 대신 선택된 것이 냉전체제다.

말했듯이 트루먼 독트린은 냉전적 개입주의를 천명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은 공산화의 위기에 놓인 국가들에 대해 경제적이고 군사적인 지원을 아낌없이 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친미반공정권이라면 그 정권이 어떤 전력을 갖고 있든, 어떤 만행을 저지르든 미국은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사이기도 했다. 그것을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미국의 현지 주둔군 사령관들이나 미국의 후원을 필요로 하는 국가의 정치세력들은 그렇게 믿었고 행동했으며, 그들의 반인류범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아낌없는 지원을 계속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그리스다. 내전 중이던 그리스의 왕당파 출신 군부쿠데타 세력들은 백색테러와 고문, 그리고 무자비하게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고 미국은 그런 정권을 대대적으로 지원하여 결국 내전의 최종 승자가 되게 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례가 제주 4.3 사건이다.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 다음 날 이승만은 남한 과도정부를 세우는 것만이 공산주의를 막는 유일한 길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리고 미국의 승인 없이는 불가능한 남한 단독정부 프로젝트가 실행되었다. 그 이듬해 510일에 제헌의회 의원을 선출하는 국민투표가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하지만 제주에서만 3개 선거구 중 2개에서 당선자를 선출하지 못했다. 전국에서 유일한 사례였다. 그렇게 선출된 제헌의회 의원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한데 새로 건국되는 나라의 첫 번째 수반이 된 이승만의 첫 포고령 중 하나가 제주에 진압병력을 증파하고 그 섬에 대한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군대에 의한 무자비한 민간인 학살극이 벌어졌다. 194843일에 벌어진 파출소 습격사건 이후, 우여곡절 끝에 양측 가해자 처벌을 둘러싼 협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이승만에 의해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송요찬이 해안선 5킬로를 넘는 지역 주민의 소개령을 발표한 1020일부터 대대적인 집단학살극이 시작되었다.

한편 그 직전, 제주로 출동하라는 명을 받은 여수의 국군 제14연대의 일부 병사들이 항명을 했다. 그러자 여수와 순천을 포함한 전라남북도, 그리고 경상남도 일대에 계엄령이 포고되고, 제주와 거의 같은 시기에 민간인에 대한 대대적 학살사태가 벌어졌다. 여순사건의 개요는 이러했다.

이렇게 여순사건과 제주4.3사건은 계엄령을 통해 공안정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계엄령은 법을 중지시키는 조치라는 점에서 비일상적 공안정치다. 해서 그러한 정치는 언제나 법의 효력을 부활시키는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문제는 법의 부활은 개헌이라는 매우 어려운 정치과정을 수반해야 한다눈 데 있다. 이때 등장한 것이 국가보안법이다. 이것은 공안정치의 일상화 기재다. 개헌을 하지 않아도, 보완입법을 통해 가능한 손쉬운 공안정치의 기재인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의 불법적 행위를 사후적으로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적발하여 처벌하는 예방적 입법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물론 법의 사전규제(ex-ante regulation) 기능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12) 하지만 국가보안법의 사전규제 기능은 모호하기도 하거니와 양심에 관한 인권 유린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가령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에 의거해서 예비검속을 실시한 바 있고, 이것이 훗날 이승만 정권의 민간인 학살의 주된 통로였다는 것이 밝혀짐으로써,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정부의 공식적 사과를 권고한 바 있다.(2022.07.20.) 이렇게 국가보안법의 사전규제적 요소는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 특히 어떤 일상적 행위가 불법적 행위로 전환될 것을 국가는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는가, 또 언제부터 그런 처벌이 가능한 예방적 조치의 대상인가를 확정할 수 있는가 등, 해명이 거의 불가능한 요소들을 담고 있다. 한데 국가보안법의 사전규제 요소는 그 범위를 행위 이전 단계, 특히 마음에까지 확대한다.

현대법은 비감성적 법적 테제(no-emotion legal thesis)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여기에는 이성과 감성이 분리되어 있다고 가정하고 이성이 감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13) 이것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원초적 감정에 좌우된 행위들을 처벌하는 것이 법의 내용이어야 하며 그 처벌의 내용 또한 이성의 기준에 따라 확정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가정을 필요로 한다. 그러려면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은 구체적 행위여야 한다. 한데 국가보안법은 행위가 아닌 마음까지도 사전규제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렇게 되면 이 법은 논리적으로 법의 위상을 초과하게 된다. 마음은 도덕이나 윤리의 영역이다. 또 종교의 영역이기도 하다. 해서 국가보안법은 도덕이나 윤리, 나아가 종교의 영역에 침투하게 된다. 요컨대 국가보안법은 공안정치로서의 법의 일상화 기재로 시작하였지만 그 법의 작동과정에서 법을 초과하는, 법 위의 법, 나가아 종교 위의 법으로까지 작동하는 운명을 갖고 있다. 이것은 국가보안법이 더 이상 법이 아닌, ‘법 해체적 법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해서 냉전 시대의 산물인 국가보안법은, 민주정권이 집권하는 시기에는 그 법의 활용이 극히 제한적이었다. 물론 아직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냉전적 질서가 엄존하고 있고 그 질서의 시간에 강하게 엮어져 있는 이들이 적지 않으니, 안타깝게도 어느 정부도 그 법을 폐지하려는 모험에 뛰어들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법은 최근 한동안 실효적 기능이 거의 멈추어져 있었다.

한데 윤석렬 정부가 미국 주도의 신냉전 프로젝트에 적극 동참했다. 그것은 공안정치의 부활이 본격화될 것임을 의미한다. 아니 실은 이미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국가보안법이 다시 실효적 법률로서 매우 활발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한데 그것 이상이다. 이제까지 국가보안법을 적극 활용한 정부들은 공안정치의 도구로서 국가보안법을 활용했다. 한데 윤석렬 정부에게서 법은 그 이상일 가능성이 있다. 알다시피 이 정권은 검찰정부를 추구하고 있다. 경제도, 정치도, 문화도, 군사외교교육도 검사가 더 잘 할 수 있다고 믿는 정부다. 해서 그들은 삼권분립의 민주주의적 원리도 무력화하면서까지 검찰정부를 구성하고자 한다. 그들 사이에는 법이, 사회의 모든 것을 작동시키는 1 원소라고 믿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국가보안법의 사전규제 기능은 법의 예외성이 아니라 법 자체의 속성이라고 믿는다. 해서 그들에게서 법은 이미 해체의 상황에 직면했다. 왜냐면 도덕도 윤리도 종교도 법으로 대체되는 법의 사회는 시민사회를 결코 설득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공안정치 특유의 공포정치적 위협으로 작용한다면 어쩔 수 없이 법에 순응하는 척하겠지만, 그런 법이 아예 법 자체라고 하는 주장에 순응할 수 있는 국민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오늘의 사회는 너무나 복잡하다. 또한 광속의 시간체험을 하게 되는 초고속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모든 것을 수렴시키는, 항구적인 것은 존립할 수 없다. 오히려 수많은 이질적 요소들이 서로 느슨하게 엮이고 분절하고 다시 새롭게 엮이는 사회에서, 법은 그런 다양한 것의 참을 수 없는 가벼운(insufferable light)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낮은 울타리일 때 유효하다.(14)

해서 윤석렬 정부의 공안정치와 국가보안법은 다른 권위주의적 정부들보다 더욱 법의 유효성 자체를 의심하는 다수의 시민사회와 맞닥뜨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 나아가 검찰정부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다수 시민들의 존재를 확인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더 성찰적인 정부가 되지 않는 한 말이다.

 

민중신학적 비평

 

하지만 이 정부는, 이제까지의 모습을 보건대, 법에 대해서 성찰적인 거리두기를 시도할 것 같지 않다. 해서 이 정부의 국가보안법 담론은 더 이상 법률과 정치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동시에 신학적 텍스트다. 해서 이 글의 마지막 대목에서는 신학적 텍스트로서의 윤석렬식 국가보안법 담론에 대한 민중신학적 비평을 시도하고자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계엄령은 사회를 일시에 비일상의 영역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된다. 전기가 끊기면서 세상이 갑자기 암전(darkness)이 되듯 계령령의 시간은 모든 것을 정지시키는 종말론적 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순간은 동시에 원초적 폭력의 시간이기도 하다. ‘계엄령이 포고된 제주4.3’의 시간이 그랬다. 거의 모든 국가의 창건신화는 이런 원초적 폭력을 통제함으로써 구현되었다고 주장한다. 근대국가는 충분한 크기의 영토와 충분히 다중적으로 주체화된 국민을 구성요소로 하면서 등장한 국가체제다. 원초적 폭력을 다스리는 것을 넘어서 훨씬 더 광역에서, 훨씬 더 다층적인 구성원이 공존하는 정치적 장이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해서 근대국가는 특정 세력의 연고성이 사회를 지배하지 않는 국가임을 국민에게 설득하는 기재를 통해 존속한다. 근대국가에서 법과 지식은 몸정치의 차원(사회 구조나 제도에 관한 것)에서 국가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역할을 했고, ‘마음정치의 차원(15)은 도덕이나 종교가 맡았다. ‘(이성)마음(감성)이 이분법적으로 분화되었다는 가정 위에서 근대국가의 체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하여 법과 지식, 종교 등은 근대국가의 통치성(governmentality)의 기재로 작동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로부터 갖은 특권을 부여받았다. 통치성의 기재들은 통치의 외적 기재가 국민의 내면에까지 개입해 들어올 때 보다 완성적인 역능을 발휘한다. 통치성에 의해 국민이 내면적으로 설득되면 민주적 국가라는 평받을 얻었고 실패하면 독재국가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다.

한데 한국의 근대국가는 계엄령을 포고하는 정부로부터 시작된다. 비일상의 시간 속으로 국가를 재배치함으로써 통치성의 기재로서의 법은 중지되었고 군대와 경찰에 의한 공포가 국가를 운영하는 중심 원리가 되었다. 하지만 국가는 어떻게 해서든 법의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이때 일제강정기 시절 일본으로부터 얻은 힌트가 있었다. 국가보안법이 그것이다. 국가의 입장에서 냉전체제에 걸맞는 법체계를 새로 구축하기보다는 훨씬 손쉬운 방책이다. ‘사전규제의 요소를 법체계 안에 끼워넣음으로써 일상을 중지시키지 않고서도 계엄령의 초법적 기능이 작동되게 하는 것이다. 이제 광염을 내뿜는 국가폭력을 동원하지 않아도 되었다. 국민의 내면만 장악하면 되는 것이다. 사전규제의 장치를 통해서 말이다.

한데 문제는 국가보안법의 사전규제라는 요소는 근대국가의 공리라고 할 수 있는 이성과 감성의 이분체계를 법이 넘나들게 한다는 데 있다. 그래야만 국가보안법은 일상을 중지시키지 않고서도 냉전적 질서를 유지시킬 수 있다. 근대국가는 이런 이분법적 틀 안에서 상호견제의 장치를 발전시켜 왔는데 국가보안법은 이러한 근대국가적 제도를 해체하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근대적 법체계도 해체된다. 한데 그 해체의 기조가 냉전의 세계관에 기반을 두고 있다.

더욱이 그런 법과 국가의 체계를 운영하는 수행자가 법지상주의적 법률가들이라면, 특히 조직 전체가 하나의 인격체라는 문화가 여전히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검찰(검사동일체)이라면 그들에 의해 운위되는 국가보안법은 근대적 법체계의 해체를 더욱 가속화시킬 수 있다.

근대적 법체계가 잘 작동하기에는 현대 사회는 너무나 복잡해졌다. 또한 너무나 빠르게 변화한다. 항구적인 것은 없고 모든 존재들은 다양하면서도 느슨한 네트워크 속에서 공존한다. 그러니 새로운 법체계가 필요하다. 요컨대 근대적 법의 해체는 불가피하다. 얼마나 빠르게, 얼마나 유효하게 해체되고 재구축되는가의 문제가 남았다. 아무튼 법은 가장 느리게 변화하는 통치성의 기재다.

한데 국가보안법이 꿈꾸는 법 해체의 상상력은 무엇인가. 여기서는 명확하게 항구적인 것이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우리은 나뉘어 있어야 하고 결코 섞여서는 안 된다. 아니 필연적으로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국가보안법의 인식론에서 말이다. 한데 어느새 섞이고 있다. ‘에게 감염된 내부의 오염된 존재들이 무수하다. 그들을 색출하고 처벌하는 법이 작동해야 한다. 대량살상을 통해서 오염지역 전체를 융단폭격하는 것은 아니지만 핀셋으로 조직에서 떼어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행위로 표출되지 않은 영역, 곧 마음의 영역까지 법의 검열이 가능해야 한다. 해서 법 해체가 불가피한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신앙에서 사탄(הַשָּׂטָן)이 악령의 수괴를 표상하는 존재으로 부상할 무렵 그 절대악의 존재가 세상을 파탄내는 무대는 신의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공간, 특히 인간의 내면이다. 아마도 기원전 3세기 어간, 고대 지중해 지역에서 문자혁명이 활발해질 무렵 팔레스티나에서도 민간서기관들이 등장하는데, 국가의 재앙과 축복을 이야기했던 군주제 하의 왕립서기관들과는 달리 이들 민간서기관들은 사적인 실패와 절망을 내면을 유혹하는 사탄의 목소리로 읽어내곤 했다. 이런 인식은 점점 더 일상화되어 서기 1세기 중반경의 바울은 내면이 선과 악의 전쟁터임을 고백한다.(로마서7,21~23) 또 예수광야수행설화에서 사탄은 예수의 내면으로 들어와 유혹한다.(πειραζομενος πο του Σατανα. 마가복음1,13) 요컨대 이미 예수-바울 시대에는 명료한 선과 악의 이분법이 교란되고 있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무려 60여 년 동안 저술된 괴테의 파우스트는 그런 이분법이 더 이상 자명하지 않는 세계에서 선과 악에 대해 논한다. 앎에 대한 욕구, 그것을 행동화하는 진취적 인간이 어느새 악의 화신이 되었다. 슈펭굴러(Oswald Spengler)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시민층의 유토피아적 욕망을 파우스트적 인간으로 묘사한다. 곧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몰락의 서막이었다.

예수는 지배사회가 악마에 오염된 자로 낙인찍은 두 사람을 치유하는데, ‘피 흘리는 여성(γυνη ουσα εν υσε αματος)시각을 잃은 거지(τυφλος προσαιτης)가 그들이다. 여성과 거지, 모두 배제된 존재인데 더 나아가 하나는 12년간 피를 흘리는 자이고 다른 하나는 시력을 잃은 자다. 복합배제(compound exclusion)의 상태다. 한데 예수는 이 두 인물을 치유하면서 다른 텍스트에서는 볼 수 없는 표현을 쓴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소(ἡ πιστις σου σεσωκεν σε).”(마가복음5,34; 10,52) 파우스트는 유토피아를 갈망하는 진취적 지식인이었지만 그 꿈이 사랑하는 여인 그레트헨의 어머니와 오빠를 죽게 하고 그녀가 정신착란 속에서 아이를 살해하고 사형장의 이슬이 되게 했다면, 예수에게 치유된 이들은 복합배제의 요소를 가진, 최악의 낙인이 찍힌 자임에도 그들의 내면에서 나오는 믿음이 그들을 구원했다. 선과 악은 분리할 수 없이 동거한다. 거기에서 괴테는 악의 기원을 말하고 있고 예수는 치유의 기원에 대해 말한다. 민중신학자 서남동은 김지하의 담시 장일담을 통해서 창녀의 썩은 자궁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했다는 민중신학적 명제를 제안한다. 신은 모든 피조세계를 망쳐놓은 최악의 피조물인 인간이 되어서 가장 비참한 인간으로 죽임당한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선과 악이 이분법적으로 분화된 질서가 교란된 세계를 척결하고자 핀셋 수술을 단행하는 것이 윤석렬식 국가보안법의 법 해체의 기획이라면, 민중신학은 선과 악의 이분법을 지탱하는 서사 자체를 해체하면서 근대적 규범의 질서를 해체하고자 한다.

한데 변화된 세계에 대한 포스트세계화라는 문제설정의 관점에서 보면 윤석렬 정부나 그 배후에 있는 바이든의 신냉전 기획과는 다른 기획이 존재했다. 한국이 냉전체제를 극복하는 운전자로 평가받았던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체제 기획이다.

세계화는 2008년 어간, 그 생산성이 정점을 찍은 뒤 점점 추락하고 있다. 다시 회복될 하락세라는 진단도 있었지만, 좀더 근원적인 문제설정이 필요하다는 진단도 있었다. 후자의 문제의식을 담은 표현이 바로 포스트세계화.

근대 자본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의 블록을 중심으로 한동안 발전을 구가했지만, 점점 그런 냉전체제는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다. TV의 등장과 함께 비주얼한 것(the visual)이 시민의 욕망을 구성해가면서 냉전적 자본주의의 생산성은 한계를 드러냈다. 탈냉전의 기획으로서의 데탕트는 그 위기를 돌파하는 하나의 가능성이 되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중국의 개방이다. 이것은 세계화된 시장이 생산과 공급의 망을 본격 작동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체계가 작동하게 되면서 이른바 망의 체계는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해서 글로벌 밸류체인이 세계화를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동인이 되었다.

하지만 다시 위기의 시간이 왔다. 앞에서 말했듯이 미국의 헤게모니를 압도하는 국가의 탄생 시나리오와 함께 워싱턴의 정치권 사이에서 반중(anti-China)의 컨센서스가 형성되었다. 또한 세계 각국에서는 대중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기류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세계화에 휘둘리며 불안과 박탈에 시달리던 대중의 심상에 증오라는 감정을 불어넣는 이들의 메시지에 대중이 공격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이른바 극우정치가 약진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이들 극우정치는 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의 한 축을 대표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무수한 퀴어적 존재들이 소수자성(minority)을 주체화의 기치로 내걸면서 세계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서구적 근대성의 양식 자체의 근원적 한계를 돌파하려 한다.

이제 포스트세계화는 많은 이들에게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그 무렵, 2018년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문재인 정부는 북한과의 평화공존을 도모하는 실험을 본격화했다. 한데 이것은 햇빛정책을 추구했던 이전의 정권들과는 다른, 보다 진일보한 요소들이 있다. 과거의 햇빛정책들이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서 소극적인 틈새정치를 도모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면,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평화프로세스 인근 강대국들의 갈등적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기획이기도 했다.

러시아의 극동지역은 엄청난 자원의 보고임에도, 동아시아 냉전체제 때문에 미개척지로 남겨져 있었다. 또 초고속 성장을 구가하고 있던 중국은 지역간 불균형 발전 때문에 사회통합의 심각한 장애에 직면하고 있었다. 한편 미국 자본은 새로운 투자처를 찾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금융자본의 이윤율 저하와 투기자본화 현상이 심각했다. 모든 강대국들의 위기의식이 중첩된 것은 아시아 극동지역의 냉전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냉전의 한 가운데에 남한과 북한의 극한적 대치 상황이 놓여 있다. 한때 이는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만들어 놓은 것이었지만, 이젠 그것이 서로에게 짐이 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갈등의 진원지에 있는 문재인 정부가 남북한 평화체제를 논하기 시작했다. 한데 그 프로세스가 신박하다. 문 정부는 러시아와 중국으로 연결되는 육로 교통망을 구축하려는 기획을 세웠다. 마치 중국과 로마를 연결하는 대상들의 이동로로 수많은 실크로드들이 한창 개척되던 시절 그 중간의 나라들은 실크로드의 중간 기착지를 만들려는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몇몇 도시들은 성장의 기회가 되었다. 국경을 넘나드는 이들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환대와 공존의 논리가 성공의 기회가 된 것이다. 바로 그런 것처럼 문 정부의 평화프로세스는 이념적 장벽을 녹이는 평화체제의 달콤함을 한반도를 둘러싼 나라들의 성공, 나아가 그것을 매개로 하는 세계의 성장스토리로 읽히는 아름다운 기획이었다.

남과 북, 그리고 세계는 평화공존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북한 지역의 철도 가설을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만들어낼 만한 기술력은 한국이 담당하고 그것에 드는 일체의 비용을 미국의 몇몇 월스트리트 투자자들이 조달하겠다고 나섰다. 중국과 러시아는 적극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표했고 월스트리트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워싱턴의 정치권도 동요하면서도 적극 반대하지는 않았다. 이것을 세계의 대표적인 미디어들은 한반도 운전자론이라며 칭송해마지 않았다. 노벨평화상 운운하는 말이 단지 국뽕담론만은 아닐 수 있었다.

사실 이것은 전혀 신박한 기획은 아니었다.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이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주창할 때 이미 그 골격이 제기된 것이었다. 또 그런 아이디어는 이명박 정부가 비핵개방 3000’론을 펼 때 그 기초가 놓여지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데 이명박-박근헤 정부는 그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길 만한 대화의 기술이 부족했다. 반면 문재인 정부는 과거 1970~80년대 남북대화라는 것을 입에 꺼내기도 어렵던 시절에 국제 그리스도교 네트워크를 통해 남북한 대화의 무대에서 인적 연결망을 만들어냈기에 이들이 남북협상의 실무진에 대거 포진함으로써 그 협상의 절차가 가능했던 것이다.

한편, 한반도는 글로벌경제의 관점에서 또 하나의 호재를 만나고 있었다. 지구온난화로 북극해가 녹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항로가 눈앞에 다가왔다. 동아시아는 교역량에서 세계 최대였지만 유럽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물류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핸디캡이 있었다. 그나마 싱가포르나 홍콩 등이 중간기착지로서 상당한 이익을 누려왔다. 한데 북극해가 교역로로 개척되면 물류비용도 줄어들 것이고 새로운 허브항이 부상할 수 있었다. 부산, 도쿄, 상하이가 북극해로를 통과하는 허브항으로서의 위상을 둘러싼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물론 부산이 가장 유리한 위상을 획득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발달된 선박공장들이 부산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쇄빙선 기술력에서 앞선 한국이 유리했다. 해서 인천공항이라는 대형의 국제공항이 있음에도 가덕도 공항을 만들겠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도 북극해로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제 부산은 아시아의 암스텔담이 될 것이라는 평판이 자자했고, 미국과 중국 등 세계의 수많은 투자자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평화프로세스는 이렇게 정치적 기획인 동시에, 포스트세계화를 세계화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재구축하는 기획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한데 많은 평화주의자들과 자본투자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진행된 문재인 정부의 남북한 평화체제에 관한 기획은 불행하게도 한국이 협상 당사자가 아니었다. 휴전협정을 조인한 당사자는 미국과 북한이기 때문이다. 한데 트럼프는 미국에서 일종의 극우정치가 실현됨으로써 대통령이 된 자다. 그리고 그를 지지한 무수한 미국의 대중, 특히 백인 중하위계층의 서사를 구성하는 데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이른바 네오콘이었다. 미국판 극우정치엘리트들이다. 그들은 세계화를 반대하고 동아시아 냉전체제를 유지함으로써 끊임없이 존재감을 발휘해온 세력이다. 트럼프 정권에서 네오콘 인사들은 약진을 했고 특히 존 볼튼 당시 국가안보 보좌관은 월스트리트와 워싱턴 사이어서 동요하던 트럼프로 하여금 하노이에서 최종 협상에 난장질하도록 이끌었다. 결국 평화체제 기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제 워싱턴의 정치권은 중국견제 논리에 압도되었고, 바이든은 그것을 신냉전체제 기획을 통해 실행에 옮기고 있다.

세계의 시민사회는 문재인 정부의 평화체제 기획의 실패를 안타까워했다. 특히 분단체제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한국에서는 더욱 아쉬움을 표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렇게 칭송하기에는 한 가지 점검해야 할 것이 있었다. 문 정부의 평화프로세스에는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게를 조절하는 적극적 행위자의 측면이 두드러졌지만, 그 논의에는 세계화의 피해자들이자 포스트세계화 담론의 또 다른 주역으로 부상하고 있는 퀴어적 존재들 혹은 언더클래스의 목소리가 생략되어 있다. 즉 그것은 자본 중심의 세계화론이 꿈꾸는 경제성장의 담론이지 세계화가 심화시켜 놓은 양극화의 위기, 대중의 언더클래스화 현상에 대한 성찰이 생략된 기획이다. 그런 생각을 담아내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을 수도 있지만, 문 정권의 폭넓은 지지세력 사이에서 이런 고민의 흔적은 거의 제기되지 않았다. 복지확대 정도가 거의 유일한 고민인 것으로 보인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유동성이 급증한 세계에서 서유럽의 국가복지가 아무런 대안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아니 오히려 극우주의적 파시즘이 발흥했다. 그런 점에서 조국 당시 민정수석이 정부가 발의한 헌법개정안을 국회에 상정하기 전 대국민설득을 위해 방송을 통해 그 아이디어를 이야기할 때 기본권의 주체를 국민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말한 것,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문 정부의 포스트세계화에 관한 퀴어적 문제제기였다.

게다가 한반도 평화체제 기획안은 동아시아의 자원 생산 과정에서 돌출하게 될 환경의 문제를 거의 고려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전제로 하는 발전기획안이기도 하다. 신종 팬데믹 사태들이 주로 남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밀림이 개척되면서 나타난 이종감염바이러스(heterogeneous virus) 질환이라면, 어쩌면 동아시아가 그런 질환의 발생장소로 부상할 가능성도 있다. 더욱이 오존층의 파괴로 인한 기후위기도 한국 중심의 포스트세계화 담론이 직면해야 하는 과제였다.

세계화로 인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망이 무한히 확대되게 했고, 사람과 동물의 간극도 해소되었다. 또한 자연환경도 공존하지 않으면 상생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심지어 바이러스와도 생생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모든 경계는 허물어지고 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상생의 체계를 통해 포스트세계화 시대는 구현되어야 위기가 한꺼번에 터지는 퍼펙트 스톰의 위기를 우회할 수 있다.

민중신학의 오클로스론은 세계화가 초래한 새로운 민중문제인 언더클래스화 현상에 대한 민중신학적 비평으로 적절하다.(16) 여기에는 언더클래스의 발화 능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세계화 시대 자본주의적 지배양식에 대한 신학적 비평이 함축되어 있고, 언어가 되지 못한 그들의 소리(‘한의 소리’)를 정치적 언어로 재현하는 것에 관한 아고니즘적 문제제기가 담겨 있다.

하나 더, 특정한 소리를 언어화되지 못하게 하는 지배체제의 메커니즘에 대해 민중신학은 죄의 체제라는 문제설정을 통해 신학적 비평을 한 바 있다. ‘한의 자리는 감옥이라고 말한 김지하의 문제제기를 서남동은 한의 자리는 죄라고 신학화했고 안병무는 죄를 죄의 체제(regime of sin)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그런 죄의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안병무의 말기 사유는 살림의 관점으로 리셋팅한다. 즉 김지하나 서남동, 그리고 안병무, 나아가 후세대 민중신학자들 대부분은 민중을 계급화된 인간의 질서에 국한해서 사유해 왔는데, 그것을 보다 확장해서 살림과 죽임의 체제에 관한 논의로 사유를 확장할 것을 안병무 자신이 제안한 것이다. 포스트휴먼시대의 트랜스패미니즘을 논한 캐서린 캘러(Catherine Keller)는 민중신학의 오클로스적 언더클래스와 비슷한 논점을 언더커먼스(undercommons)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언더커먼스론의 초점은 포스트휴먼적이라는 데 있다. 인간 중심적 사유를 넘어서야 언더클래스가 더 잘 보인다는 얘기겠다. 안병무의 살림이 바로 그렇다.(17) 윤석렬 식의 공안정치와 문재인 식의 평화정치에 대한 민중신학의 살림정치가 추구하는 것은 거대한 이데올로기들(냉전이라고 하든 평화하고 하든)이 주장하는 지배담론들, 그 공공성의 언어체계 속에서 언어를 도난당한 포스트휴먼적 존재들(언더클래스든 언더커먼스라고 하든)의 은폐된 배제와 박탈에 관해 증언하고 그들의 말이 되지 못한 소리를 대언하는 것, 그것이 민중신학이 과제로 짊어져야 하는 살림정치의 내용이다. 바로 지금이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할 시간이다.

 

 

[후주]

(1) http://whytimes.kr/skin/news/basic/view_pop.php?v_idx=1202

(2) ‘포맷은 방송 제작 및 비즈니스 분야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는 용어로, 미국 폭스티비의 더 마스크드 싱어(The Masked Singer)는 한국의 복면가왕의 포맷을 수입하여 제작한 것이다. 한편 지난 213일 한미일 외교차관회의가 워싱턴DC에서 열렸는데, 미국의 웬디 셔먼 국무부 부장관은 미일 외교산업장관이 참여하는 경제정책협의위원회(EPCC)나 미국, 인도, 호주, 일본이 참여하는 안보협의체 쿼드’(Quad, quadrilateral security dialogue)에 한국 등을 참여시키는 것을 두고 새로운 포맷을 적극 고려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은 냉전정치 혹은 안보정치의 아시아태평양 판 포맷의 관점에서 이야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포맷이 국제정치학의 용어로 재활용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윤석렬 정부와 기시다 정부의 정상회담을 포맷 전략의 관점에서 논평할 수 있다.

(3) 박진 외교부 장관은 한일 정상회담을 브리핑하면서 이제 물 반컵은 일본이 채울 것이라고 말했다. 즉 윤 정부는 선제적 양보를 했다는 것이다.

(4) 김태주, 일본 기시다 정부 인사의 함의자민당 파벌정치, 기시다 리더십, 한일관계 영향, INSS전략보고서207(January 2023) 참조.

(5) 그들이 어떤 세력이든, 국민의 지지를 받든 증오의 대상이든 관계없다. 단지 친미, 반공 노선인가만 중요했다.

(6) Douglas A. Irwin , “Globalization is in retreat for the first time since the Second World War”, PIIE (October 28, 2022). https://www.piie.com/research/piie-charts/globalization-retreat-first-time-second-world-war

(7) 강내영 외, 4차 산업혁명 시대, 제조업 기술혁신과 리쇼어링선진 제조강국을 중심으로, TRADE FOCUS(2021 05), 31.

(8) 정재용 기자, 미국 전문가 "펜스 부통령의 대중국 비판연설은 신냉전 선언, 연합뉴스(2018.10.13.) https://www.yna.co.kr/view/AKR20181013024600009

(9) 브릭스는 브라질(B)러시아(R)인도(I)중국(C)남아프리카공화국(S)의 신흥경제 5국으로 구성된 경제공동체다. 이 경제공동체의 주축국은 중국이다. 한편 글로벌 남반구가 오늘날 국제정치의 주요 변수로 부상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는 김태균, 글로벌 남반구의 부상과 세력 전이, 세계질서 변화와 주요국의 대전략미래질서 전망과 한국중장기 외교전략에의 함의(국회미래연구원 연구보고서, 2022), 66~98쪽 참조.

(10) 장지향, 2022년 중동에 친구도 적도 없다, 매일경제(2022.01.12.) https://www.mk.co.kr/news/contributors/10181058

(11) [애치슨 시대] 트럼프는 , 바이든은 삼성 찾았다돈 버는 공급망이 안보, 중앙일보(2023.01.12.) https://n.news.naver.com/article/newspaper/025/0003252831?date=20230112

(12) 환경오염이나 산업재해에 관한 법률은 대표적인 사전규제 법안들이다.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도 사전규제의 요소가 들어 있다.

(13) 이러한 가정이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포스트현대의 법학을 법시학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곤 한다. 김연미, 법적 상상력과 법시학정의의 기획들, 법철학연구192(2016) 침조.

(14) 정채연, 포스트휴먼 법담론: 탈근대적 인간의 법적 수용을 위한 시론적 연구, 안암법학회54(2017) 참조.

(15)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에서, 그동안 고전적 제국론들이 다루지 않았던 예술, 친교, 봉사 등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으로 포획한 삶정치적 생산구조가 현대자본주의적 메커니즘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음을 논하고 있다. 이것은 근대국가적인 몸과 정신의 이분법이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하여 오늘날 근대국가적 체계를 포스트근대국가적 체계로의 이행이 다양하게 실험되고 있다.

(16) 나의 글 오클로스론의 현재성안병무의 예수역사학 다시 읽기참조. https://owal.tistory.com/605

(17) 나의 글 민중신학, 21세기적 전환에 관한 내설안병무의 살림과 포스트휴먼적 아고니즘의 정치신학_한신대신학대학원 목요강좌(2022 11 10) 참조. https://owal.tistory.com/6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