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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남자와 동침하면 사형에 처하라”(〈레위기〉 20,13) - 유다귀환공동체의 순결주의 정치학

[성서와 동성애] (오월의 봄, 2022)의 제1장 원고.

같은 제목의 강의 원고를 올린 바 있는데, 꽤 더 보완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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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동침하면 사형에 처하라(레위기20,13)

유다귀환공동체의 순결주의 정치학

 

 

남자가 같은 남자와 동침하여 여자에게 하듯 그 남자에게 하면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한 것이므로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죄값으로 죽는 것이다. (레위기20,13)

 

 

이 책의 첫 번째 장은 동성애 반대론을 펴는 것처럼 보이는 몇 안 되는 성서 구절 가운데 가장 폭력적인 언사를 담은 텍스트인 레위기20,13에 관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구절을 담고 있는 텍스트는 동성애 문제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동성 간의 사랑은 당시 지중해 지역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흔히 일어나는 성적 행위에 속했고, 심지어 남성 동성애는 권장되는, 이상적인 사랑이었다. 해서 어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아무도 화들짝 놀라지 않는 것처럼 남성 동성 간의 사랑에 대해서도 그랬다. 그렇다면 남자와 남자가 사랑한 것을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규정한 본문은 동성애에 대해 반대하는 텍스트일 가능성보다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럼에도 이렇게 표현되었으니 그 의미를 해명할 필요가 있다. 그 역사적 내막, 그 의미의 가능성을 살피는 것이 이 장의 목표다.

 

극형에 관한 두 개의 텍스트: 레위기20장과 출애굽기21,12~17

 

레위기20장에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에 대하여 16가지를 열거하고 있다. 이것은 사형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또 다른 성서본문인 출애굽기21,12~17과 대조된다.

아래 표에서 보듯 출애굽기6개 살인죄 항목 중 5개를 사형죄로 처리한다. 법적 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 내용이 명료하다. 나머지 하나(21,13)는 과실치사 항목으로 극형에서 제외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렇게 극형에 해당하는 범죄를 명료하게 다루고 있고 과실치사까지 항목화하고 있는 것은, 이 법조문이 실정법으로 활용되기에 손색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반면 레위기의 항목들은 그 수가 너무 많아 일일이 기억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게다가 그 내용이 대부분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사사로운 성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어서 극형죄에 관한 법전다운 면모가 약하다. 아무튼 레위기가 상상하는 법공동체는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이런 사사로운 성적 행위들이 공공의 안녕을 해치는 중대한 범죄라고 이해했다.

왜 사적인 성적 행위들이 공공의 안녕과 관련이 있을까. 이에 대해 레위기20,23은 이렇게 말한다. “쫒아낼 민족의 풍속을 따른백성들로 인해 하느님의 눈에 났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의 이면에는 나라가 멸망하고 임금을 포함한 지배층들이 유배되기까지 했던 국난의 원인이 이 죄들탓이라는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뒤에서 더 얘기하겠지만, 여기서 멸망한 나라는 유다국이다. 정복자인 바벨로니아는 이 나라의 유력인사들을 대거 강제유배시켰는데, 그들의 일부가 돌아와 귀환자 재건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다. 이들 귀환자들은 그 땅의 소유권을 주장했는데, 문제는 그 땅에 다른 이들이 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바로 위에서 언급된 쫓아낼 민족이다. 그런데 귀환자 공동체의 가정 내에서 자행되는 일련의 성적 행위들이 바로 이 쫓아낼 민족의 풍속을 따른 결과라고 레위기는 주장하고 있다.

하여 앞으로는 이런 죄들을 저지른 자들을 극형에 처함으로써 민족이 정화되면 빼앗긴 땅을 하느님이 되찾게 해준다는 주장(24)으로 이어진다. 바로 여기에 이 텍스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담겨 있다. 요컨대 특정한 사적인 성적 범죄를 극형에 처하라는 법적 주장이 이 땅에 대한 귀환자 세력의 소유권 주장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런 역사적 개요를 좀더 자세히 이야기할 것이다. 아울러 이런 맥락에서 레위기가 어떤 주장을 하는 문서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묻고자 하는 13, “남자가 남자와 동침하면 둘을 사형에 처하라는 텍스트는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더 역사적 개연성을 지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레위기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출애굽기21장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출애굽기21장의 역사적 맥락

 

이 텍스트는, 문맥상으로 보면, 이집트에서 탈출해서 광야를 유랑하던 시절에 모세가 신으로부터 받은 법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유랑자 공동체에서 성문법이 필요할 리는 없다. 이웃을 죽인 죄(14)나 유괴범죄(16) 등은 정착민들 사이에서나 있을 법한 범죄다. 과실치사 범죄자의 경우 정하여 준곳으로 도피하게 했다(13)는 내용도 유랑민의 현실보다는 정착민의 현실을 전제로 한다.

이 텍스트가 포함된 법전을, 학자들은 계약법전(Covenant Code, 출애굽기20,22~23,33)이라고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신명기보다 오래된 법전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형성 시기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추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유다국에서 신명기텍스트의 최초본이 만들어진 요시야 왕 시대(기원전 7세기 말)보다 더 오래된 성문법전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왜냐면 요시야 왕 이전에는 잘 발달된 문자 체계가 통치에 활용된 흔적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증조부인 히스기야 왕 시절에는 왕의 인장이 새겨진 도기 파편이 발견되었는데, 그건 아마도 징세용 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히스기야 때는 아직 그 정도였다. 그때까진 적어도 통치에서 문자 활용이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성문법은 국가가 충분히 발달하여 중앙집권적 체계가 구축된 뒤에나 등장한다. 애초의 국가보다 영토도 훨씬 확장되고, 귀속된 부족들을 보다 잘 통합하기 위해 법전이 필요하게 된다. 하지만 필요하다고 해서 바로 성문법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록문화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야 하고, 서기관을 포함한 관료제도가 상당히 체계화되어야 가능하다. 또 그런 제도를 장기간 유지할 만큼의 탄탄한 왕실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나아가 영토 내의 각 지역까지 영향을 미칠 만큼의 통치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그 법은 무의미하다. 유다국에서 그런 법전이 가능했던 유일한 시대는 아하스부터 요시야까지 5대에 걸친 군주들의 시대다.(아하스히스기야므낫세아몬요시야)(01) 그때 등장한 법전이 신명기. 그리고 이 법전의 내용이나 외적 증거 등은 그때가 요시야 시대임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요시야 시대에 신명기처럼 완성도 높은 법전이 느닷없이 탄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해서 요시야 왕이 이 법전을 완성하기 이전에 보다 발달된 국가의 법전을 차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애굽기에 담겨 있는 계약법전이 바로 그 차용된 법전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 차용된 법전의 출처는 아마도 이스라엘국 법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가깝기도 하거니와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에서 가장 발달한 나라이기도 했고, 유다국과 같이 야훼 신을 최고신으로 숭배하는 나라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흔히 학자들은 이 차용의 경로가 다음과 같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멸망의 위기에 처하고 결국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난민들이 전란에 휩싸인 나라를 떠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중 적잖은 이들이 가까운 유다국으로도 유입되어 들어갔고(02) 그중에는 일단의 서기관들이 이스라엘국의 문서들 일부를 가지고 귀하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문서들 속에 계약법전혹은 그 원형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요시야는 이들을 왕실 서기관에 편입시켰고, 그 덕에 유다국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대대적인 문서 편찬사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오늘날 1성서(구약성서)의 상당부분은 바로 이 시기에 최초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특히 요시야 왕실의 문서화 작업 중 핵심인 신명기를 편찬해내기 전(요시야 왕실 혹은 그 선왕의 왕실에서) 이스라엘국의 법전을 조금 다듬어 사용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기에 담긴 계약법전이라는 얘기다.

 

레위기20장의 역사적 맥락(I)제사장들의 시대

 

그렇다면 레위기20장의 역사적 맥락은 어떠했을까? 이 텍스트는 일반적으로 성결법전(Holiness Code)이라고 알려진 법문서(레위기17~26)의 일부다. 이 이름은 너희의 하느님인 나 주가 거룩(성결)하니, 너희도 거룩(성결)해야 한다.”(19,2; 20,726; 21,8; 22,35)는 구절이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다른 텍스트들에 비해 유난히 성결(qadosh, holiness)을 강조하고 있다.

이때 성결의 내용은 주로 제사예물과 깊은 관련이 있고 그것을 주도하는 이들은 제사장들이다. 특히 아론계 제사장들이 이 법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법전의 반포를 맡은 책임자들이 아론과 그의 자녀들곧 아론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제사장 그룹인 것이다.(레위기17,2: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그리고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라.”)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에 관한 것이다. 아래 인용구에서 보듯 은 성결법전에서 율법을 둘러싼 상벌 사항의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다.

 

내가 그들을 거스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과, 그래서 내가 그들을 원수가 사는 땅으로 보냈다는 것을 깨닫고, 할례받지 못한 그들의 마음이 겸손해져서, 자기들이 지은 죄로 벌을 기꺼이 받으면, 나는 야곱과 맺은 언약과 이삭과 맺은 언약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그 땅도 기억하겠다. 그들에게 버림받은 그 땅은, 오히려 그들이 없는 동안 폐허로 있으면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 기간에 그들은 내가 명한 법도를 거역한 죄값과 내가 세운 규례를 지키지 않은 죄값을 치를 것이다. 비록 그들이 죄값을 치르고 있더라도, 그들이 원수의 땅에 잡혀가 있는 동안에 나는 절대로 그들을 버리지 않겠다. 미워하지도 않고 멸망시키지도 않겠다. 그래서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을 깨뜨리지 않겠다. 내가 주 그들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레위기26,41~44)

 

이 텍스트는 이스라엘 족속이 이집트로 가서 노예로 살다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내용처럼 들린다. 하지만 동시에 유다국이 멸망하고 유배된 자들이 돌아와 땅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의 정당성에 관한 얘기이기도 하다. 여기서 초점은 후자에 있다.

왜냐면 이 텍스트는 제사가 사회를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제사장들이 그 중심 역할을 하는 상황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맥은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던 시대와 잘 맞지 않는다. 반면 유다국이 멸망한 이후 바벨로니아로 유배되었던 유다계 귀환민들이 돌아와 정착민들과 땅을 둘러싸고 각축을 벌이던 시대와 잘 부합한다. 출애굽 시대의 핵심 기조는 해방이지 제사와 정결문제가 아니었다. 반면, 귀환자들이 보기에, 자기들은 유배 상황에서도 정결을 지켜왔는데 이 땅에 남아 있던 이들은 부정한 자들이었다. 하여 그들은 귀환민과 토착민을 순결과 부정의 틀로 구별짓기 하는 프레임을 만들어냈다. 그런 점에서 성결법전은 귀환자들의 이해와 더 잘 맞는다.

사실 출애굽 이야기는 역사라기보다는 신화에 가깝다. 여기서 신화란, 역사와 대립된 허구적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화는 역사의 반영물이다. 다만 사실적 이야기인 듯 사건을 묘사하는 역사적 이야기와는 달리, 사람들이 사실적이라고 느끼는 상념을 초과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속에는 역사가 반영되어 있다.

 

레위기20장의 역사적 맥락(I)헬레니즘 시대

 

(1) 페르시아 초기, 성전 재건군주국 재건 프로젝트

이스라엘 사회에서 출애굽의 신화적 이야기가 구성된 시기는 언제일까. 나는 이스라엘 부족동맹 시대(기원전 13~11세기경)였다는 오래된 가설에 동의한다. 그러한 신화가 문서 텍스트로 자리잡은 것은, 수백 년이 지난 뒤인 군주제 시대였다. 아마도 선진국인 이스라엘국에서 먼저 문서화가 진행되었을 것이다.(03) 그런데 이 나라는 곧 역사에서 사라졌다.(기원전 722년 이후) 이에, 위에서 정리한 것처럼, 유다국으로 남하한 이스라엘계 서기관들이 요시야 왕실에서 계약법전을 유다국의 초기 법전으로 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보는 제1성서의 초최형태였다.

이런 방식으로 부족동맹 시대를 다루는 이스라엘국의 기록들은 유다국 요시야 왕실 서기관들에 의해 선사(先史)적 기억으로 자리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서 시사되고 있듯, 레위기는 유배된 유다국 엘리트들이 귀환해서 자치공동체를 만들던 때(기원전 6세기 말 이후)를 배경으로 한다.

좀 더 그 배경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해보자. 바벨로니아 제국에 의해 멸망한 유다국은 전 국토가 초토화 되다시피 했다. 고고학적 조사에 따르면 왕국이 급격히 몰락하던 기원전 6세기를 거치면서 유다국 인구의 85%가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되었다. 정착지의 80%가 파괴되었고 특히 도시들 대부분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이후 사치품 사용의 흔적이나 이렇다 할 건조물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한동안 지배층을 대체할만한 세력이 그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편 바벨로니아로 유배된 이들은 지배층 일부와 군인, 장인집단 등으로, 그 규모에 대하여 열왕기상에는 두 차례에 걸쳐 각각 1만 명과 8천 명으로 말하고 있는 반면,(24,1416) 예레미야서에는 4,600(=3,023+832+745)으로 묘사되어 있다.(52,28~30) 예레미야서의 수치가 공식 기록에 근거한 듯한 인상을 주지만, 그 조사에서 누락된 유배민들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수가 18,000명을 넘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점에서 가장 느슨하게 추정하면 유배민의 총수는 4,600명과 18,000명 사이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바벨로니아는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했다. 이 신흥패권제국의 황제는 고레스(키루스 2, Kyrus)였다. 하지만 이 엄청난 역사적 사실보다 유다계 유배민에게 있어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바벨로니아에 의해 강제 이주되었던 이들이 본국으로 귀환해도 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는 점이다.

이후 페르시아 시대에 팔레스티나로 귀환한 유다계 이민자들의 행렬에 대해 우리는 최소한 네 번의 사례를 알고 있다.

첫째와 둘째 귀환운동은 세스바살(에스라기1,8~11)과 스룹바벨(에스라기2,1~2)이라는 구 왕족 출신 인사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그들은 대략 기원전 6세기 중후반에 유대아 지역, 특히 예루살렘과 그 인근 지역으로 돌아왔다. 이중 스룹바벨은 학개와 스가랴 등의 예언자와 아론계 제사장(04)인 예수아(여호수아의 축약형) 등의 보좌를 받으며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축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귀환자들의 정착은 녹록치 않았다. 당시는 사마리아와 암몬에 자리잡은 정치세력이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고, 예루살렘에 정착한 귀환자들의 정치적 위상은 매우 미미한 수준이었다. 아무튼 이때까지 유다사회의 재건은 군주국가로의 재건을 의미했다.

그러나 고레스 시절의 귀환공동체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을 작은 규모로나마 재건함으로써 정체성을 겨우 유지하는,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존재감 없는 집단에 불과했다. 그들은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지만 결코 선주민들(indigenous peoples)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했고 강제로 병합할 능력도 없었다. 게다가 귀환공동체의 대다수 주민들은 땅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토착세력과 갈등하기보다는 서로 뒤얽혀 살아가는 방법을 택했다. 그것이 존재감 없는 신흥집단이 주위의 압박에서 생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겠다. 그들 중 상당수는 혼인관계로 엮이기까지 했다. 최상류층의 경우도 사마리아와 암몬의 귀족층들과 혼인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러한 공존이 더 진보적이거나 더 보수적인 사회가 되게 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지만, 아무튼 귀환민들과 토착민들은 평화롭게 서로 얽혀 살아갔다.

 

(2) 페르시아 후기, 국경의 탄생제사장 사회의 탄생

그런데 세 번째와 네 번째 귀환운동 시기에 이르면 이러한 평화적 공존의 질서가 빠르게 무너져갔다. 기원전 5세기 초반에서 4세기 후반 무렵(05) 느헤미야와 에스라를 주축으로 하는 귀환자 집단이 새로 유입되어 들어왔다. 이 귀환자 대열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귀환민과 토착민 사이의 인구비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귀환운동에서 주목할 것은 그 지도자들에 있다. 그들은 구왕족 출신 인사들이 아니라, 페르시아에서 관료로 재직하던 유다계 인사들이었다. 느헤미야는 정무적 직책을, 에스라는 종교적 직책을 맡았던 듯하다. 느헤미야의 귀환에서 주목할 것은 예루살렘 성벽(shur)을 재건한 것인데, 이로써 유다귀환공동체는 명실상부한 정치세력으로서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스라는 율법(torah)을 반포하여 귀환공동체의 내적 통합을 도모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느헤미야의 성벽건축 프로젝트가 유다귀환공동체의 정치적 국(political territorialization)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한다면, 에스라의 율법화 프로젝트는 유대아의 사회종교적 국경(socio-religious territorialization)을 구축하는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에스라는 사독계 제사장인데,(에스라기7,1~2) 페르시아 제국 관료로서 유다계 이민자 집단의 제사장직을 수행했던 자로 보인다. 그는 페르시아 황실의 명을 받고 유대아 지역으로 귀환한 이후 최고지도자로서 율법을 반포했는데, 이것은 인근의 강력한 정치세력인 사마리아와 암몬에 대해 적대적인 분리주의 정책의 일환이었고, 공동체 내부에 대해 강한 동질성을 추구하는 자폐적 순결주의운동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것이 궁극적 목표로 삼은 것은 유다귀환공동체를 명백한 친페르시아 세력으로 재편하려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유다귀환공동체를 독립적인 정치세력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이로써 평화롭게 뒤섞여 살던 시간은 끝났다. 이제 정복하려는 자정복되지 않으려는 자간의 치열한 쟁투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느헤미야-에스라 이후 유다귀환공동체는 사마리아와 암몬으로부터 사실상 독립적인 정치세력으로 부상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느헤미야-에스라의 정책을 계승하는 이들이 계속 귀환공동체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추정컨대 치열한 권력투쟁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특히 분리주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부상한 사독계 제사장 세력과 분리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탄핵의 대상이 되었던 아론계 제사장 세력 간의 쟁투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계속되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데올로기적 차이는 점점 모호해졌다. 두 분파 모두 분리주의 프레임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변화해갔다. 외부의 강력한 세력으로부터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살아남기 위해 유대아의 정치세력들은 국경을 더 견고하게 만드는 방식으 택했고, 그것은 분리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고착화로 나타난 것이다.

이 시기 요시야 왕 이후 중단되었던 문헌 집필과 편찬운동이 재개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그러나 윌리엄 슈니더윈드(William M. Schniedewind)의 문제제기처럼, 페르시아 치하의 귀환공동체 시대에 이러한 문자문화가 활성화되었다고 볼 만큼의 사회적 인프라가 잘 구축된 증거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아시리아와 바벨로니아 시대로 이어지는 장기간에 걸친 전란으로 흩어진 인구가 페르시아 시대에 회복되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게다가 페르시아 시대에 히브리어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문헌화운동을 펼칠 만큼의 문자활동이 활발했다는 증가 또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요컨대 아직은 성서문헌의 체게적인 집필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3) 헬레니즘 시대, 성서문헌 편찬운동과 레위기20장의 시대적 배경

그나마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면, 요시야 왕의 시대에 비해 인구나 경제가 여전히 열악한 상황이긴 하지만, 쿰란의 가장 오래된 문서가 기원전 3세기 중반경에 기술되었다는 점에서, 성서 편찬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그 이후로 내려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원전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 제국(06) 치하에서 성서편찬 운동이 일어났다고 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

더욱이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이 패권세력이던 헬레니즘 시대 초기는 지중해 전반에 걸쳐 폭넓게 문서운동이 일어날 만큼 문자문화를 위한 사회적 인프라가 잘 구축되던 시기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이 주도하는 지중해 경제의 활황기가 그 기반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거대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07)이 건설되면서 지중해 전역에 걸쳐 필사자의 막대한 수요를 촉발한 것으로 보이고, 그 과정에서 필사의 비용도 매우 저렴해졌다. 이에 민간서기관들이 지중해 전역에 걸쳐 대거 등장했다. 그들 중 다수는 서민 출신이었다. 지중해의 경제의 활황으로 부를 어느 정도 축적한 서민 출신 신흥중산층이 크게 증가하면서 그들 가운데 학자들이 탄생한 것이다. 즉 그들은 필사자일뿐 아니라 저술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들에 의해 많은 문헌들이 폭발적으로 생산되었다. 한편 이들 사이에서 대중으로부터 커다란 지지를 받는 지도자들도 등장했고, 그들의 대중동원력은 지중해 각 지역에서 벌어진 숱한 계급투쟁의 원인이 되곤 했다.

팔레스티나에도 코헬렛(Qohelet, 전도자)이라고 불린 현자들이 등장했고, 그들이 만든 문헌들 중 대중에게 인기가 높은 문헌들인 욥기〉 〈전도서〉 〈잠언등이 정전(canon)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시사한다. 다니엘서12,3에서 한글새번역성서가 지혜 있는 사람으로 번역하고 있는 함마스킬림(hammaskilim)도 지식을 가진 신흥엘리트층의 지도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고, 하시딤(Hasidim), 에세네, 바리사이 등도 헬레니즘 시대에 등장한 서민 친화적인 지식인 집단을 가리키는 다양한 표현들로 보인다. 한편 이들 대중 친화적인 지식인 집단에게서 진보적 성향의 문헌들도 등장했다. 특히 이사야서후반부에 덧붙여진 2, 3이사야 텍스트들(이사야서40~55, 56~66)은 이 시기 지배층들의 분리주의 운동에 적극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었다. 또한 묵시문학 같은 진보적 지식인들의 문헌들도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럼에도 대체로 보수주의 성향의 분리주의 이데올로기는 유다귀환공동체의 지배적인 기조였다. 그런 입장을 주도한 이들로는, 이 시대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제사장계열과 후기신명기계열(08)의 서기관들이 대표적이다. 그중 아마도 레위기나 그것에 수록된 성결법전은 제사장계열의 대표적인 문서다. 특히 아론계 제사장들이 이 문서편찬을 주도했다.

이들 아론계 제사장들은 페르시아 초기인 제1, 2차 귀환자 물결 이후 유다귀환공동체를 주도하는 제사장 세력이었다. 하지만 이때까지 그들은 분리주의적 세력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사독계 제사장인 에스라의 분리주의 정책에 의해 아론계 사제들이 대대적으로 숙청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부활하여 사독계 제사장 계열과 치열한 권력쟁투를 계속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헬레니즘 시대의 문헌인 레위기와 그 속에 포함된 성결법전에서 보듯 아론계 제사장들은 사독계 못지않은 분리주의적 신학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페르시아 후기, 특히 헬레니즘 시대에 오면 많은 아론계 제사장들도 분리주의 성향으로 그 이데올로기적 성향이 변화된 것이다.

하여 결론을 얘기하면 레위기와 그 속에 포함된 성결법전은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되는 기원전 3세기 사이에 형성, 보완, 발전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즉 에스라 시대부터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가 끝나던 기원전 4세기 말까지는 그 맹아기가 있었을 것이지만, 본격적인 편찬운동은 헬레니즘 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레위기도 헬레니즘 초기인 기원전 3세기의 편찬운동의 산물로 탄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그 맹아는 그 이전부터 준비되고 있었을 것이고, 그 이후에 수정보완이 계속되면서 아마도 기원전 1세기쯤에는 최종 형태에 가까운 버전이 탄생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 남자끼리 동침하면 죽어야 하는가

 

(1) 레위기20장은 집권세력의 이데올로기적 홍보물

이제 우리는 레위기가 헬레니즘 시대 초기에 아론계 제사장들의 문서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남자끼리 동침하면 죽는다고 말하는 20,13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드는 질문은 레위기20장의 16개 극형 항목 중에서 여자끼리 동침하는 문제는 왜 없을까 하는 것이다. 반동성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것이 동성애에 대한 구절이라면 남녀 간의 사랑 이외의 모든 사랑을 예외 없이 처벌하는 게 상례일 텐데, 여자끼리의 사랑은 처벌 항목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여성을 법적 주체로 간주하지 않은 탓이라고 말한다. 또 실수로 누락된 것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하지만 20,15~16을 보면 동물과 교접하는 것을 뜻하는 수간의 경우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죽이라는 문장이 각각 따로 명시되어 있으니 여성을 법적 주체로 간주하지 않은 탓에 여성 동성애 처벌 얘기는 할 필요가 없었다거나(09) 실수로 누락된 것이라는 주장들은 타당성이 없다. 실제로 남녀 간의 사랑 외에도 사형에 처할 부적절한사랑들이 20장에는 여러 가지가 명시되어 있다. 타인의 아내와 동침하는 경우, 아비의 아내와 동침하는 경우, 시아버지가 며느리와 동침하는 경우, 사위가 장모와 동침하는 경우, 남자가 아버지의 딸인 이복누이나 어머니의 딸인 이복누이와 동침하는 경우, 남자가 월경하는 여자와 동침하는 경우, 남자가 고모나 이모와 동침하는 경우, 남자가 숙모와 동침하는 경우, 남자가 형수나 제수와 동침하는 경우 그런 짓을 한 남자와 여자 모두를 처형하라고 한다. 그러니 남자끼리 동침하는 것만 언급된 것은 여성을 법적 주체로 간주하지 않은 탓도 아니고 실수로 누락된 것도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은 레위기 극형에 관한 법들은 출애굽기의 중범죄들처럼 명약관화한 것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범죄에 대한 처벌이 마찬가지지만 특히 극형에 있어서는 누구나 그런 범죄는 동일하게 처벌된다는 사회적 믿음이 필수적이다. 만약 어떤 이는 극형에 처해지고 다른 이는 좀 더 가벼운 형을 받거나 아예 처벌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면 그 법은 신뢰를 상실할 것이고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한데 레위기20장에 언급된 범죄들이 과연 명약관화하게 다루어질 수 있는 것들인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 명시된 항목들 대다수는 집안에서 사사로이 벌어진 일들이다. 그것들에 대한 처벌이 극형이니 대개의 경우 가문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사력을 다해 숨길 것이다. 하여 그런 범죄자를 색출하지조차 못한 채 넘어가는 일이 허다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 항목들은 실정법으로서는 거의 무의미하다. 이 법률들은 일부 시범케이스들에 대한 색출과 처벌로서만 유의미했을 것이다. 즉 그것은 공포의 퍼포먼스를 위한 법적 알리바이 정도로만 유용한 것이었겠다. 그렇다면 레위기20장은 실정법이라기보다는 집권세력의 이데올로기적 홍보물에 가깝다.

 

(2) ‘히에로스 가모스레위기20,13

다시 13, 남자끼리 동침하는 것에 대해 얘기해보자. 남자끼리에 방점이 찍혀 있을까? 여기서 하나의 개연성 있는 가설은 히에로스 가모스(ίερός γάμος)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히에로스 가모스거룩한 결혼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인데, 성소에서 남자 제사장들이나 여자 제사장들이 신의 역할을 대행하여 숭배자들과 만드는 가상결혼식을 말한다. 이 결혼식은 숭배자들의 대표자와 제사장이 성관계를 맺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제의다. 이 의례는 가상결혼식을 수행하는 이들과 거기에 모인 이들이 함께 한 판 열광적으로 잔치를 벌이는 결혼식 축제 의례다. 여기서 사람들은, 이 지역의 결혼식이 대개 그렇듯이, 제사장과 숭배자 가릴 것 없이 서로 얽혀 노래하고 춤추며 함께 식사하고 그 절정에 신부와 신랑이 성관계를 맺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의례는 기본적으로 다신교적이라는 점이다. 풍요와 관련된 모든 신적인 존재가 이 축제에 참여한다. 특히 남신과 여신이 커플이 되어 참여하는 경우가 흔하다. 여기서 대표적인 여신들로는 가나안의 아세라(Asherah)아스다롯(Astaroth), 바벨로니아의 이슈타르(Ishtar), 아시리아의 아낫(아나투, ‘anatu), 그리스의 아프로디테(Aphroditē), 로마의 베누스(Venus) 등이 있다. 이들은 금성(金星)을 상징하는 여신들로 풍요와 다산을 표상한다. 이때 야훼는 종종 아세라 혹은 아스다롯 신과 부부로 등장한다. 왜나면 야훼와, 아세라 혹은 아스다롯은 팔레스티나 지역의 대표적 커플신들이기 때문이다.

호세아서에 의하면 야훼와 아세라(또는 아스다롯)가 부부로 등장하는 히에로스 가모스 의식이 이스라엘국의 성소들에서 흔히 벌어지고 있었음이 시사되어 있다.(10) 유다국보다 더 남쪽의 시나이반도 북단의 쿤틸렛 아주르드(Kuntillet`Ajrud) 요새에도 야훼와 아세라가 부부로 등장하는 벽화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신들의 결혼을 전제로 발전한 히에로스 가모스 의례가 여기서도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물론 이 요새는 이스라엘국의 식민지였지만, 위치상 이 지역의 의례와 연관된 신앙이 이 요새의 예배에도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큰다. 그렇다면 그곳과 북쪽에 인접해 있는 유대아 사회에도 이런 의례가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고 보는 게 더 개연성이 있다. 사실 히에로스 가모스 의례는 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 사회 곳곳에서 널리 행해지는 의례였다. 이 지역의 모든 의례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어도 대표적 풍요제의 양식으로 곳곳에서 저항감 없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필요 없다. 그리고 위에서 열거한 풍요여신들이 그 거룩한 결혼의례의 주인공들이다. 그러니 팔레스티나, 시리아, 지중해 여러 지역, 메소포타미아 사회 곳곳에서 널리 행해지는 의례가 유대아 사회에서만 없었다고 주장하려면 오히려 논증의 책임을 져야 할 일이다.

한데 기원전 8세기 이스라엘국의 예언자 호세아보다 한 세기쯤 후 유다국에서 요시야 왕이 개혁정책을 펼 때 지방에서 벌어지는 일체의 의례를 중지시킨 적이 있다. 이때 왕실과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의례만을 정당한 것으로 규정했다. 그것은 중앙집중적 왕권체제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조치였다. 많은 지방성소들은 왕권을 위협하는 대지주 귀족들의 아성이었기에 지방성소들의 철폐는 요시야 왕실에게는 대중을 통제하는 데 있어 절대적인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예루살렘 의례는 흥미롭다. 여기서는 야훼가 다른 여신과 부부로 등장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간주했다. 해서 호세아는 유다국의 예언자가 아니라 이스라엘국의 예언자였음에도, 유다국 서기관들이 편찬한 예언자 두루마리에 그의 신탁집이 포함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호세아서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제 야훼는 홀로 성전 안에 있게 되었다. 게다가 모두가 유쾌하게 웃고 춤추는 거룩한 결혼축제 의례가 벌어지는 성전이 아닌, 엄숙하게 의례를 수행하는 폐쇄적인 성전 안에 고독하게 산다. 이 성전은 여러 구역들로 나뉘는데, 여성 백성의 뜰, 남성 백성의 뜰, 제사장의 뜰, 성전 건물이 그것이다. 성전 건물 안에는 대제사장만이 정해진 때에만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성전 건물 내부는 다시 성소(holy place)지성소(the Most Holy)로 나뉘는데, 그중 모세의 법궤가 안치되어 있다는 지성소안에서 제사장은 야훼를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철저히 폐쇄적인 야훼예배가, 아마도 그 원초적 형태가 요시야 왕실의 채플에서 수행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유다국이 멸망하고 유배됐던 이들이 돌아온 뒤 만들어진 후대의 성서 텍스트들을 보면 야훼가 있다던 지성소에는 어떤 조명도 없다. 그러니까 그 안에 들어가도 대제사장은 야훼를 볼 수 없다. 하여 성전 안에도 실상 야훼는 없다는 전승이 생겼다. 그분은 너무 거룩해서 사람이 있는 공간에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계신다고 믿었던 거기에는 단지 그이의 숭고한 흔적만이 있을 뿐이다. 이 시대를 반영하는 제1성서 텍스트들은 야훼의 이 숭고한 흔적을 영광(카보드, kabod)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요시야 개혁은 시도로서만 평가될 만하다. 너무도 오래된 일상화된 관습이 불과 20년도 안 되는 개혁의 시간 안에 사라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더구나 요시야 왕은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 2(Neco II)의 팽창주의 정책으로 인해 비명에 숨졌고(기원전 609), 그의 개혁을 계승하기 위해 그를 지지한 세력이 새 왕으로 추대한 그의 어린 아들 여호아하스(Jehoahaz)는 불과 3개월 만에 폐위되었다. 요시야의 다른 아들이자 여호아하스의 배다른 형인 여호야김(Jehoiakim)이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에 의해 왕으로 새로 옹립되었는데, 그는 반개혁파의 비호를 받는 통치자였다. 그러니 지방성소들 도처에서 벌어지는 종교관행은 요시야 왕 때에 잠시 주춤했을지언정 폐지되지는 않았고 곧바로 다시 활발하게 수행되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전국 곳곳에서 히에로스 가모스 예배는 다시 활기를 띠었을 것이다. 그것을 억압하던 권력은 붕괴했다. 그리고 유다국이 바벨로니아에 의해 멸망하고 고위급 제사장을 포함한 지배층 다수가 유배되었다. 이때 유배된 제사장들은 주로 중앙성전의 대제사장이었다. 지방에서 히에로스 가모스 의례를 방해하는 세력이 사라진 셈이다.

 

(3) 왜 여자끼리 동침하는 것에 관한 항목은 없는가제의의 남성화

오십 년 쯤 지나서 유다국을 멸망시킨 바벨로니아는 몰락했고, 새 제국 페르시아 치하에서 유배된 이들의 일부가 돌아왔지만 초기 귀환집단은 정착에 실패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초기 귀환집단은 구왕족 인사들(세스바살, 수룹바벨)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이었다. 이때에 폐허가 된 성전이 다시 재건축되었다. 학개와 스라갸 예언자는 성전 재건축 운동에 열렬히 참여했던 종교지도자였다. 구왕족 출신 인사 스룹바벨과 최고제사장 예수아는 그 운동을 사실상 이끌었다. 하지만 그렇게 건축된 성전의 규모는 빈약하기 이를 데 없었고, 그 역할도 귀환자 공동체들의 예배터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게다가 가진 것 없는 이주민들이 힘겹게 헌납한 보잘 것 없는 기물들이 비축된 성전은 주변 족속들의 주기적인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하여 재건축된 성전은 오랫동안 다른 성소들을 압도할 위상을 지니지 못했다. 그러니 인근 지역 성소들에서 벌어지는 히에로스 가모스 예전을 억제하기는커녕 견제할 능력도 없었다.

그렇게 한 세기가 지난 뒤 새로운 귀환의 열기가 물결쳤다. 말했듯이 이때 이 운동들을 주도한 것은 페르시아의 관료로 재직하던 유다계 인사들이다. 그들은 제국의 후원을 조직하고 사회를 운용하는 정치력에서 과거의 인사들보다 훨씬 더 뛰어났던 것 같다. 하여 그들이 주도한 귀환운동은 귀환공동체를 과거보다 훨씬 존재감 있는 정치집단으로 자리잡게 했다. 그리고 이 집단은 차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조금씩 그 영역을 확대해갔다.

앞에서 느헤미야는 정치적 국경을 만든 장본인이고, 그 이후 귀환운동을 이끈 에스라는 율법을 반포하여 종교적 국경을 만든 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정치적, 종교적 국경이 구축되어 작동하게 된 새로운 사회는 (전제군주체제가 아니라) 고위급 평신도와 사제가 중심이 되는 귀족과두제 체제였다. 이 과정에서 가장 빠르게 바뀐 것의 하나는 종교의 남성화.

과거 군주국 시대의 이사야는 왕과 독대하여 왕의 정치를 비판하기까지 했을 만큼 영향력이 막강한 예언자였는데, 그의 부인도 국가예언자로 활동했다.(이사야서8,3) 또 요시야 개혁의 핵심인사인 훌다는 신으로부터 이 개혁의 최종인준의 받아내는 이였는데, 그도 여성 예언자였다.(열왕기하22,14) 유다국의 절정기에 최소한 두 명의 여성이 유력한 예언자로서 국정에 관여했다. 한데 유다국이 멸망한 지(기원전 586) 한 세기 후 에스라 식 종교개혁이 본격화된 즈음부터 이 지역에는 정치뿐 아니라 종교지도자 가운데 여성이 사라졌다. 마찬가지로 예배의 주도권을 쥔 백성도 남자였다. 그것은 에스라 개혁이 성공하면서 중앙성소의 위상이 급격히 강화됨으로써 예루살렘 귀환공동체의 영역이 조금씩 확대되었고 그렇게 확장된 지방의 성소들은 예루살렘 성소에 귀속되었다. 이렇게 차츰 지방과 중앙의 성소들 간의 대립은 거의 사라지고 중앙성소 우위인 상황에서 중앙과 지방의 연동체제가 구축된 결과로 보인다.

이제 제사장 간의 갈등의 축은 중앙성소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여기서 사독계와 아론계 제사장 계보가 치열한 쟁투를 벌인 주역들이지만, 그들의 영향력 아래에서 구축된 제사체제의 흔적이 담긴 문서들인 역대기상, 역대기하, 에스라기, 느헤미야기, 그리고 오경 속의 이른바 ‘P-자료층(Priestly Code)(11)이 편찬된다. 한편 우리가 이 장에서 주목하고 있는 문서인 레위기는 주로 P-자료층이 가장 집중적으로 나오는 문서로, 아론계 제사장 계보의 문서로 보인다. 아무튼 이들 식민지 시대 제사장들의 문서 속에는 여성 엘리트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여성은 아무개의 아내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자 이제 정리해보자. 느헤미야-에스라 시대 이후 귀족과두체제로 재편된 유다 재건공동체 사회에서 히에로스 가모스 관행은 계속되었고, 종교와 정치 부문에서 여성엘리트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히에로스 가모스 예배에서 다음과 같은 추정을 할 수 있다. 이 가상결혼식에서 숭배자 대표는 당연히 남자였고 그들과 가상 혼례를 치룰 제사장도 남자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즉 남자와 남자가 거룩한 결혼식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할 성관계의 중심인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레위기의 형성, 발전 시기인 헬레니즘 초기는 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문화적 혼합이 가장 활발하던 때인데, 이 문화혼합을 주도한 것은 그리스문화였다. 해서 그런 현상을, ‘그리스를 뜻하는 용어인 헬렌(Hellēn)에서 유래한 헬레니즘이라고 부른다. 한데 이 시기 많은 그리스 문헌들을 보면 남성동성애는 가장 권장되는 성적 관계였다.

그런데 역설적인 일이 벌어진다. 헤에로스 가모스는 예루살렘 중심의 야훼 신앙과 날카로운 차이를 갖는다. 예루살렘 예배는 엄숙하고 야훼 홀로 숭고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과 접촉도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반면 히에로스 가모스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신과 어울려서 벌이는 한 판의 대동제다. 더구나 그 신은 결혼한 신이다. 신 자신이 이미 다른 신과 혼인관계에 있고, 예배 때마다 숭배자들과 결혼식을 올린다. 해서 예루살렘 성전 사제들의 눈으로 보면 이런 예배는 음탕하고 방만하며 타락한 우상숭배처럼 보였다.

한편 여기에는 예루살렘 귀환공동체의 정치공학적 계산도 들어 있다. 히에로스 가모스 같은 토착적 예배전통은 이웃하는 강력한 정치세력인 사마리아와 암몬의 예배와 별 차이가 없다. 해서 이 축제 때에 사마리아와 암몬의 지도자들이 거액의 기부금을 내기도 한다. 그것은 그들이 예루살렘과 유대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적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지역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유다귀환공동체 지도자들은 저 토착적 예배전통을 음란한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척결함으로써 이곳들에 대한 사마리아와 암몬의 영향력을 차단하려 했다.

요컨대 남자끼리 성관계를 절대 금하는, 그리고 여자끼리 성관계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텍스트인 레위기20,13이 겨누고 있는 실제 과녁은 히에로스 가모스 예배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히에로스 가모스 예배에 대한 비판이 담고 있는 정치공학적 계산에 따르면 사마리아와 암몬의 세력과 연계되어 있는 선주민 엘리트세력을 거세시키고 귀환자 중심의 집단이 예루살렘과 유대아 지역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정치공학적 이데올로기는 이웃종족들과 혼합되는 것에 경끼를 일으키는 순결주의 정치학이라고 할 수 있다.

 

레위기20,13 다시 읽기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 구절을 그 문맥 속에서 철저하게 읽는 태도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 다른 극형 항목들과는 달리 이 항목에서만 유독 남성끼리 성관계를 하는 것만을 다루는 것에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여성을 법적 주체로 간주하지 않았다거나 실수로 누락했을 가능성은 없다. 말했듯이, 이 항목을 제외한 모든 항목에서 남성과 여성을 모두 극형 대상으로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데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독법은 성서 텍스트가 자기 완결적이라는 가정을 전제하는데, 이런 관점은 여기서 위기에 봉착한다. 남성 간의 성관계만을 처형하라는 것에 의문을 품는 데까지 이를 수 있지만 그 이유를 문맥적 이해만으로는 해명할 수 없다. 하여 우리는 여기서 역사적 맥락을 통해 그 문제를 해명하고자 했다. 특히 우리는 기원전 3세기 유대아 지역의 사회정치사를 주목함으로써 그 실마리를 찾았다. 이러한 사회정치사적 맥락 아래서 유다귀환공동체 주체세력이 이 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전략이 이 텍스트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성서 해석의 전부일 수는 없다. 여기서 그친다면 우리가 이 텍스트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유다귀환공동체 주체세력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하느님의 뜻이었다고 하는 황당한 주장일 뿐이다. 혹자는 이것이 역사학적 해석의 한계라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학적 해석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앞에서 내가 폈던 역사학적 해석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가(歷史家) 자신의 관점이 해석에서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은 과거에 관한 것이지만 역사가는 현재를 살고 있다. 이때 역사가가 현재를 살고 있다는 것에는 동시에 그가 지금 여기서 꿈꾸는 미래에 대한 바람이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역사가의 과거에는 미래가 들어 있다. 하여 독일의 역사가인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은 역사를 지나간 미래(Vergangene Zukunft)라고 말했다.

역사가이자 성서해석자로서 나는 독자에게 지나간 미래로서 레위기20,13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제시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했던 첫 번째 주장은 이 구절을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으로 읽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남성끼리 성관계를 한 이들을 처벌하라는 주장 뒤에는 당대에 이스라엘 지역과 유대아 지방 곳곳에서 횡행하던 히에로스 가모스 예배를 우상숭배로 간주하고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만을 성결한 것으로 보는 순결주의 정치학이 있었다. 그것을 통해서 유다귀환공동체 지배세력은 유대아 지역에 대한 자신들의 헤게모니가 정당하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이 동성애 반대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은 페이크 뉴스다.

한편 이러한 해석 위에서 내가 주장하려는 두 번째 것은, 이 구절이 특정 세력의 순결주의 정치학을 담고 있다면 그들의 정치학을 넘어서는 정치학이 필요하다는 문제제기이다. 유다귀환공동체의 정치학은 누군가를 이웃이 되지 못하게 하는 배제의 정치학을 내포하고 있다.

오늘 우리 시대에는 무수한 국경들이 그어져 있다. 국가와 국가를 가르는 선인 (외적)국경(border)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 무수한 내적 국경들이 가설되어 있다. 계급의 국경, 성의 국경, 직업의 국경, 각종 (상징)권력들에 의해 구획된 국경들 등. 그것들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배제하고, 심지어 이러한 배제는 그 배제된 이들 자신의 잘못때문이라는 해석체계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체계는 배제된 이들에 대한 사회적인 폭력을 정당화한다. 그것이 바로 내적국경의 메커니즘이다.

한데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배제의 정치학에 가장 적극적인 사회집단에 속한다는 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리스도교가 사랑의 종교라느니 평화의 종교라느니 하는 주장들은, 물론 성서 구절들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현실에선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에게 별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반면 레위기20,13에 대한 페이크 뉴스처럼 증오와 배제의 종교성이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더 지대한 영향력이 미치고 있다.

하여 나는 이 구절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유다귀환공동체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음을 밝혔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는 배제의 정치학에 다름 아니다. 내가 이 글에서 밝혀낸 것은 여기까지다. 그렇다면 역사학은 배제의 정치학을 넘어서는 정치학을 말할 수 없는가.

탈식민주의적 역사해석은 그러한 가능성의 하나를 보여준다. 내가 얘기했던 정치사적 해석은 그 텍스트를 구성한 주체들의 시각을 해부하는 데 초점이 있었다. 한데 그 텍스트 이면에는 그 텍스트가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은 이들이 희미하게 존재한다. 바로 그러한 희미한 존재를 중심으로 그 텍스트를 새롭게 읽어내려는 것이 바로 탈식민주의 해석학의 기조다.

여기서 이것을 길게 얘기하는 것은 이 책의 논지를 넘어서는 것이지만, 이 구절 속에 희미하게 존재하는 고통당하는 소년에 주목하면서 새롭게 이 구절을 읽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말했듯이 남성 간의 성관계를 금지하는 것은 당국의 관점에서는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조치였다. 그리고 그러한 남성간 성관계의 주요 장소들은 히에로스 가모스 의례가 벌어지는 지역 성소들이었다. 한데 어쩌면 헬레니즘의 영향에 의해 이 의례의 남성사제로 소년이 선택될 가능성은 없을까. 한편 성소 밖에서는 헬레니즘 풍조를 따라 소년애가 보다 성행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소년애 이데올로기는 말할 것도 없이 성인 남성중심주의의 산물이다. 이때 소년은 그러한 관행의 희생자다. 즉 여기엔 강자가 약자를 농락하면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포장된 폭력적 성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오늘날 권력 있는 나이든 남자와 어린 여자 간의 성적 관계는 많은 경우 권력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과 같다. 하여 이 텍스트 속에 숨겨져 있을 수 있는 소년의 시각에서 이 텍스트를 읽는다면, 이성애든 동성애2든 폭력적 성관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의 메시지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시선의 전환을 통한 해석은 이 텍스트를 남성 동성 간의 성관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폭력적 성관계에 관한 것으로 읽을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이 텍스트를 읽으면서 독자들은 주변에서 벌어지는 온갖 폭력적 성관계 양상들을 비판적으로 이야기하고 성찰하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후주]

(01) 여기서 아몬은 단 2년 동안 통치하다 궁중 모반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러니 다섯 왕 중에 실질적인 군주 역할을 했던 이는 4명뿐이다.

(02)예루살렘 인근 지역에 기원전 8~6세기경에 새로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주거지 터 수백 개가 발굴되었다. 이 시기 예루살렘 도성의 크기도 몇 배 이상 확대되었다. 이것을 종합해서 일부 고고학자들은 이 시기에 예루살렘의 인구가 기원전 10~8세기에 비해 3배 이상 증가했다고 추정한다. 이렇게 갑작기 인구증가가 일어난 것이 아시리아의 침공 경로에 있던 국가들의 몰락으로 인한 유민화 현상과 관련이 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03) 추정컨대 오므리나 아합 왕 시대인 기원전 879~854년 사이가 아닐까.

(04) 유다계 사회에서는 세 부류의 제사장 그룹이 등장하는데, 레위계, 아론계, 사독계가 그들이다. 이중 레위계는 요시야 개혁을 옹호하는 예루살렘성전과 지방성소의 제사장들을 지칭했을 것 같다. 하여 요시야 개혁이 실패한 이후 국가를 위기에 빠뜨렸다는 프레임이 그들에게 덧씌워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에스겔서44,10~14) 이러한 혐의는 유다국 말기, 요시야 왕을 죽인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가 암하아레츠에 의해 추대된 그의 아들 여호아하즈를 강제 폐위시키고 그의 형이자 친이집트-친아시리아 파인 여호야김을 즉위시킨 이후 왕실 제사장들 사이에서 처음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유다국을 멸망시킨 바벨로니아가 여호아긴 왕(여호아김의 아들)을 필두로 하는 반바벨로니아 인사들을 강제유배시킬 때 그들 사이에서 레위인에 대한 증오 담론이 크게 확산되었을 수 있다. 하지만 레위인 책임론을 펴는 프레임이 본격화된 것은 귀환공동체의 주도권을 둘러싼 제사장 세력 간의 경쟁과 관련되었을 수 있다. 이 시기에 레위인은 제사직무에서 배제되었고 성전 허드렛일을 도맡는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전용되었다. 반면 레위기편찬을 주도한 아론계와 에스겔서편집을 주도한 사독계 제사장들이 체제의 헤게모니 세력이 되었다.

(05) 느헤미야기5,14에는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이십 년에 유다 땅 총독으로 임명을 받아서, 아닥사스다 왕 삼십이 년까지 십이 년 동안 총독으로 있었지만이라고 되어 있는데,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라는 이름의 네 명의 황제 중 재위 기간이 32년을 넘는 이는 1세와 2, 두 명으로 좁혀든다. 그리고 에스라기7,8에서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이 다스린 지 칠 년 된 해의 다섯째 달에 귀환했다고 한다. 재위기간이 7년이 넘는 아닥사스다는 1, 2, 3세다. 그런데, 에스라 종교개혁이 효과적으로 수행되려면 정치군사적 안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연대를 추정하면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1세 때 귀환했다면 그가 유대아(예후다) 지역의 총독이던 시기는 5세기 초반이고, 2세 때라면 4세기 전반이어야 한다. 에스라가 제사장으로 재직한 시기는 그 직후일 것이다.

(06) 현대의 학자들이 이 제국을 지칭하는 공식 명칭은 이집트 제32왕조. 하지만 이 왕조의 통치세력이 헬레니즘 문화권에 속한 인사들이라는 점에서 이집트의 이전 왕조들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하여 이 왕조의 창시자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름을 따서 이 제국을 편의상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이라고 부르곤 한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그의 휘하장군들이었던 셀류코스, 리시마코스, 안티고노스 등도 각각 나라들 건국했는데, 셀류코스는 시리아-메소포타미아에, 리시마코스가 발칸 남동부의 트라키아(불가리아 지역), 그리고 안티고노스는 마케도니아에 자신의 왕조를 구축했다. 이들 알렉산드로스 휘하장군들의 세운 왕조는 헬레니즘적 국가들의 계보에 속한다.

(07) 프롤레마이오스 제국의 제2대 황제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기원전 3세기 중반에 건립이 시작된 대규모 도서관은 고대사회에서 아시리아의 니느웨 도서관과 함께 가장 규모가 큰 도서관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니느웨의 도서관에 소장된 기록물이 상형문자를 토판에 기록한 문서들인 반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양피지에 알파벳문자인 그리스어로 된 문서들이 주로 소장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니느웨 도서관은 국가만이 그 막대한 비용과 전문성을 담보할 수 있었던 반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지중해 전역에 걸친 필사현상을 야기시킬 수 있었고, 이로써 민간서기관 계층의 등장이 가능해졌다.

(08) 요시야 왕 시절의 왕실서기관을 신명기계열의 서기관이라고 부른다. 이후 식민지 시절에도 신명기적 편찬운동이 일어나는데, 이들을 후기신명기계열의 서기관이라고 부른다.

(09) 이 시대 유다귀환공동체에서 여성이 법적 주체로 간주되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법적 처벌의 대상에는 거의 예외 없이 포함된다.

(10) 고대메소포타미아에서 거룩한 결혼관행이 있었는지에 대해 1980년대 이후 많은 학자들은 대체로 증거부재라는 관점을 취한다. 이것은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메소포타미아에서 히에로스 가모스관습이 비일비재했다고 비하했던 것에 대한 반론이다. 그런데 한글새번역성서는 호세아서4,14너희 남자들도 창녀들과 함께 음행을 하고, 창녀들과 함께 희생제사를 드리는데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여기서 앞의 창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조놋트’(zonoth)이고 뒤의 창녀케데사’(qedeshah). 즉 히브리어 성서가 구별하여 표기한 것을 한글성서는 구별하지 않았다. 반면 유력한 영어번역본들인 NIVMEV는 각각 앞의 창녀harlotswhores로 번역하고, 뒤의 창녀cult prostitutesshrine prostitutes로 번역하고 있다. 즉 전자는 매춘여성을 가리키고, 후자는 이른바 성창이라고 비하적으로 표기된 이들 가리킨다. 문맥에서 둘 다 성관계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고, 전자가 세속적인 영역의 여성이라면 후자는 당연히 성소에서 일하는 여성을 가리킨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위의 히에로스 가모스 관행을 비판한 학자들과는 달리 호세아서는 그들의 존재를 시사하고 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11)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다섯 권의 두루마리를 고대이스라엘 종교에서는 토라’(torah)라고 불렀다. 훗날 이것은 모세가 지은 다섯 권의 두루마리라는 믿음 아래서 모세오경이라고도 불리웠다. 근대성서학계에서 모세저작설이 무너지면서 그냥 오경이라고 부르게도 되었다. 한데 근대 성서학계가 발견한 또 다른 가설은 오경이 시대를 달리하는 최소한 네 개의 자료층으로 분류되는 편찬작업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J-자료층, E-자료층, D-자료층, 그리고 P-자료층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