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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언택트의 사회’ 바깥에서 언택트를 묻다 - 코로나19와 작은교회

[바이러스에 걸린 한국교회](삼인 2021)에 실린 글

이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다.

글머리_ 코로나19와 함께한 1년(양권석)

제1부 취약계층은 더욱 취약해지고

     01. 고독으로/부터의 연대―재난 시대의 영성(정경일)

     02. 코로나19 전쟁(?) 시대, 여성을 이야기하다―돌봄, 쉼, 치유의 교회 공동체(배근주)

     03. 우리의 불안과 그들의 취약함이 입을 맞출 때―2020년 이태원 집단감염 사건을 돌아보며 (시우)

제2부 재난이 된 종교

     04. 코로나19와 탈종교사회의 종교성 (박정위)

     05. ‘언택트의 사회’ 바깥에서 언택트를 묻다―코로나19와 작은 교회 (김진호)

     06. 신천지 현상과 그리스도교 그리고 성경 문자주의 (오제홍)

     07. 대면/비대면(예배)에 대한 왈가왈부는 무엇을 드러내는가 (황용연)

제3부 교회에게 말하다, 대안에 관하여

     08. ‘그들만의 방주’가 되어버린 한국교회―교회와 세계의 ‘다시 연결’을 바라며 (유기쁨)

     09. 부서지고 나누며 다가가는 그 몸―코로나19, 성체성사와 신앙 공동체 (조민아)

     10. 코로나19 위기 속 교회의 변화와 이웃됨의 자세 (김주인)

     11. 백화점 교회의 종말과 새로운 교회들 (김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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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택트의 사회바깥에서 언택트를 묻다

코로나19와 작은교회

 

 

 

 

대분열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파(이하 예장통합) 총회가 전문기관에 의뢰하여 자교단 소속 목회자 1,13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01)에 의하면, 코로나19의 확진자가 크게 늘었던 20203~4월 주일예배 평균출석율은 42.4%였고, 정부가 사회적 거리두기 수준을 낮추었던 524일 예배 때는 61.8%가 참여했다. 코로나 이후 평균감소 예상비율은 19.7%였다.

그런데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이하 한목협)2017년 조사(02)에 따르면 그해 개신교 신자 중 예배에 출석하지 않는 이들의 비율은 23.3%였다. 대통령 탄핵에 불복한 극우파의 태극기집회가 한창이던 때의 조사다. 교회가 이들 극우주의의 온상이라는 혐의가 짙었으니 많은 이들이 교회에서 이탈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한데 2020년은 어떤가? 위의 예장통합 총회가 설문한 시기는 신천지발 대감염이 한창이던 때였다. 개신교 신자들은 신천지가 개신교와는 전혀 다른, 이단 종파라고 주장하지만, 시민사회의 많은 이들은 신천지를 개신교의 한 종파로 보고 있다. 물론 주택인구총조사에서도 신천지를 개신교에 포함시켜 조사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무렵 개신교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 조사들은, 그 전에 비해 더 악화된 건지 확인할 수 없지만, 매우 나쁜 상태였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2017년에 23.3%의 신자들이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고 답한 것보다 이탈자가 적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그다지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런데 예장통합 목사들은 23.3%보다 감소폭이 적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헬스커뮤니케이션학회(Korea Health Communication Association, 이하 KHCA)코로나19, 5차 국민인식 조사(03)는 상식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충격적이다. 그 조사 시기는 예장통합의 조사에서 예배참여비율이 42.4%라는 결과가 나왔던 바로 그 어간이었다. 종교적 모임의 참여 여부를 묻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이가 고작 6%였다. 종교인에게 따로 물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답한 이는 당연히 종교인일 것이다. 한데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종교인구는 50% 이하이고 개신교 대 불교 대 가톨릭 신자의 비율은 ‘45:35:18’이며, 전체 종교인구 가운데 이들 세 종단에 포함된 이들은 98%를 넘는다. 2020년 개신교 신자가 좀더 줄었다고 가정하고 그 비율을 어림잡아 ‘40:40:20’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불교와 가톨릭 신자 모두가 종교집회에 전혀 참석하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다른 변수를 고려하지 않고 산술적 계산을 해보면 15% 이하의 개신교 신자들만이 예배에 참석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시기의 조사에서 예장통합 목사들은 42.4%라고 보았음을 다시 한번 주지하자. 그 차이가 너무나 현격하다.

어느 조사가 더 사실에 부합할까. 그것을 판단할 능력은 내겐 없다. 단지 그 조사 결과의 차이가 조사대상의 차이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유념하면 그 현격한 차이에서 간과할 수 없는 논점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예장통합의 조사는 그 교단 목회자들에게 설문한 결과다. 반면 한목협과 KHCA의 조사는 신자 일반 혹은 시민사회 일반이 답한 결과다. 그렇다면 목회자들에 대한 조사결과는 교회가 더 큰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열망이 그 답변에 은연중 반영되어 있고, 신자들은 교회에 대한 커다란 실망을 자신들의 답변 속에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그 격차가 너무나 크다는 데 있다. 그것은 양자 간의 관점의 차이가 해소할 수 없을 만큼 벌어져 있다는 뜻이 아닐까. 내가 이 절의 제목을 대분열이라고 한 것은 그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분열은 코로나 국면에서 비로소 생겨난 것이 아니다. 1990년대 이후의 변화 속에서 이미 구조화되고 있었다. 그 전 시대인 대부흥의 시대(1960~1990)에 한국개신교는 집회 횟수와 예배 출석률을 유난히 중요시해왔다. 수없이 많은 부흥회를 통해 개신교 신자가 되기로 작정한 이들에게 거의 매일 벌어지는 신앙집회에 열렬히 참여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메시지가 신자들에게 거의 강박처럼 다가왔고 얼마 후 그것은 견고한 종교적 습관으로 자라잡았다. 이렇게 대부흥의 시대에는 개신교 신자의 총수가 급격하게 증가한 것만이 아니라 교회가 만들어 놓은 종교제도에 대한 충성심도 크게 강화되었다.

한데 그런 종교성은 1990년대, 특히 2천년대 이후 현저히 약화되고 있다. 교회세습, 재정불투명성과 목사들의 비리배임, 건축비 중심의 재정운영, 성범죄를 포함한 반인권적 행태, 박약한 공공성, 그리고 극우주의 등, 수많은 문제들로 점철된 종교라는 점이 널리 공지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시기에 갑자기 그런 문제적 종교가 되었다기보다는 누적된 문제점들을 가려왔던 베일이 이 시기에 벗겨진 결과겠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신앙심에 내상을 입은 신자들은 교회 가는 걸 줄였다. 나의 용어로 말하면 실망신자들의 떠돌이 성향이 매우 강화된 것이다.

게다가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온라인 세계의 관계망 형성 속도가 전 세계 어느 사회보다 빨랐다.(04) 또한 같은 시기에 세계여행자의 비율도 비약적으로 증가했다.(05) 이러한 변화는 신자들의 신앙에서 장소(06)로서의 교회(church as place)의 의미가 퇴조하지 않을 없는 조건이 되었다. ‘장소성의 퇴조는 집회 횟수와 예배출석율이라는 지표의 위력이 현저히 약화되지 않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가나안성도(07)를 키워드로 하는 현상연구들이 주목받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교회와 신학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교회 내부자들의 시선이 아닌, ‘가나안 성도혹은 떠돌이신자에 초점을 두고 살핀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 발견이다. ‘가나안 성도를 주제로 하는 연구들이 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몇몇 논의들은 이런 신앙 양식을 종교로부터의 후퇴가 아니라 새로운 신앙 양식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종교사회학계에서 오래된 통념인 세속화론(secularization)과는 다른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세속화론이란, 개략적으로 말하면, 근대 이후 사회가 더 합리화되고 현세화되며 분화되면서 종교성이 점점 후퇴하게 된다는 논지다. 그 탓에 사람들은 종교를 소비하려는 욕구가 점점 경감되었다는 얘기다.

한데 가나안 성도로 살아가는 이들 중에는 종교로부터 멀어진 이도 일부 있지만, 적잖은 이들은 더 종교적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단지 각 종교가 구축한 그 종교 특유의 신앙양식을 반복하기를 포기했을 뿐이다. 이것을 내 식으로 말하면, 떠돌이신자 중 다수는 개신교의 국경을 넘나들면서 매우 종교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들은 교회뿐 아니라 성당과 불당을 오가고, 굿판이 벌어지는 곳을 호기심반 경외심반의 마음으로 참석하기도 한다.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을 탐독하고, 대학맹자, 논어를 읽으며, 주역도덕경을 정독한다. 코란탈무드를 읽고, 요가나 참선을 수행한다. 점술업이 전례 없이 급성장하고 있는데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도 점술의 적극 소비자인 이들이 많다. 또 신천지로 귀의한 이들 중 대다수가 개신교에서 이탈한 이들이다. 한편 많은 청년들과 청소년들은 종교를 소비하는 대신 (문화적) 유사종교행위에 열광한다. 대표적인 것이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에 대한 팬덤 현상이다.(08) 그리고 다수의 국민이 촛불이나 태극기를 상징적 결속의 키워드로 삼는 (이념적) 유사종교행위를 추구하였다.(09) 온라인 담론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다양한 극우와 극좌 커뮤니티는 일종의 나치즘이나 문화혁명 같은 정치종교(Political Religion)(10)적 성격을 두드러지게 보인다. 요컨대 2천년대 이후 한국사회에는 종교성이 후퇴한 것이 아니라 약진했다. 많은 개신교 신자들도 그러한 변화무쌍한 종교성에 몸을 내맡기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없다. 즉 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실망신자로, 나아가 떠돌이신자로 지내면서 다중적 종교체험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개신교의 가나안 성도담론은, 내가 보기엔, 새로운 종교성의 표현을 주목했다는 점에서는 주목할 만하지만, 그 중의 일부가 퇴행적 종교성으로 회귀하는 경우도 있고 다른 일부는 다중적 종교성의 강화’, 내 식의 용어로는 멀티 빌리버스(multi-believers)적 신앙으로의 성숙화 과정에 있다는 해석을 적극적으로 펴지는 않는 것 같다.

아무튼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한국에서 일어난 가나안 성도 현상 혹은 떠돌이신자 현상은 1990년대 이후에 본격화된다. 한데 그 시기는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빠르게 제도화되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주권에 대한 의식이 고조되던 시대다. 또 소비사회로의 전환이 본격화되면서 소비자라는 자의식이 빠르게 강화되던 시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990년대 후반과 2천년대 이후 그간의 모든 변화를 하위적 요소로 편입시키는 거대한 전환이 일어났다. 곧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급격한 이행이다.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서 그런 이행이 거칠게 일어났지만, 한국은 그런 변화가 더 급박하고 야만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불확실성의 강화. 주권에 대한 자의식이나 욕구에 대한 민감도가 인플레를 일으킬 만큼 빠르게 주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소화불량 증세를 일으키고 있었지만, 그 변화가 실제로 자신을 주체화시킬지 더 절망적인 존재로 전락하게 할지 예측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 누구도 그 변화에 적절한 대응이라고 할 만한 예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해서 사람들은 그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 그것은 계산보다는 염원을 갈망하는 행동들이 두드러지게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즉 종교적 갈망이 그만큼 커지게 된 것이다. 다만 개신교를 포함한 기성의 종교들은 사람들에게 그 갈망하는 것만큼의 답을 주는 데 실패했다. 하여 사람들은 기성 종교 바깥에서 혹은 그 안팎을 넘나들면서 여러 종교적 성찰에 대해 존경심과 경외심을 표하며 진리를 혹은 행복을 갈구하고 있다. 즉 종교성이 약화된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성이 새롭게 형성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말했듯이 그리스도교 교회와 신학은 신자 대중이 체감하고 있는 이러한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해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하여 많은 이들은 떠돌이신자가 되어 종교적 국경을 넘나들면서 진정한 종교성을 갈구하는 여정에 이미 오르고 있다. 다만 많은 떠돌이신자들은 교회의 예배에 적극적이지 않고 여러 진리를 향해 마음을 열면서 새로운 신앙생활의 길에 들어서고 있는 것에 대해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코로나와 대분열

 

한데 코로나19는 그런 죄의식이 작동하는 담론지형을 바닥부터 흔들어놓았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뉴노멀(New Normal), 즉 새로운 삶의 규범으로 자리잡고 있다.

원래 뉴노멀은, 2008년 신자유주의적 경제가 제3세계뿐 아니라 서구사회에게도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을 때 대안적 문제설정으로 부상한 것이었다. ()자유주의적 경제가 모든 규제의 벽을 허물어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는 데 집중하게 되었다. 여기서 규제의 벽은 무한경쟁 체제의 불확실성을 제어하는 제동장치이기도 했는데, 그것이 붕괴되자 전 지구는 불확실성의 위기에 놓이게 되면서 점점 공멸의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 그 계기적 시간이 금융위기가 세계를 휘젓던 2008년이었다. 그때 성장 중심적 노멀에 대한 문제제기로 부상한 뉴노멀의 핵심적 강조점은 성장지상주의에서 포용성장으로의 전환이었다. 그런데 2020년 코로나의 가공할 재앙에 직면하게 되면서 세계는 뉴노멀의 포용성장보다 더 긴박한 규범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어떻게 성장을 유지하면서도 상생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감염의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성장보다도 더 절박하게 요청된 것은 한 것은 얽힘의 최소화였다. 바로 그런 문제설정을 담은 표현이 언택트(untact). 하여 정부와 기업과 시민단체의 각종 프로젝트에서 학술논문에까지 상생언택트을 연계시키는 시도들이 수없이 나왔다.

근대 이후 교회는 종교적 경계(boundary)를 통해 성장했다. 가톨릭, 장로교, 감리교, 루터교, 성공회 등등. 근대적 국가가 국경을 통해 국민에 대한 결속과 통합의 능력을 강화해왔던 것처럼 말이다. 즉 종파의 경계, 교파의 경계, 그리고 교회의 경계가 그것을 지탱하는 담론들과 결합되면서 내적으로 공동체의 결속력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근대사회의 국가와 종교는 공히 국경/경계 내부에서는 결속의 담론이 강조되고, 외부에 대해서는 구별짓기가 강조되는 질서를 구축했다. 그 결속의 주체가 바로 국민이고 성도(the saints). 실은 그들은 대부분 서로를 전혀 알지도 못하고 신뢰하지도 않지만, 서로 컨택트(contact)하는 사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컨택트의 장치들’, 얽힘의 장치들이 필요하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직제화, 교리화, 정전화(canonization)의 장치들이 그런 것들이다.

한데 근대의 마지막 단계는 탈근대(post-modern). 그리고 탈근대는 근대적 국경들이 팽창과 수축을 거듭하면서, 명료한 하나의 국경 개념을 교란시켰다. 종교도 그런 과정을 겪고 있다. 많은 사회들에서 종교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그 계기는 사회마다 다양하게 나타난다.

앞 장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한국사회의 경우 1990년대 이후 실망신자화 현상’, 그리고 실망신자 중 다수가 떠돌이신자가 되는 현상이 이어졌다. 떠돌이신자가 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은 교회가 만들어 놓은 얽힘의 제도들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컨택트의 굴레로부터의 해방의 기조가 뚜렸했다. 교직자(목사와 장로) 대 평신도의 이분법이 약화되었고, 성서와 교리에 대한 배타적 믿음도 이완되었다. 그런 점에서 떠돌이신자들은 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해서 언택트신앙이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망신자가 많아지고 그들 중 다수가 떠돌이신자들이 되었다고 해도, 더 많은 이들은 여전히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비록 실망에 차 있더라고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교회 당국자들은 사력을 다해서 교회를 지켜야 하는 이유를 신자들에게 설득하고자 애썼다. 새롭고 참신한 프로그램이 개발되기도 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를 나가지 않는 것에 대한 죄의식으로 신자들이 이탈하고자 하는 마음을 옥죄었다. 여기에 습관도 중요한 이유가 된다. 해서 떠나는 것을 막기도 했거니와 이미 떠난 이들도 재정착할 곳을 찾는 데 큰 힘을 쏟았다. 그래서 새신자의 유입이 정체된 1990년대 이후에도 새로 성공한 교회들이 많았다. 많은 떠돌이신자들이 재정착한 것이다. 하여 여전히 떠돌이성은 주변적이었다.

그런데 코로나가 덮쳤다. 언택트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가치로 부상했다. 이는 컨택트를 중요시한 교회의 규범과 갈등을 일으켰다. 해서 목사들 다수는 대면예배를 강조했고, 정부의 비대면예배 권고에 저항했다. 글 서두에서 소개한 예장통합의 조사에서 많은 목사들은 온라인예배만을 드리는 교회를 공교회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고수하고 있다.(65.3%) 해서 코로나 시대에 마지못해 온라인예배를 시작한 교회들이 적잖지만 그들 다수는 코로나가 지나가면 온라인예배를 폐기할 생각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익숙한 예배 양식을 고수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예배 형식에 변화를 주려는 시도들에 대해서 개신교 주류집단들은 여전히 거부감이 강하다. 그것이 최근 진정한 예배담론(11)을 확산시키는 이유가 되고 있다. 이는, ‘진정한이라는 단어에서 보듯, 예배 형식의 실험보다는 본질에 주목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전제로 한다. ‘본질이라는 개념은 대개 새로운 문화와의 접속보다는 과거로의 회귀를 강조한다. 요컨대 이러한 문제제기는 현실 해석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관심하며, 대신 본질이 무엇인지를 묻는 회고적 담론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예장통합의 조사에 응답한 목사들도,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한국교회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예배의 본질에 대한 정립이라고 답한 이들이 가장 많았다.(48.3%)(12)

물론 이런 주장은 신학적 해석이 결여된 것이다. 실제로 성서의 오래된 문헌들 다수를 편찬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던 고대유다국의 요시야 왕실 서기관들은 요시야적 제의개혁에 관한 어젠더를 문헌화하면서 신의 비대면성/비접촉성(untact)을 강조하는 신학을 입론화했다. 신은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 되며, 그분은 지성소(qodes haqoasim, holy of holies) 안에 있고, 거기에서 신과 대면/접촉(contact)하는 이는 오직 대제사장 한 사람뿐이다. 그것도 항시적인 게 아니라 주요 절기 때에 한정해서 말이다. 한데 그 지성소 안에는 어떤 조명도 없으니 대제사장도 신을 대면/접촉할 길은 없다. 하여 훗날 유다국 전통에 기초하여 발전한 야훼신앙에서 신이 성전에도 부재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거기에는 신의 흔적(kabod, 신의 영광’)만 존재한다. 이스라엘국의 신학에 반대하면서 유다국은 신의 언택트성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주장한 초기 그리스도파 지도자들은 다시 신을 대면/접촉 가능한 세계로 초대하는 신학을 발전시켰지만, 1세기 말경 그 신의 승천과 영의 재림이라는 어젠더가 부상한다. 신은 다시 비대면/비접촉의 존재로 해석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신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는 복음의 세계적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 논리를 발전시킬 수 있었을 뿐 아니라,(사도행전 4,1~13) 그 신이 인간 존재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신의 복음의 심층성도 구현하는 신학이 등장했다.(요한복음 14,15~31) 그리스도교 신학은 이러한 확장성과 심층성의 담론을 활용하면서 신앙제도를 발전시켜 온 종교다. 요컨대 야훼신앙의 역사는 신과의 대면성과 비대면성의 신학/신앙이 교차되면서 발전해왔다. 하여 언택트한 예배가 진정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성서의 신앙과 배치된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코로나19의 엄습, 그 상황에서 사회는 정부가 제시한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해 대대적으로 합의했다. 실제로 한국정부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코로나에 대응한 나라 중 하나 꼽힌다. 그런데 신천지발 대감염과 전광훈발 대감염이 발생했고, 최근에는 공격적 선교로 유명한 선교전문단체인 인터콥의 신앙훈련기관인 열방센터도 대감염의 한 원인일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끝없이 발생하는 중소감염의 가장 일반적인 원인도 교회들이었다. 정부의 언택트 요구에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반대를 표명한 교회들은 사회를 위기에 빠뜨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가리켜 상생의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파렴치한 종교로 낙인찍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그런 생각을 많은 신자들도 공감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 예장통합파 목사들은 코로나19가 지나가면 20% 미만의 신자들만 떠날 것이라고 답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대분열의 시대를 거치면서 23%가 넘는 이들이 적()만 교회에 남겨둔 채 사실상 이탈했다고 답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신자들이 떠돌이 종교생활에 돌입하는 것을 막는 최후의 방어선이 작동하고 있었다. 죄의식 때문에 망설였고 습관 때문에 불편했다. 한데 1년 넘게 신자들 다수가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습관이라는 방어선은 거의 무력화되고 있다. 또 사회적 거리두기가 도덕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으니, 죄의식도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거기에 대면예배를 주장하는 이들이, 고통스러워 하는 이웃에 대한 공감을 표하기는커녕, 다수를 설득시킬 수 없는 터무니없는 음모론이나 펴고 있으니 코로나 이후 교회는 과연 얼마나 그 교세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뉴노멀 시대의 작은교회, 언택트 사회 바깥에서 민중을 보다

 

예장통합의 조사에서 ‘29인 이하 교회의 목회자들이 답한 코로나 이후 신자의 예상감소비율은 23.6%였다. 평균(19.7%)보다 4% 정도 높다. 생각보단 그 차이가 근소하다. 한데 신자들에게 물으면 필시 이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예배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답했을 것이다. 사회의 어느 부문이든 코로나 여파를 가장 심각하게 체감할 대상은 취약계층이다. 그 점에서 개신교도 다르지 않다. 소형교회가 신자 감소를 더 심각하게 겪을 것임은 충분히 예상되는 바다.

아마도 그 주된 이유의 하나는,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대분열의 파장을 더 심하게 겪어야 하기 때문이겠다. 기성교회의 제도와 담론은 목사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특히 대형교회 목사는 자신의 전문영역인 예배 집전에서 (평상복과는 구별되는) 예전복을 입고 큰 무대 전면에서 성능 좋은 마이크를 매개로 말을 하며 초대형 스크린으로 재현된 이미지로만 표정이 읽히는 존재로 신자와 대면한다. 거대한 부채꼴 혹은 타원의 예배공간에서 담임목사는 모든 신자와 마주하도록 배치되었는데, 대형 스크린으로 재현되지 않는다면 목사의 표정은 전혀 읽히지 않는다. 목사와 평신도 사이에는 거리두기의 장치가 촘촘하게 작동하고 있다. 게다가 카메라 렌즈를 통해 재현된 목사의 시선은 스크린을 보는 모든 신자 개개인과 자주 눈이 마주친다. 가끔 목사가 준엄한 표정으로 혹은 따뜻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효과는 신자가 목사를 바라봄에도 목사에게 자신이 주시되고 있다는 시각효과를 일으킨다. 그 주시하는 눈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신의 눈과 오버랩된다. 해서 많은 신자들은 다음 일요일 대예배에서 자신을 주시하는 목사의 시선을 의식하며 한 주 동안 자기를 규율하며 지낸다. 요컨대 대형교회의 거리두기 장치가 일으키는 효과는 목사를 평범하지 않은 존재로 보이게 한다. 모든 신자가 그런 이미지 장치의 효과에 예속돼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잖은 이들에게 이러한 장치의 효과는 충분한 효력을 발휘했다. 해서, 교회세습을 했든 학력위조를 했든 성추행을 했든, 신자들에게 어떤 목사들은 모든 잘못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선별된 자로 잘 포장되어 있다.(13) 실망신자들은 그렇게 보지 않겠지만, 많은 신자들은 여전히 그런 시선으로 목사를 바라본다. 게다가 그이는 웬만한 공격을 능히 감당할 만한 막강한 권력도 쥐고 있다.

한데 소형교회 목회자의 사정은 다르다. 관행상 예배는 성직자의 거리두기를 전제로 하지만, 소형교회 목사도 그런 관행을 습관적으로 반복하고 있지만, 그것이 도리어 역효과를 일으키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선 소형교회들에선 타원형이나 부채꼴에 비해 시선의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쉬운 직사각형 공간에서 예배가 이루어진다. 더욱이 예배당 전면은 종교적 상징의 힘이 작동하기에는 너무 조야하게 장식되어 있다. 대부분이 임대공간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고, 그중 상당수의 교회들이 전용예배공간을 갖고 있지 않고 다용도로 활용되고 있기에 그 공간에서 영적인 아후라가 만들어지도록 셋팅하기는 쉽지 않다. 그보다는 소형교회는 사람들의 일상의 비루함을 더 적나라하게 반영한다. 요컨대 소형교회의 목회자는 신자 대중과 구별되는 존재로 드러나기보다는 신자들과 비루한 현실을 함께 살아가는 이로 더 잘 드러난다. 하여 소형교회는 더 종교적인 장소성보다는 더 사회적인 장소성을 상징화하기에 적합하다.

그렇지만 거의 모든 목회자들은 신학도 시절부터 전용 예배당이 없는 교회를 전제로 하는 예배학이나 예전학을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또 사회와 밀접히 연계된 선교론을 교회에서 어떻게 구현할지 고민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해서 습관적으로 거의 모든 목회자들은 사회와 구별짓기가 충분히 작동하고 있는 종교적 상징들로 가득한 예배당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기껏해야 십자가 정도가 사회와 접속하는 희미한 은유적 코드를 갖고 있다. 하지만 십자가는 이미 너무나 세속적인 것이 되어 버려서 거기에서 그것의 원래의 의미, 곧 고통과 죽음의 신앙적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해서 소형교회 목회자들 다수는 예전복을 입고 예전 집행자 특유의 종교적 언행을 구사하며 예배를 집전하곤 하지만, 거리두기 장치가 구비되지 않은 목회자들의 예배 집전 양식이 신자들에게 영적 전문가의 아후라를 느끼게 하기는 훨씬 어렵다. 해서 소형교회 목회자들은 한국 특유의 체험적 종교성의 장치들을 더 많이 활용하려 한다. 병치유나 방언 같은 대중신비주의적 양식이 선호되곤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 1990년대 이후 대분열의 시대가 도래했고, 2020년 가공할만한 위력의 코로나 쓰나미를 맞닥뜨려야 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1990년대 이후 한국교회들은 일종의 시대착오적 종교로서 극한 비호감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 시대가 도래했고, 위기는 극대화되었다. 교회는 이제까지 겪었던 것보다 더욱 재앙적인 신뢰의 위기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위기를 감당할만한 내적 장치가 결여된 소형교회들은 더 치명적인 코로나 화산재 더미에 묻혀가고 있다.

그렇다면 코로나 시대 작은교회는 회생 가능한가. 우선 작은교회라는 표현에 주목하길 바란다. 앞에서 나는 대형교회의 대응개념으로 소형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때 소형이나 대형이라는 용어는 규모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한데 작은교회라는 용어는, 한국에서 작은교회 운동을 이끌었던 그룹 사이에서 규모 이상의 함의를 갖고 사용된 바 있다. ‘작은교회 한마당(14)을 한동안 기획했던 기구인 생명평화마당은 작은교회 박람회뿐 아니라 작은교회 포럼도 운영해왔는데, 그 과정에서 작은교회의 개념을 규모에 따른 기계적 분류보다는 성장주의에 저항하는 교회라는 것에 방점을 두면서 논의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다양한 작은교회들이 지향하는 신앙적, 신학적 노선을 종합해서 탈성장, 탈권위, 탈성별을 추구하는 교회라고 규정한 바 있다.(15)

그렇다면 작은교회는 코로나시대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앞에서 코로나 시대 뉴노멀의 핵심 키워드로 부상한 것이 언택트라고 했다. 얽힘의 최소화. 2008년의 뉴노멀의 핵심이 (나홀로)성장에서 포용성장으로의 전환에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성장이 누군가를 죽이는 장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즉 뉴노멀은 상생의 성장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모두의 상생인지의 문제는 여전히 논쟁거리이지만, 승자독식 시스템의 낙수효과가 아니라 함께 생존해야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논지를 신자유주의의 첨병역할을 해온 국제경제기구들이 나서서 제기하고 있다는 점은 충분히 고무적이다.(16) 물론 여기에는 모두가 얽혀 있다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다. 그렇다면 모두가 얽혀 있다2008년발 뉴노멀이 2020년발 뉴노멀에서는 얽힘의 최소화로 전환된 것인가?

상생이라는 문제의식은 양자가 공히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인데, 그 표현 양식은 정반대로 나타났다. 아니 표면적으로는 다르지만 바뀐 것이 아닐 수도 있다. 2008년의 모두가 얽혀 있다는 것은 말 그래도 뉴노멀적 가치이지만, 2020년의 얽힘의 최소화는 일종의 행동수칙이기 때문이다.

한데 문제는 2020년의 언택트를 부르는 가장 일반적인 명칭은 뉴노멀이다. 이렇게 언택트를 뉴노멀이라는 가치로 격상시킬 때 붉어지는 문제는 언택트를 거스르는 행위를 새로운 노멀의 바깥으로 낙인찍게 한다는 데 있다. 사실은 2008년 이후의 상생의 성장주의이데올로기도 실상은 그 이데올로기에 포섭되는 계층 바깥의 대중에게는 더 혹독한 고통을 의미했다. 전례 없이 거대해진 유민과 난민,(17) 그리고 비국민화된 존재들은 상생의 공동체가 되지 못했다.

주목할 것은 이 시기에 개신교 지형에 커다란 변동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웰빙형 대형교회가 급성장하고 웰빙신앙이 거의 모든 개신교 교회들의 표준적 신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소형교회들 다수도 그런 변화에 편승했다. 한데 여기서 간화해서는 안 되는 사실은 바로 그 시기에 중소형교회의 신자들 중 많은 이들이 신천지 같은 대중신비주의적 소종파로 이동했다는 점이다. 그들 다수는 언더클래스화된 대중이다. 이것은 신귀족주의적 웰빙신앙이 개신교 교회들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잡게 되자, 언더클래스들, 그들의 다수가 자신들에게 위로를 주는 종교로 이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17)

그것은 이 시기에 소형교회들의 위기가 두 방향으로의 신자들의 이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는 웰빙형 대형교회로의 이동이고 다른 하나는 신천지 같은 대중신비주의적 소종파로의 이동이다. 이 두 방향의 이동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개략적으로 계층이동과 상호관련이 있다. 더 경쟁력 있는 계층은 웰빙형 대형교회로 이동하고, 언더클래스들은 신천지로 옮겨갔다.

웰빙형 대형교회들은 1990년대 이후 급성장을 이룩했다. 세계경제가 포용성장을 지향하게 되는 2008년 이후의 국면에서 웰빙형 대형교회 중에는 성장지상주의를 비판하고 나눔을 강조하는 교회들이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대형교회들도 사회적 권력네트워크의 재생산 장치로서의 교회가 작동하고 있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무했다. 아니 최근의 대형교회들은 그런 메커니즘에 더 친숙한 신앙제도를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이들 교회들의 상생과 포용성장을 담론화하는 언어들은 성공지상적인 사회적 욕구를 종교적으로 세탁하는 장치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작은교회들은 1990년대 이후, 특히 2008년 이후의 담론 지형을 비판적으로 읽고 신학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데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상생의 신앙 담론의 이면을 해독하기보다는 그 담론의 지형에 흡수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 연장선상에서 코로나19 국면에 들어서게 되었다. 알다시피 언택트라는 뉴노멀에 대해 개신교 진보진영과 작은교회는 별다른 문제의식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었고, 반대로 문제를 제기했던 이들은 개신교 보수진영이었다. 저들의 반대는 알다시피 다분히 음모론적이다. 세계의 권력집단이 그림자정부(Deep State)를 만들어 세계를 단일 체제로 만들려는 것이 코로나19의 숨은 실체라고 주장한 것이다. 요한계시록13,18의 사탄의 징표인 ‘666’이 현대에 오면 기술의 발전을 따라 화폐였다가 신용카드, 그리고 몸에 삽입시키는 소형칩인 베리칩(VeriChip)으로 지목되었다가 최근 코로나 국면에서는 드디어 유전자 변형 기호라는 백신으로 해석된 것이다. 바벱탑 같은 단일 세계체제를 만들려는 적그리스도의 욕망은 인간 외부의 장치들을 통해 인간이 자발적으로 체제에 순응하게 하려는 것에서 점점 진화하여 인간에 삽입시키는 기구가 되었다가 아예 유전자의 변형을 통해 인간이라는 종 자체를 변형하여 체제에 순응하는 신민이 되게 하려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적그리스도의 음모에 저항한 지도자는 트럼프였다는 미국 극우주의자들의 논리의 상당부분은 개신교 세대주의자들의 논리에 의존하고 있다. 한국의 개신교 보수진영의 많은 이들 중에는 이러한 미국발 음모론에 동화된 이들이 적지 않다.

한데 이러한 음모론에 누가 설득당하고 있을까? 다양한 이들이 있지만, 특히 더 처절하게 사회적 고통에 신음하는 이들이 이러한 음모론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주목된다. 개신교 보수파, 특히 음모론을 적극 펴는 세대주의적 극우파들은 이런 고통받는 대중에게 선민주의와 배타주의를 크게 강화시켰다. 하여 더 약한 자들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퇴행성이 증가했다.

반면 작은교회를 포함한 대다수 진보개신교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지했다. 그런데 지지파 대다수는 그 지지를 맹목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처럼 보았다. 언택트의 질서가 만들어 내는 새로운 고통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지 못했다. 코로나 감염으로 인한 고통에 주목했지만, 그 언택트한 방책이 새로운 고통이 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하지 못했다. 1년이 지나도록 교회는 대안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중에, 가정폭력이, 기분장애 질환자가, 자살자가 늘었다. 그리고 플랫폼노동자의 과로사나 최말단 노동자의 사고사도 늘었다. 그 피해자들 모두가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적절한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이들이다. 현재까지 입증된 사실은 어떤 민주적 체제도 민중을 위한 나라를 만들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시민들의 건강을 위한 질서를 대변하는 제도로 구현되었지만,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이들은 사회적 거리두기 국면에서 유령이 되었다. 우리의 일부로 살아 있지만 보이지 않는 자, 부재하는 자가 된 것이다.

고통의 현장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던 작은교회는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고통의 양식도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읽는 노력이 부족했다. 해서 은폐된 고통을 읽어내는 데 게을렀다. 혹자는 민족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낡은 어법으로 보려 했고, 다른 이들은 공공선이니 참여니 하는 도덕적 개념으로 포용하려 했다. 한데 그러는 사이 고통은 보이지 않는 현실이 되었고, 그런 이들에게 더 호소력을 갖고 다가간 것은 세대주의적 음모론자들이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언택트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대면적인 것만을 추구해온 교회의 전통에 대한 의 문제를 고민하게 한다. 그런데 고민은 시민사회와 언택트의 정신을 공유한다는 것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인지를 함께 생각하고 실천한다는 것이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읽고 그 속에서 이름 없는 이들의 고통을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작은교회는, 충분한 정당성을 가진 것처럼 포장된 시민사회적 언택트를 그대로 수용하지 말고, 바깥을 질문해야 한다. 앞에서 말했지만 작은교회는 늘 그런 질문을 해왔다. 스스로의 존재 자체가 바깥인 소수자의 교회였기 때문이다. 또 반대로 소수자의 공동체가 그 바깥에 대한 교회의 무감각에 대해 도전할 수 있다. 어느 경우든 바깥의 공동체는 시민사회와 의미를 공유하지 않을 때가 많다. 의도치 않게 장벽이 생긴 것이다. 해서 교회는 그 벽을 허물고 그 경계에서 공론을 만들어가야 한다. 작은교회는 예배공동체가 아니라 이웃과 공론을 만드는 공동체다. 하여 예배를 위한 예배가 아니라 그 공론이 예배가 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후주]

(01)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소속 목회자 대상 포스트코로나19 설문조사 1차 보고서in 코로나19 이후의 한국교회 대토론회(예장통합총회, 2020.6.15.).

(02) 한국목회자협의회, 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2018 한국인의 종교 생활과 의식 조사 보고서

(03) https://hrcopinion.co.kr/covid-19/article?board_name=board5_4&order_by=fn_pid&order_type=desc&vid=13

(04) 한국에서 인터넷 상용망이 등장한 시기는 1995년이었다. 그때부터 한국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여, 2008년 이후 인터넷 접속 속도, 속도별 인터넷 접속회선 비율, 인터넷 가입율 등에서 한국은 압도적으로 세계 1위를 고수하고 있다.

(05) 해외여행 자유화조치가 시행된 1989년 해외여행자의 수는 전년보다 무려 168%나 증가한 121만 명 정도였다. 한데 코로나 직전인 2019년 현재 한국의 해외여행자 수는 3천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1989년부터 30년 후인 2019년까지 약 248배 증가하였다.

(06) 현대공간이론에서 말하는 장소’(place), 무시간적이고 무체험적인 일종의 사물적 개념인 공간(space)에 대비하는 개념으로, 특정한 시간 속에 있는 특정 행위자의 체험이 녹아 있는 곳을 의미한다. 즉 장소에서 중요한 것은 행위자의 구체적인 체험이 녹아 있다는 것이다.

(07) 가나안성도교회를 안 나가는 신자를 표현하는 말놀이다. 이 말이 널리 회자되고 급기야는 하나의 학문용어로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은 신자들의 떠돌이화 현상이 매우 심각해졌다는 것을 시사한다.

(08) 가톨릭평론2020년에 ‘BTS로 신학하기라는 주제로 6회 연재를 한 이호은의 글은 팬덤을 통해 종교와 대중문화가 겹쳐지는 현상을 다루고 있다.

(09) 문화적 유사종교행위와 정치적 유사종교행위라는 단어는 정진홍 교수가, 조너선 스미스(Jonathan Z. Smith)에 의존해서, 종교의 시대에서 종교들의 시대로, 그리고 종교적인 것(the religious)의 시대로 전화되고 있다는 것을 나의 용어로 바꾸어 말한 것이다.

(10) 1930년대 독일의 철학자 에릭 푀겔린(Eric Voegelin)은 당시 맹렬하게 대중 사이에서 불타오르고 있던 증오의 정치로서의 나치즘을 정치종교’(politische Religion)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또한 이탈리아의 역사가인 에밀리오 젠틸레(Emilio Gentile)는 세속종교(Secular religion)라는 개념을 통해 전체주의적 체제의 종교적 성격을 지적함으로써 정치종교 연구의 중요한 획을 그었다.

(11)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예배, 진정한 예배를 향한 열망, 진정한 예배의 삶, 진정한 예배자의 삶같은 제목의 책이 2천년대 이후 연이어 출간되었는데, 그러한 담론이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문제의식은 공연화되는 예배에는 본질에 대한 물음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에 있다.

(12) 2위로 많은 대답은 21.2%, 3위는 12.9%, 나머지는 10% 미만이었다.

(13) 삼일교회 전 목사인 전병욱은 많은 여성 신자들을 성추행했고, 결국 교회를 떠나 멀지 않은 곳에 다른 교회를 개척했다. 그때 적잖은 신자들이 그이를 따라갔다. 한 연구자가 그 예배에 딸과 함께 참여한 중년의 남성에게 전 목사의 추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하느님께서 더 크게 쓰시려고 한 것이 아니겠냐. 정용택, 그들은 왜 전병욱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가?성공 이데올로기, 욕망의 경제학, 소비주의적 신앙, 웹진 제3시대(2012.09.06.)(https://minjungtheology.tistory.com/353)

(14) 작은교회 한마당2013년부터 연례행사로 개최되고 있는데, 2020년은 코로나 사태로 개최되지 않았다.

(15) 김령은 기자, 왜 작은교회 운동인가? 2015 생명평화 교회론 심포지엄 열려, 에큐메니안(2015.09.23.)(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2527)

(16) 2009년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은행(WB), 심지어 국제통화기금(IMF) 등이 포용성장을 강조하는 보고서들을 줄줄이 내놓고 있다. 한광덕 기자, 9년 전부터 세계적 화두 성장-분배 두 날개로 불평등 치유(대한민국 정책포털 공감코리아. 2019.01.28.)(http://gonggam.korea.kr/newsView.do?newsId=01JAzMbFkDGJM000)
(17) 이에 대하여는 나의 책 대형교회와 웰빙보수주의새로운 우파의 탄생(오월의 봄, 2020), 특히 보론3: 신천지 현상을 읽다신천지와 한국교회, 적대적 공생을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