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에세이

한국의 ‘작은 독재자들’ - 정치종교와 문화종교 개념으로 살펴보는 퇴행적 대중의 출현

[우리 안의 파시즘 2.0](휴머니스트 2022)에 실린 글

이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다.

여는 글. 우리 안의 파시즘, 그 후 20년 - 일상적 파시즘은 어떻게 진화했는가? (임지현)

01. 능력주의의 두 얼굴 - 민주적 공정사회인가, 엘리트 계급사회인가? (이진우)

02. 세대-연공-인구 착종이 낳은 기득권 - 한국의 노동시장 불평등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이철승)

03. 국민주권 민주주의에 사로잡힌 한국정치 - 참여가 대의를 밀어낼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박상훈)

04. 식민지 남성성과 추격발전주의 - 한국사회는 왜 기후위기를 직면하지 못하는가? (정희진)

05. 너무 익숙해서 낯선 일상적 인종주의 - 한국에는 정말 인종차별이 없을까? (조영한)

06. 주목경제 시대의 주인공, 관종 - 프로보커터는 어떻게 담론을 오염시키는가? (김내훈)

07. 한국의 작은 독재자들 - 정치종교와 문화종교 개념으로 살펴보는 퇴행적 대중의 출현 (김진호)

08. 천千의 언어, 천千의 대화 - 부사의 정치학이 낳은 배제와 억압을 넘어서 (우찬제)

09. 우리 안의 행진곡과 소리의 식민성 - 청각을 통해 작동하는 일상 속의 파시즘 (배묘정)

-----------------------------------------------------------------------------------------------------

한국의 작은 독재자들

정치종교와 문화종교 개념으로 살펴보는 퇴행적 대중의 출현

 

 

권력도 없고 자원도 없는 자들, 사회적으로 멸시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자들, 그런 이들이 다수인 대중이 왜 또 다른 누군가를 혐오하는 방식으로 주체화되고 혐오를 부추기는 정치세력의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었을까. 대중은 그 과정에서 작은 독재자들로 군림했다. 모든 권력과 자원을 독점하고 그것을 위해 폭력을 아낌없이 발산시켰던 독재자를 선망하고 모방한 탓일 수도 있다. 그런데 꼭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니다. 독재자를 향한 선망과 모방은 작은 독재자가 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에 따른 결과처럼 보이게 한다. 한데 정치종교적·문화종교적 해석은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파시즘과 정치종교

 

1938년 철학자 에릭 푀겔린(Eric Voegelin)은 유럽의 후발 국민국가 중 일부가 파시즘적 정치체제로 귀결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정치종교(politische Religion)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파시즘 체제에 대한 대중의 열광적 지지가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대중이 적에 대한 증오를 가득 품은 민족주의적 구원신화에 환호한 것인데, 이는 종교적 종말론의 세속적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종교와 정치의 불온한 만남을 정치종교라고 표현한 것이다.

한데 그런 대중은 갑자기 탄생한 것이 아니다. 미술사학자 아르놀트 하우저(Arnold Hauser)짝퉁귀족예술인 통속예술이 매스미디어와 만나 대중예술로 전화되면서 이 새로운 예술양식의 소비자인 대중이 탄생했다고 본다. 그들은 대중예술의 구경꾼이다. 미술평론가 조너선 크레리(Jonathan Crary)는 대중이 구경꾼(observer)의 체험을 통해 역사적 주체가 되었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비평가 발터 벤야(Walter Benjamin)에 따르면 그 구경꾼은 배회하는 자(flâneur). 파리의 아케이드를 배회하는 자, 이 거대도시의 이 판타지적 자극에 노출되어 신경증적 불안을 내재한, 분열적 존재인 것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이러한 신경증적 대중이 그 시대의 정치적 불안정과 얽히면서 계급의식이 약화되고 특정 정당이나 노조에 무관심한, 원자화된 개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동시에 그들은 이상주의적 유토피아와 같은 추상적 비전에 헌신하는 심리를 가지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아렌트는 대중의 이와 같은 심리 상태가 그들을 민족주의적 구원신화를 유포하는 파시스트의 주장에 열광하는 정치적 대중으로 재탄생하는 토양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한데 이들 대중을 선동한 파시스트적 구원신화는 가공할 적에 대한 공포와 결합되어 있다. 대중이 겪고 있는 이 모든 질곡은 바로 적그리스도의 농간 때문이라는 것이다. 파시스트들은 적과 맞서기 위해 구원신화의 주인공인 영웅적 존재가 이끄는 정치연합의 열렬한 수행자가 되라고 대중을 선동했다. 법학자이자 나치즘적 정치신학 주창자인 카를 슈미트(Carl Schmitt)데살로니카후서27절에 나오는, ‘무법자(아노모스, άνομος)의 준동을 억제하는 자(카테콘, κατέχον)가 바로 그 영웅이라고 말한다. 결국 나치당과 당수 히틀러가 카테콘이라는 이야기다. 저 종말의 시간이 도래하기 전, 모든 것이 결딴나는 그 단절의 시간 전까지, 이 잠재적 시간에 대중을 적그리스도로부터 보호하는 자인 것이다. 정리하자면 정치종교는 무정형적 대중이 정치적 대중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다루는 하나의 정치신학적 해석체계라고 할 수 있다.

 

60년대의혁명들로 돌아보는 한국의 정치종교

 

그렇다면 한국정치를 설명할 때 정치종교 현상을 적용하는 게 적절할까. ‘정치종교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유사한 해석을 시도한 연구는 상당하다. 대부분의 연구는 박정희 체제에 주목하는데, 특히 박정희 정권이 구사한 담론전략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 연구는 그 자체로 충분한 의의가 있지만, 이들을 정치종교 현상에 대한 선행 작업으로 설정하기 위해서는 논의를 좀 더 보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정치종교 연구는 정권의 담론전략 자체보다 그 수용자에 주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구이고 어떻게 정치적 대중으로 주체화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여기서 대중의 주체화를 본격적으로 다룰 수는 없지만, 대중의 탄생에 관해서는 간략히 스케치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는 ‘4.19’‘5.16’과 함께 시작하고 그 두 담론의 실타래가 얽히고설키면서 다음 십년으로 이어진다. 사건의 주역들이 혁명이라고 그 시간을 의미화하고 있는 데서 보듯 그것은 1960년 이전과 이후를 절단하는 시간의 단절, 그 불 같은 사회적 열망을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는 시민에 의한 단절의 시간이었고, 다른 하나는 군인에 의한 단절의 시간이었다. 1940~50년대 국가 테러리즘의 경험 속에서 시민과 군인은 공존하면서도 결코 합쳐질 수 없는 감정의 우물 속에 갇혀 있었다. 그 안에서 그들은 같은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그 하늘은 동일한 형상으로 드러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 두 단절의 시간기획은 그 이전과 연결되는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 해방 이후, 숱한 사회적 갈등 요인으로 인해 벌어진 무수한 분열은 한국전쟁을 경유하면서 뚜렷한 적에 대한 증오의 감정으로 흡수되었다. 전쟁은 적을 명료히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전쟁은 휴전으로 마무리되었다. 누구도 적을 괴멸시키지 못했다. 그리하여 적대의 선(enemy line)을 경계로 교전은 멈췄지만, 그 선 내부에선 끓어오르는 증오가 무차별하게 발산했다. 1950년대는 그랬다. 나는 이러한 증오의 정치학을 파괴적 증오라고 부른 바 있다.

4·195·16은 이러한 증오와 파괴의 연결고리를 끊고자 했다는 점에서 겹친다. 4·19는 국가폭력을 단죄하고자 했고, 5·16은 적을 향한 증오와 파괴를 성공에 대한 욕망으로 환치하고자 했다. 적을 파괴하는 데 모든 힘을 소진하기보다는 풍요의 욕구를 향해 돌진하는 생산적 동맹에 열렬히 참여하는 역동의 에너지로 전환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나는 5·16이 추구했던 이러한 정신구조를, ‘파괴적 증오가 아니라 생산적 증오라고 말한 바 있다. 한데 이 ‘5·16스러운담론은 사실 4·19의 주역들이 디자인했던 것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4·195·16은 생산적 증오의 정신구조를 공유했던 셈이다.

한데 1960년대 대중의 체험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자. 1940~50년대, ‘파괴적 증오의 정신구조를 가져야 한다는 강요 아래 대중은 그 파괴적 증오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어야 했다. 4·195·16은 그런 살육의 질서를 주도했던 권력을 와해시켰다. 그럼으로써 파괴적 증오를 추동했던 국가기구와 관제기구는 무력화되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4·195·16의 주역들은 대중이 파괴적 증오의 수행자가 되는 대신 생산적 활동에 매진하는 사회를 디자인했다. 물론 ‘5·16체제는 파괴적 증오와 철저한 단절을 도모하지 않았다. 다만 대중을 동원하지 않은 채 국가가 파괴적 증오의 실행을 독점했다는 점에서 달랐다. 파괴적 증오는 대체로 대중에게 공개되기보다 밀실에서 수행되었다. 그리하여 대중은 점차 그 폭력적 현실에서 멀어졌다. 그렇다면 대중은 그 빈틈을 무엇으로 채웠을까. 전쟁의 상흔은 여전히 몸 안팎을 오가며 증오와 복수의 감정으로 표출되고 있는데, 국가는 그런 대중이 증오를 산업역군을 향한 동력으로 전환시키길 원했다. 과연 그것이 전부였을까.

여기서 대중의 일상에 관해 한 가지 염두에 둬야 할 것이 있다. 한국전쟁 이후 다수의 대중이 도시로 몰려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1960년대 이후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도시가 갑자기 늘었고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한 노동자의 수도 빠르게 증가했다. 도시의 삶은 차가운 연결망으로 느슨하게 조직되었다. 강고한 농민적 연대감은 크게 이완되었다. 무엇보다 공산주의가 철천지원수로 낙인 찍히면서 계급적 연대는 말도 꺼내서는 안 됐다. 이렇게 개체화된 도시에서의 삶은 대중에게 실존의 공간을 두드러지게 확장시키는 것으로 이어졌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보여주듯 지식인들은 더욱 고독한 실존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 의미 없이 거리를 나돌아다니고, 의미 없이 다방에 들어가며, 의미 없이 집으로 돌아온다. 개인의 분자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공동체적 결속이 초고강도로 활개 치면 대중 사이에서 이탈의 정념이 끓어오른다. 하지만 전통적 공동체가 와해되고 개인이 분자화되면서 대중이 고독에 몸부림치는 실존적 상념에 젖으면 다시 강한 집단의 열정 속으로 빨려들고 싶은 욕구가 춤추게 마련이다. 1960년대의 대중은 전체주의적 갈증에 점차 목말라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1970년대 초 박정희 정권이 고강도의 전체주의 체제를 구축할 때, 대중은 그 불온한 기획에 수동적으로 순응한 것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이 시기에 정권의 국민 만들기 기획은 대중의 열렬한 참여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새마을운동자유교양운동이다. 대중은 단시 생산적인 산업역군으로서 경제적 주체가 되었던 것만이 아니라, 전체주의 체제의 국민 되기에 앞장선 이데올로기적 주체이기도 했던 것이다. 요컨대 그 시대를 성찰하는 데 실패한 다수의 대중은 박정희라는 독재자를 추종하는 작은 독재자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정치종교 개념은 박정희 정권 시대 대중의 전체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적 주체화 과정을 읽는 데 정치종교 개념은 유용하다.

 

1987

 

1970년대가 끝나갈 무렵 갑자기 박정희 체제가 내파되고, 그 체제 아래에서 성장한 정치군인들이 군사독재정권을 다시 연장시켰다. 군사독재정권은 독재를 연장할 명분을 확보하고자 대단히 무리한 강제와 동의의 전략을 구사했다. 강제의 전략이란 5·18 광주학살사건과 그것을 전국화한 공포정치를 말한다. 그리고 동의의 전략이란 이른바 ‘3S 정책(Sex, Screen, Sports)이라는 우민화 전략을 비롯한 유화책을 가리킨다.

이 강제와 동의의 정치는 잠시 효력을 보였다. 하지만 그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얼마 후 그 체제를 해체하는 거대한 역사의 동력을 만들어내는 자극제가 되었다. ‘1987년 민주항쟁이라는 어마무시한 대중의 저항이 발생한 것이다. 오랫동안 보수대연합을 가능하게 했던 반공연대를 위협할 만큼 거대한 대중의 민주연대가 형성되었다. 한편 3S 정책은 내구소비재산업의 비중이 크게 증가하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소비사회로의 이행에 촉매제가 되었다. 소비사회는 사람들을 집합적 주체로 결속하기가 매우 어려운, 분자화된 대중으로 호명한다. 이제 소비사회의 대중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쾌락을 참지 않는, 매우 현실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 분기점이 ‘1987이라는 주장은 널리 받아들여진다. 1987년은 더 이상 정치군인에 의한 정권 장악이 용이하지 않도록 하는 민주주의적 제도로의 전환이 시작된 해다. 그리고 소비사회로의 급속한 전환은 1988년 올림픽과 긴밀히 관련된다. 하지만 88올림픽의 국제적 인준이 주로 1987년 민주혁명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른바 ‘1988 효과1987년 체제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헌법적 질서의 시작인 동시에 대중이 민주주의적 주체이자 소비사회의 주체로 거듭나는 분기점을 ‘1987이라고 보는 것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한데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거세지고 소비사회로의 이행이 급진전되는 1987년 체제를 설명하는 데도 종교적 해석이 일정한 유용성을 갖는다. 나는 그것을 해석하기 위해 복음주의 신학자인 피터 윌리엄스(Peter J. Williams)대중종교(popular relegion)개념을 참고하고자 한다.

 

대중종교라는 문화종교

 

윌리엄스는 1960년 무렵부터 주로 미국에서 일어난 새로운 복음주의적 종교운동을 염두에 두면서 이 용어를 사용했다. 당시 주류 교회는 근대주의적 합리성과 과학을 수용하고 다원주의적 가치를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이에 반발하는 일련의 복음주의적 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크게 두 경로로 전개되었는데, 하나는 방송매체를 통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흥집회를 통한 것이다. 양자는 때로 하나로 엮이기도 했고 때로 나뉘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경로가 주류 교회의 조직 바깥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주류 교회의 조직이 잘 짜인 체계를 가진 데 반해, 이 바깥의 공간들은 체계화된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종교 현상을 좀 더 넓은 사회문화적 지평에서 보면, 1930년대의 정치종교 현상이 파시즘적 정치의 시대에 활기를 띠었다면 1960년대의 대중종교 현상은 민주주의적 정치체제와 연관되었다. 다만 전자는 파시즘 체제와 유기적으로 결합한 반면, 후자는 민주체제와 심각하게 갈등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 하나, 정치종교 현상에서는 소비사회적 문화에 대해 신경증적 불안증이 두드러졌지만, 대중종교 현상은 소비사회의 욕구와 매우 잘 조응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전자는 보들레르가 그의 산문시 괘씸한 유리 장수에서 묘사하는, 신경증적 불안에 사로잡혀 유리 장수가 들고 온 유리를 심술궂게 산산조각 내는 시적 화자처럼 소비문화에 이유 모를 적개심을 표한다. 반면 윌리엄스가 말하는 대중종교 현상은 소비사회적 욕구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대중종교가 보내는 메시지 한가운데에는 부자가 되려는 욕구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한데 미국의 1980년대에 들어서면 대중종교에 열광하던 이들이 정치적 대중으로 전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른바 기독교 우파라고 불리는 정치세력이 급격히 부상한 것이다. 물론 대중종교 현상에는 그러한 전환의 가능성이 이미 들어 있었다. 민주주의가 일상화되면서 인종··종교 등의 다양성에 대한 포용의 문화가 확산되는 것에 대해 대중은 적잖은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왜 대중종교의 추종자들이 포용주의에 적대적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포용성 담론의 사도들이 기독교 전통의 문화를 청산의 대상으로 규정하면서 세속화 테제를 제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개신교 신앙은 낡은 시대를 상징하는 것이고 이제는 그 효용을 다했으니 청산되어야 할 구태로 낙인찍은 저들 포용성의 사도들에 대해 일단의 대중이 분노한 것이다. 선동가들은 분노하는 대중에게 선악 이분법을 주입해 대중을 정치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선동가들에게 있어 정치는 다양한 세력의 협상과 타협의 산물이 아니라 악을 응징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행위다. 이러한 퇴행적 정치에 일단의 대중이 적극적 행위자로 나선 것이다. 윌리엄스의 대중종교 개념을 이와 같이 대중의 퇴행적인 정치적 주체화의 관점으로 재해석하면, 푀겔린의 정치종교처럼 대중이 특정한 시대에 어떻게 출현했고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를 읽는 데 유용하다. 한데 정치종교와 대중종교라는 용어를 나란히 사용하는 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왜냐면 정치종교도 대중의 정치적 행동에 관한 종교적, 특히 종말론적 해석이라는 점에서 엄밀히 표현하면 정치적 대중종교라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용어가 적합할까. 내가 대중종교 대신 선택한 용어는 문화종교(cultural religion). 정치종교가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갈등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주체화된 대중의 형성이 종말론적 종교 행위처럼 나타나는 것을 해석하는 개념이라면, 문화종교는 문화적 가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이 대중을 정치적으로 주체화하는 것을 다루는 개념이다. 여기서 이 문화적 투쟁은 절충하고 타협하는 정치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단절로 해석하는 종말론적 종교운동처럼 선과 악 이분법에 의거한 비타협적 정치로 나타난다. 나는 이러한 문화적 투쟁이 대중의 정치적 주체화로 이어지고 정치적 대중운동으로 구현되는 양상을 나는 문화종교라고 부르고자 한다. 하여 정치종교와 문화종교, 이 두 개념을 아래 표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혐오의 정치로 구현되는 한국의 문화종교

 

앞에서 언급했듯이 ‘1987이라는 키워드는 그 이후의 사회 형성에 관한 두 가지 변수를 함축한다. 하나는 민주화이고 다른 하나는 소비사회화. 대중은 민주화를 통해 대중은 권리란 누구에게도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을 고양했다. 한편 대중은 소비사회화 과정을 통해 대중은 자신의 고유한 취향을 표출하는 주체로 부상했다.

민주화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평등한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원리를 축으로 하는 사회제도를 지향한다. 그런 점에서 민주화된 사회의 대중은 나는 국민이다라는 자의식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문제는 누가 국민인가(또한 누가 국민이 아닌가)라는 질문에서 나온다. 그 때문에 대중의 행동에는 국민의 대열에서 이탈되지 않으려는 모든 시도가 포함된다. 그러나 대다수는 국민의 대열에서 이탈되지 않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만큼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 하여 민주사회의 주체화는 늘 나는 왜 완전한 국민이 될 수 없는가라는 결핍감을을 혹처럼 달고 있어야 했다. 한편 소비사회화는 나를 소비자로 호출한다. 한데 소비자가 되려면 충분한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거의 모든 대중은 자신의 욕구만큼 소비할 수 없다. 하여 소비사회의 주체화에는 항상 나는 왜 부자가 아닌가라는 결핍감이 붙어다닌다.

1987년 이후 빠른 주체화 과정 속에서 대중은 자신이 늘 결핍되어 있다는 자의식의 늪에 빠져 허덕인다. 이때 대중은 그 결핍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사법고시에 몰두하거나 주식투자에 혼신을 다하거나 기타 등등, 많은 이가 결핍을 만회하는 여러 활동에 매진했다. 한데 점점 대중은 결핍의 늪에서 벗어날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사회가 더 발전하고 더 합리적 시스템이 구축될수록 이미 형성된 풍요와 결핍의 벽은 거의 넘을 수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대중은 내가 부자가 될 수 없는 이유또는 내가 완전한 국민이 될 수 없는 이유준동하는 적때문이라는 생각에 빠져든다. 이른바 혐오감정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 대표적인 예가 학교나 일터에서 또는 (/오프라인의) 익명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불링(bullying)’, 곧 집단 괴롭힘 현상이다. 불링의 가해자는 세 범주로 나뉘는데, 주도하는 자, 적극적 동조자 그리고 소극적 동조자인 방관자가 그들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주도하는 자의 주요 역할이 집단의 정체 모를 불만과 분노가 표출되는 경로를 지정해주는 데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경로가 정해지면 정체 모를 불만과 분노는 특정 대상을 향해 집중된다. 여기서 초점은 왜 누군가가 혐오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는지를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없다는 것도 문제에 있다.

그런 과정은 작은 공간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넓은 범위의 사회적 혐오감정으로도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감정이다. 여기서 성소수자가 지목된 이유는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성소수자가 문제적인 행위를 벌여서 분노 유발자가 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불링의 주도자가 느닷없이 그들을 지목했을 뿐이다. 여기서 주도하는 자는 종교적 서사를 만들어낸다. 신의 섭리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라는 것, 그래서 그들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왜 무수한 죄 가운데 그들의 죄가 특별한지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단지 그들이 세상을 오염시킨다는 추상적인 집단적 위기의식이 이유라면 이유다. 해서 혐오하는 대중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을 성소수자를 향해 한껏 모욕과 증오를 쏟아낸다. 이와 같이 특정한 문화적 차이나 성향을 혐오의 근거로 삼아 그런 대상을 낙인 찍고 공격하는 메커니즘은 다분히 종교적이다. 이렇게 1987년 이후 대중의 적잖은 일부가 그런 혐오의 주체의식을 가진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한데 민주적 제도와 규범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그런 혐오주의를 허용할 수 없다. 이에 혐오하는 대중은 민주체제에 대한 정치적 반대자로 주체화되었다. 그들을 선동하는 자들은 대중에게 더 설득력 있는 담론을 만들어내기 위해 민주체제와 대립적인 메시아를 호출했다. 박정희가 대표적이다. 1997년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56공 세력이 역사적으로 붕괴하기 일보 직전에 박정희 메시아주의가 등장했다. 영원한 비서실장이라는 김정렴의 회고록, 저 유명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제목의 조갑제 기자의 신문 연재, 그리고 가장 박정희 메시아주의에 가까운 해석이 두드러진 이인화의 소설 인간의 길, 대중의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이 메시아 박정희 담론들이 1997년 한꺼번에 나온 것이다. 그들은 민주체제가 아니라 박정희 정권과 같은 강력한 권위주의적 체제를 꿈꿨다.

1987년부터 1990년대를 아우르는 문화종교 현상은 박정희 메시아주의가 출현하는 1997년에 절정에 이르렀지만, 그 뒤 빠르게 사멸했다. 1997년 외환위기와 IMF 구제금융이라는 단절적 사건의 귀책사유가 민주화 세력이 아니라 권위주의 체제에 있었고, 무엇보다 구제금융 이후에도 나라 전체가 경제 문제로 심각하게 흔들렸기 때문이다. 박정희 메시아주의가 부활한 것은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2010년대 이후다.

 

작은 독재자들의 정치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20세기 이후 대중의 출현은 다양한 요인이 결합된 결과다. 한데 정치적 주체로 등장한 대중이 퇴행적 성격을 드러내면서 증오와 정치가 함께 작동되는 과정은 종말론적인 종교적 특성을 보인다. 나는 이를 분석하기 위해 정치종교와 문화종교라는 틀을 제시해보았다. 이를 통해 한국사회를 읽어내고 일부 대중이 어째서 퇴행적 존재로 주체화되는지를 살펴보았다.

권력도 없고 자원도 없는 자들, 해서 사회적으로 멸시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자들, 그런 이들이 다수인 대중이 왜 또 다른 누군가를 혐오하는 방식으로 주체화되고 혐오를 부추기는 정치세력의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었을까. 대중은 그 과정에서 작은 독재자들로 군림했다. 모든 권력과 자원을 독점하고 그것을 위해 폭력을 아낌없이 발산시켰던 독재자를 선망하고 모방한 탓일 수도 있다.

이렇게 작은 독재자가 되는 것이 아닌, 다른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까. 퇴행이 아닌 성찰하는 대중의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나는 그중 성서를 통해 추정되는 한 대중운동에 관해 간략히 이야기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서기 1세기 말에 실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예수운동의 한 분파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그들을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이라고 부른 바 있는데, 그런 대중운동 그룹의 흔적을 보여주는 문서가 바로 요한복음이다. 특히 114절은 이 문서의 핵심 구절로, 그 집단이 어떤 것을 추구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호 로고스 싸릌스 에게네토(ὁ Λόγος σρξ γένετο),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문구다. 요한복음 저자인 익명의 사상가보다 몇세기 앞선, 같은 에게해 권의 철학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기 머리(아르케, ἀρχή)(소마, σόμα)을 강조했다. 이것은 그들의 정치철학과 연결된다. ‘머리으로 표현된 신체 부위는 그들이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정치적 질서를 구축하는 주역이 누구인지를 상징한다. 플라톤이 머리로 표상되는 엘리트 정치를 강조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엘리트도 아니고 빈자도 아닌 중간적 존재인 데모스(δμος)의 정치를 강조했다. 이때 그는 데모스를 노동자, 농민, 상인, 기술자 등 몸(소마)의 존재로 표상되는 자들로, 그들이 자신을 고양시킬 때 엘리트나 빈자와는 다른 이상적인 정치공동체를 가능하게 할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요한복음 저자는 머리(아르케)는 말할 것도 없고, 자기를 고양시킬 수 있는 몸의 존재도 아닌 것을 강조한다. 그것은 사릌스(σρξ). 빈자의 몸, 범죄자의 몸, 악령 들린 몸, 장애가 있어 부정타게 하는 몸 등등, 한결같이 신으로부터 너무나 먼 곳에 있는 범주의 존재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이는 무모하게도 말씀(호 로고스, ὁ Λόγος)사릌스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충격적인 해석이다. 가장 성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자들이 신의 존엄함을 더 닮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가 설파한 메시지의 핵심이라고 말이다. 이것은 자신의 수신자들에게, 비록 당신들이 사릌스 같은 존재지만, 그럼에도 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들임을 자각하고 누구보다도 더 철저히 성찰하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요한복음에는 무수한 폭력에 노출된 수신자들에게, 저들 가해자들의 힘을 욕망하고 모방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말들로 가득하다.

이 복음서의 수신자들 주위에는 그런 욕구들이 분출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을 수탈하고 폭행을 가하는 권력자들을 모방하면서, 자기들보다 더 약한 자들에게 권력자가 되어 증오를 퍼붓는 작은 폭군들이 되고자 했다.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공동체 내에서 일고 있는 원리주의적 유대주의도 그런 양상을 보이고 있었고, 여러 그리스도계 분파들도 그런 대열에 올라타고 있었다. 심지어 요한복음 공동체 내부에서도 그런 조짐이 보였다. 하여 이 복음서 공동체 안팎의 우리들 사이에서 사이에서 무수한 작은 파시스트들이 출현하고 있었다. 요한복음은 바로 이런 우리 안의 파시즘과 일전을 벌이고 있는 문서다. 즉 이 복음서는 자신들의 내면까지 침투하고 있는 일상의 파시즘까지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급진적 반파시스트 대중정치에 관한 하나의 전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