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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역사의 예수 다시보기_06 : 바리새파와 적대한 뒤, 갈릴래아 마을 밖으로 - 예수운동의 코어그룹, 떠돌이 예언자들

바리새파와 적대한 뒤, 갈릴래아 마을 밖으로

예수운동의 코어그룹, 떠돌이 예언자들

 

 

 

호숫가로 물러가다

 

안식일 치유 사건 직후 예수와 제자들은 호숫가로 물러갔다’.”(마가복음3,7) 앞 장은 이 구절을 다시 명시함으로 끝은 맺었다. 여기서 물러가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아낙쏘레오(αναχωρεω)는 이곳을 포함해서 제2성서에서 9번 사용된다.(마태복음7; 마가복음요한복음에 각 1회씩) 아래는 마가복음3,7을 제외한 이 단어의 용례들을 열거한 것이다.

 

헤롯을 피해 요셉 가족이 이집트로 갈 때(마태복음2,14)

요셉 가족이 에집트에서 다시 귀향하고자 했으나 아르켈라오가 헤롯의 뒤를 이어 유대아 지방의 통치자가 되었다는 소식에 그곳을 피해 갈릴래아로 갈 때(마태복음2,22)

요한이 잡히자 예수가 페라이아에서 갈릴래아로 돌아갈 때(마태복음4,12)

안식일에 바리새파 사람들과 일전을 벌인 후 예수가 마을 밖으로 나갈 때(마태복음12,15)

요한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가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피해갈 때(마태복음14,13)

바리새파와 충돌한 후에 예수가 티로와 시돈으로 물러갈 때(마태복음15,21)

배신자 유다가 산헤드린에서 은화를 던져버리고 물러갈 때(마태복음27,5)

안식일 치유사건 이후 에수가 호숫가로 물러갈 때(마가복음3,7)

오병이어 사건에 열광하게 된 대중이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 하자 예수가 그곳에서 물러갈 때(요한복음6,15)

 

모두가 갈등 상황이 전제되어 있고 그 현장에서 이탈하는 행위를 묘사할 때 아낙쏘레오를 쓰고 있다 그러니 마가복음3,7에서 호숫가로 물러갔다.’는 어구도 그런 관점에서 해석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이 구절의 바로 앞 단락에서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마을회당에서 격렬한 논쟁을 벌인 뒤, 그들이 헤롯당과 제휴하기로 하자 예수는 더는 마을 안에서 활동하는 게 여의치 않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는 마을 밖으로 물러갔다.

한데 마가복음은 그렇게 물러간 곳을 호숫가라고 말한다. 마을 밖의 여러 장소 중 호숫가가 특별히 명시되고 있다. 이곳이 마을 밖 활동기를 대표하는 공간임을 시사한다. 여기서 호수는 갈릴래아 호수다. 호수 이편은 헤롯의 아들인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땅이고, 저편은 안티파스의 배다른 형제인 필립의 땅이다. 통치자가 형제간이고 얼마 후 장인-사위의 관계가 되지만,(1) 두 영토는 엄연히 다른 행정권 관할의 땅이니 어느 관료든 국경 너머까지 공권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 그리고 갈릴래아 호수 저편의 남부지역은 데카폴리스 지역이다. ‘데카폴리스열 개의 도시라는 뜻으로, 헤롯의 영토 중 그의 아들들에게 상속되지 않고 헬라화된 열 개의 도시들에 귀속된 지역을 말한다. 가령 광인이 치유를 받았다는 거라사 지역은 거라사라는 데카폴리스의 한 도시의 영역을 가리킨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지역에도 안티파스의 군대가 진입할 수는 없다. 그러니 호숫가란 호수를 경계로 하는 변경지대다. 한편 호숫가는 예수가 마을 밖으로 내몰려 간 곳이니, 가버나움처럼 마을이 형성된 곳은 아니었다. 그곳은 공터 같은 곳이다. 요컨대 호숫가, 거시권력이든 미시권력이든, 권력의 공백지대다.

아래 인용 구절에서 우리는 호숫가에 대해 좀더 상상할 거리를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물러나 호숫가로 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군중이 따라왔다. 예루살렘과, 이두매아와 요르단 동쪽과, 티로와 시돈 주변으로부터 온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님이 해오신 여러 일을 다 듣고서 큰 군중이 예수님께로 온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자기가 쓸 작은 배 한 척을 준비하라고 하셨다. 무리 때문이었다. 무리가 자기를 밀쳐대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마가복음3,7~9)

 

마을 밖 호숫가로 물러가니 다양한 족속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에는 티로나 시돈, 요르단 동쪽 같은 곳에서 온 이방인들도 있었다. 한데 호숫가에서 마주친 그들은, 이방인이든 아니든, 마을회당에서는 볼 수 없는 자들이다. 가버나움 같은 변경지대의 어촌에도 필시 여러 지역 출신의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이방인도 적잖았다. 변경지대란 그런 곳이다. 근데 이곳엔 세관이 있었다. 이 변경마을을 통과하는 이들은 통행세와 물품세를 내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 온 여러 지역 출신 사람들 중 다수는 조세능력을 갖춘 이들이다. 물론 거기에서 자비를 구걸하는 거렁뱅이들도 있었다. 예수가 제자로 부름받은 세관원 레위의 집에서 식사를 할 때 죄인들도 그 자리에 있었다.(마가복음2,15)고 하는데, 여기서 죄인들은 마을회당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이들을 가리킨다. 마을회당 밖이란 바리새적 율법의 바깥을 뜻한다. 이방인들이거나 비천한 자들이 그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마을 안에 있을 수는 있지만, 그곳의 주된 대중일 수 없다. 마을 안에서 그들은 잉여적 존재’, 곧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아쉬울 것 없는 자들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왜냐면 그들은 바리새적 율법에 의하면 불결하다고 낙인찍힌 자들이니, 가까이 접촉하면 멀쩡한 사람을 부정타게 한다. 그렇게 부정한 기운에 전염된 자는, 자신이나 가족에게 질병이나 그밖의 여러 재앙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해서 부정한 자와 마주치면 부정함을 씻은 의례를 가져야 한다. 하여 타인을 부정타게 할 수 있는 자들을 마을 안의 종교적 질서체계는 죄인이라고 낙인찍었다.

한데 마을 밖은 사정이 다르다. 호숫가의 예수 주위에 모인 이들 중에는 세관을 통과하는 이들도 있었겠고 마을회당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이 장소에 훨씬 더 적합한 이들은, 위에서 죄인들이라고 불렀던 그런 이들이다. 그들은 이리저리 유리걸식하는 자들이다. 위의 인용구절을 보면 무리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번역어의 헬라어 단어는 오클로스(οχλος). 다음 장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바로 유리걸식하는 대중을 가리키는 용어다. 예수가 호숫가로 물러가자 그런 이들이 몰려들었다.

한편, 위의 인용구에서 보듯이, 예수는 이런 대중이 주변에 몰려들어 집회를 할 때 종종 를 이용했다. 사람들이 밀쳐대는 것에서 자유롭고자 함이었다. 다수가 모이는 장소에서 서로 밀쳐대는 일은 일상적인 것이다. 한데 왜 예수는 그런 일상적인 것을 피하기 위해 배를 사용하려 했을까.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예수는 병든 자를 치유하고 악령을 내쫓았으며 절망한 이들을 위로했다. 근데 이런 행위에서 지도자에게 꼭 필요한 자질의 하나는 스킨십이다. 많은 이들은 스킨십이 영험한 이의 기운을 받는 행위로 생각하고 있었다. 12년간 피를 흘렸다는 한 여성은 감히 치유를 사정하기도 벅차서 그저 그이의 옷깃에 자신의 손을 대었을 뿐이다. 한데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벅찬 영험함을 체험했다. 해서 그녀는 치유되었다. 그리고 예수는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치유했다고 말했다. 한데 배에서 대중을 만난다는 것, 자신은 대중의 밀쳐대는 것을 피하려고 배 위에 있고 대중은 뭍에 서서 그이를 바라보는 상황, 이것은 예언자의 너무나 차가운 행동이 아닌가. 게다가 배 위에서 말씀을 선포하려면 물소리 같은 소음의 방해를 감수해야 했다. 좀 거센 바람이라도 분다면 집회는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는 왜 배가 필요했을까.

여기서 우리는 요한이 체포되었을 당시를 연상할 필요가 있다. 대중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대중에게 하느님나라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군대가 들이닥쳤다. 어쩌면 그들은 요한을 체포하려고 몰래 군중 속에 그의 신탁을 경청하는 자처럼 숨어들어 있었는지 모른다. 신호가 떨어졌을 때 병사들은 사납고 무자비한 야수처럼 숨겨둔 무기를 꺼내들고 대중을 닥치는 대로 패대기치고 때리고 베어댔다. 그리고 집회의 주모자 요한과 그의 측근들을 체포했을 것이다.

예수는 그것을 경험한 요한의 측근이었다. 그렇다면 대중의 밀쳐댐이 일상에선 치유사건이 일어나는 환경적 동력이 될 수 있지만, 유사시엔 운동 자체를 끝장낼 수 있는 무대책 무방비의 집회기획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겠다. 해서 예수는 미심쩍은 상황이라면 배를 사용해서 집회를 하곤 했을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호수 저편은 다른 통치자의 영토니 안티파스의 군대가 추격할 수 없는 곳이다.

이것은 예수와 그 측근 인사들의 하느님나라 운동의 양식이 바뀌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가 한 때 추종했던 요한은 대중을 자신의 장소로 불러모았다. 한데 그가 체포되고 그의 잔당들이 공권력의 추적을 당할 때 공권력의 영향력이 발휘될 수 없는 시골마을 안에서 활동했다. 그는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집회를 마치면 다른 마을로 갔다. 그렇게 마을을 돌면서 활동한 뒤 거점장소인 가버나음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마을회당에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심각한 갈등 상황에 놓이게 되자 예수는 마을 밖으로, 특히 호숫가로 물러갔다. 마을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 여의치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은 호숫가 같은 마을 밖 공터에서 대중과 만났고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가끔은 배를 타고 이방지역으로도 갔다. 마을회당 활동기 때나 마을 밖 호숫가 활동기 때나 집회 후 그곳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는 건 비슷하지만, 하나는 그 이후 거점장소로 돌아가곤 했지만 다른 하나는 돌아갈 거점장소조차도 없어졌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둥지 틀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자는 머리 대고 누울 곳이 없습니다.”(마태복음8,20)는 구절은 바로 이런 상황을 반영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예수일행은 돌아갈 곳이 없다.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는 예언자가 된 것이다. 이 장은 바로 이들 떠돌이 예언자가 된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제자사도’, 그리고 열둘

 

위에서 인용한 구절에서 예수가 호숫가로 물러갈 때 제자들이 그와 동행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예수가 제자 중 몇을 선별하여 열둘을 정하고 그들을 사도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셔서, 자기 뜻에 딱 맞는 사람들을 가까이 부르신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왔다. 예수님이 열둘을 정하셨다. 그들에게 사도라는 이름도 붙여주셨다. 그들이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그들을 내보내어 선포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또 귀신들을 쫓아내는 권한이 그들에게 있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마가복음3,13~15)

 

여기서 예수운동의 코어집단을 가리키는 세 단어가 나온다. ‘제자’, ‘열둘’, ‘사도가 그것이다. 이중 열둘이 제일 어려운 번역이다. 이 단어는 헬라어 도데카(δωδεκα)를 번역한 것인데, 많은 한글 성서들은 열두 제자로 옮겼다. 하지만 헬라어 성서는 한 번도 도데카 마세타이(δωδεκα μαθηται), 곧 열두 명의 제자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단지 도데카로만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열둘열두 명의 제자로 번역하는 게 옳을까.

그렇게 번역하는 게 성서에 기반을 두지 않는 터무니없는 번역은 아니다. 실제로 성서 자체도 이 단어를 열두 명의 제자로 생각했던 흔적이 있다. 대표적인 성서 구절이 복음서의 제자 명단이다.(마가복음3,13~19; 마태복음10,1~4; 루가복음6,12~16) 세 복음서 모두 열두 명으로 구성된 제자 명단을 소개하고 있다. 한데 조금 더 생각하면 이 명단이 의심스럽기도 하다. 열두 명이라는 명확한 숫자를 얘기하고 있음에도 세 복음서의 명단은 서로 조금씩 다르다. 또 몇 명을 빼면 복음서 어디에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한편 이 명단에 언급되지 않았지만 예수 측근 중의 측근인 이들도 등장한다. 대표적인 이가 주의 형제 야고보막달라 마리아. 야고보는 예수 사후 얼마 되지 않아서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제자 명단에 그는 등장하지 않는다. 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묘사하는 설화에서 누구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한 여성인데, 예수가 갈릴래아에서 활동할 때부터 그이를 추종하였다. 그럼에도 열두 제자 명단에는 흔적도 없다.. 한편 배신자 유다가 자살하자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제비뽑기를 했다는 구절(사도행전1,26)도 좀처럼 납득되지 않는 일이다. 비밀스런 활동을 벌여야 했던 집단이 지도자가 당국에 의해 처형당한 직후다. 근데 그런 상황에서 열두 명이라는 숫자를 지키기 위해 결원을 보충하는 행보를 했다는 걸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일까.

그런데 제2성서에 도데카가 사용된 것은 총 71회인데, 이중 숫자 ‘12’을 가리키는 경우는 별로 없다. 대부분의 경우는 1113 사이의 자연수 12가 아니라 상징적 의미의 숫자로 나온다. 가령 성전으로 올라간 열두 살의 예수(마가복음2,42), 12년 동안 출혈하는 여자(마가복음5,25), 회당장 야이로의 12살짜리 딸(마가복음5,42), 열두 광주리 가득 남은 빵(마가복음6,43; 8,19), 열두 레기온 만큼의 천사부대(마태복음26,53) 등은 전체 혹은 완전함을 시사하는 의미의 상징적 숫자로 쓰였다.

복음서의 사례들만 봐도 도데카는 숫자 자체라기보다는 대부분 상징적 의미로 쓰였다. 또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된 제1성서도 대부분 그렇다. 열두 지파, 열두 개의 샘, 열두 마리의 황소, 열두 개의 지팡이, 열두 개의 돌, 둘레가 12큐빗인 성전의 두 놋쇠 기둥, 열두 조각으로 잘린 레위인의 둘째 아내의 몸, 열두 조각으로 잘린 예언자 아히야의 옷 등, 하나 같이 상징적 의미로 쓰인 열둘의 용례들이다.

그러므로 인용된 본문의 열둘도 자연수 ‘12’라고 하기엔 어색하다. 당시 예수는 안티파스의 군대의 추격을 피하면서 운동을 펼쳐야 했다. 그런데 마을 안에서의 활동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마을의 지도자들인 바리새파 사람들 다수가 예수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갖게 되었고, 그들 중에는 안티파스의 군대에 예수의 활동을 제보하는 경우도 있었다. 해서 예수는 마을 안으로도 들어갈 수 없는 사정이 되었다. 상황이 훨씬 열악해진 것이다. 그래서 떠돌이 예언자들이 되어야 했던 예수그룹이 열두 명의 제자단의 숫자를 고수하면서 활동하는 것이 과연 용이했을까. 그중에는 사라진 이들, 변절한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새로 중요한 위상을 가진 이도 등장했을 법하다. 근데 결원을 보충하면서까지 열두 명을 지키는 게 과연 적합할까. 비밀스런 활동을 펴야했던 이들에게 말이다. 그러므로 정황상으로도 열둘은 숫자 12가 아니라 어떤 상의적 함의를 가진 명칭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알다시피 열둘은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하는 기호다. 역사 속에서 뿔뿔이 조각나고 사라지는 시련 속에서도 궁극에는 하나로 완성된 이스라엘이 하느님 앞에 부름받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이스라엘은 공유하고 있었다. 그런 함의를 가진 기표 중의 하나가 열둘이었다면, 예수 제자단의 한 그룹의 명칭이 열둘이라는 것도 이스라엘의 구원과 해방을 상징하는 용어였지 않았을까.

위의 인용문에 의하면 열둘제자와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다. 최측근의 인사들을 따로 분류해서 열둘이라는 이름을 불렀다. 한데 제2성서의 용례를 보면 열둘제자가 동일한 집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구절도 있다. 루가복음9,12~13이 그런 경우인데, 저 유명한 오병이어기적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열둘은 예수에게 날이 저물었으니 몰려든 사람들이 각자 흩어져 숙식을 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한데 예수는 당신들이 대중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한다. 이때 예수가 그렇게 말하는 이들을 성서 본문은 제자들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경우 열둘’=‘제자. 아마도 이것은 제자 중의 핵심집단(inner circle)열둘이 그만큼 모호한 용어이기 때문에 훗날 열둘과 제자를 혼돈하게 된 결과일 수 있다. 예수 사후, 예수와 더불어 떠돌이 예언자로 활동했던 이들 중 흩어져 사라진 이들도 있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예수 당대에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그 이후에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면, 사람들은 그도 원래 열둘이었을 것으로 생각했음직 하다. 또 여러 제자들은 저마다 자기가 열둘에 속했었다고 주장하였을 수도 있다. 결국 세월이 흐르면서 열둘과 제자는 거의 동일한 이들을 가리키게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위의 루가복음의 구절은 그런 후대의 기억의 혼돈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제자라는 용어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니 훨씬 더 혼란을 일으킬만하다. 필시 예수 당대에도 제자단 중에 서로 면식이 없는 이들도 있었을 수 있다. 십여 명 이상이면 함께 다니기가 용이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그만큼 식량이나 그밖의 용품들이 구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떠돌이 예언자들에게 그런 정도의 구비용품을 상시적으로 갖추고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종종 이동을 위해 활용했던 배도 그들 모두가 함께 탑승할 만큼 큰 배가 아니었다. 루가복음3,9에서 예수가 인파가 밀쳐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구해오라고 한 배는 플로이아리온(πλοιαριον)이었다. 야고보와 요한이 아버지와 일꾼을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고 할 때의 는 플로이온(πλοιον)이다. 플로이온이 여러 어부들이 함께 조업하는 어선을 의미한다면, ‘플로이아리온은 보트 같은 쪽배를 가리킨다. 이렇게 쪽배로 이동하는 경우 동승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기껏해야 수명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해서 일부 제자들은 다른 곳으로 갔고, 나중에 어느 곳에서 합류하기로 약속하며 움직였을 것이다. 그러니 제자들이 각자 제자단 하나하나를 알기는 어려웠을 수 있다. 또 예수가 사망한 뒤 누가 제자인지 분명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했을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떠나갔고 다른 이들은 새롭게 급부상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렇게 급부상한 이를 제자단의 어떤 인사들은 잘 알고 있었겠지만 다른 제저들은 잘 모르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해서 이런 혼란 때문에, 제자단 중 특화된 지도급 인사들을 지칭하기 위해 다른 용어가 소환되었다. 그것이 바로 사도. 서기 50년대에 활동했던 바울 당대에 이 용어는 그리스도파 공동체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널리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도표들은 이 세 용어의 사용빈도를 보여주고 있다. [10]에서 보듯 사도1세기 말의 문서로 보이는 사도행전에 집중적으로 나오지만, 2성서 곳곳에서도 두루 사용되고 있다. 이는 이 단어가 여러 지역의 초기 그리스도파 공동체들 사이에서 폭넓게 사용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한데 [09]에서 보듯, ‘제자라는 용어는 네 복음서에서 매우 자주 사용되는 데 반해, 다른 곳에서는 사도행전을 제외하고는 전혀 나오지도 않는다. 루가복음을 제외한 복음서들은 초기 그리스도파 운동의 주변부 공동체들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는 초기 그리스도파 공동체에서는 아주 낯선 용어였지만, 복음서 전승에서는 매우 중요한 단어였음을 시사한다. 특히 거의 모든 경우에 이 단어는 예수의 제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이렇게 교회에서 잘 사용되지 않았음에도 복음서 전승에서 매우 자주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이 단어가 예수 당대의 추종자 집단을 가리키는 대표적 표현이었음을 시사할 것이다. 반대로 복음서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단어인 사도는 예수 당대보다는 후대에 더 중요한 용어로 부상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열둘은 거의 복음서 전승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건대 예수 당대의 용어였고 후대에는 열두 명의 제자단이라는 식으로 오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버리고 따르다제자됨의 역사성

 

4장에서 세례자 요한이 체포되었을 때 예수는 갈릴래아의 가버나움으로 간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공권력의 추격을 피해서 달아난 길인데 고향인 나사렛으로 가지 않고 낯선 땅 가버나움으로 간 이유를, 앞 장에서 예수에게는 가족보다도 더 믿을 만한 동료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안드레와 베드로가 그들이다. 예수와 이 두 사람은 요한의 운동 현장에서 끈끈한 동지가 된 사이였다. 또 야고보와 요한도 요한운동의 동지였을 수 있다. 혹은 베드로 형제를 통해 새로 알게 된 이들일 수도 있다. 한편 여기서 예수는 새로운 동지를 만나기도 했다. 세관원으로 있는 레위가 그런 이였다. 그밖의 또 측근들이 생겼을 것이다. 한데 이들과 예수를 복음서는 스승(διδασκαλος[디다스칼로스] 혹은 αββι[랍비])제자(μαθητης)로 표현하고 있다.

제자들로 불린 이들의 특징적 모습은 부름 이야기에 잘 드러난다. 앞 장에서 본 것이지만 다시 인용해보자.

 

그러자 두 형제(베드로와 안드레)는 곧바로 그물을 그대로 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마가복음1,18)

그들(야고보와 요한)은 자기들의 아버지 세베대를 일꾼들과 함께 배에 그대로 두고 예수님을 뒤따라갔다. (마가복음1,20)

예수님이 ...... 알패오의 아들 레위......에게 말씀하신다. “나를 따라오세요.” 그러자 그가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마가복음2,14)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가족이나 일자리를 버리고(αφιημι) 따라나서야(ακολουθεω) 한다는 것이다. 해서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비상한 상황에서 제자들은 저마다 그 나라가 도래할 때가 되었다는 황홀한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때 베드로가 모두를 대표해서 이렇게 말한다. “보십시오, 우리야말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선생님을 따랐습니다.”(마가복음10,28) 또 한 부자 청년은 예수에게 다가와서 자신이 얼마나 신실하게 살아왔는지를 주장하면서 영생을 얻는 지혜를 말해달라고 간청한다. 예수의 대답은 가진 것을 다 팔고 나를 따르라.’(마가복음10,21)였다. 이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삶이, 곧 자신의 제자들이 했던 것과 같은 삶이 바로 영생의 길임을 말하고 있다. 하여 예수의 제자됨을 두 단어로 단언적으로 표현하면 버림과 따름의 에토스로 묘사할 수 있다.

 

길을 나설 때 지팡이 말고는 아무것도 들고 가지 마세요. 먹을 것이든 봇짐이든 허리에 두르는 돈주머니든요. 샌들은 신어도 되지만 통옷을 두 벌 겹쳐 입지는 말세요. (마가복음6,7~9)

 

독일의 성서학자 게르트 타이쎈(Gerd Theißen)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유랑, 무소유, 무가족을 예수운동의 핵심 에토스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표현들을 전한 이들이 누구였을지에 대해 묻는다. 초기 그리스도파 운동은 일찍부터 지역공동체를 만들었고, 그 공동체가 예수운동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대표적인 예가 안디오키아의 그리스도파 공동체다. 2성서에 의하면 이런 그리스도파운동의 지역공동체들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이들로 장로(πρεσβυτερος), ‘감독(επισκοπος), ‘목자(ποιμην), ‘교사(διδασκαλος) 등이 있었다. 그밖에 예언자(προφητης)도 종종 언급되고 있다. 이중 예언자를 제외한 이들은 모두 정착지도자들이었다. 예언자는 떠돌이도 있고 정착자도 있었다. 즉 그리스도파 공동체들의 발전사에서 아주 일찍부터, 당연한 일이지만, 떠돌이형 지도자보다는 정착지도자들이 중요했다.

다시 타이쎈의 물음으로 돌아가보자. 유랑, 무소유, 무가족의 에토스의 가르침을 전파한 이들은 누구였으냐는 물음이다. 타이쎈은, 정착지도자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공동체조직가들이 이런 가르침의 주요 전승자는 아니었다고 추정한다. 자신의 리더십의 근거를 부정하는 말이 될 테니 말이다. 하여 그는 주장한다. 또 다른 유형의 지도자들이 초기 그리스도파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이 바로 떠돌이 예언자였다. 그들이야말로 유랑, 무소유, 무가족을 몸으로 실천한 이들이다. 바울이 그랬고, 베드로도 아내와 함께 떠돌아다녔다는 것을 제하면, 그런 삶을 살았다. 타이쎈은 이런 떠돌이 예언자들을 유랑하는 카리스마적 지도자(Wander Karismatiker)라고 불렀다. 아주 일찍부터 그리스도파 운동의 주도권을 쥔 공동체 조직가들이 에클레시아(εκκλησια. ‘교회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라는 장소를 강조하면서 신앙의 제도들을 구축하고 있을 때, 그들과는 다른 유형의 떠돌이 예언자들이 있었다면,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이런 활동 양식을 취했을까. 그들의 활동의 선례가 된 무엇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타이쎈은 바로 그 선례가 예수와 제자들의 활동양식이었다고 말한다. 해서 그런 활동이 한동안 계속될 수 있었다고 보았다.

결론적으로 타이쎈이 주장하는 요점은 유랑, 무소유, 무가족의 삶의 양식이 바로 예수와 제자들의 실천 양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역사의 예수의 삶의 양식을 찾아낸 것이다. 기존의 예수 연구가 직면했던 결론은 역사의 예수는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왜냐면 일찍부터 지역에 정착한 집단들 사이에서 형성된 그리스도파 공동체에서 예수 이야기가 전승되었는데, 그것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예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 그리스도파 공동체들의 삶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초기 그리스도파 공동체와 예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다는 얘기다. 한데 타이쎈은 그 강을 건널 수 있는 배 한 척을 찾아냈다. 복음서라는 공동체가 구성한 문헌을 통해서는 그 강을 건너는 배를 발견할 수 없었는데, 복음서 속에 흔적이 새겨진 일부 구술적 텍스트(oral texts)에서 그 가능성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그 흔적은 급진적인 윤리(radical ethics)를 담은 텍스트 속에 담겨 있었다. 정착공동체가 결코 전승시키고 싶지 않았을 떠돌이형의 급진적 윤리가 공동체의 문헌들 속에 남아 있었다는 것은, 지역공동체들을 순회하고 다니는 떠돌이 예언자들도 지역공동체에서 중요한 지도자로 떠받들어졌으며 그들이 예수가 그랬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 더, 타이쎈이 주장한 이런 급진적 윤리의 텍스트가 전승될 수 있는 메커니즘에 관한 논지를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급진적 윤리를 그대로 따라 할 수 없었을 공동체가 생산한 문헌 속에 이런 얘기들이 어떻게 남아 있게 된 것일까. ‘문서라는 것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문서라는 것은 기억하고 기록하는데 있어 탁월한 매체다. 설사 그 내용이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대로 재현되지 않을지라도 기록은 가능하다.

한데 그런 급진적 윤리가 문서에 기록되기까지는 그것을 전달하는 이들이 있어야 한다. 그 전달 과정에서 구술(oral tradition)의 단계가 있었다. 한데 구술이라는 매체는 그 내용을 수행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기억되기 어렵다는 특징을 갖는다. 즉 이야기 속의 삶과 전승하는 자의 말이 유사하지 않으면 기억으로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렇게 해서 이런 이야기가 살아남아 문헌텍스트 속에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은 구술과 문자라는 다른 매체의 속성이 적절히 매칭됨으로써 가능했다는 것이 타이쎈의 설명이다.

한편 타이쎈은 자신이 역사의 예수에게 갈 수 있는 배를 발견했다고 하면서, 그 배의 재질이 급진적 윤리로 만들어졌음을 주장했다. 그것은, 아래 도표에서 보듯, ‘복음서 텍스트’, 떠돌이 예언자, 예수와 제자들이 급진적 윤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여 타이쎈은 이런 방법으로 예수와 제자들이 벌인 운동이 유랑, 무소유, 무가족이라는 윤리로 특성화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이가 주도한 운동과 그 사회체제의 갈등이 어떠한지에 관한 것이다. 한데 타이쎈은 그이의 운동을 수도자적 수행 윤리 같은 것으로 얘기하고 있다. 즉 타이쎈에게서 예수운동은, 그 시공간적 성격을 상실한, 무시간적 윤리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타이쎈의 구술에 대한 해석은 문제가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구술의 매체적 특성은 말과 삶의 유사성에 있다. 즉 구술은 그 내용을 기억하는 이의 삶과 유사하지 않으면 망각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앞에서 나는 그 원리를 마가복음에 적용하면서 체험의 유사성이 기억의 유사성을 낳았다는 명제로 다시 논한바 있다. 그런데 이런 구술연구의 원리는 구술문학을 통해 도출된 것이다. 즉 그것은 설화적 텍스트다. 한데 타이쎈은 그것을 스토리가 사라진 어록 텍스트에 적용했다. 하여 그가 얻어낸 결론도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 그 어록에 들어있는 무시간적인 윤리가 바로 예수운동의 특징이 되어버렸다.

반면 우리는 마가복음이라는 구술문학 속에서 그 텍스트가 위치한 시공간적 맥락과 그 안에서 활동하는 행위자들의 기억에 주목하면서 역사의 예수를 읽고자 했다. 그런 관점에서 지난 몇 주 동안 예수운동의 장소적 전환을 주목하면서 예수운동의 성격을 살폈다. 그리고 오늘은 제자에 주목하면서 예수운동을 살피고 있다.

다시 이 장 처음에 얘기했던 것으로 돌아가보자. 예수의 제자됨은 버리고 따랐다는 말로 요약된다. 한데 그런 행위적 특성은 무시간적인 윤리의 산물이 아니다. 앞장에서 보았듯이 예수운동은 요한이 체포되면서 그이가 벌였던 운동의 계승자로서 출현했다. 처음에 예수는 요한이 벌인 운동의 참여자였다. 한데 요한이 당국에 체포되자 예수는 갈릴래아의 가버나움을 베이스캠프 삼아 요한의 운동을 계승하는 활동을 펼쳤다. 그것을 보고 들어면서 일단의 사람들은 요한이 부활했다고 믿었다.

이것은 예수가 주도한 운동이 요한을 체포하고 처형한 안티파스 당국의 공권력의 추격을 당하면서 전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이 폈던 운동의 전략은 끊임없는 이동이었다. 처음에는 은거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어촌마을 가버나움을 베이스캠프로 삼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녔다. 한데 마을 안에서도 대중을 억압하는 미시적 권력을 읽어낸 예수는 마을의 질서를 상징하는 장소인 마을회당에서 안식일을 두고 바리새파 인사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그 결과 예수는 더 이상 마을 안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수일행은 마을 밖을 전전하면서 활동을 벌여야 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예수와 그의 일행들은 점점 더 생활의 기반들을 하나씩 하나씩 버리면서운동에 참여해야 했다. 처음에 고향을 버렸고, 다음엔 비교적 안전한 은거지였던 마을 안의 집을 버렸다. 그리고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호숫가 공터로, 야산으로, 이방지역 등으로 이곳저곳을 전전하면서 활동했다. 바로 이런 행동양식을 평면적으로 압축하여 표현한 윤리적 해석이 베드로의 말에서 보듯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다는 명제로 표현된 것이다. 즉 그것은 무시간적 윤리가 아니었다.

 

장소적 전환과 제자’/‘떠돌이 예언자

 

아래 도표는 마가복음에서 회당의 사용빈도를 예수운동의 장소적 변화와 연관하여 정리한 것이다.

1,14~3,6 사이에는 회당이 자주 나올 뿐 아니라, 1,39(“예수께서 온 갈릴래아에 다니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시고 귀신들을 쪼아내셨다.”)처럼 마을회당이 이 시기 예수의 주된 활동공간임을 시사하는 집약적 표현도 등장하고 있다. 해서 이 시기를 갈릴래아 마을회당 활동기라고 하자.

이 시기 이후 예수는, 고향인 나사렛의 회당을 방문한 얘기를 제외하면, 단 한 번도 회당을 활동지로 선택하지 않았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말이다. 마을회당에서 바리새파와 논전을 벌인 뒤 마을밖 호숫가로 물러갔다는 이 복음서의 표현은 이렇게 예수운도의 활동 거점의 전환을 보여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회당이 떠돌이예언자들의 중요한 활동 거점이었다가 마을 밖으로 나간 뒤에는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회당이 등장하지 않은 반면, 그 이후인 3,7부터는 호숫가가 훨씬 자주 나온다는 점이다.

이를 조금 더 넓은 지평에서 살피면 이렇다. 예수운동은 공개적 활동의 차원과 비공개적 차원으로 나뉜다. 비공개의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적대자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다. ‘갈릴래아 마을회당의 시기에 적대자는 안티파스의 공권력이다. 한데 갈릴래아 호숫가의 시기에 적대자는 마을의 지도자들인 바리사이가 추가되었다. 그들의 감시를 피해 활동해야 하는 상황에서 비공개적 활동의 장소들이 선택되었다. 아래 도표는 예수의 공개적 활동과 비공개적 활동을 보여주는 장소들이다.

즉 예수와 제자들의 하느님나라의 대중운동적 차원은 (I)요한을 추종하던 때엔 페라이아의 광야’, (II)그가 잡힌 뒤 갈릴래아에서 활동하던 초기엔 마을회당 안’, 그리고 (III)후기엔 마을밖 공터인 호숫가’, 마지막으로 (IV)예루살렘에 상경했을 때엔 성전이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하고 펼쳐졌다.

한편 그밖에도 어떤 이나 거리에서 대중들에게 하느님나라를 설파하는 얘기가 간혹 나오는데, ‘거리는 마을회당 안에서 밖으로의 전환과 무관하다. 하여 마을 안과 밖이라는 장소성의 전환이 갖는 의미를 주목한다면 촌락회당마을 밖 호숫가라는 장소성에 주목하게 된다. 여기서 마을 밖 호숫가라는 장소성에 대하여는 나중에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후주]

(1) 얼마 후 필립은 안티파스의 의붓딸인 살로메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