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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역사의 예수 다시보기_08 : 예수운동의 '숨겨진' 활동가들 - 지역협력자

역사의 예수 다시보기 여덟번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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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운동의 숨겨진활동가들

지역협력자

 

 

내 뒤를 따르라” + “버리고 따랐다

 

예수는 어떤 이를 제자로 부를 때 듀테 오피소 무(Δευτε οπισω μοη) 혹은 아콜류떼이 모이(Ακολουθει μοι)라고 말했다. 우리말로 옮기면 둘 다 나를 따르시오.’. 이에 부름받은 이는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따랐다.’

6장에서 보았듯이, ‘버리고’ ‘따름이라는 조합은 예수와 함께 떠돌이 예언자가 된 이들의 전형적인 제자됨의 양식이다. ‘따르다는 뜻의 그리스어 동사 아콜류떼오’(ακολουθεω)떠돌이 예언자형 제자의 따름을 말할 때 종종 사용되는 단어다. 반면 버리다는 동사 없이 따르다.’만 나오는 경우는 단순히 예수에게 감화된 대중이 예수를 열망하게 된 것을 묘사할 때도 사용되곤 했다. 세관원 레위가 부름받은 본문과 그 다음 문장들에서 그것을 잘 볼 수 있다.

 

[에피소드A: 세관에서](마가복음2,14) 예수가 레위에게 나를 따르시오라고 말하자 레위가 자리에서 일어나예수를 따랐다’.

[에피소드B: 레위의 집에서](마가복음2,15~16) 레위의 집에서 예수와 더불어 공동식사 자리가 만들어졌다. 거기에서 함께 식사하던 세관원들과 죄인들중 여럿이 예수에게 감화되어 그이를 따르게 되었다.

 

14절에서 예수는 레위에게 아콜류떼이 모이’, 즉 제자가 되라고 호출했고, 레위는 즉시 일자리를 버려두고 그이를 따랐다’. 여기서 따르다앞에 첨부된 단어 일어나는 그가 가까스로 잡았던 일자리인 세관원을 포기한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14절에서의 따르다는 예수의 부름의 말과 버리고 따름이라는 제자의 추종 양식의 표현과 결합되어 있어, 전형적 제자됨의 어법에 부합한다. 반면 15절의 따르다버림의 늬앙스를 갖는 어떤 단어와도 연결되지 않은 채 홀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레위의 동료와 이웃들이 예수와 함께 식사를 나누면서 예수에게 매료되었던 정황이 엿보인다. 요컨대 그들이 예수의 편에 선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을 따르다로 표현한 것이다.

한편 마가복음10장에는 떠돌이형 제자와 다른 범주의 추종자가 있었다는 정황이 시사되고 있다. 이 다른 범주의 추종자는 레위의 공동식사 자리에서 엿보였던, 예수에게 감화된 이들과는 다른 추종자들로 보인다. 그들은 일시적으로 예수에 열광한 이들과는 달리, 좀더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혹은 조직적으로 예수를 추종한 이들이다. 이 장은 바로 그런 이 중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에피소드A](마가복음10,17~27) 예수에게 한 사람이 다가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하는지묻는다. 예수는 율법 전체를 상징하는 십계명을 지키라고 말한다. 그는 어려서부터그것을 이미 지켜왔다고 답한다. 이에 예수는 그를 사랑스럽게 여기면서말한다. “가서, 그대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세요. ...... 그리고 ...... 나를 따르세요.” 그러자 그는 괴로워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겐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에피소드B](마가복음10,46~52) 예수 일행이 여리고에서 나올 때 많은 이들이 주위에 몰려들었다. 그때 길가에서 동냥질하던 시각장애인이자 거렁뱅이인 디매오의 아들 바르디매오가 예수를 향해 소리쳤다.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사람들은 그를 꾸짖었다. 소리치지 말라고.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욱 크게 소리 질러댔다. 예수가 가던 길을 멈추고 그를 불렀다. “그러자 그가 겉옷을 벗어젖히고 벌떡 일어서서 예수님께로 와서다시 보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예수가 말했다. “가세요.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구원했어요.” 그러자 그의 눈이 밝아졌다. 그런데 그는 간 것이 아니라 따라나섰다.”

 

[에피소드A]는 예수와 부자인 어느 남자와의 대화이고, [에피소드B]는 시각장애인이자 거렁뱅이인 아무개와의 대화다. 두 에피소드 모두 가다‘(버리고) 따르다라는 동사가 교차하면서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 두 단어에 주목하면서 두 에피소드를 다시 살펴보자.

[에피소드A]에서 재산이 좀 있는 어떤 이는 예수에게 찾아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에 대해 묻는다. 그는 실질적인 요구에 절박한 이가 아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충실히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이 있는 이다. 즉 그는 자수성가한 사람이 아니다. 또 신실한 가풍의 집안에서 성장했다. 예수가 그를 사랑스럽게 본 것은 그의 신실함이 단지 자신과 가신의 가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도 평판 좋은 부자였던 것 같다.

한편 그는 흔히 부자청년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마태복음에 근거한 것이다. 이 복음서에선 그를 호 네아니스코스(19,20: ὁ νεανισκος), 젊은이로 표기하고 있다. 하지만 루가복음은 반대로 그를 아르코(18,18: αρχω)로 표기한다. ‘지도자로 옮기면 될 단어다. 씨족적이고 가부장적인 전통사회에서 지도자라는 표현은 그가 청년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마가복음에는 그의 연령에 대한 직접적 정보가 없지만, 예수가 그에게 가진 것을 다 처분하라고 말한 것으로 보건대 그가 가정의 재산권을 가지고 있는 가부장적 위상의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에서도 그가 젊은이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재산을 다 처분하고 나서 자신을 따라도좋다는 예수의 말에 그는 낙담하고 돌아갔다’. 여기서 떠돌이 예언자형 제자의 추종을 시사하는 헬라어 동사 따르다가 쓰였다. 이는 그가 예수를 따라 떠돌이 예언자가 되려 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예수는 그에게 버림도 요구한다. 한데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왜일까. 안락한 집을 가진 이였지만 떠돌이가 되어 예수와 함께 풍천노숙하겠다는 단단한 결단을 하면서 예수에게 다가갔지만, ‘가진 것을 다 처분하라는 예수의 말에 그의 단단했던 결단은 무너졌다. 자신의 따름때문에 남은 가족의 생계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기 때문일까. 다른 상상도 가능하다. ‘공의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체데카(tzedekah) 혹은 미슈파트(Mishupat)를 가장 중요한 삶의 교훈으로 삼는 바리새파 전통에 충실했을 그는, 앞에서 사시했듯이, 나눔과 섬김, 그리고 공동체의 갈등 조정에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던 이였을 수도 있다. 만약 그가 조상 대대로 지켜왔던 가문의 이런 역할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떠나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필시 가문의 전통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체되었을 것이다. 일족이 멸족되는 상황이 아닌 한 일부다처 사회에서 결원이 된 가부장을 이어갈 이는 끊기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전통이란 그렇게, 구성원 아무개의 결원에도 불구하고 잘 지켜져왔다. 한데 가진 것을 다 처분하는 일은 사정이 다르다. 그의 가문이 해왔던 공의적 행위를 수행한 자원 자체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필시, 자신의 신앙적 열정 탓에 가문의 공의적 전통이 끝장나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예수의 말(마가복음10,24~25)은 전승자들에 의해 오독된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 왜냐면 그 부자를 사랑스럽게 바라본 예수가 곧 이어서 제자들에게 부자라는 작자들은 도대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독설했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흐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전승한 오클로스들은 이런 부자의 역할을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해서 부자 일반에 대한 반감이 이 이야기 전승에도 끼어들었을 것이다. 해서 낙타 운운하는 이야기가 후반부에 끼어들게 된 것일 수 있다. 어쩌면 이 부자 이야기와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기 어렵다는 텍스트는 원래 따로 전승되었던 이야기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에피소드B]에도 따르다가라는 동사가 나오는데, 앞의 부자와는 대조되는 어느 추종자의 이야기 속에서 활용되고 있다. 그는 시각장애인이자 거렁뱅이다. 장애와 빈곤, 이중의 사회적 낙인으로 삶이 온통 뒤틀려 버린 자다.

그가 구걸하던 곳은 여리고다. 여리고는 사해 북단에서 10km도 채 안 되는 황량한 요르단 계곡의 오아시스 마을로, 제법 규모 있는 세관이 있는 곳이다. 루가복음19장에 나오는 삭개오가 근무하던 세관이 바로 여기에 있었고, 그는 이곳의 책임자였다. 주로 예루살렘을 오가는 순례객과 상인들이 이곳을 지나갔고, 세관에서 통행세나 관세를 지불해야 했다. 알다시피 예루살렘은 야훼 신이 계신 곳이라는 믿음으로 운용되는 도시다. 그러니 그 도시를 향하는 이들은 거렁뱅이에게도 자선을 아낌없이 베풀곤 했다. 해서 이곳 세관 근처는 거렁뱅이들이 많았다. 본문의 거렁뱅이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이름도 없는 자다. 마가복음은 그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호 휘오스 티마이우, 바르티마이오스(υος Τιμαιου, Βαρτιμαιος). ‘호 휘오스 티마이우티마이오스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은 디매오인데, 이는 대부분의 한글 번역성서에서 티마이오스를 그렇게 음역했던 탓이다. 이 어구 다음에 나오는 단어 바르티마이오스바르는 아들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다. 바르티마이오스도 앞의 어구처럼 티마이오스의 아들이다. 이런 어색한 중복표기는 우리말에도 종종 나온다. 족발, 도화꽃, 역전앞 등, 한자와 한글이 병합되어 사용될 때 이런 일이 흔히 일어난다. 사람 이름의 경우도 그런 일이 적잖다. 이런 가상의 사례 같은 경우다. ‘독고 씨의 아들 독고지자’.

한데 여기서 간혹 오독이 생기곤 한다. ‘독고지자를 성(last name)독고이고 이름(first name)지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독고지자(獨孤之子)가 독고 씨의 아들이라는 뜻이니, 이 표현은, 한자어를 아는 이라면 의당 중복표기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한자표기가 낯선 사람들에겐 충분히 오독할 만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바르디매오라는 표현도 히브리어에 익숙치 않은 이에게 일어날 수 있는 흔한 오독의 경우다.

요컨대 디매오의 아들은 이름이 없거나 알려지지 않은 이다. 그의 부친의 이름인 디매오는 헬라 문헌에 가끔 등장한다. 즉 헬라 이름으로 낯설거나 어색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디매오는 헬라문화권 출신의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한데 그가 이스라엘 문화권에 유입되어 살고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레위의 부친 알패오(마가복음2,14)처럼 말이다. 알패오도 하층의 이민자인데 아들이 거렁뱅이인 디매오는 훨씬 더 낮은 계층의 이방인임에 틀림없다. 하여 어쩌면 디매오의 아들에게 찍힌 낙인은 하나 더 있다. 그는 심지어 이방인이었다. 삼중의 낙인이 찍힌 그는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아무개 씨다. 이름도 기억하지 않을 만큼 존재감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겠다.

요한복음9,1에는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던어떤 사람을 두고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렇게 묻는다. “랍비님, 누가 죄를 지어서입니까? 이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이 사람이 시작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이요?” 이 구절에서 시사되는 바는 사람들은 그가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은 하늘의 천형이고, 그 자신이든 부모나 조상이든, 누군가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한데 마가복음10장의 시각장애인은 더욱 심각하다. 그는 거렁뱅이이고 이방인이다. 그런 자가 예수를 향해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친다. 사람들은 이런 천벌을 받은 자가 감히 예수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불경하다고 생각했기에 그의 입을 봉쇄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는 더욱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다.

예수가 발길을 멈추고 그를 불렀다. 그는 소원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예수는 말했다. ‘가시오.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구원했소.’ 그런데 그 말을 들은 그는 것이 아니라 따랐다’. 여기서 그의 따름에 관하여 간과해서는 안 되는 표현이 끼어들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겉옷을 벗어젖히고예수에게 다가왔다. 거렁뱅이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다. 그에게 가진 여분의 것이라곤 겉옷 한 벌뿐이다. 그러니 그가 겉옷을 벗어던졌다는 것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을 함축한다. 요컨대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다시 말하면 그는 떠돌이 예언자형 제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부자 남자는 거절되었고, 거렁뱅이요 시각장애인이며 이방인인 익명의 사람은 제자가 되었다. 제자 중에는 하도 이례적인 존재여서, 그의 신원도 그랬고 부름의 스토리도 특이해서, 그의 부름 이야기는 베드로 등의 부름 이야기로 가늠될 수 없었기에, 따로 그 이야기가 남아 전승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떠돌이예언자인 제자들은 부름의 말 + 버리고 따름을 묘사하는 표현들로 묘사되었다. 한데 위의 디매오의 아들 이야기에서, 흔히 간과하지만, 주목해야 하는 표현이 하나 있다. 예수는 그에게 가라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따랐다.’ 여기서 가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에 관한 것이다.

 

가라

 

가다라는 그리스어 휘파고(παγω)의 명령형인 휘파게(παγε)는 제2성서에서 24번밖에 사용되지 않은, 비교적 드문 표현이다: 마태복음11, 마가복음8, 요한복음4, 그리고 묵시록1회가 전부다. 이 중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마가복음에서의 용례다. 마가복음이 단어가 사용된 모든 구절들을 살펴보자.

이 단어의 8번의 용례(1,44; 2,11; 5,19; 5,34; 7,29; 8,33; 10,21; 10,52) (1)단 한 번도 예수와 적대적인 대상에게 사용되지 않았다. 가장 적대적 늬앙스가 있는 대목은 8,33인데, 베드로와 격렬하게 논쟁을 하는 대목에서 예수가 그를 향해 내뱉은 폭언이다. 그 격렬한 늬앙스는 내 앞에서 꺼져버려!’이지만 이 일로 베드로가 예수의 적대자가 된 것은 아니다. 그런 막가지는 식의 싸움은 아니었다.

반면 가다라는 뜻의 또 다른 동사 아페르코마이(απερχομαι),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몇몇 곳에서 예수와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와의 단절적 상황을 묘사할 때 쓰이곤 했다. 가령 흔히 문둥병으로 번역하곤 했던 레프라(λεπρα)가 예수에 의해 어떤 이의 몸에서 떠나갈 때(1,42) 이 동사가 쓰였다. 또 바리새파 사람들과 표징을 두고 격한 논쟁을 벌인 뒤 예수가 그들로부터 떠나갈 때(8,13), 그리고 유다가 대제사장에게 예수를 밀고하러 갈 때(14,10) 이 동사가 쓰였다. 그러니까 위의 본문에서 예수로부터 휘파게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그 부자는 예수의 적대자가 되는 길을 간 것이 아니다. 실제로 본문에서 예수는 그 사람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는 가서 가진 것을 다 처분하라는 말을 이행할 수 없었지만, 그의 따름이 아닌 (going)은 그의 가족과 지인, 그리고 재산이 있는 곳에서 예수를 추종하는 모종의 행위를 하였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휘파게의 두 번째 용례가 드러난다. (2)이 단어는 버리고 따름이 함축하는 떠돌이 예언자형의 제자와는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예수운동의 활동가를 시사한다. 복음서에는 자신의 지역에서 예수를 추종하는 이들이 적잖이 등장한다.

여기서 마가복음형성의 주역에 관해 간략히 정리해보자. 수난 이야기 이전까지의 예수 이야기, 즉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갈릴래아의 마을회당에서 활동하다 마을밖 호숫가등지에서 활동하는 예수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회자하며 하나의 서사적 텍스트로 구성해낸 것은 주로 오클로스의 공이었다. 그리고 수난 이야기, 즉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다 당국에 의해 체포되고 처형당했으나 부활했다는 이야기는 예루살렘에서 그분과 함께 활동했던 이들, 특히 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 떠돌이 예언자형 제자들의 기억과 해석을 반영하고 있다. 요컨대 마가복음에는, 크게 보면, 두 개의 다른 시선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전반, 갈릴래아 이야기는 오클로스의 시선이 흐름을 이끌고 있는 반면,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과 예루살렘에서 죽임당하고 부활하는 이야기를 다루는 후반부는 제자들의 시선이 이야기의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후반부의 경우, 전반부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떠돌이 예언자형 제자를 탄핵하는 기조가 수난 이야기 전체에 덧씌워져 있다. 그것은 필경 이 부분의 저자가 제자 공동체의 일원으로 그 서사를 전수받았지만 이 문서를 작성하는 시점에서는 그 서사에서 제자들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그가 전반부의 이야기를 채록한 이라면, 아마도 그이는 오클로스적 예수운동에 감화되어 그들의 예수 이야기를 채록하고 제자들의 예수운동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후반부를 저술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그 결과 마가복음에서 묘사된 제자들은 예수의 진정한 추종자가 아니라 실패한 추종자들이다. 진정한 추종자는 예수의 주요 대중이던 오클로스였다. 이것이 이 채록자가 자신이 개입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각색한 예수전인 마가복음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와 논쟁했다는 묘사는, 오클로스가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니지만, 제자들에 대한 오클로스들의 비판적 시각을 반영한 채록자이자 해석자 아무개의 각색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8,33사라져라떠돌이 예언자형 제자인 베드로가 예수운동에서 영원히 제명되었다는 함의로 독자인 청중들에게 이해된 것이 아니라 징계받은 베드로라는 의미로 독해되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다시 휘파게의 용법에 대해 더 이야기해보겠다. (3)추종자형 제자도 아니지만 적대자도 아닌 이들에게 예수가 가라고 말했을 때 도출되는 세 번째 용법은 그들의 예수를 지지하는 행동은 자신들의 활동공간에서 계속되었는 것이다. 하여 나는 이 단어에서 예수운동의 떠돌이 예언자 형의 제자와 그이 주위에 몰려든 대중, 이 두 범주 이외에 다른 제3의 지지자 유형을 추론하고자 한다. 그들은 지역에서 예수에게 협력한 활동가들이다. 하여 나는 그들을 지역협력자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한편 다른 문서들 속에서 휘파게는 이런 용례로만 쓰인 것이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아무런 의미 없이 가라는 용법이다. 가령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에서 저 유명한 누가 당신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시오(마태복음5,41)라는 말, 혹은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는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가 그녀에게 가서, 당신 남편을 불러 오시오.’(요한복음4,16)라는 말이 그렇다. 마가복음에서 휘파게는 떠돌이 예언자도 주변의 대중도 아닌, 3의 유형의 추종자들의 존재를 시사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지역협력자

 

예수운동은 세례자 요한이 잡힌 뒤에 갈릴래아의 마을회당을 떠돌며 비판적 예언자로서 활동했다. 이때 가버나움은 일종의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었다.(마가복음1,21; 2,1; 9,33) 인근의 마을로 선교활동을 하다 가버나움으로 되돌아왔다. 아마도 가버나움에서의 숙소는 시몬(베드로)의 장모의 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떠돌이 예수일행은 마을에서 어떤 사람의 에서 집회를 열곤 했다. 마비증에 걸린 이를 고쳤다는 가버나움의 ’,(2,1)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이를 찾으러 왔다고 하는 집회 장소인 어떤 이의 집(3,20)처럼 이름이 명시되지 않은 누군가가 예수에게 대중집회 장소로 집을 공여했다. ‘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는 떠돌이 예언자형 제자들은, 요한과 야고보를 제외하고는, 대개 가난한 농민이나 어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니 그들의 집을 집회 장소로 쓰기엔 부적절했을 것이다. 아주 몇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모임이 아니라면 말이다. 추정컨대 집회장소로 제공된 은 대체로 아주 작은 집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떠돌이 예언자 형 제자들이 아닌 누군가가, 그런 규모의 집을 소유했을 법한 아무개가 자신의 집을 예수일행의 활동을 위해 제공했다는 것이겠다.

또 어떤 들은 예수일행이 떠돌다 묵는 숙소(7,17; 7,24; 9,28; 10,10; 14,3; 14,14)이기도 했다. 들은 대체로 은거지였다. 그 중에는 아래 구절에서 보듯 페니키아의 티레 지역에도 있었다.

 

예수님이 거기에서 일어나서 티레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그것을 아무도 모르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숨길 수 없었다. (마가복음7,24)

 

예수에게 집을 공여한 이들은 대체로 이름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자신의 지역에서 예수에게 협조하는 일이 당국에게는 비밀스런 일이었음을 시사한다.

이렇게 예수운동에 협력했던 지역 활동가들은 집을 제공한 이들만이 아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지팡이 하나, 신발 한 켤레, 야영시 이불로도 사용하는 통옷 한 벌 외에는 아무 것도 갖고 다니지 말라고 엄명했다.(마가복음6,8~11) 그 이외에는 다른 생필품도 구비하고 다니지 말라는 것이다.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떠돌이 예언자들이니, 그것들을 구하려면 누군가의 공여가 있어야 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집을 제공한 이가 이런 소모품도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돈주머니(money in your belts)도 갖고 다니지 말하는 표현이다. 화폐경제가 일반적이지 않은 사회에서 돈을 사용하는 이들이라면, 군인이거나 상인, 혹은 세관원일 것이다. 이중 상인은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데, 예수는 도시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예수일행이 상인을 만날 수 있는 장소들이 있다. 상인들이 다니는 도로나 세관이 그런 곳들이다.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지지자로 보이는 이들 중에는 백명대장(백부장, ὁ κεντυριων)이 없지만, 마태복음8,5~13루가복음7,1~10에는 자신의 종을 치유해달라고 청탁하는 백명대장이 등장한다. 세관에 종사하는 예수의 지지자로는 삭개오라는 세금업자의 우두머리(세관장, αρχιτελωνης)가 있었다.(루가복음19,1~10) 한편 예수일행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나귀를 제공한 사람에게 마지막 거사를 위한 만찬장소를 제공한 사람(마가복음11,1~11), 그리고 마지막 거사를 위한 만찬장소와 함께 음식을 제공한 사람(마가복음14,6~21)도 지역에 실명이 공개되지 않은 채 물질적 후원활동을 했다.

이 사실은 예수운동의 지역협력자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실명이 대부분 공개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역에서 예수운동에 협력하는 것은 대체로 비밀스런 지지활동에 국한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앞에서 언급한 부자 남자(마가복음10,17~22) 이야기에 나오는 20~21절을 다시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추정할 수 있게 된다.

예수를 따르려면, 즉 떠돌이 예언자 유형의 제자가 되려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이 청년도 그런 요구에 맞닥뜨렸다. 특히 그는 부자이니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라고 한다. 한데 그렇게 말하는 구절 바로 앞에, 예수는 그에게 휘파게하라고 한다. 여기서 휘파게하는 일은 단지 예수일행에게 집과 먹거리, 소모품을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거기에는 다른 역할도 요청된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모든 재산을 그렇게 한다면 그도 떠돌이 예언자의 자격을 얻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했다. 하여 그는 소극적 참여자인 지역협력자가 되기로 했다.

여기서 하나 첨언하면, 예수운동에서 지역협력자 유형의 활동가는 바울운동 당시에는 공동체조직가로의 역할 변이가 일어난다. 고린도전서에 등장하는 교회(에클레시아, εκκλησια)를 위해 집을 제공한 그리스보(2,1) 같은 이는 실명으로 공개되었을 뿐 아니라 공동체의 유력한 지도자의 하나였다. 빌립보의 에클레시아 모임을 위해 집을 제공한 루디아 여자는 비록 실명이 나오지는 않지만 굉장히 중요한 여성 지도자였다.(사도행전16,12~14)(1)

이것은 예수운동이 비장소성을 특화시키면서 일어난 운동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장소로부터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이탈한 이들을 중심으로 초기 예수운동의 담론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떠돌이 예언자들의 활동은 경외의 대상이 되고 지역에서 협력한 이들에 대해서는 과소평가되곤 했다. 해서 부자 남자이야기처럼, 그가 떠돌이 예언자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해 절망했다는 표현이 가능했다. 반면 바울 당대에는 떠돌이 예언자가 여전히 중요했지만 지역의 공동체 조직가가 떠돌이 예언자를 후원할 뿐 아니라 공격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떠돌이 예언자임에도 끊임없이 지역공동체를 만드는 활동을 벌였던 바울의 사역에서는 불가피한 갈등이었을 것이다. 한편 떠돌이 예언자보다 공동체 조직가의 위상이 압도하던 포스트바울 시대에는 자신의 장소에 머물러서 예수운동을 펼치는 공동체조직가들의 믿음이 그리스도파 신앙의 핵심적 질서의 일부가 되었다. 어쩌면 포스트바울 시대, 장소귀속적 신앙이 빠르게 주도권을 쥐어가던 시절, 마가복음이라는 떠돌이 예언자 이야기집인 예수전이 등장한 것은 그런 추세에 대한 안티테제였을지도 모른다. ‘역사의 예수가 처음 소환된 맥락은 바로 그런 것이라는 얘기다. 한편 좀더 시간이 흘러, 장소귀속적 신앙이 대세가 된 시대에 등장한 요한복음은 해체적 영성으로서의 예수운동의 등장을 의미할 것이다.(2)

하지만 예수운동에도 지역협력자들 가운데 비밀스런 후원자의 차원을 넘는 이들이 등장한다. 다음 강좌에는 그런 이들에 대하여 좀더 이야기할 것이다.

 

[후주]

(1) 루디아 여자와 스데바나에 대하여는 김진호, 리부팅 바울권리 없는 자들의 신학을 위하여(삼인, 2013), 3장과 5장을 참조하라.

(2) 마가복음을 필두로 하는 예수전 운동요한복음의 해체주의적 영성운동에 대하여는 이 강좌의 3년차 해에 다룰 예정이다. 김진호, 급진적 자유주의자들. 요한복음(동연, 2009)에서 이미 그런 해석이 시도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