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에세이

역사의 바울을 찾아서_04 : 갈라티아의 바울 - 바울 특유의 그리스도 운동이 정립되기 시작하다

[가톨릭평론] (2023 겨울)에 실린 네 번째 연재글

--------------------------------------------------------------

역사의 바울을 찾아서_04

 

갈라티아의 바울

바울 특유의 그리스도 운동이 정립되기 시작하다

 

 

 

마가라 불리는 요한이 떠나가다

 

지난 호에서 바울과 바르나바의 키프로스 선교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 텍스트(사도행전13,4~12)에 의하면, 키프로스 선교 이후, 이름이 사울에서 바울로 바뀌었고 바울과 바르나바로 순서도 바뀌었다. 바울은 이제 바르나바 휘하의 보조사역자가 아니라 대등한 사역자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이 테스트는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키프로스 선교 이후 바울은 본격적으로 선교 길에 오른다. 흔히 1차 선교여행이라고 불리는, 지중해권 선교의 초기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주로 아나톨리아(소아시아) 지역의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을 두루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바울의 선교여정을 1, 2, 3차로 나누는 것은 사도행전의 도식이다. 이렇게 도식화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파송된 초기 선교(1차 선교 여정)가 아르메나아 지역을 두루 다니며 펼쳐졌다는 것은 역사적 개연성이 있다.

이 선교 여정에서 바울과 바르나바가 다녀갔던 곳은 아래 도표와 같다. 대략 아나톨리아 중부 지역이다. 이 지역을 통칭하는 용어가 갈라티아.(1)

위의 도표에서 보듯 이 지역 선교의 첫 기착지는 팜필리아의 페르가다. 여기서 출발해서 갈라티아 지역의 도시들로 들어가는 선교여정이 펼쳐진다. 한데 키프로스에서 페르가로 갈 때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한다.(사도행전13,13) 사도행전에 의하면 그는 바르나바와 바울의 휘페레테스(ὑπηρετης)였다.(13,5) 휘페레테스란, 마태복음5,25에서 보듯, 보조사역자를 가리킨다. 여기서 그의 이름은 마가라고 불리는 요한이었다. 요한은 이스라엘식 이름이고 마가는 헬라식 이름이다. 이스라엘식 이름의 시몬이 헬라어권으로 파송될 때 베드로라는 헬라식 이름을 사용한 것처럼, 아마도 이 인물도 이스라엘의 예수공동체가 해외 이스라엘계 공동체들로 파송한 사람의 하나였을 것이다.

사도행전(12,12~17)은 그를 예루살렘에서 탈옥한 베드로의 은신처가 되었던 마리아라는 어떤 여성의 아들로 묘사한다. 그녀의 집에 많은 예수파 인사들이 숨어 있었다고 하고, 그 집에 딸린 여종도 있었다니, 아마도 그녀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유독 예수 측근의 여성으로 자주 언급되는 마리아는 특정인의 이름이라기보다는 예수운동에 참여하는 익명의 여성들을 부르는 집단적 개인의 명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동시대 여성들이 공식적인 이름 없이 가문이나 마을 사람들이 편의상 부르는 명칭으로만 불리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해서 가문이나 마을 밖으로 나간 여성들은 마땅히 불릴 이름이 없었다. 그 이름은 그녀의 가문이나 마을에서만 그녀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예수운동에서 일부 여성들은 그렇게 이름 없는 존재로 있기엔 역할이 지대했고 동료집단과 관계가 긴밀했다. 해서 필시 예수운동 집단은 그녀들을 마리아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집단적 개인의 명칭이 특정화될 때는 또 다시 그녀 집단의 남자의 이름과, 혹은 가족이 알려지지 않은 경우는 고향의 지명과 연결시켜 불렸던 것 같다. 하여 이 본문의 마리아는 그녀의 아들인 마가라고 불리는 요한의 이름과 연결시켜 불렀다.

당국의 추적을 당하는 예수파 인사들이 그녀의 집에서 은신했다면, 필시 그녀의 이름이 공개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아무튼 마가라 불리는 요한은 그녀의 아들이었다. 훗날 베드로를 추앙하는 공동체의 문서인 베드로전서에서 그는 베드로의 아들로 언급되고 있다.(5,13) 이는 베드로의 혈연적 아들이라기보다는 영적 자녀, 즉 베드로 계보의 주요 인사라는 것을 뜻할 것이다. 요컨대 그는 예루살렘의 예수공동체에서 파송한 베드로의 영향권 아래 있는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사도행전은 그를 해외선교사로 데리고 간 이는 베도르가 아니라 바르나바였다고 한다.(12,25)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추정을 할 수 있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바르나바가 이끄는 선교팀으로 하여금 아나톨리아 도시들 곳곳에 있는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을 두루 다니면서 그리스도를 선포하게 했다. 이 팀의 휘페레테스’, 곧 보조사역자로 마가라고 불리는 요한이 포함되었다. 사도행전은 이 인물이 바르나바와 바울의 보조사역자라고 말하지만, 역사적으로 좀더 개연성 있는 사실은 마가뿐 아니라 바울과 실라(Σιλςα. 실라스)(2) 등이 모두 바르나바의 보조사역자였으리라는 것이다.(3)

여기서 바울과 실라가 아마도 이방인 선교에 좀더 적극적인 인물이라면 마가는 베드로처럼 복음 전파를 이스라엘계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주력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인물로 보인다. 안티오키아 회식사건에서 보듯, 안티오키아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항상 의식하면서 갈등을 회피하려 했다. 그런 점에서 바르나바 선교팀을 구성할 때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선교사 베드로를 포함시키는 것이 필요한 일이겠지만, 그의 위상이 바르나바의 보조사역자가 될 수는 없었기에 베드로계 인물인 마가가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데 서두에서 요약한 것처럼, 키프로스 선교를 다루는 사도행전텍스트는 하나의 상징적 묘사다. 바울은 이 선교 여정에서 바르나바 선교팀의 보조사역자로 참여했지만 점차 바르나바와 대등한 위상을 갖는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것을 축약해서 보여주는 것이 바로 키프로스 선교 이야기다. 한데 이 텍스트는 바울의 격상을 예수의 아들(바르 예수)의 방해를 넘어서는 것으로 은유적으로 묘사했다. 이것은 바르나바 선교팀에서 바울식 메시지의 반향이 상당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상징적 텍스트 직후 마가라 불리는 요한이 바울-바르나바 선교팀에서 이탈하여 예루살렘으로 갔다.(13,13) 예루살렘이 그의 고향이기도 했겠지만, 베드로가 있는 안티오키아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갔다고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의 이탈이 바울이 극복해야 했던 예수의 아들의 의미와 관련이 있으려면 안티오키아보다는 예루살렘이 적격이기 때문이다. 곧 그의 이탈은 바울의 격상에 대한 반발과 관련이 있다.

이 선교 여정이 마무리될 즈음 바르나바는 그를 다시 선교팀에 합류시키려 했다.(사도행전15,36~41) 바르나바는 바울처럼 이방인 선교에 적극적인 사람이었지만, 그는 언제나 예루살렘의 예수파를 의식하면서 함께 펴는 선교를 지향했던 인물이다. 해서 그는 베드로계 인물이자 예루살렘 교회를 대변하는 마가를 동역자로 참여시키고자 했다. 그렇지만 바울은 바르나바의 절충주의에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바르나바와 바울은 여기서 헤어졌다. 바르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키프로스로 갔고,(4)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더베와 루스드라로 갔다.(15,37~39) 바울은 이제 바르나바와 대등한 사역자의 위상을 넘어 독립적 사역자이고자 했던 것이다.

근데 키프로스 선교 이야기가 다분히 상징적이어서 마가라 불리는 요한이 떠나간 이유가 여전히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궁금증을 조금 더 해소시켜 주는 것이 갈라티아 지역 선교에 관한 사도행전의 이야기다. 특히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사역에 관한 묘사에서 우리는 그 내막에 대해 조금 더 알 게 된다. 그리고 바울 자신이 이 지역의 그리스도파 공동체들에게 보낸 서신인 갈라디아서에서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갈등의 내막

 

바르나바와 바울 선교팀은 키프로스를 떠나 페르가에 당도했고, 거기서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로 갔다.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처럼 이 안티오키아도 헬레니즘 제국인 셀류큐스국의 창건자 셀류쿠스 1세 니카노르(Σελευκος I Νικατωρ)가 자신의 부친에게 헌정한다는 의미로 도시를 재건축하여 개명한 곳이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그가 열어놓은 헬레니즘 시대의 적장자임을 자부했던 두 경쟁국인 프톨레마이오스 제국과 셀류쿠스 제국은 각기 헬레니즘 제국 시대를 상징하는 도시들을 재건축하였는데, 대표적인 도시가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의 수도인 알렉산드리아다. 이에 대항하여 셀류쿠스제국이 만든 도시가 안티오키아였다.(5) 한데 헬레니즘 시대가 지나고 로마제국 시대가 도래했고, 로마는 이 도시들 중 여전히 정치적으로 유의미하고 로마의 주도권이 더 강하게 작동할 수 있는 곳을 로마의 도시로 재건했다. 그 방법이 로마의 퇴역병들이 도시의 지배권을 장악하는 도시로 만드는 것이었다. 갈라티아의 안티오키아가 바로 그런 도시에 속했다. 하여 이곳은 매우 라틴화된, 로마제국에 철저히 충성스런 국제도시가 되었다.

국제도시인만큼 이곳에도 이스라엘계 이민자 공동체가 있었다. 이 공동체들의 회당을 두루 다니면서 바르나바와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했다. 특히 바울의 메시지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그들을 따랐다.(사도행전13,43)

한데 모두가 환호한 것은 아니었다. 13,43에 의하면 회당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분류되어 있다. 유대아 사람들(Ιουδαιοι), 그리고 세보메노이(σεβομενοι)와 프로셀뤼토이(προσηλυτοι)가 그들이다. ‘유대아 사람들은 이스라엘계 이민자를 가리키는데, 이 성서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어 여기서는 이스라엘계 이민자라고 부를 것이다.(6) 한편 세보메노이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단어다. 그리고 프로셀뤼토이는 야훼 신앙으로 개종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두 단어가 13,43에는 하나의 정관사에 연결되어 있다. 해서 새한글성경은 이 어구를 유대교로 넘어와 하느님을 받들어 섬기는 사람들이라고 옮겼다. 또 많은 영어성서들도 “devout converts”, 독실한 개종한로 번역했다. 한데 세보메노이와 프로셀뤼토이는 이렇게 겹쳐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다른 두 유형의 사람들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그 단적인 증거가 튀르키아 서부지역의 아프로디시아스 시(Aphrodisias)의 이스라엘계 회당에서 발견된 비문에서 드러난다. 서기 2세기쯤 건축된 이 이스라엘계 회당의 유적지에서 비문 하나가 발굴되었는데, 거기에는 이 회당 건축에 기부한 사람들로 보이는 126명의 명단이 적혀 있다. 이들은 세 부류로 나뉘어 있는데, 이스라엘계 이민자, 개종자, 그리고 테오세비오이(θεοσεβιοι)가 그들이다. 이중 테오세비오스는 세보메노이처럼 하느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단어다. 세보메노이는 전체 명단 중 43%에 달하는 54명이나 되는데, 그중 9명이 이 도시의 원로원 회원이다. 즉 테오세비오이 혹은 세보메노이는 대체로 지역사회에서 매우 존중받는 중상위계층의 사람들인데, 이스라엘계 공동체를 존중하고 보호해주는 이들이다. 더욱이 도시의 최상위층인 원로원 회원이 이 명단에 속하는 사람들의 7%에 달한다는 것은 이 회당이 얼마나 도시 유력층이 과집중되어 있었는지를 시사한다.

반면 프로셀뤼토이, 즉 개종자는 3명으로 전체 명단의 2%를 약간 상회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그들은 가난한 하위층이거나 졸부처럼 공동체로부터 존중받지 못하는 자산가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 이스라엘계 공동체의 보호막 안으로 유입되어 들어온 이들이다. 해서 이 둘을 하나로 묶어 이스라엘계 이민자들과 대조하면 혈통주의적 구분법으로 이야기하는 셈이 된다. 반면 하느님을 두러워하는 자개종자를 나누어서 이스라엘계 이민자와 병렬로 연결하면, 혈통뿐 아니라 계층의 변수도 고려한 분류법이 된다.

다시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얘기로 돌아가보자. 바울의 주장에 회당 내의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 하지만 이스라엘계 이민자 중 일부의 사람들은 바울의 주장에 반박을 가했다.(13,45) 바울의 주장이 회당 내의 사람들 사이에 논쟁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듯하다. 바울이 주장한 것이 무엇이길래 이런 현상이 일어났던 것일까.

사도행전에는 그 이유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반면 이 지역의 그리스도파 공동체들에 보낸 바울의 회람서신인 갈라디아서에는 좀더 명료하다. 나중에 더 자세히 이야기할 것이어서 여기서는 간단히 핵심만 요약하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나누지 않으며 심지어 남자와 여자, 자유인과 노예의 이분법도 부정했다.(갈라디아서3,28) 혈통도, 성별도, 신분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이것은 당시 강력하게 부상하고 있던 유대아 중심주의적 원리주의자들에게는 하느님과 민족을 배신하는 치명적인 신앙의 왜곡으로 여겨졌다. 제국들의 식민지로 오랫동안 강탈당해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먼저 주어져야 한다고 그들을 확신했던 것이다. 한데 그 우선성에 반대할 뿐 아니라 심지어 수탈자 민족에게도 그 축복이 공정하게 배풀어질 수 있다는 주장을 그들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다. 예루살렘계 예수파는, 원리주의자들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 우선성의 원리에는 공감하고 있었다. 해서 마가라고 하는 요한은 바울을 반대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렸다.

한편 사도행전13,49에 의하면 이스라엘계 원리주의자들은 도시 엘리트들을 부추겨서 바울을 탄압하게 했다. 이것은 꽤 역사적 개연성이 있다. 우선 이 도시의 원로원 의원 같은 유력자들 중에는, 아프로디시아스 시처럼,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포함되었을 수 있다. 해서 그들은 회당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자를 위험분자로 간주하는 데 동참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위의 갈라디아서의 바울의 주장은, 그런 친소관계를 넘어서, 바울을 위험한 자로 간주할 이유가 충분하다. 특히 남자와 여자의 차별을 해체하는 듯한 주장, 그리고 자유인과 노예도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주장은 매우 심각한 발언으로 간주되었을 법하다. 노예나 천민들은 고대로마사회 곳곳에서 사회를 위협하는 중대한 위험요소였다. 사회의 도덕적 규범을 도무지 준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숱한 범죄를 저행했고 야심적인 권력자들에게 매수되어 귀족과 시민계층의 민주주의 전통을 파괴하는 일을 벌이기도 했다. 한데 그런 자들에게 신의 축복이 차별 없이 주어질 수 있다는 주장은, 도시의 엘리트들로서는 위험한 발언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해괴한 주장을 하며 이스라엘계 회당을 무뢰배들로 들끓게 한 자가 있다는 바울 반대자들의 고소를 당국자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였음직하다. 결국 바울 일행은 서둘러 이 도시를 빠져나와야 했다.

아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아탈리아 등으로 이어지는 갈라티아 행보 내내 이런 일은 반복되었다. 이스라엘계 이민자 사회에는 어디나 바울의 주장을 극렬 비판하는 자들이 있었고, 그들의 기소로 도시 당국자들도 바울을 위험분자로 간주하여 탄압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바울의 선교는 이렇게 늘 논쟁적이었고 극한 갈등을 유발했으며 도시를 소란스럽게 했다.

갈라티아 선교는 이렇게 바울 특유의 선교가 구체화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선교가 아직 꽃을 피우지는 못했다. 그것은 에게해를 건너, 발칸과 그리스로 가는 새로운, 모험적인 행보를 거치면서 발화한다.

 

[후주]

(1) 그리스어 켈토이(Κελτοι)는 라틴어 켈타에(Celtae)에서 유례했다. 켈타에는 라틴어로 갈루스’(Gallus)라고도 불렸다. 해서 프랑스 지역의 켈트족을 갈리아족이라고도 했다. 이들 갈리아 부족의 일부가 기원전 3세기부터 아나톨리아 중부 내륙의 고지대에 침입하여 치열한 갈등과정을 거치면서 정착해갔다. 기원전 25년 아우구스투스는 이 지역 일대를 갈라티아 속주라고 이름지었다. 바울의 제1차 선교여행지들인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는 바로 이 갈라티아 속주에 속하는 도시들이다. 이고니온은 갈라티아 지역의 가장 중요한 도시에 속했는데, 특히 바울시대 로마의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서기 41~54년 재위) 시대엔 도시명이 황제의 이름을 딴 클라우디코니움(Claudiconium)으로 개칭되었다. 이는 이 도시가 로마제국 당시 이 지역에서 얼마나 황제의 극진한 관심의 대상이었는지를 시사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식문서상의 명칭이었고 동시대 사람들 대다수는 오래된 명칭인 이고니온이라고 불렀다.

(2) 실라는 사도행전에만 나오는 이름인데, 이는 고린도후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베드로전서실루아노’(Σιλουανος. 실루아노스)와 축약형이다. 한데 실루아노스는 라틴식 이름인 실바누스(Silvanus)를 음역한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원래 라틴식 이름을 가진 이였는데, 헬라 문화권에서 실루아노스 혹은 실라스로 알려졌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추정컨대 그는 로마 지역 출신의 인물이지만 헬라 문화권에서 살게 된 사람이다.

(3) 후대에 영웅화된 바울의 위상을 반영하여 저술된 사도행전은 바울을 실재보다 훨씬 격상시켜 묘사했다.

(4) 사도행전과 비슷하게 1세기 말과 2세기 초 즈음에 저술된 문서로 보이는 골로새서에 의하면 마가는 바르나바의 아네프시오스’(ανεψιος)라고 한다.(4,10) 많은 번역본들은 이를 사촌’(cousin)으로 번역했는데, 이는 혈연적으로 그렇다기보다는 베드로의 아들처럼 영적으로 바르나바에 귀속된 보조 동료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5) 니카노르가 안티오키아로 명명한 도시는 16개나 되는데, 그중 이 도시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만큼이나 중요했고 오래도록 그 이름으로 불렸다. 한데 이름만 개칭된 것이 전부는 아니다. 셀류코스 제국의 통치방식은, 경쟁국인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제국보다 훨씬 더 철저한 헬레니화를 강요했다. 하지만 그만큼 저항도 강력했다. 더욱이 이 도시는 인근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토착세력이 형성된 곳이었다. 해서 셀류쿠스 제국의 헬레니즘화는 충분히 성공적이지 못했다. 로마의 아우구스투스는 이 도시를 정복한 뒤 퇴역군인들의 도시로 재구축하여 지배층을 아예 바꿔버렸다. 이런 통치가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이 도시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관해 여기서 길게 얘기할 수는 없지만, 아우구스투스는 도시명도 콜로니아 카이사리아’(Colonia Caesarea)로 개칭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우구스투스의 라틴화 정책은 꽤나 성공적이었지만, 도시의 명칭은 헬레니즘식 이름인 안티오키아로 더 많아 알려졌다.

(6) 마치 일본에 거류하는 한반도계 사람들을 재일한국인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어법이다. 반면 북한은 이들을 재일조선인이라고 부른다. 한데 이 두 단어 속에는 체제경쟁의 논리가 함축되어 있다. 해서 한쪽을 택하면 다른 쪽에 반대한다는 함의가 들어 있다. 그런 체제 갈등의 논법을 피하고자 대안으로 자이니치’(在日)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마찬가지로 이 글은 문맥상 해외 이스라엘계 이민자를 가리킬 경우 유대인이라는 용어 대신 이스라엘계 이민자로 고쳐쓰려 한다. 실제로 이들은 유대아 지역 출신의 이민자들만이 아니다. 사마리아계, 심지어 블레셋계, 트랜스요르단계 이민자들 다수를 포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