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에세이

역사의 예수 다시보기_12 : ‘천막 세 채’의 정치학 - 메시아의 죽음은 분별없는 종교적 열광주의를 경계하다

역사의 예수다시보기 12'의 원고

--------------------------------------------

천막 세 채의 정치학

메시아의 죽음은 분별없는 종교적 열광주의를 경계하다

 

 

 

또 다시 비이스라엘 지역에

 

우리는 앞 장들에서 예수가 비이스라엘적 지역으로 갔던 두 번의 경우를 보았다. 첫 번째는 요르단강 서쪽의 거라사 지역의 어느 무덤터로 갔던 이야기다.(마가복음5,1~20) 거기서 예수는 더러운 영에 붙들렸다는 한 남자를 만났다. 두 번째는 시로페니키아 지역의 어느 산골로 갔던 이야기다.(마가복음7,24/`30) 거기서 예수는 더러운 영에 붙들린 어린 딸을 치유하려 찾아온 어떤 헬라여자를 만났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가 비이스라엘적 지역으로 갔던 것은 모종의 위험에 직면한 행보인 것으로 추정된다. 시로페니키아 지역으로 간 이야기에는 아무도 모르기를 바랐다(7,27)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 또 거라사 지역 이야기에선 예수가 이스라엘계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꺼리는 장소인 무덤터로 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 두 이야기에서 예수는 이스라엘 사회로 결코 편입될 수 없는 부류의 사람을 만났다.

이 장에서 살펴볼 것은 비이스라엘적 지역으로 간 세 번째 이야기에 관한 것이다.(마가복음8,27~9,29) 그곳은 필립의 카이사레아 시 인근의 마을들이다. 곧 이 지역 통치자 필립이 다스리는 나라의 수도인 카이사리아 인근의 시골마을들로 간 이야기다. 어떤 위험한 상황 때문에 이곳으로 왔는지에 대해 마가복음에는 아무런 암시가 없다. 다만 앞의 두 경우를 통해 유추해본다면, 여기서도 모종의 위험한 상황이 전제된 행보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오히려 본문은 제자에 대한 당부가 주조를 이룬다. 제자들은 이제 가려는 예루살렘으로의 행보에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 길은 승리의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데 예수는 그 길이 배척당하고 죽임당하는 길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마가복음에 의하면 앞의 두 번의 비이스라엘적 지역으로 가는 행보가 앞선 위험한 상황에 대한 대응행위였다면, 세 번째 행보는 일어날 위험한 상황에 대한 대응행위였다. 이 대응의 방식은 당부였다.

이런 이야기 구성이 구구절절 실제 일어난 사실 그대로를 반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처참하게 죽임당한 것을 경험하고 부활신앙을 통해 그 절망적 사건을 성찰하면서 형성된 민중 기억의 산물이겠다. 그런 기억이 구술되면서 만들어진 구술집 예수전이 누군가에 의해 채록된 문서가 마가복음이다. 그러니까 이 구술문집은 예수의 개인전기가 아니라 이야기의 대상인 예수와 이야기꾼인 대중이 함께 만들어간 예수의 집단전기. 민중신학자 김용복이 말한 민중의 사회전기란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킨다. 즉 이 문서는, 예수가 개인적으로 어떤 말을 했는지를 보여주기보다는, 민중이 기억하는 예수를 보여준다. 한데 이것은 한 저자가 창작해낸 문서와는 다르다. 이런 문서의 힘은 독창성에 있다. 반면 구술문집은 시공간을 달리하는 대중의 기억의 검열을 거치면서 만들어진다. 해서 기억하는 이들이 집단적으로 공증하는 개연성이 수반되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구술문학의 역사성이 조명되는 실마리가 생긴다. 그렇다면 세 번째 비이스라엘적 지역에서 일어난 예수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떤 역사적 해석을 시도할 수 있을까?

 

필립의 카이사레아

 

예수 당대에 가나안 지역에는 두 개의 카이사레아가 있었다. 하나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 86km 거리의 지중해 연안도시다. ‘카이사레아 마리티마(Caesarea Maritima), 항구도시 카이사레아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헤롯 대왕이 기원전 22년부터 건설을 시작하여 기원전 10년경에 완공한 뒤 아우구스투스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의미에서 이 도시를 카이사레아라고 명명했다. 알다시피 카이사르는 당시 로마의 절대권력자인 옥타비아누스의 양부다.(1) 이 도시는 기원전 4년 헤롯이 사망하자, 유대아, 이두매아, 사마리아 지역의 통치자(2)로 위임된, 그의 아들 아르켈라우스(Archelaus)의 영토에 포함되었다. 한데 서기 6년 아우구스투스가 아르켈라우스를 파면하고 그의 영지를 직속령으로 삼게 되었을 때, 총독의 관저도시로 부상했다. 이때부터 카이사레아는 이 지역의 정치 중심지가 되었다.

두 번째 카이사레아는 헤롯의 아들이자 아르켈라우스의 이복형제인 필립의 영토에 있다. 그는 부친이 카이사레아를 만들어 로마에 충성을 과시적으로 표했던 선례를 따라 헬레니즘화된 도시 파네아스(πανεας)를 재건하여 카이사레아로 명명하고, 자신의 행정수도로 삼았다. 즉 이 도시는 처음부터 정치 중심지였다. 이 도시를 항구도시 카이사레아와 구별짓기 위해 라틴어로 카이사레아 필립비(Caesarea Philippi), 필립의 카이사레아라고 불렀다.

한데 필립의 카이사레아는 정치 중심지 이상의 의미가 있다. 위의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도시는 이스라엘국의 국가성소가 세워졌던 에 인접해 있다.(3) 흔히 한국인들이 한민족의 이상적인 영토관을 한라에서 백두까지로 표현하듯, 이스라엘은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고 표현한다.(4) 바로 그 이다. 과거 가나안 남부 가자 근방 지역에서 살았던 족이 블레셋에 시달리다 못해(5) 멀리 북동쪽 헤르몬산 근방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곳이라고 해서 단이라고 불렀다. 이스라엘국과 시리아 접경지역이어서 끊임없이 국경분쟁이 있었기에 이스라엘은 이곳에 국가성소를 지어 이스라엘 영토임을 주장했다.(아마도 기원전 8세기경) 그 성소가 있는 도시가 바로 이다. 그 이후 파네아스 혹은 필립의 카이사레아가 건설되자(기원전 3세기 이후), 그곳에서 불과 6km 거리에 있는 단은 이 도시의 시골지역으로 분류되었다. 그런 점에서 필립의 카이사레아는 이스라엘에게는 종교 중심지의 하나로 기억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이 지역을 제1성서에서는 바알헤르몬(사사기3,3; 역대기상5,23) 혹은 바알갓(여호수아기11,7; 12,7; 13,5)이라고 불렀다. 즉 그곳은 바알의 신전이 있던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헬레니즘 국가들인 프톨레마이오스 제국과 셀류쿠스 제국은 이곳에 목축의 신이라는 또는 파네아스의 신전을 세웠다. 해서 그 도시 이름도 파네아스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곳은 바알신, 판신, 야훼신의 신전이 있는 곳, 신들의 도시였다. 국가신전이 세워졌다는 것은 그 지역에 종교 인프라가 강력하게 형성되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은 토호세력이 종교적 권력과 깊게 연루되어 있다는 의미다.

하나 더 추정하자면, 예루살렘은 특정 종교권력이 독점하는 장소였던 데 반해, 이곳은 여러 종교권력이 공존하는 장소였다는 점이다. 국가와 그 수호신의 지배가 끊임없이 새롭게 교체되던 곳이기에 이 지역의 토호들은 특정 종교에 의존하기보다는 여러 종교에 열려 있어야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정치의 중심지이자 종교의 중심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의 전통주의가 살아 있으면서도 국제화된 정치종교적 혼합주의의 중심지가 필립의 카이사레아다. 바로 그곳으로 예수가 갔다.

 

논쟁

 

이 카이사레아에서의 활동에 관한 마가복음이야기는 크게 세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면 1’(8,27~9,1)은 예수와 떠돌이 추종자형 제자단과의 대화 장면이다.(6) 장면 2’(9,2~13)는 예수와 제자단 중 핵심집단(inner circle)과의 대화 장면이다. 그리고 장면 3’(9,14~29)은 다시 전체 제자단이 있는 곳으로 와서 말 못하게 하는 영에 들린 아이를 치유하는 장면이다.

비이스라엘권 지역으로 갔던 앞의 두 텍스트에선 위기의 상황에서 국경 밖으로 피해 간 사정이 전제되어 있는데, 세 번째 이야기는 미래의 위기 상황을 대비하여 예수가 제자들에게 깨우침을 주는 이야기가 중심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런 기조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야기에서도 계속된다.

마가복음이 구전되던 이야기를 채록한 문서였다는 우리의 가설에 의거해서 본다면, 이야기꾼은 이 대목에서 (예수운동) 기조의 전환을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판소리에선 고수의 장단이 들어가고 소리꾼의 발성과 박자가 변화하면서 기조의 전환이 청중에게 전달된다. 청중은 그 변화된 기조에 감정이입하면서 흥분하기도 탄식하기도 환호성을 지르기도 한다. 청중의 이러한 호응에 따라 이야기꾼의 스토리텔링도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이야기꾼과 청중의 상호작용이 구술 연행(performance)의 속성이다. 필시 예수 이야기도 이렇게 상호소통적인 연행 과정을 통해 보완되면서 형성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잠시 민중신학의 예수역사학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구술연구의 연행론(performance theory)은 예수 이야기를 사건의 관점에서 보는 민중신학의 예수역사학적 문제의식과 관점이 겹친다. 사건이란 사건을 구성하는 시공간적 행위자들의 상호적 소통을 통해 전개된다. 반면 전통적인 예수역사학은 예수 이야기에서 여러 행위자와의 연관성을 제거하여, ‘순수한예수의 말과 행위를 발견하려는 방법을 통해 역사적 진정성(historical authenticity)을 발견하려 했다. 한데 이러한 순수한 말과 행위는 결코 역사적일 수 없다. 역사학은 그 사건의 맥락과의 연관성을 발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해서 전통적인 예수역사학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행위자들의 소통의 관점에서 역사성을 묻고자 했던 사건론적 민중신학 해석학은 예수 연구의 역사학적 지평을 가능하게 했던 하나의 비평학적 개가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본문 얘기로 돌아가보자. 예수 이야기꾼의 연행의 기술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구술 채록집이 남아 있다. 바로 마가복음, 특히 십자가 사건 이전까지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야기꾼의 장면 전환의 기술이 아니라, 그 기조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바로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장면 1’이다.

 

예수가 묻는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부릅니까?’

제자들이 답한다.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며 예언자 중 한 분이라고도 합니다.’

예수, 다시 묻는다. ‘당신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베드로, 답한다. ‘그리스도입니다.’ (마가복음8,27~30. 의역)

 

마가복음6,14~16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데, 거기는 안티파스 궁전에서 왕이 신하들에게 묻는 장면이다. 물론 예수 이야기를 구술하는 이야기꾼과 청중이 왕의 궁중에서 오간 대화를 알 리 없다. 그것은 이야기꾼과 청중의 상상의 산물이지만, 당대 대중이 예수를 보는 시각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위의 장면 1’, 마찬가지로, 대중의 시각이 반영된 텍스트다. 대중은 예수가 부활한 요한, 부활한 엘리야, 혹은 종말의 때에 오신다는 그 예언자, 즉 부활한 그 예언자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대중은 그이들이 과거에 권력에 의해 처참하게 죽임당했지만 다시 부활해서 자신들의 세계 안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고,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 속에서 그런 이를 발견하기를 갈망했다. 예수는 바로 그런 존재로 대중에게 받아들여졌다.

한데 장면 1’에는 한 가지가 더 첨부되어 있다. 제자들의 생각은 어떤지 말이다. 사실은 하나 더 첨부된 것이라기보다는 논점을 대중에서 제자로 옮기는 화법으로 보인다.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답한 것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알다시피 그리스도라는 헬라어 단어는 히브리어 메시아를 번역한 것이다. 메시아는 이스라엘 신앙에서 신이 위임한 구원자 같은 이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요한이니 엘리야니 종말의 때에 오신다는 그 예언자니 하는 존재가 바로 메시아인 셈이다. 하지만 마가복음에서 베드로의 대답은 필시 대중의 시각보다 진일보한 것으로 간주되었을 법하다. 왜냐면 마가복음당시에 그리스도파 공동체에선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 메시아 중 하나가 아니라 유일무이한 결정적인 존재로서 이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복음서보다 20년쯤 이전에 활동했던 바울에게서 이미 그런 해석이 발견된다. “우리에게 신은 하느님 한 분...뿐입니다. ...... 또한 주도 예수 그리스도님 한 분 뿐입니다.”(고린도전서8,6)라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바울 이전에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파 사이에서 제기된 해석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마가복음이 채록될 당시 채록자는 베드로의 고백이 예수 당시 사람들의 고백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으로 생각했으리라는 것이다.

한데 마가복음의 전승모체(7)였던 민중이 기억하는 예수는 이런 베드로의 고백에 동의하지 않았다. 해서 민중은 예수가 자신이 당국자들에 의해 버림받고 죽임당하게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전파했다.(8,31~34) 물론 예수 당대에 민중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지는 않다. 시간이 흐른 뒤에 예수가 죽임당한 것을 겪고 부활했다는 소문을 접하면서, 그리고 부활한 그분이 진정한 그리스도라는 해석을 접하면서 민중의 기억이 이렇게 편집되었을 것이다. 즉 시간의 기회를 성찰할 수 있었던 민중의 업그레이드된 기억이 반영된 텍스트인 것이다.

이어지는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는 충격적이다. 새한글성서는 베드로와 예수가 서로를 나무랐다고 말한다.(8,3233) 이 단어는 헬라어 에피티마오(επιτιμαω)를 옮긴 것인데, 2성서에서 29회 사용되었다. 주목할 것은 이 단어가 거의 모든 용례에서 격한 공격의 늬앙스를 지닌 용례로 쓰였다는 사실이다. 가령 악령 들린 이를 치유하면서 그 악령에게 예수가 호통칠 때, 거센 풍랑을 잠잠하게 할 때 에피티마오가 쓰였다. 호통을 치며 상대를 제압하는 단어인 것이다. 아마도 그런 늬앙스를 살린다면 나무라다는 점잖은 표현보다는 힐난하다는 좀 더 원색적인 싸움 장면을 연상케 하는 단어가 적절할 것 같다.

예수와 제자가 이렇게 원색적으로 싸움을 하는 모습은 성서의 다른 곳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마태복음에피티마오에포(επω)로 바꾸었다.(16,20) 이 단어는 말하다는 뜻이지만, 특별한 감정이 실리지 않는 표현이다. 그것도 예수가 한 말에서만 쓰였다. 루가복음에선 에피티마오가 사용되긴 하지만, 그 말의 감정은 오직 예수의 말에만 담겼다.(9,21)

반면 마가복음의 텍스트는 예수와 베드로가 서로를 힐난하며 격하게 언쟁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베드로는 조금 전까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한데 어떻게 감히 그이를 힐난한단 말인가. 고백은 그렇게 했지만 함께 먹고 마시며 일상을 나누며 지냈으니, 한편에선 경외하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피와 살을 맞댄 동지이자 선배 같은 존재로 각인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여 고백과 이해가 서로 부자연스럽게 뒤얽힌 탓이 아닐까. 아무튼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버림받고 죽임당하게 될 것이라는 예수의 말에 도무지 동의할 수 없었다. 그토록 갈망하던 종말의 시간이 드디어 도래했다고, 예수를 떠받들며 목숨을 걸었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확고히 믿었다.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그이를 따랐다. 한데 그이가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이 운동은 끝이다. 누가 그의 말을 믿고 그를 따라 목숨을 건단 말인가.

그렇다면 예수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예수가 죽임당한 뒤 부활했다고 믿는 마가복음공동체에게 이 말은 그렇게 난해한 것이 아니다. 해서 예수의 이 말은 당연히 일어날 일의 예고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텍스트가 묘사하는 시간은 예수의 죽임당함과 부활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다. 그 얼마 후, 예수는 당국에 체포되었다. 바로 그 직전, 심야에 올리브 산기슭의 겟세마네에서 예수는 눈물이 피가 되도록 기도했다.(14,32~42) 마지막 순간에 그이 자신도, 버림받고 죽임당할 것을 이미 수차례나 말했음에도, 닥쳐올 처절한 그 사태를 예감하며 동요했다는 얘기다. 스승인 요한도 그렇게 죽임당하지 않았던가. 수많은 예언자들도 그랬지 않은가. 하여 예수는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그렇게 생각하며 두려워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처참하게 버림받고 죽임당했던 제2, 3이사야에 관한 전승을 떠올리며 자신도 그래야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과거 혁명에 성공했던 예언자 엘리사가 구축한 예후체제는 오므리-아합의 체제만큼이나 민중억압적이지 않았던가. 성공한 메시아 혁명은 그 자체로 위기였다는 게 제2, 3 이사야의 성찰이다. 그 때문에 당신은 그리스도입니다라는 제자들의 말을, 그 말 속에 담긴 승리주의적 기조를 그이는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 모른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그렇게 말하느냐고 소리쳤다. 그래야 당신을 따랐던 자신들이, 그리고 민중이 나서서 무엇이라도 할 것 아니냐고 말이다.

한데 동요했던 예수는 베드로식의 단호한, 승리주의적 그리스도관을 넘어섰다. 동요했기에 넘어섰다. 하느님은 성공한 메시아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는 분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이다. 엘리야가 그랬고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성공하지 못했지만, 신은 그 절망의 사건을 통해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깨우쳐준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권력화를 끊임없이 가로막는 신의 사건을 깨우쳐주려 했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예수는, 동요하는 그리스도는 그것을 깨달았던 것이 아닐까. 이런 전환의 기조가 이 텍스트 속에 스며있다.

얼마 후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그 도정에서 그는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훈계의 말을 남긴다. 나중에 살펴볼 것이지만 민중에서 제자로 전환된 기조의 요체는, 그리스도 사건이 또 다른 권력화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데 있다.

 

천막 세 채

 

이야기는 장면2’로 바뀐다. 제자단 중 세 명의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오른다. 마가복음에서 이렇게 제자단 중 셋 또는 네 명을 데리고 따로 가는 경우가 네 번 나온다.

네 경우 모두 예수의 메시아성에 관한 비밀이 폭로되고 있다. ‘A’에서 그이는 죽은 이를 살리기까지 하는 신령한 존재임이 폭로되었다. ‘B’는 예수가 모세와 엘리야라는 이스라엘 신앙을 상징하는 두 신령한 존재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C’스가랴서14,4에서 보듯 메시아 사건이 시작되는 장소에 그분이 베이스캠프를 두는 이야기다. 그리고 ‘D’에선 메시아가 자신이 겪을 고난의 사건을 두고 신에게 기도한다.

앞 장들에서 얘기했듯이, 예수는 안티파스 당국에 의해 처형된 국사범 요한의 잔당으로 당국으로부터 추격당하고 있었다. 해서 당국의 경찰력에 노출되지 않으려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노력의 하나가 제자단 내부의 좀더 비밀스러운 핵심집단의 존재다. 비밀스럽게 활동해야 했던 저항단체는 내부의 특화된 비밀집단을 갖기 마련이다. 나는 그 비밀집단의 명칭이 열둘(δωδεκα, 도데카)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예수가 자신의 메시아성이 폭로되는 장면마다 따로 서너 명의 제자만을 데리고 갔다는 설화들은, 그것 하나하나가 사실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내부의 핵심적 비밀집단이 예수와 별도로 행보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형성된 것들이다.

이제 필립의 카이사레아에서 있었다는 천막 사건을 살펴보자. 예수는 이 지역에서 대중을 만났고 제자단과 따로 활동하기도 했다. 여기서 천막 사건은 제자단 중 최측근 몇 명만이 관여된 사건이다.

예수는 세 명의 측근 제자들과 에 오른다. 이 지역 일대가 워낙 고지대이지만, 그중에도 높은 산으로(εις ορος ψηλον. 에이스 오로스 휩펠론) 간다. 헤르몬 산 정상이 거의 해발 3천 미터에 달하니, 예수 일행이 간 높은 산이 얼마나 고지대인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이스라엘 신앙 서사에 익숙한 사람들은 여기서 모세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도 시내 산이라는 높은 산 꼭대기에서 하느님의 율법과 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받았다. 그곳까지 최측근 인사인 여호수아(출애굽기24,13)가 동행했다. 예수가 최측근과 함께 높은 산 정상으로 갔던 것처럼 말이다. 그곳의 신령스러움을 출애굽기는 이렇게 묘사한다. “구름이 산을 덮었다. 주님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엿새 동안 구름이 산을 뒤덮었다. ... 주님의 영광이 마치 산꼭대기에서 타오르는 불처럼 보였다.”(24,15~17) 또 어떤 이들은 여기서 전설적인 예언자 엘리야를 떠올릴 수도 있다. 그이가 시내 산에 당도했을 때, 설화는 그가 맞닥뜨린 산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한다.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다. 그 바람이 지나가자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직후 산에 불이 났다.(열왕기19,11~12) 예수설화 속의 천막 이야기에도 산의 풍경은 비슷하다. 구름이 산을 온통 뒤덮고 있었고, 그 속에서 신의 소리가 들렸다.(마가복음9,7)

제자들은 이 광경을 목도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예수의 옷이 눈부실 정도로 하얗게 빛났고, 이스라엘 신앙이 가장 신령한 분으로 모시는 모세와 엘리야가 그곳에 함께 있었다.(마가복음9,3) 이 영광스런 광경에 취해 베드로가 외친다. ‘주님, 우리가 여기에 천막 세 채를 짓겠습니다. 거기서 세 분을 모시겠습니다.’(마가복음9,5)

한데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복음서는 베드로의 외침에 대해 시니컬한 코멘트를 남긴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9,6) 첫 번째 문장의 주어는 베드로인데, 두 번째 문장은 남성 복수3인칭의 주어를 함축한 문장이 나온다. 그러니 베드로가 혼자 광분해서 한 말은 아닌 모양이다. 요컨대 천막을 짓겠다는 말은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그 말에 동행한 제자들 모두의 마음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이것이다. 도대체 이들이 무엇을 몰랐다는 것인가?

여기서 주목할 단어가 바로 천막으로 번역된 스케네(σκηνη). 칠십인역성서에서 이 단어는 4백 회 가량 나오는데, 대부분 천막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수카(sukâ)를 번역한 것이다. 이 단어는 거의 모든 용례에서, 사람들의 거처가 아니라, 신의 거처를 가리키고 있다. 2성서는 더 명료하다. 아래 []에서 보듯 스케네가 사용된 본문은 모두 신을 모시는 천막을 가리키고 있다. 요컨대 베드로가 말한 천막 세 채는 모두 신당들인 셈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필립의 카이사레아 지역은 전통적으로 신당들이 많은 곳이다. 바알의 신당도, 파네아스의 신당도, 야훼의 신당도 있었다. 그 신당들은 분명 국가제사가 벌어지는 꽤 규모 있는 건축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필시 곳곳에 이들 세 신뿐 아니라 수많은 신들을 모시는 중소규모 신당들이 대단히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당들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각각 종교적 진정성에서 국가신전들을 압도한다는 신념을 함축하고 있었다.

말했듯이, 오래 전부터 신전들의 장소라는 사실은 이 지역이 종교적 토호들이 탄탄한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곳임을 의미한다. 즉 종교와 권력이 보다 긴밀히 연루된 곳이라는 얘기다. 한데 이 지역의 신전들의 성쇠는 그 신들을 각기 대변하는 국가의 성쇠와 직결되어 있었다. 해서 종교가 어느 다른 지역보다 사람들의 삶에 훨씬 깊이 개입되어 있는 곳이다. 그것도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여러 종교가 사람들의 일상에 뒤엉켜 있는 혼융적 종교성(hybridic religiocity)이 흘러넘치는 곳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곳은, 그 혼융성에 못지 않은, 종교적 갈등과 증오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이기도 했다. 혼융성이 더 중요하게 작동할 때도 있고 갈등이 더 강한 규정성을 지니고 있는 때가 있다. 한데 이 당시는 갈등의 변수가 더 중요했다. 바로 이런 곳에 제자들은 야훼 신의 신당들을 짓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를 그들은 알고 있을까. 그들은 예수의 신성화된 모습에 취해서 자신의 열정을 표했겠지만, 그런 열광이 증오와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다른 종교의 사람들을 학살하는 일이 빈번한 곳에 세워지는 신당은 다분히 그런 위험을 내포한다. 더구나 이스라엘에는 그런 근본주의적이고 분리주의적인 신앙분파가 불꽃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이미 예수 당대에 그런 분위기가 일고 있었다. 해서 얼마 후 예수가 죽임당한 직후 예루살렘에는 스테반이 그런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죽임당했다. 그리고 예수파의 일원이 되지 전의 바울은 그런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신앙운동의 일원이었다. 그가 그런 활동을 벌인 곳은, 빌립의 카이사레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시인 다마스쿠스였다. 이런 조짐이 이미 일어나고 있던 시기에, 필립의 카이사레아 인근 모처에서 예수는 제자들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천막 세 채는 그런 갈등의 한 흔적이다.

 

말 못하게 하는 영

 

예수와 최측근 제자들은 다른 제자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이곳에는 제자뿐 아니라 많은 무리와 율법학자들도 있었다. 무리와 율법학자들과 제자들이 있는 곳에선 언제나 예수가 율법학자들과 갈등을 벌이는 장면이 이어진다. 한데 이 텍스트에선 율법학자들의 역할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여기서 요점은 제자들의 실패에 대한 예수의 훈계가 중심이다.

실패란 말 못하게 하는 영에 들린 아이를 제자들이 치유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그 아이는 종종 거꾸러지고 거품을 물며 이를 갈고 몸이 뻣뻣해지는 발작 증상을 일으켰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는 불 속에 뛰어들기도 했고 물에 빠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그 더러운 영을 에피티마오’, 즉 격하게 꾸짖었다. 그러자 그 영은 아이에게서 떠나갔다. 이에 제자들은 물었다. 왜 우리는 당신처럼 하지 못했나요? 어떻게 당신은 할 수 있었나요? 예수의 대답은 상투적이다. ‘기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앞의 장면 1’장면 2’를 연계시킨다면, 제자들은 예수의 능력을 빌어서 악령과 싸우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악령을 이기는 힘을 그분이 가졌다고 믿었다. 해서 그들은 악령을 제압하고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게 예루살렘에서도 예수는 승리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데 그것은 실패했다. 예수는 자기를 믿지 말고 자신을 파견한 이에게 간구하라고 말한다. 승리하든 않든, 성공하든 않든, 그것은 보내신 이의 뜻이다. 다만 우리는 고통받는 이를 위해 간구하는 일만 남았다.

장면 전환의 기조가 필립의 카이사레아 활동 전체에 깔려 있다. 적과 싸우면서 고통당하는 민중을 편드는 일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향한 훈계에 초점이 있다. 메시아가 도래할 시간에 대한 제자들의 갈망이 분별없는 열정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려는 이야기들로 기조가 바뀌고 있다는 얘기다. 나쁜 권력을 물리치려는 열광과 스스로 나쁜 권력자의 행태를 모방하는 분별없는 욕망이 겹쳐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경계인 것이다.

이런 기조의 전환은 이 복음서의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그렇게 메시아의 시간에 대한 복음서의 성찰이 예수기억의 마지막 대목을 이끌고 있다.

 

[후주]

(1)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암살된 이후 내전을 제압한 뒤 최고 권력자의 자라에 오르는데, 아직 이라는 호칭에 대한 원로원 의원들의 강한 반감을 고려해서 자신의 호칭을 아우구스투스’, 곧 지존자라고 부르게 했다.

(2) 아우구스투스가 그에게 준 작위는 에쓰낙키아’(εθναρχια). 헤롯의 다른 아들로 갈릴래아와 페레이아의 통치자인 안티파스, 그리고 또 다른 아들로 이복동생인 필립은 한 급 아래인 테트락키아’(τετραρχια) 작위를 받았다.

(3) 유다국의 국가성소는 예루살렘에만 있었던 반면, 이스라엘국은 벧엘과 단, 남쪽 끝과 북쪽 끝의 도시에 국가성소를 세웠다.

(4) 이런 영토관은 아마도 요시아 왕실 산하 국정홍보처의 산물인 듯하다. 성서에서 그런 표현이 요시야 왕실의 문서들에 기원을 두고 있는 성서문서들인 사사기〉 〈사무엘기상〉 〈사무엘기하, 그리고 아모스서이기 때문이다.

(5) 단 부족의 전설적 영웅인 삼손의 설화에는 이 족속이 강력한 부족동맹체인 블레셋에게 얼마나 시달리고 있었는지에 관한 생생한 기억이 담고 있다.

(6) 8,34~38은 예수가 제자단에 더하여 그를 따르던 민중에게도 한 말이다. 하지만 내용상 제자들을 향한 가르침의 연장이다. 해서 이것도 장면1’로 묶어도 될 것이다.

(7) 마가복음을 창작 문서라고 보는 예수학계 다수파의 주장에 의거하면 이 복음서의 저자는 특정인이다. 학계는 그를 편의상 마가라고 부른다. 한데 예수학계의 소수파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주장에 의하면 이 문서의 채록자보다 그 이야기를 구술전승한 이들이 더 중요하다. 안병무는 이들을 전승모체라고 불렀다. 그리고 안병무는 그들의 신원에 관하여 마가복음자신이 정보를 흘리고 있다고 보았다. 그들이 바로 오클로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혹은 귀속성이 약화된 떠돌이들이다. 이들 오클로스들은 구술과정에서 단편적인 예수 전승들을 점점 더 큰 이야기 덩어리, 즉 구전 텍스트로서의 예수전으로 만들어냈는데, 그런 구술 예수전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구술문학계는 변이형’(variants)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여러 변이형 하나가 바로 마가복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