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 당비생각4] (산책자, 2009.12)에 결론으로 수록된 글입니다.
이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글은 목차 아래 첨부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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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에세이_이상엽 / 김흥구 / 조습
들어가며: ‘당비의생각’ 3권을 기획하며 _서동진
1부 ‘애도’에 대한 질문
‘정치’적 죽음, ‘역사’적 죽음, 정치의 죽음 _엄기호
더 이상 아름다운 순교자는 없다: 우리는 노무현을 지키지 못해 미안해야 하나? _김원
죽음과 생존을 묻다: 애도, 우정, 공동체 _권명아
‘종교’가 되어버린 광장의 애도에 대하여: 우울증의 스펙터클, 혹은 집합 의례로서의 애도와 추모 _정용택
무덤은 핑계였다: 원한과 연민의 정치에 대한 명상 _김성태
구술 드로잉: 우리 시대의 평범하지 않은 가족 이야기 _조동환 / 조해준 / 이경수
2부 ‘기억’에 대한 성찰
애도와 민주주의: 포스트-노무현 시대의 기억 문화를 위하여 _전진성
노무현 씨의 죽음과 법의 논리 _이국운
무수한 죽음들의 동일함에 대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_송경동
죽음에 대한 우울증적 태도와 정치적 행위의 가능성 _이현재
노무현 이후의 한국 정치를 생각한다 _박동천
나오며: ‘불타는 몸들’의 강요된 침묵, 그것은 나의 욕망인가: 2009년의 죽음들, 그 기억의 비대칭에 대하여 _김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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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몸들'의 강요된 침묵, 그것은 나의 욕망인가
2009년의 죽음들, 그 기억의 비대칭에 대하여
왕자의 불타는 몸
왕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 아이를 바치라고 명한다. 신속하게 의식이 준비된다. 지체할 틈이 없다. 온 국토를 불구덩이로 만들며 사방에서 시시각각 조여 오는 적군을 몰아내려면 더 지체할 수 없다. 도성 서편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벤힌놈 계곡(“힌놈의 아들 골짜기”) 1의 도벳(Tophet)에, 그 성소에 불이 지펴진다. 순식간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제단 한복판에 사지가 묶인 채 거의 혼절해 있는 왕자는 몸둥이를 향해 질주해오는 기름 불꽃의 열기에 비명 지를 힘도 없다. 순식간에 몸에 불이 타올랐다. 온몸에 발라진 기름을 게걸스럽게 핥아가던 불꽃은 곧 아이를, 그 열기와 고통에 꿈틀거릴 틈도 주지 않고 휘감아버린다.
기름 타는 연기와 살갗 타는 냄새가 잔인한 돌풍을 일으키며 제단 주위를 채운 군중의 숨결을 자극한다. 군중은, 사제의 푸른 도포자락이 휘날리며 격렬하게 허공을 가르는 춤사위를 본다. 아니 차라리 그건 칼날이 된 옷자락이다. 비명인 듯 고함인 듯, 찢어질듯 내지르는 사제의 목청이 사정없이 허공을 벤다. 왕자의 불타는 몸, 그러나 신음으로조차 드러내지 못한 그 고통을, 허공을 가르는 사제의 옷자락이, 그 고함소리가 베고 도려낸다. 저 잔인한 ‘죽음의 극’을 통해 왕자의 고통은 군중의 고통이 된다.
왕자를 휩싸버린 불의 열기처럼 군중의 가슴에 불이 타올랐다. 고함을 지른다. 발을 구른다. 그리고 옷을 찢는다. 왕자의, 그 아이의 죽음이 슬프고 분해서다. 동시에 그것은 군중 자신의 고통으로 번안된다. 그 죽음은 잿더미가 된 강토와, 주검이 된 어린 자식들이, 늙은 아비 어미들이, ......, 저 주검들의 하소연으로, 살아남은 자들의 울부짖음으로 번안된다.
이제 왕이 앞으로 나온다. 눈물에 콧물에 범벅이 된 얼굴로 울먹이며 소리 지른다. 적을 무찌르자고, 한 놈도 남김없이 다 쓸어버리자고 말이다. 신께서 아이의 주검을 아셨으니, 그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을 들으셨으니, 틀림없이 이 나라를, 이 백성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
유다국 왕 아하스가 통치하던 때였다. 다마스커스의 아람국 왕 르신이 시리아-팔레스티나의 패권국가로 부상한 때이기도 하다. 강력한 경쟁국이던 이스라엘의 베카 왕도, 페니키아의 띠르(Tyre) 왕 히람도 르신에게 굴복하였다. 르신은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소국들에게 아시리아의 서진(西進)을 방어할 연합군에 참여할 것을 종용한다. 거의 모든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혹은 마지못해 연합군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한데 남부의 몇 나라들이 반아시리아 동맹에 불참을 통보했다. 아하스의 유다국이 그중의 하나다. 르신은 동맹을 맺은 모든 나라들에게 명한다. 유다를, 마온 족속을, 여왕 삼시가 이끄는 아라비아를 인정사정 보지 말고 한껏 짓밟으라고.
유다국의 거의 전역이 잿더미가 되었다. 동쪽의 블레셋이, 서쪽의 모압과 암몬이, 북쪽의 이스라엘이, 그리고 르신의 다마스커스-아람 제국의 군대가 닥치는 대로 불 지르고 살육하며 도성을 향해 공격해 들어온다.
피난민들이 줄을 이었다. 갑자기 늘어난 도성 안 백성들의 식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곡물을 공출해올 시골도 이미 사라졌다. 굶주려 죽어가는 이들이 점점 늘어났다. 사람들은 괜히 화를 내고 사소한 일로 다투는 일이 빈번해진다. 민심이 흉흉해진다. 그렇게 누군가 죽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때 궁중에서 쿠데타가 혹은 그러한 음모가 있었다. 아하스 왕을 축출하고 ‘타브엘의 아들’(ben-Tabeel)이라는 이를 왕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이사」 7,6~7). 이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연구자들은 두로 왕 히람의 선조인 ‘투바일'(Tubail)이 ‘타브엘’과 동일인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하여 ‘타브엘의 아들’이라는 이는 띠르국의 공주가 낳은 유다 왕의 아들이라는 주장이다. 아하스의 아들이거나 그의 부왕(父王)인 요담의 아들로, 두로국의 공주가 낳은 왕자라는 얘기겠다. 어쨌거나 아하스는 이 반역 사태를 진압했고, 더 이상 민심의 동요를 방치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극약처방을 내놓아야 했던 것 같다.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한 것이다.
번제물은 대개 가축 가운데서 선별된다. 하지만 좀더 심각한 상황이 오면 인신제물이 쓰이기도 하는데, 주로 이방인, 노예, 천민의 자식 등이 제물로 선별되곤 한다. 한데 지금의 상황은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다.
왕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쿠데타 음모가 있었고, 극도의 고통에 시달리는 백성들은 왕을 향해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곧 왕 자신이 제물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왕자를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한 때는 바로 이런 시기다.
희생제물은 그것을 바치는 이들 자신을 상징하는 존재다. 그런데, 말했듯이, 희생제물은 위기가 고조될수록 제의를 드리는 이들과 점점 근접한 존재로 선정된다. 그리고 가장 근접한 존재가 바로 자식, 특히 아들이었다. 곧 아들을 바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바친다는 가장 직접적인 표현인 것이다.
이런 의례가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제1성서(=구약성서) 여러 곳에서 이 인신제사가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은 그것이 효력이 있다는 대중의 믿음이 널리 퍼져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특히 대부분의 구절들이 전쟁과 같은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언급되어 있는 것은 이것이 위기시의 극약처방임을 시사한다. 필경 아하스가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의례도 대중을 선동하는 강렬한 효력을 가졌을 것이라고 추정할 만하다. 그 사건으로 인해 갈라진 국론은 통일되었고, 그 덕에 르신 동맹군의 침공을 견뎌낼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아하스는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면서 봉신국의 예를 올렸다. 그리고 긴급한 구호의 신호를 타전했다. 3년을 끌던 전쟁(주전 734~732년)은, 아시리아가 다마스커스를 침공함으로써 끝이 났다. 다마스커스 제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이스라엘국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항복했다.
결국 아하스의 두 가지 방책은 다 성공을 거둔 셈이다. 인신제사로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고, 국제 외교전을 통해 적성국이 더 이상 재기할 수 없게 하였다.
뿐만 아니다. 의도하지 않은 횡재가 온 것이다.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수많은 유민들이 유다 땅으로 몰려들어 왔다. 르신이 이끄는 연합군의 공격으로 흩어진 인구가 매우 빠르게 회복되었고, 심지어 원래의 배 이상 늘었다. 2 폐허가 된 땅이 다시 경작되었고, 새로운 경지가 개간되었다. 생산성이 높아졌고, 이 모든 것을 국가가 주도함으로써 왕실의 부도 몇 배가 늘어난 것이다. 실제로 이 시기 고고학적 발굴물을 보면 유다 왕국은 번영기에 접어든 것임이 분명하다.
아하스 왕은 아들을 제물 삼아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아들의 불타는 몸은 자기의 고통을 말할 수 없었으나, 사제의 대언을 통해 아하스의 고통으로 표현되었다. 즉 아들의 고통은 침묵으로 가려지고 아비의 고통으로 번안됨으로써, 아비인 아하스는 자기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나라를 번영하게 하는 밑거름으로 삼은 것이다.
기원전 8세기 팔레스티나 지역 후진국의 한 군주는 벌써 타인의 죽음을 이용해서 자기의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통치술을 활용했다. 물론 그 이전이나 이후의 수많은 권력들도 이런 방식을 활용하곤 했겠다. 위기가 심할수록 더욱 큰 자극으로 고통을 양산하되, 그 고통의 소리를 봉쇄하고 대신 자신의 소리를 더빙하는 방식 말이다. 그것은 권력에게 성공을 선사하기도 했고, 때로 실패로 귀결되기도 했다. 하지만 권력은 이것이 매우 효과적이라는 믿음을 대대로 간직해왔음이 분명하다. 하여 그런 관행은 계속되어 왔다.
용산의 불붙은 몸들
용산의 ‘불붙은 몸들’은 어떤가? 민주화 이후 문제의식의 다원성이 확산되어온 추세와는 달리, MB 정부 들어서는 다시 두 편으로 첨예하게 갈린 해석이 ‘용산의 죽임당한 육체들’에 대해서도 격렬하게 대립했다. 한 편은 세입자의 육체를, 다른 한 편은 진압경찰의 육체를 화두 삼아 그 주검들의 강요당한 침묵의 소리를 대언(代言)하려 했다.
공중파 TV에서도 송출했던 ‘불타는 몸의 이미지들’은 자극성 강한 메시지를 시민사회 구석구석으로 타전했다. 처음 얼마간은 지난해의 ‘광장’을 재현할 듯 기세등등했다. 저 죽임당한 몸들의 불길이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빠르게 번져갔다. 강경진압을 단행했던 MB 정부는 아마도 크게 당황했던 듯하다. 신속하게 관련자 모두를 체포했고, ‘도시 테러’ 운운하며 그 불길을 진화하고자 했다. 그리고 경찰의 죽은 몸에 자기들의 소리를 더빙하여 커다란 확성기를 연결해 버렸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저항의 불길이 더욱 거세지도록 자극했을 뿐이다. 사람들의 분노는 순식간에 확산되었고, ‘정권 퇴진’의 구호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채 한 달이 못가서 분위기는 급속히 식었고, 시민사회는 용산을 거쳐 나오는 격렬한 말들에 빠른 속도로 무감각해졌다. 그리고 남은 것은 ‘법의 판단’이었다. 물론 예상했던 대로 법의 판단은 지긋지긋하게도 불공정했다.
시민사회는 그 불타는 몸들을 빠르게 망각했다. 기억에서 사라졌기에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생각과 행동을 동원하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의미에서의 망각이다. 그렇다면 ‘무관심’이라는 말이 더욱 적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MB 정부가 성공을 거둔 것도 아니다. 시민들은 무관심했지만, 정부에 지지를 표하지도 않았다. 아무튼 그 주검들은 어느 편에게도 ‘이미지의 힘’(the power of the image)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토록 강렬했던 죽음의 이미지가 그토록 빠르게 망각 혹은 무관심의 대상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 불타는 몸은 너무 강렬하기에 시민이 공유할 수 없어서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른바 ‘광우병 시위’는 하나의 저항 퍼포먼스이기도 하며, 그런 점에서 일종의 축제이기도 했다. 한데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그 죽음들에 직면해서도 정부는 조금도 후퇴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저항은 1970,80년대처럼 사생결단의 항전처럼 전화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이른바 ‘전위적 활동가’들 다수는 이것을 체제의 문제로 급진화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시민사회의 발화자들, 사회현상에 대한 해석의 권리를 획득한 이들에게 그러한 투쟁, ‘축제 없는’ 투쟁은 너무 구태스럽다. 무엇에서든 유머를 필요로 하게 된 몸들이 되어버린 ‘게그적 소비사회’(gagged consumer society)의 시민들에게 쾌락 없는 투쟁이란 ‘참아줄 수 없는 진지함’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른 해석도 했다. ‘시민사회의 룰’은 저항이 사유재산의 문제를 피해가야 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데 용산의 불타는 몸은 그것을 건드렸다. 비록 도심 신사화(gentrification)의 사회적 역학 아래서 수행되는 철거라는 행위가 내장하고 있는 갈등의 속성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 저항행위는 사회적 룰을 위배한 것이다. 그 죽음에 동정이 가고, 나아가 도덕의식이 발동하여 분노가 치밀기도 하지만, 그것은 내면적 분노 바로 ‘거기까지만’이다, 더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합의는 시민사회의 합리적 절충선이기도 하고 동시에 욕망의 균형점이기도 하기에, 의식적 무의식적인 작동 원리를 갖는다. 하여 사람들은 용산의 ‘불타는 몸’을 한편으로는 그 고통에 공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공감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얘기겠다.
아무튼 2009년 용산의 불타는 몸들은 빠르게 망각되었다. 한데 그 누구도 만족감에 사로잡힐 수 없는 사정에 있었다. 지구화의 변화는 이곳저곳 예측할 수 없는 지점으로 출몰하면서 삶의 기반들을 닥치는 대로 파괴(demolition)하고 있었고, 잿더미가 된 황폐한 땅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내몰고 있었다. 혹은 ‘파괴의 예감’은 거의 모든 이들의 ‘존재론적 불안’의 지배적인 내적 원리가 되었다. 더욱이 MB 정부의 정치 부재의 통치 혹은 독재정치는 삶의 안전을 모색할 시민적 주체의 권리를 회수해버렸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정부에 대한 분노가 영혼을 간질이고 있지만, 거의 무정부적 테러리스트처럼 활동하는 지구적 제국들의 광폭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를 믿을 수도 없고, 정부를 반대할 수도 없다. 아니, 믿는 게 유리한지 반대하는 게 유리한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분명 MB 정부의 안하무인식 통치는 싫지만, 느낌대로 행동하기엔 두렵다. ‘주체의 의지’가 무력해지는 상황에 빠진 상황인 것이다.
아마도 종교가 필요한 순간이겠다. 한데 우리사회의 종교들은 신뢰할 만하지 않다. 현존하는 종교제도들로 인해 사람들은 ‘종교적’이지 않게 되었다. 한데 주체의 위기는 사람들을 ‘종교적’으로 만든다. 종교적이지만 종교적일 수 없다. 이럴 때 사람들은 ‘대안종교’를 찾는다. 나는 2009년, 아니 그 몇 년 전부터 한국의 시민사회가 선택한 대안종교는 ‘광장’이었다고 이해한다. 한국사회의 시민종교적 욕망은 주체의 한계의식을 구원해줄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는데, 광장은 그러한 구원제의를 수행하는 시민적 축제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2009년 서울의 ‘벤힌놈의 도벳’은, 그 인신제사의 제단은 ‘서울광장’이었다.
봉하마을에서 날아온 또 하나의 부고(訃告)
5월 23일, 전직 대통령이 자살했다. 진실과 거짓을 교차시키며 구성된 ‘법적 사실’이 그를 더 감당할 수 없게 만들었나보다.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앙심인가, 권력은 그를 바닥까지 철저히 파괴시켰다.
한데 저들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단지 10년일 뿐이고, 그것도 참여정부가 집권한 것은 그 절반에 지나지 않은데, 그 기간 동안 얼마나 잃어버렸단 말인가? 아니 그마저 잃어버린 게 있었던가? 대차대조표를 만들 수 있다면, 오랜 기득권세력은 그 시기에 더욱 확고한 기반을 마련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문구는 오랜 기득권집단을 묶어내는 분노와 원한의 프레임이었다. ‘원한의 정치’가 작동되는 동력은 ‘복수’다. 복수할 수 없는 이의 앙심은 자기 내적 병증을 낳지만, 복수할 능력을 갖춘 이의 앙심은 심각한 폭력을 낳는다. 하어 복수의 정서는 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직 되갚아주어야 할 것을 갑절로 되돌려주는 폭력만이 남을 뿐이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으로 원한의 정치는 일단락되었다. 이제 ‘건설’만 남은 것이다. ‘전 국토를 공사판으로!’, 연초 집권당 원내대표가 기자회견 시에, 뜬금없이 외친 구호는 어쩌면 ‘원한의 정치’가 종식될 때가 왔다는, 저들의 신이 내리는 신탁인 셈이다. 그것은 원한의 정치, 그 무의식적 복수심의 끝을 향한 알리바이를 스스로에게 제공하는 신의 선물이다. 그리고 그 신은 적어도 거기까지는 전능했다.
한데 뜻밖에도 시민사회의 분노가 마른 산의 불길처럼 번져갔다. 광장에서는 다시 불의 향연이 벌어졌다. 시민은 광장으로 몰려왔고, 장엄한 죽음의 미사를 드렸다. 광우병의 광장은 축제였지만 종교심으로 승화되기엔 너무 경박했다. 반면 전직 대통령을 추모하는 시민의 장례식장인 광장은 장엄한 축제의 장이었다. 비로소 광장은 시민종교의 장소가 되었다.
많은 이들은 한 사람의 죽음에서 자기의 죽음을 예감했다. 나아가 자기 자신에게 닥친 혹은 닥쳐올 온갖 고통의 예감을 그의 죽음으로 환치시켰다. 바닥까지 파괴될 위기에 놓인 몸들은 벤힌놈 계곡의 인신제사처럼 누군가의 죽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를 덮치고 있는 온갖 죽음들과 예감된 죽음들이 씻겼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정화의 예식이며 구원의 마당인 셈이다. 동시에 그것은 그렇게 성결하게 된 자의 미래를 호출하는 소명의 예식이다.
이제 사람들은 그의 원한을 대언(代言)한다. 억울한 죽음을 세상에 폭로하며, 그 죽음의 원인이 된 불의한 체제를 고발한다. 그 체제의 끝을 향해 기도하며, 그 체제의 끝을 가상적으로 체감하는 각양의 퍼포먼스를 기획한다. 그리고 그 기억의 퍼포먼스는 반복적으로 수행되면서 그를, 그에 관한 기억을 되새긴다. 그렇게 반복되는 중에 또 어느 순간의 계기가 찾아오면 그 퍼포먼스는 현실의 행위로 옮겨간다. 어쩌면 그것은 봉기가 될 수도 있고, 나아가 혁명이 될 수도 있다. 시민의 집합행동은 이렇게 종교적으로 실현되고 발전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여 종교는 또 하나의 ‘기억의 정치’다. 아니 어느 매체보다 기억을 생생하게 보전하며, ‘때가 차면’ 어느 것 이상으로 폭발력을 갖는 혁명적 정치의 매체다.
그런데 2009년 봄의 전직 대통령의 죽음으로 인한 시민종교는 아무런 변혁의 계기도 되지 못했다. 광장은 소란스러웠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죽음에서 자기 구원의 카타르시스를 체감하는 데서 머문듯했다. 실제로 그의 장례식날 노제가 벌어진 광장에는 그의 영정사진들이 땅을 뒤덮고 있었지만, 그 즈음에 죽어간 많은 이들의 주검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여전히 망각의 대상일 뿐이었다. 한 사람의 죽음에서 자신의 죽음을 보고 성찰하려는 신앙의 틀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돌아보는 데까지 옮겨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그런 점에서 하나의 부정적 선례를 남겨주었다. 예수의 죽음을 기리면서 사람들은 자기의 죽음을 본다. 그리고 그 죽음들을 그의 죽음으로 환치시켰다. ‘죄 씻김’의 교리는 그런 해석체계를 만들어내었다. 한데 그이의 죽음을 기리는 집단적인 추모의 퍼포먼스인 미사는 거기에서 멈춘다. 그 죽음에서 자기의 죽음을 동일시하지만, 타인의 죽음, 혹은 다른 존재, 다른 것의 고통을 감정이입하지는 못한다. 대개의 그리스도교 신앙 양태는 그러했다. 요컨대 그리스도교의 실패는 어쩌면 오늘 우리의 광장의 실패를 예감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8월, 또 다른 죽음
8월 18일, 또 한 사람의 전직 대통령이 서거했다. 그 죽음은 타살도 자살도 아닌 자연사였다. 그 며칠 전 죽음이 임박한 그의 병실로 또 다른 전직 대통령이 방문했다. 그리고 그는 병실을 나와서 기자들에게 선포했다. 화해했다고. 한 사람은 심장박동기로 겨우 생의 시간을 지연시키는 상황이니 방문자가 말한 ‘화해’는 대화가 아닌 독백이다. 그 방문으로 자기의 원한이 해소됐다는 혹은 해소하기로 했다는 뜻이겠다. 아무튼 그의 화해 선언은 세간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진짜로 이 허망한 화해는 현실이 되었다. DJ의 죽음에 직면하면서, 먼저 정치인들이 ‘화해’를 얘기했고, 대중매체가 화해를 전했으며, 시민사회의 분노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현실에선 아무런 구체적인 형상물이 없는, 그리하여 추상적인 아름다움의 언술인 ‘화해’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공감대를 이루어낸 것이다.
다시 그리스도교 얘기를 해보자. 예수의 죽음에 직면해서 많은 사람들은 기력을 상실했다. 그런데 그를 안장한 무덤이 비어있다는 몇 명의 여자들의 목격담과 더불어서 그의 부활설이 유포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절망에서 일어섰다. 곧 ‘부활’이라는 말은 예수의 실천이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그것과 연관된 또 하나의 전승이 있다. ‘성령체험’이 그것이다. 부재하는 예수를 체험하는 사건을 초기 그리스도교는 ‘영의 체험’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 1~13절에서, 모처에 숨어서 부활한 예수를 고백하던 이들이 영을 받게 되자 제자들은 광장으로 나와서 ‘각기 다른 방언으로 사람들에게 말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전한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흩어져 있던 이들이 결속되었고, 새로운 사람들을 결속시키게 되었다는 줄거리다. 이 이야기 배후에는 다양하게 분화되어 때로 갈등하기도 하고 때로 분쟁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1세기 말의 「사도행전」 공동체 주변 그리스도 분파들의 분열과 갈등 상황이 암시되어 있다. ‘각기 다른 방언으로’는 ‘타인의 말로’라는 뜻이다. 즉 저자는 예수 분파들이 ‘따로 또 같이’의 연대의 틀로 엮이게 되는 사건을 성령체험으로 묘사함으로써, ‘화해’를 도모하는 것이다.
이렇게 화해는 다분히 모호한 공유지점을 서로 확인함으로써 수행된다. 어쩌면 DJ의 죽음은 그러한 화해를 위한 절묘한 조건을 갖는다. 그는 한편으로는 오랜 정치적 기득권을 누려온 하나의 상징적 인물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장례식 때에 고인의 부인 손을 부여잡고 통곡하는 모습에서 보듯, 세례자 요한과 예수처럼, 노무현의 등장을 위한 전제이고 징검돌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한편과 다른 한편의 공통부분에 존재하는 이인 것이다. 게다가 그의 죽음은 이제까지의 모든 논점의 지평인 한국이라는 영토를 넘어서는 전 세계적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시민종교는 그의 죽음에서 한국이라는 경계를 넘어서는 초월의 체험을 공유하게 된다. 이로써 화해는 사람들의 영혼 속으로 화려하게 파고든다.
아마도 광장의 지리한 갈등이 끝을 잃어버린 채 공전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끝을 갈망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그의 서거는, 그 서거로 인한 화해라는 ‘텅빈’ 기표는 lf상으로 복귀하고픈 시민사회적 갈망의 표현일 수 있다. 이렇게 시민종교는 죽음에서 부활로, 부활에서 성령체험으로 이어지는 시나리오를 갖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앞에서 언급한 한국적 시민종교의 문제적 특징을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적 시민종교의 형성은 2009년의 체험을 통해서 하나의 기억의 순환적 서사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기억의 공고화를 향한 하나의 기반이 마련되었음을 의미한다. 제도화되지 않았을 뿐 대안적 종교체험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그 체험의 이면에는, 그리스도교의 실패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듯이 보인다. 한 사람의 죽음에서 타인의 죽음을 읽지 못하는 이기적 자기애의 한 양상이 2009년 한국의 시민종교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기억의 비대칭성
기억은 언제나 비대칭적이다. 어떤 것은 더 생생하게 재현되어 생각과 행동에 끼어들기까지 하고, 다른 어떤 것은 아무런 반향도 일으키지 않는 무관심한 것의 일부로 사라져 버린다. 게다가 기억이 시간에 따라 비례하여, 링거액 떨어지듯 일정 양씩 소거되는 것도 아니니, 기억의 비대칭성은 늘 그때마다 해석의 대상이 된다. 왜 그것은 기억되었으며, 저것은 망각되었는지, 또 그 기억과 망각은 행위자의 생각과 행동에 어떻게 관여하고 있는지 등등.
이 책은 근년에 있었던 몇 건의 죽음들에 관한 사회적 기억의 비대칭성, 그것의 해석에 초점이 있다. 한국사회 전반을 들끓게 했던 전직 대통령의 자살은 이 물음의 직접적 계기다. 또한 그 전 해에 일어난 ‘용산의 죽검들’에 대한 사회적 망각은 기억의 비대칭성에 대한 우리의 물음을 촉발시켰다. 그리고 화해라는 ‘이상한’ 사회적 합의를 야기한 또 다른 전직 대통령의 죽음은 이 물음에 관한 우리의 섣부른 상상에 당혹감을 선사해 주었다. 이 책은 이러한 물음과 혼란에서 시작한다.
다양한 해석들을 제시하려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하지만 그 해석들 속에서 우리가 함께 공유했던 광장과 애도의 문제적 상황을 짚어보고 성찰하려는 것이 우리가 이 책에서 기획했던 것이다. 하여 이 책이 우리가 2009년에 경험한 비대칭적 기억의 양상이 우리를 퇴행화하는 계기가 되지 않도록 하는 하나의 레퍼런스가 되기를 바란다. □
- ‘벤힌놈 계곡’(힌놈의 아들 골짜기, Gai Ben-Hinnom) 또는 ‘힌놈 계곡’(Gai Hinnom)은 예루살렘의 서쪽에서 남쪽으로 1킬로 정도 이어지는 계곡인데, 이 계곡의 도벳에는 자식을 불태워 재물로 바치는 제단이 세워져 있었다. 이러한 관행은 군주제 시대 말기에 철폐되었는데, 그 이후 ‘가이헨놈’은 차차 일반명사화되어, 악마의 장소 혹은 지옥 같은 의미로 쓰였다. 이 단어는 후에 그리스어로 음역되어 ‘게헨나’(Gehenna)가 되는데, 예수의 말로 알려진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복음〉 10,28)에서 ‘지옥’이라고 번역된 단어의 그리스어가 바로 '게헨나'이다. [본문으로]
- 유다국의 인구는 5~6만 명을 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아하스의 아들인 히스기야 왕 때의 유적지를 보면 인구가 거의 12만 명에 이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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