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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고통의 현장에서 예수 찾기, 과연 가능한가

이 글은 [경향잡지] (2009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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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현장에서 예수 찾기, 과연 가능한가

 

얼마 전 의학계에서 최근 모색되고 있는 하나의 동향에 관해 들었다. 질병의 원인 제거에 관심을 가져온 전통적인 치료 방식보다는 환자의 고통 자체에 주목하는 연구와 임상이 새롭게 주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문제제기가 철학에서도 있었다. 철학이 인간의 고통에 대한 직접적인 문제의식을 회피하고 상아탑의 학문으로 남아 먼 곳에서만 고통을 관조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성이다. 하여 고통의 현상학에 주목하는 철학, 나아가 고통에 관한 철학적 임상학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또 사회학에서도 고통 자체를 사회학의 중심 과제로 삼으면서, 고통이 개인의 문제로 환원되어 해석되는 경향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고통의 사회학적 함의에 주목하는 새로운 과제가 학문적 의제로 떠오르고 있다. 나 또한, 성화된 고통이라고 할 수 있는 ‘고난’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 ‘고통’, 그 속에서 벌어지는 비루한 인간 현실 그 자체가 신학의 중심 과제임을 주장한 바 있다.

요즈음 양성장교육원에서 주관하는 가톨릭 수녀, 수사를 대상으로 하는 ‘현대사회와 교회’라는 제목의 강의를 하고 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강의의 즐거움에 나는 함빡 빠져 있다. 이 강의 역시 오늘 우리의 사회를 고통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데 중점을 두고 진행하는데, 특히 ‘감추어진 고통’에 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가령, 고등학교 중퇴가 최종학력인 비정규직 노동자 모씨는 회사에서 끊임없는 퇴출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게다가 허술한 외모에 소심한 성격과 어눌한 말투 등 자기 표현상의 열등함 탓에 동료직원들에게 얕보여 집단따돌림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데 그는 집에서는 성격이 돌변하여, 아내와 자식에게 폭행을 일삼는다. 이웃의 고발로 파출소로 연행되었던 그는 심문과정에서 횡설수설하고 극히 소심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여성단체 활동가는 그의 이중성이 고의라고 주장했는데, 실은 그 이중성은 의도된 행동으로만은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에게 심한 폭행을 당하며 성장했고, 학교에서도 ‘왕따’였다. 이런 지속적 체험은 아마도 그에게 극단의 소심함과 극단의 과도함이 겹쳐지는 이중성을 일상화시켰고, 여기에는 폭력의 피해자로서 성장하면서, 폭력의 가해자이기를 무의식적으로 선망하게 되는 ‘부적절한 모방’ 현상이 배후에 놓인 것으로 보인다. 대개가 그렇듯이 폭력의 가해자이자 피해자라는 이중성이 이 예외적 존재에게도 적용되고 있다.

아무튼 그는 고통당하는 자임에 분명하다. 한데 대개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표현하는 고통에 대한 반응이 그에게서는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 타인에게, 구체적으로 자기보다 약하고 자기에게 응징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아내와 어린 자식에게 자신의 고통을 전가하고 있다.

이 남자의 행동은 평범한 사람들의 가학성의 체계 속에서 자기 방어에 실패한 사람이 보이는 왜곡된 자기표현의 하나이다. 그는 자기보다 강한 이들로 인해 고통을 겪어왔고, 그것에 적절히 대응하기보다는 회피하면서 자기보다 약한 타자에게 자신의 고통을 전가하고 있다. 대소의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고통의 무의식적 전가는, 성화된 고통이 아닌, 보통사람들의 보통 고통이 작동하는 전형적 메커니즘이다.

나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수도자로서, 그리고 사목자로서 이에 대해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물었다. 아마도 이 강의의 참여한 수도자들 상당수는 이런 당황스러운 현실에 직면하면서 자신들이 이제껏 직간접으로 체험했던 여러 고통들을 연상해낸 듯하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악순환적 상황에 사목이 별로 주목하지도, 아니 전문적인 준비도 거의 되어 있지 않았다는 문제의식을 느끼게 된 듯하다. 실은 신학자로서, 그리고 목회자로서 내가 느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고, 대다수 개신교 교회들과 목회자들 역시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잠정적인 논점을 하나 제기해도 될 법하다. 개신교뿐 아니라 가톨릭교회들과 사목자들 대다수도 고통의 문제에 대해 신학적으로나 사목에 있어 ‘잘 준비’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세상엔 고통이 넘쳐나고, 더욱 확산되고 심화되는 추세에 있는데, 교회는 그러한 현상을 대면할 자세도 준비도 부족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최근, 앞서 말한 것처럼, 고통 그 자체를 주목하는 다양한 학문적 접근들이 모색되고 있지만,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그러한 의제를 신학화하려는 징후는 전혀 없다. ‘고통사목학’,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 신학교육의 가장 중요한 화두의 하나라고 제언하고 싶다. 여기에는 의학, 인류학, 사회학, 철학 등, 고통학을 발전시키고 있는 각 분과학문들과의 공동연구가 필요하고, 이를 통해 사건, 사고, 재앙의 현장에서 활약하는 고통전문 사목자들이 양성되어야 한다고 본다. 교회 또한 신자들에게 고통의 문제에 다가가는 신앙적 안목을 개발하게 하여, 선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할 것이다.

사건, 사고나 재앙이 일어났을 때 원인을 발견하고, 책임자를 색출하고, 재발 억제를 위한 제도 마련을 강구하는 식의, 이제까지 일반적으로 활용되어온 방식은 의도하지 않게 이 사태로 인한 고통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해서 희생자들은 종종 그러한 사태의 재발을 억제하기 위해 대안적으로 마련되는 위험관리체계(risk care system)의 도구로 취급되곤 했다. 어쩌면 이러한 상투적 위기관리 방식은 여전히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교회는, 사목자들은 그런 방식보다는 고통 그 자체를 중심으로 사건, 사고, 재앙을 대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고통에 초점을 두고 사태를 바라보고, 고통으로부터의 회복을 위한 최적의 프로그램을 발견하며 시행하는 선교 방식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