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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일치와 화해를 위한 가장 훌륭한 존경의 자리는 비판이다

[월간 사목정보] 2011년 3월호에 기고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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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치와 화해를 위한 가장 훌륭한 존경의 자리는 비판이다

 

 

지난해 말 현 정부의 4대강공사에 대한 정진석 추기경의 발언이 촉발한 논란은 아직 진행 중인 것 같다. 나 같은 외부자의 눈에는 그 논란의 풍경이 낯설다.

최고위직에 있는 이의 발언의 부적절성을 둘러싼 논란은 진부한 논쟁에 속한다. 대통령의 정치 행위에 대한 비판에 종종 참여하였고, 개신교의 어른들에 대한 비판에도 비교적 적극적이었으며, 심지어는 성서나 성직, 성례전, 교회 등의 권위에 관한 이른바 개신교적 해석에 공공연히 비판적 문제제기를 해 온 나로서는 추기경의 발언을 둘러싼 논란은 그다지 새롭지 않다.

그이의 발언에 대해 반대 진영과 찬성 진영이 형성되고, 각 진영이 활용할 수 있는 효과적인 담론의 공간을 통해서 상대 진영을 향해 비판을 가하는 것은 지극히 평범하고 필요한 일이다. 그것은 그 집단이 살아 있다는, 아직 자정 가능성에 열려 있다는 징후다. 그런 점에서 존경의 자리는 비판이다.

내 주변의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는 냉담자들이 여럿 있다. 그들은 몇 년째 거의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톨릭교회 안팎에서 벌어지는 교회에 관한 이러저러한 논의에 귀를 종긋 세우고 있다. 특히 이들은 정 추기경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들조차 추기경에 대한 자기와 같은 생각이 교회 내에서 담론화되고 있다는 것에 한편으로는 반가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놀라워하고, 나아가 우려와 충격을 받는다. 이런 모순적인 감정의 이유는 그 직을 맡은 이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직 자체에 대해서는 존경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존경의 자리인 것이다. 여전히 비판자들에게 그 직위, 그리고 그 종교에 관한 애정과 관심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냉담자들조차 말이다.

내가 보기엔, 바로 이것이 가톨릭교회의 가능성이고 저력이다. 냉담자들이 안티가톨릭으로 전화되지 않고 교회에 대한 존재론적 귀속의식을 여전히 갖고 있다는 것이다. 냉담신자들처럼 경계에 선 사람들은 극단적인 비판적 외부자가 될 가능성에 열려 있다. 개신교 신자였던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가 안티개신교주의자가 되었고, 한때 근본주의적 열혈 개신교도였던 나는 그 극단의 반대편의 있는 민중신학도가 되었다. 물론 가톨릭신자들 가운데도 그런 이가 없지는 않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이들 가운데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최근 가톨릭교회 내의 논란이 내게 낯선 것은 이런 흔한 일이 가톨릭에서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고, 냉담자들조차 가톨릭교회의 이 논란에 대해 우려와 충격을 받고 있다는 점에 있다. 바로 이 사실은 가톨릭교회가 기로에 서 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한국 개신교회도 기로에 서 있던 때가 있었다. 한데 개신교회들은 그 때를 기회로 활용해서 개혁하기보다는 더욱 위악적으로 행동했다. 결국 신자들의 대대적인 이탈이 있었다. 2005년 인구센서스에서 드러난 개신교 인구의 감소는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계기였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수많은 교회들은 교인수의 감소와 외부 시선의 따가움을 절실히 체감하고 있었다. 한데 교회들은 더욱 공격적인 포교에 열을 올렸고, 그런 만큼 배타성의 기치를 더욱 강화하였다. 바로 그 결과 대대적인 이탈뿐 아니라 이탈자들 가운데서 나타난 훨씬 적극적인 무신론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사실 무신론은 19세기 유럽의 담론이었다. 현대신학에서 무신론 대 유신론의 문제는 그리 날카롭지 않다. 리처드 도킨스의 책이 신학자들이나 심지어는 그리스도교권 밖의 지식인들에게서도 비판을 받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에도 유신론 대 무신론의 이분법적 틀에 기초해서 반기독교담론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근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될지언정, 오늘의 그리스도교 신학의 성찰에 대해서 무지하고, 나아가 20세기 이후 성찰적인 많은 그리스도교도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해서 그의 비판은 그리스도교의 성찰의 수준을 19세기로 되돌려놓은 진부함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도킨스의 책이 대대적으로 읽히고 담론화된 것은 개신교회의 모습이 바로 19세기 유럽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배타성을 보였던 것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현대 신학에 대해 한국의 개신교회가 눈과 귀를 닫아 놓은 결과다. 실은 한국사회의 낯익은 신심은 유신론 대 무신론의 논쟁과는 너무나 다르다. 개신교도들이 아무리 배타적으로 행동해도, 그들 자신도 이미 무수한 신들이 공존하는 세상에 자기도 모르게 얽혀 있다. 그러니 도킨스 같은 시대착오적 논의가 다른 어느 사회보다도 한국에서 더 맹렬하게 소비됐던 것이겠다.

나는 가톨릭교회가 이런 개신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한데 내 주위의 냉담자들 가운데 절대다수가 여성이다. 그들이 갖는 불만은 교회가 여성에 대해 성찰해온 시민사회의 감성과 이해의 속도보다 훨씬 뒤처져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성찰에 대한 논의에 대해 너무 닫혀 있다는 데 있다. 이와 같이 내부 논쟁의 결핍은 교회의 성찰을 더디게 하며, 많은 이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종종 듣는 말은 가톨릭교회가 개신교회의 성장주의를 모방하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데 개신교회의 성장이 성장주의의 산물만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였으면 좋겠다. 한국전쟁 직후 개신교 신자는 현저히 감소했는데, 박태선의 전도관 운동과 나운몽의 기도원운동이 상상할 수 없는 규모로 활성화된 것은 그들이 전후 보건의료체계가 바닥까지 무너져 내린 상황에서 신앙을 병치유의 동력으로 삼은 데서 비롯되었으며, 1970년대 대부흥이 가능하게 한 것은 국가가 발전의 희생자로 도구화한 대규모 이주민들에게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반면 그러한 성공을 성공지상주의로 해석하고 오늘 성공한 강남귀족들의 종교로 전락해 버린 개신교회는 복음을 종교교리로 대체해 버렸을 뿐이며, 사람들의 행복에 관한 일체의 논의에 눈과 귀를 닫아버렸다. 그런데 그러한 빗나간 개신교회의 성공주의를 모방하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가능성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보다는 오늘 한국사회의 다양한 고통에 함께 하는 교회, 그러한 문제제기를 경청하고 논쟁을 억압하지 않는 교회, 여기에 기로에 선 가톨릭교회의 장밋빛 꿈이 담겨 있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