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훅'에서 연재 중인 '나는 어떻게 쓰는가(3)'에 기고된 글(2011.4.19)
이 글들을 묶어서 [나는 어떻게 쓰는가 - 글로 먹고사는 13인의 글쓰기 노하우](씨네21북스, 2013)로 발간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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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는 ‘비평’이다, 또한 ‘비평되는’ 텍스트다
설교의 딜레마
기독교 출판물 가운데 스태디셀러 중 하나는 설교집 장르의 책이다. 전국의 목사들 거의 모두에게 설교는 가장 큰 부담거리의 하나인 탓이다. 대개의 담임목사들은 주일 예배를 절대로 남에게 양도하지 않는다. 그것은 담임목사의 철칙에 가깝다. 게다가 수요일 예배와 금요일 예배가 있다. 또한 매일 새벽에도 예배가 있고, 1년에 두 차례씩 교인들의 집을 방문하는 심방예배가 있으며, 그 외에 결혼식, 장례식 등 이런 저런 예배들이 일년 전체를 가득 채운다.
개신교에서 설교는 모든 예배의 하이라이트이니 빠뜨릴 수 없지만, 그 많은 예배를 일일이 준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해서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주일 예배 외에 다른 예배의 설교는 부목사나 전도사 등과 분담하기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설교 수가 너무 많다. 게다가 교회 행정, 교인 관리, 교회간 정치 등 목사에게 부여된 일은 생각보다 과중하다. 이런 일로 시달리다 보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러니 설교를 하려 해도 무엇을 해야 할지 난감함에 빠진다. 하여 많은 목사들은 원고 없이 설교를 하며, 그중 적지 않은 설교는 거의 즉석설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순발력에만 의존한다.
그래도 설교를 전혀 준비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것이 많은 목사들이 남의 설교집을 참조해야 하는 이유다. 여러 개를 펴 놓고,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내고 다른 데서 예화를 빌리며, 또 다른 데서 해석을 발췌한다. 이런 것들이 조합되어 한 편의 설교가 만들어지곤 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대개의 설교들은 내용이 그저 그렇다. 깊이는 말할 것도 없고 귀담아 들을 만한 내용도 찾아보기 힘들다. 상투적인 말들, 안 해도 그만인, 입에 발린 말들로 가득하다. 생각의 깊이가 배어 나오기는 매우 어렵다. 그것은 곰곰이 생각하고 삶을 성찰하는 시간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해서 훌륭한 설교를 하는 이들의 경우는 거의 예외 없이 설교 편수를 줄이고 기타 업무를 줄이는 ‘목회의 기술’을 발휘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한 달에 네 번은 해야 한다. 더구나 설교 내용이 좋기로 유명한 목사들의 경우는 교인들이 설교노트를 만들고, 녹음테이프나 녹화테이프를 구해다 반복해서 듣고 본다. 심지어 인터넷을 통해 무차별 대중에게 공개되곤 하니, 아무리 업무를 줄이고 설교 횟수를 줄여도 한주 내내, 아니 일년 내내, 시도 때도 없이 설교 생각에 정신이 스탠바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탄성을 절로 불러일으키는 빛나는 설교를 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정말로 대단한 필력과 사고력, 그리고 몸과 영혼이 지쳐도 정신의 기복이 남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다.
공적으로 글을 쓴 경력이 20년이 넘었어도 그이들 정도의 지력이나 필력이 따라붙지 못하는 나에게 한 달 네 번의 설교는 불가능에 가깝다. 목사로서 교회를 전담해본 8년의 시간이 있었지만, 그 때에도 보통 한 달에 3회 정도를 했고, 네 번을 했던 경우는 손에 꼽힌다. 더구나 목회를 그만 둔 지금은 한 달에 한 번꼴로 설교를 하는 셈이어서, 대개의 목회자들의 경험과 정신의 수고를 대신하는 글을 쓸 자격은 내게 없다. 다만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 살아온 세월이 20년이 넘은 덕에, 나름의 설교에 관한 관점도 생기고 나름의 스타일도 만들어졌으니, 설교쓰기에 관한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는 있을 것 같다.
수다 떨기로서의 ‘하늘뜻+나누기’
우선 내가 설교하는 교회 얘기를 해야겠다. 여기에서 나의 첫 설교가 1988년에 있었으니 20여년이 되는 동안 나의 설교관과 스타일이 형성된 토양이다. 그중 6년간은 목회 보조자였고, 8년간은 담임목회자였으며, 목사직을 사임한 이후 9년 동안은 교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있으면서 고정 설교자로서 한 달에 한 번 설교를 맡아 한다.
이 교회에서는 ‘설교’라는 말 대신에 ‘하늘뜻 나누기’라는 명칭을 붙였다. 이것은 나름의 신학적 주장을 담고 있다. 핵심은 ‘하늘뜻+나누기’라는 데 있다.
전통적인 견해는 ‘하늘뜻’은 ‘선포하기’ 혹은 ‘펴기’ 같은 말과 결합되어, ‘하늘뜻+선포하기’, ‘하늘뜻+펴기’이어야 한다. 여기서 ‘선포하다’, ‘펴다’라는 말이 시사하듯 ‘하늘뜻’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경로는 일방향적이고 하향적이다. 이때 선포자가 설교의 중심에 있음은 물론이다. 청중은 수동적으로 듣는 자다. 그이들에게 부여된 자율권은 그 선포된 것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한정된다. 일방향적, 하향적, 수직적인 하느님의 말은 절대불변의 것이다. 그 말의 뜻은 이미 결정된 채로 사람들에게 설교자를 통해 전해진다.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일지 거절할지 선택해야 한다.
해서 전통적인 설교학은 선포의 주체는 하느님이고, 선포자, 곧 설교자는 하느님의 말을 대언하는 자다. 해서 설교학적으로 다음과 같은 명제가 제기되었다. ‘설교자는 설교하는 순간 하느님의 말을 하는 것이다.’ 서양의 종교개혁기부터 정립된 관점으로, 설교자는 바로 이 설교의 순간 역할상 신을 대리한다.
반면 ‘나누기’와 결합된 ‘하늘뜻’은 사뭇 다른 방식으로 사람과 엮인다. ‘나눔’, 곧 수평적인 방식으로 신과 사람이 뜻으로 얽힌다는 얘기다. 또한 그 뜻은 미리 결정된 의미가 단지 선포되는 게 아니라, 나눔으로써 형성된다. 신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의 나눔, 곧 대화의 과정에서 ‘하늘뜻’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은 이 교회만의 독특한 설교 제도를 만들어냈다. 설교자의 설교가 끝나면서 예배는 곧바로 ‘대화나눔’으로 이어진다. 곧 이 교회의 ‘하늘뜻 나누기’는 ‘설교+대화나눔’으로 구성된다.
이것은 오랜 실험을 거치면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형성된 관행이다. 모두들 설교를 두고 바로 대화나눔을 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해서 예배를 마치고 토론을 하거나, 애초부터 집단설교를 하면서 토론을 하거나, 혹은 토론 주제를 놓고 난상토론을 하거나, ......, 이런 시도 저런 시도를 했다. 그러다 발견된 것이 ‘수다 떨기’였다. 주제를 두고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설교 속에서 발견된 ‘소재’를 두고 말꼬리를 이어가며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주제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다. 어떤 때는 설교자가 던진 주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다른 때는 설교에서 떠오른 말을 소재삼아 자기 얘기를 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맞장구를 치기도 하며, 또는 말이 이어지지 않으면, 자기가 느낀 것을 얘기하기도 한다. 형식과 내용에 대한 제약을 최소화하니 얘깃거리가 다양해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시간 동안 설교자의 말을 듣고, 또 다른 이가 하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며 자기 말을 한다. 때로 이야기를 독점하려는 이가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해서 하늘뜻나누기 전담 사회자가 생겼다. 예배 전체의 사회자와는 별도로 말이다. 그이의 역할을 특정인이 이야기를 독점하지 않도록 하고, 말이 끊길 때 말이 나오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한다. 사회자는 한 달 단위로 돌아가며 맡는다.
혹은 실험적인 예배의 기획에서 그것을 준비한 교인들이 아예 수다 떨기 좋은 공간으로 예배당 구조를 바꾸기도 했다. 일종의 카페를 만든 것이다. 몇 명이 둘러앉을 수 있게 책상을 배치하고, 책상 위에 음료와 다과를 놓고, 조용한 음악을 틀었다. 이럴 땐 설교자와 청중이라는 역할 분할 자체가 없어져버린다. 오히려 수다떨기를 위해 제기된 소재가 간단한 단어로, 혹은 노래로, 때로는 짧은 동영상으로 제공될 뿐이다. 또 다른 실험적 예배에서는 수다 떠는 대표자 몇이 나와 패널처럼 대화를 나누고, 청중이 대화 도처에서 끼어들기를 하며 이야기를 어어 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 모든 경우는 사람들 간의 이야기 나눔에서 하늘뜻이 서로에게 각기 나눠진다는 신앙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 첨언하면, 이 교회의 대화나눔 속에는 갈등도 포함된다. 그것은 종종 얼굴을 붉히는 것으로 이어지며, 어떤 경우는 설교자가 상처를 받고 더 이상 설교를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난감한 일이 벌어질 때 예상외로 교인들 중에 그런 난감함을 중개하고 갈등 당사자들의 상처를 봉합해주는 이들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어떤 이는 상처받은 이를 껴안아 주고 보듬는 경우도 있었다. 또 어떤 경우는 설교자의 말에 혼란과 상처를 입은 이가 사적으로 설교자를 찾아와 그 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것은 충분한 대화로 이어지면서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서로의 말을 들으면서 자기 생각의 폭을 넓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해서 이 교회의 ‘하늘뜻나누기’의 대화나눔은 예배 안에서만이 아니라, 예배가 끝난 이후에도 이어진다. 그러한 과정에서 하늘뜻이 서로에게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설교자의 말을 실마리 삼아 자유롭게 서로 수다 떨기를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 각자가 자기의 성찰에 이를 때 그것이 바로 ‘하늘뜻’이다. 이 교회가 말하는 설교의 신학에 의하면 말이다. ‘하늘뜻’은 내려오는 게 아니라, 남의 말을 듣는 ‘과정’이고, 그 말에 자기의 말을 섞는 ‘과정’이며, 그러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사람들 각자가 대화를 통해서 ‘뜻’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 곧 ‘하늘뜻’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늘뜻’의 ‘뜻’은 함석헌의 용어에 영향 받은 것이다. 그이는 역사 현실 속에 내재된 신의 형상을 ‘뜻’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역사의 운동과 함께 존재하며, 역사 속에서 사람들이 신을 발견하는 과정, 달리 말하면 각각의 역사라는 장(fields)에서 사람들이 신과 대화하는 과정이다. 매순간 역사가 달라질 때마다 뜻은 변모하며, 그 변모 속에는 신과 사람들의 만남이 다르게 구현된다. 뜻은 현실 너머에서 내려오는 고정불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역사 과정에서,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함께 나누면서 만들어내는 진리인 셈이다. 그것을 함석헌 선생은 역사에 구현된 하늘의 형상으로서의 ‘뜻’이라고 말했다. 바로 그러한 ‘뜻’의 의미가, 나의 생각에는, 이 교회의 ‘하늘뜻’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설교를 일방적인 말하기가 아니라 말하고 듣기, 그리고 듣고 말하기가 교차하는 과정이라고 하면, 더 이상 설교자는 특별한 사람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설교자가 설교하는 순간 신의 말을 대언한다거나 그이가 그 순간 신의 모상(image)이라거나 하는 주장이 전제되어야 할 필요도 없다.
일반적으로 설교학에서는 이런 주장을 보충하기 위해 설교자의 ‘소명’을 강조했다. 이때 소명은 주관적인 인식작용이다. 그것은 원리상 부름의 주체인 신과 부름의 대상인 특정인 사이에서 일어난 내밀한 관계 맺기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여 그것을 다시 다른 요소가 보충해야 한다. 바로 설교자의 ‘객관적 자격’이 부여되어야 하는 것이다. 개신교에서 설교는 목사의 고유 권한이다. 예외적 상황이 아닌 한 다른 이는 설교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교단마다 조금씩은 달라도 목사가 되려면 신학대학원을 나와야 하고, 목사 자격시험에 합격해야 하며, 유급의 목회 경력을 일정기간 거쳐야 하고, 마지막으로 그이를 목사로 받아들이는 교회의 ‘청빙’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논리상의 갈등이 있다. 소명이라는 주관적 인식작용과 목사가 되는 객관적 자격조건 사이에는 어떤 필연성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실재로는 후자가 전자를 대체하며, 그렇게 목사가 된 사람은 자기의 말이 설교하는 순간 신의 말이 된다는 신학적 주장을 의식하며 설교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를 내장한 논리 아닌 논리는 신학적 주장이라기보다는 ‘신학적 억지’에 가깝다.
반면 하늘뜻의 나눔으로서의 설교론은 특화된 자만이 맡아 하는 설교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린 설교를 지향한다. 누구든 설교자가 될 수 있다. 하여 내가 설교자로 참여하는 교회에서는 여러 명이 돌아가며 설교를 맡는다. 그중에는 목사도 있고 목사 아닌 이도 있으며, 종종 집단으로 하는 설교도 있다. 그리고 언제나 설교 후에는 대화나눔이 이어진다. 물론 실재로 설교자의 자격은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지만, 공동체가 동의할 만한 이가 설교자로 선임된다. 목사인지 여부가 아니라 대중이 그이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지 여부가 암묵적인 자격 조건이다.
이 교회는 3~5명의 주기를 달리하는 고정 설교자가 있으며(월별, 격월별, 4분기별 등), 그이들의 설교 주기는 담임목사가 예배위원회, 그리고 설교자들과 협의하여 조정한다. 그리고 고정 설교자 외에 간간이 설교자로 참여하는 이가 몇이 더 있고, 교인들의 조직이 자발적으로 기획하여 진행하는 설교도 횟수가 연 단위로 정해져 있는데, 이 경우 대개 집단설교나 퍼포먼스의 형식으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이 교회에서 설교는 비교적 잘 분담되어 있으며, 누구도 과중한 설교의 짐을 지고 있지 않다. 내가 보기엔 이것은 설교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다. 특출한 필력과 사고력을 가진 ‘슈퍼휴먼’이 아니어도, 설교자로서 충분히 생각하고 나름 깊게 연구할 틈을 통해 교인과 교인, 교인과 신의 대화나눔 과정에 실마리를 제공하는 설교의 말을 구성할 최소한의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설교쓰기에서 ‘지금 여기’
교회와 그 설교신학에 대해 얘기가 길었다. 이제 설교쓰기에 관해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눠보겠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설교란 그것이 연행(performance)되는 ‘현장의 언어’라는 점이다. 인터넷에 원고가 공개되고, 그 녹음 혹은 녹화한 것이 무차별 대중에게 바로 공개된다고 해도 원칙적으로 설교는 설교자와 대중이 마주보며 일어나는 그 현장의 것을 옮겨온 것이다. 물론 미국에서 시작된, 이른바 방송설교라는 현장 해체적 설교도 있지만, 그것은 아직까지 설교의 예외적 현상일 뿐이다.
설교 쓰기 과정에서부터 현장은 설교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일종의 ‘예비검열’(preparatory inspection)이 작동하는 것이다. 청중과 대화할 수 없는 언어를 선택하며 설교를 연행하는 이는 없다. 이때 예비검열자인 청중은 그 교회가 오랫동안 펼쳐오면서 제도화된 예배와 설교 신학 속에 응축되어 있다. 즉 교회가 공유하는 예배와 설교 신학은 설교자가 상상하는 청중의 이미지인 것이다. 특히 일반적인 교회의 관례를 따르지 않고 자기만의 경험을 녹이면서 제도를 구축해온 실험적 교회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내가 설교하는 교회도, 갖가지 실험을 하면서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나름의 관행을 정착시킨 예에 속한다. 이 관행 속에는 갖은 실험과 문제의식이 얽혀 있다. 그것은 이 교회가 발전시킨 예배와 설교 신학인 셈이다.
설교쓰기에서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다. 각 교회의 교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예배와 설교 신학 속에는 시공간에 대한 공통감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현장감각이겠다. 가장 간단하고 직접적인 시간의 문제는 얼마간 설교를 하느냐의 문제다. 교인들이 생각하는 적정한 시간보다 넘치면 너무 길고 모자라면 너무 허전하다. 매주 반복되는 설교를 통해 교인들은 적정시간을 몸에 간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설교의 내용을 가장 효과적으로 기억하는 그 교회 나름의 시간감각인 것이다.
이것은 글쓰기의 분량을 결정하는 중요한 시금석이다. 내가 설교하는 교회의 경우 30분 설교와 30분 토론이 적정시간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데, 거기에 알맞은 나의 글의 분량은 200자 원고지 23매 정도다. 그만큼의 분량 속에 글이 구성되도록 생각을 배분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설교자의 말의 속도와 스타일에 따라 그 분량은 달라진다. 또 가장 간단한 공간의 문제는 설교와 대화나눔이 연행되는 장소에 관한 것이다. 나의 경우 적정한 공간은 둘러앉았을 때 각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 반응을 살필 수 있을 정도다. 하여 나의 설교신학적 관점에서 하늘뜻나눔으로서의 설교는 ‘작은교회’를 필요로 한다.
시공간에 관한 가장 복잡한 문제는 ‘지금’과 ‘여기’의 해석에 관한 것이다. 교인들이 공지하고 있는 구체적 사건에서 출발하며, 그 사건에 관한 교인들의 이해의 틀, 혹은 교인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회 일반적인 이해의 틀에서 제기할 논점을 결정한다. 그리고 그 사건을 좀 더 광역의 시공간 속에서 다시 생각해본다. 즉 ‘지금 여기’의 사건을 하나의 국부적 사건이 아니라 보다 넓은 사회적 역사적 맥락과 연관시켜 그 사건에 관한 종전의 생각을 더욱 깊게 발전시킨다. 하여 여기에서 교인들에게 일반적인 이해의 틀을 넘어서서 생각할 수 있는 대화의 실마리를 제기한다. 요컨대 ‘지금’과 ‘여기’에 대한 해석은 설교의 출발점이고 또 종착점이다. ‘지금’과 ‘여기’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하고, ‘지금’과 ‘여기’에 대한 성찰에서 끝나는 것이다.
다음은 ‘지금 여기’에 대한 문제의식과 성찰에 관한 설교의 한 사례로, 나의 설교 중에서 퍼뜩 떠오르는 것 하나를 선택했다. 선택하고 나서 이 글을 쓰는 중에 확인해보니 이 설교는 수련회 때에 다른 교회와 연합하여 나눈 예배의 설교인 탓에 대화나눔이 생략된 것이었다. 낭패감에 다른 설교로 이 글을 다시 쓸까 했으나, 그냥 진행하기로 했다. 왜냐면 그날 밤 여러 사람과 길게 얘기를 나누었으니, 사실상은 하늘뜻나누기의 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독주에 제동을 건 시민의 승리.’ 이번 선거 결과를 놓고 많은 이들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저 역시, 대반전의 스펙터클을 통해 드러난 선거 결과에 고무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 천안함의 정치, 과학주의의 형식을 빌려 전 세계를 향해 타전된 북한 테러리즘에 대한 폭로의 정치가 뜻밖에도 한국의 시민사회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선거 때마다 등장했던 이른바 ‘북풍’은 무력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의 해석에 의하면, 정부가 주도한 천안함의 과학주의적 네러티브가 신냉전주의로 귀결되는 것에 시민사회가 주저한 것이라고 합니다.
2010년 5월 13일에 발생했던 천안함 침몰사건과 6.2지방선거 직후에 있었던 설교의 한 부분이다(<욕망의 습격>. 2010.6.13). 이 설교의 출발점이 된 ‘지금 여기’는 천안함 사건에도 불구하고 북풍이 부는 대신 정부, 여당에게 지방선거에서 치명적인 실패를 안겨준 성숙한 시민정신에 많은 이들이 고무되어 있던 상황 인식과 관련이 있다. 그런 사정은 교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인식이라는 시공간적 좌표가 바로 이 설교의 출발점인 것이다.
시민사회가 선거를 통해 보여준 것은 MB 정부의 토건주의적 행보에 제동을 건 것이 아니라, 신냉전주의적 정치의 호전성이 담고 있는 정치적 불안에 대한 반대인지도 모릅니다. 혹은 정부의 일방적 토건주의 정치가 오히려 더 불안을 야기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대인지도 모릅니다.
해서 나는 MB 정부의 토건주의에 대한 우려 못지않게 우리 자신의 욕망 분출의 전략에 대해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욕망을 절제하는 삶을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MB의 토건주의를 좌초시키는 데 성공할지라도 우리는 또 다른 ‘MB’를 불러오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같은 설교의 맺음부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6.2지방선거의 결과는 ‘성숙한 시민정신’ 덕이 아니라 ‘시민의 넘치는 욕망’ 탓일 수 있다는 문제제기에 있다. 소비사회가 도래하면서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시민의 게걸스런 자산 축적의 욕망이, 그리고 그러한 삶의 전략이 과하게 고조되고 있는 시기에 천안함 사건이 발생했다. 더욱이 지구화의 광폭한 태풍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치열하게 욕망의 게임에 몰두하게 만들고 있던 시기다. 그런데 정부가 담론화하던 천안함 사건에 관한 해석들은 전쟁의 위기의식을 한층 고취시켰다. 이것은 주가를 떨어뜨리고 부동산 경기를 침체하게 하고 국제무역에서 좋지 않은 징후로 해석될 수 있었다. 시민사회는 그렇게 이해했다. 즉 정부와 여당은 천안함 사건을 위기담론으로 해석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자 했는데, 시민사회는 그것에서 자신의 이익이 침해될 수 있다는 것에 불만을 품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선거에서 여당에 반대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인 것은, 이 선거의 민심이 4대강 사업 같은 정부의 토건주의 정치를 반대하게 하는 동력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에 있다. 교회가 지향하는 하느님나라의 질서에 반하는, 땅을 착취하고 농민과 서민의 건강한 삶을 유린하는 자본 친화적인 MB 정부의 토건주의 정책이 이번 선거로 그다지 제동이 걸릴 것 같지 않다는 문제제기다. 하여 너무 낙관적인 마음으로 ‘지금 여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좀 더 냉철하게 사태를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설교 후 ‘지금 여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관한 격렬한 토론을 낳았다. 선거결과를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선거행위가 이 설교에서 모욕을 당했다는 느낌을 받았던 모양이다. 반대로 다른 이들은 설교의 주장에 공감했다. 그이 중에 한 사람이 부동산에 관한 사람들의 욕망이 어떤지에 대해 자기의 기억을 풀어놓았다. 그러자 욕망에 관한 얘기가 꽃을 피웠고, 그 욕망을 어떻게 절제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생각을 나눴다. 거기에는 무소유를 주장하는 스님의 책 얘기도 나왔고, 동양고전에 관한 얘기를 꺼낸 이도 있었다. 또 예수에 관한 생각을 펴는 이도 있었다.
하여 설교자의 생각을 사람들이 지지하든 않든, 이 설교는 하나의 생각의 실마리가 되어, ‘지금’과 ‘여기’를 보다 냉철하게 생각하고 성찰하게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에 관한 사회의 일반적인 이해의 틀에서부터 교인들 각자가 품은 자기 자신의 욕망까지 되돌아보면서 이 사건에 관한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설교쓰기에서 ‘성서 읽기’
한편 이 설교의 ‘지금 여기’에 대한 문제의식과 성찰 사이에는 ‘성서 읽기’가 있다. 시공간에 대한 이해가 설교에서 특별히 고려해야 하는 첫 번째라면, 성서 읽기는 두 번째 요소다.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적 이해가 현재라면, 성서는 ‘과거의 텍스트’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를 동원하는 방식, 그것이 설교의 중요한 형식적 틀이다. 즉 설교는 과거를 ‘회상’함으로써 현재(‘지금 여기’)를 다르게 바라보고 성찰에 이르게 안내하는 데 목적을 둔 텍스트다.
위의 설교로 돌아가 보자. 생각의 실마리로 선택한 성서 구절은 〈창세기〉 6,2이다.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이것은 기원전 3세기에 널리 회자된 묵시적 구문의 하나인데, 5개 묵시록의 묶음집인 《에녹1서》에 수록된 〈파수꾼의 책〉에서는 이 수수께끼의 실마리가 들어 있다. ‘하느님의 아들들’은 ‘타락한 천사’라고. 다시 이 설교의 한 부분을 인용해보자.
한데 그것에 제동을 걸 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타락한 천사 아사엘은 심판을 받지만, 그 종말을 되돌리게 할 이는 부재합니다. 어느 인간도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천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니 신조차도 불가능합니다. 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난 재앙 이후 역사를 다시 시작하는 것뿐입니다. 욕망의 침입은, 그 절정에 이르면 이렇게 환원 불가능한 파멸로 인간을 몰아간다는 것, 이것이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시대, 그 욕망의 질주 시대를 맞아 「파수꾼의 책」을 저술한 한 묵시가의 문명비평적 고언(苦言)입니다.
타락한 천사들이 인간에게 신의 비밀을 발설하였다. 가령, 아사엘은 야금술을 가르쳤다. 그것은 문명을 낳았고, 그 결과 제국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 식민지 사회에서 형성된 묵시록들의 문명인식의 한 단면이다. 발전된 문명의 추동자인 제국의 치하에서 식민지인 팔레스티나는 적지 않은 발전을 이룩했다. 물론 그것은 ‘더 많은’ 땅을 병합한 지주들과 그들의 하수인인 토지관리인(청지기), 그리고 몰락의 위기에 놓인 농민들과 이미 몰락하여 떠돌이가 되어버린 이들로 사회적 계층 분화를 심화시켰고, 성장의 꿈에 부푼 이들의 향락과 몰락의 나락에 떨어진 이들의 비탄이 겹쳐지는 사회를 낳았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한 묵시가는 부풀려진 욕망, 그 욕망의 습격으로 환각에 빠진 영혼들의 파멸을 상상한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6,2의 구문 속에 담긴 종말론적 비판인 것이다.
이와 같이 성서는 ‘지금 여기’에서의 문제의식과 성찰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키며, 그 사이를 괜한 낙관으로 메우는 대신 문명에 대한 종말의 위기의식으로 채워 넣는다. 천안함 사건이 6.2선거에서 북풍으로 귀결되지 않고 오히려 정부와 여당에게 패배를 안겨준 것은, 시민정신의 발로가 아니라 소비사회를 사는 우리 모두가 탐닉하고 있는 욕망의 경제학 탓이라고, 그런데 이것은 우리 모두의 파멸을 부르고 있다고 말이다.
예언 혹은 비평으로서 설교쓰기
여기서 우리는 설교에서 고려해야 하는 세 번째 요소에 이른다. 현장의 대중에게 던지는 논점이다. 논점은 청중에게 불편한 진실 혹은 낯선 진실을 가지고 설득하려 할 때 형성되곤 한다. 물론 모든 설교가, 언제 어디서나 이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위로가 필요하고 때로 슬픔을 공감하거나 분노를 공유해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많은 설교는 이렇게 사람들에게 낯설거나 불편한 진실에 생각이 헛갈리게 하고 때로 반감을 불러일으키게 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당연한 생각의 코드를 교란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해석은 하나의 자명한 진실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각의 틀도 가능하다는 다중의 현실에 직면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설교의 말/글은 신학적으로 ‘예언’이며 문예학적으로 ‘비평’이다.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말하되, 그 사건에 대해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하는 스토리라인을 빗대면서, 그 담론에서 말하고 있지 않은 말을 찾아내고 또 말하고 있는 은폐된 소리를 들춰낸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이 생각을 발전시키고 성찰에 이르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언 또는 비평으로서의 설교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설교를 다른 점에서 불편해 한다. 그것은 설교가 예언이고 비평이어서가 아니라, 뜬금없는 소리이거나 아무 의미 없는 소리로서, 현장도 없고 진정성도 없는 공허한 소리로만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기보다 생각을 지우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화 중에 “너 설교하니”라는 말은 아무런 애정도 진실도 담기지 않는 ‘훈장짓’ 하는 말을 뜻한다. 실재로 많은 설교가 그렇다.
일차적인 책임은 목사들에게 있겠다. 동시에 그러한 설교 말을 공명하는 교회와 교인에게도 책임이 있다. 이러한 나쁜 관행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 가지 방안이 있다. 그것은 ‘설교가 비평인 것처럼 설교도 비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알 고 있는, 한국교회가 개혁될 수 있는 한 가지 방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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