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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낯설음을 배제하는 근대, 낯설음을 증오하는 교회

이 글은 [연세대학원신문](2001년 말쯤)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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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음을 배제하는 근대, 낯설음을 증오하는 교회

 

 

전통으로부터의 단절이라는 근대성의 기조는 대략 17세기 어간부터 본격화된 서구 사회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반영한다. 그런데 비서구 사회의 근대화는 이러한 서구 근대를 모방함으로써 자신의 전통을 넘어서고자 했다. 거칠게 말하면, 서구 근대로의 맥락화 과정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물론 서구와는 다른 근대, 아니 근대을 낳았다.(‘서구 근대로의 길이 하나가 아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한국 근대는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을 띠며 전개되어 왔는가? 이 문제를 논하는 데서 그리스도교의 선교 역사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근대가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의 조선 진입과 더불어 출발했다는 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한국의 근대화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개입의 양상에서 적나라하게 밝혀진다.

근대가 (종교)공동체에서 독립된 개인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그런 개인이 만들어지는 근대적 주체의 형성사라고 한다면, 한국의 근대는 유교공동체로부터 독립된 주체의 구성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개신교 선교의 대원칙인 정교분리신앙은 그리스도교 대중의 내면 속에 거대한 신앙 세계의 일부로서의 주체를 형상화함으로써, 유교적 주체관과는 구별되는 입지를 구축했던 것이다. 이로써 그리스도교 대중은 더 이상 유교 선비의 국가관 아래 예속된 노예적 대상이 아니라, 왕의 나라보다 우월한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자율적 주체가 되었던 것이다. 이때 하느님의 나라는 문명화된 서양, 구체적으로는 한국 개신교의 대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국을 향한 선망 의식과 중첩되었다. 요컨대 그리스도교 신앙은 서구, 특히 미국을 욕망의 대상으로 하는 의식의 식민화장치로서 기능하였다.

이러한 근대적 주체화의 또 하나의 장치로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를 떠올릴 수 있다. 그것은 유교적 공동체를 대체하는 대중의 주체화 양식이지만, 동구적 근대를 선망하게 하는 식민화의 장치이기도 했다. 물론 마르크스주의가 부르주아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그리스도교적 주체화보다는 훨씬 더 민중주의적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두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아무튼 이 두 주체화 양식은 한국에서도 예외 없이 충돌하였다유럽과는 양상이 상당히 달랐지만. 소설 손님이 재현하고 있는 바, 그리스도인에 의한 신천 양민 학살은 이러한 대결이 얼마나 부정적으로 구현되었는지에 대한 하나의 예시다.

저발전의 근대화가 늘상 그렇듯이 선망 의식으로 가득 찬 광적인 모방 의식은 근대성의 근본주의적수용 양상을 낳았다. 결국 이 두 손님(마마)의 대결은 분단으로 귀결되었고, 또한 분단을 고착화시켰다.

미군정기 3년을 거치면서 남한 지역의 반공주의적 정부는 일제의 과대 형성된 국가기구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일제 시대의 관료와 경찰은 물론이고, 동장과 학교 교사, 그리고 성직자 등 일제의 다양한 협력자들(collaborators)이 남한 정부의 75%를 차지하였다. 한데 이들 협력자들과 미군정 당국을 중개한 자가 바로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었다. 이 사실은 한국 근대를 이해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데, 특히 한국 근대화 전략의 가장 주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주의적 발전전략은 바로 이 과도한 국가를 전제하지 않으면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박정희 정부는 그리스도교의 근본주의적 반공주의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주로 미국의 대부흥 운동의 후예들인 선교사들에 의해 세례받은 한국 그리스도교의 주류는 강렬한 선악 이분법을 신앙적 주체 속에 주사注射시켰고, 선의 편에 미국을, 그리고 악의 편에 소련과 북한을 투사했다.

아무튼 한국 근대화의 국가주의적 발전전략은 압축적인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것은 범사회적인 역량을 총동원함으로써 가능했다. 국가의 동원 전략의 하나가 반공주의이고, 교회가 그러한 반공주의의 보루임은 주지한 대로다. 그것은 최근 한 언론인이 반공주의 최후의 보루라는 표현으로 교회를 선동하고 있는 데서 다시 한 번 극적으로 표현되었다. 한편 또 다른 동원의 전략으로 탈빈곤의 이데올로기를 들 수 있다. 그것은 정부에 의해 탈전통화로서 선전되었고, 농민의 도시화의 물결로 이어졌다. 여기서도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맹활약을 보게 된다.

잘 살 수 있으리라는 꿈 하나만 가지고 조상의 얼이 깃든 땅을 떠나도록 선동된 이농자 대중. 그러나 정부는 이들에게 아무런 보장도 해주지 않았다. 해서 저임금의 대규모 산업예비군이 양산되었으니, 무보장이 오히려 국가의 전략인 셈이다. 이때 교회는 황무지 같은 도시의 환경 속에서 위기에 처한 대중의 대안적 안착지를 자임하였다. 그것은 탈빈곤의 담론과 서구에 대한 선망 의식이 절묘하게 얽히면서 나타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탈전통화에 공모한 이농민들에게 교회의 몰전통주의적 태도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결국 한국 근대화 시기 교회의 유래 없는 성장은, 바로 대책 없이 도시로 동원된 이농자들이 교회로 회수된 결과였다.

요컨대 한국 그리스도교는 한국의 국가주의적 근대의 주된 주체화 양식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한국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의 승리주의(triumphalism)적 선교 태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한국의 성장 지상주의 발전 전략과 담론적 등가를 이룬다. 승리주의란 교회의 성장을 하느님 나라의 성장으로 직결시킴으로써, 성장이라는 목표를 위해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려는 신앙적 태도를 가리킨다. 그것은 교회의 외부를 신앙적으로 주변화시켜야만 한다. 그리하여 주변화된 대상은 자신의 과거 존재방식과의 단절 선언 그리고 교회 제도에의 순종 선언에 다름 아닌 회심을 하든가, 아니면 영원한 무관심의 대상으로 전락되고 만다.

이러한 승리주의는 신앙을 일종의 선교 마케팅 활동으로 대체하는 셈이 되었다. 종교 생활은 더 이상 삶의 성찰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성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되었고, 그것은 신앙 권력으로 교환되었다. 신앙은 상징 권력을 얻기 위한 일종의 화폐적 거래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신앙은 자본주의적인 교환 관계를 일상 속으로 끌어들이는 장치로서 작동하였고, 일상 속에서 신앙의 시장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본주의적 시장을 일상에까지 확장하는 중요한 장치의 하나로 전락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한국 근대를 형성하는 데 관여된 교회의 역할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약술하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과도한 국가주의에 포획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주체를 생산하는 기제가 되었고, 승리주의라는 천민적 시장 자본주의적 대응물에 불과한 비호혜적 개인을 낳는 주체화 양식으로 작동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낯설음을 배제하는 한국 근대에 맞물려, 낯설음을 증오하는 한국 교회의 자화상이다. 바로 여기에 21세기, 한국 근대의 새 지평을 마련해야 하는 우리의 신앙적 과제가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