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예수 담론과 교회주의 비판_신학사상 116(2002 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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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예수’ 담론과 교회주의 비판
왜 ‘역사의 예수’인가?
1950 후반에서 60년대 전반 정도를 제외하면, 20세기 내내 연구사적으로 죽은 분야로 취급되어왔던 예수에 관한 역사적 연구가 1980년대 후반 이후 영·미권을 중심으로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그것은 양적인 현상만은 아니다. 금세기를 대표할만한 위대한 저작들이 최근 십여 년 간에 저술되었다. 1 우리에게도 이미 익숙해진 ‘예수 르네상스’라는 용어는 바로 이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행히, 열악한 우리의 신학 풍토에도 불구하고, 주요 저작에 속하는 연구서들이 상당수 번역 출간되었다. 2 뿐만 아니라, 동향을 소개하는 논문이나 저술의 수가 퍽 많은 편이다. 3 부분적이지만 몇몇 인문·사회과학 전문지들이 이 새로운 현상을 다루기도 했는데, 근간에 학문간 교류가 거의 없던, 고립된 한국 신학계로선 고무적인 현상이라 하겠다. 4 또 이러한 연구를 단순히 소개한다기보다는, 그 연구사적 맥락을 짚어보고 우리의 신학적 문제의식 속에 재맥락화하려는 시도들도 있다. 5 그밖에 ‘역사의 예수’ 텍스트에 관한 독창적 방법 적용과 해석을 다룬 주목할 만한 저술도 있다. 6 무엇보다도 이 새로운 연구 기조를 밑바탕에 깔고 있는 예수 논의가 선풍적인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범사회적으로 신학적인 비판적 인식을 고조시켰다는 점은 한국 신학계의 중요한 성과라고 아니할 수 없다. 7
한마디로, 영·미 지역에서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역사의 예수’는 부활하고 있다. 특히 ‘예수 르네상스’는 방법론에서 학제간 연구를 통해 과거의 한계를 뛰어넘었으며, 해석에서 많은 과거의 연구사적 전제들을 뒤엎었다.
그런데 내가 이 글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최근의 ‘역사의 예수’ 연구가 방법론이나 해석에서 이룬 학술사적 개가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여러 글에서 많이 다루어진 바 있고, 나 자신도 이미 여러 글에서 논평한 뒤이니 더 말한다면 동어 반복에 불과하다. 반면에 예수에 관한 역사적 연구가 필요한 이유에 관한 논의는 내가 보기엔 여전히 매우 빈약한 형편이다. 여기서 강조점은 ‘역사의’(historical)라는 수사어에 있다. 다른 양식의 예수론이 아니고 ‘역사의 예수’이어야 하는 필연성은 어디어서 오는가의 문제다. 물론 이런 빈약함은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서구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역사적 연구를 통해서 예수에 관한 사실에 보다 근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견해는―내가 보기에는 대다수의 연구자들이 공유하는 관점인 듯 한데―역사에 관한 너무나 소박한 견해에 불과하다. 그것은 역사학이 하나의 근대적 학문으로 등장하던 시기이자 예수에 관한 역사적 연구가 시작된 무렵인 18, 19세기 연구자들의 역사 인식과 별반 차이가 없다. 과거 사실을 그대로 재현해 낼 수 있다는 믿음 아래서 그 사실을 ‘있었던 그대로’ 재현해 내는 데 모든 학문적 가치를 두었던 순박한 역사관이다. 8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 Carr)는 ‘과거의 사실’(fact of the past)과 ‘과거에 관한 사실’(fact about the past) 그리고 ‘역사의 사실’(historical fact)을 구분함으로써, 과거와 현재 사이의 역사학적 긴장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주장하는 바는,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에 접근하기 위해, 사료에 기록된 사실인 ‘과거에 관한 사실’을 재료로 삼아 연구하여 역사가 자신에 의해 재현된 ‘역사의 사실’을 구성해낸다는 것이다. 9 여기서 ‘역사의 사실’은 역사가의 당대적 상상력의 개입에 의해 재현된 또 하나의 ‘과거에 관한 사실’인 셈이다. 그리하여 그에게서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대화’의 산물이 되는 것이다.
예수 연구사에서 이러한 긴장은 ‘역사의 예수’ 대 ‘케뤼그마의 그리스도’라는 이항 대립적 논제를 통해 이미 오래 전부터 제기된 바 있다. 전자가 과거의 사실에 초점이 있다면 후자는 그것의 현재화를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와 (예수의 현재화의 주체로서의) 교회 사이에 예수 이해, 즉 예수 자신의 스스로에 대한 이해와 교회의 예수 이해 사이에는 ‘인식론적 단절’(epistemological berak)이 있었다는 것이다.
근대의 예수 역사학이 교회의 해석을 넘어 역사의 예수를 조명한다는 것은 이러한 인식론적 단절의 상황 속으로 개입해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시간의 방향에 거슬러서 케뤼그마적으로 해석되지 않은 예수를 조명하려 한다. 그것은 교회 이전으로 돌아가 ‘교회화된 예수가 아닌’ ‘날 것 상태의 예수’를 찾아내려 하는 것이다. 요컨대 ‘예수 역사학’은 의도했건 아니건 ‘반교회주의’적 기조를 담고 있다.
앞서도 언급했거니와, 많은 예수 연구자들은 이러한 역사적 질문을 통해서 ‘교회의 예수’(케뤼그마화된 그리스도)가 아닌, 실제로 존재했던 예수(real Jesus)를 ‘그 모습 그대로’ 찾아내려 했다. 바로 여기에서 ‘역사의’라는 수사어의 의미심장함이 있다. 교회 중심적 세계관이 사실의 질서를 구성하던 시절, 즉 교회의 프리즘을 통해 세계가 이해되던 시절, 바로 그것을 넘어서 세계를 읽고자 했던 담론이 바로 역사였다. 그래서 역사라는 학문은 18, 19세기에 과학적 담론으로서의 외양을 띠었던 것이다. 요컨대 교회의 진리 독점에 대한 비판의 기조가 ‘역사의 예수’ 담론에 함축되어 있다. 10 그것은 교회주의적 인식론의 극복이라는 근대적 세계관에 입각한 역사가의 현재 의식이 그의 역사 서술 작업에 은연중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의미한다.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가 말한, 18, 19세기 예수 연구자들은 바로 자신의 세계관을 예수에 투영하려 했다는 평가 11는 ‘역사의 예수’ 연구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의 산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상에서 나는 ‘역사’라는 담론 형식에는 역사가의―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상상력이 관여되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려 하였다. 그리고 ‘역사의 예수’ 담론 주위에는 교회 ‘안 대 밖’(inside vs. outside)이라는 근대성의 갈등 양상이 함축되어 있음을 말하고자 했다. 여기서 ‘교회 안’이라는 것은 ‘콘스탄니누스 이후’의 그리스도교적 지향인 교회 중심주의, 즉 교회를 팽창하여 전 세계를 교회화해야 한다는 강박증을 담은 이른바 ‘교회 제국주의 신앙’을 함의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근대가 불가피하게 불러들인 다원성의 문제와 항상 긴장 관계를 이루기 마련이다. 요컨대 근대 사회에서 교회를 둘러싼 가장 중요한 논점의 하나는 교회 중심주의 대 세속주의의 문제인 것이다. ‘역사의 예수’ 담론을 둘러싼 연구자들 간의 논쟁은 성서학이라는 학문 분과에서 벌어진 ‘안과 밖’의 전쟁인 셈이다. 하지만 ‘왜 하필 역사인가’라는 우리의 질문처럼, ‘역사’라는 담론 형식은 다른 담론 형식을 둘러싼 논전과는 다른 양상도 지닌다. 바로 이 점이 우리의 관심이다.
나는 이 글에서 최근의 ‘역사의 예수’ 연구가 담고 있는 역사적 문제 설정에 대한 비판적 반성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교회 안과 밖의 예수 담론 양식을 선별적으로 다뤄보고자 한다. 이 두 논점은 예수 담론이 어떤 화두와 관련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며, 나아가 ‘역사의 예수’ 논의가 이들과 어떤 맥락으로 연관되는지를 시사하고 있다.
교회 안의 예수, 교회 밖의 예수
교회 안의 예수
교회의 예수 해석은 ‘교회의 신앙 제도’ 속에 응축되어 있다. 여기서 교회 같은 신앙 제도를 포함한 ‘(사회)제도’(social-institution)란 구조와 행위자 사이에서 양자의 관계 양식으로, 구조(structure)는 제도를 통해서 행위자(aqgents)의 선택을 강제 또는 유인하며, 행위자는 제도를 통해서 구조를 재생산 또는 변형한다. 12 이때 제도는 비단 물리적 기구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관습·습관·합리적 행동 등 일상적이고 반복·지속성을 지닌 행위 및 인지 양식까지도 포함한다. 13 그리하여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의 (인지 및―인용자) 행동 양식의 틀을 제공해줌으로써 불확실성을 제거해주는” 14 일종의 ‘친숙함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동시에 낯설음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를 낳는 인지 및 행위의 장치이기도 한다.
나는 교회의 신앙 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세 요소로 ‘직제’, ‘예전’, ‘교리 체계’(정전과 신조를 포함하는)에 주목한다. 물론 이 세 요소는 예수를 상징적 중심으로 설정함으로써 비로소 작동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 제도의 이 세 요소는 서로를 조건짓고 강화한다는 점이다. 가령, 교회(의 직업적) 봉직자 담론은 그리스도교 발전 초기부터 ‘올바른 가르침’을 강조하는 이레네우스와 ‘성례전의 유효한 집행’을 강조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전통에 따라 전개되었으며, 이는 각기 개신교와 가톨릭에 의해 승계되어 각기 한 편을 보다 강조하는 근대 교회의 신앙 제도의 계보를 이루었다. 15
직제와 관련해서는 예수에 의해 가르침과 악령 추방의 권한을 위임받은 공동체의 엘리트가 강조된다. 에두아르트 슈바이처(E. Schweizer)가 분류한 교회의 직제화에 대한 세 유형 16 가운데 다양한 은사들의 수평적 조직화를 강조한 ‘바울적 유형’은 직제화에도 불구하고 평등 원리가 훼손되지 않는 교회를 이념형으로 설정한다. 마르틴 루터의 ‘만인사제론’은 아마도 이러한 전통에 기반한 하나의 실례일 것이다. 그러나 수평적 조직화는 공동체를 위한 특정한 지도력(은사)을 행사하는 직위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개방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또한 그것이 은사를 통해 하사되는 것인 한, 그러한 직위를 행사하는 자가 되는 것은 예측 가능한 일이 아니다. 한데 제도화는, 위에서 말했듯이, 일상적 선택에서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직제화는 특정 직제에 도달하는 과정이 공동체 성원 모두에게 예측 가능한 경로로 구성되도록 전개되며, 공동체의 엘리트는 자신의 은사를 준항구적으로 수행하는 자가 된다. 그러므로 직제화는 항상 위계적 속성을 띠기 마련이다.
직제화는 봉직의 위계적 성격에 따라 하위의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하는’ 언어, 의복, 상징물 등을 창안해낸다. 보다 직제화가 강한 공동체일수록 이러한 요소들이 더욱 발전하기 마련이다. 아무튼 이것이 공동체에 의해서 일상적으로 수용되는 과정에서 공동체 구성원은 이중의 배타성을 강화하게 된다. 하나는 이러한 제도화 내부의 사람들에게 엘리트와 대중을 구별짓게 하며, 다른 하나는 제도를 공유하지 않은 이들과 자신을 구별짓게 한다.
예전은 사람들을 신앙 공동체 구성원으로 주체화하는 주요한 장치다. 모든 사람의 참여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 사건이 함축되어 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일상적인 신앙적 이해와 실천의 과제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즉 공동체 구성원은 예전을 통해서 특정한 삶을 임시적으로 대리 수행하는 것이며, 그것이 비록 삶의 전 부분이 아닐지라도 자신의 삶 전체로서 인식하게 하는 ‘착시 현상으로서의 주체화’를 낳는다. 17
한데 여기서도 모든 이의 동등한 참여는 보장되지 않는다. 즉 배제와 결합된 참여의 양식이 예전 속에 들어있다. 역시 이중의 배타성이 내포된다. 요컨대 예전을 통해 주체화된 대중은 이중의 배타성을 지향하는 존재로서 스스로를 인식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리 체계를 보자. 교리는 언제나 ‘바른 가르침’과 그렇지 못한 것을 나눔으로써 존재하는 담론 양식이다. 가령 정전(Canon)이라는 것은 단지 66 개의 텍스트의 묶음집이 아니라,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담론과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은 해석의 문제와도 결합된다.
정전성(Canoncity)에 대한 신앙이 강한 공동체에서는 번역된 판본들조차도 진위를 구별짓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즉 강한 정전성은 정전 자체조차도 심판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항구적인’ 진정성에 대한 욕망은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전이라는 것 자체가 수백 년에 걸친 기나긴 정전화 과정의 산물임에도,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생각하게 하는, 이른바 기원의 신화를 낳는다.
이상에서 우리는 직제, 예전, 교리 체계 등으로 대표되는 교회 제도화는 이중의 배타성으로 특성화될 수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예수는 이러한 제도의 정당성의 근거로서 이해되고 있다. 요컨대 교회 안의 예수 이미지는 친숙함과 낯설음에 대한 구별짓기를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화의 담론적 특성은 교회가 사회의 헤게모니 집단의 하나가 된 이후에 교회 외부의 존재들에게는 심각한 폭력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래서 이에 대한 도전으로 ‘교회 밖의 예수’가 제기되는 것이다.
교회 밖의 예수
‘교회 밖의 예수’는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 단적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교회의 선교용 자료로 활용되곤 하는 것이 아닌, 교회의 제도화에 도전적인 텍스트들이다. 내가 참조한 것들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소설로는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The Last Temptation of Christ, 1951), 보리슬라프 페키치(Borislav Pekić)의 《기적의 시대》(1965), 18 그리고 영화로 알렉산드로 달라트리(Alexandro Dalatri) 감독의 〈가든 오브 에덴〉(Garden Of Eden, 1988), 카잔차키스의 동명 소설을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가 감독한 〈예수 최후의 유혹〉(1988), 데니스 아르캉(Denny Arcand) 감독의 〈몬트리올 예수〉(1989), 그리고 제임스 바든(James H. Barden) 감독의 〈쥬다스 프로젝트〉(The Judas Project, 1993) 등.
영화든 소설이든 이 텍스트들의 공통점은 예수를 고뇌하고 동요하며 여인에 대한 사랑으로 격동하는 인간으로 묘사한다는 데 있다. 이것은 물론 신앙 제도 속에 함축된 예수의 신적 이미지와 대립적이다.
카잔차키스의 소설 이면에는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그리스도교로 표상된다. 이때 서구 문명이란 인간에게 삶의 정형성의 구조를 가져다준 제도적 장치다. 거기에는 선과 악에 관한 이분법적 인식 및 실천이 포함된다. 바로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 문제 제기하는 것은, 이러한 숨막히는 정형성에서 벗어나 자기를 초월하는 것, 바로 그것에서 예수를 읽을 수 있지 않느냐는 물음인 것이다. 요컨대 여기서 예수는 이데올로기적 당파성의 범주에서 벗어난 존재다. 그는 이 세계에 살면서 이 세계의 정형성 체계의 유혹과 고통스런 투쟁을 벌이다 그것에서 자유를 얻은, 그리하여 다른 패러다임의 세계를 사는 데 성공한 존재, 그런 점에서 우리의 그리스도가 된 존재라는 것이다.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에서도 바로 이러한 요소가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예수가 직면한 최후의 유혹은 바로 ‘평범한 삶에의 유혹’이었다고 해석한다. 그것은 일상을 지배하는 제도에 순응하는 삶이다. 수없이 반복되어온 삶, 그래서 예측 가능한, 그렇고 그런 삶, 바로 이것이 마지막 유혹의 요체였다는 것이다. “루시퍼가 내 속에 있다. 그는 내(예수)가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19 영화의 이 대사에서 보듯, 제도에 순응하는 유혹은 외부 유혹자의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 이미 들어와 있는, 그래서 자기 자신이 되어버린 악마의 유혹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투쟁은 ‘정신 분열증적’이다. 20 이것은 들뢰즈(Gilles Delueze)가 우리 시대를 ‘분열증적 국가사회’로 설명하는 것을 연상케 한다. 21 스콜세지는 오늘의 시대에 대한 치밀한 읽기를 통해서 역사의 예수를 상상해내는 것이다.
《가든 오브 에덴》이 그리는 예수상도 이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이 영화의 특색은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13~30세 때의 예수를 상상해내는 데 있다. 저자의 상상력은 폭력과 대응폭력 모두를 넘어서는 진리를 찾아 헤매는 순례자로 예수를 읽고 있다. 즉 예수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권위를 담보한 존재가 아니라, 고뇌하고 방황하는, 치열한 자기와의 대결 속에서 메시아적 존재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가정이 여기에 깔려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다가서기 위한 영화의 상상력은 그리 개연성 있어 보이지도 않고, 깊이 있는 성찰도 엿보이지 않지만, 정전 외 텍스트를 참조하는 도발성이 돋보인다.
카잔차키스의 소설이나 《가든 오브 에덴》이 예수 읽기에 불교 사상을 개입시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항이다. 이 텍스트들의 상상력은 다원종교성을 개입시킴으로써 서구 중심주의적 종교관으로 채색된 그리스도교 제도에 해체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다원종교성의 체험은 ‘현대’ 서구인의 경험이라는 사실이다.
이와 비교해서 〈쥬다스 프로젝트〉나 〈몬트리올 예수〉는 다원성을 다종교성의 차원보다는 세속성에서 보려 한다. 동시에 예수의 투쟁을 내면 세계까지 침투한 문명의 유혹에서 읽으려 하기보다는, 세속화된 사회의 자폐성과 투쟁하는 모습으로 보려 한다. 특히 〈몬트리올 예수〉는 교회, 법원, 경제, 병원, 매스컴, 광고 등 여러 제도화의 양상에 따라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얽혀 있는 사회의 패턴화에 대한 저항에서 예수를 보는 시선을 제공하고 있다. 22
한편 패키치의 소설은 흥미롭게도 정전의 예수 텍스트를 전복적으로 읽는 모범을 보여준다. 예수의 기적들이 수혜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켰다는 것이다. 낯설음에 대해 가학적인 체계는 개인에게 국한된 기적만으론 조금도 변하지 않고, 도리어 강화된다는 주장인 게다. 이는 교회적으로 제도화된 예수 기적 담론, 아니 나아가 교회의 예수 담론 자체를 향한 공격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패키치는 이 책을 통해서 그 반항아적 성격이 순화된 ‘교회 안의 예수’를 조롱하는 있는 셈이다. 요컨대 예수의 기적을 제도의 변혁으로 읽을 수 없게 했던 것에 대한 전복적인 상상력의 개입이 바로 이 소설의 의의라고 할 수 있다.
요약하면 이들 소설이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예수상은 교회 제도에 의해 억압되었던 다른 예수에 대한 재발견에 있다. 그것은 인간의 내적 고뇌의 무대로, 그리고 인간 사회의 갈등과 혼돈의 영역으로 그를 초청하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화의 옷을 벗긴 일종의 ‘역사의 예수’인 것이다. 영화 속의 연극을 실연하는 과정으로 ‘역사의 예수’의 삶을 은유하고자 했던 〈몬트리올 예수〉에서 시사적으로 볼 수 있듯이, 이들 텍스트들의 놀라운 상상력은 교회에 의해 경직되게 이해됐던 시대착오적 예수를 우리 시대의 당대적(contemporary) 물음 속으로 과감하게 재맥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 텍스트는 예수를 우리의 당대의 상황 속으로 육화시키고(bodified)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예수 르네상스’, 그 가능성과 제약성
최근 북미 지역에서의 예수 연구는 크게 두 흐름으로 계보화되고 있다. 하나는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 1985년 결성)를 주축으로 하는 연구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성서문학협회(SBL) 산하 분과인 ‘국제 Q 프로젝트’(International Q Project, IQP, 1989년 결성)로, 잃어버린 Q 텍스트를 복원하려는 기획과 더불어 형성된 연구 흐름이다. IQP에 참여하는 연구자들이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미국 신약학계를 양적으로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규모 기구인 만큼 후자의 흐름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교회주의에 대해 온건한 개혁파 내지는 정통파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모임은 다음에 언급할 ‘예수 세미나’의 반교회적인 급진적 비판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진 연구자들이 결성 단계에서부터 많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반면 ‘예수 세미나’는 현대 문화의 세속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신학적·신앙적 지향을 표방한다. 23 여기에 참여하는 연구자들의 학문적 입장은 다양하지만, 이 연구 포럼의 발의자이자 조율사라고 할 수 있는 로버트 펑크(Robert Funk)는 우리 시대가 ‘탈그리스도교 시대’(post-Christian era)라고 보면서, 이런 시대에 개입할 수 있는 대안적 신앙의 모색으로 탈교회주의(post-Churchism)를 주장한다. 24 이것은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의 ‘아우슈비츠 이후의 그리스도교’(post-Auschwitz Christian)를 급진적으로 재전유한(re-appropriated)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몰트만은 인종주의와 권력 친화성이 그리스도교의 내적 속성임을 단적으로 보여준 ‘아우슈비츠의 체험’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원적인 전향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 펑크는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의 위기는 이데올로기와의 비성찰적 결합의 차원을 넘어서 자기 중심주의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신앙이 일상화된 교회주의적 제도화 자체에서 비롯한다고 봄으로써, 보다 급진적인 성찰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시사했듯이 ‘역사의 예수’ 논의는 연구사적으로 ‘교회화된 예수’, 즉 케뤼그마적으로 해석된 예수(=케뤼그마의 그리스도)와 긴장 관계에 있는 예수를 핵심적 연구 소재로 삼아 왔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예수’를 이해하는 강력한 ‘역사적 선험성’으로 간주되어 왔던 교회의 예수론에서 탈피해야만 예수 역사학이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양자 사이의 긴장을 순화하려는 데 보다 관심을 가진 IQP보다 ‘예수 세미나’가 연구사적으로 새로운 단계로서의 최근 예수 연구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마커스 보그(Marcus Borg)는 ‘예수 세미나’에 참여한 연구자들간의 대체적인 합의 사항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한다. 예수를 종말론적 예언자로 보는 견해가 후퇴하였으며, 그 대신 예수를 지혜 교사, 특히 전복적인 지혜(subversive wisdom)를 설파하는 현자로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예수의 사회적 세계를 강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5
예수를 종말론적 예언자로 보는 견해는 요하네스 바이쓰(Johannes Weiss)가 리츌 학파(리츌[Ritschl], 율리우스 카프탄[Julius Kaftan],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k] 등)와 논쟁하면서 제기한 견해를 알버트 슈바이처가 발전시킴으로써 20세 내내 예수 학계를 지배하였다. 26 여기서 주목할 것은 리츌 학파와 바이쓰 간의 논점의 배후인데,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을 대표하던 리출 학파는 신성화된 교회의 예수를 비판하기 위해, 근대의 역사학적 시각으로 ‘역사의 예수’를 조명하려 하였다.
근대 학문으로서 역사학은 ‘프랑스 혁명 이후’ 사유의 틀이 변화하면서 등장하였는데, 교회의 가치에 의해 묵살되어온 인간이 사유와 행위의 주체로 부각되면서 (신이 아니라) 인간을 중심으로 과거·현재·미래를 꿰뚫어볼 수 있다는 인식의 결과로 대두한 학문 분과다. 휴머니즘이 교회의 담론을 대체하는 거대담론으로서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된 근대적 사유의 맥락에서, 근대 역사학의 등장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리출 학파는 이런 맥락에서 예수를 역사적으로 조명하였던 것이며, 그러므로 예수는 신성으로 채색된 것이 아닌 인간 예수로, 휴머니즘적인 윤리적 가르침을 설파한 스승 27으로 이해되었다.
바이쓰의 반격은 이러한 ‘인간 예수론’이 연구자들 자신의 시대의 당대적 가치 속으로 예수를 너무 쉽게 용해시킴으로써, ‘현재와 긴장 관계에 있는 미래’를 통해 현재를 비판·재구성하려는 신학의 힘을 상실시켰다는 데 초점이 있다. 적어도 슈바이처는 바이쓰의 논점을 이렇게 이해했다. 이 주장은 특히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학계의 중요한 성과로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 비극적 상황에서 교회와 신학은 세속적 가치에 매몰된 나머지 세속적 진리관의 쟁투에 무비판적으로 몰두하는 전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현재와 갈등 관계에 있는 미래’를 강조하는 것은 자유주의 신학이 표방했던 근대적 학문 28을 지양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바이쓰와 슈바이처 이후의 예수 연구자들은 예수의 신학을 종말론적 기조 아래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에 몰두하였다. 닷드(C.H. Dadd)의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의 ‘실현되어 가는 과정으로서의 종말론’(an eschatology that is in process of realized),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실존주의적 종말론’(existential eschatology) 등은 그러한 대표적인 성과물에 속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들은 현재와 미래의 긴장을 해소하는 종말론을 찾아내려는 데 집중하고 있다. 즉 이들에게서 종말론의 ‘미래’는 탈세주의로 전락할 위험성이 농후한 것으로 해석될 뿐이었다. 그래서 ‘현재를 부정하지 않는 미래’의 해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인류 문명사의 진보주의나 계몽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신학의 가능성은 여전히 부재하게 되었다.
오히려 그러한 신학적 가능성은 신학 영역 외부에서 제안되었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공통 기조인 진보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현재와 긴장 관계에 있는 종말론’을 제기하는데, 이를 위해서 그는 그리스도교 신학을 끌어들이기보다는 유대교 신학을 끌어들여야 했다. 29 그리스도교 신학 내에선 이러한 성찰이 부재했던 탓이다.
안타깝게도 ‘예수 세미나’ 계열의 연구자들이 예수를 종말론적 예언자로 보는 대신 지혜 교사로 보려는 것도 이러한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그들이 학계의 지배적 견해인 종말론적 예수상을 비판하는 것은 여전히 탈세주의적 신학의 위험성에 대한 문제의식과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아마도 미국 교회 신앙의 지배적 현상인 탈세적 경향과 맥을 같이 하는 것 같다. 30 게르트 타이쎈(Gerd Theissen)은 미국의 비판적 예수 학계의 이러한 현상을 (갈릴래아 예수가 아니라) ‘캘리포니아 예수’라고 비판한다. 31 그런 점에서 예수가 ‘지혜 교사’임을 강조하는 것은 과도한 현재주의적 문제 인식의 소산으로 보인다.
펑크는 ‘예수 세미나’가 예수를 역사적으로 재현하는 주된 동기를 계몽적 가치의 회복에 있다고 보았다. 32 그의 말을 인용해보자. “기독교가 최상의 시간들에는 윤리적(ethical)이며, 최악의 시간들에는 신조적(creedal)이다. 신조들이란 (외부인들을) 포함시키고 양육시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을 제외시키고 말살하기 위해 고안된 것들이다.” 33 대단히 도발적이면서도 우리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주장이다. 그는 신조 대신 윤리를 강조한다. 그에게서 이것은 교회 대신 (전복적인 지혜 교사로서의) 예수를 강조하는 것과 등가적이다. 여기서 윤리라는 것은, 보그가 정리한 것에 따르면, ‘인습적 가치’에 대해 ‘전복적인 가치’를 의미한다. 34 보그에게서나 펑크에게서나 이러한 윤리는 ‘대안적인 윤리’다. 즉 기존의 가부장제적이고 배타주의적인 질서에 대해 대안적인 공동체의 윤리인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펑크의 ‘양육시키다’는 표현에서 잘 드러나듯이, 그것은 계몽적 가치를 가진다. 인습적 가치에 의해서 배제되었던 사람들은 예수의 대안적 가치로의 초대를 ‘복음’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35
그런데 문제는 인습적 가치란 하나의 욕구체계로서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미 무의식 속에 내면화되어 있다. 따라서 대중은 그렇게 쉽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징 세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이 점에선 예수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윤리는 계몽적이라기보다는, 미리 알고 있는 대안을 추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반진리요 일탈의 진리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하는 게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이 점에서 다가와 겐조(田川建三)가 예수의 윤리를 ‘역설적 반항’으로, 즉 대안적인 가치의 주장이라기보다는 진리 체계의 의미 구조를 분열시키는 교란의 담론으로 이해하는 것은―시간적으로 훨씬 앞선 시기에 제기된 견해임에도―‘예수 세미나’의 예수 이해를 넘어선다. 36
이상에서 보듯 ‘예수 세미나’로 대표되는 최근의 예수 연구의 새로운 동향은 교회의 예수 대신의 ‘역사의 예수’에 주목함으로써, 교회주의에 갇히지 않은 새로운 신학적 논의의 가능성을 남겼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적지 않은 한계를 노정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자유주의적 예수 연구의 한계처럼 계몽주의적이고 진보주의적 가치에 여전히 몰두해있는 듯이 보인다. 이러한 현재주의는 역사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에 기반한다. 그러나 20세기 초입부터 겪었던 처절한 세계대전의 기억뿐 아니라, 최근 경험하는 지구화된 자본의 무소부재의 파괴력은 결코 낙관할 수 없는 역사 인식에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 바로 여기에 예수에 관한 역사적 연구의 향후의 과제를 추정할 수 있다. 서양의 비판적 예수 연구자들이 이제까지보다 좀더 자신의 시대를 성찰적으로 질문할 수 있는 한에서 말이다.
글을 맺으며―‘역사의 예수’ 담론이라는 의제의 첨예화를 위하여
역사는 과거에 대한 ‘집단 기억’을 재현하는 데 목적이 있다. 37 집단 기억의 주체가 자신의 당대적 문제의식에서 과거의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역사라는 말이다. 교회사는 교회라는 기억의 주체가 예수를 체계적으로 기억해내는 하나의 양식이다. 그것이 ‘교회 안의 예수’였다. 한데 문제는 이 집단 기억은 동시에 특정한 ‘망각’을 내포한다는 데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교회 밖의 존재’에 대한 망각이다. 또한 그러한 망각에서 과거의 대상인 예수에 대한 망각이 초래된다. 이것은 예수 읽기와 관련해서, 크게 두 갈래의 도전을 낳는다. 하나는 ‘교회 밖’에서 본 예수 읽기다. 우리는 영화나 소설 등에서 그러한 문제의식을 담은 예수론들을 찾아보았다. 나는 임의적으로 이것을 ‘교회 밖의 예수’라고 명명하였다. 이러한 예수론들은 과거의 존재인 예수를 물으면서도 과거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역사적 질문 대신에, 현재의 상상력에 의존하였다. 첨예한 당대 현실에 대한 문제 인식이 이들 예수 읽기에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광역의 그리스도인 영역 내에 속해 있으면서도 교회 밖의 예수 담론처럼 교회를 넘어서려는 예수 읽기 방식이 있다. ‘역사의 예수’ 연구는―비록 모든 연구자들이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이런 경향의 하나임에 분명하다. 38 이러한 예수 담론은 역사적 접근을 통해, 즉 과거와의 보다 진지한 대화를 통해 망각을 야기하는 현재에 개입하고자 했다. 예수의 망각된 부분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특정한 기억만을 재현해왔던 교회의 예수론에 대한 신랄한 비판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지금까지의 예수 연구는, 많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아직 과거와 현재의 대화로서의 역사학적 의제의 가능성을 첨예화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것은 여전히 순진한(naive) 근대 인식을 넘어서진 못했기 때문이다. ‘탈근대’ 담론은 우리에게 순진한 역사관을 넘어서는 강렬한 지적 자극임에 분명하다.
나는 ‘역사’ 담론이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서 망각과 기억을 수반한 특별한 ‘기억술’을 파헤치는 데 있어 탁월한 의제 제기 방식이라는 푸코식의 역사관에 주목한다. 이것은 은폐된 과거에 대해 꼼꼼한 발굴 작업을 반드시 동반해야 한다는 점에서 고고학적 접근이다. 동시에 그러한 망각을 낳은 우리의 당대적인 권력 메커니즘에 대한 정교한 인식 또한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권력의 계보학에 대한 연구이기도 하다. ‘교회 밖의 예수’ 담론들은 분명 이러한 현재 인식에 하나의 훌륭한 참고서가 되리라고 본다. 아무튼 ‘역사의 예수’를 향한 우리의 역사적 상상력은 우리 당대의 제도화된 질서를 대면하는 예리한 눈을 필요로 한다. □
- 주관적인 평가지만, 내가 보기엔 최근의 예수 연구서 중 가장 돋보이는 저작은 E.P. Sanders, Jesus and Judaism (Fortress Press, 1985)와 John Dominic Crossan, The Historical Jesus. The Life of a Mediterranean Jewish Peasant (HaperCollins, 1991)이다. 이 두 책은 각각 《예수 운동과 하느님 나라》 (한국신학연구소, 1997)와 《역사적 예수》 (한국기독교연구소, 2000)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밖에 주목할 만한 저서로, Burton L. Mack, A Myth of Innocence (Fortress, 1988); ―, The Lost Gospel. The Book of Q & Christian Origins (HarperSanFrancisco, 1993)[《잃어버린 복음서. Q 복음과 기독교의 기원》 (한국기독교연구소, 1999)]; John P. Meier, A Marginal Jew. Rethinking the Historical Jesus (Doubleday, 1991); Richard A. Horsley, The Liberation of Christmas (Crossroad, 1989)[《크리스마스의 해방》 (다산글방, 2000)]; ―, Jesus and the Spiral of Violence. Popular Jewish Resistance in Roman Palestine (Fortress, 1993); J.D. Crossan, Jesus. A Revolutionary Biography (HarperSanFrancisco, 1994)[《예수.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 (한국기독교연구소, 2001)]; N.T. Wright, Jesus and Victory of God (Fortress, 1996); Gerd Theissen & Annette Merz, Der historische Jesus (Vandenhoek & Ruprecht, 1997)[《역사적 예수. 예수의 역사적 삶에 대한 총체적 연구》 (다산글방, 2001) 등을 꼽을 수 있다고 본다. [본문으로]
- 앞의 주에서 소개된 것을 제외하면, 다음과 같은 저술들이 번역 출간되었다. M. Borg, 《예수 새로 보기》 (한국신학연구소, 1997); ―, 《미팅 지저스》 (홍성사, 1995); ―, 《새로 만난 하느님》 (한국기독교연구소, 2001); J.D. Crossan, 《예수는 누구인가》 (한국기독교연구소, 1998); E.S. Fiolenza, 《크리스찬 기원의 여성신학적 재건》 (도서출판 태초, 1993); R. Funk, 《예수에게 솔직히》 (한국기독교연구소, 1999); R.A. Horsley, 《예수 운동. 사회학적 접근》 (한국신학연구소, 1993); G. Theissen, 《예수 운동의 사회학》 (종로서적; 1981); G. Vermes, 《유대인 예수의 종교》 (은성, 1995); Borg & N.T. Wright, 《예수의 의미―역사적 예수에 대한 두 신학자의 논쟁》 (한국기독교연구소, 2001) 등. [본문으로]
- 주요 저술로는 김명수, 《원시 그리스도교 예수 연구》 (한국신학연구소, 1999); 소기천, 《예수 말씀의 전승 궤도》 (대한기독교서회, 2000); 조태연, 《예수 운동. 그리스도교 기원의 탐구》 (대한기독교서회, 1996); 편저로는 김진호 엮음, 《예수 르네상스》 (한국신학연구소, 1996); 최갑종 엮음, 《최근의 예수 연구》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참조. [본문으로]
- 김진호, 〈‘탈교회적 주체’의 신앙을 향해: ‘역사의 예수’ 담론의 정치성〉, 《진보평론》 7(2001 봄); 배철현,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역사적 예수〉, 《사회비평》 28(2001 여름). [본문으로]
- 김덕기, 〈토차화의 근거로서의 타자와 언어 이해〉, 《예수 비유의 새로운 지평》 (다산글방, 2001); 김준우, 〈예수의 반세계화 전략〉, 《세계의 신학》 49(2000 겨울); 김진호, 앞의 논문; ―, 《예수 역사학》 (다산글방, 2000); 한인철, 〈역사적 예수와 종교간의 대화〉, 《세계의 신학》 48(2000가을); ―,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와 대학 선교〉, 《세계의 신학》 53(2001 겨울) 등이 있다. [본문으로]
- 김덕기, 《예수 비유의 새로운 지평》에 실린 여러 글. [본문으로]
- 이른바 ‘예수는 없다’ 신드롬이 대표적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오강남, 《예수는 없다》 (현암사, 2001) 참조. [본문으로]
- 이렇게 가치 중립적 태도로 과거에 일어난 것을 ‘사실 그대로’ 재현해내려는 역사학의 태도는 19세기의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로 대변되는 고전 역사주의의 실증주의적 관점에서 발견할 수 있다. George G. Iggers, 《20세기 사학사》 (푸른역사, 1998), 제1장 참조. 이러한 고전적 역사주의는 20세기 초 미국의 신사학(The New History)의 ‘현재주의’를 거치면서 역사학은 기록된 어떤 것(any written history)이지 과거의 실재적 사실 자체가 아니라는 극단적인 부정의 시각과 마주치게 된다. 같은 책, 제4장 참조. [본문으로]
- E.H. Carr, 《역사란 무엇인가》 (까치, 1997), 제1장 참조. [본문으로]
- 이 논제는 나의 글 〈‘탈교회적 주체’의 신앙을 향해―‘역사의 예수’ 담론의 정치성〉에서 상세히 다룬 바 있다. [본문으로]
- Albert Schweitzer, 《예수의 생애 연구사》 (대한기독교출판사, 1995), 583~85. 여기서 연구자들 자신의 세계관이란 각 논자들마다 다르지만 ‘휴머니즘’으로 종합될 수 있는 여러 세계관들을 뜻한다. 이것은 근대의 역사 개념이 프랑스 혁명 이후의 인식론적 변화와 맞물려 있다는 코젤렉(Reinhard Koselleck)의 논평을 확증시켜주는 하나의 예인 셈이다. Reinhard Koselleck, 《지나간 미래》 (문학동네, 1998) 참조. 아무튼 이러한 슈바이처의 평가는 연구사적으로 예수 역사학의 사망선고로 받아들여진다. 실제로 슈바이처 자신도 그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것은 역사학의 사망 선고가 아니라, 슈바이처 자신도 극복하지 못한 역사 실증주의의 사망선고라고 하는 게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본문으로]
- 이호철, 〈행위자와 구조, 그리고 제도: 제도주의의 분석 수준〉, 《사회비평》 14(1996, 1/2) 참조. [본문으로]
- 이재열, 〈개인의 합리성에서 제도의 신화까지: 조직과 시장의 사회학〉, 《사회비평》 11(1994, 1/2) 참조. [본문으로]
- 박명호, 〈제도, 조직, 그리고 역사〉, 《사회비평》 12(1994, 2/2), 55. [본문으로]
- Petter Hünermann, 〈교회〉, 《하나인 믿음》 (분도출판사, 1982), 596~604 참조. [본문으로]
- 이신건, 《조직신학 입문》 (한국신학연구소, 1992), 168~70 참조. 이 책에 의하면, 에두아르트 슈바이처는 신약성서에는 위계적인 조직화가 강한 ‘팔레스틴적 유형’과, 일탈적이고 반제도주의적인 ‘요한적 유형’ 그리고 이 둘의 중간에 있는, 보다 평등주의적인 조직화가 특징인 ‘바울적 유형’ 등, 세 가지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 운동이 나타나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 특정한 학교 혹은 특정한 군부대에 귀속된 경험이 그 사람에게는 일부분의 경험일지라도, 그것에 주체화된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전부인 양 오인한다. 이렇게 주체화는 언제나 오인 현상을 통해 작동된다. [본문으로]
- (‘열린책들, 2000). [본문으로]
- D. Thompson & L. Christie 엮음, 《비열한 거리. 마친 스콜세지: 영화로서의 삶》 (한나래, 1994), 186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 같은 책, 186. [본문으로]
- Gilles Deleuze & Félix Gattari, 《앙띠 오이디푸스―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민음사, 1994), 357~88 참조. [본문으로]
- 김종길, 〈‘몬트리올 예수’와 제도의 논리〉, 《고려사회학 논집》 8(1994) 참조. [본문으로]
- 이 연구 집단에 대해서는 Mark Allan Powell, 〈예수 세미나〉, 《신학사상》 110(2000 가을) 참조. [본문으로]
- R. Funk, 《예수에게 솔직히》 (한국기독교연구소, 1999)의 〈후기〉 참조. [본문으로]
- M. Borg, 〈예수 연구의 르네상스〉, 김진호 엮음, 《예수 르네상스》 참조. [본문으로]
- 노먼 페린(Norman Perrin)에 의하면, 바이쓰의 주장은 당대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고, 슈바이처에 의해 비로소 예수 이해의 핵으로써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책, 《예수의 가르침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무림, 1992), 16~25 참조. [본문으로]
- 이것은 오늘날 비교인류학적 성과로 보완되면서 지혜교사 혹은 팔레스틴적 견유철학자로 보는 관점으로 발전하게 된다. [본문으로]
- 헤겔에게서 보듯, 거대담론으로서의 역사는 현재와 미래를 연속적으로 보려했다. 그것은 현재적인 이성의 능력으로 구성된 미래(유토피아)로 현재를 기획할 수 있다는 믿음을 낳았다. 여기서 진보에 대한 낙관적 이상과 계몽주의에 대한 도도한 확신이 도출된다. [본문으로]
- W. Benjamin, 〈역사철학테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1983). [본문으로]
- 주로 미국 선교사들에 영향받은 한국교회도 마찬가지로 탈세적인 특징을 갖는다. ‘예수 세미나’를 열렬하게 포교하는 일단의 연구자들이 종말론적 예수상을 비판하는 것은 이런 맥락을 갖는다. 조태연, 〈한국 교회의 신앙 구조와 예수 운동의 도전―새로운 밀레니움을 향한 해석학적 반성〉, 《신학사상》 98(1997, 가을); 한인철,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와 대학 선교〉, 《세계의 신학》 53(2001 겨울)을 보라. 하지만 이들에게서 공히 간과되는 것은 한국 교회가 특히 1945년 독립 이후 정치사회와 긴밀히 유착하면서 권력게임에 몰두해온 역사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강인철, 〈한국 개신교 교회의 정치사회적 성격에 관한 연구, 1945~1960〉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학위 논문, 1994) 참조. 민중신학이 종말론적 예수를 강조한 데는 바로 이러한 과도한 현실주의적 태도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현재와 긴장 관계에 있는 미래에 대한 관점이 함축되어 있다. [본문으로]
- Gerd Theissen & Annette Merz, 《역사적 예수》, 43. [본문으로]
- Funk, 《예수에게 솔직히》, 459. [본문으로]
- 같은 책, 459. [본문으로]
- Borg, 《예수 새로 보기》, 제6장 참조. [본문으로]
- 보그, 〈부활절 이전의 예수와 부활절 이후의 예수: 유대교 신비가와 기독교의 메시아〉, 마커스 보그 & N. 톰 라이트, 《예수의 의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1), 122. [본문으로]
- 다가와 겐조, 《예수라는 사나이》 (한울림, 1983); 가라타니 고진,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이산, 1999), 216~24 참조. 고진은 다가와의 주장이 기존의 예수 논의와 다른 점은 그의 논의가 ‘적극적인 의미’ 대신에 ‘담론의 차이’에서 역사의 예수를 조명하는 역사 인식론에 기반한다는 데 있다고 본다. 이때 ‘적극적인 의미’라는 표현은 실증주의적인 역사학의, ‘과거에 있었던 그대로의 객관적인 사실을 오늘의 시대에 담론으로 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빗대는 표현이다. 고진은 다가와가 이러한 역사학의 신화를 넘어서 사유할 수 있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탈근대론적 역사 인식론은 구미의 예수 학계에서도 완전히 낯선 것만은 아니다. 로버트 스트림플(Robert B. Strimple)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90년대 성서학계와 신학계의 가장 특징적인 인식은 복음서에 관해서 그리고 예수가 누구였느냐에 관해서 단 하나의 ‘참된’ 이해는 없다는 성찰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Robert B. Strimple, The Modern Search for the Relal Jesus. An Introductory survey of the Historical Roots of Gospels Criticism (P & R Publishing Company, 1995), 153. 또한 Edgar V. McKnight, Post-Modern Use of the Bible: The Emergence of Readeroriented Criticism (Abingdon, 1988) 참조. [본문으로]
- 김기봉, 《‘역사란 무엇인가’를 넘어서》 (푸른 역사, 2000), 49. [본문으로]
- 문학이나 영화와는 달리 ‘신학’이라는 담론 양식은 이런 속성을 지닌다. 즉 교회를 비판할 때조차도 여전히 교회 제도 외부가 아닌 내부와 연계된 담론 양식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의 예수’ 담론의 교회 비판은 ‘교회 밖의 예수’라고 할 수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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