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신학사상] 80(1993 봄)에 게재된 글입니다
역사주체로서의 민중 - 민중신학 민중론의 재검토_신학사상 80 (1993 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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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주체로서의 민중
민중신학 민중론의 재검토
머리말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신념은 ‘민중’신학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명제의 하나이다. 요컨대 민중신학은 이 믿음 위에서 한반도에서의 ‘신학하기’, 즉 ‘지금 여기’에서의 역사실천적 지평을 열어놓고 있는 실천의 신학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펴는 데 있어서는 다음의 몇 가지 해명해야할 과제가 수반된다. 즉 ‘누가 민중인가, 왜 그들이 역사의 주체인가, 그들이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변혁시켜 왔으며, 또 어떻게 변혁시킬 것인가, 그리고 민중이 변혁시킬 잠정적 또는 최종적 사회는 어떤 것인가’ 등등. 나는 이러한 과제를 해명하는 작업이 ‘민중개념화’의 구체적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민중개념화’에는 세 가지 차원의 범주적 구분이 있다고 생각된다: 신학적 차원, 사회학적 차원, 그리고 성서적 차원이 그것이다. 신학적 차원은 민중개념화의 신학적 근거를, 사회학적 차원은 민중개념화의 사회학적 근거를 밝히는 작업이다. 그리고 성서적 차원이라 함은 신학적, 사회학적 민중개념화의 성서적 기초 1를 만드는 작업과 관련된다. 2 그러나 이 세 차원은 범주적 구분일 뿐이지 실제의 작업과정에서는 서로 얽혀 있고, 다만 접근상의 강조점이 다를 뿐이다. 이 글은 이 가운데 사회학적 차원에 강조점을 두면서 민중개념화 작업의 새로운 돌파구를 여는 하나의 시론적 자료가 되는 데 목적을 둔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민중신학의 민중개념화에 대한 평가 및 문제제기
민중신학의 민중론은 한국사회에서 경험되는 파행적 착취의 현실이 사회의 구조적 맥락과 관련되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른바 1세대 민중신학자들은 이 구조적 맥락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이 부재하였고, 3 단편적인 정보들로 착취의 현실을 신학화하는 데에 치중하였다. 4 여기서 민중은 단지 ‘민중사건’, 즉 ‘하느님의 경륜에 따라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예수사건’이라는 레토릭으로만 규정된다. ‘민중이 도데체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하여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의 사회학적 규정을 거부하고, 오직 위와 같은 레토릭으로만 파악되어야 할 것을 강조한다. 그것은 민중 존재의 역사적 역동성을 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5 이론화 작업에 대한 이러한 극단적인 경험주의적 태도는 당시 미국과 우리나라의 주류 사회과학분야를 풍미하던 탈역사적 경향에 대한 저항감의 즉자적 표현방식일 수도 있다. 6
그러는 가운데 민중을 ‘총체적으로 소외된 자’, 7특히 정치적 소외를 중심으로 하는 집단이라는 관점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것은 민중적 관점을 사회학에 도입하고자 했던 한완상의 개념화에 힘입은 것으로 보인다. 8 한완상과 마찬가지로 민중신학자들이 총체적 소외 가운데서 ‘정치적’ 소외에 특히 주목한 것은 그들의 역사분석이 한국의 파행적 사회현실을 독재정권의 존재와 즉자적으로 결부시키는 데 그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러한 관점도 사회학적 개념화의 구성조건으로서는 적절치 못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소외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것이고, 따라서 구체적 사회의 구조와는 별개로 설명될 수 있는 무한정한 일반화이기 때문이다. 9
결국 1세대 민중신학자들의 민중론은 민중이 역사의 ‘존재론적’ 주체라는 선험적 판단에 이르게 하며, 10 때로는 변혁 방식에 대한 혹은 (잠정적이든 최종적이든) 변혁된 사회에 대한 역사적 전망 일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11 그러므로 이들에게서 ‘민중개념화’는 무한히 열려진 가능성으로 남아 있거나 논의 자체가 폐쇄되어 버린다. 12 결국 이러한 ‘소외론적 민중’ 개념은 실천이론으로서 발전할 수 없었다. 13
한편 2세대 민중신학자들은 사회구성체라는 총체적 사회인식을 시대적 유산으로 물려받으면서 논의를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1세대 민중신학자들을 넘어선다. 즉 구조적 맥락의 내적 연결고리에는 자본주의적 경제관계 14가 규정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인식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민중개념화가 계급론적 관점에서 조명됨을 의미한다. 15 특히 강원돈은 민중을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한에서의 계급동맹으로 본다. 다시 말하면 그는 한국 자본주의의 보편과 특수의 관계, 즉 기본모순과 주요모순의 관계에서 계급과 민중을 설정한다. 16 이리하여 민중개념화는 계급논의의 하위개념으로서 역사실천적 개념으로 이론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점에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첫째로,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결국 ‘민중개념화’ 자체는 사실상 무의미해진다. 왜냐하면 민중은 계급동맹이라는 계급론적 관점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17 둘째, 모순론에 근거한 계급논의는 계급구성 논의로는 적합하지만, 계급형성 문제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18 이러한 민중개념화는 구조환원론에 빠진다. 셋째, 모든 진보적인 사회운동을 계급의 문제로 환원시키려는 전제를 하게 된다. 19 즉 이러한 민중개념화는 계급환원론에 빠진다. 이상의 문제제기에서 볼 수 있듯이, 2세대 민중신학자들의 (계급환원론적인) 모순론적 민중개념화는, 실천이론으로서의 민중신학의 정초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론 수준 이상의 논의의 진척을 이룰 수 없었다. 또한 여기에는 계급환원론적 개념화 자체가 안고 있는 유신론적 신앙과의 모순관계가 개입되어 있다.
최근 민중신학을 향하여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첫째로, ‘대중적 신학’ 20에 대한 요구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중은 주로 ‘교회’ 대중을 말하는 것으로, 민중신학은 내용이나 언술 형식 21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주요 대중인 교회 대중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동안의 민중 논의에서 배제되어 왔던 신중간계층 또는 중산층의 문제이다. 이것은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주로 87년 민주화 운동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하여 확산되어 최근 실천적 이론 재구성의 주된 소재로 등장하는 것인데, 이른바 ‘시민사회론’적 함의를 내포한 채 소외론적 민중론이나 모순론에 기초한 계급(환원)론적 민중론의 비실천성에 대한 비판 22으로 민중신학을 조이고 있다. 23
나는 이러한 문제제기들이 위에서 약술한 바, 민중신학의 민중개념화의 실패와 연관된다고 본다. 따라서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의 실천이론으로의 재구성은 위에서 두 가지로 요약한 민중신학을 향한 문제제기에 대한 응답이 될 것이며, 나아가 1990년대 민중신학의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실천이론으로서의 민중개념화는 ‘대중’의 문제를 극복하는 틀이어야 하지만 단순히 ‘교회의 신학’이라는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역사변혁을 전망하는 거시적 틀이어야 한다. 또한 실천이론으로서의 민중개념화는 구성적 실체로 규정되는 ‘기층민중’(1세대) 혹은 프롤레타리아(2세대)와 중산층 사이를 변혁적 실천의 역할에 있어서 존재론적으로(선험적으로) 가르는 방식의 구조환원론적이고 계급환원론적인 결정론적 시각을 극복하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서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의 실천이론으로의 재구성을 다음절에서 시도코자 한다.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개념의 재구성
나는 여기서 대안적인 민중개념화를 제시하는 데 있어서 1980년대 민중신학이 이룩한 계급적 관점의 함의를 수용코자 한다. 그것은 사회구성체의 관점에서 조명된 한국사회의 구조적 맥락에 대한 계급적 인식에 기본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조환원론적 계급결정론의 실천이론으로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민중개념화의 ‘정치이론’적 함의를 또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1세대 민중신학의 개념화처럼 총체적 인식을 결여한 ‘정치이론적 관심’이 아니라 사회구성체론적 인식 위에서 제기되는 ‘정치이론에 대한 관심’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2세대 민중신학의 구조적 맥락에 대한 계급적 인식을 실천이론으로 계승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민중을 고정된 구성적 실체로 보는 것에 반대한다. 그리하면 계층의 개념과 동일한 설명변수를 갖게되며, 계층 개념과 중복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이러한 개념화는 ‘실천적’이라기보다는 ‘설명적’ 개념화라는 점에서 ‘민중=역사주체’라는 민중개념화의 근본 취지와 모순된다. 또한 모순론적 계급이론의 계급 개념과도 상충될 수 있다. 왜냐하면 모순론적 계급이론은 사실상 계급형성을 계급구성의 하위개념으로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단의 민중신학자들을 포함하여 1980년대 진보적 학술진영의 상당수 논객들이 이런 경향을 띠고 있었다.
나는 민중을 사회구성체의 모순구조 속에서 ‘이 모순적 구조를 극복하려는 역동적인 형성적 실체’로 규정코자 한다. 이런 규정이 계급과 다른 것은, 형성론적 관점에서, 계급은 경제적 관점에 초점이 있는 개념인 반면, 민중은 정치적 관점에 초점이 있다는 점이다. 나는 여기서 ‘사회구성체의 모순구조를 극복하려는 집합의지’를 ‘민중당파성’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리고 ‘사회구성체의 모순구조를 극복하려는 경향’을 ‘변혁적’이라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민중당파성은 곧 민중형성의 논리인 것이다. 요컨대 민중은 민중당파성을 형성논리로 하여 이루어진 일종의 변혁적인 정치연합인 것이다. 24 여기서 사회구성체는 민중의 모집단(母集團) 25의 범위를 설정해 준다. 그러나 이 모집단이 자명하게 정치연합으로서의 민중으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점이 정치적 관점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만약 민중의 모집단과 가장 근접하게 민중이 형성된다면 변혁의 가능성은 가장 커지게 되는 것이다. 26
우리는 여기서 사회구성체의 모순구조를 극복하려는 집합의지로서의 민중당파성을 융통성있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시대의 세계사적 콘텍스트는 다양한 모순구조의 (본질적이든 국면적이든) 환원불가능성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었기 때문이다. 27
마르크스주의에서 생산양식 중심의 논의로부터 사회구성체 논의로의 발전은 다양한 모순들이 그리고 이 모순들에 기초한 사회적 적대들 28이 단순히 경제논리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절합’(articulation)되고 있다는 데에 그 함의가 있다. 29 나는 다양한 모순과 적대가 특수한 방식으로 절합된 것이 사회구성체라고 본다. 이때 절합의 개념에는 각각의 모순들과 적대들 그리고 양자간에 서로서로에 대해 ‘상대적으로 규정적이면서 동시에 상대적으로 자율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또한 절합의 개념에는 어느 하나가 다른 것들에 대해 과잉결정의 관계가 항시적으로 성립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이러한 관점을 민중의 개념에 적용하면 민중과 계급간의 차이가 분명해진다. 즉 사회구성체에는 다양한 모순 및 다양한 적대적 실체가 존재한다. 이것들은 서로 절합되어 있고, 이 절합에는 과잉결정 관계가 성립한다. 그런데 이 과잉결정 관계는 항상 경제적 착취관계 30로서 판별되지는 않는다. 요컨대 사회구성체의 모순구조를 극복하려는 집합의지로서의 민중당파성은 언제나 계급관계로서 파악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민중당파성과 계급당파성은 동의어가 아닌 것이다. 민중을 계급동맹으로 본 민중신학자들의 민중론은 바로 이 점을 혼동한 것이다. 민중형성의 논리인 민중당파성은, 첫째로 해당 국면을 과잉결정하고 있는 사회적 모순구조에 의해 가능성의 경우들이 제한되고, 31 둘째로 이러한 제한들에 의해 형성된 민중의 모집단간의 민중연합 형성을 위한 헤게모니적 절합을 통해 형성된다. ‘민중=계급동맹’이라는 등식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민중당파성이 계급당파성으로 구현되었을 경우에만 성립한다. 만일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중연합이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하의 계급동맹으로 나타난다면, 민중당파성은 가장 급진적인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그리고 이 연합이 변혁 또는 민주화에 성공한다면 해당 국면에서 가장 근본적인 또는 철저한 변혁 또는 민주화를 이룩해낸다. 32
그렇다면 민중의 모집단간의 헤게모니적 결합의 유형이 문제시된다. 이것은 각 집단의 자원동원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민중의 결속력을 형성시키는 조직과 이념의 문제이다. 만일 민중이 피지배연합으로서 도전연합일 경우에는 이 조직과 이념은 ‘대안 조직’, ‘대안 이념’일 것이고, 반대로 체제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반면 도전연합이 보수주의적 연합일 경우에는 민중연합의 조직과 이념은 ‘체제(연합)’, ‘지배 이념’으로서 나타날 것이다. 33 여하튼 전자는 변혁지향을 가지며, 후자는 질서지향을 갖는다.
‘조직’의 유형으로는 일반적으로, 조직의 형태를 중심으로 하면 정치적 조직, 계급적 조직(예: 노동조합), 각종 계층적 조직(예: 도시빈민협의회,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기타 사안별조직(예: 환경단체) 등이 있고, 정치적 조직은 다시 제도권 내의 조직과 비제도권 조직으로 나뉠 수 있다. 그리고 지리적 영향력을 중심으로 하면 국제적 조직, 전국적 조직, 지역조직 등이 있고, 또한 조직의 목적과 관련하여 공동체(community)적 조직과 시장(market)적 조직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34 이렇게 조직은 다층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민중연합이 성공을 거두려면 수(number), 조직구성원 사이의 응집력 및 타조직들과의 연대에서 성공적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조직의 ‘이념’이 문제시된다. 이것은 알튀세르(L. Althusser)의 ‘호명’(interpellation)의 개념을 통해서 보다 명확해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특정집단의 이념 혹은 이데올로기는 순수한 혹은 투명한 집단 내적 함의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호명은 구조의 담지자일 뿐인 개인을 자율적인 주체로 부르는 과정이다. ‘주체 없는 과정으로서의 구조’라는 구조주의적 관점이 깊이 깔린 이 개념을 라클라우(E. Laclau)는 계급 혹은 여타 집단의 이데올로기가 형성되는 원리를 밝히는 데에 사용한다. 35 예컨대 특정 계급의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계급적 이데올로기를 투명하게(순수하게 당파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모순적 이해관계들과 절합하여 형성된다. 여기에는 적대적 모순관계에 있는 계급의 이해관계까지도 포함된다. 물론 여기서 적대적 모순은 은닉되거나 중립화되어 표상된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포용한 헤게모니적 절합에 가장 성공적인 이념이 구성되었을 때 조직은 수, 조직구성원 사이의 응집력 및 타조직과의 연대에 성공적일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민중연합은 자원동원능력을 획득하는 내적 역량인 조직과 이념의 ‘형성 원리’로서, ‘최대강령주의’(maximalism)을 지양하고 ‘최소강령주의’(minimalism)에 입각했을 때에 효율적이다. 그런데 최소강령주의는, 앞에서 말한 바, 민중이 가장 철저한 변혁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조건인 기본계급 중심의 계급당파적 동맹과 종종 모순관계에 있다. 극단적으로 최소강령적 원리에 의해 형성된 조직과 이념은 때로 상위의 이념인 민중당파성으로부터 이탈하곤 한다. 36 그러므로 민중연합의 자원동원능력의 극대화조건인 최소강령주의 對 민중연합의 변혁논리인 민중당파성, 혹은 변혁내용의 극대화 조건인 계급당파성 사이의 상호적 결합이 필요하다. 그리해야만 민중은 역사변혁적 실천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민중신학은 민중사건을 예수사건으로 본다. 이것은, 변혁의 성공과 실패를 넘어서, 민중연합이 조직되고 이 연합에 의해 담보되는 실천을 예수사건이라고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중신학자들이 민중을 우상화한다는 비판 37은 민중을 구성적 실체로 보았을 때에만 설득력을 갖는다. 1세대와 2세대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을 사건적 실체로 보고자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민중을 구성적 관점에서 보았다. 하지만 여기서 설명하는 민중은 ‘사건적 실체’이고 이미 그 개념 자체에 당파적 지향이 들어 있으므로 이런 비판과는 무관하다. 그러므로 역사주체론적 민중신학은 민중형성을 ‘지금 여기’에서의 하느님의 뜻임을 선언한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의 민중연합이 지향하는 변혁의 내용이 ‘궁극적’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민중은 모순적 사회구조가 존재하는 한 각 시기, 각 상황에서 언제나 변형되어 형성되는 역동적 실체이기 때문이다. 현 단계에서의 민중은 ‘잠정적인 변혁지향’을 가질 뿐이며, 예수운동은 궁극적으로 변혁된 세계인 하느님 나라가 구현될 때까지 창조와 완성의 과정으로 계속된다.
성서에서의 민중형성, 두 가지 범례
성서는 팔레스틴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고대 이스라엘의 야훼신앙의 여정 이야기이다. 나는 야훼신앙의 요체가 민중당파적 실천에 있다고 믿는다. 38 물론 이것은 다양한 사회역사적 맥락과 다양한 실천주체들에 의해 여러 가지 형태로 구현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성서에는 ‘그때 거기’에서의 야훼주의자들의 민중당파적 실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요컨대 성서에는 앞 장에서 살펴본 민중개념화의 성서적 기초를 보여주는 수많은 자료들이 있다. 여기서는 다음의 두 가지 민중형성 이야기를 약술하기로 하겠다: ①사울 연합과 다윗 연합; ②예수의 민중연합.
(1) 사울 연합과 다윗 연합
사울 연합과 다윗 연합은 모두 이스라엘 평등사회의 붕괴과정을 배경으로 하는 군사적 대중연합이다. 그러므로 이 연합에 대하여 이해하려면 초기 이스라엘 평등사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갓월드(N.K. Gottwald)의 가설에 따르면 이 사회는 에집트의 종주권이 약화된 상황에서 성읍국가 형태로 난립된 상태의 군소 국가들로부터 이탈한 농민들의 혁명에 의해서 형성되었으며, ‘성읍국가-농경공동체’의 사회적 생산물의 전유관계를 해체하고 부족공동체적인 사회적 생산관계의 평등한 분배를 지향하는 ‘복구적인 새로운 정치체’의 결성을 통해서 성립된 것이다. 39 그는 이러한 복구적인 새로운 정치체 지향운동을 ‘사회종교적 재부족화’(socioreligious retribalization)라고 명명하는데, 이것은 ‘확대가족(extended families)-확대가족 보호연합체(protective association of families)-지파(tribes)-지파연합(Israel)’으로 구체화한다. 40 여기서 재부족화의 초점은 이 네가지 수직적 조직에서 (앞의 두 조직에 있다기보다는) 뒤의 두 조직에 있다. 왜냐하면 위에서 성읍국가시대의 사회적 생산물의 전유관계를 나타내는 ‘성읍국가-농경공동체’ 관계에서 ‘성읍국가’는 독점적 지주(상급소유)를 중심으로 하급소유가 포섭된 일종의 군소지주연합체의 ‘정치적 구현체’인 반면, 41농경공동체는 농업에서의 협업을 토대로 하여 유지되는 ‘경제적 구현체’로서 ‘확대가족-확대가족 보호연합체’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생산력의 변화를 초래할만한 상황이 전제되지 않는 경우 상위의 정치적 조직체가 변화되었다 하더라도 농경공동체의 구성은 변함이 없으리라는 것이다. 요컨대 재부족화의 요체는 군소지주연합의 정치적 구현체로서의 성읍국가가 노동대중인 농민의 정치적 구현체로서의 ‘지파-지파연합’으로 (복구적으로) 바뀌었다는 데 있다. 42
그런데 고대 농경시대의 생산력의 발전이 기술적 발전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주로 영토의 확장과 관련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생산력의 발전은 보다 커다란 영역(지리, 인구)을 포괄할 수 있는 정치적 조직체의 형성을 통해 담보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이스라엘 평등공동체가 성읍국가시대보다 발전된 사회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정치적 조직의 관점에서 초기 이스라엘 평등공동체는 성읍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은 지리적 영역과 인구 영역을 포괄하는 정치적 조직체였기 때문이다. 43 그러므로 이스라엘 평등사회는 평등지향의 사회인 동시에 상대적으로 높은 발전을 담보한 사회인 것이다.
따라서 이 사회의 존속 가능성은 주변의 경쟁적 사회에 비해 지리와 인구에 있어서 우위에 있을 때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이 사회의 지향 논리인 평등지향이 잘 지켜진다는 조건을 전제한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이스라엘 평등사회를 초기.중기.후기로 구분하고, 평등지향의 사회적 실행능력의 상대적 크기를 ‘중기>초기>후기’로 나타났다고 본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생산력상의 발전의 상대적 크기를 같은 방식으로 보고자 한다. 44
아래 표는 발전능력 상대적 크기와 평등지향의 사회적 실행능력의 상대적 크기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평등사회의 형성에서부터 고대국가 형성기인 다윗 왕국, 그리고 고대국가 완성기인 솔로몬 왕국에까지 위치를 개략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여기서 이스라엘 평등사회의 전성기로 가정하는 중기 이스라엘 평등사회를 평등지향의 사회적 실행능력의 최대치로, 그리고 고대국가 완성기로 보는 솔로몬 왕국을 발전능력의 크기의 최대치로 설정한다.
갓월드에 의하면 이스라엘 평등사회 붕괴의 요인은 내적, 외적 요인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는데, 외적인 요인은 블레셋 군사동맹의 등장과 관련되며, 내적인 요인은 평등공동체 내부의 계급/계층분화의 심화로써 설명할 수 있다. 전자는 발전의 상대적 크기에서 초기 이스라엘 평등공동체를 압도하는 경쟁적인 정치적 조직체의 형성과 관련되며, 후자는 평등지향의 사회적 실행능력의 내재적인 쇠퇴추세와 관련된다. 그는 이 양 측면의 요인 가운데 외인이 국면적으로 해체의 계기적인 요인이라고 본다. 45
max-D
발 전 의 크 기 (상대치)
nin-d | Sol Dav Ec-m
Ec-f
Jud/Isr Ec-l(Sau) | |
| min-e Max-E 평등지향의 사회적 실행능력의 크기(상대치) | |
| 평등공동체(EC): 초기(EC-f), 중기(EC-m), 후기(EC-l) 의사왕정(사울): 사울시대(Sau) 다윗-솔로몬 왕국: 다윗 시대(Dav), 솔로몬 시대(Sol) 분열왕국시대: 남왕국 유다(Jud), 북왕국 이스라엘(Isr) |
블레셋 군사동맹은 철제무기와 전차전술이라는 군사적 능력과, 의사 전제군주화한 다섯 부족의 군사적 연합체라는 정치조직적 능력으로 주변 성읍국가들을 압도하였으며, 46이스라엘 평등사회로서도 감당하기에 벅찬 상대였다. 더욱이 이스라엘 지파동맹 지도부인 중앙성소 엘리트의 카리스마적 권위 상실(삼상 2,12이하), 지파간 갈등 혹은 지방색 심화, 47및 평등적 질서의 해체경향(삼상 22,1~2) 등으로 이 시기에 동맹은 상당부분 흔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아펙 전투에서 이스라엘 연합군이 패하고 이 동맹의 지도부인 실로의 사제집단이 몰락한 후, 사무엘-사울로 이어지는 종교적-군사적인 새로운 지도부의 등장과 더불어 이스라엘 평등사회는 중부지파 중심으로 재연합에 성공한다. 48 그런데 이스라엘 평등사회는 위의 표에서도 보는 것처럼 평등지향의 사회적 실행능력의 상대적 크기가 매우 높다. 따라서 성읍국가의 국가논리인 사회적 생산물의 독점적 분배를 더욱 확대발전시킨 블레셋 군사동맹체에 대항하여 이스라엘 평등사회를 수호하기 위해 형성된 사무엘-사울 중심의 동맹(이하 사울 연합 49)은 민중당파적 동맹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민중연합인 것이다.
한편 사울은 블레셋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맞서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의용군 체제 50를 개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본거지를 일종의 군사적 지휘본부로 삼아 요새화하였으며, 51상비군 체제를 도입하였다(삼상 14,52). 이것은 이스라엘로부터 일정한 잉여생산물의 전유를 필요로 한다. 물론 이것은 강제성을 지니기 보다는 자발적인 성격을 띤 것이리라. 필시 이 자발적 기탁자―여기에는 사울 자신의 가문도 포함되었으리라 52―는 이스라엘 평등사회(특히 후기)에서 꽤 진척된 계급/계층 분화 과정에서 상향분화한 특권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부류가 현 이스라엘 지파동맹 체제의 질서를 수호하려는 가장 강력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즉 이들이 사울-사무엘 동맹의 주요 지지세력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사울동맹은 중부지파들의 지지를 한 축으로 하고 지파동맹에서 상향분화한 집단의 지지를 다른 한 축으로 하는 민중연합인 것이다.
다윗은 사울의 상비군에 편입됨으로써 이 동맹군에 참여한다. 그는 동맹군에 참여하기 이전부터 용병대장으로서 자신의 개인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던 것 같다. 53 그런데 그의 주변에 모여든 집단은 가족과 친족, 그리고 특히 이스라엘 평등사회의 내적 모순으로 인한 박탈계층(삼상 22,2)이었다. 다윗부대는 기층대중을 지지기반으로 하여 형성되었기는 하지만, 그들은 이념지향적 집단이 아니다. 54
사울이 전사한 길보아 전투 이후 일련의 상황전개는 다윗부대의 탈이념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아마도 블레셋의 공격에 가장 노출되어 있는 남부의 유다 지파는 당시 블레셋의 봉신이었던 다윗을 불러들임으로써 일종의 블레셋의 예속지역이 될 것을 자청한 것 같다. 55 이때 유다의 장로들이 그에게 ‘기름부음’ 의식을 거행함으로써(삼하 2,4) 새로운 동맹인 다윗 연합이 형성된다. 그러나 이 연합은 정치적 지도력의 공백기에 일종의 투항형식으로 형성된 것으로, 다윗과 그의 용병부대의 이해관계를 과도하게 관철시킨 것이다. 56 따라서 이 연합은 지파연합의 지향이데올로기의 성격을 특징짓는 민중당파성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이 연합이 어떤 이념적 지향을 선택할 것인지는 열려진 가능성이었지만 그 주도권은 블레셋의 봉신이었던 다윗과 그의 용병부대에 있었다.
다윗이, 사울의 아들 이스바알을 지도자로 하여 재연합한 중부와 북부 지파들의 연맹 57과 전쟁을 벌였다는 사실(삼하 2장)은 그가 블레셋의 지지를 받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다윗은 헤브론을 거점으로 하여 남부 지파(들)의 동맹을 관할하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지도자가 아니다. 그는 필시 시글락과 헤브론 및 그 주변 일대를 개인 소유지로 장악하고 있었을 것이며, 58 이것은 성읍국가 시대의 군주들이나 블레셋의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사유지에서의 잉여생산물과 잉여노동의 독점적 전유를 기본적 원칙으로 하는 지도력, 즉 왕(melek)을 의미한다. 59 여기서의 잉여를 통해 다윗은 자신의 개인부대를 양성할 수 있었고, 이들에 의해 수행된 계속된 전쟁을 통해서 획득된 전리품은 다시 그의 지도력 강화로 이어진다. 다윗이 택한 이 연합의 길은 ‘왕국으로의 길’이었던 것이다.
사울 연합과 다윗 연합은 이스라엘 평등사회의 붕괴와 왕국으로의 전화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주체적 선택의 두 유형이다. 60 블레셋이라는, 이스라엘 동맹 붕괴의 주된 외적 요인이 이 두 연합의 형성을 촉발하였지만, 동시에 이 두 연합은 이스라엘 지파동맹의 이념인 평등지향의 사회적 실행능력의 내재적인 쇠퇴추세의 소산이다. 지파동맹의 평등 에토스가 그 사회적 실행능력을 상당부분 상실함에 따라 빈부 격차가 심화된 것이다. 사울 연합은 주로 이 계급/계층부화된 사회의 상류층으로부터 지지를 받는다. 반면 다윗 연합은 이 사회의 박탈집단의 경험을 공유한다. 즉 다윗연합은 기층대중연합의 성격을 갖는다. 그런데 사울 연합은 이스라엘 ‘평등’사회의 수호를 그 명분으로 하는 반면(통합지향), 다윗 연합은 탈이념적인, 단지 전투능력이라는 기능적 우월성을 그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연합체이다. 하지만 다윗 연합에게는 이스라엘 사회에 대한 일종의 저항감이 내재되어 있었다(해체지향).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회가 이념적 지향이 명백한 사회라는 점에서 탈이념적 집단의 형성은 기존 이념지향에 대한 저항을 전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집단은 ‘왕국에로의 길’을 주도하는 주체가 된다. 요컨대 사울연합은 질서지향과 평등지향을 동시에 갖는 다는 점에서 ‘체제연합으로서의 민중’이라 할 수 있으며, 다윗 연합은 체제에 대한 기층대중 중심의 도전연합이지만 어떤 점에서도 결코 민중연합은 될 수 없다. 따라서 사울연합은 정치적 민중연합의 한 유형을 보여준다.
나는 여기서 민중연합으로서의 사울 연합의 실패 요인에 관한 분석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 작업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소재여서 사울 연합에 관한 시론적인 논술에서 다루기는 벅차기 때문이며, 또한 이 항목의 논술 이유가 민중신학의 민중개념화의 성서적 기초를 제시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보다는 이러한 이야기가 성서의 주된 진술방향과 모순된다고 느낄 독자의 정서가 걱정된다. 하지만 주지하듯이 사울-다윗 이야기는 신명기적 역사의 일부로서 주전 8세기말(혹은 7세기 초)부터 6세기까지의 시대적 배경에서 완성된 형태로 편집된 것이다. 그리고 정경적인 편집은 주전 2세기에 와서야 이루어진다. 요컨대 사울-다윗 이야기의 많은 부분은 후대의 상황과 평가를 내포한다. 만일 우리가 신앙의 성서적 근거가 이스라엘의 야훼에 대한 신앙고백을 오늘 여기서 재현하는 데 있다고 한다면, 줄거리의 전체적인 진술(Great Tradition) 방향은 신앙을 위한 성서 독서의 일면적인 진실을 담보할 뿐이다. 나는 단편적으로만 남겨져 있는 자료들(Little Tradition) 61로부터 추정되는 사울과 다윗 자신의 시대의 역사를, 그리고 그 시대의 민중의 집약적인 야훼신앙 고백과 실천을 재현함으로써 성서 독서의 다른 측면을 강조한다.
(2) 예수의 민중연합
예수의 민중연합에 대하여는 이미 나의 글 〈민중신학 민중론의 성서적 기초〉, 《예수・민중・민족》와 《실천적 그리스도교를 위하여―예수운동의 혁명성 문제》 62에서 서술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개요만 약술하기로 하겠다.
예수운동은 1세기 팔레스틴의 피지배대중 일반을 주요 지지자층으로 하여 전개된 운동이다. 주요 지지자층은 크게 두 유형의 사회학적 범주로 나뉘는데, 하나는 토지에 긴박되어 있는 소농민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적 요인으로 인해 비자발적으로 토지에서 이탈된 집단(오클로스)이다. 전자는 운동의 전기국면(제2단계 갈릴래아 ‘촌락회당’ 단계)에서 주요 대중인 반면, 후자는 제3단계 이후(갈릴래아 ‘호숫가’ 단계와 예루살렘 성전 단계)에서 주요대중이다. 63 이렇게 예수운동의 대중활동의 주요 대중이 바뀌게 된 요인은 운동의 전략집단의 내적 신념 변화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정치적 공권력인 안티파스 체제와 촌락의 지배기구를 형성한 회당의 중심세력인 바리사이간의 반예수전선 결성과 관련된다. 64
예수운동의 이념적 기반은 이스라엘 피지배대중의 오랜 묵시적인 메시아 염원과 관련된다. 65 이런 경향에는 착취자 일반에 대한 적대가 함축되어 있기 마련이다. 특히 묵시사상에는 반외세의 정서가 핵심을 이룬다. 66 예수운동은 식민지 지배국인 로마와 그 예속 정권들인 성전체제나 안티파스 체제 등 지배계급 일반에 대항한다. 더 나아가 운동의 전개 상황이나 많은 담론들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예수운동은 촌락회당의 지배자들인 바리사이들과도 적대관계에 있다. 이것은 당시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성전-회당 연계체계를 통해 피지배대중에게 생활률로서 발현 67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운동의 전략집단은 당시 팔레스틴의 피지배 대중을 향해 이러한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사건을 일으키고 담론을 유포시켜 자신들이 펼치는 민중운동에 명시적인 협조자 68가 되기를 유도한다. 필시 예수운동의 전략집단은 유월절 절기 때에 대중이 대대적으로 운집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명시적인 대중의 지지 69를 통해 지배연합에 대한 도전연합으로서의 민중연합을 도모했던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갑자기 도래하는 대파국의 변혁주체로서의 예수의 이 민중연합은 대중운동적 성격을 지니면서도 급진적인 변혁전망을 가졌던 것이리라.
요컨대 예수운동은 당시 사회의 피지배대중 일반을 지지자층을 하는 급진적인 체제변혁적 도전연합으로서의 민중연합의 관점에서 파악될 수 있다.
맺음말: 민중운동으로서의 한국 그리스도교 운동을 전망하며
민중신학은 한국 그리스도교의 사회적 실천에 관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민중의 역사주체론’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제기된 민중신학의 실천적 테제이다. 그러나 이 신념은 바로 그 실천적인 결함 때문에 도전을 받고 있다. 앞에서 말한 이 도전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하면 이렇다. 하나는 교회의 신학을 요구하는 관점에서의 대중적 신학에의 요구이며, 다른 하나는 시민사회론적 함의를 갖고 제기되는 중산층/신중간계급의 문제이다. 이 비판의 극단으로 가면 ‘민중 역사주체론’의 폐기가 요구된다. 그러나 나는 앞에서 민중의 역사주체론은 여전히 유효하며, 현재 제기되는 이 문제들과 모순되지 않는 민중개념화가 가능함을 보였다. 나는 여기서 맺음말을 대신하여 내가 시론적으로 제시하는 민중개념화를 토대로 민중신학과 한국 그리스도교 민중운동에 관한 전망을 제시코자 한다.
우선 나는 그리스도교 운동의 실천 단위의 다양성 및 다원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적어도 현재로는 한국 그리스도교 운동의 실천 단위는 통합되어 있지 않으며, 통합의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운동을 전반적으로 이야기할 때 이 다원적인 실천을 유형화할 필요가 우선적으로 요청된다. 나는 이데올로기적 지향을 중심으로 계급적 성격, 계층적 성격, 그리고 계급/계층복합적 성격을 구분할 수 있다고 보고, 주요 활동 영역을 중심으로 국제적, 국가적, 지역적 성격을 구분할 수 있다고 본다. 이데올로기적 지향별 범주를 가로축으로 놓고 활동영역 범주를 세로축으로 놓으면 가로축의 범주들과 세로축의 범주들이 교차하는 9 가지 유형이 만들어진다.
일반적인 교회는 지역적 운동인 동시에 계급/계층복합적 운동의 성격을 지닌다. 또한 이른바 ‘민중교회’는 지역적 성격을 갖는 동시에 계급적 성격을 갖거나 혹은 계층적 성격을 갖는 경향이 있다. 한편 교회들의 연합체로서의 ‘교회’가 있다. 이것은 다분히 계급/계층복합체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개별 교회와 일치하나 활동영역은 국가적 혹은 국제적인 차원을 갖는다.
| 계급적 운동 | 계층적 운동들 | 계급/계층복합적 운동 |
국제적 운동 |
|
| 교회 연합체로서의 교회 |
국가적 운동 | 그리스도교 사회 | 운동 조직체들
| |
지역적 운동 |
|
| 교회 |
그밖에 우리가 흔히 ‘그리스도교 사회운동’ 70이라고 말하는 영역을 담보해온 조직체들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조직체들은 대체로 계급적 성격을 지니는 경향이 있고 또 활동 역역에 있어서는 국가적 성격을 지니거나 드물게 지역적 성격 71을 지닌다.
지금까지 한국 그리스도교의 민중적 실천 역량은 계급/계층적이고 국가적인 차원의 ‘그리스도교 사회운동’ 조직체들이 담보해온 것으로 보인다. 교회의 참여는 대체로 목회자의 개별적 참여에 국한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 외에 교회 연합체로서의 ‘교회’도 일정한 몫을 담당해 오기는 했으나 ‘그리스도교 사회운동’ 조직체들의 외곽단체 혹은 후원단체 정도에 그치는 감이 있다.
한편 앞의 2장에서 요약한 것처럼 민중신학은 제1세대의 경우 ‘지식인 중심의 민중운동이 주도하던 시대의 실천 인식’과 관련되었고, 제2세대의 경우는 ‘계급적 민중운동이 폭발적인 팽창을 거듭하던 시대의 실천 인식’과 관련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 인식은 ‘국가적’인 변혁전망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민중신학의 실천적 함의는 교회의 신학으로서보다는 ‘그리스도교 사회운동’과 유친성을 갖는 것 같다.
우리가 흔히 ‘변화된 상황’이라고 부르는 최근의 상황은 일국적 변혁론에 경도된 계급론이 퇴조하는 한편 국제적인 그리고 지역적인 차원의 변혁 문제가 부각된다. 여기서 ‘지역적’이라 함은 ‘××도(道)’라든가 ‘도시, 농촌’ 등과 같은 광역적 지역이라기보다는 72 우리의 생활세계와 관련된 미시 영역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사회운동’의 이데올로기와 활동 영역에서의 인식지평의 확대가 요청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중의 모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계급/계층의 실천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혹은 현재 참여하고 있는 여러 영역을 민중연합에 포괄할 수 있는 폭이 필요하다. 이것은 국제적인 계급/계층적 연대 그리고 대중의 생활세계를 구성하는 지역적인 실천의 민중적 가능성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과 관련된다. 물론 민중신학은 이런 보다 유기적인 계급/계층적 연대와 국제적, 국가적, 지역적 성격이 결합되는 실천적 신학이론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인식은 시민사회론의 함의를 포용하는 유연한 계급론적 민중연합을 위한 기초가 될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지역적이거나 국제적인 그리고 계급/계층복합체적인 교회는 일국적이고 계급환원론적 변혁론에 기초한 민중연합에 참여할 통로가 사실상 폐쇄되어 있는 샘이었다. 만일 이런 유형의 민중연합에 교회가 참여하려면 교회 대중의 토대와의 괴리를 감수해야 하며, 참여를 포기하면 비민중적 그리스도교의 하나라는 ‘오명’을 피할 길이 없다. 이런 점에서 최근 ‘교회의 신학’을 강조하면서 민중신학을 향해 가해지는 문제제기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민중신학이 ‘그리스도교적 전통언어’나 ‘성서적 언어’ 사용에서 인색했기 때문에, 그래서 ‘전통 언어’와 ‘성서적 언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해결방안이라면 교회가 민중형성의 차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교회와 지역사회의 문제를 인식하고 다양한 실천 방안을 모색해야 하고, 민중신학이 지금까지 지역성을 배려하지 않는 전체성, 거대담론 중심성에 경도된 신학작업을 지양하고 지역의 변혁과 국가의 변혁 문제가 통일될 수 있는 신학적 실천이론을 형성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나는 이 글에서 민중신학의 민중개념화를 통해 우리 사회가 규정하고 있는 민중 모집단에 포괄되는 여러 계급과 계층의 다양한 실천이 포용되는 실천이론을 전망코자 했다. 또한 거시적인 세계에서부터 미시적인 세계까지를 총체적으로 포함하는, 하느님의 창조 세계 곳곳이 함께 변혁되는 실천이론을 전망코자 했다. 그리고 민중신학이 교회와 ‘그리스도교 사회운동’의 여러 운동 조직체들 및 아직 잉태하지 못한 민중적 조직들과 실천을 통해 보다 다정한 연인으로 만나기를 이 글에서 전망하였다. □
- 서남동 교수의 ‘성서적 전거’라는 개념을 원칙적으로 수용하되, 다른 전거들에 비해 ‘성서적 전거’의 비교 우위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에서 ‘성서적 기초’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서남동의 ‘전거’ 개념에 대하여는 〈대담: 민중신학을 말한다〉, 《민중신학의 탐구》 (서울: 한길사, 1984) [본문으로]
- 나는 ‘민중개념화’를 위한 성서적 기초를, 안병무 교수의 오클로스론을 검토하면서 시론적으로 제시한 바 있다. 김진호, 〈민중신학 민중론의 성서적 기초―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을 중심으로〉, 《예수・민중・민족》 안병무 교수 고희기념 논문집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2). [본문으로]
- 서남동의 말기 논문의 하나인 〈빈곤의 사회학과 빈민의 신학〉에서야 구조적 맥락에 대한 분석적인 시도가 신학적 잡업 속에 활용된다. 이 글은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한길사, 1984)에 수록되어 있다. [본문으로]
- 그 단적인 예가 김용복의 ‘민중사회전기’라는 개념에서 발견된다. 이에 대하여는 그의 글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민중사회전기〉, 《기독교사상》 (1982.8) 참조. 서남동은 다른 1세대 민중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개념을 받아들여, 자신의 ‘합류’ 개념에 활용하였다. 예컨대 〈민담에 관한 탈신학적 고찰〉, 《1980년대 한국민중신학의 전개》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이하에서는 《전개》로 표기]. [본문으로]
- 송기득, 〈민중신학의 정체〉, 《전개》, 70~73쪽. [본문으로]
- 조희연과 김동춘은 60년대와 70년대 한국 사회과학의 주류 패러다임의 성격을 ‘균형’, ‘정태적 안정’, ‘합의’ 등으로 요약한다. 이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세계관에 대한 순응적 태도와 관련된다. 이에 대하여는 조희연・김동춘, 〈80년대 비판적 사회이론의 전개와 ‘민족・민중사회학’〉, 《한국사회의 비판적 인식―80년대 한국사회의 분석》(서울: 나남, 1990), 16~26쪽 참조. [본문으로]
- ‘총체적 소외’라는 애매한 개념화는 김지하로부터 빌려온 ‘한’ 개념에 대한 사회학적 개념화의 난맥성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이러한 접맥이 가능했던 근거는 아마도 권위주의적 독재정권하에서 자행된 정치적 착취에 대한 문제인식의 공유였으리라. [본문으로]
- 한완상, 《민중사회학》 (서울: 종로서적, 1984). [본문으로]
- 한상진, 〈‘민중사회학’의 이론구조와 쟁점〉, 《민중의 사회과학적 인식》 (서울: 문학과 지성사, 1990) [본문으로]
- 서광선, 〈한국의 민중신학〉, 《전개》, 53쪽. 나는 안병무 교수의 민중론을 검토하면서 그의 민중론이 ‘민중이 역사의 존재론적 주체’라는 전제하에서 결국 민중과 연대하는 비민중 특히 지식인의 실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밝혔다. 즉 민중과의 부단한 동일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일종의 ‘하방품성론’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진호, 앞의 논문 참조. [본문으로]
- 안병무,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전개》, 476쪽. [본문으로]
- 최근 한 독일 연구자는 민중신학과 남아프리카교회협의회의 문건을 비교연구하면서 민중신학이 실천 윤리로서 기능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C. Linnemann-Perrin, 〈교회의 정치적 책임―한국 민중신학과 남아프리카 정치신학의 비교〉, 《예수・민중・민족》. 비록 그의 연구가 형평에 맞지 않는 비교자료를 채택함으로써 비교방법상의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보이지만, 그의 결론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1세대 민중신학자들을 계승하면서도 정치윤리적 논의를 발전시킴으로써 실천윤리의 결여를 극복하려는 권진관 교수의 시론적 시도는 주목할 만하다. 권진관, 〈크리스찬의 정치적 행동을 위한 종합적 판단 방법〉, 《전환기의 민중신학―竹齋 서남동의 신학사상을 중심으로》 (한국신학연구소, 1992). [본문으로]
- 물론 이 말은 민중신학이 실천과 무관한 이론이라는 말은 아니다. [본문으로]
- 이 문제는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논의가 분화된다. 하나는 세계 자본주의 운동에 주목하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적 자본주의의 발전에 주목하는 관점이다. 조희연・김동춘, 앞의 논문, 26~38쪽. [본문으로]
- 김창락과 강원돈이 이점에서 가장 명료한 입장을 표명한다. 김창락, 〈민중신학에 있어서 민중의 의미〉, 《한국민중론의 현단계》 (서울: 돌베개,1989); 강원돈, 《物의 신학》 (서울: 한울, 1992). 반면 박재순은 “기층민중을 중심으로 파악하되 민주화세력인 중간층(지식인・가진자)과 연대하는 ‘개방적 존재’, 운동과정 속에서 주체적 민중으로 형성되어가는 ‘과정적 존재’, 사회변혁세력으로서 사회적 힘을 확보하는 ‘객관적 존재’”로 규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많은 것을 고려한 것이기는 하되, 사회학적 개념화로 보기에는 너무 추상적이다. [본문으로]
- 강원돈, 〈한국사회 민주화와 기독교의 실천전략〉, 같은 책 참조. 한편 한국사회를 예속적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하는 그의 관점에 대하여는 그의 글 〈신학적 해석학의 새로운 모색―민중문화운동의 민중신학적 수용〉, 같은 책 참조. 이러한 민중개념화는 박현채의 민중론에서도 볼 수 있다. 박현채, 〈민중의 계급적 성격 규명〉, 《한국사회의 계급연구》 (서울: 한울, 1985). [본문으로]
- 한상진은 이를 “범주의 수준에서 민중과 계급을 혼돈한 결과”라고 본다. 한상진, 〈민중, 중산층, 中民의 정체성에 관한 연구〉, 《사회운동과 사회개혁론》 (서울: 전예원, 1992), 209쪽. 나도 이와 유사한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앞의 글, 185쪽. [본문으로]
- 계급은 이 양자의 상호성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모순론적 관점에서만 계급의 문제를 파악하면 구조환원론에 빠지게 되는데, 구조환원론에 대한 최근의 대표적 비판으로는 E. 라클라우와 C. 무페, 《사회변혁과 헤게모니》 (서울: 터, 1990)를 참조하라. 한편 R. Brenner는 일종의 ‘생산관계 우월론’의 입장에서 계급투쟁을 강조하면서 이행(또는 변혁)의 문제를 ‘계급투쟁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봄으로써, 그리고 E. Balibar는 “계급들의 실존과 정체성을 계급투쟁의 경향적 효과”라고 봄으로써 마르크스주의적 ‘아킬레스건’인 구조환원론적 오류를 극복한다. R. 브레너, 〈前산업시대 유럽의 농업게급구조와 경제발전〉, 《농업게급구조와 경제발전―브레너 논쟁》 (서울: 집문당, 1991)와 〈유럽자본주의의 농업적 뿌리〉, 같은 책; E. 발리바르, 《역사유물론 연구》 (서울: 푸른산, 1989), 48~51쪽 참조 [본문으로]
- 최근 우리 학계에서 활발하게 제기되는 ‘시민사회론’은, 그 논의의 배경이나 관점에 있어서 다양한 함의를 갖지만, ‘계급환원론적’ 마르크스주의 논의가 현재 사회운동의 실체를 경험적으로 충분히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는 공통된 인식에 근거한다. 이에 대하여는 한상진, 〈세계적 변혁기의 민주주의 재조명―마르크스를 현대의 논쟁에 접목시키는 길〉, 《마르크스주의와 민주주의》 (서울: 사회문화연구소, 1991) 참조. [본문으로]
- 강원돈의 물의신학에 문제를 제기한 서진한의 글은 바로 이런 관점을 대변한 것이며, 이에 대한 첫 번째의 명시적인 주장은 박재순의 〈민중신학, 무엇이 과제인가〉, 《기독교사상》 373(1990.1)에서 볼 수 있다. 서진한, 〈80년대 민중신학의 과학성과 대중성―80년대 후반 ‘소장 신학연구자’들의 작업에 대한 평가와 전망〉, 《진통하는 한국교회》 (서울: 민중사, 1990) 참조. 한편 한국민중교회연합이 주최한 심포지엄 〈민중신학과 민중교회〉(1992.9)는 바로 이런 입장을 개진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특히 김광훈의 글 〈민중교회의 어제와 오늘〉 참조. 또한 《예수・민중・민족》에 수록된 노창식의 글 〈민중신학과 민중교회의 실천〉 참조. [본문으로]
- ‘내용’에 관한 지적은 1세대 민중신학자들의 경우에는 ‘반신학’ 또는 ‘탈신학’(서남동), 그리고 2세대 민중신학자들의 경우에는 마르크스주의와 유신론적 신앙과의 모순관계를 ‘무시한’(?) 결합(강원돈)이 관념적 급진주의라는 비판으로 나타났고, ‘언술형식’에 대한 지적은 2세대 민중신학자들이 (교회)대중으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난해한’ 논리구조와 언술체계를 펴고 있다는 비난과 엇물려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들은 제한적으로만 타당하다. 왜냐하면 자칫 이런 비판은 이론적 무정부주의 또는 반지성주의의 다른 표현방식으로 사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개념적 성찰이 결여된 채 ‘민중신학하기’(doing Minjung-Theology)의 방식으로 논의되어 온 이른바 ‘이야기 신학’은 여러 함의로 사용되는 전략적 용어인데, 많은 경우에 반지성주의의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이를 극복하려는 하나의 시도로 김창락의 〈이야기 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 《새로운 성서해석과 해방의 실천》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0)은 민중신학의 성과물의 하나이다. 여하튼 ‘대중적 신학’의 문제는 전문성의 포기로써가 아니라 다양성, 개방성으로 담보해야 한다. [본문으로]
- 비록 민중신학 외부에서이긴 하지만 박종천의 호의어린 비판은 민중신학의 내적 발전에 매우 값진 문제제기라고 본다. 그는 한상진의 ‘중민’이론을 빌어서 민중신학 민중론의 계급론적 편향을 비판한다. 박종천, 〈1980년대 민중신학의 문제와 한국신학의 새로운 탐색〉, 《신학사상》 71(1990 겨울). 한상진은 모순에서 직접 실천주체를 도출해내는 환원론적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면서, 양극화변혁 모델에 대한 대안으로 중심화 변혁모델을,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중심의 변혁론에 대한 대안으로 중민 중심의 변혁론을 제시한다. 나는 이러한 그의 결론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의 논의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올 수 있었다. 한편 김명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여러 편의 논문을 통해서 중산층의 실천적 함의를 민중신학 안으로 포섭코자 한다. 김명수, 〈한국교회의 민중운동과 민중신학의 과제〉, 심포지움 민중신학과 민중교회 자료집(1992.9 미간행) 등 참조.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서구에서의 발생맥락과 한국에서의 적용맥락 사이의 함의 변화이다. 서구에서 이 사상적 조류는 마르크스주의 같은 거시적 통합이론 자체가 하나의 기득권적 체계로 성립된 상황에서 이익표출 기재를 갖지 못한 사회집단에 대한 관심이었지만, 한국에서의 적용맥락은 노동자 계급보다는 훨씬 유리한 중산층의 실천적 가능성의 재고와 관련된다. [본문으로]
- 다른 진보적 학술운동 진영의 경우 ‘마르크스주의의 복원’이라는 과제를 안고 등장한 2세대 연구자들의 활동은 실질적 의미에서 세대교체를 이룩한 반면, 민중신학의 경우는 별 의사소통 없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에 있어서 ‘시민사회론’적 문제제기는 1,2세대 양자에게 닥친 것이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 이런 관점에서 나는 중산층과 민중의 개념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려는 경향에 반대한다. 중산층은 하나의 계급적 혹은 계층적 집단범주가 아니다. 한완상은 중간제계층의 정치의식에 관한 실증적 연구에서 중간계층과 노동자계급간의 차이 보다 중간층 내의 차이가 더욱 두드러진다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한완상, 〈한국 중간제계층의 정치의식〉, 《계간 사상》 (1991 겨울). 이것은 한상진의 실증적 연구결과와도 일치하는데, 한상진은 한국사회에서 중산층은 증가추세에 있음을 밝히면서 88년 현재 도시가구의 35%를 점하고 있고, 신중간계급의 70%, 구중간계급의 40%, 노동자계급의 20% 정도를 포함하고 있다고 보면서 이들의 일부는 권력연합에 참여하는 경향이 있고 다른 일부는 민중연합에 참여하는 경향이 있음을 주장한다. 한상진, 〈중산층의 개념화를 위한 시도―중산층의 규모와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중심으로〉, 《중민이론의 탐색》 (서울: 문학과 지성사, 1991)과 같은 저자, 〈모색―‘민중’과 ‘중산층’ 귀속 의식 연구에 기초하여〉, 같은 책 참조. 김성국도 마찬가지로 중간계급의 다층적 성격을 인정하면서, 현재로서는 민중과 중산층, 이 양자간의 상호공존이나 연대의 가능성과 상호이질화나 대립화의 경향이 동시적으로 존재함을 주장한다. 김성국, 〈민중의 중산층화 혹은 중산층의 민중화―중산층 사회론을 주장하며〉, 《사회비평》 창간호. 이들은 모두 중산층의 일부 집단은 노동자층보다 더욱 변혁지향적임을 강조한다. 물론, 중산층이 노동자층보다 변혁지향적일 가능성이 결코 없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한상진이나 김성국처럼 중산층의 일부가 변혁지향적 정치의식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변혁의 주체세력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낙관이다. 강문구가 옳게 지적한 것처럼 한상진의 ‘중민론’이나 김성국의 ‘중산층론’은 한국사회의 전망에 대한 가능성과 이에 대한 자신들의 당위적 신념을 과학적 전망과 혼돈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강문구, 〈한국 사회의 민주화, 사회변혁 그리고 피지배연합〉, 《사회비평》 7(1992.5), 338쪽 및 345쪽의 각주 60 참조. 한완상이 중산층 가운데 가장 변혁지향적인 세력으로 꼽는 ‘신중간계급’은 대다수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계급론자들에게도 유사한 관점으로 포착된 존재인데, 한완상, 한상진, 김성국과는 달리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학자들 다수는 ‘신중간계급’의 변혁지향성의 한계도 지적한다. E.O. Wright는 이들을 세 가지 생산적 자산 가운데,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일치하지만 다른 두 생산적 자산인 조직자산이나 기능/자격자산의 일부 혹은 전부를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집단은 ‘모순적인 계급위치’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앞의 책 참조). 실제로 이 집단은 정치적 국면에 따라 그 정치적 태도가 쉽게 변할 수 있는 상황적 성격을 보유하고 있다. 강문구, 앞의 논문, 332쪽. 여하튼 다층적인 중산층 가운데는 민중연합에 포괄될 수 있는 집단이 있는가하면, 그 반대의 입장을 가지는 집단도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즉 정치연합 개념으로서의 민중과 사회적 위치개념으로서의 중산층은 모순적 관계가 아니다. [본문으로]
- 이 용어는 한상진으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그에 의하면 한국 국가의 성격을, 라틴아메리카의 국가성격에 대한 설명적 패러다임인 관료적 권위주의의 한국적 변형태로 보면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의사결정 과정이 일부 상류층에 독점되어 왔고 또 근본적으로 민중억압과 배제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여성・노동자・청년학생세대・농민・자영업자・화이트칼라・중소기업가 등 다양한 성격의 집단들이 민중의 모집단이 될 수 있다고 본다. G.O'Donnell, 《관료적 권위주의와 조합체제》 열린글1; 한상진 엮음, 《제3세계 정치체제와 관료적 권위주의》; 한상진, 〈관료적 권위주의와 한국사회〉, 《한국사회의 전통과 변화》 (서울: 법문사, 1983); 같은 저자, 〈민중, 중산층, 중민의 정체성에 관한 연구―제조업 생산직과 화이트칼라를 중심으로〉, 《사회운동과 사회개혁론》 (서울: 전예원, 1992) 참조. [본문으로]
- ‘대중적 이론’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관점, 즉 민중이 그 모집단과 보다 근접하게 결정되는 사회적 제조건을 조명하는 이론화 작업을 말한다. 즉 대중적 이론의 요체는 반지성주의가 아니다. [본문으로]
- 최근, 계급론의 가장 열렬한 주장자의 한 사람인 서관모까지도 현재의 계급이론으로는 다양한 사회적 적대들의 환원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불가피함을 인정하고 있다. 서관모, 〈마르크스주의 게급이론의 현재성〉, 《이론》 1(1992 여름) 참조. [본문으로]
- 사회적 모순이 곧바로 사회적 적대를 낳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지배계급(들)은 이데올로기적 담론을 통하여 피지배계급들에게 모순을 ‘적대’가 아니라 단순히 ‘차이’로 인식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적대를 은닉하고자 한다. [본문으로]
- 사회구성체 개념은 알튀세르 계열의 학자들이 유행시킨 개념인데, 플란차스는, 생산양식을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층위의 절합의 관점에서 보면서, 사회구성체는 몇 개의 순수한 생산양식들이 절합되어 나타나는 것으로써, 생산양식보다는 구체성을 띤 개념으로 파악한다. N. Poulantzas, Political Power and Social Classes (London, 1973), 15쪽. 한편 한상진은 사회구성체론은 다양한 모순들의 관계를 밝히는 관점에서뿐 아니라 여기에 실천의 접목이라는 함의도 갖는다고 봄으로써 구조환원론적 경향을 넘어선다. 한상진, 〈중심화 변혁모델의 탐색―‘중민 노선’을 향하여〉, 《중민이론의 탐색》, 137쪽. 그런데 그의 사회구성체론은 알튀세르類의 ‘최종심급에서의 경제적 결정’ 테제를 폐기하며, 그 대신에 포스트계열의 학자들이 강조하는 ‘담론’(discourse)으로 대체한다. 한상진, 〈사회구성체의 논리와 계급문제―다원주의의 복원을 향해〉, 《사회계층: 이론과 실재》 선정 김채윤 교수 회갑기념 논문 참조. 그가 알튀세르처럼 최종심급에서의 경제적 결정론의 논거가 선험적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타당성이 있지만, 그 대신 담화환원론을 주장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의 선험적 판단에 기인한 것이라 생각된다. 담화환원론에 대한 비판으로는 신광영, 〈포스트 맑스주의와 계급분석: 비판적 논의〉, 《사회비평》 8(1992.9)을 보라. [본문으로]
- 분석마르크스주의자(Analytical Marxist)인 E.O. Wright는 J. Roemer의 착취개념을 빌어서 계급을 규정한다. 그에 의하면 착취는 생산적 자산의 불평등한 분배라는 사회적 관계의 문제이며, 생산적 자산이란 ①생산수단, ②조직자산, ③기능/자격자산 등이라고 본다. 이에 대하여는 그의 책 《국가와 계급구조》 (서울: 화다, 1985) 참조. 한편 J. Roemer의 착취이론에 대하여는 뢰머, 〈착취, 계급 그리고 재산관계〉, 《마르크스 이후》 (서울: 신서원, 1991) 참조. [본문으로]
- 구조는 행위자의 선택에 제한조건인 동시에 가능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는 A. Przeworski, Capitalism and Social Democracy (Cambridge, 1985), 제2장. 그리고 우리말로 번역출간된 그의 책 1장도 참조. A. 쉐볼스키,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사회민주주의〉, 한상진 편저, 《마르크스주의와 민주주의》 (사회문화연구소, 1991). 또한 J. Larrain도 역사적 유물론의 재구성을 제안하면서 경제적, 정치적 투쟁의 성격과 조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J. 라래인, 《역사유물론의 재구성》 (서울: 인간사랑, 1991). [본문으로]
- 성경륭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민주주의 정치체제간의 변증법적 관계를 분석하면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경향적으로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창출.확대하는 방향으로 전화된다고 보면서 이런 정치과정의 발전 정도는 민주화 지향세력의 헤게모니 집단이 누구냐에 따라 다양한 경로로 분화됨을 비교론적 방법에 입각하여 도출해낸다. 그에 의하면 노동자계급이 헤게모니 집단이 되고 이 민주화가 성공한다면(이때 성공과 실패의 배후에는 ‘억압의 비용’과 ‘관용의 비용’ 사이의 ‘크기의 법칙’이 작용한다고 본다), 가장 근본적인 변혁이 이루어짐을 분석해낸다. 이에 대하여는 성경륭,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변증법적 관계―자본주의 체제의 변혁 가능성 모색〉, 《사회비평》 6(1991.12) 참조. [본문으로]
- 성경륭은 동원의 대상이 되는 주요 자원으로 조직(그에게서는 ‘정당조직’)과 수(number), 그리고 연대계급(집단)을 든다(성경륭, 앞의 논문, 151쪽). [본문으로]
- 임혁백은 ‘영토적 기반을 가진 강제적 조직’으로서의 ‘국가’와 ‘국가의 직접적인 통제 바깥에서 개인들과 집단 간에 사적 또는 자발적 협정에 의해 조직되는 사회생활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를 구분하고, 다시 시민사회 영역은 ‘공동체’(community)와 ‘시장’(market)으로 나뉜다고 본다. 임혁백, 〈시민사회의 성장과 국가기구의 민주적 통제〉, 《한국의 국가와 시민사회》 한국사회학회・한국정치학회 공동학술발표회 연구논문집 (서울: 한울, 1992). [본문으로]
- 이에 대하여는 N. 무젤리스, 〈이데올로기와 계급정치: 라클라우 비판〉, 《포스트맑스주의?》 (서울: 민맥, 1992) 참조. [본문으로]
- 고세훈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79년(대처 행정부가 등장한 시기)까지의 영국 노동당의 최소강령적 사민주의가 몰락하는 과정을 다루면서, 그 실패 원인으로 영국 노동당의 사민주의의 탈이데올로기적 경향과 노동조합의 ‘임의주의’적 경향이 상호작용한 결과라고 보았다. 즉 전자는 탈이데올로기적 정치주의에 경도된 반면, 후자는 비정치적(따라서 탈이데올로기적) 경제주의에 경도되었다는 것이다. 고세훈, 〈영국 사회주의의 이념적 한계―노동당, 노동조합, 그리고 생산수단의 소유문제〉, 《한국정치학회보》 23/1(1989) 참조. [본문으로]
- 김지철, 〈예수의 민중성―하나님의 나라와 그 義〉, 《장신논단》 6 (1990) 참조. [본문으로]
- 《함께 읽는 구약성서》와 《함께 읽는 신약성서》(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1/1992)에서 우리는 성서를 야훼주의자들의 ‘그때 거기’에서의 민중당파적 신앙의 여정이라는 관점에서 조명하였다. [본문으로]
- N.K. Gottwald, The Tribes of Yahweh: A Sociology of the Religion of Liberated Israel 1250~1050 B.C.E. (Maryknoll, N.Y.: Orbis, 1979), 특히 Part V와 Part VI 참조. [본문으로]
- 같은 책 Part VI 참조. [본문으로]
- C. Tilly에 의하면 국가란 일반적으로 ①‘지정학적(geopolitical) 행위자’로서 국가간 경쟁체계의 현상유지 및 (필요한 경우) 전쟁의 수행에 필요한 사회.경제적 자원을 추출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하고 있으며, ②동시에 합리적 선택 이론에 바탕을 둔 ‘경제학적(economistic)행위자’로서 외부세력으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해 주는 대신 내부적 약탈을 통하여 국가 엘리트들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하는 속성을 갖는 정치체이다. 그런데 국가는 정당한 보호자가 아니라 위험을 생산하고 이에 대한 보호를 판매하는 일종의 ‘공갈단’(recketeering organigation)이다. 전상인, 〈틸리의 국가건설 비교연구〉, 《비교사회학: 방법과 실제 II》 (서울: 열음사, 1992), 102쪽. 성읍국가는 이러한 국가의 속성의 가장 원시적인 유형의 정치적 행위체라고 할 수 있는 바, 중앙의 군사적 요새와 주변의 농경지 사이의 군사적 ‘보호’와 보호의 비용으로서의 ‘예속’의 관계를 통해 (성읍)국가적 지주와 예농의 관계가 국지적으로 형성된 정치체이다. [본문으로]
- 이러한 관점은, 고대농경사회에서는 늘 그렇듯이, 국가이전시대-성읍국가시대-초기 이스라엘 평등공동체 시대-고대국가시대(다윗-솔로몬 왕국)-제국주의적 국가시대(식민지 시대)로 이어지는 고대 팔레스틴 사회는 사회구성체의 변화를 초래할만한 기술적 생산력상의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본문으로]
- 추정에 불과하지만 가나안 지역에서 형성된 최초의 고대국가는 다윗-솔로몬의 왕국이다. 물론 이 나라는 이스라엘 평등공동체의 종교공동체적 사회조직의 발전을 유산으로 물려받으면서 형성되었다. 나는 이것이 우연이라고 생각치 않는다. 국지적 수준에서의 연대만을 이룩할 수 있었던 성읍국가의 사회-종교적 메커니즘으로는 아무런 매개 없이 곧바로 훨씬 넓은 영토와 인구를 통괄하는 고대국가적인 사회-종교적 메커니즘으로 발전할 수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본문으로]
- 초기가 후기보다 발전능력이 우위에 있었다고 보는 이유는 초기에 비해 후기에 들어서 그 지리적 영역이 현저하게 축소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J.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 (上)》 (왜관: 분도, 1981). 또한 초기 이스라엘 평등사회의 경쟁적 사회조직이 성읍국가인 데 비해 후기 이스라엘 평등사회의 경쟁적 사회조직은 보다 발전된 블레셋 군사동맹이라는 점은 발전의 상대적 크기를 이와 같이 보게 하는 근거가 된다. [본문으로]
- 갓월드, 《히브리성서: 사회문학적 연구 1》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9), 382~83쪽. [본문으로]
- J. 브라이트, 앞의 책, 279~80쪽. [본문으로]
- 판관기 20장의 이른바 ‘베냐민 전쟁’은 지파연합의 중심적 역할을 한 베냐민 지파에 대한 유다 지파의 주도권 도전(20,18)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M.G. Rogers, "Judges, Book of", IDB Sup. 513~14쪽 참조. [본문으로]
- A.J.H. Gunneweg은 초기 이스라엘 사회 형성에 관한 Alt-Noth 학파 특유의 견해인 점진적인 이주가설을 엘 신앙과 야훼 신앙의 혼합과정 속에서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야훼 신앙은 중부지파들에게서 유래한 것이며, 전투의 신 야훼의 속성처럼 이 지파들이 전투에 능했다는 사실에서 정치적 동맹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성립이 가능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군네벡, 《이스라엘 역사》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1), 75쪽. 나는 그의 이주가설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중부지파들이 이스라엘 동맹의 중추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그의 설명으로 충분히 입증될 수 있다고 본다. 갓월드, 앞의 책, 179~80쪽 참조. [본문으로]
- 사무엘과 사울은 양자가 평등사회 질서의 수호자라는 점에서 일치된 입장에 있었지만, 아마도 점차 사이가 벌어졌던 것같다. J. Bright는, 전시상황에서 사울의 영향력이 점차 사무엘의 그것을 압도해가는 중에 사무엘의 고유권한을 침해하는 듯한 사울의 제의주관 행위(삼상 13,4,15)는 양자의 불화를 것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고 본다. J. 브라이트, 앞의 책, 293~4쪽 참조. 그런 점에서 블레셋의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형성된 사무엘-사울 중심의 동맹은 실제로 사울 중심의 동맹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 한편 최근 R.R. Wilson은 왕국 수립에 관한 사무엘의 역할을 보여주는 여러 전승들에는 그에 대한 여러 집단들의 이해가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사울-사무엘 연합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이스라엘 중앙제의의 우두머리였던 사무엘의 지지세력은 처음부터 사울에 대해 반대하고 있었고, 반대로 사울의 지지세력은 사무엘의 중심적 역할을 인정하지 않았고―물론 이들은 사무엘의 지지를 받아 내려고는 하였지만―그들 단지 지방의 한 선견자 정도로 보았다는 것이다. R.R. 윌슨,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과 사회》 (서울: 예찬사, 1991), 205~222쪽. 그러나 그의 가설의 결정적인 약점은 그가 사울의 지지파를 단지 왕조수립을 지향하는 집단으로 이해하였다는 데 있다. [본문으로]
- 의용군은 전 지파동맹적 차원에서 모병되는 데는 부적합하다. 그리고 장기전을 치루기에도 부적합하다. 왜냐하면 의용군에 의해 주도되는 군제(軍制) 상황은 미조직화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병을 위한 조직은 물론이고 다양한 이해관계의 집단들을 통솔할 지도력, 그리고 병참 문제 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지파동맹 시절에 전 지파동맹적 차원에서의 의용군에 의한 전투는 전혀 없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의용군에 관한 사회제도적 차원의 논술을 보려면 R. 드보, 이양구 옮김, 《구약시대의 사회풍습》 (서울: 기독정문사, 1992)의 제2장 참조. [본문으로]
- A. Mazar, Archeology of the Land of the Bible. 10,000~586 B.C.E. (N.Y.: Doubleday, 1990), 371~74쪽. [본문으로]
- 사무엘상 9장 1~2절은 사울의 가문이 베냐민 지파의 부유한 가문임을 시사한다. R.R. 윌슨, 앞의 책, 213쪽. [본문으로]
- 군네벡, 앞의 책, 104쪽. [본문으로]
- 실제로 다윗 부대는 사울 연합을 위해서도 봉사하였지만, 이념적으로 그 적대세력인 블레셋 군사동맹체의 봉신으로도 복역한다. [본문으로]
- 군네벡, 앞의 책, 112쪽. [본문으로]
- 하지만 다윗 자신이 의도했건 아니건간에 ‘기름부음’ 의식 속에 투영된 이스라엘 대중의 ‘민중왕’에 대한 기대는 왕조의 성립 이후에도 여전히 다윗 왕조의 ‘왕국으로의 길’에 일정한 제약조건으로 작용한다. Z. Weisman은 다윗의 기름부음 속에 대중의 ‘민중왕’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음을 밝힌다. Z. Weisman, “Anoiting as a Motif in thhe Making of the Charistic King”, Bib. 57 (1976). 또한 다윗 왕국의 완전한 성립 이후에도 다윗의 사제나 군대 편제가 이스라엘계와 비이스라엘계의 둘로 나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이 이스라엘 대중의 기대가 그의 정책에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받을 수 있다. [본문으로]
- 그 본거지를 요르단 동편의 마하나임이었다는 사실은 길보아 전투에서의 패배의 대가였을 것이다. [본문으로]
- 군네벡, 앞의 책, 116쪽. [본문으로]
- melek은, 고대 근동에서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왕’을 지칭하는 히브리어이다. 한편 성서는 사울을 nagid로서 묘사한다. 이 단어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로서의 ‘군사령관’을 뜻한다. 갓월드, 《히브리성서1》 383~4쪽 참조. [본문으로]
- 물론 역사의 진행은 주체적 선택의 필연적 결과이라거나 이 주체적 선택이 순전히 의도적인 행위들의 소산이라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 대한 주체적인 행위, 그리고 이에 의해 귀결하는 의도하지 않는 또 다른 결과 등의 과정이 개입된다. [본문으로]
- 지식인들의 민중전승까지를 포함한 다양한 사회적 담론들의 체계화된 문필과정과 엇물려 있는 great tradition과 농민의 단편적이지만 경험집약적인 little tradition은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농민을 포함한 사회 전 구성원에게 영향력 있는 전통을 형성한다. J.W. Flanagan은 이 인류학적 개념을 다윗 왕국 성립에 관한 연구에 적용한다. J.W. Flanagan, "The Relocation of the Davidic Capital", JAAR 47(1979) 참조. [본문으로]
- 서울: 나단, 1992. [본문으로]
- 예수운동의 전개와 그 지지자들에 관하여는 나의 책 《실천적 그리스도교를 위하여》 4장과 5장 참조. [본문으로]
- 그밖에도 예수운동의 지지자들 가운데는 상류층도 없지 않았으나 이들은 주로 ‘물적 후원자’ 이상의 역할집단으로 활동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하여는 나의 글 〈지지자들을 통해 본 예수운동 연구〉, 같은 책 보론 2 참조. [본문으로]
- 물론 묵시적 메시아사상에는 피지배 대중의 염원만이 함축된 것은 아니다. ‘묵시적 메시아 대망’은 당시 유다교 영역의 경향적인 특징이었다. H.C. Kee는 이러한 인식에서 자신의 신약성서 개론서를 저술하였다. H.C. 키, 《신약성서 이해》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2) 참조. 나는 신약성서 운동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구약 묵시문학을 계급론적 관점에서 조명한 바 있다. 이에 의하면 구약성서에 반영된 묵시운동들 가운데 적어도 네 경우는―이것들은 또한 가장 대표적인 묵시운동들이다―‘민중당파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정치적 급진주의’로 표현되는 계급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나의 글 〈구약문시문학의 종말론―계급론적 연구 시론〉, 《신학사상》 74(1991 가을) 참조. 한편 R.A. Horsley는 예수시대 민중운동을, E.J. Hobsbawm의 민중운동 연구서들인 《의적의 사회사》 (서울: 한길, 1982)와 《원초적 반란》 (충북: 온누리, 1984)를 빌어서, 네 유형을 분류한다. 여기에는 대중적 왕의 지도 아래 민중봉기로 귀결된 ‘대중적 메시아 운동’과 반체제적이기는 하되 상징적인 예언행위를 추구했던 ‘대중적 예언운동’을 분류한다. R.A. Horsley & J.S. Hanson, Bandits, Prephets, and Messiahs―Popular Movements in the Time of Jesus (Minneapolis. Chicago. N.Y.: A Seabury Books, 1985) ch.3과 ch4 참조. 그러나 나는 그가 암시하듯이 예수운동을 대중적 예언자 운동으로 단정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본다. 나는 예수운동이 성전에서 왕으로서의 예수를 중심으로 해서 대대적인 집단 저항을 모색하였음을 시사한 바 있다. 나의 책, 7장 참조. [본문으로]
- ‘문화접변’(cultural acculturation)이 묵시운동의 촉발요인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A.F.C. Wallace, Relation: an Anthropological View (Random House, 1966) 참조. 나는 문화접변을 단순히 문화적 관련성에서가 아니라 정치-경제적 착취와 상관관계를 가지고 팔레스틴의 민중적 묵시운동의 촉진요인으로 작용함을 분석한 바 있다. 나의 글 〈구약묵시문학의 종말론〉, 635~39쪽 참조. [본문으로]
- 이에 대하여는 나의 글 〈예수운동과 그 적대자들〉, 《함께 읽는 신약성서》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2), 특히 75~79쪽 참조. [본문으로]
- 예수운동의 전략집단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는 다양한 전술을 활용한다. 갈릴래아에서 예수일행은 열악한 대중활동의 국면에서 공개적 활동과 비공개적 활동을 적절히 배합한다. 이 과정에서 예수는 메시아적 존재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확산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대중이 메시아 운동에 대한 명시적인 지지를 표명한 것이 아니다. 또한 예수일행은 대중의 공공연한 명시적 행동을 자제케 한다. 이것은 아마도 열악한 운동의 상황에서 국부적인 소규모 저항을 지양하려는 의도와 관련되었을 것이다. 나의 글 〈예수운동의 전개〉, 《함께 읽는 신약성서》 참조. [본문으로]
- 예수는 피지배 대중에게 막연하게 알려진 메시아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자신들에게 나타난 존재임을 알리기 위한 의도적인 다양한 상징적 행위를 펼친다. 이에 대하여는 나의 책 《실천적 그리스도교를 위하여》 제7장 참조. [본문으로]
- 나는 이 용어가 실체를 규정하는 엄밀한 개념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 용어가 포괄하는 현실태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대안적인 개념을 제시할 능력은 없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되 작은따옴표로서 나의 문제의식을 표현코자 한다. [본문으로]
- 여기서 지역적 성격이란 대체로 도시와 농촌, 혹은 영남, 호남 등과 같은 광역지역이다. [본문으로]
- 최근 한 사회학자는 광역적인 지역과 관련된 우리 사회의 담론이 지배이데올로기의 주요한 요소임을 지적하였다. 조희연, 〈‘지역감정’과 한국의 민주주의〉, 《창작과 비평》 79(1993 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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