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우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는 역사의 예수론에 대한 나의 관점에 대해 <역사적 예수 담론의 종교문화사적 의미: 한국 교회의 쇠퇴 위기와 세계적인 탈그리스도교 시대에 역사적 예수 연구의 필연성을 중심으로>([세계의 신학] 57호. 2002 겨울)에서 비판을 하면서 나에게 반론을 쓸 것을 요청하였고, 이 글은 그 반론으로 집필된 것이다.([세계의 신학] 58 . 2003 봄). 그리고 그 이듬해 이 글에 부기를 달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2004년 5월 포럼에서 발표하였다.
팍스로마나 팍스아메리카나 팍스크리스티_세계의신학 (2003년 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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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로마나, 팍스아메리카나, 팍스크리스티아나
역사의 예수 연구의 정치성에 대하여[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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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의 시대는, 아마도 지난 세기 전반기에 있었던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이후 ‘위기’가 가장 고조되어 있는 시기가 아닌가 한다. 이른바 ‘지구화’globalization로 표상되는 거대한 사회적 변동 과정이 이러한 위기의 그 주된 계기라는 점도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대개의 사람들에 의해 인지되고 있는 바다. 물론 지구화에 대한 최근의 이론적인 논의들에 의하면, 그 전개가 미리 정해진 특정 경로를 노정한다는 결정론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공간에 대한 지각(또는 경험)의 변화와 ‘세계 내’ 체제들의 사회적 변동 사이의 상관성을 첨예하게 사유한 결과이고, 개별 경험과 사회 구조의 ‘파생물인 동시에 중개자’인 다중적 행위자의 다중적 행동이 지구적 맥락과 연계된 궤적을 따라 구성되고 있으며, 이들 다중 행위자들 간의 상호 투쟁와 공조의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지구화의 당대적 구체성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지구화의 추세는 ‘글로벌 자본’global capital 체제나 ‘글로벌 웨펀’global weapon 체제에 의해 추동되고 있는 듯이 보이고, 이러한 흐름의 결과가 인간을 포함한 전 지구적 존재들에게 어떤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생략하더라도, 당장의 모습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폭력적인 양상을 띠고 우리의 경험 속으로 시시각각 위협적으로 돌진해오고 있다.
공상만화를 보면 종종 갈등 당사자 간의 싸움이 로봇끼리의 싸움으로 표현되곤 한다. 웅장한 몸집의 로봇이 마치 태권도를 하듯 날렵하게 발차기를 하고 공중을 날아다니면서 격렬한 싸움을 벌인다. 격투기를 하는 로봇, 동시에 공중전을 벌일 줄 아는 로봇. 뿐만 아니라 주먹이 신체에서 떨어져 나와 상대방을 향해 날아가 가격하고 되돌아오며, 심지어는 미사일이나 레이저 빔 등이 발사된다. 한마디로 로봇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공격력을 다 갖춘 강력한 파괴적 존재다. 물론 공격력만이 아니라 그에 못지않은 강력한 방어능력을 갖춘 로봇은 웬만한 공격 정도에는 끄떡없다. 한데 나의 악마적 상상력을 자극한 것은 그러한 로봇간의 끔찍한 싸움 과정에서 과녁을 빗나간 무기들이 제3의 대상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날아든다는 데 있다.
현재의 지구화의 추세는 마치 이런 최첨단 로봇간의 싸움과도 같다. 격렬하기는 거의 생사를 건 투쟁처럼 보이고, 승리만이 그 싸움의 유일한 가치이자 절대적인 게임 규칙이다. 이른바 무한 경쟁의 상황인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전쟁의 상황’이다. 한데 이러한 전쟁은, 패권주의적 군사주의 집단의 이데올로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결코 ‘깨끗한 전쟁’이 아니라는 데 더욱 심각성이 있다. 요컨대 결코 이 전쟁의 주된 희생자는 싸움의 당사자라기보다는 익명의 제3자인 것이다. 물론 그들은 공격력이나 방어력을 갖추지 못한 무력한 존재들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지구화는 (그 주요 전장이 어디든 결코 국지전이 아닌) 지구적 차원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지구화는 곧 ‘지구적 전쟁화’인 것이다. 그리하여 지구화 즉 지구적 전쟁화는 전지구를 향한 무차별적인 학살을 양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위기의식이 확산된 배경에는 이러한 심각한 위기의 구조가 도사리고 있다. 한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또 한 가지 사실은, 글로벌 자본 체제든 글로벌 웨펀 체제든, 지구화를 현재와 같은 지구적 전쟁화로 귀결시키는 데 있어 ‘미국’의 존재가 결정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미국 전문가 권용립의 말대로 미국이라는 표현만으로는 그 의미가 모호하다. 미국이라는 것은 무수한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때로는 세계 제국의 온상이기도 하고, 반대로 자유주의의 상징이기도 하다. 무차별한 양민 학살의 주범인 테러국가인 동시에 전 세계인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들이 표상하는 지구적 정의의 수호자이기도 하다. 또 제국주의 논리의 온상인 동시에 반제국주의 담론 시장이 가장 크게 형성된 사회가 미국이다. 그리고 미국의 외교 노선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인 노암 촘스키를 포함해서 반미를 부르짖는 무수한 미국인이 있고, 한국의 보수주의적 기독교 엘리트들처럼 미국인보다 더욱 친미적인 한국인도 무수히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미국’이라는 표현보다는 ‘아메리카주의’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아메리카주의는 미국 외부에도 있으며, 반대로 미국 내부에는 안티아메리카주의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주의는 힘을 숭배하는 문화로서, (미국만이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분포된 현상이지만, 그럼에도 오늘날 그러한 힘의 문화는 가장 강력한 패권주의 체제인 미국과 직간접으로 네트워킹되어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네그리의 표현대로 미국을 중심으로 현대의 ‘제국’을 이야기하는 것은 표상어로서 유용하다고 본다.
그런데 지구화라는 사회 구조적 변동에 대한 표현을 사용하면서, 그와 별도로 아메리카주의를 따로 거론한 것은, 지구화가 수반하고 있는 전 지구적 전쟁화를 단지 글로벌 자본 체제나 글로벌 웨펀 체제 같이 폭력과 학살의 아비규환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쟁은 대대적인 전쟁터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직장 안에서, 학교 안에서, 나아가 가정 안에서 매일의 평범한 일상을 통해서도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일상은 승리하기 위한 생존 게임이 벌어지고 있는 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분열된 개개인은 자기 내면에서도 그러한 전쟁을 경험한다. 가령, 누가 묻지 않아도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어느 부분을 사랑하고 다른 부분을 증오하곤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는 기준은 대체로 타인과의 경쟁에서 우월한 것인가의 여부와 관련이 있다. 이것을 일컬어 ‘전쟁의 일상화’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이 개념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승리를 추구하게 되고, 일상에서 벌어지는 승자가 되기 위한 게임 때문에 일어나는 폭력과 희생에 대한 감수성이 현저히 퇴화된 존재로 만들어진다는 점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지구적 전쟁화로서의 지구화는 동시에 일상의 전쟁화를 함의하는 아메리카주의와 함께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최근 일어난 대구 지하철 사고에서 여실히 드러난 것처럼, 최첨단의 매체들에 의해 생활을 하는 오늘의 세계에서 사고는 과거보다 훨씬 치명적이고 대형화될 가능성을 지니지만 동시에 그것은 누구에게나 언제라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사고의 일상화). 누구나 자신에게 사고가 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살아야 하지만, 또한 그러한 사고를 두려워해서 활동하는 데 몸을 사린다면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결국 사고의 일상화는 위험에 대한 감수성을 이완시키고, 그래서 사고를 염두에 둔 사회적 대비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한데 이러한 아메리카주의 논리의 맥락에서 ‘평화’의 관념이 도출된다는 점이 내가 주장하는 것의 요점이다. 전쟁의 일상화되는 감각 속에 사는 우리가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약화된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폭력을 희생자의 시선에서 생각하기보다는 일상이 일어나는 현실의 유지라는 차원에서 보려 한다는 데 있다. 바로 여기서 ‘평화’가 사람들에게 관념화되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의 안정 상태를 유지하는 평화며, 그것을 위해 일부 희생자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용인하는 평화다. 최근 미국의 보수주의적 교회들이 주장하는 평화는 바로 이런 평화, 미국이 하느님을 대신해서 악을 응징하고 세계의 안정적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평화인 것이다. ‘팍스아메리카나’Pax-Americana는 바로 이러한 평화를 가리킨다.
정리하면 오늘의 위기는 현재를 주도하는 지구화의 흐름이 내포하는 위기로서 글로벌 자본과 글로벌 웨펀 체제의 폭력성에 의해 전지구가 전쟁터로 변해버린데 있지만, 동시에 그러한 전쟁화는 폭력적 영웅에 대한 선망을 일상화하는 아메리카주의와 뗄 수 없이 연계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권력의 거대한 주체만이 위기의 원흉이 아니라, 그러한 불사신 영웅을 숭배하는 우리의 일상적 문화 또한 문제인 것이다. ‘팍스아메리카나’의 논리, 그러한 평화주의는 바로 여기에서 그 견고한 둥우리를 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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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아메리카나의 논리적 연원은 1세기 지중해 지역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였던 ‘팍스로마나’Pax-Romana이다.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스페인과 갈리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왔을 때 원로원은 그의 귀환을 기념하기 위해 ‘아우구스투스 평화 재단’을 설립했다. 클라우스 벵스트는 “이 제단 위에서 희생자는 연기처럼 사라져갔다”고 말한다. 평화를 기억하는 이 제의는 그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희생된 이들을 망각하게 했다는 얘기다. 곧 ‘평화’ 제의는 희생자를, 그 고통과 피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우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세네카는 위대한 영웅이자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이룩한 제국적 질서의 평형 상태를 일컬어 ‘팍스로마나’라고 명명한다. 그것은 권력의 중심인 로마에 의해 시작되고 유지되며 귀결되는 평화이며, 그러한 압도적 힘에 의해 지탱되는 평화가 없다면 세상은 야만과 혼돈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런 점에서 팍스로마나는 평화를 위해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공공선을 대표하는 존재를 필요로 하는 평화이며, 그러한 공공선의 유일 담지자는 압도적인 힘의 담지자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팍스로마나는 진리를, 도덕적 당위를 자신과 일치시킨다.
우리는 주후 2세기 후반 일단의 교회 지도자들의 저술에서 이러한 ‘로마의 평화’를 ‘예수의 평화’, 곧 팍스크리스티아나Pax-Christiana와 동일시하려는 시도들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가 아직 교회가 소수자로서 억압의 대상이었던 때임을 기억한다면 이러한 해석이 그다지 문제될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반세기도 못돼서 교회는 ‘새로운 주류’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평화를 독점한 동시에 자원을 독점했던 구세력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갔다. 과거 자신들이 당했던 것처럼 소수집단 가운데 일부를 희생양삼아 박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교회의 재산으로 귀속시키는 방식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힘에 의한 평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평화는 이렇게 소수자의 일부를 악의 상징으로 지목했고, 그들을 표적 삼아 질서를 위배하는 이에 대해 가혹한 ‘평화의 테러’를 가했으며, 그들의 자원을 자신들이 관리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를 제기했다. 결국 비루한 존재이던 시절 교회가 품었던 주류에의 ‘찬란한’ 꿈은 이와 같이 찬란한 시절이 왔을 때 ‘비루한’ 것이 되고 말았다.
나는 우리가 ‘역사의 예수’를 다시 이야기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그것은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애초에 교회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한 것에 대해, 다른 ‘예수의 평화’, 팍스크리스티아나를 이야기함으로써 그간 ‘로마의 평화’와 등가적으로 논변되어온 ‘교회적 예수의 평화’, 그것의 패권주의적 속성을 발본적으로 문제제기하고자 함이며, 바로 이 사실이 ‘역사의 예수’ 담론의 ‘정치성’이라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지해야 하는 사실은 ‘역사의 예수’ 담론의 정치성이라는 문제의식 자체가 전적으로 근대적 현상이라는 점이다. 그 이전까지 예수를 역사적으로 묻는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에 관한 진실을 독점하고 있던 교회에 대한 이의 제기가 ‘역사’라는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근대 이전 시기에 역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역사라는 것이 ‘기록’ 능력을 통한 기억의 저장을 의미한다면, 근대 이전 시기의 역사란 누가 먼저 ‘기록’의 형식으로 기억을 선점했으며, 그것을 저장하고 보전하는 창고를 어떻게 견고하게 지켜내느냐에 의존한다. 즉 기록과 저장 능력에 따라 ‘과거의 사실’이 누구에게 귀속될 수 있는지가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교회와 수도원이 근대 이전 시기까지의 예수에 관한 역사를 독점해왔다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단수의 기록이 아닌) 복수의 기록‘들’이 생겨났다는 사실은 기록 저장소를 독차지하는 것 자체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기록 자체는 사실과 동일시될 수 없었고, 기록들에 대한 ‘독해’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네 복음서’란 근대적 개념이다. 그때까지 정경에 포함된 네 권의 복음서는 사실은 자명하게 ‘하나로 수렴되는 넷’으로 받아들여졌었다. 하지만 근대에 와서는 그것들이 ‘다르다’는 문제 인식에서 예수에 관한 기록들을 읽기 시작했고, 거기에서 사실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인 이른바 문서가설들이 제기된 것이다. (기록이 아닌) 기록‘들’에 대한 근대적인 수용 방식인 독해는 그 방법으로 여러 문서가설들을 태동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이들 여러 문서가설들이 지향하는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넷 중 어느 것이 보다 타당한 기록인가에 관한 데 있다. 이러한 가설은 문헌비평 작업을 통해 수행된다. 네 권의 기록들을 비교하면서 보다 오래된 것을 가려내는 작업이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은 뜻밖에도 네 권 외에 다른 ‘책’을 발견하게 된다. 이른바 ‘어록집’이라고 명명된 것인데, 현존하지는 않으나 실재했었다는 가상의 책에 관한 가설이 문헌 비교 방법을 통해서 대두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질문 방식은 최근 역사의 예수 연구의 가장 중심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전승사적 가설들’에서도 거의 그대로 관철되고 있다. 선형적인 발전 경로를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실재했던 예수에게로 끊임없이 다가가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책이 그 매체가 된다는 인식이 지속적으로 관철되고 있는 점이다. 현존하는 텍스트에서 유추해낸 ‘존재하지 않는 존재’라는 유령은 늘 ‘책’으로 표상된다. 결국 한스 블루멘베르크Hans Blumenberg의 표현대로 “책이라는 은유”가 진리를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실재하는 것이든 가설적으로 구성해낸 것이든 책 자체는 사실의 가능성을 배타적으로 담지하고 있으며, 책을 통한 책의 탐구가 비록 지금은 독해의 가능성 아래 남겨져 있지만 언젠가는 완성된 진리를 드러낼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그는 진리를 찾아가는 독해를 ‘독서 가능성’Lesbarkeit라고 하면서, 여기에서 근대의 계몽주의적 역사 인식의 특성을 발견한다.
이러한 인식 아래 수행된 역사의 예수 연구는 인류에 관한 총체적 진실로서의 예수를 발견한다. 비록 그 총체적 진실의 내용은 연구자마다 각기 달랐지만 그것들은 한마디로 ‘휴머니스트 예수’라는 관점으로 함축된다. 이는 역사의 예수가, 교회의 예수가 표상했던 세계의 질서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의 정신에 의한 새로운 질서와 부합한다는 문제제기였던 것이다. 로마의 평화, 그 등가물인 교회에 의한 예수의 평화는 그 패권주의적 질서관은 역사의 예수로부터 부정되었던 것이다.
한데 우리는 여기서 잠시 한 가지 사실을 집고 넘어야가 한다. 18~19세기 역사의 예수 연구를 이렇게 요약하는 것은 당대의 예수에 관한 역사적 연구들 대다수가 이러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니 사실은 양적으로만 보면 절대 소수였고, 연구의 깊이에 있어서도 대단한 성과물들의 견해를 요약한 결과가 반드시 그렇다는 것도 아니다. 연구의 양이나 깊이의 문제도 무시할 수 없지만 오히려 이러한 평가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역사적 상상력에 있다. 당연한 것으로 규정되어왔던 인식의 질서를 넘어서 그것을 전복시키는 새로운 시각으로 보려는 시도, 특히 당대적 문제인식이 새로운 모색의 원천이었던 사유 방식에서 이 시기의 연구사적 특징이 도출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알베르트 슈바이처를 통해서 우리는 그러한 연구들이 그 총체적인 하나의 진실을 추구했지만, 결국 하나가 아닌 제각기의 다른 총체성이라는 역설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라인하르트 코젤렉이 말한 바 하나의 보편적인 사실에 관한 기록으로서의 ‘역사’Historie라는 근대적 역사학이 파산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파산이라 한 것은 그 성과가 무효화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연구의 성과가 그 인식론적 전제를 부정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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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근의 ‘예수 세미나’에 관한 평가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수행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연구 프로젝트의 창설자이자 코디네이터인 로버트 펑크Robert Funk의 진단처럼 탈그리스도교의 시대Post-Christian Era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에게 솔직한’honest to Jesus 신앙을 자극한다. 그것은 교회의 도구마로부터 예수를 해방시킬 것과 그러한 도그마에 억매인 교회의 신앙으로부터 그리스도인 자신을 해방시키라는 시대의 호명에 응답하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다원화된 세계 속에서 사회의 윤리적 의제들과 (교회를 매개로 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씨름하는 신앙을 통해 표현된다. 이것은 서양의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부정적 자리매김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미국 교회의 현상에 대한 그의 성찰적 비판의 결과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교회적인 도그마에 사로잡힌 신앙은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몰인식을 조장하며, 나아가 그 외부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이 세계 속에서 자행되는 불의에 대해 교회가 무관심하며 나아가 그러한 체제와 깊이 연루된 공모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도그마적 신앙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에 대해 그는 ‘신에게 솔직하자’고 권고하는 로빈슨J.A.T. Robinson의 논의를 받되, 자신이 주도적으로 관여되어 있는 최근의 예수 연구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담아내는 표현인 “예수에게 솔직히”를 주장한다.
한데 나는 이러한 주장의 사회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본다. 서구사회에서 1960년대 말 이후 민주주의 담론의 급진화와 소비자본주의화 현상이 두드러졌다. 그 이전까지 민주화 담론이 주로 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다면 이 시기는 소수자 운동이 두드러지게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모든 하위진리들을 포괄하는 총체적 진리에 대한 인식이 해체되고 다원적 진리에 대한 인식이 대중의 주체 형성에 개입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소비주체로서 대중이 호명되는 사회경제적 맥락은 공동체적 귀속의식이 여전히 중요하기는 하지만 개인이 판단의 주체라는 인식을 활성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양상은 사회의 전반적인 탈성화desanctification 기조를 낳았다. 이는 서구 사회에서 교회의 선교가 위기에 부딪친 주된 요인이었다. 또한 이분법적 성화 구조를 기반으로 하는 교리체계의 시대착오적 성격 탓에 신앙을 통해서 삶을 활성화하는 일 또한 현저하게 어려워졌다. 즉 교회는 선교의 위기를 넘어 신앙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신학적 성찰이 시도되었고, 좀 단순화해서 이해하면 ‘예수 세미나’는 예수 학계의 신앙젓 성찰의 차원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또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운동의 대두에 관한 것이다. 앤써니 기든스에 의하면 지구화로 인해 소비자본주의가 급진화하면서 전통적 결속체가 급격하게 와해되어 가고, 이러한 현상은 사람들의 귀속 공간을 앗아가버리는 현상을 초대한다. 존재론적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행위는 일정한 제약을 받게 되는데, 그런 제약된 행동의 하나가 바로 더욱 공동체주의적이고 더욱 반지성적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회문화적 배경 아래서 성령운동이 강력하게 대두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파 운동이 타자에 대해 보다 폐쇄적이고 문명화 과정에 비성찰적인 특성을 보이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결국 신앙의 활력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그 비성찰적 태도는 종종 자폐적인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는 경향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마커스 보그가 최근 북미의 역사의 예수 연구들이 도달한 합의점 가운데 하나로 종말론적 예수 이미지에서 지혜론적 예수 이미지로의 이행을 들고 있는 것은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유럽 문명의 한계지점에서 예수에 관한 합리주의적 연구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날 무렵 대두한 종말론적 예수론이 이번에는 과도하게 탈속적이며 반지성적 태도를 취하는 신앙적 관행이 심각한 상황에 이른 북미의 교회 환경에서 반종말론적이며 지혜론적인 예수론으로 뒤바뀐 것이다. 물론 보그의 이러한 결론은 적지 않은 문제점을 가진다. 왜냐면 좀더 아카데믹한 연구들 가운데는 예수를 종말론적 요소와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이 만만치 않게 제기되었으며, 보그 자신이 그러한 입장의 연구자들과 논쟁 중이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게르트 타이쎈이 북미의 예수 연구의 분위기를 팔레스틴의 예수가 아닌 ‘캘리포니아의 예수’라고 부른 것은 분명 ‘예수 세미나’를 겨냥한 일종의 비아냥임을 주지해야 한다.
또한 보그를 포함한 북미의 몇몇 예수 연구자들이 합의 운운하는 주장은 서구 학계의 고질병 중의 하나인 이분법적 인식을 그들이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컨대 그는 오늘날 근대성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많은 논의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바, 인간이 합목적적이고 통합적이라는 근대주의적 가설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은 예수에 관한 묘사 가운데 종말론적인 것과 지혜적인 것은 양자택일해야 하는 것이며, 그 결과 예수를 분열적이지 않은 존재로 그릴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결국 그들이 재현한 예수는 ‘파란눈의 뽀죽코’를 한 전형적인 근대주의적 서구인 남자 영웅에 다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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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블루멘베르크의 주장을 보자. 그는 “책이라는 은유”라는 표현에서 책 속에 보편적이며 통합적인 궁극의 진리가 있다는 믿음, 결국 ‘책=사실’이라는 서구 근대적 인식은 19세기 말, 20세기 초를 기점으로 급속히 와해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는 이를 “책의 종말”이라고 말한다. 그 주장이 함축하는 바는 ‘책’이란 책을 둘러싼 맥락과 연관되어 의미가 구성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책은 보편적이고 통합적인 단 하나의 불변의 진리를 가지고 있으며 언젠가는 그것을 드러낸다는 믿음 대신 책은 끊임없이 해석될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폴 드 만Paul de Mann이 말하는 “독서 불가능성”이라는 말은 바로 이것을 의미하며, 푸고M. Foucault의 계보학은 책의 의미 구성의 역사를 밝히고 있다.
예수를 역사학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현대 역사학적 의미에서 보면, ‘예수’와 ‘제1 해석자로서의 책’, 그리고 ‘제2해석자로서의 우리’라는 3자간의 대화의 산물이다. 이때 고정불변의 진리로서의 예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역사적으로는 그렇다. 여기서 다시 논의가 갈라질 수 있는데, 그래도 예수라는 실재는 단일한 주체로서 존재했었다는 견해이고, 예수 자신도 모순적이며 불규칙적인 존재라는 견해다. 후자의 주장이 가능한 것은 예수의 삶의 순간순간 또한 그 상황을 이루는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서 실체화하는 것이므로, 어떤 맥락에 위치하느냐에 따라서 그 또한 변화한다는 것이다. ‘신이 인간이 됐다’는 신학적 단언은 바로 그러한 비예측성, 역설성을 전제로 한다. 가라타니 고진이 독해한 바에 의하면 다가와 겐조의 ‘역설적 반항자’ 예수론은 역사학에 대한 이러한 인식론을 보여주는 탁월한 주장에 속한다.
‘예수 세미나’는 분명 예수 연구의 층위를 한층 높여놓았다. 특히 동시대의 문화 맥락 속에서 예수의 의미를 묻고자 했다는 점에서, 북미의 그리스도교 보수주의가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조직화되고 대중의 일상 속에서 재활성화하는 성령파 그리스도교의 열정적 신앙을 보수주의적 이데올로기 아래 대대적으로 동원하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에게 솔직한 신앙이 무엇인지를 묻는 그들의 연구자적 앙가주망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논의를 번역, 아니 표절하는 것으로 다른 사회에서 예수의 의미를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만용에 있다. 물론 이러한 수용 방식은 그들 자신의 주장에서 기인한다. 그들은 여전히 ‘은유로서의 책’을 신뢰하며, 보편적인 진리를 말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문서가설, 문헌비평에서 시작해서 전승사적 연구로 이르는 일련의 책에서 책으로 가는 진리 여행은 그 책의 외부를 전혀 상상하지 못한다. 그것은 책을 통해서 펼쳐진 일련의 선형적 흐름 이외에도 전혀 다른 흐름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망각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물론 예수 세미나 멤버의 한 사람인 리처스 호슬리는 예수의 탄생 신화 속에서 비문서적 예수 담론의 흔적을 추적하며, 민중사적 비교연구에 힘입어서 대중담론 속의 예수 이미지의 가능성을 모색한 바 있다. 하지만 호슬리 자신에게서도 마찬가지지만, 예수 세미나는 이런 물음에 대해 다른 연구자들보다 열린 태도를 가졌다고는 결코 볼 수 없다.
‘책의 종말’은 연구 방법 파괴의 가능성을 향해 열려진 역사의 예수에게로 우리를 초대한다. 안병무는 예수 전승의 양식을 ‘루머’로 상상해낸 바 있다. 그것은 1980년 광주 담론에 대한 기억이 역사의 예수를 읽는 데 영향을 미친 결과다. 루머에 관한 연구가 아직 빈약하기는 하지만, 책에서 책으로 향하는 연구만으로 예수를, 그것도 자료가 극히 부족한 1세기의 시골지역에서 일어난 한 운동의 지도자를 재현해낼 수 있다는 무모함을 보완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다만 그러한 가능성이 ‘책의 은유’에 사로잡힌 시대착오적 성서학의 무모함 때문에 가려지지만 안는다면 말이다. 아직도 책 중심주의, 로고스 중심주의적 연구 태도로 역사학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이상한 자부심을 극복할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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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이 팍스로마나는 일상 속에서도 작동한다. 그것은 끝없는 해석의 바다 속으로 흐르는 의미라는 돛단배를 물 밖으로 건져내 유리관 속에 넣고는 물 위에 흐르고 있다고 믿는 독단주의를 통해 역사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팍스아메리카나는 팍스로마나의 20, 21세기 버전이다. 그것은 선과 악의 이분법 속에, 아름답고 추함의 이분법 속에, 올바르고 그른 이분법 속에서 의미를 읽어낸다. 물론 오늘날 통찰력 있는 여러 논의들은 그것이 자본의 경계선 위에서, 국경의 경계선 위에서, 정상성의 경계선 위에서, 섹슈얼리티의 경계선 위에서, 나이의 경계선 위에서, ......, 무수한 경계선 위에서 항상 그 이분법적 가치를 드러낸다. 이러한 논리는 한 편에서 옳은 것이 다른 편에서는 그를 수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이 타자에 대한 편견과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팍스크리스티아나는 그러한 폭력과 편견의 체제 아래서 추방당한 사람들에게 선사되는 역설적 진리다. 그것은 동시에 추방당한 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권력 관계 속에서 다시 추방된 이들에게 선사된다. 팍스크리스티아나는 해석의 공간 속에서 항상 버림받은 자들에게 선사되는 축복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즐거움이 동반된다. 페터 지마는 아름다움이란 “개념 없이 마음에 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름다우니 설레고 기쁘다. 물론 지배적인 가치는 승리하고 약탈하고 낭비하는 것을 아름다움이라고 규정해왔고, 그러한 욕구를 통한 쾌락이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팍스크리스티아나는 그와는 정반대의 것이다. 패배하고 약탈당하고 굶주린 데서 쾌락이 있다는 것이다. 역설이다.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이러한 쾌락을 주이쌍스라고 명명했다. 나는 그것을 성찰적 쾌락이라고 번역하고자 한다. 그것은 우리의 구체적인 맥락에서 육화한 예수를 보여준다. 역사의 예수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전태일 예수’라는 담론처럼, 책이 아니라 그런 텍스트로서 우리에게 부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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