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주간기독교] 2002.9(날짜는 미상)에 기고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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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없다’ 신드롬은 기독교의 닫힌 문을 열라는 대중의 요청이다
최근 한 학술토론 모임에서 나는 논문 발표자와 가벼운 언쟁을 벌인 적이 있다. 그와 나의 의견 차이는 오늘의 한국 기독교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의 문제였다. 그는 더 나빠졌다고 했고, 나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한 지 얼마 안 되는 연구자인 그는 오랜만에 실제로 접한 한국 기독교에 적지 아니 실망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지난 몇 년간 경험한 서양의 기독교에 비해 형편없이 초라한 한국 교회의 신학적․신앙적 천박함을 느끼는 순간, 유학을 떠나기 전의 기독교에 비해 지금이 훨씬 못하다는 상황 인식에 이르게 됐는지도 모른다. 반면 나는 계속 한국에서 살면서 연속적인 변화에 익숙해 있었다. 마치 아이를 몇 년 만에 보면 깜짝 놀랄 만큼 변화된 것을 느끼지만, 늘 그 아이 옆에서 지켜보면 변화에 그리 민감하지 않은 것과 같은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와 나 사이의 상황의 차이는 인식의 차이를 낳았다. 하지만 오늘의 기독교의 모습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의견을 같이 했다.
우리의 공통 인식처럼, 최근에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은 기독교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 20여 년간 가파른 상승세를 타던 교세가 정체되거나 감소 추세로 전환되면서 거의 모든 교회가 선교의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고, 외부에서 기독교를 보는 시선이 전에 없이 냉소적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점이 그렇다. 자연 교회의 사회적 역할은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크게 위축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의 반대급부로 극히 폐쇄적인 소종파 운동이 상당한 활기를 띠고 있다. 이들은 기성 종파들과는 달리 신앙적 역동성을 재활성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기성 종파들이 폐쇄적 소종파 운동들을 수용, 모방하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결국 소종파들 만이 아니라 기독교 전체가 세계와의 접점을 점차 상실해 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출간되고 있는 일련의 기독교 비판서들이 우리의 주목을 끈다. 특히 지난해 출판계에 상당한 바람을 일으킨 저서 예수는 없다(오강남)에서 올해 주문이 폭증하고 있는 《예수는 신화다》(티모시 크리크와 피터 갠디)는 이러한 비판 흐름을 대중적으로 선도하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예수는 없다’ 신드롬이 일간지 기자들의 열광적 반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는 세평처럼, 대중의 반기독교적 정서를 가장 기민하게 포착했던 이들은 출판인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신문기사들에서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이야기가 다루어졌다. 또 기독교적 주제에 대해 극도로 인색하던 비기독교적 계간지들이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문제를 제기한 특집을 기획한 것(《당대비평》 12호, 2000 가을; 《사회비평》 32호, 2002 여름)은 지식사회에 팽배해 있는 반기독교적 현상을 반영한다. 이러한 지식상품들은 대중의 반기독교적 정서를 지적으로 정비해주는 담론적 효과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한편 최근 영미 지역을 중심으로 연구의 붐을 일으키고 있는 예수에 관한 역사적 연구 흐름이 한국에도 꽤 많이 소개되었다. 이것은 대체로 기독교 학계에 한정된 현상이었지만, 몇몇 비기독교 계간지들에서도 단독 논문 형식으로나마 소개된 바 있다(《진보평론》 7호, 2001 봄; 《사회비평》 28, 2001 여름). 비록 그 연구의 사회적인 맥락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거의 다뤄지지 않은 탓에 기독교에 대한 그 과감한 문제제기가 간과된, 형식 모방에 그친 감이 있지만, 전반적인 기조가 현존하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반기독교적 정서를 지적으로 정비한데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신학적․신앙적 도전의 근거를 대중에게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이런 점에서 이렇다할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예수에게 솔직히》(로버트 펑크)의 출간은 연구 현상 이면의 격렬한 사회적 논점에 대한 공복감을 독자들에게 채워주었다. 나아가 이 책은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탈기독교 시대’(post-Christian era)의 ‘대안적 전망’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중한 지적 자산임에 분명하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최근 크게 확산된 대중의 반기독교적 정서를 교회와 비판적 지식사회는 전혀 다르게 읽고 반응하였다. 교회는 수구적으로 사회와의 문을 닫은 채 접점을 더욱 폐쇄하였으며, 사회와는 괴리된 ‘거룩의 동굴’ 속으로 숨어듦으로써 신앙과 사회의 이분법을 한층 강화하였다.
하나의 제도는 옳고 그름에 관한 담론 체계를 수반한다. 그것은 말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구분하는 인식의 틀을 낳는데, 그 제도 안에 있는 사람은 옳은 것 혹은 허용되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낀다. 문제는 부자연스러운 것에 대한 태도에 있다. 최근 교회는 폐쇄성을 강화함으로서 부자연스러운 것을 폭력적으로 배제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얼마 전 한국의 대표적인 신학교에서 이러한 이분법에 신학적으로 도전하였다는 이유로 두 사람을 교수직에서 면직시키고 교단의 교적을 박탈한 사건은 그 단적인 예다. 최근에 폭증하는 이른바 ‘영성’에 대한 집착은 한국 기독교에서 사회와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신앙적・신학적 전략의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자발적인’ 신앙적 동기를 제공하는 동시에, 외부와는 구별되는 강력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신앙적 성채를 형성케 한다. 그리고 그것은 배제될만한 자를 그 밖으로 내쫓는 폭력적 배제를 정당화한다. 타자에 대한 배제를 보다 유연하게 하는 신앙 관행을 지닌 서양 기독교를 한동안 접했던 이가 한국에 돌아와서 심한 ‘불연속’을 느낀 것은 이러한 변화에 주목한 결과일 것이다.
한데 일부 신학자들을 향한 감시의 눈길이 강화된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폭력적 배제의 관행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에 있다. 실제로 많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 일반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이러한 경향에 ‘동조’하고 있다. 그것은 최근의 변화가 사실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한국의 기독교는 충분히 폐쇄적인 신앙․신학으로 틀 잡혀 있었던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예전부터 교회로부터 추방당해 왔으며, 기독교계 학교나 기타 기구들 안으로의 진입을 차단당해 왔다. 단지 일부의 예외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예외를 향해서도 이제 심판의 칼날이 번뜩이게 되었다는 것이 새로운 것일 뿐이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최근 기독교에 대한 대중적 정서가 악화된 것에 대해 보다 자폐적으로 대응한 결과다. 요컨대 기독교는 반기독교적인 대중 현상에 직면하여 교회를 폐쇄적 담론 공간으로 ‘재’구축함으로써 ‘폐쇄적 신앙 제도화’를 한층 강화하였다. 그 결과 대중과의 이반은 더욱 심화되었다.
반면 비판적 지식사회는 이러한 이반된 대중을 향한 지식 상품들을 속속 내놓았다. 이 지식 상품은 앞서 말했듯이 반기독교적 정서를 가진 대중이라는 소비 시장이 있음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대중이 기독교 비판적 기조의 지식 상품을 소비하는 장소는 교회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와 분리될 수 없는 ‘자리’에서 읽혀진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자리에서 통용되는 담론은 신앙과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가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교회를 매개로 하지 않는 세상의 장소에서 신앙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생활 윤리로서의 신앙이며, 정치 윤리로서의 신앙, 경제 윤리로서의 신앙, 가족 윤리로의 신앙, 성 윤리로서의 신앙, ......이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의 신앙이 이러한 자리를 ‘신앙의 자리’로서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불신앙의 자리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교회적 신앙으로 내면화된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말이다. 그리하여 대중은 자신의 고민을 신앙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목회자와 신자들은 대중의 고민을 불신앙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단정해버린다. 바로 이것이 대중의 교회로부터의 이반의 요체며, 기독교 선교 위기의 핵심이다. 그리고 최근 지식사회의 문제제기는 이러한 대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의혹을 신념화하게 하며, 그 문제의식을 정비되게 하여 대안을 모색하게 이끈다. 어쩌면 탈기독교 시대에 적합한 대안적 신앙이 교회가 아니라 교회 밖 대중에게서 나올지도 모르겠다. 교회가 그 자폐성에서 돌이키지 않는 한 말이다.
내가 사는 동네의 한 초등학교는 담을 헐었다. 대신 꽃으로 울타리가 쳐졌고, 몇 곳에 출입구를 두었다. 교문 없는 출입구이다. 그리고 작지만 ‘만남의 광장’을 마련해서 벤치와 미끄럼틀, 철봉대, 평균대 등을 놓았다. 미끄럼틀도, 올라가는 계단과 내려가는 미끄럼대로 구성된 단조롭고 상투적인 조형물이 아니라, 어느 곳으로도 올라갈 수 있고 또 어느 곳으로도 내려갈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이 형식의 파괴에서 나는 창조성과 자유를 느낀다. 어느 구석에도 값비싼 비용이 드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구석에도 누구에게든 닫힌 곳은 보이지 않았다. 밤이면 동네 사람들이 조깅을 하고 산책을 한다. 또 연인끼리 부부끼리 친구끼리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눈다. 낮에는 아이들이 담을 넘지 않고도 밖을 자유로이 나가고 들어온다. 정문을 지키는 사나운 모습의 수위아저씨는 보이지 않았고 관리하는 이만 보일 뿐이다.
열린 공간이다. 꽃으로 단장된 울타리는 학교 안과 밖을 가르는 장벽이 아니라 만남의 지대를 표시하는 이정표다. 어떤 정치학자는 그것을 ‘경계(boundary)에서 변경(frontier zone)으로의 이행’이라는 은유적 묘사를 한 바 있다. 나누고 차별하게 하는 선이 아니라 만나서 거래하고 삶을 나누는 지대로의 변환이라는 것이다. 곧 우리와 타인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것이다.
구원의 방주는 더 이상 폐쇄된 공간으로 모든 것을 불러 모우는 행위가 아니다. 닫힌 세계관, 타자에 대한 배타적 폭력성은 교회 제도라는 이른바 ‘구원의 방주’ 안이나 자본주의적 세계 질서로 구성된 ‘바깥’ 세상이나 다를 바 없다. 요컨대 그 방주는 세상의 죄를 지고 희생당한 이를 기리고 세상의 희생양의 문화로부터 모든 이들을 구원하기 위한 방주가 아니다. 대중의 이반은 이것의 해체를 의미한다. ‘예수는 없다’ 신드롬은 기독교를 향해 이미 허구가 된 ‘방주 아닌 방주’에서 나오라는 신호다. 그리고 세계 안에서 온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새로운 구원의 방주를 구축하라는 요청이다. 시대착오적인 신앙 제도의 틀을 깨뜨리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창조성과 자유를 선사해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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