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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혼 유예제도보다는 성찰적인 헤어짐의 제도가 필요하다

이 글은 [서울신문](2004 01 14) 칼럼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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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유예제도보다는 성찰적인 헤어짐의 제도가 필요하다

 


지난해 12월 말, 2002년 한국 사회의 총 결혼 건수에 대한 이혼 건수의 비율이 47.4%이며, 이는 세계 3위 수준이라는 보건복지부가 관련된 한 보고서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게다가 보고서는 조만간에 세계 최고의 이혼 국가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이 통계 수치는 매우 심각한 것임을 지적했다고 한다.

이 통계나 순위가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없지 않지만, 최근 이혼 비율의 급증을 강변하려는 취지라는 점을 감안해서 받아들인다 해도, 나로서는 이 심각하다는 표현은 좀처럼 공감하기가 어렵다.

도대체 무엇이 심각하다는 것일까? 이혼율이 세계 1위라는 것이 부끄럽다는 뜻인가. 방송이나 신문 기사들을 검색해보니 그런 투로 해석한 경우가 적지 않은 듯하다. 또 네티즌의 반응 가운데는 그런 이해가 꽤 많았다.

이혼율 급증은, 보고서도 암시하고 있듯이, 최근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한 신빈곤화의 특징적인 양상의 하나다. 실제로, 저소득계층 지역에서 일하고 있는 복지 관련 활동가의 증언에 따르면, 이곳에서의 가족해체는 상당히 진척되었음을 보여준다. 또 극빈층은 아니더라도 경제적 위기가 부부관계에 부정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양상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세계화의 구조적 변동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증명해주는 단적인 사례다.

한편 지난해 5월에 있었던 이혼에 관한 한 여론 조사를 보면 이혼에 관한 여성과 남성의 태도에 있어서 여성이 훨씬 적극적이었다. 이것은 더 이상 여성이 참는 존재, 가족을 위해 희생당하는 존재로 남아 있으려 하지 않는, 즉 여성이 자신을 주체로 인식하는 태도와 이혼율의 상승이 서로 비례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요컨대 이러한 사실들은 최근 이혼율의 급증은 결코 개개인의 선택의 문제만은 아닌, 사회적 변동과 밀접히 관련된 사안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한데 이혼율이 세계 1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태도는 이러한 배후 과정을 간과하게 한다. 그보다는 개인의 섣부른 선택이 가족의 해체를 가져온다는 점을 은연중 강조한다.

이 보고서가 제출되기 한 달 쯤 전, 보건복지부는 이른바 충동 이혼을 억제하기 위해 민법 혹은 건전가정육성기본법을 개정하여 이혼 숙려기간도입을 검토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각종 여론 조사는 예외 없이 이 방안이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이혼율 급증을 막는 것이 삶의 질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 보건복지부와 국민 대다수의 공감대라는 얘기다. 즉 개인의 섣부른 선택에 따른 이혼이 가족 해체를 가져오는 주된 이유이고, 이것이 삶의 질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판단이 우리 사회의 컨센서스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이혼율 증가의 원인보다는 이혼 자체가 문제라는 선험적 판단을 전제한다.

한데 위에서 말한 것처럼, 최근의 구조의 변동과 사회적 주체화 양상의 변화 과정에서 한국의 가족은 더 이상 전통적인 인간관계의 붕괴 추세의 안전구역이 아니다. 요컨대 이혼의 광범위한 증가는 한국 사회의 가족 시스템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이혼을 억제하여 가족 해체를 막아보려는 시도가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보다 삶의 질의 문제는 성찰적인 만남만큼이나 성찰적인 헤어짐이 중요하다는 것을 제도 속에 반영할 때 진정 모색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우리 사회에서 부부가 헤어지면 남만 못하다고 하는 통설이 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헤어짐의 제도가 그만큼 성찰적이지 못하다는 증거다. 재산분할 문제, 자녀 문제, 이혼 여/남의 취업 및 기타 사회적 관계 문제 등등, 끊임없이 헤어진 상대방을 원망하고 증오하게 하는 요소들이 우리 주위에 널려 있다. 그렇다면 보건복지부가 삶의 질을 위해 이혼율 급증을 우려한다면, 국민의 일상화된 편견을 거슬러서 성숙한 헤어짐의 제도화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