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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연구 기금의 함정
고대 이스라엘사 연구는 한갓 ‘역사적 발명품’에 불과했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담고 있는 휘틀럼의 《고대 이스라엘의 발견》은 결코 센세이셔널리즘의 산물이 아니다. 이 분야에서 가장 명성 있는 연구자의 한 사람인 저자는 고대 이스라엘의 형성에 관한 현대의 가장 대표적인 가설들이 동시대의 정치학과 어떻게 연루되었는지를 꼼꼼하게 분석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현대의 국민국가 이스라엘의 시오니즘과 유럽 중심주의적 가치가 성서의 역사적 맥락을 추적하려는 역사가들의 심성 속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그는 세심하게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심성이 반영된 연구는 결국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편견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스라엘과 유럽의 정치 경제적 권력이 미개한 아랍인에게 진보의 축복을 가져다주리라는, 서구인과 유태인의 제국주의적 인식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주장한다.
어쩌면 독자들은 고대 이스라엘사에 대한 연구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한데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휘틀럼 같은 특출난 연구자가 아니었다면 여간해서 알아낼 수 없을 만큼 연구는 정교한 직물과도 같다. 그런 견해를 직조한 연구자들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해왔던 것이니 말이다.
이와 같은 연구자의 자기 현혹의 메커니즘 가운데 하나가 연구기금을 둘러싼 학문제도다. 연구자들이 많이 몰리는 곳은 말할 것도 없이 연구기금이 많이 조성되는 분야다. 성서 역사학 분야에서 가장 많은 기금이 투여되는 곳 중의 하나는 고대 이스라엘의 출현과 관련된 분야다. 역량 있는 많은 연구자들이 풍부한 연구비를 받아 연구하니 그 성과는 대단하다. 한데 바로 그 성과가 함정임을 누가 알았으랴.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오직 고대 이스라엘의 출현에 얽힌 영역만 과도하게 연구되다보니 의도하지 않았지만 동시대를 산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제거된 역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게다가 ‘이스라엘’이라는 것 자체가 출현기로 추정되는 시기보다 몇 세기 후대에야 비교적 잘 구성된 종족적 결속체로 등장했으니, 즉 이스라엘과 비이스라엘의 구별이 출현기에는 그리 명료하지 않았을 것이니, ‘출현기의 이스라엘 거주 지역’이라는 것 자체가 허구적인 산물이라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시간과 공간을 편의에 따라 나누고 연결하면서 엮인 역사적 구상물인 ‘상상의 과거’는 현대 이스라엘의 그 지역에 대한 영역 주장의 근거가 되었고, 유럽인과 그리스도 교회의 대 아랍, 나아가 대 비서구 사회에 대한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자원이 된 것이다.
최근 이른바 ‘동북공정’이라 하는 중국의 고구려 연구 프로젝트가 알려지면서 한국 정부도 상당한 연구 기금을 조성해서 고구려 연구를 지원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한국의 관련 학계와 시민단체들도 중국 정부의 정치적 의도를 둘러싼 각종 해석을 제기하면서 ‘제2의 나당전쟁’ 운운하며, 이 연구 기금을 활용하는 방안을 두고 입장에 따라 격론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열손까락이면 충분히 헤아릴 만한 고구려 전문 연구자의 숫자는 이제 꽤나 늘어날 것 같다. 물론 양만이 아니라 연구의 질도 한층 깊어지리라고 믿는다. 그런데 나는 이 대목에서 걱정이 앞선다. 내게 익숙한 분야인 고대 이스라엘사가 밟았던 전철을 고구려사 연구가 답습할 가능성이 충분해 보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역사의 과제가 국가 혹은 여타 권력적 체계의 과제와 맞물릴 때 시간을 통한 성찰의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은 위기를 맞는다. 국가 등은 경계의 안과 밖을 나눔으로써 존재가 실현된다. 민족주의는 많은 적극적인 의미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계의 안-밖 이분체계를 강화하는 논리로서 작동하는 효과적인 장치였다. 그런 점에서 역사학은 민족주의를 필요로 할 때조차도 그것과 상대적인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역사 전쟁이 벌어질 때 민족주의적인 경계의 논리가 예민하게 작동되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의 일상에 깊이 스며들어와 있는 외부자들(국제이주노동자 같은)은 상당히 많다. 혹 역사 전쟁이라는 의식이 이들 우리 안의 외부자들에 대한 우리의 숨겨진 배타성을 자극하는 은밀한 촉진제가 될까 걱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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