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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다시 ‘희생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이 글은 [서울신문](2004 04 17) 칼럼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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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희생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드디어 총선이 끝났다. 항상 그런 느낌이지만, 휘몰아치듯 지나간 선거 태풍은 퍽도 거세다.

방송은 저녁 6시를 카운트다운으로 시작하더니, 밤새도록 누가 당선됐고, 어느 당이 성공했고, 지방색은 어땠고, 계급적 성향이 어떻게 영향을 미쳤고, ‘탄풍’, ‘박풍’, ‘추풍’, ‘노풍등등은 어땠는지를 분석한다. 아마 며칠이 지나도록 신문과 방송은 이 얘기를 끝도 없이 우려먹겠지.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만남이 있는 곳곳에서 사람들과 그 얘기를 나눴고, 얼마간은 그렇게 하겠지.

선거 결과는, 대체로 주변 사람들 거의 대부분에게 꽤나 만족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내게도 그다지 나쁘진 않다. 한데 마음이 좀 찜찜하다. 실은 한달 쯤 전에 한 사람이 내게 던진 질문이 계속 나를 성가시게 했기 때문이다.

한동안 연일 보도됐던 아이들의 유괴, 소녀들을 포함한 부녀자의 강간, 자녀 학대, 노인 학대, 그리고 이들 피해자들을 죽이기까지 하는 끔찍한 사건 소식에 접하면서 그는, 왜 사회의 실패자들이 자신보다 약자에게 분노를 터뜨리는지에 대해 말해달라고 했다. 피 튀기는 생존 경쟁에서 패배한 자들이 자신을 포기하기로 맘먹은 그 순간에 왜 자신의 완력을 약자에게 휘두르는지, 바로 그 사실이 그는 너무나 안타까웠던 것이다.

몇 년 전 TV 외화 <X파일>의 한 에피소드는 자기 몸에서 지방을 합성해내지 못하는 돌연변이가 뚱뚱한 여자들을 연쇄 살해하는 얘기였다. 돌연변이 남자는 인터넷 채팅을 통해서 희생자를 골랐다. 그런데 이들 희생자는 한결같이 뚱뚱한 젊은 여자였다. 남자들과의 만남이 두려워서 인터넷 대화에 몰두했던 여인들은 이 돌연변이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돌연변이는 지방을 그녀들의 몸에서 흡수함으로써 살아간다. 문명의 희생자인 돌연변이는 또 다른 희생자를 공격해야만 한다는 비극이 이 에피소드의 요지인 것이다.

어쩌면 유괴, 강간, 학대, 살해를 저지른 우리 사회의 돌연변이들은 그런 행위들 속에서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항상 누군가에 의해 패배하고 좌절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이길 수 있고, 그 희생자에게 절망을 안겨줄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총선은 우리 사회에서 꽤나 성공한 사람들의 잔치다. 후보자들은 대개 인생에서 실패의 경험보다는 성공의 경험이 월등히 많은 사람들이다.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자신을 잘 관리한 대가이기도 하다. 물론 큰 정당 소속수록 대체로 더욱 성공적인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런 정당의 선거 대표자들이 예외 없이 자신의 몸을 학대하면서 선거를 치뤘다. ‘자해는 자신의 몸에 실패의 흔적을 남기는 행위다. 사람들은 그들의 자해를 보면서, 저 대단한 사람들의 고통을 안쓰러워하기도 하고, 그 고통이 평범한 자기 자신의 실패의 쓰라림이기라도 한양 공감하는 위안을 얻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 대표자들은, 나를 괴롭힌 그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을까? 최후까지 몰린 실패자들도 성공의 가학성에 취하고 싶어 하는 문명의 저주를 푸는 비법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내는 데 꽤나 효과적이었던 자해’, 그것의 기억은 그들로 하여금 성공주의 사회의 저주받은 이들에게 가해지는 형벌을 느끼게 해 줄까?

나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자해를 행한, 각 당의 선거 대표자들의 입에서는 승리라는 말이 떠나질 않았다. 이겨야만 하는 게임은 이렇게 지나갔지만 그 결과는 우리 모두를 이 경쟁의 논리 속으로 계속 붙잡아 놓을 것이다. 미디어는 그런 흥분을 유지하고 싶어 할 것이고, 정치인들도 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엔 빨리 여기서 탈출해야 한다. 한동안 미디어를 온통 채웠던 그 문명의 저주에 관한 기억을 얼른 다시 떠올려야 한다. 왜냐면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를 향한, 실패자들의 저주받은 가학성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