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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단지 그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이 글은 [서울신문](2004 06 25) 칼럼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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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그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지금 막 김선일 씨가 처형당했다는 급보를 들었다. “죽고 싶지 않다고 처절한 절규를 내뱉던 그 청년은 끝내 처참한 시신이 되고야 말았다. 납치부터 처형까지 5일 간 체험했을 통제되지 않는 극도의 무력감과 공포감은 단지 그때 거기 있었다는 이유때문에 그에게 날아들었다. 근년에 아프간이나 이라크 등에서 스러진 수많은 주검도, 그리고 주검 같은 절망도 단지 거기에 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미국 정부와 이라크 저항무장단체, 그리고 한국 정부 등이 각자의 이해관계 속에서 공모해낸 세계의 규칙이다. 단지 거기 있음으로 해서 불행한 자는 위로받을 길 없는 격렬한 절망감 속에서 자신의 최후를 맞이해야 한다는 규칙이다. 예고도 없이 찾아든 저주는 단지 삶의 기회를 찾아 인생을 배회하던 이들의 진부한 평범함을 참아주질 않는다. 위대한 거대 진리를 수호하기 위함이라는 명분은 작은이들의 하찮은 꿈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세계의 질서를 구축했던 것이다.

김선일 씨 처형 직후 미국은 이번에도 알 자르카위의 은신처로 추정되는 모처에 보복공격을 가했다고 한다. 반인륜적인 테러를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다. 그리고 이러한 인권 옹호적 발언’(?)과 더불어, 필경 단지 거기에 있었을 뿐인 여러 이라크인은 쏟아붓는 포탄세례에 죽거나 불구가 되거나 심각한 정신적 장애상태에 떨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라크 무장 납치 단체는 처형을 실행하는 자리에서 단지 잘못된 선택을 행한 국가를 응징하기 위해 소박한 꿈들을 도살했다고, 계속 그렇게 할 거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러한 악순환을 마치 모르는 양 한국 정부는 천진한 얼굴로 재건을 지원한다는 전투병 파병 명분을 다시 한번 천명하였다.

국가 혹은 국가임을 자임하는 이들은 자기들의 대의앞에 다른 것들이 모두 사소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불연 듯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 특권과 탈특권의 틀에서 살고 있고, 그러면서도 그 대의에 동화되기보다는 개인적인 꿈과 욕망에 더욱 민감한 대다수 사람 가운데 하나인 나를, 혹은 우리를 걱정하게 된다. 국가 외부의 우리엔 당연히 우리의 시민사회가 포함된다. 그러니 시민사회가 걱정된다. 김선일 씨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 것처럼 나도, 우리의 시민사회도 예고 없이 찾아든 그 불행의 자리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이 사건은 나를 혹은 우리를 우연히 찾아들지도 모르는 절망적 불행의 예감 속에 가둬버린다. 공포의 일상화다. 피해의식도 일상화되고 있다. 또한 자기 보호의 과민함이 일상화되고 있다.

종종 그렇듯이 어떠한 감각이 일상적으로 예민해지면, 다른 어떤 감각은 둔감해지곤 한다. 가령, 우리 자신에 대한 보호의 과민함은 우리 아닌 타자들의 공포에 무감각한 우리를 탄생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이라크 출신 이주노동자가 있으면 뭇매를 가하겠다고 화를 터뜨린다. 잔인한 흥미로움이지만, 그의 입에서는 그 직전에 테러 조장하는 파병을 반대한다는 평화주의적 메시지가 튀어나왔다는 것을 나는 기억한다. 물론 내 머릿속에서도 복수심 같은 어떤 분노가 이글거린다.

타자에 대한 적대감과 타자를 위한 평화주의는 이 사건을 경유한 우리의 기억 속에서 그다지 불편하지 않게 동거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소한 마음들이 우연히 마주친 곳에서 팍스아메리카주의 같은, 가해자 중심의 평화주의는 세계 속에서 실행에 옮겨진다. 아메리카제국 외부에서도, 멀고 먼 외부인 한반도에서도 말이다. 또 그 적대적 사회인 이라크의 분노에 찬 시민들의 적의 속에서도 말이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김선일 씨 사건이 충동질한, 삼국의 그 가해자들이 파 놓은 함정에 걸려들 위험에 빠졌다. 단지 거기에 있었을 뿐인 타자들에 대한 폭력에 무감각해지는 적개심이 평화주의와 갈등 없이 마음속에서 서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칫 전쟁 반대를 소망하는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팍스아메리카주의의 공모자가 될 기로에 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