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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와 교회에는 예수가 있는가

[서울신문](2004 05 01) 칼럼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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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와 교회에는 예수가 있는가?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는 말에 의아해할 사람은 없다. 모양이 닮았지만, 양자는 서로 별개임을 사람들은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데 교회에는 예수가 없다고 누가 말한다면 이 말은 매우 심각한 문제제기로 들린다. 예수와 교회는 서로 깊게 연루되었다,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한참 시사회를 할 무렵 한 영화 잡지가 내게 글을 청탁하면서, 최근의 예수에 관한 역사적 연구의 관점에서 이 영화의 예수를 다루어 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것은 <패션...>이 예수에 관한 사실적묘사를 위해 치밀한 고증을 거쳤다는 주장의 타당성을 점검해보라는 얘기겠다. 물론 예상대로 영화는 전혀 사실적이지 않았다. 예수에게 고문을 가하는 장면의 리얼리티 정도가비록 예수 자신이 당한 고문에 관한 직접적인 정보는 없더라도개연성을 지닐 뿐, 그 외의 역사적인 고려는 최근의 연구 성과는커녕 고전적인 연구조자 참조하지 않았다.

얼마 후 나는 감독인 멜 깁슨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지지하지 않는, 가톨릭 신자라는 정보를 들었다. ‘2차 바티칸공의회는 현대의 신학적 성과를 수용하여 교리적이고 체제적인 개혁을 결의한 가톨릭 교회회의였다. 그리고 그는 이 영화를 자신의 신앙적 신념과 결부시켰다. 요컨대 멜 깁슨의 영화가 현대 신학의 역사학적 논의를 충실히 반영하였는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가 사실 고증을 위해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열렬하게 토로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적어도 학문적인 개연성을 갖지 못한다.

한데 흥미롭게도 이 영화는 가톨릭뿐 아니라 개신교 신자들에게까지도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 데 성공했다. 특히 미국이나 한국처럼 원리주의적 기독교가 성행한 사회에서 그러하다. 이것은 교회가 학문적 구성물인 역사의 예수를 수용하지 않는 태도와 맞물려 있다. 실제로 역사의 예수교회의 예수는 많은 경우 대립하고 있다.

얼마 전 한국의 거대 규모의 한 개신교 교단 신학교에서 교수 두 사람이 교수직과 성직자의 직위를 박탈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역사의 예수에 관한 연구 성과를 수용한 학문적 논의를 했다는 것이었다. 신학 학술사적으로 이 분야 연구가 그리 일탈적인 것이 아님에도 대학교에서 이러한 학문적 견해가 파면의 이유가 된다는 것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그것은 분명 사실이다. 이것은 극단적인 사례지만, 한국의 어떤 신학교에서도 역사의 예수연구는 학생들에게 거의 제대로 소개되지 않고 있는 형편에 있다. 그나마 최근 영미권에서 이 연구가 붐을 일으키고 있는 덕에, 몇몇 학술지나 비판적인 연구기관 등에서 최근의 논의가 종종 소개되고 있는 형편이다.

신학교가 이런 사정이니 교회는 말할 것도 없다. 요컨대 교회에는 역사의 예수가 없다. 물론 그것이 신학 관련 매체가 아닌 곳에 고자질할 만큼 중요한 문제꺼리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패션...>의 경우는 이런 양상이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내가 다른 글에서 언급한 바 있거니와, 이 영화는 인종적, 성적, 계급적 편견을 담고 있다. 사람들이 온갖 고문을 당하며 처참하게 죽임당하는 예수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고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고 고백할 때, 그러한 감정이입은, 의도했든 아니든, 영화 속에 함축된 여러 편견들과 함께 우리 내면에 끼어 들어온다. 마치 지난 총선에서 정치인들의 자학적인선거운동이 유권자에게 감정이입되면서 그들에 대한 냉정한 판단에 장애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처럼, ‘신의 자학이라는 교회의 예수담론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지극히 감성적인 반응만을 자극하는 리얼리티만을 부각시키면서 다가올 때, 신앙의 비판적인 성격은 실종되고 만다. 더구나 <패션...>은 모든 인간사를 선과 악이분법으로 단순분할하고 있다. 최근 미국과 한국에서 정치세력화하고 있는 원리주의적 기독교가 그렇듯이 말이다. 이럴 때 , ‘으로 규정된 존재들은 세상의 증오와 복수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미국인에게 아프간과 이라크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