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 15~16일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가 주최한 ‘신학댓거리여행’에서 발표한 원고.
이 댓거리여행 강연원고 세 편이 모두 [기독교사상] (2007.2)에 게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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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성서, 민중신학
오늘 우리는 성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는 자아의 거울?
이러저러한 신앙 교육의 강사로서 참여한 지도 어언 20년이 되어 간다. 그간 했던 강의 원고 프린트는 폭 85센티 짜리 책장 두 줄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다. 물론 프린트된 것은 거의 대부분 성서에 관한 것이다. 초기의 것들은 타이핑을 하여 자료집 형식으로 보관되었는데, 그중 상당수는 유실되어 없으니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다. 그 외에 나의 신약학 분야 석사 학위 논문도 강의 원고를 발전시켜 만들었다. 한편 내가 쓴 책 중 두 권은 강의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이고, 또 초고가 완성된 상태의 한 권도 강의 원고를 다듬은 것이다. 물론 이것들도 모두 성서를 다룬 것이다. 여기에 현재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 책 하나가 있는데, 강의 원고에 기초한 것은 아니지만, 역시 성서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새삼 내가 성서 연구자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한때 나는 성서를 교육한다는 것에 강한 회의를 느낀 적이 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정말 성서를 필요로 하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의욕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나의 성서 강의는 거의 언제나 ‘역사 연구’의 결과를 나누는 데 초점이 있었다. 어떤 텍스트든 그 속에 담긴 역사적 정보를 발견하려 하였고, 그것들에 기초하여 텍스트 배후에 놓인 역사적 사연을 재구성하려 하였다. 바로 그러한 역사적 해석이 내 강의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한데 그런 강의를 2,3년씩 연속으로 들은 사람조차도 성서를 읽을 땐 거의 언제나 ‘자의적인 요소’를 끼워 넣으면서 이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성서 속의 얘기이자 성서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자기의 얘기이고 자기 자신이 듣고 싶은 소리를 마치 복화술 하듯이 들으려 한다는 것이다. 성서에 대한 역사적 해석이나 정보는 그네들에겐 그러한 자기가 원하는 얘기를 듣기 위한 단지 하나의 도구로 쓰일 뿐이었다. 그때 나는 이러한 식의 독서는 성서에 대한 착취요 농락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내가 생각하게 된 것은, 사람들은 성서를 볼 때도 거울을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었다.
근대 역사학으로서의 성서학, 그 논리와 효과
한데, 사실 성서 교육에 대한 나의 회의는 섣부른 것이다. 왜냐면 그것은 독서자의 그릇된 독서 욕망 내지는 습관이 낳은 것이라기보다는, 성서학 자체에 내장된 위기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근대(modern) 성서학은 근대 서양의 발명품인 역사학을 성서 해석의 주요 인식론이자 방법론으로 사용함으로써 전근대(pre-modern)의 성서 이해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런데, 뒤에서 더 얘기하겠지만, 근대 역사학은 내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는 성서학 자체의 위기로 나타났던 것이다.
먼저 여기서는, 근대 역사학과 성서학의 위기에 대해 논하기에 앞서, 그 논리와 효과에 대해 살펴보자. 근대 역사학의 근원적인 문제의식은 해석자의 자의적인 이해가 차단된, 텍스트 그 자체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데 초점이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텍스트를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그 주역은 예나 지금이나 교회다. 즉 근대 성서학은 성서에 대한 교회의 자의적인 해석을 문제제기하면서 진실로 객관적인 텍스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려는 데 주된 노력을 기울이면서 발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교회가 기억해온 텍스트의 의미를 삭제하는 데 있어 대단한 효력을 발휘했다. 요컨대 성서 역사학으로서의 근대적 성서 연구는 성서에 대한 교회적 기억을 ‘망각’하게 하려는 근대의 체계적인 테크닉이었다.
가령 알베르트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가 예수에 관한 18,19세기의 학문적 저작 중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평했던 슈트라우쓰(D.F. Strauss)의 역작 《예수의 생애》(1835)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기적 이야기의 대부분을 신화적인 것으로 해석하여 역사성 논의에서 제외시켰다. 이는 당시 교회 지도자들과 많은 신학자들을 당혹스럽게 했고, 그리하여 그들의 집중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이것은 슈트라우쓰 개인의 학자로서의 경력에 치명적으로 작용했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슈트라우쓰 이후 점차 대학 공간에서의 학문적 연구들은 그의 논지를 중요하게 참조해야 했고, 이에 대한 교회의 반박 또한 점점 그 호소력을 잃어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서학은 서양 근대의 정치학의 차원에서 다음 두 가지 점에서 매우 중요한 효과를 발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 첫째로, 근대 성서학은 ‘역사’라는 인식론적이고 방법론적인 해석 도구를 통해서 사람들에게서 교회의 독점적 지위를 해체시켰다. 역사를 통해서 교회가 해석해온 많은 요소들이 자의적인 요소들로 채색된 것임이 드러났고, 이는 세상을 향해 신의 의미를 설파해온 교회의 입지를 실추시켰던 것이다. 물론 학문적 논박만으로 하나의 견고한 제도가 산산이 붕괴되지는 않는다. 다만 그 독보적 지위가 격하된 정도이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역사학은 전근대(과거)와 근대(현재) 사이를 매개하는 교회주의적 해석의 연계성을 해체시키는 도구의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두 번째 정치적 효과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혁명이 1차적으로 제도에 대한 ‘망각의 정치’라면, 근대적 역사학과 성서학은 1차적으로 인식 혹은 생각에 대한 ‘망각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과거를 지움으로써 현재의 질곡을 극복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과거의 삭제라는 것이 단지 기능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데 있다. 과거의 지배적인 해석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단지 체제의 논리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까지 지배하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거를 삭제하는 일은, 마치 세기말적 현상과 같은 ‘정신적 공황과 불안’을 야기시킨다. 하여 교회의 특권적 지위가 사라진 사회의 정신적 공황,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근대의 지식은 어떻게든 보충해야 했다. 그것은 삭제된 ‘낡은 과거’의 자리에 ‘새로운 과거’를 채워 넣는 일이다.
여기서 시간의 학문인 역사학은 미래를 끌어들인다. 이른바 ‘유토피아적 미래’다(아래 도표의 ①). 그런데 유토피아적 미래는, 진실로 미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현재에서 상상된 가공물이다. 현재의 질곡을 겪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의식・무의식적으로 자리잡게 된 내일에 대한 꿈이다. 그런데 그 꿈의 형상이 마치 객관적인 것인 양 구성된다. 근대적 지식들에 의해서 말이다. 바로 유토피아란 그런 것이다. 그것은 미래를 구상하는 근대적 지식의 발명품인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유토피아’가 되려면 사람들은 그것이 현재의 상상적 가공물임을 알지 못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사람들은 그 유토피아가 현재의 자리에서 상상된 미래임을 몰라야 한다. 요컨대 유토피아적 미래는 ‘객관적 사실’의 지평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속음으로써 사람들은 존재적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정신적 자산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토피아적 미래를 끌어들인 역사학은 그러한 미래를 다시 과거에서 발견하려 한다(②). 가령 18,19세기 예수 연구자들이 예수가 평화주의자니 휴머니스트니 하면서 해석했던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하여 역사학을 통해 ‘새로운 과거’가 발명된다. 그리하여 현재 지향해야 할 것이 해석된다.(③)
한데 역사학은, 앞서 말했듯이, 객관주의를 추구한다. 즉 해석자의 자의성이 텍스트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미래의 유토피아적 지평이 과거 해석에 영향을 미친다면 역사학은 붕괴하고 만다. 그리하여 이 시기 역사학은, 마치 사람들이 유토피아적 미래가 현재의 상상된 가공물임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 그 미래가 불안으로부터 위안을 주었던 것처럼, 역사학자 자신이 발명한 ‘새로운 과거’가 유토피아적 미래의 ‘과거 버전’임을 알아차리지 못해야 한다. 이러한 이중의 자기 속임을 통해 역사학은, 교회주의적으로 구현됐던 과거가 아닌 진정한 근대 세계를 이룩하는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서 역사학 또한 그러한 정치적 역할에 한 축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근대적 역사학은 결정적인 딜레마를 갖고 있다. 한편으로는 해석자로부터의 절대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텍스트, 그 원본성을 철저히 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의 상상된 미래로서의 유토피아를 과거에서 읽어냄으로써 그들이 읽어낸 원본으로서의 텍스트는 다시 해석자의 가공물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그러한 지식이 유럽의 근대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말한 이중의 자기 속임 덕이었다.
근대 역사학과 성서학, 위기의 요체는?
한데 문제는 ‘상상된 미래’를 향한 실천들이 처절한 절망으로 다가온 19세기 말의 격동을 거치면서, 그리고 20세기 전반기의 두 차례의 거대한 세계적 전쟁을 치루면서 서양 근대에 대한 근원적인 자기 반성이 제기되었고, 이 과정에서 역사학적인 자기 속임의 틀들이 속속 폭로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예수 역사학 분야의 대저작인 알베르트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의 《예수의 생애 연구사》(1906)는 1778년 제자 레씽(G.E. Lessing)에 의해 출간된 라이마루스의 저작에서부터 1901년까지 저술된 6백여 편의 연구서를 꼼꼼히 분석하면서, 이 모든 역사적인 예수 연구서들은 하나같이 저자 자신의 상상적 미래를 과거에 투영시킨 것이 지나지 않았음을 밝혀냈다.
이것은 근대 역사학의 붕괴를 의미했다. 실제로 예수 연구에서도 20세기는 역사학이 좌초된 시기였다. 비록 연구자들 자신은 그러한 좌초에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20세기는 역사학의 차원에서 방법론적으로 19세기를 극복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인식론적으로는 후퇴라고까지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성서 역사학은 위기의 시기였다.
이러한 역사학의 위기의 요체는 역사가 객관적 사실, 해석자의 자의적인 것이 개입하지 않은 그것을 밝혀내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의 문제였다. 즉 해석자와 분리하여, 텍스트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지를 역사학은 해명해야 했다. 역사학에서 이것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관계를 둘러싼 토론으로 이어졌고, 예수 역사학에서는 역사의 예수(실재한 예수 자신)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선포된 그리스도) 간의 문제로 신학자간의 격론을 야기시켰다. 이때 ‘역사의 예수’(Historical Jesus)는 실재했다고 가정된 예수에 관한 학문적 가공물이며,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는 예수에 관한 초기 교회의 해석을 말한다. 바로 이 해석을 통해 역사의 예수를 읽는다는 것은 근대 역사학적 공리에 위배된다. 왜냐면 그것은 교회의 자의적인 해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라는 교회적 해석의 이면에 있는 ‘저 순수한’ 예수를 읽어내는 길은, 적어도 역사학의 위기를 경유한 상황에서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즉 케리그마적 그리스도에서 역사의 예수를 찾아가는 것은 근대 역사학에서는 방법론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20세기 신학은 대체로 케리그마적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간의 단절보다는 연속성을 강변했고, 이러한 가정에 기초해서 역사의 예수를 발견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한데 이러한 가정을 전제하려면 근대 역사학적 공리를 위반해야 한다. 하여 이 시기 예수 연구자들은 근대 역사학적 방법과 거리를 둔 자기들만의 학문적 게토를 만들어 그 속에 숨어들어 학문적 대화에 대해 꽁꽁 문을 닫았다. 그리고 다른 한편의 연구자들은 점차로 비역사학, 특히 문학에로 관심을 돌렸다.
제3세계 신학의 도전,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이후 활발해진 이른바 ‘제3세계 신학’은 이러한 성서학의 역사학적 위기에 하나의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제3세계 신학 운동은 국경적으로 서양의 외부인 제3세계의 사회들(라틴아메리카해방신학, 민중신학, 아시아신학, 아프리카 흑인신학 등)뿐 아니라 서양 내부의 제3의 세계(북미 흑인신학, 여성신학 등)에서 다양하게 발생한 다중적 신학 경향이지만, 전체적으로 일정한 공통성을 지니는데, 무엇보다도 세계의 각종 편견과 배제의 체계에 의해 억눌린, 심지어 그것에 억울해하고 분노해야할 자아마저 박탈당해버린(식민화되어버린) 존재들에게서 신의 형상을 보고자 한다는 점에서 대체적인 동질성이 있다.
이는 지배적인 신학이 그러한 편견과 배제의 질서를 공고히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문제의식과 맞물리면서, 서양 중심주의적 신학을 제국주의 신학이라고 비판하는 신학운동을 낳았던 것이다. 이러한 제3세계 신학들의 담론전략은 다양하지만, 그중 특히 역사의 예수를 묻는 데 강한 방점이 찍힌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는 배제의 재생산의 장치로 기능했던 교회와는 달리, 그것을 해체하려 하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교회가 기초하고 있는 담론의 핵심인 예수가 교회와는 달랐다는, 아니 그 정반대에 있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가장 통렬한 문제제기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제3세계 신학의 역사의 예수 논의에는, 예수라는 과거적 실체와, 배제되어 고통받는 자의 얼굴이라는 현재적 문제의식이 겹쳐져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때 과거와 현재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현재의 요청이 과거를 그렇게 읽어낼 가능성을 제시했고, 그렇게 재현된 과거는 현재를 향해 예언자의 목소리를 발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에 대한 서양 교회 내지는 신학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하나는 제3세계 신학들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18,19세기 서양의 예수 연구가 범했던 역사학적 과오를 그대로 반복한다는 입장이다. 즉 과거를 읽어내는 데 현재를, 현재의 해석자의 주관을 끼워 넣는 과오를 되풀이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타당성이 없는 억측인 측면이 있다. 왜냐면 서양의 성서 역사학은 현재가 과거를 읽는 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식론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즉 그러한 자기 속임을 통해서 텍스트(과거)의 의미를 현재의 사람들에게 내놓을 수 있었다면, 제3세계 신학의 성서 연구는 과거의 텍스트인 성서를 읽는 데 ‘현재의 사회적 고통을 보는 눈’이 개입되어야 함을 ‘명시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지배적인 서구신학에서 담론화하는 역사의 예수 연구라는 것의 함의와 제3세계 신학들이 지향했던 역사의 예수에 대한 논의는, 비록 후자가 서양 신학으로부터 학문적 자양분을 선택적으로 수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활용 양식이나 전제는 동일하지 않았음에도, 서양의 비평가들이나 그러한 경향에 세뇌된 이들은 늘 서양적 전제에서 제3세계 신학을 논평했던 것이다.
한편 다른 견해는 오늘의 제3세계적 현실 바로 그것 덕분에 비로소 예수의 실재, 나아가 성서의 역사적 실재를 올바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을 논증하려는 입장이다. 그동안 서양의 신학은 고통을 이야기할 때조차 그것을 민족적 고통, 계급적 고통, 나아간 인간 종으로서의 고통 등과 같은 하나의 추상화된 개념으로만 보았다는 것이다. 하나의 일반화된 보편타당한 추상적 가치에 준해서만 보려 했던 것과는 달리, 제3세계 신학 운동들이 제기하는 구체적인 고통의 현장은 지금까지의 서양 신학과는 전혀 다른 시각을 제시해 주었고, 이것이 예수를, 혹은 성서의 현실을 역사적으로 바로 읽어낼 수 있는 지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제3세계 신학과 서양 주류 신학의 공유된 한계, 본질주의
그런데 이상의 두 입장은 정반대의 견해인 듯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공통된 생각의 지평 위에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즉 이들에게서 과거의 역사적 대상은 ‘오직 하나의 실체’라는 생각이 공히 견지되고 있다. 그 흔들림 없는 실체를 사실 그대로 재현해내는 것이 역사의 예수 연구의 과제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가령 예수라는 하나의 역사적 실체를 읽어내기 위해 전자는 해석자의 현재, 해석자의 시선을 개입시키는 것의 부조리함을 지적했다면, 후자는 그 하나의 실체를 보는 데 현재의 시선이 유용성을 갖는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부조리하냐 유용성이 있느냐의 의견의 갈림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공히 예수는 역사적으로 ‘오직 하나의 실체’만을 갖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요컨대 이 두 견해 속에 담긴 제3세계 신학의 일반적 경향은 단지 하나의 실체로서의 과거의 역사적 대상을 오늘의 실천을 위해 적용하려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의 제3세계 신학들의 경우 그러한 본질주의적 역사관이 공유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본질주의적 역사학, 즉 단 하나의 과거를 읽는 것이 역사학의 과제라는 인식에 있어서 서양의 성서 역사학이나 제3세계 신학들의 역사학적 문제의식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앞서 슈바이쳐의 지적에서 보았듯이, 예수에 관한 ‘단지 하나의 실체’는 방법론적으로 그것을 읽는 주체가 개입하지 않는 한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여 그 주체의 눈이 달라지면 그 텍스트 속의 역사적 실체도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단지 하나의 실체’란 과연 존재하는가?
민중신학, 본질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능성
한데 흥미롭게도 민중신학에서 이에 대한 다른 시선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민중신학도 대체로 본질주의적 관점이 지배적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민중론을 얘기하는 대목에서 이와는 다른 분열적 시선이 본질주의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것은 18,19세기, 나아가 아직도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역사학적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 담론적 가능성이 제시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이 그것인데, 오클로스는 〈마가복음〉에서 민중을 나타내는 어법이다. 물론 나머지 세 복음서와 〈사도행전〉에도 이 용어는 많은 사용되고 있지만(〈마가복음〉: 38회/ 〈마태복음〉: 49회/ 〈누가복음〉: 41회/ 〈요한복음〉: 20회/ 〈사도행전〉: 22회), 오직 〈마가복음〉에서만 특별한 사회학적 함의를 지닌 용어로 쓰인다.
여기에서 그들은 ‘귀속할 곳을 박탈당한 대중’을 의미한다. 그들은 가난해서 생계를 연명할 농토를 빼앗긴 이들이고, 몸이든 영혼이든 부정한 자로 여겨짐으로써 사람들과 정상적인 공존을 거부당한 자들이며, 나아가 유대 민족공동체의 당당한 일원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한 자들이다. 요컨대 오클로스는 ‘타율적으로 귀속할 공간을 박탈당한 자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마가복음〉은 바로 이들이 예수의 주요 대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일차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가설은 〈마가복음〉을 낳은 공동체의 주요 구성원이 바로 오클로스였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오클로스의 예수 기억이 바로 이 텍스트라는 주장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오클로스가 구술로 전승하던 것을 누군가 채록한 것이 〈마가복음〉이라는 얘기다.
안병무의 오클로스 가설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은 바로 여기에 있다. 〈마가복음〉이 구술을 채록한 텍스트라는 사실은 이 텍스트와 예수 사이의 중요한 역사적 연계고리를 제공해 준다. 왜냐하면 주후 30년 어간에 활동했던 예수로부터 주후 70년 어간에 저술된 이 텍스트에 이르기까지 예수 이야기가 전달된 ‘하나의 경로’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 하나의 경로란 ‘오클로스에 의한 예수 기억’이다. 즉 〈마가복음〉의 대중인 오클로스는 그 선대의 오클로스로부터 예수 이야기를 들었고, 또 그들은 예수를 직접 만났거나 그 당대의 사람들, 예수의 대중인 오클로스로부터 예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세 범주의 이야기의 전달자가 모두 오클로스라는 점, 즉 사회학적으로 유사한 계층적 집단이라는 사실은 구술 전승에서 기억의 유사성을 낳는 요소가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계층이 유사하다는 것은 그들의 사회적 체험이 유사하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이러한 체험의 유사성은 기억의 유사성을 낳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가복음」의 예수 기억에서 역사의 예수로 가는 어떤 역사적 연속성을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의 예수’는 오클로스의 ‘기억의 구성물’이다. 이때 기억의 구성물이라는 것은 기억되는 존재와 기억하는 존재 간의 상호소통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주위 대중과 분리하여 예수를, 역사의 예수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억하는 이가 달라지면 역사의 예수상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요컨대 ‘단 하나의 실체’라는 말은 역사의 예수일 수 없다. 곧 역사의 문제는 단 하나의 실체로서의 본질을 묻는 물음이 아니라 기억하는 이와 기억되는 이(것) 사이의 상호성 속에 존재하는 것을 묻는 물음의 방식이라는 얘기다.
이상과 같이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은 예수와 〈마가복음〉을 잇는 기억의 연속성 속에서 역사의 예수를 조명한다. 그것은 예수를 기억하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하나의 기억의 계보에 속한다. 그리고 안병무는 이를 전태일에 의해 폭로된, 은폐됐던 한국의 민중, 1970년대 이농하여 무허가주택에서 집촌을 형성한 도시빈민, 귀속공간을 박탈당한 대중이자, 상당수가 사회의 혐오적 대상으로 배제되고 있던 그들에게서 오클로스를 발견하며, 전태일의 민중적 실천은 오클로스적 예수사건의 재현으로 해석한다. 요컨대 예수의 오클로스 사건과 〈마가복음〉의 오클로스 사건을 잇는 연속성이 한국의 전태일 사건에서 재현되고 있다고 그는 이야기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역사의 예수 문제를 해석하고 있다.
민중신학의 이러한 문제제기는, 역사의 예수는 혹은 성서 역사학은 하나의 실체로서의 본질을 묻는 물음이라는 전제로부터 벗어나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선례가 된다. 물론 이미 1930년대에 루돌프 불트만(R. Bultmann)이 해석자와 성서 사이의 상호성 속에서의 의미/계시를 해석함으로써 텍스트의 본질적 의미를 물었던 역사학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적 의미, 다양한 계시의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 그는 해석자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로부터 이탈하여 반역사적인 실존의 세계로 숨어들어야 했다. 반면 민중신학의 이러한 문제제기는 그것을 다시 역사화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요컨대 성서 역사학은 이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위기를 돌파하여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민중신학 이후, 본질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세 가지 테제
그러므로 나는 이제 앞의 문제제기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었다. 사람들이 성서를 읽으면서 자기를, 자기 자신의 경험을 개입시키는 것은, 성서를 농락하는 게 아니라, 성서를 읽는 타당하며 필요한 방법인 것이라는 얘기다. 그것은 거울을 보고 싶은 욕구가 아니라, 성서와 ‘대화하고 싶은 욕망’인 것이다. 이에 나는 아래에서 ‘민중신학 이후’ 성서를 보는 역사학적 방식에 대한 하나의 개연성 있는 가설을 다음 세 가지 테제 형식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1] 독서하는 자는 성서 텍스트를 진공 상태에서 읽는 것이 아니다. ‘독서자 자신의 삶’이 그 사이에 놓인다. 독서자는 자신의 삶의 세계 밖에서 텍스트를 읽을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의 경험이 응축된 자기의 언어로 성서를 읽으며, 자기의 삶의 사연들을 성서와 의식・무의식적으로 연루시키면서 성서를 읽는다. 이때 ‘무의식’이라는 말은 의지 밖의 영역이라는 뜻이며, 이는 텍스트를 읽는 데 그(녀)의 삶이 거기에 개입하는 것이 불가피한 것임을 의미한다.
[2] 독서자의 삶은 그(녀)가 속한 동시대의 삶의 제도(언어적 컨텍스트, 역사 문화적 컨텍스트)와 관계한다. 이때 삶의 제도와 삶의 구체적인 관계의 양식을 ‘실천’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성서 텍스트 또한 그 동시대의 공동체의 삶 속에서 형성된 것이며, 이는 그 공동체가 속한 삶의 제도와 실천을 통해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독서자가 성서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자신의 실천을 통해 읽는 것이며, 동시에 성서가 독서자에게 의미화되는 것에는 성서 텍스트의 실천이 함축되어 있다.
[3] 민중신학은 독서자가 ‘(사회적) 고통’에 주목하면서 삶의 제도와 대면하는 신앙 태도 속에서 수행되는 성서의 독서 양식이다. 그것은 타자의 고통을 나의 고통과 연계시키는 신앙 행위이다. 나의 고통에서 타자의 고통을 보고, 타자의 고통과 대면하면서 그것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민중신학적 성서 독서는 성서 속에서 신이 타자인 인간과 세상의 고통을 대면하기 위해 신 스스로가 고통의 현장으로 들어가 세상의 고통을 신 자신이 체험하는 이야기를 구원/해방의 이야기로 읽는다.
에필로그. 삶의 현장과 나누는 성서 읽기
이러한 테제에 기초해서 나는 이 글을 마무리하는 대목에서 성서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말하고자 한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독서하는 우리의 동시대를 대면하는 우리의 실천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또 민중신학적으로 성서를 본다는 것은 우리의 실천이 나/우리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의 연계를 체험하는 과정임을 말하였다. 그것이 각기 별개의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실상은 연계되어 있다는 깨달음이다(고통의 연대성). 그렇다면 과연 성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 읽기를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고통의 현장을 대면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거기에서 고통을 읽고,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체감하는 훈련이 요청된다. 가령, 고통의 현장에서 장애인 되기, 노숙자 되기, 어린이 되기 등을 실행에 옮김으로써 독서자는 자신의 삶과 삶의 세계 사이의 실천을 조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을 보다 구체화하기 위해 그 고통들에 대한 조사연구를 하면서 동시에 성서를 읽는 것이다. 여기서 성서가 그 고통에 대해 어떤 실천을 내포하고 있는지가 독서자에 의해 분석된다. 그리고 바로 이 과정에서 성서는 독서자에게 의미화되는 것이다.
성서는 결코 독서하는 우리와 무관하게 의미화되지 않는다. 성서가 스스로 말한다는 믿음은 근대주의의 신화일 뿐, 성서에 대한 진정한 역사적 인식 태도가 아니다. 성서는 결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독서자가 특정한 실천을 통해 대면할 때, 바로 그때그때 성서는 비로소 독서자에게 자신을 열고 의미를 발설한다. 고통의 가해자가 그러한 가해성을 스스로에게 정당화하는 실천 속에서 성서를 읽으면 성서는 오히려 그(녀)를 두둔하곤 한다. 그러므로 그 실천이 어떠한 것인가를 성찰하는 것이 성서 독서에서 매우 중요하다. 바로 그렇기에 민중신학은 고통을 대면하며 성서를 읽는 하나의 훌륭한 성찰을 제공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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