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원고를 다듬어서 [제2의 종교개혁과 민중신학. 임태수교수 퇴임논문집] (한들, 2007)에 수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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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같은 전쟁의 시대, 소비되는 타인의 고통
폭력의 일상화에 대한 민중신학적 고찰
전쟁의 일상화
고대의 전쟁에서 기본 병기는 칼과 창이었다. 병사들은 적의 얼굴을 마주대하면서 무기를 휘둘러야 했고, 제압하려면 그의 몸둥이를 치명적으로 훼손시켜야 했다. 칼의 손잡이로 베어진 적의 살갗 터지는 느낌이 전율처럼 다가왔고, 그 자의 절규하듯 내지르는 비명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움찔해졌다. 사방으로 터져나간 그의 살갗과 핏덩이가 눈으로, 입 속으로 튀어들어 온다. 피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촉각, 시각, 청각, 후각 등, 온갖 감각이 소름끼치도록 헤집어지는 경험을 통해야만 비로소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것이 고대의 전쟁이다.
총의 발견은 제압할 적을 ‘비가시적 존재’로 만들었다. 적의 머리통을 박살내거나 몸둥이를 헤집으면서 꿰뚫어버릴 총탄은 총신을 벗어나는 순간 보이지도 않는다. 또 적의 시체들이 발견되는 시간은 한참이 지나서이며, 즐비한 사망자들 가운데 자신의 총탄에 쓰러진 자를 가려낼 도리도 없다. 근대의 전쟁은 살육의 고통을 현저히 경감시켰다.
하지만 병사는 귀를 찌르는 폭약 터지는 소리와 어깨를 격하게 밀쳐내는 개머리판의 반동을 겪지 않으면 사격을 할 수 없다. 등판이 터지고, 두개골이 깨지고, 손발이 잘린 적의 끔찍한 시신을 밟아 지나야만 전투는 끝이 난다. 비록 살상의 순간에는 그것을 확인할 수 없지만, 되풀이되는 기억은 그 둘 사이의 간격을 거의 동시적인 것으로 겹쳐버린다.
게다가, 살육의 고통은 경감되었을지언정, 치사율을 극대화시킨 무기의 야만성의 희생자가 된 동료의 끔찍한 모습으로 인한 공포는 결코 경감되지 않는다.
한편 매스미디어가 발달하지 못한 고대 사회에서 병사들의 전쟁 기억은 대중에게 충분히 전파되지 못한다. 오히려 영웅담의 형태로 낭만화되곤 한다. 전장의 폭력이 빗겨간 공간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근대의 전쟁은 다르다. 기본 병기보다 더욱 치명적인 대량살상 무기들의 개발은 더 이상 전투가 병사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전장의 폭력은 그 공간적 범위를 극도로 확대시켰고, 희생자의 범주를 무차별적으로 확장시켰다. 근대는 전쟁의 악마성을 극한적으로 체감시킨 것이다.
한데 오늘 우리는 이러한 근대의 전쟁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체험한다. 람보형 병사들보다 더욱 중요한 존재로 엔지니어 병사들의 등장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양상이다. 그들의 무기는, 적어도 그들의 시야에선 칼이나 창, 총 등이 아니라, ‘버튼’이다. 그들은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 밖에 있다. 그들에게 발견되는 적은 인공위성이 전송해주는 디지털 신호로 환원된 존재며, 적들의 제거도 주검들에 대한 육체적 감각을 통하기보다는 디지털화된 신호로 확인된다. 그들은 커피를 마시며 동료들과 환담을 나누기도 하면서 전투에 임한다. 그것은 엔지니어 병사들에게 인터넷 온라인 게임에 다름 아닌 것임을 의미한다.
그들은 제거될 적이 사람임을 느낄 수 없다. 적은 단지 디지털 신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적의 고통을 체감할 수 없다. 물론 적에게 희생된 동료의 고통 또한 공감할 수 없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표적에 정확하게 타격을 가했는지의 여부이며, 그것으로 그 디지털 신호가 완벽하게 제거됐는지의 여부이다. 그리고 성공을 확인했을 때 무한한 통쾌감에 사로잡힌다. 그들에게 전쟁은 특별한 체험이 아니라, 오락게임의 희열과 같은 것, 일상화된 기억이다.
Tomothy O'Sulliban, A Harvest of Death, Gettysburg (1863)
근대적 기술전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남북전쟁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전쟁의 리얼리즘을 단적으로 보여준 가장 대표적인 사진.
한편 이라크 전쟁의 실시간 TV 중계에서 보듯, 엔지니어 병사들의 게임 같은 전쟁의 기억은 대중에게 곧바로 전달된다. 마치 불꽃놀이를 연상시키는 분홍색, 황색, 청색, 녹색 등의 섬광은 잔인하기보다는 아름답다. 게다가 표적을 정확하게 가격하여 민간인의 희생을 최소화한다는 이른바 ‘깨끗한 전쟁’ 이데올로기는 시청자에게 폭격의 참상을 위생처리하여 전달한다. 시청자들의 감각 속에서 인간의 고통은 부재하고, 오락과 같은 쾌감이 가슴을 적신다. 이렇게 대중에게 ‘전쟁은 일상화’된다.
지구화, 새로운 메시아의 도래
20세기를 마감하기 몇 년 전 한국을 필두로 하여 아시아 동반부 지역의 몇몇 국가들에 갑자기 몰아닥친 외환위기는 그때까지는 말로만 듣던 이른바 ‘지구자본’이라는 것의 실체가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어느 사회학자의 표현대로, 초단기간의 무차별 공습이 일체의 저항력을 완전히 파괴해버린 뒤 진주한 정복군 사령부(IMF)가 자신의 방식대로 폐허로부터의 재건을 지휘하는 양상은 영락없는 ‘전쟁’ 바로 그것이었다. ‘지구자본’은 자본주의가 창조해낸 가공할만한 최첨단 신형무기체계이며, 향후 전쟁의 양상을 예고하는 유력한 신호탄이기도 했다.
이른바 ‘포스트 전쟁 시대’는 이렇게 개시되었다. 전쟁 개시를 알리는 선전포고도 없으며, 그럴듯한 지구적 공공성을 가장한 명분도 없다. 각개의 지구자본적 행위자들은 일사불란한 지휘계통도 없이 서로 별개의 정보 분석을 통해 행동에 임한다. 이들을 결속시키는 유일한 명분은 이유창출이며, 행위를 합류시키는 직접적인 계기는 그들이 공히 신뢰하는 신용정보기구들의 분석에 있을 뿐이다. 일단 표적이 결정되면, 그들 각자는 이윤창출이라는 저의를 숨김없이 드러내며 표적을 향해 초단기간에 무차별 포격을 가한다. 이른바 외환위기는 이렇게 왔고, 가장 피해가 격심한 나라의 하나인 한국은 순식간에 일체의 저항력을 상실한 채, IMF의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그러나 지구자본이 반드시 이처럼 전쟁 같은 방식으로만 덮쳐오는 것은 아니다. 더욱 빈번하게는 문화적 재화를 포함한 소비재 상품의 형태를 띠고 유유히 전 지구의 곳곳으로 스며든다. 이러한 지구자본의 이동을 방해하는, 국경으로 상징되는 여러 장애물들이 있지만, 지구자본은 갖은 압력을 통해 가설자인 각 국가들과 도시들 자신이 그것들을 자발적으로 철거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국가들과 도시들은 위협에 못 이겨 그것을 할 뿐 아니라, 많은 경우 기꺼이 지구자본의 자국 주둔을 허용한다. 지구자본만이 파멸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지구자본 메시아론’이 널리 편만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전쟁의 예감, 자칫하면 엄청난 재앙에 직면할 수 있다는 그 불길한 예감이 수동적 순응을, 나아가 보다 적극적인 순응을 낳은 결과다. 한국의 신자유주의론자들도 바로 이러한 메시아론 신봉자의 하나였다. 그들은 메시아가 곧 도래하리라는 신탁을 선포하고 골짜기를 메우고 산을 깎아 주름진 곳을 펴서 평평한 대로를 만들려 한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한 장면 미국의 폭격으로 불타고 있는 바그다드
한편 1991년의 제1차 이라크 전쟁과 21세기 벽두에 벌어진 두 차례의 전쟁 또한 예사스럽지 않은 변화를 보여준다. 정교하고 가공할 위력을 가진 최첨단 무기들의 묘기 같은 장면은 통신과 미디어 기술의 복합을 통해서 전 지구적으로 거의 생방송처럼 방영되었다. 승패가 결정될 때까지 정규군간의 전투가 거의 사라졌으며, 엔지니어 병사들은 마치 오락 게임처럼 버튼으로 상대를 제압하였다.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처참한 전투장면과 달리, TV 모니터를 통해 전달되는 색깔의 향연은 마치 불꽃놀이라도 하는 양 아름다운 이미지로 재현되어 전 지구의 시청자에게 다가갔다. ‘깨끗한 전쟁’이라는, 병사들과 민간인의 희생을 최소화한다는 현대 전쟁론자들의 이데올로기는 전쟁쇼가 되어버린 이미지 재현을 통해서 홍보되고 있다. 다행히도 이런 유의 전쟁은 지구자본의 그것에 비해 아직 충분히 미학화되지 않았다. 따라서 전쟁의 이미지에 가려진 추악함을 드러내는 시도들이 훨씬 더 강한 설득력을 갖추고 미국을 제외한 전 지구 대중에게 다가가고 있다.
이 두 유형의 현대적 전쟁은 현행의 지구화를 대표하는 두 주체인 ‘지구자본체제’(golbal capital system)와 ‘지구무기체제’(global weapon system)가 얼마가 파괴적이고 독점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계기다. 이 두 체제는 때로는 서로 연동되기도 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특성으로 각기 지구적 통제 체계를 구축해가고 있다. 요컨대 지구화 시대의 ‘제국’은 두 가지 모델로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순응의 정치학
《세계화의 덫》을 쓴 한스 페터 마르틴과 하랄트 슈만은 지구자본의 운동이 얼마나 심각한 재앙인지를 신랄하게 고발하면서 저 유명한 ‘20 대 80의 사회’라는 표현을 쓴다. 전반적인 지구적 궁핍화는 이렇게 급속도로 우리 앞으로 돌진해오고 있다. 그것은 동시에 각 나라별로 국가적 단위에서 처절한 투쟁을 통해 제도화된 민주주의적 장치들을 파괴하고 있다. 또 근대를 거치면서 어렵게 구현해온 ‘삶의 질’은 퇴락해가고 있다. 때로는 좀더 완만하게 때로는 좀 더 급격하게. 때로는 좀 더 평화적인 양, 때로는 좀 더 전쟁처럼...
케빈 베일스(Kevin Bales)는 지구화가 새로운 형태의 노예제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일회용 인간’(disposable people)이라고 부른다. 지구적 궁핍화는 극빈층에게 더욱 극심한 존재의 파괴를 야기하고 있다는 얘기다. 삶의 질의 문제를 너머 어떤 이들에게는 ‘존재의 해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지구무기체제는 이러한 궁핍화를 더 심하게 겪고 있는 사회에서 예방안보정책을 극단적으로 실행하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안보산업의 자본축적에 유리한 지정학적 전략이 끼어들고 있음을 의문의 여지없다.
절망의 구조는 이렇게 지구자본체제와 지구무기체제의 형성과정에서 벌써 심각하게 실행되고 있다. 그런데 두 제국 모델의 형성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공히 전쟁이었다. 그것은 임의로 설정된 표본국가에 엄청난 파괴를 가져다줌으로써, 강력한 학습효과를 전 지구 사회에 주고 있다. 즉 ‘전쟁예감’은 현행의 ‘지구화의 덫’에 모든 국가와 도시들이 자발적으로 걸려들게 하는 가장 유용한 장치임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일상의 전쟁화
‘전쟁예감’은 전 지구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패전에 대한 공포를 예방하기 위한 처절한 삶의 전략에 매진케 한다. 무한경쟁의 시대다. 지난 시절 일터와 쉼터를 이분화시켰던 일체의 제도들은 사정없이 교란되었다. 특히 한국에서 이러한 교란은 더욱 고통스러웠다. 왜냐면 가족은 단지 쉼터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든 가용 자원을 단지 발전을 향해서만 총동원하는 돌진적 성장(Rush-to Growth) 사회의 배후에는 국가에 의해 유보된 일체의 복지체계를 가족이 대체해줌으로써 ‘편식적 발전’으로 인한 갈등이 완충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의 돌진적 근대는, 한편으로는 개발의 공간적 변화를 따라 이농 현상을 포함한 사회적 이동성을 극대화(이주노동, 재개발 등)함으로써 핵가족 단위로 분화된 가족 제도를 낳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세대별, 성별 주체화를 억제하는 전통적 결속의 체계(가령 호주제 등과 같은)를 유지, 온존시켜왔다. 나아가 국가가 보장해주지 않는 위험(risks)에 대비하기 위한 가족주의는 의사가족주의로 확대된다. 학연, 지연 등이 그런 의사확대가족적 욕망을 반영한다.
그런데 지구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무한경쟁의 사회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돌진적 근대의 사회적 기초단위였던 가족을 심각하게 교란시키고 있는 것이다. 위험을 방어할 수 없었던 가족은 현저한 붕괴 경향을 보였고, 아직 심각한 위기에 처하지 않은 많은 (확대)가족들도 예감된 위험으로 인해 결속력이 급속도로 약화되고 있다. (확대)가족의 짐을 떠안지 않으려는 자기 방어의 전략, (확대)가족의 자산을 더 많이 자신에게 귀속시키려는 전략 등은 가족주의를 상쇄시키고 있다. 나아가 위험의 예방을 위하여 단위 (핵)가족 내부에서도 노동분업이 해체됨으로써, 가족주의적 질서에 균열이 가속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 기업의 노동전략이 고도로 세공화되어 가족은 더 이상 쉼터가 아니라 ‘일터의 연장’에 놓이게 되었다. 즉 후방지역의 전방지역화를 실현한 기업의 노동전략 또한 가족주의를 흔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은 규범의 아노미 상태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사람들 각자의 ‘존재론적 불안’(ontological insecurity)을 심화시킨다. 이것은 전통적 질서에 의해 소수자로 배제되었던 이들에겐 기회일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일상의 민주화를 위한 하나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이 글의 주제를 넘어서므로 다른 글로 미루고, 여기서는 존재론적 불안이 야기하는 고통의 문제만을 주목하고자 한다. 아무튼 이러한 지구화의 전쟁예감 상황은 일상적인 공간과 시간을 전쟁처럼 맞이하도록 강제한다는 점을 주지하자.
욕망으로서의 전쟁
저명한 교육학자이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인 닐 포스트먼(Neil Postman)의 저서 《죽도록 즐기기》(Amusing Ourselves to Death. 이 책의 한글 번역본이 1997년에 출간되었다)는 현대인이 사회의 통제 아래 놓이는 양식은 (‘강제’라기보다는) ‘쾌락’이라고 본다. 그는 TV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러한 결론에 이르지만, ‘TV적 감각’(televisionic sense)보다 ‘컴퓨터적 감각’이 그러한 요소를 ‘더욱 급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폴 비릴리오(Paul Virilio)는 그러한 TV, 영화, 비디오, 컴퓨터 등 시각적 영상매체의 감각 양식을 ‘속도의 감수성’을 중심으로 살피고 있다(《속도의 정치: 공간의 정치학에서 시간의 정치학으로》[1997]) 참조).
김문호, <질주, 그 허망함에 관한 보고서> 지하철 역사를 빠져나오는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
‘빠름의 문화’의 제도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돌진적 근대의 한국 사회는 시간 단축에 온갖 역량을 투여해온 사회였다. 그러나 속도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적응력이 높은 사람들인 한국인들은 요즘 어지럼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만큼 사회의 변화 속도는 놀랍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달린다. 자동차도 달리고 사람들의 발도 달린다. 출근길에도 달리고 산책로에서도 달린다.
질주하는 시선들을 끌어당기는 이미지들은 인지의 대상이거나 해석의 대상이 아니다. 흘깃 스쳐가며 느끼는 감각적 대상일 뿐이다. 그리고 그 감각적 대상으로서의 이미지들은 대개 영상매체를 통해 재현된, 아니 편집된 환형적 실체다. 그것도 저 무수한 환형적 영상 이미지들 가운데 시선을 끄는 데 성공한 대상들이다. 비릴리오가 말한 바, ‘시선의 우생학’에서 우량종으로 판명된 것들만이 질수하는 인간의 감각을 자극한다. 대중매체들은 그러한 시선적 우생학의 원리에 따라, 이미지들을 성적이거나 폭력적이거나, 가벼운 아이러니적 뉘앙스로 재현한다. 이렇게 해서 쾌락주의는 시각문화 속에서 질주하는 현대인들의 ‘감각의 리얼리티’를 구성하는 핵심요소로 자리잡는다.
사람들은 달리며 쾌락을 열망한다. 아니 쾌락을 위해 사람들은 달린다. 거기에는 영상문화를 낳는 산업적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소비사회는 그러한 산업적 변화의 배후다. 사람들은 소비사회를 경유하면서 개인으로서의 자아로 탄생한다. 한국의 돌진적 근대가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개인을 낳았고, 의사가족으로서의 개인, 즉 공동체의 일원, 특히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개인을 탄생시켰다면, 1987년 이후의 민주화는 그러한 공동체로부터 독립적인 자아를 향유하려는 ‘정치적인 개인’의 탄생을 자극하는 계기였다. 한편, 앞서 본 것처럼, IMF 관리체제를 경우하면서 지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집단적 결속체인 가족이 붕괴되어감에 따라 개인의 등장은 더욱 본격화된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서 특별히 주목해야할 사안은 1990년대 이후 급속히 발전하는 소비사회로의 산업구조의 변화이다. 이 변화와 맞물려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취향을 가지라는 피할 수 없는, 아니 피하고 싶지 않는 강력한 유혹에 직면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문화적 개인’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위에서 본 것처럼, 문화적 개인은 속도의 문화 속에서 영상매체가 재현한 가장 자극적인 이미지를, 성적이고 폭력적이며 아이러니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자아를 구성한다. 쾌락주의적 자아다. 그런데 이 쾌락주의적 자아를 유혹하는 이미지들 속에 담긴 핵심적 메시지는 쾌락은 질주하는 것, 타인과 경쟁하는 숨 막히는 질주를 즐기라는 것이다. 곧 일상화된 전쟁은 살기 위한 싸움일 뿐 아니라, 더 많이 즐기기 위한 싸움이다. 물론 싸움은 승리자에게만 쾌락을 선사한다. 하여 승리를 욕망하며 사람들은 싸움을 즐긴다. 전쟁은 또한 욕망인 것이다.
고통
한데 일상화된 전쟁의 사회, 전쟁을 욕망하는 사회, 승자의 쾌락을 향유하기 위한 전쟁의 쾌락에 몰입하는 사회, 게임이 되어버린 전장으로서의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항상 승자가 되고자 열망하지만 불행하게도 항상 승자일 수만은 없다는 당연한 사실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의 예감은 자신 또한 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음울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쾌락을 추구하면 할수록, 메시아 부재의 골고타 언덕을 향한 십자가의 질주 속으로 던져진 자아를 발견할 뿐이다. 쾌락을 열망하는 자아는 동시에 고통에 신음하는 자아이다.
고통의 시장
얼마 전 방영됐던, 1950년대 어간 김수영 박인환 등의 작가들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든 〈명동백작〉을 보면서 나는 그 시기에 청년기를 살아간 이들은 그 격동의 시절이 안겨준 고통을 어떻게 견뎌냈을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증언자들의 파편적인 기억을 뚫고 다가온 한 가지 정보는 ‘술’이었다. 식민지의 상실감을 인고하게 했던 희망이 처참히 무너진 자리에서, 이유 모를 폭력의 난무 속에서 그들은 술에 취해 있었다. 전봇대를 들이받고 담벼락을 걷어차면서 비틀거렸다. 익명의 사람이 사는 집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스쳐 지나간 모르는 이를 향해 호통을 쳤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하나 쓰러졌다. 그 비루함 속에 살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였겠다. 그러나 알코올에 찌든 채로 살아갈 수만은 없는 법. 취하지 않은 육체는 다른 무엇을 필요로 했다. 필경 1950년대 사회를 그토록 신속하게 통합시켰던 ‘반공’이라는 증오의 정치는, 알코올에 빠져 자신을 저주했던 자학의 육체이기를 부정한 이들의 심성 속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학적 공격성은 이후 ‘잘 살아보자’는 구호 아래 맹렬하게 추진된 ‘돌진적 근대’의 심성적 자원이 되었다.
전투적 반공주의와 돌진적 근대로 특징 지워지는 한국의 산업화는 1950년대를 살아간 이들의 집단적 상흔이 자학적이기보다는 ‘생산적’으로 표출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국가 관료, 기업가, 심지어는 개신교 성직자 등, 자기 자신에 대한 성공신화를 술회하는 이들은 자신에게 닥친 고통을, 동시대를 살아간 사회 전체 구성원의 고통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의 고통이기도 한 그것을 ‘생산적’인 것으로 치환함으로써 자기가 어떻게 ‘조국 근대화’의 주역이 되었는지에 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그러한 고통의 치환을 생산적인 것으로, 즉 생산적이라는 긍정적인 자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변환시키는 장치가 있다. 마치 어떤 물건의 사용가치를 평가하여 잉여가치를 높게 부여하는 역할을 시장이 하듯이, 사적인 고통을 공적 욕망으로 치환하는 작용에 긍정적이라는 가치를 부여하는 일종의 고통의 시장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장은 전투적인 생산적 총동원체제라는 고도의 권력 집중적인 국가체제, 기업체제, 교회체제 등을 정당화시켰다. 문제는 사회 곳곳에 침투한 이들 권위주의적인 체제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증오하게 하고 ‘생산적 체제’의 일탈자 혹은 실패자를 배척하게 하는 ‘가학의 심성화’를 촉발하고 격려하고 부추여 댄다는 데 있다.
‘386세대’는 바로 이 세대가 낳은 ‘사생아’의 이름이었다. 어미인 모국, 모기업, 모교회 등을 둘러싸고 아비와 반목 갈등해야 하는 것이 이들의 외디푸스적 운명이었다. 아비가 뿌려 놓은 증오와 발전 욕구의 산물은 규제와 체벌로 가득한 사회였다. 세상은 입을 수 있는 옷과 입어서는 안 되는 옷, 들을 수 있는 노래와 들어서는 안 되는 노래, 활동할 수 있는 시간과 안 되는 시간, 할 수 있는 말과 해서는 안 되는 말 ... 등등, 수없이 많은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었다. 아비의 부정(不定)은 이들 금지된 것을 향한 게걸스런 욕구로 나타났다.
권력 집중에 대한 지난한 도전은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기억 속에서 지난날의 권위는 삭제됐고 부친 살해 욕구는 실행되었다. 이러한 성공은 일탈자 세대를 새로운 주역으로 탈바꿈했다. 실은 ‘386’이라는 이름은 일탈자 일반을 향한 이름이라기보다는 그 가운데서 부친 살해에 성공하고 새로운 주역으로 부상한 이들에게 부여된 ‘영예스런’ 이름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아무튼 ‘저항’은 일탈자의 고통스런 체험을, 그 사적인 좌절을 회수하여 권력의 집중화에 대한 증오로 공공화함으로써, 세대적인 공동운명체적 체험으로 언어화함으로써 실행된 것이다. 사적인 것의 이러한 공적인 것으로의 치환은 전체주의적인 권력 집중적 체제를 낳게 한 ‘고통의 시장’을 공격함으로써 그 논리적 근원을 반추하고 뒤흔들어 놓는 효과가 있다. 민주화라는 권력에 대한 탈집중적 지향의 제도화는 바로 이 과정의 직접적 산물이다.
그런데 이 과정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 점에서 위기의 요소를 담고 있다. 첫째, 새로운 권력 주체인 386세대는 규제와 처벌의 체계, 그 권위주의적인 ‘아비의 법’을 철폐하려는 의제를 물신화시켰다. 그 아비의 법이 철폐되어야 하는 이유는 사람들 각자의 사적인 고통을 전체주의적으로 동원함으로써 타자를 향한 가학의 질서로 작동하였기 때문이다. 사적인 고통이 사회적 생산의 동력이 되기 위해 타자를 향한 증오를 공격적으로 제도화했기 때문이다. 한데 새로운 주체가 된 이 세대는 그것이 ‘악’이기 때문에 철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아비의 법’을 철폐하기만 하면 모든 게 잘 될 것이라고 믿었다. 여기서 ‘어떻게’라는 질문은 불필요하다. 결국 아비의 법 내부의 진리의 인식틀, 그 이분법적인 가치 판단의 준거틀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아비를 증오했고 극복하려 했으나 너무나 아비를 닮아 있었다.
둘째, 개체적인 경험을 회수했던 권력 집중적인 질서, 그 아비의 법이 교란되면서 사적인 것이 대두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공적 가치에 의해 식민화되지 않은 사적인 것의 대두는 곧 ‘개인의 등장’과 ‘일상의 발견’을 의미한다. 이제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차이를 드러내는 감수성이 주체의 조건이 된 것이다.
한편 거기에 소비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각 사람들의 자기 취향에 대한 감수성이 맹렬히 개발된다. 과거 ‘권위주의 제도+자본주의적 산업화’의 체제가 가족공동체, 교회공동체, 국가공동체 등의 범주적 결속을 토대로 하는 근대성을 형성하였다면, ‘민주화+소비자본주의’ 체제는 이러한 전통적 범주들의 위상을 급속히 격하시키고 개인들의 주체화를 강화시켰다. 가부장, 성직자, 국가관료 등의 하위주체로 엮여있었던 가족, 성도, 국민 등이 이제 더 이상 전통적 권위에 순응하지 않는 녹록치 않은 존재로 주체화되었다. 이제 전통적인 권위들은 새롭게 주체화된 이들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끊임없는 갈등과 협상을 통해 전통적 결속의 범주가 변형 존속되거나 해체되는 상황이 도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민주화+소비자본주의’적 사회로의 이행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고도성장이 중단되었고,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폭력적으로 삶의 일상 속으로 엄습해 들어왔다. 가족, 교회, 국가 등 전통적 범주들은 돌진적 발전의 폭력적 상황으로부터 개개인을 일정하게 보호 후견하는 틀이기도 했는데, 신자유주의 시대의 무한 경쟁의 상황에서 그 범주들의 보호 장치는 이미 무장해제되었다. 게다가 게임 자체가 공정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 각자는 경쟁에서 보다 유리한 조건을 선점하기 위한 사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려는 일에 광적으로 몰입한다. 이러한 상황은 사적 욕구의 천민화를 급속도로 촉진시켰다.
공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네러티브의 그물망 속에 포박되어 있던 개인이 거기에서 탈출하여 ‘자기 욕구를 언어화’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일상의 민주주의를 심화시킨다. 그러나 사적 욕구의 천민화는 일상 영역에서 ‘민주주의의 야만화’를 초래한다. ‘잘 개발된’ 자기 욕구를 표출하는 데 여념이 없는 나머지, 자기의 아픔을 특화시키는 언어화에 지나치게 몰두하고 반면 자신이 타자화시킨 대상의 언어 박탈 현상에 대한 감수성이 현저히 퇴화되는 현상이다. 이때 그 타자적 대상은 자기 내부에도 있다. 예컨대 외모에 대한 천민적 욕구가 다이어트에 실패한 자기 자신을 학대하여 자기 증오에 이르는 경우에서 이러한 내적 타자화의 한 예를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어떤 고통은 침묵을 강요당한다. ‘언어화가 정지된 고통’인 것이다. 즉 사적 욕구의 천민화는 언어화가 허용된 고통에만 과도하게 집착하는 자기애의 병증을 야기한다.
침묵을 강요당한 고통, 언어를 박탈당한 고통은 무의식의 층위에서 표출된다. 이때 무의식적 대응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하나는 다른 방식으로 ‘재언어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고통의 치환이 바로 그것인데, 기억과 망각의 무의식적 편집 작용을 통해 언어화가 허용된 어떤 것으로 기억을 전이시키는 것이다. 이때 종종 허용된 언어임이 공증된 공적 가치로 사적 체험을 이전함으로써 재언어화가 실행되곤 한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민주화의 물신화를 얘기했는데, 나는 이것이 사적 욕구의 천민화로 인해 넘쳐나는 상처를 민주화의 의제로 변환시킴으로써 사회적인 동력을 얻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그 민주화는, 권위주의 체제 속의 구체적인 고통들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민주적 제도들의 효과에 대한 과신에 기반을 두고 있다. 민주화의 물신화, 바로 이것이 치환된 고통들의 새 안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즉 386세대에 의해 의제화되고 있는 민주화의 물신화는 고통을 치환하게 하는 시장인 셈이다.
한편 실어증 걸린 고통에 대한 무의식적 반응의 다른 차원은, 언어 박탈이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억죄어올 때, 그 반복적 억누름에 대해 ‘학습된 무력감’에 빠지는 현상이다. 이것은 고통에 ‘중독’되는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은 특정 경험에 한정된 언어 박탈 경험이 존재 전체의 언어 박탈로 이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능력’은 이렇게 그(녀)를 지배하게 된다.
전자가 자기 외부를 향한 병증적 요소라면, 후자는 자기 내적 병증이다. 외적 병증은 자기 외부의 타자를 공격하는 반면, 내적 병증은 자기 자신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 고통은 이렇게 치환됨으로써 자기를 파괴하고 타인을 파괴한다. 그러면서도 이 파괴가 무의식적 대응이기 때문에, 내․외부의 타자들의 고통에 대한 그들의 감각은 마비되어 있다. 우리가 수행자인 우리의 폭력은 우리 자신에게 은폐되어 있다.
민중신학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민중신학을 하는 것의 내용적 실천의 차원을 ‘민중의 눈’으로 세계를 읽는 것으로 보았고, 그 형식적 실천의 차원을 ‘증언’이라고 말했다. 민중의 눈으로 세계를 본다는 것은 ‘민중의 고통’을 세계 속에서 읽어내는 것이요, 세계를 향한 염원을 민중의 고통에서 추론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민중이라는 것은 세계의 고통의 담지자, 세계가 치환한 고통의 담지자이지만, 그 체험을 이야기할 언어를 박탈당한 존재다.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전가하기 위해 희생양으로 삼은 이들이다. 그러나 이 희생양은 이미 언어를 잃어버렸다. ‘실어증’은 민중의 자기 언어인 셈이다. 그래서 그들은 ‘무능력’하다. 한데 그들의 언어를 박탈한 사람들 또한 민중이라는 타자적 존재를 망각했다. 앞서 보았듯이, 리얼리티 감각의 마비는 속도문화를 추구하는 소비사회의 특징이다. 타자에게 전가하는 고통의 치환에 대한 마비된 감각은 민중의 망각이라는 야만을 은폐한다. ‘민중의 눈’은 바로 그러한 망각의 발견을 향한 인식론적 은유이다. 그리하여 민중신학자들은 은폐된 민중의 고통을 ‘증언’하는 자들이다. 그것은 민중 망각의 사회를 향한 고발이요, 그 사회에서 실어증에 걸린 민중의 대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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