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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신의 보신탕

기자가 4시반에 전화를 했다. 칼럼 원고를 언제 줄 거냐고... 

앗, 수요일? 화요일인줄 알고 글의 소재들만 몇 개 머리 속에 담아두고 있었는데 ..., 이미 시간은 마감을 네 시간 넘게 지나쳤다. 기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의 떨림 이상으로 내 심장도 떨렸다. 

최대한 줄 수 있는 시간을 물었다. 기자는 말이 없다. 무슨 소리냐는 뜻이겠다.

이미 줄 시간이 다 지나버렸다는 얘기다.

한 시간 반만 달라고 부탁했고

떨리는 손 끝으로 자판을 두둘겨댔다.

그야말로 쓰면서 생각했다. 아니 생각할 틈도 없이 써댔다.

6시 15분, 놀랍게도 원고를 마쳤다.

하고 싶은 말을 많이 놓쳤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마무리한 것은 천만 다행이다.

어쩌면 나로 인해 하루를 망쳤을지도 모르는 기자에게 정말 미안하다.

 

[한겨레신문]의 2012년 8월 16일자 칼럼 '야!한국사회'에 실린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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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보신탕

 

 

 

올림픽이 끝났다. 스포츠의 범람이 보름 넘게 지속되는 동안 세상의 많은 사연들과 문제제기들, 성찰들은 깊숙이 침수되어 있었다. 스포츠에 대한 열정이 유별난 사회가 아닌데도 모든 공중파 TV 방송은 대부분을 스포츠로 채웠다. 뉴스까지도. 사회 구석구석을 낮밤 가리지 않고 스포츠가 점거한 것이다.

나는 거의 모든 종목의 게임 룰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경기들을 시청했다. 또 대부분의 종목들은 선수들의 이름조차 처음 들어보았다. 그러다보니 나의 관람 방식은 한국이 이기는 것에 몰두하는 것이고, 금메달에 집착하는 것이었다. 금메달 예상 선수들이 탈락했다는 뉴스에 불안해했고, 의외의 선수들이 금메달을 연일 받으면서 만족스러워 했다. 한국 선수가 부당한 판정으로 불이익을 당했다고 하면 먼저 분노했고 심판과 상대편 선수들에게 적대감을 품었다. 또 금메달 수로 세계 최상위 그룹에 속했다는 것에 자긍심을 가졌다.

한국의 대다수 사람들을 올림픽과 마주치게 하는 절대 매체인 TV 방송은 그런 점에서 더하다. 방송 진행자와 해설자들은 내용의 침착한 전달이나 전문적 안내보다는 승부에 집착했고 소리만 고래고래 질래대는 경우가 허다했다. TV는 국민의 흥분과 승리감을 고취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매체였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상대하는 나라와 그 선수들은 우리가 이겨야 하는 대상일 뿐, 그 나라나 선수들에 대한 어떠한 관심도 가질 필요가 없었다. 하여 이 세계 최대의 국제스포츠 제전은 세계를 서로 소통하게 하고 이해하게 하며 화합하게 하는 데 별로 기여하고 있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우리의 공중파 TV가 재현하는 올림픽은 그랬다. 세계는 스포츠를 통해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우리와 타자만이 존재할 뿐이고, 타자는 우리의 미친 존재감을 위한 단순 대상물에 지나지 않았다.

몇몇 대선후보들의 지지율 상승의 일등공신이 된 것으로 유명해진 힐링캠프에 메달을 딴 유도선수들이 출연했다. 그들의 얘기들 가운데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그들이 장애등급을 받은 선수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세계 최고의 신체능력을 인정받은 그들이 실은 장애인이었다.

순간 우리의 올림픽에 대한 광분, 우리식 올림픽의 재현 방식이 선수들에겐 이렇게 나타나고 있었구나 하는 의구심이 솟구쳤다. 그들만이 아니라 많은 다른 국가대표 선수들의 몸도 그랬을 것이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몇몇 실패한 선수들도 그랬다. 과도한 운동으로 손상된 연골이 재생될 시간을 주지 않는 스케줄로 그들의 몸둥이는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숱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회복할 시간을 신체에 허용할 수 없게 하는, 오직 승부에만 집착하게 하는 스포츠 메커니즘이 가장 강인한 몸을 가진 선수들을 훼손된 몸의 소유자로 만들어버렸겠다.

하여 이 국제적 스포츠의 제전은 몸은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오직 승리하나만을 추구했던 성공한 선수들이 들려주는 무용담을 통해 비로소 삶의 즐거움을 겨우 얻을 수 있는 슬픈 국민의 제전이다. 비루한 일상을 위로받는 출구가 이것 밖에는 없는 사람들이 누리는 빵과 서커스’, 그것을 위해 국가는 국가대표선수들의 몸을 그렇게 훼손시켜야 했고, 국민은 그런 훼손된 육체로 승전보를 안겨준 선수들의 무용담으로 정신의 보신을 체험하려 했다.

그러나 이 정신의 보신탕은 국민을 퇴행시킨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나라 외에는 모든 것을 타자화하는 생각의 연습을 하였고,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정복욕이 주는 쾌감의 기억 한 줄을 마음속에 새겨놓았다. 또한 그런 방식의 스포츠 해석이 난무하는 가운데 삶의 비루함과 쾌락의 시스템을 바라보고 성찰한 시간을 우리는 또 다시 놓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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