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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그리스도교 애국주의, 도대체 왜 이러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2013.12.16)에 기고한 글입니다. 

갈수록 글 쓰기가 힘들어집니다. 짧은 글인데도 겨우겨우 썼네요.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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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애국주의

도대체 왜 이러나!

 

 

 

 

 

 

199212363빌딩 국제회의장, 충현교회 인맥이 주축이 된 나라사랑협의회가 주관한 나라와 민족을 위한 목사, 장로 기도회가 열렸다. 흔한 대선 세몰이의 일환이었지만, 주목할 것은 직선제 대선이 부활하고 두 번째 맞는 선거에서 개신교의 정치화가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점과 그 슬로건이 애국(‘나라사랑’)이었다는 점이다. 이 둘이 만나 엮이어 형성하는 의미는 기독교국가.

한경직 이래 이런 기독교국가론은, 세계 기독교의 애국주의에 대한 관점과 구별되는, 한국 개신교 특유의 애국주의적 심성을 구성했다. 최근 유럽에서 불고 있는 애국주의 논의들이 자폐적 민족주의로 환원되지 않는 애국주의를 재해석하려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애국주의는 한반도라는 영토성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데, 이는 통상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한민족의 공간적 배치와 중첩된다. 하지만 기독교적 애국주의는 격한 반공주의적 기조를 띤다. 해서 한반도의 절반 지역에서 실체로서 존재하는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을 비존재화하며, 동시에 남한 사회에서도 격한 반공의 기준에 벗어나는 이를 배제한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적 애국주의는 반공 기조의 강한 배타적 애국주의의 성격을 갖는다.

한편 한국 개신교의 기독교국가론은 깔뱅주의적 국가관과 유사한데, 이는 기독교적 가치가 통치원리로 작동하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한데 한국 개신교는 깔뱅의 국가론과는 일정 부분 다른 신앙관을 갖고 있다. 우리가 흔히 근본주의라고 부르는 신앙이 그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근본주의는 전통종교에 대해 특별한 경계심을 표할뿐 아니라, 심지어 가톨릭에 대해서도 배타적이고 개신교 계열의 많은 소종파를 배척하는 신앙 전통을 갖고 있으며, 최근에는 유사종교적 현상들(가령 뉴에이지)이나 성소수자들, 그리고 이슬람 신앙을 가진 이민자들에 대해 공격적 배타주의를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 개신교의 깔뱅주의적 애국주의는 근본주의적 자기중심주의에 치우친 협소한 공동체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한데 이런 애국주의는 한국 개신교만의 현상은 아니다. 한국사회의 권위주의 정권이 추구했던 애국주의도 크게 보아 이와 유사하다. 해서 세계 차원의 민주주의적 법 이해의 관점에서 많은 문제를 지닌 국가보안법이 한국에서는 다수의 동의를 받고 있고, 최근의 종북몰이에 대한 사회적 동조 현상도 가능하다. 또한 사회적 소수자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권리에 대한 소극적 법률인 차별금지법이 제도화되지 않는 것도 이런 배타적 애국주의가 여전히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에서 개신교와 권위주의적 근대국가가 서로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전개된 원인이고 결과다.

알다시피 1990년대 어간 한국사회는 민주주의를 구축하려는 제도적 행보가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소비사회로의 이행도 빠르게 전개되었다. 이 무렵 수많은 권위주의적인 것들을 퇴출하려는 문화적 응징들이 계속되었는데, 권의주의와 동일시된 애국주의도 그 중의 하나였다. 하여 1980년대 민주화 담론에서 애국이라는 단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즉 민주화 담론에서 애국주의는 성찰되지 않은 채 방치된, 극우 반공주의적 권위주의 세력의 전유물로 간주되었다.

한편 소비사회 담론에서 애국은 다양하게 상업화되었다. 즉 비장한 반공주의자의 그것과는 달리 국가간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며 소비하는 경쾌한 애국주의로 재해석되었다. 88올림픽은 바로 그러한 소비사회적 애국심을 향유하는 강렬한 집합적 체험의 출발점이었다. 물론 이런 소비사회적 애국주의가 배타적 공격성과 결합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소비사회적 애국주의는 자본주의적 상품으로 소비하는 자기 향락의 소재의 하나일 뿐이다. 하여 우리라는 민족주의적인 집단적 동질성을 불태우는 애국심의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다시 개인으로 돌아가 애국심과 무관한 자본주의적 일상을 살아간다.

이렇게 1990년대 이후의 담론 지형에서 애국심은 낡은 권위주의의 유물로 퇴출되거나 소비사회적 개인들의 열정의 한 양식으로 재해석되었다. 그런데 권위주의 시대의 저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비장함 감성의 애국심은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1992년 나라사랑협의회의 기도회에서 주류 개신교의 기독교국가론의 핵심 요소로 잔존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하여 향후 본격화되는 개신교의 정치화는 이러한 배타적 애국주의를 제도화하려는 하나의 사회적 기조로서 해석할 수 있다.

한데 2013년 말, 사제들의 시국미사 정국에 반대하며 등장한 일단의 가톨릭 평신도 집단이 개신교 특유의 기독교국가론과 유사한 애국주의를 들고 나왔다. 이는 지난 2010년 경 대두한 가톨릭계의 뉴라이트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나타난 흐름의 하나로 보인다. 아직 개신교처럼 성직자와 평신도, 그리고 사회적 엘리트 계층에서 하위계층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활동가 층을 가진 폭넓게 정치화된 종교의 현상은 아니다. 또 배타주의적 애국심의 활동 영역이 개신교처럼 타종교, 타인종, 성소수자, 소수문화 등의 영역에까지 미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개신교 만큼은 아니더라도, 가톨릭 신자들 내부에서 훨씬 더 큰 규모로 확산되고 또 결속된 세력으로 나타날 개연성은 충분하다.

아무튼 최근 개신교와 가톨릭에는 애국주의 열풍이 불고 있다. 개신교에서 이러한 열풍은 아직은 다수이지만 최근의 양상으로 보아 점점 위축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가톨릭에서 이러한 열풍의 확산은 그리 우려할 현상이 아닐 수 있다. 왜냐면 한국에서 가톨릭은 개신교보다 덜 배타적인 신앙양식을 뿌리 깊게 제도화해 왔기 때문이다. 또 집회의 숫자에서 드러나듯 개신교 신자에 비해 가톨릭 신자들은 훨씬 더 동질적 집단주의를 행동화할 가능성이 약한 신앙 양식을 갖고 있다. 요컨대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 신자들에 비해 훨씬 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편이다. 요컨대 개신교와 가톨릭 내에서 불고 있는 애국주의 현상은 장기적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기획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성공하지는 못해도 결코 작지 않은 부작용의 흔적을 도처에서 남길 것이기에 우려된다. 우선 이런 종교계의 배타적 애국주의는 너무 쉽게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 이런 행동주의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이들은 사회적 소수자들이다. 소수자라는 이유로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존중받지 못해온 이들 중 상당수는 이미 많은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상흔을 갖고 있기에 비교적 작은 사회적 공격에도 깊은 상처를 받을 만큼 유약한 상황에 처해 있다.

또한 배타적 애국주의 신앙은 공론의 장에서 대화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경직된 주장을 소리 지르듯 내뱉는다. 이것은 성찰 없는 행동주의에 동조 혹은 모방하는 사회적 현상을 낳을 수 있다. 최근 온오프라인 공간에서 극우주의적 편집증에 기반을 둔 테러리즘이 부쩍 늘은 것은 그러한 우려가 기우가 아님을 시사한다. 상습적 성폭행범이나 연쇄살인자들 중 상당수는 피해자 여성의 부도덕함을 응징한 행위로 자신의 가해행위를 설명하곤 한다. 이것은 극우 보수주의자들이 도덕심에 기반을 둔 응징의 정치를 수행해 온 것에 대한 무의식적 모방행위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애국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이들에게도 성찰 없는 행동주의를 부추기는 효과가 있다. 즉 공론의 장에서 소통하기보다는 공격적 행동으로 자신의 견해를 표하는 일이 빈번해 질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온라인 게시판에서는 이러한 비대화적인 인터넷 테러가 횡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성찰 없는 과잉 행동주의는 정치엘리트들에 의해 이용되어 타협과 절충을 통한 협의의 영역인 정치의 공간을 협소하게 하여, 정치가 결핍된 통치의 사회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 실제로 최근 한국정부는 정치가 부재한 통치를 지배전략으로 구사하고 있는데, 그 배경에는 맹목적인 애국주의가 정치를 협소하게 하고, 통치를 강화하는 대중 현상이 깔려있다. 독일의 나치즘이나 중국의 문화혁명 등이 그런 선례들이었고, 최근 한국사회의 종북몰이도 그러한 대중 현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렇게 성찰 없는 배타적 애국주의는, 장기적으로는 실패할 기획일지라도, 사회적으로 많은 상처를 남길 것이기에 적극적으로 그것을 지양하려는 특별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도 우파든 좌파든 애국주의를 재해석하는 일에 나설 필요가 있다. 하여 한국사회를 요동하게 하는 애국주의의 배타성을 지양하고 맹목적 공격성을 지양하며, 대화적이고 생명 친화적인 감수성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유럽의 좌파 지식인들의 애국주의 재성찰 작업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특히 1997년 이후 한국사회는 모두가 서로를 경쟁자로 여김으로써 이웃이 사라지고 오직 자기애와 가족애만이 남는 극한적 개체주의가 남기는 파국적 경쟁사회에 돌입했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 경쟁에 실패한 혹은 성공 가능성이 거의 사라진 자들이 넘쳐나는 사회가 되었고, 이러한 열패감은 종종 분노 감정으로 재현되고 가끔은 약한 타자를 향해, 그리고 때로는 묻지마 폭력의 형식으로 표출되곤 한다. 이에 약한 타자들은 사회적 분노의 표적이 되곤 한다. 즉 감정을 성찰하는 기재가 결핍된 상황에서 과잉 감정은 타자에 대한 과잉폭력으로 나타나는 사회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하여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감정을 다스리는 내적 동력이다. 나아가 배타성과 공격성으로 표출되는 감정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될 필요가 있다. 즉 배타성이 지양된 열린 공동체주의, 그것에 기반을 둔 감성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많은 사상가들이 애국주의를 호출했다. 마음을 공유하는 이웃을 만들고, 그 이웃이 타자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경쟁하면서도 서로 배려하는 성찰적 감정의 영역으로 애국주의를 작동시키려는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평화는 타자를 이웃으로 삼는 평화다. 특히 약한 타자를 배제하는 사회 시스템을 극복하고, 장애가 있거나 몰락한 이들을 복원시키고 건강하게 하여 모두가 하느님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일, 그것이 그리스도의 평화인 것이다. 그러므로 개신교와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약한 이웃을 배제하지 않는 일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내린 소명이다. 하여 나눔과 배려의 애국주의를 향한 성찰은 오늘, 배타적 애국주의가 사람들의 내재된 폭력성을 부추기는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적 과제로 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