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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공동선] 작은 자들과 함께 하는 법, 역사를 묻다

격월간 잡지『공동선(http://www.comngood.co.kr)』 115호(2014. 03. 04)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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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자들과 함께 하는 법, 역사를 묻다

성서의 십계명, 그 법신학에 대하여

 


 

  

성서에서 십계명은 두 버전이 있다. 신명기5,1~22가 그 하나고, 출애굽기 20,1~17이 다른 하나다. 이 중 신명기버전은 히스기야(기원전 727~698) 혹은 요시아 왕(기원전 639~609) 때의 문서임이 분명하고, 출애굽기의 십계명은 그 시기를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추정컨대, 신명기의 십계명이 보다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유다국에서 왕립문서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다름 아닌 히스기야와 요시아 왕 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 확실히 해둘 것은, 십계명에 속한 계율들 하나하나는 보다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 식으로 오래 전부터 내려왔던 계율들은 필경 열 개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생활률이 열 개 이하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십계명은, 그 계명 하나하나가 아니라, 열 개 계명의 묶음본을 뜻한다. 이 열 개 계명의 묶음이 만들어진 것은 신명기의 원본(학자들은 이것을 원신명기라고 부르지요.)이 만들어지던 히스기야(히즈키야)나 요시아 왕 때였다는 것이다.


사실 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유다 전통에서, 단순히 911 사이의 자연수인 것만이 아니라, ‘전체를 뜻하는 의미로도 종종 사용되었다. 가령 창세기31,7에서 야곱이 아내들에게 자기의 외삼촌이자 그녀들의 아버지인 라반이 자신의 품삯을 속이기를 열 번이나 했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숫자 은 진짜 열 번 속임수를 당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늘 그런 식으로 자신을 속여 왔다는 주장을 담은 상징적 숫자다. 마태복음25,1~13에서는 신랑을 맞아야 하는 열 명의 여자 얘기를 예수가 비유로 말하고 있는데, 이때도 10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인간 일반을 대표하는 숫자다.


필경 신명기에서 열 개짜리 계율 묶음도 그런 뜻일 것이다. 즉 십계명은 단지 열 개의 계명만을 지키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이것은 모든 계율들을 상징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것이라는 얘기다. 사실 백성들은 이 열 개 계명만이 아니라 다른 생활률로 전해 내려오는 규율들을 지켜왔고 앞으로도 그래야 했다. 왜냐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을 공동체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국가가 반포한 십계명의 항목들도 이미 백성들은 다 지켜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열 개 계명의 묶음을 국가가 반포하였다. 그것은 이 계명을 받은 이들은 이제 국가의 법을 지키는 의무 아래 놓인 자들인 동시에 국가의 법 아래 부름받은 백성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어느 나라든 국법이 있고, 그 법의 백성/국민이 된다는 것은 그 국가의 주역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마찬가지로 십계명이 의도하고 있는 것은 백성을 지주도 아니요 지방성소의 제사장도 아닌 바로 국가에 속한 자로, 왕에 속한 자로 호명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조금 더 생각해보자. 계율의 열 개 묶음이 갖는 효과라는 점에서 말이다. 우리는 십계명이라는 표현이 우리 일상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음을 본다. 가령, 부부십계명, 안전운전십계명, 건강십계명, 청년십계명 등등. 왜 이렇게 무수한 십계명들이 있을까?


부부십일계명은 안 될까? 삼십칠계명은 어떤가? 부부가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 함께 지킬 요목이 열 개면 족한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은 것 아닌가? 하지만 이 주는 효과가 있다. 부부가 서로 합의한 열 개 항목보다 실제로 부부들은 더 많은 것들은 ,굳이 명시하고 있지는 않더라도, 이미 잘 지키고 있다. 하지만 서로 합의하고 서명한 십계명은 그 이상의 항목들을, 아니 가정을 지키기 위해 해야 할 모든 것들을 최선을 다해 실천하겠다는 선언을 담겨 있다. 그런 맥락에서 은 상징적 숫자 10이지만 동시에 최소한 이것만은이라는 함의를 포함한다. 즉 이 열 개는 기본이고, 그 이상의 모든 것을 지킨다는 고백을 내포한다는 얘기다.


이때 기본적으로 당연히 지켜야할 열 개라는 것, 10이라는 숫자는 실천에 옮기기에 적절한 숫자다. 너무 많다는 부담감을 주지도 않으면서, 기억하기에도 좋은 경각심을 주는 숫자다. 가령, 부부 십일계명이라고 하면 열 개보다 단지 하나 더 많은 것에 불과하지만, ‘열 개만큼 눈에 확 들어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홉 개계명도 단지 하나 적은 것에 불과하지만 그 기억효과는 훨씬 떨어진다. 그러니까 은 대중이 기억하기에 적합한 숫자라는 것이다.


, 다시 히스기야 혹은 요시아 왕 때로 돌아가 보자. 당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을 읽지 못했다. 한데 그런 사회에서 만약 왕실 제사장이 대중에게 율령을 150계명으로 선포한다면 사람들은 그 계율들을 잘 기억할 수 있을까? 물론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 십계명이라면 귀에 쏙들어오지 않겠는가. 요컨대 십계명은 특히 구술사회에서 대중에게 법을 반포하는 데 적합한 형식이라는 얘기다. 이 열 개만 지키면 모두가 하느님의 백성이 되며, 하느님이 선택한 왕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그 사정을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자. 팔레스티나의 국가들 중 야훼를 국가 수호신으로 섬기는 나

라는 두 나라가 있었다. 유다국과 이스라엘국이다. 한데 이스라엘국은 시리아-팔레스티나 전체에서 가장 선진국이었다. 인구도 많고 영토도 넓은 나라인데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그리고 아르메니아(오늘날의 터키 동부지역과 북시리아 지역)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 상에 위치한 나라다. 해서 이 나라는 시리아-팔레스티나의 패권을 두고 시리아 내륙 지역의 다마스커스국(Aram-Damascus)과 치열한 전쟁을 벌였고,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제국들이 팽창정책을 펼 때 시리아-팔레스티나 소국들의 연합군을 이끌고 대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기원전 722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반면 유다국은 사해 서부와 서남부의 작고 척박한 땅에서 인구도 별로 없는, 팔레스티나의 보잘것없는 소국(小國)의 하나였다. 1성서(구약성서)에는 유다국 중심으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탓에 이 나라가 꽤 강력했던 나라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오랜 기간 동안 이스라엘국에 예속된 봉신국에 불과했던 미미한 나라일 뿐이었다.


살만에셀 3세가 세운 석비에는 아합을 비롯한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연합군에 의해 자신의 동방원정이 저지당했음을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 석비에는 연합군의 군대규모가 들어 있는데, 여기에는 아합의 군대가 이 연합군을 사실상 이끌었음이 시사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유다국의 행운이기도 했다. 지리적으로 척박할 뿐 아니라 주요 도로상에 위치하지 않았기에 제국들의 관심 밖에 있어, 주변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전쟁의 피해를 별로 겪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같은 야훼 신을 수호신으로 받들던 나라였기에 이스라엘국이 멸망할 무렵 많은 유민들이 남하해서 유다국으로 유입해 들어왔다는 점도 이 나라의 행운이 되었다.


이로 인해 유다국은 결정적인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스라엘국이 멸망하던 당시 유다국 왕인 아하스(아하즈, 기원전 742~727)는 나라를 크게 번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국의 유민들이 공터로 남아 있던 땅을 경작하는 것이 가능했고, 전쟁으로 무주공산이 된 서쪽, 블레셋이 점거하던 곡창지대도 점령할 수 있었으며, 북쪽의 이스라엘 인접의 평야지대도 복속시켰다. 해서 아하스 치하에서 유다국은 비로소 국가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근데 그때 유다국에는 견고한 기득권 집단이 형성되었다. 저개발 국가가 보다 선진적인 국가로 이행하는 과정에는 대개 견고한 국가를 주도하는 계층이 왕실과 함께 성장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왕과 기득권계층이 형성되려면, 백성에 대한 수탈체제가 보다 체계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소농의 몰락을 의미했다. 바로 아하스 왕 시절의 유다국이 그랬다.


아하스를 이어 왕이 된 히스기야나, 히스기야의 손자 요시아 왕이 개혁정치를 폈던 것은 바로 이런 사정과 관련이 있다. 강력하고 유능한, 그리고 교활한 군주 아하스가 죽자, 정국은 왕실과 귀족 사이의 주도권 경쟁이 첨예화되었다. 세습체제가 대개 그렇듯이 후계자의 요건은 유능함보다는 혈통이다. 반면 선왕을 보필하며 국가를 성장시킨 주역들인 관료와 귀족들은 노련한 정치력을 갖춘 자들이다. 하여 후계자는 늘 강력한 귀족들과 경쟁해야 하는 어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히스기야도 이런 귀족과의 권력 투쟁의 관문을 뚫어야 했다. 이때 그가 선택한 묘책은 귀족층들의 땅에서 예속되어 있던 농민들을 자영농으로 복귀시킴으로써, 귀족의 권력기반을 붕괴시키고 백성을 왕당파로 흡수하려는 것이었다. 학자들은 이때의 개혁문서가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신명기의 초본일 것이라고 보았다. 신명기가 그렇듯이 그 초본에도 무수한 사회법적인 요소들이 많이 담겨 있었는데, 그 골조는 예속농민의 자영농화에 있었다.


문제는 이런 중앙의 정책이 어떻게 지방의 농민들에게 전달될 것인가에 있었다. 오늘날처럼 전국망을 갖는 지상파 방송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 촘촘하게 메시지를 유포시킬 수 있는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 국가의 정책을 반영하는 국립교육체계가 잘 짜여 있는 것도 아니다. 고작 전령관들이 전국을 돌며 왕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유일한 수단이었다.


한데 지방에는 지역 성소들이 있고, 그 성소들에선 제사장과 예언자들이 사제의 역할뿐 아니라 재판관의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그 지역의 대지주들과 서로 밀착된 지역엘리트였다. 또 지역의 대지주들은 중앙의 관료들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요컨대 중앙관료와 지방의 대지주, 그리고 지역 성소의 종교엘리트를 잇는 권력연합이 나름 견고히 작동되는 곳이 바로 지역 성소였고, 이 성소의 사제들은 그런 관점으로 백성을 가르쳤고 통제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전령관들이 왕의 메시지를 잘 전달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들은 지역 성소에서 거의 활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때로는 생명에 위협을 받는 경우도 많았겠다. 아마도 신명기에 나오는 레위인은 이런 상황에서 훌륭한 왕의 전령관이었다. 1성서의 다른 부분에 나오는 레위인들과는 달리, 신명기레위인들은 독특하다. 그들은 준군사화된 종교집단이었고, 철저하게 왕에게 충성하는 이들이었다. 아마도 이들 레위인을 지역 성소에 힘으로 밀고 들어가서 왕의 메시지를 포고하는 종교적 의례를 수행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때 지역 성소에서 왕의 메시지가 반포되었는데, 그 핵심에 십계명이 있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은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권력기반이 무력화되었고 일정기간동안 궁중에 유폐되어 있다가 죽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지만 선왕의 반대파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므낫세는 유다국은 물론이고 이스라엘국까지 합쳐도 최장기간인 무려 55년간을 재위에 있으면서 선왕의 개혁기반을 철저히 붕괴시켰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 그의 승계자가 궁중암투로 암살당하자, 오랜 동안 침묵하던 히스키야와 민중세력이 등장하여 므낫세의 다른 아들 요시아가 재위에 오른다. 그리고 그가 재위에 오른 지 10여년이 지난 뒤 개혁정국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때 신명기가 바로 왕실 서기관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십계명이 백성들에게 재반포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요시아가 왕이 되는 데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한 세력의 하나인 민중파에 관한 것이다. 1성서의 열왕기에는 히브리어로 암하아레츠(am ha'arez)라고 표기된 사람들이 나타난다.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지방민이라고 번역되어 있고 새번역 성서에서는 땅의 백성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동시대 여러 문헌들을 보면 이들은 농민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다. 이들 중에는 지주도 있고 소농도 있었으며 예속농도 있었겠다.


한데 중요한 것은 제1성서, 특히 열왕기에 등장하는 암하아레츠는, 그냥 농민 일반이 아리라, 정치세력화된 농민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기원전 837년 아달랴(아달리야)를 축출하는 궁중 쿠데타(열왕기하11,14)에서 기원전 609년 여호아하스(여호아하즈) 옹립을 위한 쿠데타(열왕기하23,30)에 이르기까지 거의 15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수차례에 걸쳐 왕권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 과정에서 특정한 입장을 가진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요시아의 등극에 이들이 개입했고, 그런 사실과 요시아의 정치가 농민 친화적이라는 점이 중요한 쌍을 이룬다. 어쩌면 반아달랴 쿠데타 때에 증장했던 암하아레츠가 히스기야의 개혁정치를 거치면서 민중세력으로 특성화되었는지도 모른다. 바로 이런 세력이 요시아를 등극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요시아의 친농민적 개혁을 가능하게 했던 주역이었다.



 요시아 왕의 선무관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율법을 포고하고 다녔다. 이때 엘리트계층에게는 신명기의 형형격 되는 문서였을 것이지만, 대중에게 설포된 율법은 십계명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히스기야 혹은 요시야 왕정의 개혁문서인 신명기에는 농민 친화적인 사회개혁적 요소들이 굉장히 많다. 그런 개혁의 메시지를 전국의 마을 곳곳으로 돌아다니면서 선전하고 다녔던 왕의 선무관들이 백성에게 바로 십계명을 전파해주었고, 이것이 설득력을 얻는 곳에서는 지주와 귀족들을 위해 봉사했던 지역 성전의 제사장들이 농민들에 의해 축출당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런 현상을 성서는 산당 철폐(열왕기하23,8)로 묘사하고 있다. 산당의 철폐는 예루살렘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중앙의 귀족들과 그들의 힘의 근거지인 지방의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농민을 보호하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히스기야-요시아의 개혁은 진보적인 사회적 개혁의 성격을 지녔던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만들어진 문서가 십계명의 원본이었다.


요약하자면 십계명의 계율 하나하나는 히스기야나 요시아 왕 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십계명으로 묶인 것은 앞서 보았듯이 이들 왕의 민중적 개혁정치의 산물이다. 즉 십계명에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권리를 옹호하며, 강자의 권리를 제약하려는 시대정신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십계명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십계명의 구절 하나하나를 곱씹고 그것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옳을까? 아니 가능한가? 단언컨대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아니 적절하지 않다. 왜냐면 그 계명 하나하나는 너무나 단순해서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살인하지 말라는 제5계명을 보면, 이것은 요시아 왕 당대에도 충분하지 않았음을 신명기자체가 증언해주고 있다. 살인은 극형에 처해져 마땅한 죄이고, 심지어는 재판도 없이 피해자 가족에 의한 피의 복수의 대상이 되어도 되는 범죄다. 근데 과실치사같은 의도하지 않은 살해범죄는 어떻게 할 것인가? 또 가해자가 명료하지 않은 경우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이 경우 피의 복수관행은 남용될 소지가 너무나 많았다. 이에 대해 요시아 정부는 의도하지 않은 살인은 피의자가 도피성으로 들어가 평생을 스스로 유폐시킴으로써 죽임은 면하지만 완전한 자유로운 생활에는 제약을 두는 오래된 관행을 수용했다(신명기4,41). 또 의혹만 가지고 가문 간에 벌어질 수 있는 피의 복수를 막기 위해 미해결 사건은 공적으로 그 사건은 누구도 책임이 없음을 공시함으로써 복수의 악순환을 예방하고자 했다(신명기21,1~9).


요컨대 십계명은 법을 극도로 단순화해서 반포함으로써 글을 모르는 백성들도 법의 백성임을 선언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때까지 백성은 법의 주체가 아니었다. 법은 왕이나 귀족들의 영역이었고, 백성은 그 법의 대상이지 주체가 아니었다. 한데 히스기야-요시아 정부는 백성, 곧 암하아레츠를 법의 주체로 인정하고자 법을 그들에게 부여한다. 이제 법의 백성이 된 이들은 국가의 주체가 되었을 뿐 아니라 법을 지켜야 하는 주체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속에는 이 나라의 백성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의미와 그것을 어긴 이들은 법정에서 법률에 따라 극형에 처해지거나 정상참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오늘날에 오면 제5계명은 훨씬 더 복잡해진다. 낙태, 안락사 등의 문제, 심지어는 자살의 문제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그 법의 정신을 참조하며 재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누구나 이 법의 주역이며, 이 법이 지탱하고자 하는 사회의 주역이라는 점, 그리고 이 법이 요구하는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승인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십계명을 우리의 현실을 고려하며 재해석하고, 약자를 보호하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해준다는 그 애초의 의의에 맞게 지키는 태도가 바로 십계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