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에세이

교회의 공공성 회복의 길, 작은교회론

"대형교회는 평교인과의 소통에 매우 소극적이고 보수적인 권력과두체제로 남거나 내분에 휩싸인 채 동력을 상실한 신앙제도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어느 경우든 대형교회는 공공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개혁될 가능성이 별로 없다."(본문 중)


이 글은 회개혁실천연대, 건강한작은교회연합,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교회2.0목회자운동 등이 주최한 <긴급포럼: 악법도 법이다? - 일부 대형교회의 정관 개악을 둘러싼 쟁점과 전망>(2014. 03. 26.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 때 발제 원고로 처음 작성한 것이고, 이를 다듬어서 격월간지 [공동선] 116호(2014. 05+06)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이 포럼 발제자는 아래와 같습니다. 


○ 방인성(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함께여는교회)

○ 김진호(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 강문대(법률사무소 로그 변호사)


-------------------



회의 공공성 회복의 길, 작은교회론

대형교회 정관 개정 논란에 즈음하여

   




엎친 데 덮친 ...

― 대형교회의 정관 개정 꼼수와 공공성 위기

 

최근 일부 대형교회들이 개정하고 있는 정관에 대한 교회 안팎의 논란이 거세다. 크게 보아 이 정관들에 대한 논점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이들 교회들이 개정하고 있거나 개정한 정관이 목사와 당회[각주:1]의 권한을 더 강화하고 교인들의 권리를 더 제약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 재정의 비공개성을 더 높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논점을 한국교회의 공공성 문제와 연관시켜 논의하려는 데 초점이 있다.


이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왜 공공성 문제와 이 논점을 연결시켜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우선 최근 신학계에서 교회의 공공성을 둘러싼 논의가 현저하게 늘고 있다는 점을 주지하자. 그것은 교회와 사회의 관계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그리스도 신학계의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여 공공성의 차원에서 신앙제도를 재점검하고 교회 개혁의 가능성을 모색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세계 속에서 점점 더 불필요한 존재로 각인될 것이라는 점에서 공공성 문제가 오늘날 신학의 주요 아젠다가 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개신교회는 위기에 처해 있는 세계의 여러 교회들과 비교할 때 그 정도가 더 심각하다. 또한 한국의 주요 종교들과 비교할 때도 개신교는 가장 신뢰도가 낮은 위기의 종교다.[각주:2] 무엇보다도 이 위기의 가장 결정적인 형식은 시민사회가 더 이상 교회의 신앙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아니 오히려 혐오적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 수 있다. 개신교 신자가 아닌 이들 가운데 개신교회를 신뢰하는 이는 매우 소수이고, 심지어 개신교 신자조차도 개신교회를 신뢰하는 이가 매우 낮다.[각주:3] 이는 사회적으로도 개신교회가 혐오의 대상일 뿐 아니라, 교회 내적으로도 심각한 충성도 이완 현상을 보인다는 얘기다.


한데 이런 시민사회의 개신교에 대한 혐오의 시선이 겹쳐지는 곳은 대형교회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형교회에 대한 시민사회의 이미지는 교회 전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로 이어지고 있다. 하여 사람들(개신교 신자건 아니건)은 복지에 대해 개신교의 사회적 기여가 다른 종교나 시민사회의 여느 영역에 비해 가장 높다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그것이 교회에 대한 불신의 시선을 교정하지 못하였다.[각주:4] 아무튼 이러한 따가운 사회적 시선은 교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여 많은 교회들에서 교인들의 이탈뿐 아니라 전반적인 충성심 이완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심지어는 교회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노골화되기까지 했다. 물론 많은 대형교회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일부 대형교회의 대응전략이 정관 개정으로 나타났다.


요컨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일부 대형교회들의 정관 개정 시도는 교회의 공공성의 위기와 그로 인한 교회 내부의 개혁 요구와 엇물린 현상이다. 그러므로 교회 정관 논란을 교회의 공공성의 문제와 연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이 문제를 보다 적절하게 해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순치의 역사

― 대성장기 교회와 공공성

 

공공성의 위기를 이야기하자면, 공공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얘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앞서 시사했듯이 교회의 공공성은 기본적으로 교회와 시민사회 간의 소통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이때 소통은 상대를 대화 파트너로 존중해줄 수 있다는 인식이 있을 때 가능하다. 즉 상대가 나/우리에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고 그 얘기에 귀 기울일 자세가 있을 때 소통이 발생한다. 물론 소통은 모든 면에서 대화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서로 생각을 공유할 수 없는 것이 많지만, 그럼에도 상대를 말이 통하는 대상으로 보고, 그 말에 귀 기울이는 것, 그러한 태도와 과정이 바로 소통이다. 하여 소통은 나/우리와 저들이 통한다는 전반적인 인식 위에서 가능하다. 하지만 실제로 소통이 일어나는 지점은 모든 면이 아니라 소통 가능한 특정 영역에 한정된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에서 교회와 사회 간의 소통에 대해 역사적으로 간략히 얘기해보자. 단 여기서는 한국교회의 대성장기인 1960~1990년과 그 이후만을 주목하겠다. 전자는 전대미문의 대성장을 이룩했던 시기이고 후자는 소통의 위기와 교세의 정체 및 쇠퇴의 시기다.


우선 대성장기를 보자. 한국교회의 대성장은 공공성과 관련하여 몇 가지 요소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건강과 부유함에 대한 욕망이라는 점에서 교회와 사회는 서로 소통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특히 도시 이민자들이 겪고 있던 건강의 위기와 빈곤의 상황을 극복하는 데 교회의 신앙이 큰 도움이 된다는 사회적 평판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하여 이러한 소통의 지점은 도시 이민자들의 대대적인 신자화를 중심으로 하는 광범위한 사회계층의 신자화로 이어졌다.


둘째, 미국에 대한 욕망이라는 점에서 교회와 사회는 소통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미국의 이데올로기, 미국의 문명, 미국의 풍요에 대한 선망과 겹친다. 그리고 이런 선망의 주체는 국민이었다. 한데 국민적 시선에서 신자는 한국에서 가장 미국화된 집단범주의 하나였다. 요컨대 그 시기 국민과 신자는 서로 서통 가능한 대상이었다. 이는 대대적인 국민의 신자화’와 맞물린다.


셋째 요소는 청년의 신자화현상이다. 소비사회로 변모하고 있는 미국의 전후 문화를 빠르게 흡수하고 있던 전후 한국의 청년세대는 미국적 문화가 가장 적극적으로 실행되는 장이 교회라고 생각했다. 즉 이 시기 청년과 신자는 서로 소통 가능한 대상이었다.


이러한 소통의 지점들을 둘러싸고 한국교회는 당시 한국사회에 있어 공공성을 지녔다. 물론 그 시기 한국사회가 잘 통합된 사회가 아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적지 않은 이들이 산업사회로 치닫고 있는 한국사회에 대해 저항했고, 그것은 성장주의의 부정적 측면, 특히 반인권적 측면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났다. 이때 사회적 저항의 대열에 참여한 이들은 교회를 한편에서는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교회와 적극적으로 소통했다. 이때 저항의 공공성이 일부 교회들과 일부 저항세력 간에 공유되었다. 이것은 인권연대의 신앙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와의 소통의 지점들을 중심으로 교회는 이 시기에 급성장했다. 한데 이러한 개신교 교세의 성장을 대표한 것은 대형교회다. 주일 대예배에 참여한 성인의 숫자가 2천 명 이상인 교회를 미국에서는 메가처치라고 부르는데, 단일국가로서 메가처치가 가장 많은 나라인 미국에서 현재 메가처치 수는 1,200~1,500개 정도다. 한데 한국에서 메가처치는 900개 정도로 추산된다.[각주:5] 미국 개신교 신자의 수가 15천만 명 이상인데 비해 한국의 개신교 신자는 그 1/20 수준인 8백만 명에 불과하다. 또 교회 숫자 대비 메가처치 비율도 미국은 0.005~0.007%인데 비해 한국은 1.7%나 된다. 요컨대 한국에서 교회 성장은 압도적으로 대형교회가 주도했다는 것을 뜻한다.


더욱이 한국의 거의 모든 교회는 대형교회의 신앙 양식, 신앙 패턴, 비전 등을 모방하고 있다. 하여 거의 모든 중소형 교회도 사이즈만 작을 뿐 그 형식과 제도, 비전은 대형교회적이다. 그런 점에서 대부분의 중소형교회는 일종의 짝퉁 대형교회. 반면 작음 자체를 추구/향유하는 교회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한데 한국에서 대형교회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갖춘 담임목사가 장기간 그러한 리더십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 있다.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갖춘 목사는 교회가 발생시키는 거의 모든 신앙자원을 독점한 자다. 그런 이가 전 교인을, 성장을 위해 총동원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대형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대형교회로 성장하지 못한 대다수 교회는 그러한 리더십에 대한 선망을 갖고 있지만 그 교회의 목회자는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특정 목회자가 장기간 그 교회를 담임하지 못하고 사역지를 옮겨 다니는 순회목회하는 현상을 낳았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두 유형의 교회는 매우 다른 운영방식을 낳았는데, 전자는 담임목사의 권력이 압도적인 반면, 후자는 장로로 표상되는 교회의 특권적 평신도 엘리트들에 의해 권력이 과점되는 현상을 띤다. 두 유형의 교회는 거의 모두 카리스마적 리더십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 작동하는 권력 형식은 이와 같이 양분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양분구조는 점점 더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권위적이고 자폐적인 종교라는 낙인

― 역성장기 교회와 공공성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교회와 시민사회 간의 갈등이 심화된다. 한국사회에서 이 시기를 추동한 사회제도적 요소는 민주화소비사회화. 이 두 요소는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자의식이 강한 개인을 탄생시켰고, 이러한 개인들이 서로 자신의 이익을 강화하기 위해 네트워크화된 집단들을 낳았다. 이렇게 자의식 강한 개인이익을 위한 네트워크로서의 집단이 시민사회를 구성했다. 이때 시민사회가 만들어내는 공공성의 문제는 개인들과 집단들이 기존의 여러 크고 작은 범주적 제도들과 얽히고설키면서, 때로 서로 상보적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서로 갈등적이기도 하면서 형성되었다.


이렇게 새롭게 주체화되고 있는 개인 혹은 집단이 자신들의 주권과 이익을 위해 국가, 기업, 가족 등 크고 작은 제도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데, 반면 이를 방해하는 세력도 있다. 그런 존재를 일반적으로 구기득권세력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기성의 거시적이거나 미시적인 제도들을 과점하는 이들이다. 하여 새로운 시대의 개인들과 집단들은 이들 구기득권세력의 방해를 가로질러서 제도들의 개혁을 도모하면서 사회는 더 변화되거나 덜 변화되는 제도들로 이루어지게 된다.


한데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사회 각 영역 가운데 가장 변화하지 않는, 지체된 공간이 개신교 교회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대표적인 수구적 집단이 교회라고 믿고 있다. 실제야 어찌 됐든 사람들은 개신교회를 가장 대표적인 수구세력이라고 본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대개의 사람들은 교회를 소통의 대상이 아닌 불통의 대상, 심지어 소통을 방해하는 대상으로 규정짓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오늘날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공공성 위기의 주요 양상이다.


교회가 소통의 대상이 못 된다는 포괄적 이해는 적지 않은 교회가 해온 사회적 기여도 폄하하게 하며, 포괄적으로 모든 교회와 교인들에게 낙인을 찍는다. 그 낙인의 내용은 대략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교회는 가장 불평등한 권력 구조를 가진 사회 세력이다. 즉 교회는 권위주의적이다. 둘째로 교회는 자폐적인 신앙 인식을 가진 사회 세력이다. 즉 교회는 배타적이다.


요컨대, ‘권위주의적이고 배타적이라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시민사회는 교회와의 소통을 철회했다. 즉 이 두 요소가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공공성 위기의 요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공공성의 관점에서 개혁이 필요하다고 할 때 개혁 아젠다가 작동해야 할 주요 항목이 바로 이 두 요소와 관련된다.

  


대형교회의 불가능성, 그리고 작은교회의 가능성

 

말했듯이 최근 한국의 일부 대형교회가 정관 개정을 시도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한국에서 대형교회로 성장한 교회의 실제적인 리더십은 카리스마적이었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오래 가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세속화되고 일상화되어 제도적 리더십으로 변모한다고 주장했다. 한데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담임목사의 카리스마적 지도력이 20~40년이나 지속되었다. 하여 이들 대형교회들은 특이하게도 간명한 의사결정의 관행과 제도를 낳았다. 주일 출석교인 2천 명 이상이나 되는 조직의 의사결정 과정이 담임목사(와 당회)의 포고에 직결되어 있다는 점이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한데 그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행사하며 대형교회를 일구어 놓은 이들은 이제 은퇴하거나 사망하고 있다. 요컨대 많은 카리스마적 지도력이 작동했던 대부분의 대형교회와 일부 중형교회들은 오늘날 세대교체 국면을 겪고 있거나 진행 중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세대교체는 그다지 안정되게 작동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민주화와 소비사회화를 거치면서 시민사회의 교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많은 교인들에게 크든 작든 영향을 미쳤고, 이는 권위주의적인 독재를 지속시키려는 안정된권력 교체를 더욱 방해했다. 무엇보다도 평교인들의 도전이 돋보였다.


이것은 때로 법정 투쟁으로 이어졌고, 이때 법원의 판결은 교회의 정관에 준하여 이루어졌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특권적 엘리트 세력에 의한 정관 개정 시도를 낳은 직접적 이유다. 한데 이러한 정관 개정 국면은 카리스마적 지도력의 와해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고, 베버가 말한 제도적 리더십으로의 전환을 강화시킬 것이 예상된다. 왜냐면 정관을 통한 통치, 즉 법에 의한 통치는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어울리지 않으며, 오히려 제도적 리더십의 전형적인 양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제도적 성찰(institutional reflexibility)이라고 부른다. 즉 제도의 이행기에 갈등 당사자들의 전략적 행동들이 뜻하지 않게 점차로 덜 권위적이고 더 민주적으로 전환시키는 방향으로 제도화가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여, 만약 한국의 대형교회가 이러한 갈등 과정에서 교회 민주화가 더 진척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면 제도적 성찰이 가능할 것이다.


한데 실은 그럴 가능성이 매우 낮다. 왜냐면 제도적 권력은, 최근 정관을 둘러싼 논쟁 국면이 보여주듯, 목회자 대 교인, 그리고 교인 간의 갈등을 더 심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목사와 일부 특권적 장로로 구성되는 독과점적 권력을 추구하는 경향과 평교인의 시민적 권력을 추구하는 경향이 신앙제도적으로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민주주의 문제를 신앙과는 별개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신앙 내적 요소로 이해하는 교인층이 크게 확대될 수 있다.


문제는 대형교회의 간명한 의사결정구조가 과연 이러한 갈등을 잘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제도는 규모가 커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복잡해지는 경향이 있다. 한데 한국교회는 정반대로 작은교회에 비해 대형교회는 신앙 관행이나 제도에 있어 의사결정과정이 훨씬 간단명료하다. 바로 모든 주장과 욕망을 흡수해버리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교회가 스스로 리더십을 합리화하려 한다면 그에 합당한 의사결정구조를 제도화해야 하는데, 그러한 제도 이행의 비용을 감당할 대형교회가 있을지 의문이다. 국가가 민주주의를 위해 지불했던 막대한 비용을 교회가 감당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 기간도 매우 길어야 할 것이다.


일부 대형교회가 성공적인 민주적 운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다양한 의견이 논쟁, 소통되는 갈등의 제도화가 가능해서가 아니라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계몽군주가 되어 민주적인 형식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런 양식은 교회가 그 지도자를 중심으로 잘 통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서만 가능하다. 한데 리더십의 교체는 언제나 통합의 위기를 동반하며, 갈등을 제도화하지 않는 한, 그런 교회도 심각한 위기를 겪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대형교회는 평교인과의 소통에 매우 소극적이고 보수적인 권력과두체제로 남거나 내분에 휩싸인 채 동력을 상실한 신앙제도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각주:6] 어느 경우든 대형교회는 공공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개혁될 가능성이 별로 없다.


그렇다면 중소형교회는 이제 대형교회화, 짝퉁 대형교회로 사는 방식을 청산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신앙제도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대형교회적 요소를 청산하는 것이다. 앞에서 공공성의 의제로 언급한 것처럼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성직자 대 교인, (특권적 엘리트) 교인 대 ()교인, 교인 대 비교인 혹은 타교인 간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의 개혁이다. 둘째로, 투명성과 도덕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의 개혁이다. 여기서 재정 공개의 문제가 투명성과 도덕성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두 가지 개혁 요소는 대형교회에게는 거의 불가능한데 중소형 교회에게는 훨씬 더 가능하다. 문제는 중소형교회들이 작음자체를 향유하고, 작음을 신앙적이고 신학적으로 전유하는 것, 그러한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자존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있다. (끝)

  1. 담임목사와 시무장로 2인 이상으로 구성되는 장로교회 정치의 대표적 치리기관인데, 한국 개신교의 경우 거의 모든 교단에서 채택하고 있는 사실상의 최고의결기관이다. [본문으로]
  2.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지난 2014년 2월 5일에 발표한 <2013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에 따르면, 3대 종단의 사회적 신뢰도는 가톨릭이 29%, 불교가 28%, 개신교가 21%다. 이러한 결과는 최근 시도된 여러 조사에서도 대동소이하다. [본문으로]
  3. 위의 조사에서 개신교의 사회적 신뢰도는 비신자의 경우 11.3%(‘약간 신뢰’ 11.0%, ‘매우 신뢰’ 0.3%)에 불과했고, 개신교 신자의 경우에도 47.5%(‘매우 신뢰’가 10.6%, ‘약간 신뢰’가 36.9%)다. [본문으로]
  4. 위의 조사에서 개신교 신자와 비신자 모두 사회봉사를 가장 많이 하는 종교로 한국 개신교회를 꼽았다(각각 50.4%, 44.1%) [본문으로]
  5. 2004~2005년도 교회성장연구소가 전국 864개 교회를 유효표본 삼아 조사한 바에 따르면(표본오차 ±3.1%, 신뢰구간 95%) 1.7%의 교회가 출석교인 2천 명 이상의 교회였다. 한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발표한 2004년도 한국 개신교회 수는 51,775개다. 한기총 조사에서 교인수 통계는 중복교인 등이 포함된 통계이므로 실제보다 훨씬 많게 나오지만, 교회당 수는 다른 조사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신뢰할만하다. 그렇게 보면 한국의 메가처치의 수는 약 880개라는 추산이 나온다. [본문으로]
  6. 물론 대형교회는 쉽사리 몰락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대형교회 교인이 된다는 것은 다양한 사회적 이해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질병, 법적 문제, 결혼, 사업, 취업 등에서 사적 인간관계가 유용한 상황에서 다양한 인적 자원이 넘치는 대형교회는 훌륭한 사적 네트워크의 풀이 된다. 또 노후의 외로움을 견뎌내는 데 교회만큼 유용한 공간이 없으며, 그것은 그 노인들의 가족에게도 큰 혜택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례를 둘러싼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최적의 장이 교회다. 또한 이러한 사회적 필요와 종교적 신념(신앙)은 긴밀히 얽혀 있다. 어떤 필요가 신념과 결합하면 내구성이 훨씬 강력해 진다. 하여 오랜 동안 형성된 사회적 자산이기도 한 대형교회의 신자라는 기회를 포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혹여 다른 교회로 이동하려고 마음먹는다고 해도, 자신이 속했던 교회에서 수년 혹은 수십 년, 나아가 대를 이어가면서까지 주 1회 이상 집회에 참석하고 소득의 상당부분의 기부금을 내왔던 것만큼의 헌신을 대체하는 행동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대형교회의 몰락은 중소형 교회의 몰락과는 다른 문제다. 요컨대 교회가 도덕적이거나 기타 여러 문제가 발생해도 대다수의 교인들은 그 교회를 떠나는 선택을 하기가 여간해서 쉽지 않다는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