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게재한 설교 원고인 <축복과 망각>(2014. 5.18)을 수정 보완하여 [공동선] 117(07+08)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빠른 축복은 망각을 낳는다
세월호 사건, 그 참혹함의 기억을 방해하는 한 가지
네가 나에게 복종하였으니,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자손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창세기」 22,18
하느님이 명을 내렸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 번제물로 바쳐라.”(「창세기」 22,2) 뒤늦게 낳은 귀한 외동아들이다. 이 아이를 통해 후손이 크게 번성하여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해주겠다는 하느님의 축복, 그 장본인이다.(「창세기」 17,16) 한데 하느님이 그 아들을 바치라고 한다.
왜 하느님은 마음을 바꾸었을까? 아브라함이 뭔가를 잘못했기 때문일까? 욥의 친구들은 재앙을 당한 욥에게 그런 식으로 추궁했다.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에 대해서 예수의 제자들도 그 자신이나 부모 혹은 조상의 죄가 있었던 탓이 아닌지를 예수에게 물었다(「요한복음」 9,2). 하지만 이런 식의 생각이 얼마나 부적절한지는 세월호 사고로 자녀와 형제, 부모 등을 잃은 가족들을 떠올리면 더 분명해진다.
다행히 「창세기」에선 아브라함의 잘못이 추궁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문서의 설명은 ‘더 문제적’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시험’이었다는 것이다.(「창세기」 22,1) 그렇다면 이 시험의 정답은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하느님에게 순종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여 하느님이 약속한 더 큰 축복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22,17) 하여 훗날 이 믿음은 세세손손까지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바쳤습니다. 더구나 약속을 받은 그가 그의 외아들을 기꺼이 바치려 했던 것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삭에게서 네 자손이라 불릴 자손들이 태어날 것이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되살리실 수 있다고 아브라함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유하자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되받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7~19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고서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야고보서」 2,21
하지만 그것을 축복으로 여기고 행복해한다면, 아브라함은 참으로 비정한 아비다. 또 그런 명을 내린 신도 비정하다. 요즘이라면 신들의 의회에서 청문회를 열어 그 신과 비정한 아비를 소환, 조사해야 한다는 여론이 빗발쳤을 것이다. 하여 위대한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아브라함은 신의 소리가 아니라 ‘악마의 소리를 들은 광신도’였다고 비난해마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이튿날 아침 짐을 챙겨 나귀에 싣고, 아들 이삭과 종 둘을 데리고 떠났다. 사흘을 걸어 신이 명한 모리아 산이 멀찍이 보이는 곳에 도달했다. 이 산은 훗날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은 바로 그곳이라고 알려진, 곧 훗날 축복의 장소로 상징화된 곳이다.(「역대기하」 3,1) 그 산 아래에 종들과 나귀를 두고, 그는 아들과 둘이서 산에 오른다.
한참을 가다 아들이 물었다. “아버지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제물은 어디에 있나요?” 어쩌면 사흘 전 길을 떠날 때부터 내내 궁금했을 테지만 아비의 비장한 모습 때문에 감히 묻지 못한 것일지 모르겠다. 아비는 대답한다. “신이 준비해 놓으셨다.”(「창세기」 22,7~8) 물론 이 무뚝뚝한 대답이 그대로 그의 마음은 아니었겠다. 필경 속마음은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었을 것이겠다. 아들을 바쳐야 했던 아비이니 말이다.
아무튼 아비는 아직도 그 말을 아들에게 하지 않았다. 자기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갔지만, 아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을 준비할 틈을 부여받지 못했다. 아비는 그 사흘간 처절한 고뇌의 행보를 하면서도 아들 목숨의 존엄함을 위해서는 끝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신이 말씀한 그곳에 도착해서 돌로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준비해온 장작을 거기에 펼쳐놓았다. 「창세기」는 그런 다음 이삭을 묶어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고 담담하게 묘사한다.(「창세기」 22,9)
이삭은 아비의 이 갑작스런 행동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을까? 죽음의 준비를 전혀 할 기회가 없었던 그가 말이다. 산을 오를 때 장작을 매고 갔다고 하니 아주 어린 아이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도망칠 수도 있었겠다. 서기 1세기의 이스라엘계 역사학자인 요세푸스는 그때 이삭의 나이가 25세였다고 추정한다.(올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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