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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유민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오늘 우리는 지구화 시대를 맞아 제국의 초대형 쓰나미가 쉼 없이 휘몰아치는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살아남고자 하는 도시들은 앞 다투어 제국의 질서를 수용하기 시작한다. 그 질서란 자본, 특히 악성금융이 활개 치는 놀이터를 보장해주는 질서다. (...) 한국은 그런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악화되는 사회의 하나다. 많은 사람들이 자산을 털려버려 유민이 되고 난민이 되고 있는, 그런 현상이 가장 심각한 사회가 바로 우리사회인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민과 난민의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본문 중)


[몸울림] 36호(2014. 06)에 실린 글입니다. 지난 4월 13일 한백교회 하늘뜻나누기 원고에 내용을 보탰습니다.





유민을 위한 나라는 없다!





유다국은 심각한 국론분열 상황에 있었다. 왕성한 국가 발전의 주역이 되었던 아하스 왕과 므낫세 왕, 그리고 복지를 확대하여 평등한 국가를 이룩하려 했던 개혁군주들인 히스기야 왕과 요시야 왕을 빼고는 그 전후의 유다국 왕실은 예외 없이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지 못했다.

 

조정(朝廷)이 발전주의자들과 평등주의자들로 나뉘어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사이, 농촌은 빠른 속도로 대지주들에게 장악되어 가고 있었다. 소농은 몰락하였고, 적지 않은 이들이 경작지를 상실한 예속농이 되거나 노예가 되었으며, 그런 악화된 사정을 견디지 못한 이들이 유랑민이 되어 도적패가 되거나 거렁뱅이가 되었고 또 적지 않은 이들은 인근 국가로 이주하는 떠돌이들이 되었다. 



고대사회에서 통상 국가가 발전하게 된다는 것은 왕실과 귀족으로 이루어진 기득권 집단이 견고하게 성장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농촌의 소자작농의 몰락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들 몰락 농민 중 상당수는 떠돌이가 되고 그들은 농촌 사회 안팎을 오가면서 생계를 연명하기 위해 뭐든 하며 살아야 한다. 대농장의 일용노동자가 되었다가 일자리를 못 구하면 거렁뱅이짓을 하며 살기도 했다가 도적이 되어 마을을 떠돌며 약탈자가 되곤 한다. 또 때로는 대지주나 지방성소에 고용된 사병이 되어 소자작농과 소작농에게 횡포를 부리는 군사집단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한 이들은 다른 곳, 심지어는 국경 너머 다른 나라로 떠나는 유민이 되어야 했다.


이런 사정은 개혁정치에 대한 요구가 되어 중앙정치로 되돌아온다. 하여 왕실과 귀족 가운데 일단의 세력이 개혁당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개혁군주인 히스기야 왕과 요시야 왕이 등장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사회적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한데 유다국이 직면한 현실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실은 그것은 비단 유다국 만이 겪었던 문제가 아니다. 바로 제국들의 팽창주의는 이 지역의 어느 소국들도 피할 수 없었던 가장 심각한 재앙이었다. 이집트와 이란-이라크 지역을 잇는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Fertile Crescent)에는 유난히 강력한 철기시대 제국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이집트의 제국들은 늘 팔레스티나 지역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해 왔고, 메소포타미아 중원의 이라크 지역에서 등장한 아시리아 제국과 바벨로니아 제국, 그리고 그 옆의 이란 지역의 부족들에서 유래한 페르시아 제국 등이 차례로 시리아-팔레스티나를 유린했다.


제국 군대들이 휩쓸고 지나간 곳은 마치 초대형 쓰나미가 휘몰아친 해안처럼 초토화되어 버렸다. 하여 강력했던 국가인 아람-다마스쿠스국과 이스라엘국, 페니키아 국가들도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무너져버렸다. 그리고 유다국도 바벨로니아 제국에 의해 지도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이런 설명으로 간단히 제국들의 시대를 이야기하는 것은 턱없이 부족하다. 어느 제국도 안정된 체제를 장기간 이끌고 가지 못했기에, 제국들이 부침을 겪을 때마다 다른 제국이 팽창하고 그때마다 소국들은 요동을 쳤다. 대외적으로는 어느 제국과 한편이 되어 국제전에 참전할지를 결정해야 했고, 대내적으로는 친 이집트 세력, 친 아시리아 세력, 친 바벨로니아 세력 등으로 나뉘어 서로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유다국의 개혁군주들인 히스기야와 요시야는 각기 아시리아와 이집트 군대에 의해 권력 기반이 유린되어 개혁의 깃발이 꺾여버렸고, 므낫세는 시종 아시리아 제국의 봉신국으로 숨통조이며 지내야 했으며, 아몬은 그러한 정세 속에서 궁중쿠데타로 살해되었고, 여호아하스는 이집트 파라오에 의해 폐위되어 압송되었으며, 여호야김은 아마도 바벨로니아 황제에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호야긴과 시드기야는 바벨로니아 군에 의해 폐위되어 압송되었다. 이렇게 히스기야 이후 유다국 통치자들은 예외 없이 국제정치의 희생물이 되었고, 그 이면에는 조정내 각 정파들의 복잡한 권력투쟁이 있었다. 조석으로 변하는 국제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만큼 어려운데 그런 판단을 내릴 일사분란한 주체가 유다국 조정엔 거의 자리잡지 못했던 것이다. 


두 세기에 걸쳐 진행된 국제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던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소국들, 그 나라의 백성들은 어떠했을까? 이 제국과 동맹을 맺으면 저 제국이 동맹국들과 함께 쳐들어왔고 또 저 제국의 편을 들면 이 제국의 군대가 밀어닥치는 상황에서 통치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농민을 병사로 차출했고, 생산물을 군비로 차압해버렸다. 게다가 귀족들의 부당한 착취로 삶의 기반이 바닥까지 털려버릴 상황이었다. 한데 그렇게 겨우겨우 지내다보면 제국의 군대가 쳐들어와 사람과 짐승과 땅을 온통 초토화해버렸다. 


하여 시리아-팔레스티나에는 유민과 난민들이 들끓었다. 유다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이 나라로 유입해 들어왔고 또 많은 이들이 이 나라에서 유출되었다. 히스기야-요시야 왕의 개혁은 유출되는 노동력을 어떻게든 막아보고자 했던 측면이 많았다. 또 유입되는 이들을 받아들여 폐허가 된 땅을 경작하게 하려 했던 측면도 있었다. 아무튼 개혁은 이런 유민과 난민을 정착하게 하려는 정책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다 유다국이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 바벨로니아에 저항하다 마침내 유다의 왕조가 끝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바벨로니아는 패망한 나라 유다국을 위임통치할 대리인을 임명했다. 그가 바로 그달리야다. 과거 요시야 개혁당파의 핵심세력의 후손이었다. 그리고 그달리야의 측근에는 급진개혁파 명망가인 예레미야 예언자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달리야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개혁정치를 드라이브한다. 사정이 나쁘지 않은 것은, 많은 토지를 장악하고 있던 구왕족과 귀족들이 바벨로니아로 압송된 탓에 주인 없는 땅이 널려 있었다. 그달리야는 바로 이 땅에 예속되어 있었던 빈농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고, 유민과 난민들에게도 땅을 나누어 준다. 유민과 난민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흩어져 있는 유다 사람들도, 모두 자기들이 살던 곳에서 돌아와서, 유다 땅 미스바의 그달리야에게로 갔다. 그리고 그들은 포도주와 여름 과일을 아주 많이 모았다.

―「예레미야서」 40,12 


그러나 전국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구귀족 인사들과 바벨로니아에 의해 압송된 구왕족과 귀족들이 이에 반발한다. 그리고 그들이 결국 그달리야를 암살하고 만다. 이렇게 해서 다시 유민과 난민의 꿈은 다시 수포가 되어 버렸다. 


그달리야는 히스기야나 요시야와 같은 전략을 추구했다. 그들이 만들고자 했던 것은 유민과 난민을 위한 나라였다. 왕실이나 귀족이 든든히 선 나라가 아니라 소농이, 심지어 외국에서 이주해온 이들이 든든히 선 나라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달리야는 실패했다. 히스기야와 요시야, 두 왕보다 더 철저한 유민과 난민을 위한 개혁을 시도하고자 했던 그의 시도는, 기득권 세력들이 그를 암살해 버림으로써 얼마 안 되어 중지되어 버렸다. 그런 시도 자체를 불온하게 여겼던 이들의 조바심 탓에 미완의 실험으로 그치고 말은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유럽에서 그런 시도는 비로소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른바 복지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노동자의 몰락을 억제하고 몰락한 이들의 회생을 추구하는 제도가 사회발전을 이룩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제국의 횡포가 잠잠하던 지역에서 가능했다. 


오늘 우리는 지구화 시대를 맞아 제국의 초대형 쓰나미가 쉼 없이 휘몰아치는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살아남고자 하는 도시들은 앞 다투어 제국의 질서를 수용하기 시작한다. 그 질서란 자본, 특히 악성금융이 활개 치는 놀이터를 보장해주는 질서다. 그 질서 속에서 빈부격차가 급격하게 심화되고 있고, 자본의 전쟁에서 몰락한 유민과 난민들이 발생하며, 그런 이들이 무수히 유출되고 무수히 유입되는 세계다. 


한국은 그런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악화되는 사회의 하나다. 많은 사람들이 자산을 털려버려 유민이 되고 난민이 되고 있는, 그런 현상이 가장 심각한 사회가 바로 우리사회인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민과 난민의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1인 가족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만큼 가족은 뿔뿔이 해체되었고, 친구도 동료도 어떤 연고도 무의미해진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많은 이들은 이미 그렇게 되었고 또 많은 이들은 그런 위기감 속에 살고 있다. 해서 누구는 국경 밖으로 떠밀려 나가야 했고, 누구는 국경의 주변부 지역으로 내몰리거나 그럴 위기감 속에 살고 있다. 또 누구는 자신의 내면의 국경에서 내쫓겨 정신적 파산 증상을 앓고 있다. 그리고 다른 누구는 그런 우리 사회 속으로 유입되어 들어온다. 그러나 그들에게 나눠줄 시민권은, 그럴 자산 분배의 여유는 이미 거의 없다. 


오늘 한백은 고난 주간을 맞아 유민과 난민의 고통을 주제로 삼았다.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그달리야를 다시 주목해 본다. 유민과 난민을 위한 나라는 진정 없을까요? 그달리야의 미완의 실험은 여전히 불가능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