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권이 집권하고 1년 반이 지나기까지 가장 놀라운 일은 대통령의 지지율이 장기간 대단히 높게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 기간 동안 정부와 관련된 비리, 추문, 거짓말, 무능, 실패 등이 끊임없이 이어졌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렇다 할 정책적, 정치적 성과도 전무했다. (...) 그렇다면 합리적 이유가 없음에도 높게 유지되는 지지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다양한 해석이 있겠지만, 나는 대통령이 메시아정치의 주인공이라는 점을 그 주된 이유라고 이해한다.(본문 중)
[오늘의 문예비평(2014 여름호)] 특집 기사 '메시아를 기다리지 마라!' 안에 실린 글입니다.
증오의 메시아정치, 그 불온함
2012년 이후 한국사회의 종교성 비판
오늘 한국의 종교성
이 글은 한국사회가 최근 점점 더 ‘종교성이 강화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한다. ‘종교성’이란 논자마다 포착하고자 하는 현상에 따라 각기 다르게 해석되고 있어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불가능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종교성의 요체를 ‘구원/해방에 대한 갈망’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감내하고 살아야 하는 현실이 버거운데 거기에서 벗어날 수단이 거의 없다고 생각할 때 나타난다. 특히 ‘이성의 기획’이 고통과 결핍을 해석하는 데 실패하고 그것에서 벗어날 확신을 주지 못한다고 여겨질 때 사람들은 ‘구원/해방에 대한 감성의 기획’인 종교성에 좀 더 몰두하게 된다. 물론 종교성과 비종교성이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는다. 거의 모든 경우 양자는 공존한다. 하여 사람들은 불가능해보일 때조차 고통으로부터의 출구를 찾으려는 이성의 기획에 치열하게 몰두한다. 하지만 동시에 절망이 깊을수록 종교적 열망이 점점 깊어진다.
이러한 구원/해방에 대한 강한 종교적 열망은 대개 ‘메시아적 존재’에 대한 기대와 결합되어 있다. 메시아는 기본적으로 ‘낯섦’을 특징으로 한다. 이 낯섦은 사람들의 기대를 초월하는 낯섦이다. 그것은 사람들 각자가 체감하고 있는 현실의 체제, 그 체제의 본질적 비루함에 구속되지 않는 존재임을 뜻한다. 그래야만 그이가 사람들의 구원자/해방자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
한데 이런 이해는 종교제도와 종교성을 직결시키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요컨대 종교제도는 고통 혹은 결핍을 전제로 하는 제도이기는 하지만, 그 제도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고통이나 결핍을 실존적으로 체감하지 않고도 종교인(宗敎人)일 수 있다. 가령 최근 한국의 많은 개신교 신자들은, 구원을 갈망하기 때문에 교회에 속해 있기보다는, 부모가 그 교회의 교인이기에 혹은 어린 시절부터 형성되어 온 친근성의 공간이기에 그 교회의 교인으로 남아 있다. 심지어는 꽤 괜찮은 결혼시장이기 때문에 혹은 풍부한 사적 인맥 풀(pool)이기 때문에 그 교회에 속해 있다. 2 물론 교회의 담론 속에는 구원에 대한 갈망의 언표들이 무수히 담겨 있지만 적지 않은 신자들은 그것들을 단지 기계적으로 되뇔 뿐이다. 이처럼 많은 경우 기성의 종교제도들은 사람들의 종교성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하여 우리사회에서 종교적 구원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는 많은 이들은 특정 종교제도에 속하기를 망설이고 있거나 적극적으로 거절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특정 종교제도의 외부에서 종교적으로 행동하곤 한다. 내가 이야기하는 종교성에 관한 것은 바로 이런 현상을 포함한다.
한데 나는 이 종교성이 한국사회에 속한 다수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집단적 체험’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즉 오늘 우리사회에서 고통 혹은 결핍의 느낌은 개별화된 절망감을 넘어 집단적으로 체감되는 현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집단적 절망감을 해소시켜줄 미래의 기획들은 더 이상 희망을 이끌어내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날 한국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종교적 구원에 대한 갈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통과 결핍의 상황에서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데 실패한 것은 이성의 기획만이 아니다. 기성의 종교들도 사람들의 종교적 갈망에 답을 주지 못했다. 하여 사람들의 종교성은 귀의할 곳을 찾지 못한 채 사회를 배회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많은 사람들이 ‘이성의 기획’ 외부에서 그리고 ‘종교제도 밖에서’ 구원의 계기를 발견하고자 열렬한 종교적 행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메시아적 존재도 기성의 종교 제도 밖에서 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바로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출발한다. 즉 최근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더 강한 종교성’을 나타내고 있고, 이 종교성은 종교제도 밖에서 ‘더 사회적인’ 양상으로 표출되고 있다. 이것은 흥미로운 현상인데, 한국사회에서 ‘시민종교’(civil religion)의 등장이 기성의 종교제도 밖에서 탄생하고 있는 징후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기성의 종교제도들은 정교분리라는 형식적 틀 속에서 정치권력과 밀월관계를 형성한다거나, 혹은 정치를 신성화하여 반시민적 폭력성에 몰입된 정치종교(political religion)적 성격을 지녔을 뿐이었다. 3
한데 시민사회에서 이러한 종교성의 강화 현상은 종종 ‘메시아의 사회화’(messianic socialization)를 가능하게 하는 토양이 되었는데, 이는 메시아가 사회를 형성하는 하나의 ‘광폭한 정치적 변수’로 대두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졌다는 것을 뜻한다. 요컨대 파시즘적인 정치종교가 대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종교는 늘 메시아정치(messianic politics) 4를 동반한다. 현대의 일부 철학자들이 은유적으로 이야기하는 메시아정치의 아름다운 그림과는 달리, 역사 속에 현현한 메시아정치는 이렇게 매우 불온하고 위험한 현상의 배후이다. 5 이 글은 최근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의 종교화 현상을, 메시아정치의 대두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살피려는 데 목적이 있다.
메시아의 탄생, 1997년
1987년 민주화에 대한 거센 사회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지속된 극우주의적 권위주의 정치는 6공 정권과 문민정부로 이어졌다. 권위주의 체제는 통치자를 중심으로 하는 권력 응집력이 대단히 높은 정치 형태를 취한다. 하지만 6공과 문민정부, 이 두 정권은 권위주의 체제를 계승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 응집력이 크게 이완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것은, 한편에서 보면,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중간 단계일 수 있었지만, 전통적 권위주의 세력에게는 ‘유약한 정권’이라는 문제의식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바로 이 시기에 한국정치에 대한 두 가지 기획이 활발히 모색되었다. 권위주의 체제를 종식시키고 시민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추구하는 민주주의화(democratization) 기획이 그 하나였고, 반대로 다시 강력한 카리스마적 리더십에 의해 단일대오로 결속된 재권위주의화(re-authoritarianization) 기획이 다른 하나였다. 여기서 전자를 향한 기획은 다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서유럽과 북미의 민주주의 모델을 이상으로 하는 이념적 기획이고, 다른 하나는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모델을 이상으로 하는 이념적 기획이다. 요컨대 이 두 유형을 모범으로 하여 추구되었던 민주주의화 기획은 일종의 ‘이성의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재권위주의화 기획은 한국에서 급속한 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신권위주의 체제를 재구축하려는 것이다. 즉 카리스마적 1인 독재자와 그이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다하는 테크노크라트,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국민으로 형성된 신권위주의 체제를 리바이벌하려는 것인데, 여기서 핵심은 이러한 권력연합을 추동하는 강력한 지도자의 문제였다. 그래야만 6공과 문민정부의 ‘유약한 정권’의 한계가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재권위주의화 기획의 일환으로 일단의 극우주의자들에 의해 박정희 메시아주의가 거세게 호출되었다. 외환 차입금을 무분별하게 허용함으로써 버블경제로 무능한 권력을 힘겹게 유지하고 있던 문민정부의 레임덕 현상이 극단에 달하고 있었고, 그 결말로서 ‘IMF 관료들’이 마치 피정복지의 주둔군처럼 진주하던 1997년, 바로 그해 그 재앙적 사건 직전, 그 징후들이 도처에서 불쑥불쑥 출몰하던 시기였다. 그해 4월에 김정렴의 『아, 박정희. 김정렴 정치회고록』과 이인화의 『인간의 길』 3권 중 2권이 발간되었고, 6 10월에는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연재가 시작된 것이다.
이 세 극우 논객의 텍스트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박정희 집권 18년 중 절반을 비서실장으로 지냈던 김정렴의 회고록은 발간된 지 두 주 만에 무려 5만 부가 판매되었다. 당대 최고의 극우파 논객이던 조갑제의 연재는 『조선일보』 지면에서 3년간 564회라는, 한국 언론사에서 전무후무한 경이적인 연속물이 되었을 뿐 아니라 숱한 논쟁의 진원지가 되었다. 그리고 젊은 논객 이인화의 소설 또한 발간되자마자 널리 알려졌고, 젊은 세대에게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하여 1997년의 정국으로 박정희는 귀환했다.
이 놀라운 대중적 반향은 어찌 보면 이례적 현상이다. 왜냐면 문민정부 시절은 권위주의 정부들이 그토록 부르짖었던 선진국 진입의 꿈이 실현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 되었고,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에 돌입했다는 정부의 자화자찬과 함께 엄청난 소비시장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또, 비록 국가복지는 빈약했지만 ‘평생직장’이라는 이상과 함께 기업복지의 가능성이 장밋빛 꿈을 잔뜩 부풀리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시기에 대형 사고들이 연이어 터졌다. 서해 페리호 침몰,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아현동 가스폭발, 대구 지하철 가스폭발, 대한항공 801편 추락 등. 여기에 ‘세계화 시대’의 장밋빛 이데올로기에 한껏 부풀려진 대중의 탐욕이 소비시장을 새빨갛게 달구어놓자, 권위주의 시대의 극단적 엄숙주의에 단련됐던 대중은 일종의 ‘소돔 증후군’(Sodom's Syndrome) 증상을 드러냈다.
소돔 증후군은 종말론적 유대 랍비 전통에서 유래한 용어로, 특히 오늘날 미국의 극우파적 복음주의자들이 소비사회화되고 다원주의화되는 비가역적 문화현상에 대해 종말론적으로 비판하면서 리바이벌한 개념인데, 이와 비슷한 현상이 바로 1990년대 한국에서도 일어났다. 가령, 소비사회적 대중문화에 대해 배타적인 성향이 강한 극우주의적 기독교 대중 사이에서 이른바 ‘뉴에이지 문화’에 대한 혐오와 공포심이 분출했다. 하여 당시 대중문화의 상징이었던 서태지를 사탄숭배자로 규정짓는 등, 트랜디한 대중문화 현상을 악마화하고, 이런 현상을 적대하는 행동의 주체로 스스로를 해석하는 경향이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서 분출했다. 또 ‘가계저주론’이라는 담론이 기독교 출판 시장을 강타했고, 특히 치유집회에서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씻는 의례와 주문 등이 대대적으로 활용되곤 했다. 그리고 일부 극단적 종말론자들은 시한부 종말을 외치며 일상에서 이탈하는 현상도 1990년대 내내 끊이질 않았다.
한데 이러한 세대주의적 종말론은 비단 기독교만의 현상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세기말적 현상으로 전 세계에 종말론이 크게 활성화되었고, 한국도 종말론 담론이 크게 유행하였으며, 공포영화 등 공포산업이 번창하였다. 앞서 열거한 1990년대의 대형 사고들은 이런 종말담론의 상투적인 위기론적 소재꺼리였다. 그런데 이 위기를 대처하기에는 문민정부는 너무나 무능했고 부패했으며, 특히 ‘소통령’이라 불리며 사실상의 정부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던 김현철이 한보사건으로 구속되자 급격하게 구심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와 같은 상황은 예언자들이 등장하기에 안성맞춤의 환경이 된다. 1997년 한국에서 박정희 부활설화를 창안해 내고 유포시킨 주역들은 바로 그런 이들이었다. 하여 김정렴, 조갑제, 이인화 등이 합류하는 지점은 동시대 위기의 요체가 바로 ‘유약한 리더십’에 있었다는 인식이었다. 하여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강한 통치차 박정희’를 소환한다.
물론 서술 방식에서 셋은 다소 다르다. 회고록의 저자 김정렴은 ‘그때 그 시절의 모습’으로 재현한다. 즉 그의 박정희론은 ‘과거 회귀적’이다. 칼럼을 연재한 조갑제는 끊임없이 1990년대, 특히 1997년의 옷을 입은 박정희를 그려내고자 한다. 즉 그의 박정희론은 ‘현재적’이다. 심지어는 그 이후의 한국을 묘사할 때도 1997년의 시간성이 덧입혀진 ‘현재’를 묘사한다. 요컨대 그에게서 현재는 늘 ‘1997년적 현재’다, 하여 ‘1997년 현재의 메시아’의 얼굴을 한 박정희가 구원자로 소환된다. 한편 이인화의 소설적 재현은 ‘신화적’이다. 즉 그에게서 박정희는, 서양 사상이 일방적으로 강요한 근대가 아닌, ‘한국적 근대’라는 ‘새로운 시간을 발명’한 장본인이다. 바로 이 새로운 발명이 전무후무한 한국의 성공 비결인 셈이다. 요컨대 이인화의 박정희가 선사한 구원은 그가 새로운 시간을 선사한 ‘초시간적 메시아’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7
하지만 이러한 서술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필경 이들 셋은 그해(1997년) 말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염두에 둔 박정희 부활설화를 만들어낸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들 극우 보수주의적 예언자들의 박정희 메시아론은 당시 많은 대중에게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구원에 대한 갈망에 목말라 하는 대중에게 구원을 선사할 메시아로서 박정희를 성공적으로 소환해낸 것이다. 하여 그해 대선 정국에서 박정희와 그의 정치는 더 이상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지향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당시 대선후보들이, 심지어는 김대중 후보까지도 박정희를 선거 마케팅에 활용하고자 했던 데서 드러난다.
이로써 1997년 박정희는 메시아로 탄생했다. 그 해에도 그랬지만 이 박정희 메시아주의는 이후 대선 때마다 등장한다. 즉 박정희는 ‘정치적 메시아’로서 탄생한 것이다. 한데 앞에서 당시 한국 정치의 두 가지 기획에 대해 언급했을 때, 그 하나인 권위주의 체제를 넘어서고자 하는 기획으로서의 민주주의화 기획이 이성의 프로젝트라고 말했다면, 박정희 메시아주의는 종교적인 ‘감성의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후자는 박정희를 덧입은 ‘강한 지도자’, 즉 카리스마적 리더를 소환하고 있다는 점에서 탈권위주의적 기획이 아니라 ‘재권위주의적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메시아정치, 2012년
1997년과 2002년 신한국당의 대선 후보인 이회창은 박정희 생가 방문을 대선후보들의 필수 코스가 되는 관행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최대 약점은 박정희와 닮은 점이 너무 적었다는 사실이었다. 1997년 국민신당 대선 후보인 이인재는 헤어스타일과 의복에서 박정희 코스프레를 공공연히 했다. 2008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이명박은 한강의 기적을 계승하는 ‘4대강의 기적’를 얘기했다. 이렇게 박정희와의 연계성을 강조하는 것은 1997년 이후 대통령을 꿈꾸는 보수정치인들의 일반적 풍경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조갑제 등이 부르짖었던 강력한 영도자로서 부활한 정치적 메시아와 동일시거나 직결되지는 않았다. 박정희 따라하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캐릭터가 정치적 메시아로서의 박정희를 연상시키기에는 여전히 거리감이 있었고, 아울러 1997년 대두했던 메시아정치에 대한 기대가 현실화되는 데는 ‘2012년’이라는 시간성이 필요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한국에선 정치적 메시아주의가 범람했다. 유력한 두 명의 대선후보들은 각기 다른 두 메시아의 대리인이었다. 한 사람은 강력한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가지고 대중을 멀찍이 앞서서 구원에로 이끈 ‘초월적 메시아’의 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친근함과 소탈함으로 사람들에게 감동과 공감으로 함께 했던 ‘내재적 메시아’의 분신 같은 동료였다. 실제로 대리인이자 분신인 두 대선후보들은 그들이 대변한 메시아들과 각기 동일시될 만큼 유사한 이미지로 대중에게 기억되었던 이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 대리인은 두 메시아와 각기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 즉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 하나이자 둘인 관계이다. 8
초월적 메시아주의는, 앞서 말했듯이, 1997년 정국에서 박정희를 소환했던 일단의 예언자적 논객들에 의해 발명됨으로써 역사화의 도정에 들어서게 된 담론이라면, 내재적 메시아주의는 2009년 자살한 노무현에 대한 대중의 애도 과정에서 집단적으로 발명되어 역사화된 담론이다.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전자는 다윗 메시아니즘과 발생과정과 전개가 유사한 양식을 지닌다면, 후자는 예수 메시아니즘과 유사성을 띤다.
이 글은 이 중에서 박정희 메시아니즘에 초점이 있으므로 1997년의 예언이 2012년에 실행되는 것에 대해서만 주목할 것이다. 우선 알다시피 1997년 발명된 초월적 메시아에 대한 보수성향 대중의 열렬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이 종교적이고 감성적인 기획은 합리주의적이고 이성적인 기획을 압도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직 IMF 관리체제를 초래한 ‘외환위기’라는 초대형 폭탄이 터지기 직전이었지만, 심각한 무능과 부패로 점철된 보수주의 정부에 대한 사회적 문책과 개혁정치에 대한 이성적이고 합리주의적 기대가 보수주의 논객들이 설파한 메시아정치에 대한 열망보다 더 강력하게 작동했던 탓이겠다. 또 규범과 질서를 상징하는 인물 캐릭터를 가진 이회창이 메시아정치의 표상으로 부상한 박정희를 연상시키기에는 거리감이 너무 컸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메시아 담론’에서 박정희는 ‘(새로운) 질서의 창안자’였지 (기성의) 질서의 수호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편 그 이후 보수주의 정치는 한동안 대중의 종교적 열정을 거의 동원하지 못했다. 예외가 있다면 2천 년대 초 개신교도들의 극우주의적 바이블벨트가 소란스럽게 감정적 열정을 토해냈던 것 정도다. 이 시기 대중의 감정적 열정은 보수주의 진영이 아니라 개혁적 혹은 진보적 대중의 전유물이다시피 했다. 2002년 거세게 몰아닥친 ‘바보 노무현’ 담론과 반미 담론, 그리고 2008년을 뜨겁게 달군 광우병 담론 등이 그 예다. 반면 보수주의 정치는 훨씬 더 이성적인 비전을 추구했다. 그것은 작은 정부, 규제 완화, 민영화, 자유무역 등의 키워드와 연계된 신자유주의적인 지구화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1997년 당시 개혁적이거나 진보적인 정치가 이성의 기획을 더 많이 추구하고 보수주의 정치가 감성의 기획에 더 몰두했던 것과는 반대로, 그 이후의 정치는 그 반대의 조합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1997년 이후의 정국에서 보수주의적인 초월적 메시아주의는 그다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데 결정적인 반전의 계기가 MB 정부를 거치면서 나타났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는 급속하게 신자유주의 질서 속으로 흡수되어 버림으로써 치열한 무한 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거칠게 빨려 들어갔고, 무수한 실패자가 양산되었으며 대다수 사람들은 실패에 대한 공포감 속에서 생존게임에 돌입해야 했다. 이런 맥락에서 성공과 생존의 가치가 절대적 위상을 지니게 되었으며, ‘부자 되세요’ 담론이 사회 구석구석을 휘몰아쳤다. 그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공지상주의가 전 국민을 ‘욕망이라는 이름의 질주하는 전차’에 몸을 싣게 하고, 그 속도가 절정에 달할 무렵 국민은 MB 정권을 선택했다. 부패하고 탐욕스런 권력이라 하더라도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성공한 것, 그 하나를 절대우선시한 결과였다.
하지만 바로 이 선택이 문제였다. 2천 년대 초, 시도 때도 없이 ‘부자 되세요’를 외쳐대며 부자를 훔쳐보고 그들과의 상상적 동일시의 망상에 몰두했던 대중이 MB 정권을 경유한 뒤에 자신은 결코 부자가 될 수 없다는 집단적 절망감에 빠져버린 것이다.
한국갤럽의 조사에 의하면 2014년 4월 현재 부자가 될 가능성이 없다고 답한 이는 61%에 달했다. 또 <머니투데이>도 2013년 현재 59.3%의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조사를 발표했다. 9 한편 서울 시민의 경우 직장인들이 퇴직하는 평균 연령이 2012년 현재 52.6세다. 그런데 재취업률은 극도로 저조하다. 해서 자영업자가 크게 늘었고, 경험이 적은 이는 프랜차이즈 자영업을 선택하곤 한다. 하지만 자영업의 폐업률은 85%에 달하고, 그중 절반이 1~2년 만에 문을 닫는다. 그 사이 자산은 절반 아니 1/4로 축소된다. 이렇게 중산층은 몰락하고, 중하위 혹은 하위계층이 급속도로 늘고 있다. 그리고 아직 몰락하지 않은 이도 몰락에 대한 심한 위기감에 빠져 있다.
이렇게 사람들은 치명적인 절망의 위기에 놓여 있는데, 그 수렁에서 벗어날 이성의 기획은 부재하다. 국가경제가 좋아지건 나빠지건 그 결과는 비슷하다는, 곧 부익부 빈익빈, 아니 1대 9의 사회로 치닫고 있다는 비관적 생각이 사람들의 마음을 억죄고 있는 것이다.
하여 MB 정부를 경유한 한국사회는 절망의 수렁에 빠져 있다. 더욱 문제는 누구도 그 수렁을 헤어 나올 계산 가능한 합리적 기획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고통과 절망은 극을 향해 치솟고 있는데, 거기에서 벗어날 이성의 기획이 부재한 상황, 이것이 MB 시대 이후의 한국사회 다수의 사람들이 체감하고 있는 현실인식이다. 바로 이런 인식에 빠져든 이가 상상할 수 있는 구원의 가능성은 다분히 ‘종교적’일 가능성이 크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 글이 전제하고 있는 문제의식으로 돌아가게 된다. 오늘 한국의 대중은 고통과 결핍의 상황에서 탈출할 계산 가능한 출구를 찾지 못한 채, 그런 집단적 절망감에서 구원받고자 메시아를 갈구한다. 이 메시아적 갈구는 1997년의 정국에서 보수주의적 예언자들에 의해 극우적 메시아정치로 형상화되었는데, 그 이후부터 MB 정부까지 보수주의적 메시아정치는 중요한 변수로 작동하지 못했으나, MB 정부를 경유한 이후 매우 중요한 사회 형성의 요소를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2년 이후 메시아정치의 신체. 포스트신권위주의?
애초 MB 정부는 북한이라는 변수를 대수롭지 않게 취급했다. 또 자연재해나 체제 오작동이 유발할 ‘위험사회’적 요소 또한 중요하지 않게 보았다. 이 정부가 중요시한 유일한 요소는 오직 ‘개발’이었다. 해서 참여정부 때에 지위가 급부상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비상설기구로 바꾸었고, 그 산하의 종합상황실을 해체하기로 했다가 남대문 화재사건을 경험한 뒤 규모를 축소하여 존치시켰다.
그런데 천안함 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정상적 보고라인을 통해서만 그 사건의 진상에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즉 정부는 사건의 최초 해석자가 될 수 없었고, 그 최초 해석은 군부의 몫이었다. 흥미롭게도 대북 안보 문제를 경시한 MB 정부는 이 사건 이후 집권기간 내내 대북 강경노선에 집착했다. 그리고 그만큼 군부의 역할은 점점 주도적이 되었다.
2012년 대선 과정에서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군부의 선거 개입은 매우 두드러졌다. 또 박근혜 정부 집권 이후 정국을 휘몰아친 NLL 담론과 종북 담론, 그리고 공무원의 간첩조작 사건 등, 끊임없이 군부 강경파의 이해와 맞닿은 의제가 군부-국정원의 주도 아래 파열음을 일으키며 정국을 휩쓸었다. 요컨대 1990년대 초 하나회 해체 이후 탈정치화되었던 군부는 MB 정부를 경유하면서 뚜렷하게 '재정치화'되었다.
한편 지상파 방송들과 종편 방송들, 그리고 3대 신문들은 지난 2012년 대선 때에 노골적인 극우주의적 편파 보도를 일삼았다. 또 법무부, 검찰, 대형로펌을 잇는 법조계의 지배 권력 네트워크 또한 노골적으로 극우 보수주의 동맹에 참여했다. 요컨대 지난 대선 당시 군부, 언론, 법조 권력 등이 주축이 된 극우 보수주의 동맹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극우주의 권력 네트워크의 중심에 ‘박근혜’가 있었다. 그이는 말이 많지 않았고 사람들과 자주 만나지도 않았다. 그이는 민주주의 시대의 대중정치인스럽지 않게, 언제나 대중과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선 당시 후보간 토론도 극히 꺼려했고,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기자들과의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다. 야당 대표와의 만남도 거절했고, 자기가 임명한 각료와 비서진들과 회의할 때도 언제나 ‘말하는 이’의 포지션을 견지했다. 그리고 그이는 주로 대중에게 연출된 이미지로서 다가가길 원했다. 해서 성직자처럼 의전(儀典)을 중요시했고 상징적 메시지를 담은 의복에 집착했다. 중국어, 영어, 불어 등, 외국 방문시에 직접 발설한 외국어들은, 그 말들을 둘러싼 국제적 토론의 맥락으로 국내에 소개된 것이 아니라, 마치 개신교 목사가 설교의 자리에서 불쑥 던진 히브리어나 헬라어 같은 효과로 국민에게 수용되었다. 즉 그것은 의미로서 다가가는 대화를 위한 말이 아니라 종교적 방언처럼 소리로서 다가가는 권위적 지도자의 위세의 신호에 가깝다. 요컨대 듣기와 대화하기는 그이의 이미지와 너무 멀다. 그래서 사과하는 것이 그토록 그이에게는 어려운 행위였다.
이런 지도자를 일컬어 ‘권위주의적 리더’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이 주위에 각 영역에서 최고의 권력과 전문적 능력을 보유한 테크노크라트들이 서로 엮이어 있다. 흥미롭게도 이 권력 연합은, MB 정부의 그것처럼 각각의 이해관계가 모자이크된 이익집단적 네트워크로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덜 실용주의적이고 훨씬 더 이념적이다. 그리고 이 이념을 상징하는 권위주의적 리더가 그 연합을 추동하고 있다.
이렇게 권력 연합의 구성원들이 자기 이해를 내세우지 않은 채 모든 지도권을 권위주의적 리더에게 위임하고 있고, 그들이 마치 자신의 특화된 능력으로 헌신하는 테크노크라트처럼 연합의 이념에 기여하는 체제를 ‘신권위주의 체제’라고 부른다. 테크노크라트의 존재는 상당히 제도화된 사회를 함축하지만, 이 신권위주의 체제의 지도자는 적어도 자신의 행위에 있어서는 ‘초제도적 권력’을 행사한다. 그런 점에서 그이는 카리스마적 리더다. 10
그러나 2012년 이후의 한국사회는 1960,70년대와는 다르다. 카리스마적 리더가 모든 자원을 독점하고 그이를 중심축으로 하는 모든 동맹의 주역들이 그 하나의 중심축에 의해 자신들의 이해를 유보하고 전체의 일원으로서 테크노크라트적 충성심으로 엮이는 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또 시민사회의 주역들인 개인 각자가 단일대오의 국민으로 묶이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다. 그럼에도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를 지지하는 신권위주의적 동맹이 마치 일사불란한 유기체처럼 보였던 것은 도전연합의 세력이 그만큼 강력했던 탓이고,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뼈아픈 실각의 기억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내가 이 글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 강력한 리더십에 의해 안전과 성공을 구가했다고 믿고 싶은 그때 그 시절에 대한 로망이 자기 시대로 귀환한 카리스마적 리더와 만나면서 ‘상상적으로 체험된 종교적 환각 작용’이 일시적으로 일사불란한 듯이 보였던 권력동맹을 형성하게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 신권위주의적 권력동맹은 ‘실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냥 종교적 환각일 뿐이다. 현실적 조건은 그렇게 단일대오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의 시대에 걸맞는 권위주의 체제는 새로운 형식이 필요하다. 아마도 그것은 오늘의 자본주의처럼 유동적이고 네트워크적인 권력 형식을 띠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유동적이고 네트워크적인 권위주의를 ‘포스트신권위주의’(post-neoauthoritarianism)라고 부르고자 한다. 요컨대 박정희식 신권위주의 체제와는 달리 명실상부한 중심이 없지만 권력연합이 권위주의적으로 공고히 작동하는 체제를 가리킨다. 아마도 박정희 같은 전제군주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다할 의사가 없는 권력의 구성원들은 필경, 이러한 포스트신권위주의 같은 체제를 상상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박근혜 정부의 등장을 포스트신권위주의 체제가 대두하는 하나의 ‘징후’라고 보았다. 11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그런 징후가 메시아정치를 통해 대두했다는 것, 즉 카리스마적 리더를 중심축으로 하여 구축되었다는 것은 이 체제의 근원적 불안정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즉 명실상부한 중심이 실재하는 것처럼 작용함으로써만 탈중심화 시대의 체제인 포스트신권위주의가 실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역사적 실험의 결정적인 딜레마다. 왜냐면 카리스마적 리더는 초제도적이고 초법적인 권력으로 ‘전체의 기획자’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렇기에는 사회가 너무나 복잡하게 편재되었고, 그 구성원들이, 심지어는 그이의 지지자들조차 자존성이 강한 주체로서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하여 대통령이 된 카리스마적 리더 박근혜는 자기 캐릭터에 걸맞게 언제나 말하는 자이고 일방적 지시자로서, 곧 전체의 기획자처럼 행동하지만, 그 기획은 대개 성공하지 못한다. 왜냐면 사회는 다양한 주체가 서로 자기의 게임을 공공연히 벌이기 때문이다. 하여 일방적 지시는 그 지시가 수행되는 직후 바로 무의미해진다. 세월호 사건은 카리스마적 리더의 지시가 실재 속에서는 철저히 ‘비어 있는 기표’에 지나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므로 박근혜 정부는 그 권위주의 체제를 지속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종교적 환각을 연기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그것은 이 체제가 대통령이 카리스마적 리더로서의 이미지가 훼손되지 않은 채로 높은 대중적 지지를 유지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런 비정상적이고 탈제도적인 지지 현상이 유지되지 않으면, 체제는 권력 누수를 겪게 되고 결국 권위주의 체제는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포스트신권위주의적 실험, 그 성공 불가능한 실험이 집권기간 동안 내파하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은 메시아적 정치종교가 5년 내내 사회 구성원 다수를 동원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지금 우리사회에서 메시아정치가 소멸하지 않고 계속 작동하는 현상은 그것이 포스트신권위주의 체제라는 불안전한 육체가 만들어내는 시대의 유령이기 때문이다.
불온한 메시아정치
이 정권이 집권하고 1년 반이 지나기까지 가장 놀라운 일은 대통령의 지지율이 장기간 대단히 높게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 기간 동안 정부와 관련된 비리, 추문, 거짓말, 무능, 실패 등이 끊임없이 이어졌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렇다 할 정책적, 정치적 성과도 전무했다. 그럼에도 대통령의 집무 평가는 대단히 높고, 그 지지율이 크게 떨어질 때조차 상당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매스미디어는 ‘콘크리트 지지율’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앞에서 보았듯이 이러한 콘크리트 지지 현상은 이 신권위주의 체제를 유지시키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다.
그렇다면 합리적 이유가 없음에도 높게 유지되는 지지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다양한 해석이 있겠지만, 나는 대통령이 메시아정치의 주인공이라는 점을 그 주된 이유라고 이해한다.
그 비슷한 현상이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와 그 교인들과의 관계에서 엿보인다. 최근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끊임없는 추문에 시달리고 있다. 교회 건축을 둘러싼 비리, 세습과 관련된 비리, 교회 재산의 불법 유용과 관련된 비리, 성폭력, 막말, 그리고 수많은 반공공적 행위들 등. 시민사회는 이러한 추문들에 대해 매우 강도 높게 비난을 퍼붓고 있다. 그리고 교회의 팽창은 멎은 지 오래고 심지어는 감소추세다. 남아 있는 이들도 자신이 개신교 신자임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기를 꺼려한다. 즉 기독교 신자라는 사회적 자존성은 매우 낮아졌다.
한데 놀랍게도 이러한 추문들에도 불구하고 교인들, 특히 대형교회 교인들의 다수는 담임목사에 대한 충성심을 철회하지 않았다. 가령, 교회 재산에 대한 배임행위와 학력 위조 등에 대해 의심의 여지없는 혐의를 받고 있는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에 대해 그 교회의 교인들 절대다수는 변함없는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그 추문들이 실제 사실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충성심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 현상이 바로 대형교회 담임목사들에게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그 주된 이유는 바로 한국의 대형교회적 메시아니즘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에서 대형교회들은 예외 없이 담임목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장기간 대단히 높게 발현됨으로써 나타났다. 이 카리스마적 리더들이 교회의 모든 신앙자원을 독점하였고 그것을 성장에 집중 투여한 결과 그이들의 교회가 대형교회가 되었다는 얘기다.
한데 이들이 장기간 독재자로서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유지하는 데는 몇 가지 통치의 기술이 있었다. 그중 결정적인 하나는 사람들 각자의 내면을 수치심이나 죄의식에 빠져 고통스럽게 하고, 거기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열망을 특정 대상에 대한 공포와 증오 같은 감정적 행동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행동주의적인 ‘감정적 총화’를 가져오는데, 그 상징적 중심의 자리에 독재자 자신이 위치함으로써 그이의 카리스마적 권력은 강력한 동력을 유지하며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 각자가 개별적으로 겪는 감정적 절망감이 집단적인 총화를 이루며 공포나 증오 같은 감정적 행동으로 표출되는 현상은 강렬한 열정을 동반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상의 질서, 계산과 합리적 판단을 마비시키곤 한다. 해서 어떤 사람들은 전 재산을 교회에 기부하기도 하고, 삶 전체를 목사가 제시한 방향으로 질주하듯 쏟아 붓기도 한다. 그리고 저 증오의 대상(빨갱이나 이단, 최근에는 동성애자와 무슬림 등)을 향한 교인들의 공격성은 거의 맹목적일 만큼 ‘순수한 열정’으로 표출되곤 한다. 이때 삶의 균형이나 타협, 절충 따위의 요소는 자리잡을 곳이 없다. 이렇게 일상의 규칙이 크게 약화되고 비일상의 감정적 요소가 압도하는 순간을 일컬어 신학에서는 ‘메시아적 시간’이라고 말한다. 대형교회 목사들은 교인들의 삶에서 메시아적 시간의 비중을 높이는 데 성공한 이들이다. 그런 점에서 그이의 목회는 메시아주의적 목회이고 그 교회의 많은 대중은 메시아주의적 대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을 국가 차원의 문제로 환치시키면 카리스마적인 리더와 대중의 비일상적이고 감정적 요소가 압도적인 상호행동을 ‘메시아정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형교회 담임목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런 메시아정치가 계속 작동되고 있음으로써, 즉 대중이 메시아정치에 동원되고 있음으로써, 박근혜의 콘크리트 지지 현상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 절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자기 모순적인 불안전한 포스트신권위주의 체제가 내파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으려면 그 상징적 중심에 있는 카리스마적 리더가 높은 지지를 유지해야 한다.
내가 보기엔 바로 이 사실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메시아정치가 지속되려면 사람들이 헤어 나올 이성적 전망이 무망한 고통과 절망 속에 빠져 있어야 하고, 그러한 고통과 절망감이 특정 대상에 대한 공포와 증오 같은 감정적 행동으로 전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공포와 증오감이 메시아적인 카리스마적 리더를 중심으로 실행되어야 한다. 바로 이 사실이 현 정부가 집권한 이후 내내 지속되고 있는 ‘공포마케팅’의 이유다. 가령, 북방한계선(NLL) 파동은 한때 대통령이던 이와 그의 지지자들이 사실상 ‘적’의 내통자였다는 공포스런 위기 담론을 만들어냈고, 이석기 파동은 적의 프락치가 국회에까지, 심지어는 우리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사회의 교란과 분열, 파괴를 기도하고 있다는 공포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북핵 파동은 군사비가 34:1이고 국내총생산(GDP)이 38:1로 절대열세인 북한이 여전히 가장 공포스런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담론의 장치였다. 또 최첨단 차세대전투기로 무장함으로써 대공 전력이 절대적 우위에 있음에도 무인비행기라는 적의 비대칭전력이 얼마나 우리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지에 대한 공포담론을 유포시켰다.
이러한 상존하는 북한발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대북 경각심이 굳건한 ‘강한 통치자’가 필요하며, 그이가 펴는 권위위주의 정치를 발목 잡는 세력이 척결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안전이 지켜질 수 있고, 그래야만 우리가 발전국가로 재도약할 가능성이 있다. 메시아 박정희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고, 박정희의 분신인 그의 딸이 새로운 메시아로 우리에게 또 한 번의 도약을 선사할 것이라는 생각이 메시아적인 카리스마적 리더에 대한 대중의 지속적인 높은 지지를 가능하게 한 것이라는 얘기다.
한데 세월호 사건은 이러한 대북안보 담론, 그 공포마케팅이 얼마나 무망한 것인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실제로 발생한 삶의 안보가 침해받은 것은, 적의 무기나 그 협력자들의 암약보다도, 우리 정부의 무능함과 무관심에 더 깊이 연루되어 있고, 더 근원적으로는 생명에 대한 존중감보다는 모든 것을 돈벌이 수단으로 인식하는 나쁜 자본주의적 감각과 더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일상에서 파손된 안전과 그로 인한 깊은 상처에 대해 권위주의 정부는 사과하지 못하는 얼굴을 드려냈다. 사과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처 입은 이들의 마음을 공감하지 못하는 감각의 불모성을 의미하며, 이는 문제를 상처 입은 이들의 관점에서 해결할 능력이 근원적으로 결핍되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하여 오늘 우리 사회에서 작동되고 있는 메시아적 권위주의 정치 그리고 그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공포, 증오, 적대 등의 감정과 친화적인 반면, 생명이 존중받는 세계를 약속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메시아정치는 불온하다. 하여 오늘 우리 사회에서 점점 강화되고 있는 종교성에 대해, 우리의 과제의 하나는 증오의 메시아정치가 아니라 생명 존중의 메시아정치에 대한 새로운 신탁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관련 글 보기 : 당신들의 대통령 - 선출된 왕과 민주주의, 그 이후
- 이를 ‘초월적 메시아주의’라고 부른다. 그 메시아가 위대한 군주로 혹은 전쟁 영웅으로 등장해서 압제자들을 몰아내고 고통당하는 이들을 구원/해방해줄 것이라는 신앙이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메시아운동은 많은 경우 실패했거나 변질되었다. 하여 변형된 메시아주의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내재적 메시아주의’가 그런 경우다. 가령 지중해 연안 대도시 지역에서 발전한 ‘그리스도’파의 해석이 그랬다. 팔레스티나에서 처형당함으로써 실패한 예수운동이 그 제한된 시공간을 초월하여 다른 곳 다른 시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내면에서 계속 이어지게 하는 존재로서 함께 하고 있다는 신앙적 신념이 발전했던 것이다. [본문으로]
- 이렇게 서양에서 유래한 정교분리라는 교리적 이상은 실제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 여기서 '정치종교'라는 용어는, 시민종교와 대비시켜 정치의 신성화를 통해 파시즘 같은 전체주의적 체제와 연관시켜 해석하는 이탈리아의 역사학자 에밀리오 젠틸레(Emilio Gentile)의 어법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시민종교와 정치종교를 민주주의적 공공성과 연관된 종교성 대 전체주의적 종교성으로 이분화하여 이해하는 방식이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것은 오늘날 시민적 공공성이 종종 비시민에 대한 교묘한 배타주의로 나타나고 있다는 문제를 은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민종교의 ‘성찰적 공공성’의 형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 글의 논지 밖에 있으므로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본문으로]
- ‘메시아의 사회화’는 히브리대학의 사회인류학자인 미카엘 크라벨-토비(Michal Kravel-Tovi)의 용어로, 종교적 지도자들에 의해 사회적으로 번안되는 메시아가 제도적 완충장치를 갖는 것과는 달리, 종교적 지도자의 실패로 인해 대두하는 메시아의 사회화는 제도 해체적이고 질서 전복적인 메시아정치를 낳았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본문으로]
- 현대신학은 메시아정치와는 다른 방식의 메시아 신앙의 구현 양식들에 대해 주목해 왔다. 특히 나치즘이라는 광폭한 정치종교를 청산하고자 했던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은 메시아를, 메시아정치의 승리 서사가 아니라, 예수의 죽음 서사와 연계시키곤 했다. ‘죽음’은 역사적 시간의 정지이며 새로운 시간 도래의 암호이다. [본문으로]
- 『인간의 길』은 박정희를 소설화한 세 권짜리 책인데, 3권은 이듬해(1998) 3월에 출간되었다. [본문으로]
- 이에 대하여는 나의 글 「메시아주의, 한국 정치의 어떤 열망」, 『당신들의 대통령. 선출된 왕과 민주주의, 그 이후』(문주, 2012)를 보라. [본문으로]
- 2012년의 정국을 박정희 메시아주의와 노무현 메시아주의, 이 두 정치적 메시아주의가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관점에 대해서는 나의 글 「메시아주의, 한국 정치의 어떤 열망」을 보라. [본문으로]
- 한편 2005년에는 자신이 부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사람들의 20.6%가 그렇다고 보았다. 하지만 2010년에는 14.8%로 현저히 줄었다. 이에 대해서는 정수남, 「‘부자되기’ 열풍의 감정동학과 생애프로젝트의 재구축」, 『사회와역사』 89(2011)을 보라. [본문으로]
- 막스 베버는 제도적 권력과 카리스마적 권력을 대비시키면서, 제도를 초과하는 권력의 수행자를 카리스마적 리더라고 보았다. [본문으로]
- 이에 대하여는 나의 글 「한국 개신교 반공주의와 ‘증오의 정치학’」 (2013년 비판사회학대회 특별세션 발표글. 2013.10.26.)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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