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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성서에 따른 조세

[공동선] 9+10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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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따른 조세






“성경도 모르는 것들이”


최근 박근혜 정부는 증세안을 속속 발표하고 있다. 담배값을 대폭 인상하겠다는 것이 사실상의 증세임은 의심의 여지없다. 거기에 자동차세나 지방세를 인상하겠다는 계획도 제시되었다. 예상한 대로 반론이 속출한다. 증세 문제는 거의 언제나 조세저항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반론들의 요지는 증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사실상 서민증세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한편에선 배당소득 증대세제, 근로소득 증대세제, 임대소득 과세 등, 고소득자일수록 유리한 감세안들을 내놓고 있으니 증세안의 설득력이 더 궁색하다.


개신교 성직자들 중 많은 이들은 정책 내용이 어떻든 보수정부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번에도 몇몇 목사들이 정부를 편드는 말을 공공연히 했다. 그이들이 어떤 말을 했는지는 듣지 않아도 뻔하다. 예상대로 한 목사는 「로마서」 13,7을 들이대며, “성경도 모르는 것들이” 아무 말이나 해댄다고 ‘무지한’(?) 대중을 나무랐다. 그 구절은 이렇다. “여러분은 모든 사람에게 의무를 다하십시오. 조세를 바쳐야 할 이에게는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바쳐야 할 이에게는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해야 할 이는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이는 존경하십시오.” 


과연 그런가? 이 구절을 들이대며 현 정부의 증세안에 이견을 표하는 이들이 성경을 모른다고 말해도 좋은가? 과연 그 목사는 성경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가? 이 구절 속에 담긴 조세의 의미는 무엇일까?



로마시의 그리스도파



로마제국의 네 번째 황제 클라우디우스(재위 41~54년) 치하인 서기 49년경 로마 시에서 그리스도파 사람들이 주도한 일단의 소요가 있었다. 황제는 소요를 진압한 뒤 주모자들을 처형했고 많은 이스라엘인들을 로마 시에서 강제 추방했다. 바울의 가장 절친한 동료가 된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도 그때 추방당한 사람들 중 하나다. 그들은 추방당해 고린도로 왔고 거기에서 바울을 만났다. 바로 이 만남이 이들 부부가 자신들의 신앙의 뿌리였던 로마 시의 그리스도파와는 ‘다른’ 그리스도 운동가가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알다시피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이십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처형당한 메시아를 가리킨다. 메시아는 하느님의 나라를 다스리는 대리인을 뜻하는데,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나라의 긴급한 도래를 부르짖었던 이들을 메시아라고 부르곤 했다. 하여 그 나라의 도래를 체험한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사람들이 ‘메시아’라 불렸던 이들은 여러 명이 있었다. 나사렛 예수도 그 중의 하나다. 


한데 그리스말을 쓰는 일단의 사람들이 바로 나사렛 예수가 처형당한 뒤, 그이를 ‘그리스도’라고 부르며 메시아운동을 펼쳤다. 그리스도란 메시아를 뜻하는 그리스어로 그들에 의해 차용된 용어다. 아무튼 이들은 처음엔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그들의 활동터인 예루살렘의 리버디노 회당(「사도행전」 6,9)[각주:1]에서 이들의 지도자 스데반이 처형되자 사방으로 흩어져 나가 그리스도 운동을 계속했다. 특히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와 안디옥에서 그들의 활동이 돋보였다. 하여 이 지역에서 이들을 가리키는 이름이 생기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바로 그것이다(「사도행전」 11,26).


다마스커스는 아랍지역과, 안디옥은 지중해 지역과 연결되는 거점도시다. 즉 이들 도시에서 시작된 그리스도 운동은 이 두 도시를 기점으로 해서 동서로 퍼져나갔는데, 우리에게는 지중해로 퍼져나간, 즉 서쪽으로 전파된 그리스도 운동만 알려져 있다.[각주:2]


아직 하나의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가 탄생하기 이전이다. 그러니까 유대교처럼 범이스라엘 신앙권 내의 한 분파에 속한다. 아니 실은 좀더 복잡하다. 이 시절 그리스도파는 하나의 분파라기보다는 예루살렘에서 로마 관리에 의해 처형당한 예수라는 이를, 메시아를 뜻하는 그리스말인 ‘그리스도’로 부르며 활동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하다. 지중해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다 보니 이들 그리스도파들끼리도 서로 모르는 경우가 많았고, 때로는 그리스도파들 간에 갈등과 분쟁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이념적 성향도 신앙의 기조도 다양했다. 그들 중의 하나가 떠돌이 선교자 바울이 주도하는 그리스도파다. 


한편 로마 시에는 또 다른 그리스도파가 있었다. 그들은 로마 시의 이스라엘 교포사회의 일원으로서, 아마도 자산이나 지식에 있어 평균보다 꽤 수준 높은 이들이 많았던 듯하다. 해서 바울은 이들을 “강한 자들”이라고 불렀다(「로마서」 14,1 참조). 곧 로마의 이스라엘 교포사회 일반에 비해 그리스도파는 ‘강한 자들’에 속했다.[각주:3] 반면 바울이 조직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지역들의 이스라엘 교포사회에서 “약한 자들”이었다. 



조세거부운동



이들 로마 시의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의 권력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표시로 조세거부운동을 벌였던 것 같다. 그 결과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 등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도시에서 추방당해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그런데 클라우디우스가 죽었다. 소문으로는 아내 아그리피나에게 독살당했다고 하니, 그의 죽음을 두고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신의 응징으로 해석했을 법하다. 하여 흩어지거나 지하로 숨어들어 있던 그리스도파가 다시 결집하고 있었다. 그런 즈음에 그의 아들 네로가 즉위한다.


새 황제는 처음부터 선왕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검투경기 등 대중적 이벤트를 대폭 늘렸고, 심지어 대중 앞에서 연기자로 나서는 파격을 보이기도 했다. 선왕은 꽤 유능한 실무능력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인기가 너무나 없던 통치자인 반면, 네로는 처음부터 대대적인 대중의 열광을 불러 일으켰다. 


이들 이벤트는 대중에게 여흥만 준 것이 아니다. 엄청난 고기와 빵이 대중에게 분배되었다. 또한 전 도시민의 20%에 달하는, 거의 20만 명의 시민들에게 식량을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로마 시에서 시민에게 식량을 무상공급하는 것은 모든 황제들이 공히 지속적으로 펴온 정책이었지만, 그 수혜자를 20%까지 늘린 것은 황실 재정이 최고조에 있던 아우구스투스 시절에 비견될 만했다. 


전쟁이 별로 없던 시절이다. 공화정기 대대적인 정복전쟁의 수혜를 입고 지존의 자리에 앉은 아우구스투스는 제국 각처에 흩어진 황제령 농경지에서 수거한 곡식으로 복지비용을 충당했지만, 네로는 다른 수입원이 필요했다. 그중 하나는 제국내의 각 태수와 정무관들, 예속국 왕들이 보내는 공납물이었다. 왕은 그것을 원활히 하기 위해 교통과 행정망을 효율화했다. 또한 황제는 귀족들과 시민들, 곧 안정계층으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징수했다. 이와 함께 귀족층의 횡포를 억제하였다. 황제의 공권력은 귀족의 권력 남용을 응징하는 데 활용되곤 했던 것이다.[각주:4] 


그러나 로마 시의 그리스도파는 새 황제의 권력이 아직 공고해지기 전에 반제국 투쟁을 벌이고자 했다. 그들에게 모든 황제는 다 적이었던 것이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메시아가 활동을 시작할 때까지는 아직 ‘그 날’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들 그리스도파는 이 예루살렘 중심적 기획은 지난 일이고, 그리스도의 새 시간은 그 낡은 법칙과는 달리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이들은 황제에게 복종하지 않았고, 그 일환으로 조세거부운동도 벌이고자 했다. 



“‘그 권력’에 복종하라”



바울은 아마도 이런 분위기를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로부터 들었던 듯하다. 한데 그는 로마 시의 그리스도파의 활동을 위험하게 보고 있다. 저들의 섣부른 행동은 오히려 대중을 죽음으로 내몰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여 그는 주장한다. 권력에 복종하라고, 세금도 내고, 의무를 다하라고 말이다.


그가 보기에 그 때는 아직 아니었고, ‘아직 아닌’ 지금의 전략은 ‘기다리는 것’이다. 게다가 로마의 새 황제는 귀족의 횡포를 응징하고 있었고, 대중에게 나눠줄 복지자금과 식량을 위해 조세를 증액시켰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과세대상은 안정계층에 한정되었다는 점이다. 빈곤층은 너무나 가난해서 조세는커녕 생계도 이어나가지 못할 형편이었으니 그들을 과세대상으로 삼는 것은 무의미했고, 또 실제로 로마 시의 빈곤계층은 인구조사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협소한 지역에 초고도로 밀집해 살고 있어 과세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그들을 조금이라도 더 갈취하려는 황제나 귀족이 있었지만, 네로는 그런 대중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아 원로원과 대결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의 과세 정책은 명백한 ‘부자 증세’ 정책이었고, 내용은 복지를 위한 증세였다. 하여 바울은 네로가 펴는 권력은, 궁극적으로는 아니지만, 당장은 존중해야 할 권력이라고 보았다. 문제의 구절, 이제까지 숱한 연구자들과 성직자들, 그리고 신자 대중에게 혼란을 주어왔던 「로마서」 13장 1~7절의 구절들, 특히 권력에 복종하고 세금을 순순히 내라는 구절은 바로 이렇게 해석되어야 할 것들이다.


요컨대 그날, 그리스도의 날이 도래하기 전까지 황제가 대중을 착취하고 괴롭히지 않는 한, 또 대중을 학대하는 귀족층의 횡포를 억제하는 한, 그 권력은 존중해야 한다고 말이다. 또 그날, 그리스도의 날이 도래하기 전까지 대중에게 식량을 나눠주고 복지를 위해 쓰이는 한, 세금을 응당 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부합하는 세금인가



지난 총선과 대선 과정에서 박근혜 정부는 야당보다도 앞서서 복지에 관한 진일보한 공약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유권자에게 모종의 기대감을 품게 하였음에 분명하다. 한데 지난 집권 2년 동안 복지 공약은 줄줄이 후퇴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경제활성화를 명분으로 자산가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어왔던 종래의 성장주의 정책을 다시 되풀이하고 있다. 그나마 형식상의 복지를 위함이라는 명분으로 증세 정책을 내놓았는데, 그 성격이 누진세율이 적용되지 않는 기계적인 증세, 그러니까 결국 사실상의 서민증세 정책에 다름 아니다. 


복지란 양극화 해소를 기조로 하는 정책이다. 한데 최근, 빈약한 복지를, 그것도 서민증세로 기금을 충당하려는 정책, 게다가 경제활성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실행될 예정인 부자 감세 정책은 설사 경제가 활성화되더라도 양극화는 해소되지 않고 심지어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니 최근의 정치는 저 빈약한 복지가 그나마 더 후퇴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바울의 「로마서」 13,7을 되새겨보자. 증세를 비판하는 이들을 향해 “성경도 모르는 것들”이라고 비난한 목사는 과연 바울의 이 텍스트를 잘 이해했는가? 그는 40년대 말에서 50년대 초라는 시간과 로마 시라는 공간의 특수성을 묻지 않고 이 구절의 표피적 문장을 곧이곧대로 읽었다. 그렇다면 그를 포함한 개신교 성직자들은 왜 소득세를 내라는 주장에 반대하는가? 심지어 끝도 알 수 없는 교회의 부동산에 대한 과제에 대해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인가? 혹자는 교회는 황제의 것이 아니어서 과세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마가」 12,17) 하지만 많은 교회들은 법률이 정하는 방식에 따라 대지를 구입하고 건축을 하며, 매매를 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적지 않은 시세차익을 올렸다. 왜 하느님의 것을 짓는데 법률에 따르고 법률에 따라 매매하며 시장의 규칙에 따라 차익을 올리는가? 그것은 성경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우리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로마서」 13,7은 그 역사적 문맥을 함께 본다면, 조세 나아가 국가권력은 그것이 약한 대중의 인권과 생존권을 위해 존재할 때 한시적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얘기했고, 그 이상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박근혜 정부에게 주장해야 한다. 증세를 하든 감세를 하든, 서민을 위해서 하라고. 그것이 바로 ‘성경대로’ 하는 조세인 것이다. 



[각주]

  1. 리버디노 회당은 예루살렘에 거류하는 헬라계 교포들의 회당이다. 구역 별로 하나 이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 회당들의 구성원들 사이에는 상대적으로 긴밀한 관계망이 형성되었던 것 같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이들 헬라계 이스라엘 교포의 수가 이 도시 인구의 대략 10~15% 정도였던 것으로 추산되며, 그 수는 최소한 2,500~4,500명 이상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2. 다마스쿠스에서 그리스도 운동가로 전향한 바울은 처음엔 이 도시를 거점으로 아라비아 지역(아마도 오늘의 요르단국 지역) 일대에서 활동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이루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것은 그 시기인 38년 어간에 이 지역의 통치자인 나바테아국의 아레타스 4세와 헤롯의 계통을 잇는 통치자들 간의 전쟁과 심한 갈등으로 점철된 정치적 여건과 무관하지 않을 법하다. 아무튼 그는 이 선교활동에 내용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3년 후에’ 그는 돌아와 안디옥을 거점 삼아 서방, 곧 지중해의 에게해 지역에서의 활동을 재개한다.(「갈라디아서」 1,15~19) [본문으로]
  3. 고대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가 쓴 『황제전』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 때에 일단의 이스라엘인들이 강제 추방 되었는데, 그 추방의 이유는 ‘크레스투스’(Chrestus)의 선동으로 인한 것이었다. 여기서 ‘크레스투스’는 ‘크리스투스’, 곧 그리스도를 그렇게 표기한 것임은 의심의 여지없다. 그리고 황제가 추방조치를 내린 것이라면 그 소요는 도시 치안에 위해가 되는 행위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이스라엘 교포사회 내에서 그리스도파의 위험한 행위가 당국에 의해 처벌된 사건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한편 「로마서」 14장에 묘사된 ‘강한 자들’은 이스라엘 전통주의자인 ‘약한 자들’과는 달리, 로마 사회의 문화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적응하는 이들이다. 이민자 집단에서 현지 문화에 더 적극적이며 자신의 조상의 전통에 좀더 개혁적 태도를 갖는 이들은 대개 언어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 그 현지 사회에 더 잘 정착한 부류의 사람들일 경우가 일반적이다. 「로마서」 11,11에 의하면 이들 로마의 그리스도파는 예루살렘이나 사마리아에서 메시아가 등장하여야 세계에 대한 신의 통치가 시작될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전통적 신앙의 기획이 실패했고, 아마도 그 메시아는 자신들이 활동하는 로마에서 먼저 등장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강한 자들’은 사회계층적으로 젊고 혁신적인 엘리트 계층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속해 있었다면 ‘강한 자들’은 로마시의 그리스도파로서 대개 젊고 안정계층에 속한 진취적 엘리트였다고 추정된다. [본문으로]
  4. 네로가 미친 황제, 잔인한 독재자 등으로 알려진 것은 그가 쿠데타로 강제폐위 된 이후, 그의 정적인 원로원 귀족 출신 문필가들이 그를 격하시킨 결과다. 이후 한 세대 이상 지나서 황제가 된 도미티아누스의 정적(政敵)인 원로원 귀족 출신 역사가들이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한 이후 그를 격하시키는 작업을 벌인다. 즉 도미티아누스를 제2의 네로로 낙인찍는 작업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과거 자신들의 선배들이 온갖 불명예를 뒤집어씌운 네로에 대한 역사를 재정리한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네로에 대해 알고 있는 부정적 인상의 뼈대가 되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