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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사회적 영성이란 무엇인가 - 신자유주의적 현상들로서의 ‘영성들’과 ‘그것 너머의 영성’

이 글은 제7회 맑스코뮤날레의 종교세션 <일상적 변혁으로서의 사회적 영성>의 제1발제 원고로 처음 발표되었고, [공동선] 2015년 7-8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종교분과 자료집을 첨부하였습니다.


제7회 맑스 코뮤날레 종교분과 자료집.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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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영성이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적 현상들로서의 영성들그것 너머의 영성

 

 

 

 

 





영성 현상

 

1990년대 이후 전 세계는 이른바 영성의 물결에 빠져들고 있다. 2003년 가톨릭성령쇄신봉사회에 따르면 성령체험자들은 개신교와 가톨릭, 정교회를 합쳐 전 세계적으로 약 6억 명이나 된다고 발표했다. 기관의 성격상 이 수치는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맥락상 최근 매우 확산되고 있는 영성 현상의 추세를 반영하는 발표라고 할 수 있다. 한국과 미국 같은 강력한 근본주의적 개신교가 종교의 큰 줄기를 형성한 나라들에서는 개신교 성령운동의 기세가 여전히 강력하다. 또 남아시아나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에서 불고 있는 개신교의 맹렬한 팽창은 성령운동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한편 힌두교나 불교, 도교 등 아시아적 종교성에 영향을 받은 포스트모던 신종교 현상(Postmodern New-Religious Phenomenon)이 포스트근대적 문화가 발전한 사회를 중심으로 폭넓게 확산되고 있는데, 이 현상도 영성 체험을 통해 강력한 마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것은 불교나 힌두교 같은 기성종교 내에서 일어나는 명상, 자기계발과 힐링 프로그램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단월드나 마음수련 같은 아시아적 기원을 지닌 신종교적 조직들이 수행하는 마음의 기획들로 나타나기도 한다.

나아가 종교제도나 담론의 형식을 갖지 않지만 그것의 수행적 효과의 차원에서 볼 때 종교적인 기획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자기계발-힐링의 프로그램들(각종 코칭 프로그램 혹은 리더십 프로그램)도 성행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종교적 요소의 중심에 영성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 정치인에 대한 팬덤 현상도 영성 현상이라고 범주화할 요소를 갖고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이와 같이 종교적 제도화가 구축되지 않은 영역에서 나타나는 종교성의 양상을 종교적인 것(the religious)이라고 부르겠다.]

그밖에 최근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시위문화로 자리잡은 촛불집회도 영성 현상의 맥락에서 다룰 수 있다. 근대 이후 대중적인 저항은 종교적 열정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이데올로기의 옷을 입고 펼쳐졌다. 종교적 열정은 신의 기획에 대한 대중적 믿음의 산물이라면, 이데올로기는 일종의 이성의 기획에 대한 대중의 확신이 불러일으키는 정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도 1980년대 전후에 이데올로기적 정념에 기반을 둔 대중적 저항이 불타올랐다. 하지만 최근 한국사회의 집단적 저항에서 이데올로기는 거는 거의 대중의 결속의 틀이 되지 못한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깃발촛불이다. ‘깃발에 새겨진 단체의 명칭이나 슬로건, 그리고 그 색깔은 하나의 명료한 기표로서 지향하는바 이데올로기를 함축하고 있다. 하지만 요즈음의 집회에서 깃발은 더 이상 그러한 의미로서 대중과 만나지 못한다. 단지 우리 모임의 회원들은 이리로 모이시오라는 표식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반면 깃발이 차지했던 자리는 촛불로 대체되었다. 그런데 촛불에는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염원이 있다. 그것은 이성의 자리를 종교성이 대체하였음을 의미한다고 해석될 수 있다. 촛불을 들고 집회에 참여한 대중은, 과거 깃발의 주체들처럼 낡은 질서의 전복을 도모하며 파괴를 행위의 양식으로 선택하기보다는, 마치 예배 참여자들처럼 염원을 갈구하는 노래와 기원을 한껏 부르짖다가 집회를 마치면 그곳을 깨끗이 정리하고 각자의 사적 공간으로 흩어진다. 사제복을 입은 가톨릭 사제가 주도하는 시국미사가 대중의 긍정적인 이목을 끄는 것도 집단적 시위가 일종의 탈제도적 종교의 예배로 변모하고 있는 또 하나의 징후로 보인다. 여기서도 영성 현상의 확산이라는 논점을 확인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최근 영적 현상은 우리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고,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많은 기성 종교들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나아가 (포스트모던 신종교라고 불리는) 새로운 종교 탄생의 주된 배경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종교적인 것이라고 명명한, 종교적 제도나 양식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수행적 효과의 차원에서 종교성을 지니는 범주들에서도 영성 현상은 폭넓게 드러나고 있다.

 

의미와 맥락

 

그런데 이 글이 주장하는 영성이란 무엇인가? ‘영성(spirituality)이 종교학의 주요 개념으로 부상한 것, 그리니까 종교학적 작명의 저작권은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그것이 최근 범종교적, 나아가 비종교적 종교성을 이야기하는 범주로 확장된 것도 주로 그리스도교 신학의 발전 과정에서 유래한다. 그런 점에서 이 용어는 어원학(etymology)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적절한 대체용어를 찾기가 어렵고 이미 연구자들과 대중에게 영성이라는 표현이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편의상 이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우선 앞의 이야기에서 혼란스럽게 사용된 영성과 종교성이 같은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영성이라는 용어는 체험을 강조하는 종교성을 이야기하는 맥락에서 흔히 사용된다. 즉 영성은 체험으로서의 종교성과 관련이 있다. 한데 기성 종교는 잘 짜인 제도를 통해 구축되는데 여기서는 체험 자체보다는 체험에 대한 해석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해석은 이해의 범주이고 이성의 영역이다. 반면 체험은 감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즉 제도로서의 종교는 체험을 해석하여 다스림으로써 발전한다. 하여 제도종교의 엘리트는 체험을 언어화하는 자로서, 체험을 제도 순화적 감정으로 조작하는 전문가다. 그들에 의해 제도종교는 순화된 체험을 포용하고 순화되지 않은 체험을 배제한다.

한데 종교제도가 구원의 매개자로서의 위상이 실추하게 되면, 그 자리를 대체하는 개혁가들이 속속 등장하게 된다. 특히 제도 해체적인 체험의 전문가들이 나타난다. 이 체험은 제도에 순화되지 않는 감정이며, 구원에 이르는 대안적 양식이다. 이들 체험의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감성의 정치가 바로 영성 현상이다.

한편 최근 포스트모던 신종교들이나 종교적인 것들덜 제도화된혹은 제도화되지 않은종교성을 통해 그 사회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감성이 지대한 역할을 하곤 하는데, 이때 이런 감성의 종교성은 곧 영성과 겹친다.

아무튼 영성은 종교적 차원의 감성의 정치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영성은 집단적이든 개체적이든 이 감성의 수행을 통한 자기 초월을 지향한다. 이러한 자기 초월을 향한 영성적 수행,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종교정치적 효과를 조명하는 일이 영성학의 한 과제이다. 그런데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러한 영성 현상이 199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두드러졌다. 그것은 어떤 맥락과 관련이 있을까?

나는 세 가지 요인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본다. 첫째는 소비사회의 대두다. 자본주의의 주요 동력이 생산패러다임에서 소비패러다임으로 이행하면서, 불안정하고 불온하기까지 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던 감성의 위상은 급반전되었다. 이러한 감성사회로의 변화가 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포착된 시기는 1990년대다. ‘()의 시대에서 ()의 시대, 그리고 다양성의 시대를 거쳐 1990년대 이후 감성의 시대로 이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 속도는 급가속 발진중이며, 전지구적으로 빠르게 영역을 확장되고 있다. 한국사회도 다양성’, 그리고 감성의 요소가 동시적이며 압축적으로 사회변화의 주요 동력으로 작동하게 된 시기가 1990년대다.

둘째 요인으로 매체 환경의 변화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16세기 인쇄술의 발전과 더불어 형성된 이른바 구텐베르크 은하계가 종말을 향해 추락하고 새로운 은하계가 도래하고 있다는 논제가 제기된 것은 1990년대 이후다. 15~17세기 지리상의 발견은 인쇄기술로 인한 문자혁명과 함께 찬란한 자본주의 문명을 이룩했다. 그러나 지리상의 확장이 멈춰 버린 18세기 이후 유럽은 공간의 확장을 대신하는 새로운 범주의 확장을 시간을 통해 구현한다. 이때 시간의 확장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유토피아 담론이다. 이것은 일종의 이성의 기획이었다.

한데 이성의 기획으로서의 유토피아는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종말과 더불어 영향력이 크게 감쇄되고 있다. 사이버스페이스로의 확장을 불러일으킨 디지털전자기술은 이해보다는 직관이 더 강한 소통능력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이성의 기획인 유토피아주의의 위상을 격하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감성이 소환되어 문명의 장치들을 왕성하게 재구조화시키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를 포스트구텐베르크 은하계라고 한다면, 이러한 새로운 은하계 도래의 징후가 눈에 띄게 부상한 시기가 바로 1990년대 이후다.

마지막으로 감성의 결정력이 확대된 요인은 신자유주의와 관련이 있다. 신자유주의는 기술로서의 지구화(globalization of technologies)의 전개와 함께 자본주의의 매트릭스 역할을 해왔던 근대국가의 족쇄가 풀리면서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지구적 자본운동의 이데올로기다. 한데 이 이데올로기가 극적으로 강화시킨 것은 무한경쟁의 문화다. 그리고 이 무한경쟁의 문화는 끝없는 자기쇄신의 소용돌이를 거의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장하였다.

하여 존재는 자기계발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성공에 대한 장밋빛 꿈이 일으키는 열정의 이펙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실패에 대한 예감된 공포가 만들어내는 절망적 몸부림이기도 하다.

이 둘은 상반된 듯이 보이지만 서로 얽혀 있는 서사구조를 지닌다. 신자유주의적 구원론은 바늘귀보다도 작은 문을 열어놓고 극소수의 승자에게만 보상을 약속한다. 그 승률이 극도로 낮으니 보상의 크기는 어마어마하다. 물론 상상속의 궁극적 성공에 도달하기 전에 마주하는 작은 현실의 성공들은 무수히 많다. 신자유주의 서사 속에서 이 작은 성공들은 궁극적 성공의 전조다. 한데 동시에 이 모든 잠정적 성공의 보상물은 언제 회수될지 모른다. 작은 성공들은 궁극적 성공의 예감을 낳지만 동시에 실패의 예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여 사람들은 승자의 달콤한 꿈을 꾸면서도 동시에 패자에게 덮쳐올 가혹한 징벌의 악몽에 시달린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몸이 다 소진(burning out)되도록 자기 쇄신을 위해 전력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심혈관계질환, 당뇨병, 위장질환, 그리고 우울증 같은 소진성 질환에 몸과 정신이 노출되어 있다. 건강 염려증은 단지 복지의 확대로 인한 건강검진의 활성화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무수한 사람들로 하여금 몸과 정신의 질병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쉼 없이 일하게 한다. 1990년대는 바로 그러한 소진성 질환의 위기가 빠르게 전 세계로 확산되던 시기다. 이런 상황에서 다친 감성을 치유하고 부정적 감성을 긍정적 감성으로 전환시키는 종교적 기획들이 확산되었다. 혹은 저 찌질한 일상을 한방에 뒤엎어버리는 전복의 정치(politics of subversion)로서의 메시아주의가 거세게 불타올랐다. 이러한 메시아주의는 병든 몸을 낫게도 했고, 병든 체제(국가라는 몸)를 무너뜨리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한국사회는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의 금융대란을 거치면서 신자유주의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고, 이후 신자유주의의 가장 난폭한 자장 안에 포함된 사회가 되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희망보다는 절망의 더 깊게 빠져들었고 몸과 정신이 병들었으며, 사회도 회생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질병의 수렁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해방을 갈구하며 감성 과잉의 종교에 빠져들거나 종교적인 것의 수행에 몰두하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는 바로 그러한 시대였다.

 

사회적 영성

 

앞에서 개념적인 가설적 정의를 시도할 때 자기초월을 지향하는 종교적 감성의 정치를 영성이라고 했다. 여기에는 기성종교나 포스트모던 신종교, 그리고 종교적인 것들에서 시도되는 감성 과잉의 기획들이 다루어졌다. 한데 최근 이러한 영성 현상의 폭발적 확산을 나는 세 가지로 요약한 1990년대적 사회변동과 연결시켜 이야기하였다. 그것을 요약하면 감성 과잉의 사회에서 종교적 감성의 정치가 분출한 것이라는 얘기다.

감성의 추동력이 현저히 강화된 사회에서 종교 혹은 종교적인 것의 차원에서 감성을 정치화하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가치에 있다. 즉 기존의 종교적 감성의 정치가 과연 타당한가에 관하여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영성 현상은 두 가지 범주의 종교적 감성의 정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집단적 영성이고 다른 하나는 개체적 영성이다. 전자는 외면적 요소를 강조하고 후자는 내면적 요소를 강조한다. 그리고 전자는 매우 동적인 양상을 보인다면 후자는 정적이다. 한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집단 영성의 수행적 서사들이 우리와 구별되는 외부를 으로 지목하고, 심지어 우리 내부에서 을 색출하려고 하고 그렇게 색출된 을 향하여 강한 공격적 태도를 두드러지게 보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개체적 영성은 외면 세계가 벌이는 피()와 아()의 대결 구도에서 벗어나 내면의 전쟁에 몰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때 내면의 전쟁의 수행자는 우리와 우리의 외부에 대해 무심하다.

그런데 이 둘은 이와 같은 매우 상반된 양상을 보이지만, 기실 하나의 뿌리를 가진 두 개의 가지다. 왜냐면 두 개의 영성 현상은 (‘우리) 자기 중심적 이분법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타자성은 자기초월을 향한 영성 수행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 아니 심상(心象)에서 타자성의 제거가 영성 체험의 비결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행법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일정한 성과를 이룩했고, 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한데 이는 그리스도교가 애초에 발전시켰던 영성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적 영성은 타자인 신과의 만남, 그로 인한 두 존재의 유착을 언표화한 것이다. 유착이라 함은 두 존재가 하나로 붙어버림으로써 서로가 각각 변하게 되는 형질변화의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상호적 자기초월의 체험이다. 더욱이 그리스도교는 그 타자가 저 높은타자적 공간의 존재가 아니라 가장 낮은타자적 공간의 존재다. 신이 지극히 낮은 그곳으로 도래했다. 이것은 단지 방향이 바뀌었다는 것의 의미를 넘어 신의 도래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지극히 높은 타자라는 속성은 그리스도로 인해 사라졌다. 그 신은 이미 지극히 낮은 타자가 되었다. 요컨대 그리스도교 영성은 지극히 낮은 타자와 나/우리의 만남, 그로 인한 두 존재의 자기초월적 유착을 가리키는 감성적 언표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영성 현상에서 타자성의 몰락과는 다른 가치의 영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것을 가리키는 용어가 사회적 영성이다.

이러한 사회적 영성의 전범(典範)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울이다. 바울의 시대, 그리고 바울이 활동한 공간은 감성 과잉의 시공간이었다. 하여 그의 주위에는 환상, 환청, 방언, 몰아현상적 예언, 마술적 병치유 등 영성 현상이 만연하고 있었다. 여기서 영성의 수행자들은 비상한 감성의 흐름을 조절함으로써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타자를 압도하거나 배제하는 데 그 은사(카리스마)적 능력을 활용했다. 우리 시대의 기독교적 은사 수행자들처럼 말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영성의 은사주의적 서사 대신에 사랑의 영성을 제시한다. 이때 그가 말하는 사랑의 영성은 타자됨의 영성을 의미한다. 즉 타자를 자신의 몸으로 초대하여 그가 되고자 하는 것, 그러한 배려의 태도로 시작해서 끝맺는 수행의 과정이 바로의 바울의 주장하는 영성이었다.

한데 이러한 영성의 수행은 바울 자신에 의해서 위기에 빠졌다. 특히 영성의 수행자가 된 여성을 대할 때 그는 타자됨의 영성을 보이지 못했다. 오히려 여성의 영성을 순응적 영성으로 만들어 가부장적 교회로 포용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이러한 실패한 영성의 역사는 그리스도교의 발전 과정에서 되풀이되었고 심화확대되었다. 이후 신학의 역사는 영성을 제도 순화적인 것으로 순치시켜온 담론의 발전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한복음이 말했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영의 도발성이 무력화되는 제도의 역사인 것이다. 교회의 신앙 제도는 그렇게 영성을 순치시키려는 역사였다. 이는 영성 현상이 일으키는 제도에 대해 불안 요소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제도에 대한 발본적인 개혁의 영적 동력도 사라졌다. 하여 영성 현상이 전 세계에서 전대미문의 성장을 일으킬 만큼 왕성했던 한국교회는 그 영성을 통해 조금도 개혁되지 못했다.

하여 오늘 우리는 사회적 영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탈신학적 탐험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다. 탈신학적 탐험이라고 함은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신학의 이름을 부여받지 못했으나 타자됨의 영성을 발굴하려는 탐험이고, 그리스도교 외부에서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영성과 계보학적 유사성을 갖는 종교적 혹은 비종교적 요소들을 발굴하려는 탐험이다.

동시에 사회적 영성의 두 번째 과제는 탈신학적 탐험에 의해 발굴된 영성들에 이름을 짓고 신학적 서사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재신학적 탐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신학은 배타적 그리스도신학이 아니라 타종교, 타문화의 신학, 아니 타자성의 신학이다.

마지막 과제는 사회적 영성 담론을 실천의 범주로 재해석하는 데 있다. 그것을 우리는 수행으로서의 사회적 영성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것은 예배 같은 종교적 수행과 사회적 저항 같은 정치적 수행, 그리고 매일의 삶에서 영성을 실천하는 일상적 수행을 포괄한다.

말했듯이 사회적 영성은 타자됨의 영성이다. 한데 신자유주의가 만드는 세계의 외부는 우리와 격리된 어떤 미지의 장소가 아니라 나/우리의 일상적 삶 한편에 있다. 그런데 나/우리의 바로 옆에 있는 그 장소를 우리가 볼 수 없게 하는 데 신자유주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앞서 말했듯이 영성 현상은 그러한 은폐의 도구로 작동하기도 한다.

반면 사회적 영성은 이러한 타자성의 탈은폐를 향한 수행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곳을 다시 만남과 소통의 장소로 바꾸려는 실천을 추구한다. 하여 그 과정에서 나/우리가 바뀌고 저 배제된 타자가 변화하는 것을 추구한다. 그 과정이 바로 우리와 타자가 함께 체험하는 구원이고 해방이다. 사회적 영성이 추구하는 자기초월은 이러한 구원과 해방의 과정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