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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서바이벌의 체계를 척결하라 - 사회적 타살로서의 자살에 관하여

이 글은 [공동선] 2015년 03-0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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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바이벌의 체계를 척결하라

사회적 타살로서의 자살에 관하여

 

 

 

 

 

 

 

5계명, 그 속에 담긴 복잡한 성서적 법현실

 

살인하지 말라!’ 너무나 단순 명백한 법률처럼 보인다. 누가 살인을 정당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우 아벨을 죽인 카인(창세기 4,8)은 그 살인의 대가로 톡톡한 벌을 받았다. 그런데 성서가 살인을 항상 징벌하는 것만은 아니다. 아들을 죽일 뻔한 아브라함(창세기 22,10)의 이야기는 자칫하면 신 자신이 살인교사자가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다행히도 이 이야기는 신의 급작스런 제지로 비속살해가 저질러지지 않았음을 전한다. 하지만 그래도 문제는 잘 봉합되지 않는다. 왜냐면 여기에는 신은 살인해도 된다는 생각이 암암리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성서 속에서 그리고 역사 속에서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무수한 살인들의 배후가 되었다.

한편 고대 이스라엘의 여인들은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고 노래했다.(사무엘기상 18,7) 이때 살인의 대상이 적군이니 살인 금령의 예외가 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군인에게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금령을 강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감하게도 이 텍스트는 유일무이의 정전(正典, Canon)으로서의 성서가 되었다. 즉 더 이상 문제의 본문은 이스라엘 민족 영웅담의 일부에 그칠 수 없다. 그것은 모든 인류의 진리에 관한 문서의 일부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든 유대교든 이슬람교든 적에 대한 무수한 살해의 전력을 가진 종교로서, 또 종종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의 배후가 되는 종교로서, 세 종교가 공히 정전으로 삼는 성서에 속한 이 구절은 살인 금령의 문제와 관련하여 비판적인 점검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성서 속의 설화들은 정전으로서의 위격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다 비판적인 신학적 재해석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성서가 정전이라고 볼 경우에 성서 속 설화들의 살인에 대한 무심함은 심히 문제적이지만, 그 설화들의 역사적, 문화적 현실의 차원에서 보자면 이해할 수 있는 구석이 있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이렇다 할 수단이 없을 때 극약 처방으로 인신제사가 활용되었던 고대의 관행을 단순히 살인금령으로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이것은 일종의 큰 희생을 막기 위해 작은 희생을 지불하는 공리적 선택으로도 볼 수 있다. 지지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윤리적 잣대로 비난할 수만도 없는 문제다. 또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투 상황에서의 살인도 비슷한 사정을 갖고 있다. 즉 성서 속 설화들은 복잡한 현실을 무시하고 살인 금령을 일방적으로 적용하기가 용이한 일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서 속의 법전은 어떤가? 결론부터 말하면 성서의 법전들에서도 살인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고의살해는 극형에 처할 범죄로 간주된다.(민수기 35,21) 현대 형법의 ‘1급살인(murder)이 가장 중한 범죄의 하나로 취급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데 극형에 처해야 할 중한 범죄임에도 고대사회에서 살인은 매우 많았고 그 처벌은 매우 미미했다. 왜냐면 범죄자는 가문이나 씨족의 보호막 안에 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서 당국이 대행하지 못하는 처벌을 사적으로 대체하는 일이 빈발했고, 그것을 피의 복수라고 부른다.(vendétta, 민수기 35,25) 또한 가문이나 씨족의 명예를 훼손하는 자, 특히 그런 여성에 대한 가부장 혹은 씨족장의 살해도 빈발했다. ‘명예살인이라 부르는 이 고의살인의 한 양상은 성서 속에도 나오는데, 야곱의 아들 유다는 며느리 다말이 매춘행위를 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끌어내서 화형에 처하여라!”고 명하였다.(창세기 38,24) 이런 피의 복수를 통한 살해나 명예살해는 고의살해임에 분명하지만, 아마도 십계명의 제5계명은 이것들을 포함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요시야 왕실은 피의 복수가 남용되는 것을 제한하기 위한 법적 조치를 하고 있다. 즉 살인사건이 과실치사일 경우 가해자가 피살자 가족과 친족에 의해 피의 복수로 희생당하지 않도록 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도피성제도가 그것이다.(신명기 4,41) 이곳으로 도주하면 누구도 그를 가해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또한 가해자가 명료하지 않은 살해의 경우, 그 사건을 둘러싸고 가문 간에 벌어질 수 있는 피의 복수를 막는 것도 필요했다. 하여 그 사건은 누구도 책임이 없음을 공시함으로써 복수의 악순환을 예방하고자 했다.(신명기 21,1~9) 반면 존속살해자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극형에 처했다.(신명기 21,18~21)

이와 같이 살인하지 말라는 법령은, 흔히 생각되듯, 간단명료한 것이 아니었다. 기원전 7세기의 신명기 법전에서조차 그 복잡한 현실이 고려되고 있었다. 십계명은 간단명료한 금지령처럼 보이지만, 그것의 배후가 되는 신명기법전은 이러한 간단치 않은 현실을 함께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십계명 속에는 동시대의 살인에 관한 문제인식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5계명을 읽는 오늘 우리에게는 살인에 관한 어떠한 법 현실이 도사리고 있을까?

 

우리 시대로 걸어 나온 제5계명

 

현대사회로 오면 살인의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해진다. 물론 고의살해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중한 범죄에 속한다. 하지만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해나 상해치사, 과실치사, 그리고 정당방위로 인한 살해 등 극형에서 무죄에 이르는 살인에 대한 다양한 법적용 항목들이 있다. 또 살인교사나 위계위력에 의한 살해 등 간접살해이지만 중형에 해당하는 범죄와, 자신을 죽여 달라는 부탁을 받아들여 살해하는 촉탁에 의한 살인 같은 직접살해이지만 일반 살인보다 덜 중하게 취급되는 살해도 있다. 뿐만 아니라 자살자를 도와준 자살방조나 자살 의사가 없던 이를 자살하게 하는 자살교사도 살인범죄의 새로운 항목들이다.

낙태나 존엄사 등은 가장 논란이 많은 살해 항목에 속한다. 이것들은 어떤 사회들에는 형법상의 살해에 해당하고, 다른 사회들에서는 법적으로는 무죄로 간주되는 가운데 종교적 혹은 도덕적인 격렬한 논쟁의 주제로 자리잡고 있다.

한편 아직까지 주류적 관점은 아니지만 점차 부상하는 것으로, 사람들과 인격적, 감성적 친밀성을 교류하는 반려(伴侶) 존재들의 생명권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리고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 미래사회의 생명권에 관한 주제로 부상하고 있는, 인조인간을 뜻하는 안드로이드(Andriod)의 생명권 혹은 비신체적 존재의 생명권[각주:1] 등도 다뤄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가 약화 내지 해체되고, 존재들 간의 선택적으로 관계가 긴밀해지고 있는 현재의 인식론적 추세를 반영한다. 즉 현대사회에서 혈연적 공동체나 지연적 공동체가 이미 심각하게 붕괴되고 있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반려동물이나 식물과의 교감은 가족이나 이웃보다 훨씬 더 긴밀하게 되었다. 또 미래사회에는 안드로이드가 새로운 반려존재로 부상할 수 있으며 심지어 동물이나 식물이 할 수 없는 새로운 행위주체로 부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생명권이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일 수 없다는 생각이 대두했다. 나아가 사이버스페이스가 가장 중요한 활동의 장이 되고 있는 사회에서 신체는 점점 존재를 결정하는 핵심적 요소로서의 위상을 상실하고 있고, 미래에는 신체 없는 존재의 생명권이 새로운 존재의 결정적 구성요소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각주:2]

그렇다면 이런 문제들이 진지하게 고민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5계명속에 내재된 복잡한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이것이 지금 여기로 걸어 나온 제5계명에 대한 우리의 문제제기다.

 

자살, 가장 심각한 자기살해

 

이 글에서 주목할 주제는 자살이다. 살해 금령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에서 자살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일찍부터 자살이 자기 살해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왔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이론의 태두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자살을 공격성이 자기 자신을 향해 가해진, 일종의 전도된 살해라고 말했다.(<슬픔과 우울증> in [무의식에 대하여]) 또한 교회는 훨씬 이전부터 자살자기 살해의 관점에서 보면서, ‘살인하지 말라라는 금령을 어긴 행동으로 간주했다. 이런 자살 반대 교리 탓에 가톨릭이나 개신교 성직자들이 자살자들의 장례미사 혹은 장례예배를 거부하는 경우도 적지 아니 있었다.

한데 우리가 자살을 주목한 더 결정적인 이유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살인행위가 바로 자살이기 때문이다. 통계청의 2012년 사망원인에 대한 조사에 의하면 암, 심장질환, 뇌혈관질환에 이어 자살이 네 번째를 차지했다. 그해 전체 사망자의 무려 5.3%(14,160)가 자살자로, 하루 평균 39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2013년에는 더 늘어서 하루 평균 40명이 자살했다). 알다시피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이 10년간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더욱 심각한 것은 자살증가율 또한 이들 국가 중 제일 높다는 점이다. 현재 한국사회의 살인율은 OECD 국가들 가운데 6, 살인증가율은 9위라고 한다. 이 순위도 매우 높지만 자살은 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정도이다. 해서 우리는 자살이 살해 문제에 관한 주제 중 첫 번째 논점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교, 자살에 대해 적대적인 종교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자살에 대해 적대적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분명한 것은 성서의 살인 금령에는 자살 문제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서에 묘사된 대표적인 자살의 예는 다음에 열거한 몇 개를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적에게 죽임당할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사무엘기상 31,4). 삼손은 자신이 묶여 있던 블레셋 신전 기둥을 무너뜨려 무수한 블레셋인들과 함께 그 돌무더기에 깔려 죽었다.(사사기 16, 29~30) 그밖에 제1성서(구약성서)에 나오는 다른 자살자들로는 다윗을 살해하려다 실패한 뒤 자살한 아히도벨(사무엘기하 17, 2~3), 이스라엘국에서 쿠데타에 성공했다가 7일천하로 끝나버린 뒤 자살한 시므리(열왕기16, 18~20) 등이 있다. 한편 제2성서(신약성서)에도 몇 번의 자살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예수는 느닷없이 예루살렘을 향하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임당할 것을 세 번이나 예고했다.(마가복음 8,31; 9,31; 10,33~34) 그것은 일종의 자살행위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하여 예수운동은 처음부터 무수한 순교자들과 더불어 발전했는데, 순교자 신앙은 권력에 의한 타살을 자발적 죽음으로 해석하는, 일종의 자살의 영성으로 이해하곤 했다. 성서는 이런 자살들 혹은 자살로 해석되는 행위들에 대해 살인 금령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한편 가룟 사람 유다의 자살(마태복음 27,5) 같이 성서가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자살도 있지만, 그때에도 자살은 그이가 지은 죄의 당연한 귀결이지 자살 자체를 살인으로 간주하여 비난하지는 않았다. 요컨대 성서에 나오는 많은 자살들은 살인 금령을 어긴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자살을 살인으로 해석하여 자살 자체를 잘못된 행위로 비판했던 대표적인 그리스도교 지도자는 5세기 교부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였다. 그는 자살할 권리가 인간에게는 없음을 강변했던 것이다. 한데 그가 자살을 비난한 맥락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다.

당시 아프리카에는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하는 도나투스파 교회들이 로마 교회와 대립하고 있었는데, 이는 이 지역의 반로마 기조와 결합되어 열렬한 대중운동으로 번져나갔다. 요컨대 이른바 도나투스 논쟁의 내막에는 로마에 의해 혹독한 착취를 당하고 있던,[각주:3]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하는 북아프리카 지역 대중의 반로마 감정이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때 열광적 도나투스파 사제들은 순교를 불사한 반로마 항쟁을 부추겼고, 무수한 대중이 이에 열렬히 호응했다. 이들의 운동은 일종의 천년왕국운동의 양상을 띠면서 격렬하고 폭력적인 저항적 테러 행위를 동반했다. 반면, 아프리카 출신이지만 로마 황제와 로마 교회 편에 섰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파 사제들이 주장한 순교를 자살이라고 격하했고, 자살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권리가 아니므로 신의 구원을 결코 받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로마 제국과 교회는 도나투스 운동과 그 대중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그리고 그들의 신학과 신앙을 더 이상 존립할 수 없을 만큼 철저히 파괴했다. 이것은 도나투스 파의 종말을 의미했지만, 이 지역의 가톨릭화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대중은 빠르게 그리스도교로부터 이탈하여 그로부터 불과 두 세기가 못된 7세기 말에는 거의 전적으로 이슬람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자살 반대론은 도나투스주의에 대한 이론적 공격의 의미를 넘어서 신학적 일반론으로 격상되었다. 하여 이제 자살 문제는 자기 살인으로 해석되었고, 자살자는 교회의 아무런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교리는 잘못 자리잡은 교리다. 이 교리의 출발과 초기 전개는 정치적 야바위에 가까웠고, 그것이 성찰적으로 재해석되기 전에 교리적 권위를 부여받았다. 하여 경직된 자살 금지 교리는 자살자를 추모의례의 대상에서 제외시켰고, 나아가 자살한 시신을 훼손하고 유가족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관행을 야기시키는 신학적 알리바이가 되었다.[각주:4] 그 결과 교회는 자살의 사회적 현실을 망각하게 되었고, 사회 전체로 하여금 자살한 사람들의 고통, 자살할 만큼 극한의 고통에 시달리는 대중의 고통을 대면하지 못하게 했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사회는 자살자가 왜 그런 행위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을 묻기 시작했다. 드디어 자살을 사회적 타살이라는 보는 관점이 생겨났던 것이다. 16세기의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7~18세기의 반교회적 계몽주의 사상가들인 루소(J. Rousseau), 볼테르(Voltaire, 본명 François Marie Arouet), (D. Hume) 등을 거쳐 이러한 논의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에밀 뒤르켐(E. Durkheim)자살론(1897)이 출판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교회와 그리스도교 신학은 자살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좀처럼 철회하지 않았다. 다만 본훼퍼(Dietrich Bonhoeffer)나 칼 바르트(Karl Barth)처럼 참여를 강조한 현대의 신학자들은 타인을 위한 의로운 죽음으로서의 자살에 대해서는 비판적 태도를 유보하였다. 그렇지만 바르트를 포함해서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은 의로운 죽음 이외의 대부분의 자살에 대해서는 비판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하여 대부분의 교회와 그리스도교 신학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처럼 자살 또한 인간의 자기 존엄성의 한 표현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학이 근대 이후의 인류 사상사의 발전과 두루 대화할 수 없는 사상적 편식 상황에 놓이게 했다. 결국 무수한 실존적 자살들이 야기한 담론 현상들을 진지하게 해석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한데 더욱 심각한 것은 자살을 긍정과 부정의 이분법의 틀로만 바라봄으로써 수많은 자살들의 실제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테오도르 레싱(Theodor Lessing)이 지적한 것처럼 사회적 배제를 체험한 이들은 배제를 내면화하여 자기 자신을 증오한 나머지 자살을 선택하곤 한다. 즉 많은 자살들은 사회적 요소들이 야기한 폭력의 체계 아래서 스스로 무너지고 정신이 파괴된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것이 옳은 선택인지 아닌지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 점은 자살이 어느 사회보다도 심각한 문제로 작동하고 있는 오늘 우리사회에서 특히 중요하다. 즉 교회와 신학은 낡고 경직된 자살 교리의 옷을 벗고 사회를 직시하면서 자살을 이해함으로써 제5계명의 재해석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 서바이벌 사회

 

한국사회에서 자살이 급증한 것은 1997년을 기점으로 한다. 통계청의 연도별 자살사망자 자료를 보면 1997년 이전에는 인구 10만 명당 사망자수가 10명 내외를 오가다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다음해에는 18.4명으로 급상승하였고, 2008년 금융대란을 겪은 다음해는 31.0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이런 상승추세는 대체로 계속되어 201131.7명으로 정점을 찍었고, 그 이후 다소 감소했지만, 여전히 상승세에 있다.

좀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남자, 여자, 청소년 모두 육체적이거나 정신적 질환으로 인한 자살자의 수가 가장 높았다.[각주:5] 그 다음의 요인들로는 경제문제와 가정문제가 뒤따른다.[각주:6] 그런데 신체적 만성질환과 사회계층 간의 상관성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하위계층과 저학력층으로 갈수록 질환으로 인한 위험의 정도가 현저히 높게 나온다. 또 정신질환의 경우도 하위계층과 저학력층에서 현저히 더 많았다. 그리고 가정불화도 저소득층에서 훨씬 더 높게 나타났다. 요컨대 사회 전체에서 자살은 경제적 위기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자살자의 급증 시기가 1998년과 2009년이라는 사실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1997년과 2008년의 경제적 대란 상황이 최근 한국사회의 자살의 가장 결정적인 이유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좀 더 큰 사회적 변동의 맥락에서 살펴보자. 1980년대는 민주화의 열망이 전 사회를 휘몰아쳤다. ‘1987은 민주화가 더 이상 꿈이 아니라 실현되어 가는 가능성,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의 질서가 중요하게 작동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상징적 시간이다. 하지만 그 10년 후인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한국사회는 처절한 생존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난폭하게 휘말려 들었다. 그 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진통 끝에 노사정 합의가 도출되었다. 그런데 그 합의는 결과적으로 고통분담의 합의가 아니라 고통전가의 합의였다. 여기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고용 유연성에 대한 합의다. 그때부터 우리사회는 중도 퇴직자가 급증했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수 또한 빠르게 증가했다. 이러한 고용상의 위기는 그해 이후 크게 상승한 빈곤율의 주된 이유였다. 그리고 1997년과 그 직후 속출한 자살자의 상당수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빠르게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이들 가운데서 나왔다.

모두의 평등’, ‘모두의 행복이라는 민주화 시대의 집단적 가치는 산산이 무너졌다. 바로 그때 우리사회를 뒤흔든 것이 이른바 부자 되기 열풍이었다. 자살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부자 되기 경제학’, ‘부자 되기 심리학에 몰두했다. 사람들은 노동과 휴식 시간 가리지 않고 갖가지 재테크에 열을 올렸고, 모든 여력을 있는 대로 다 가동하여 스펙 쌓기에 전념했다. 남들이야 어찌되든 자기 자신만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열망이 사람들의 생각을 장악했던 것이다. 바야흐로 서바이벌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MB 정권의 탄생은 그러한 부자 되기 열풍의 절정을 보여준다. 이제 도덕도 가치도 공동체도 필요 없고, 단지 성공적으로 부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만이 관심꺼리였다.

그렇게 MB 정부의 시간은 흘렀다. 한데 그 5년 사이 이러한 열풍은 절망으로 전도되었다. 그 미친 서바이벌 게임을 거친 뒤 사람들은 공포감에 휩싸여 버렸다. 현재를 살아갈 힘도, 노후를 기대할 희망도 몰락했다. 비정규직으로 추락하는 것에 대한 공포, 일터에서 퇴출되는 것에 대한 공포, 가족해체의 공포, 질병의 공포, 빈곤의 공포 등등, 온갖 공포들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제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생존에 대한 공포. 사회는 공포에 민감해졌다. 그러자 사회적 공포감에 기생하는 시스템이 발전한다. 매스미디어는 각종 안보 파산의 공포를 유포시켰고, 보험사는 건강과 재산의 파산 공포감을 유포시켰으며, 심리상담가들은 정신의 파산 공포감을 유포시켰고, 종교는 세계 파멸의 공포감을 유포시켰다.

공포는 존재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었다. 자살 증후군은 바로 이런 서바이벌의 종언과 함께 사람들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다. 하여 자살은 곧 사회적 타살의 결과이며, 우리가 만들고 있는 이 저주의 사회는 생명 파괴의 세계이기도 하다.

 

5계명 다시 읽기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다시 주목하게 된다. 무수한 살인 중 가장 심각한 살인으로 대두한 자살의 문제가 간과할 수 없는 제5계명에 대한 재해석을 요청하고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최근 급증하는 자살의 문제는 경제적 양극화와 밀접히 관련된다. 28의 사회, 아니 199의 사회에서, 저 극심한 양극화 현상이 바로 자살의 직접적 가해자다. 그리고 이 양극화와 맞물린 공범들, 서바이벌 사회의 시스템과 그것이 초래한 절망, 바로 이것들이 많은 이들이 생명을 스스로 끊게 한 자살교사범이다. 그렇다면 제5계명을 지키라는 신의 명령을 우리는 어떻게 실천해야 할 것인가? □ 

  1. 1982년에 상영된 SF 영화의 고전인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는 벌써 안드로이드의 생명권 문제를 다루고 있다. 또 시로 마사무네(伽姫草子)의 원작을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든 오시이 마모루(押井守)의 〈공각기동대〉(攻殻機動隊, Ghost in the Shell, 1995)는 신체 없는 존재의 생명권을 이야기한다. [본문으로]
  2. 이것은 살해가 현실세계에서 신체나 정신에 치명적인 상해를 가함으로써 생명을 잃게 하는 행위만이 아니라,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치명적인 상해 행위로 확장되어야 함을 뜻한다. 이러한 비단 미래 사회의 일만은 아니다. 최근 사이버 왕따(cybermobbing)가 현실세계에서의 왕따보다 더 치명적이라는 연구가 제기된 바 있다. [본문으로]
  3.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카르타고를 더 이상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했고 학살했다. 그렇지만 한 세기 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황무지가 된 이 도시를 다시 재건하기 시작했고, 아우구스티누스 시절에 완성되었다. 이후 이 도시는 로마의 아프리카 수탈의 기지가 되었다. [본문으로]
  4. 교회의 자살 금지 교리는 자살한 자에 대한 야만적인 시신 훼손의 관행을 야기시켰다. 이에 대하여는 게르트 미슐러(Gerd Mischler)가 쓴 󰡔자살의 문화사󰡕를 보라. [본문으로]
  5. 단 청소년의 경우 육체적 질병으로 인한 자살은 상당히 적다. [본문으로]
  6. 단 청소년의 경우 남녀 간의 애정으로 인한 자살이 정신적 질환 다음으로 높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