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최형묵, 백찬홍 선생과 공저로 엮은 책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평사리 2007)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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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도구화에 대하여
평양대부흥운동의 영 대 성서의 영
평양대부흥운동과 한국교회의 성령 정치
올해는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양대부흥운동을 알지 못한다. 심지어 기독교인조차도 대다수가 퍽 낯설어 한다. 그럼에도 이 사건이 한국 기독교 형성사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는, 각종 기독교 학회들과 단체들, 특히 각 교단 총회 등 줄잡아 20여 기관에서 행사를 시행했거나 준비하고 있다는 데서 드러난다. 또 한국 기독교를 대표한다고 자부하는 세 단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한국교회연합을위한교단장협의회(교단장협)가 오는 7월 8일에 연합으로 100주년 기념행사를 치르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이는 이 기억의 정치 속에 교회 전체를 동원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많이 회자되는 ‘어게인 1907’이라는 슬로건은 각종 행사의 취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즉, 평양 대부흥 사건을 오늘에 되살리자는 것이다.
도대체 이 사건이 함축하는 내용은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을 되살리자는 것일까. 짧은 지면에서 정리할 만큼 간단하지는 않지만, 언급치 않고 논지를 펴는 것은 뜬금없이 비추어질 듯하여 간략히 나의 관점을 요약해보겠다.
이 사건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짚어야 함에도 거의 주목받지 못하는 것이 ‘러・일 전쟁’이다. 전쟁의 주요 무대는 중국 여순 항 지역이지만, 조선 또한 전쟁의 바로 배후지라는 점에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고통을 겪은 곳은 바로 대부흥운동의 진원지인 평안도 지역이었다.
일본군을 따라나선 서양 종군기자들의 눈에 포착된 광경은, 수많은 조선 대중이 일본 군대에 의해 징발되어 강제노역에 동원되는 모습이고, 한겨울인데도 사람들이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버려서 마을들이 텅 비어 있는 모습들이다. 조선말을 알아듣지도 관심도 없던 서양 기자들의 시선에는 이러한 광경이 의아했 던 모양이다. 하지만 무심한 기자의 묘사에도 군대 폭력에 대한 조선 대중의 공포가 얼마나 큰 압박이었는지가 암시되어 있다.
[그림] 프랑스 언론인 비고는 1904년 일본이 청나라를 물리치고 러시아를 향해 진군하는 당시의 정세를 만화로 그리고 있다. 여기서 일본 군대는 러시아를 공격하지만 짓밟히는 건 조선의 민간인이다.
[사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저항하는 조선인을 무수히 처형하였다.
1904년 초, 한겨울에 시작된 전쟁은 매서운 바람을 쏟아내는 산속으로 사람들을 몰아냈다. 북진하는 일본 군대를 맞이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대중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저들은 사람들을 징발할 뿐 아니라, 가옥을 약탈하고 불사르고 여인들을 성폭행하며 저항하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는 등, 군대 폭력은 전쟁 중인 2년간 자제됨 없이 자행되었다.
물론 2년간 지속된 전쟁 기간 내내 숨어있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자국의 양민들을 보호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맨몸으로 전쟁을 견뎌내야 했던 이들은 군대의 폭력, 추위, 전염병, 기근을 스스로 감내해야 했다. 이때 많은 이들이 교회로 몸을 위탁하며 들어갔다.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교회는 그나마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안전망을 제공해 줄 수 있었다. 일본 군대도 주로 미국인 선교사들의 공간인 교회를 함부로 할 수 없었던 탓도 있었고, 교회에서는 최소한의 밥이나마 먹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양상을 선교사들은 ‘쌀신자’라고 비하하기도 했다. 하여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은, 교회의 대부흥은 2년 뒤인 1907년 대부흥운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로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산물이었다는 점이다. 각종 기록들을 보면 이 시기에 교인수가 급격히 늘었고, 교회당 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그런데 선교사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것은 결코 부흥이 아니었다.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이 찾아오는 장소가 된 것에 기뻐하고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선교사들은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선교사들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이 교회로 왔다는 게 아니라, 어떻게 이들을 기독교 교리에 순응하도록 만드느냐에 있었다. 교회 지도자들이 그토록 열렬한 기도회를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런 취지에서였다.
아무튼 전쟁이 끝나고 일상 공간을 침투한 군대는 사라졌지만, 남겨진 사람들의 터에서 폭력의 시간까지 철수한 것은 아니었다. 몸과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고스란히 남았고, 군대가 가하는 폭력은 사라졌지만, 폭력에 대한 고통과 증오는 계속되어, 상처 입은 사람들 스스로를 폐허로 만들었고 또 서로를 할켜댔다.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교회 안으로 몰려들어온 이들이 도덕적 아노미 상황에 처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공동체는 바닥까지 무너진 인생들로 가득한 공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전후 평안도 일대는 고통이 범람하는 장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당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각자의 상처들, 뒤틀린 영혼들이 교회 안에서 숱한 문제를 일으켰던 듯하다.
교회 지도자들은 이런 상처를 치료하는 데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다만 부풀려진 교세에도 불구하고, 상처의 뒤틀림으로 인해 야기되는 숱한 갈등과 다층적인 욕구을 소화하지 못하는 교회에만 관심을 가졌다. 해서 교회 지도자들이 한 것은, 사회적 상흔을, 그 원인을 찾아 보듬기보다는 골방으로 들어가 기도회를 갖는 것이었다. 걱정이 큰 만큼 기도는 절절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기도의 현장에서 갑자기 불이 일듯 마음이 뜨거워지고, 회개운동이 일어난다. 이른바 ‘성령 체험’이 기도자들을 휩싸 안아 버린다. 하나둘, 그리고 점점 많은 이들이 이 열광적 분위기에 얽혀든다. 곧 공동체 전체를 아우르는 회개와 도덕 각성 운동이 벌어졌다. 바로 이것이 평양대부흥운동이었다.
뜨거운 집회의 열기는 사람들의 다양한 상처와 갈망들을 봉합하기에 충분했다. 나아가 하나의 열망으로 변환된다. 물론 사람들의 상처는 해소되지 않았다. 교회는 애초부터 상처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교회가 가졌던 관심은 일체감이었고, 이질성, 혼란스러움의 제거였다. 하여 다양한 욕구들로 범람하던 공동체의 이질성이 제거되고, 커다란 신앙적 공통감각이 광적으로 형성되었다. 물론 다른 생각이 자리잡을 공간은 극도로 협소해졌다. 선교사 중심의 헤게모니는 확고해졌고,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은 추방당하거나 스스로 떠나야했다. 그리고 공통감각으로 무장한 뜨거운 신앙의 열사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상처만큼이나 강한 열기를 선교의 열정으로 쏟아냈다. 이것은 교회의 양적팽창으로 이어졌다.
[사진] 평양 대부흥운동의 진원지인 장대현교회의 집회 광경
[사진]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기념포스터(2006)
하여 오늘날 ‘어게인 1907년’을 외치는 이들은 교세가 위축되고 사회적 신망이 퇴락하는 오늘의 위기상황에서, 교회를 다시 통합하고 복음화가 맹렬하게 활성화되는 성령의 역사(役事)를 도모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런 점에서 이 ‘1907년 대부흥운동’은 한국기독교의 ‘초석적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 개신교회는 비로소 나름의 독특성을 지니면서 발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특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만, 여기에서는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요소 하나를 지적하고자 한다. 그것은 이 사건의 기억이 기독교 지도자들과 열성 신자들의 영혼에 깊이 각인되어서, 비록 사건 전말을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이 사건에서 획득된 신앙과 삶을 바라보는 기독교 공통의 시선이 형성되었고, 다른 상황에서 현실을 해석하고 대처하는 데에 이 시선이 강력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 교회의 신앙은 다양한 욕망, 다중적 주체를 참지 못하는 심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다중성을 조정하는 합리적 방식보다는, 카리스마적 지도력에 의한 통합을 선호하게 되었다.
한데 카리스마적 지도력은 기본적으로 ‘제도형성적’이라기보다는 ‘제도해체적’인 권위를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왕국 시대 이전 사회인 사사시대에 기드온, 아비멜렉, 사울의 경우에서 보듯 권력은 지속성을 추구한다. 반면 카리스마적 지도력은 권력 승계를 거부하고 나아가 카리스마적 지도력조차도 인물 중심적 차원보다는 사태 중심적 차원을 추구하는 경향을 지니게 되었다.
요컨대 한국 교회의 신앙은 카리스마적 권력의 재생산을 선호하게 된다. 오랫동안 독재체제와 밀월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한국 교회와 독재체제가 권력에 대한 태도에 있어 유사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전쟁의 상처, 사회적 상처가 깊은 곳에서 알 수 없이 넘실거리는 내면의 증오들을 한 데 모아 다른 열기로, 한 편은 선교의 열기로, 다른 한 편은 산업화의 열기로(이 두 열기는 모두 양적인 팽창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흥분제였다) 전환하는 데 성공하면서 더욱 견고해진, 즉 이러한 성공의 계기이자 결과로 확고해진 체제라는 점에서 그렇다. 또 이 체제의 동력은 다양한 상처들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말로 통합해내는 광적인 흥분 상황을 연출하는 신비한 힘에 있다. 교회는 그것을 ‘성령’이라 했고, 국가는 ‘기적’이라고 했다. 또한 이러한 신비한 힘을 실행에 옮기는 현실의 주역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였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민주화는 한국 교회의 신앙의 위기처럼 인식되는 내적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전쟁의 상흔으로 가득했던 공동체의 대중은 각자 나름의 ‘한’을 기억하며 이를 극복하는 희망의 공동체를 신앙 속에서 기대했다면, 평양대부흥운동은 그러한 다중성을 ‘획일성’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한 사건이다. 성공했다는 것은 하나의 욕망 속으로 다중의 주체들을 흡인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통합의 원리인 하나의 욕망, 곧 하나의 믿음, 하나의 교회에 대한 시각은 누구의 관점일까. 언술 형식상으로 보면, 당연히 하느님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을 대변하는, 하느님의 영을 받은 존재인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하나의 믿음에 맞는 시선적 주체다. 그리하여 그의 시선 아래 대중을 동원할 수 있게 한 것, 바로 이것인 평양대부흥운동에 담긴, 오늘의 교회가 끊임없이 되새김질하고자 하는 기억의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환, 다중성이 획일성으로 전환되는 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성령이 있기 때문이다. 즉 성령을 누가 전유하느냐, 누가 성령의 시선을 대변하느냐의 문제가 카리스마적 지도자 중심으로 해소된 것, 그것이 바로 평양대부흥운동이 구현한 ‘관점의 정치’ 내용이다. 하여 성령은 이러한 관점의 정치를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관점의 정치를 위한 ‘성령의 도구화’, 이것이 평양대부흥운동을 둘러싼 기억의 정치가 가지는 또 다른 문제점인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는 어떤가. 이 글의 과제는 한국 교회의 신앙사에서 도구화된 성령이, 과연 성서에 담긴 신앙의 준거들과 얼마만큼 연계된 것인가를 묻는 데 있다.
재1성서(=구약성서)와 르아흐, 그리고 그 속에 함축된 영의 정치
‘영’에 해당하는 재1성서의 낱말인 ‘루아흐’(רוח)는 378회 언급되어 있다. 원래 이 낱말은 바람, 특히 광풍 같이, 삶의 일상을 깨뜨리는 바람 같은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이사야서〉 17,18의 “산에서 ‘루아흐’에 흩어지는 겨와 같고, ‘쑤파’(폭풍) 앞에 흩날리는 티끌과 같은 것이다”라는 표현에서 루아흐는 야훼의 심판 날에 적(다마스쿠스)이 어떻게 파멸에 이르게 될지를 묘사하는 자연 비유어로 쓰인다. 그것이 신학적으로 발전하면서 은유적 의미로 사용되어, 하느님이 사람 마음에 불어넣어 주는 바람, 알지 못하는 어떤 기운 혹은 성향, 나아가 생명․숨과 같이 의미 확장이 일어났다.
야훼의 루아흐(영)가 기드온을 사로잡으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어 아비에셀 족을 모아 자기를 따르게 하고…….
―〈판관기〉 6,33
모든 생물의 생명이 하느님의 손 안에 있고, 사람의 루아흐(생명) 또한 그분의 능력 안에 있지 않느냐?
―〈욥기〉 12,10
그밖에 〈전도서〉 7,8 “참는 루아흐가 교만한 루아흐보다 나으니”처럼, 긍정 혹은 부정적인 힘에 사로잡힌 인간의 심성, 성향을 나타내기도 한다. 심지어 자기의 실존적 상태를 멋들어지게 표현하는 지적인 어법으로 쓰인 〈욥기〉 19,17 “내 루아흐(숨)를 내 아내가 싫어하며 친형제들도 역겨워한다”도 있고, 다음의 시편 구절처럼 하느님 자신으로 의인화되기까지 한다.
내가 주의 루아흐를 피해 어디로 가며, 주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시편〉 139,7
이처럼 루아흐의 용례는 매우 다양하다. 개념사가(槪念史家)인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s)에 의하면, 낱말이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은 본뜻이 무엇인지가 모호해질 만큼 함의가 다양해지는, 심지어 서로 모순되기까지 하는 방향으로 의미가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여 그 다양한 의미 중 어떤 것을 특권화시키기 위한 경쟁과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이렇게 개념화는 낱말의 의미를 둘러싼 담론적 투쟁사를 담고 있다. 재1성서에서 루아흐에도 이와 같은 개념사적 전개를 추론할 수 있는데,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자 한다.
먼저 판관시대, 왕 없는 시대에는, 상설적인 지도자가 없음으로 해서 외적이 침입한다든가 하는 위기 상황에서 영웅이 등장하여 그 위기를 타개하곤 한다. 그런 이들이 바로 사사(士師, 또는 판관)인데, 어떤 엘리트 충원의 절차를 거친 게 아니라, 갑자기 등장한 영웅들이다. 그렇다고 대개가 영웅다운 풍모를 지닌 것도 아니고, 가문이 좋은 것도 아닌, 여러 모로 지도자로서는 부족한 자들이었다. 한데 갑자기 등장해서 외적을 물리치고 위기에서 종족을 구출해 낸다. 이때 야훼의 루아흐가 등장하고 있다. 루아흐가 그이를 사로잡아 지도자로 이끌어낸 것이다. 즉 그들은 카리스마적 지도자이고, 그것을 보증하는 것이 바로 야훼의 루아흐인 것이다.
이스라엘 신앙사에서 신학화된 루아흐에 관한 가장 초기의 어법은 주로 이런 식이다. 이때 루아흐는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일상의 엘리트 충원에 관한 관습, 그러한 사회적 상식을 교란시키는 존재다. 위기는 정상적인 시스템이 대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게 마련이고, 대중은 그 시스템 외부에서 오는 대안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한데 현실 속에서 위기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대한 믿음만으로는 충분히 대처되지 않는다. 가령 전쟁의 경우, 지속적인 군비가 필요하고, 상설화된 군사력이 필요하다. 또한 그러려면 절대 충성을 하는 위계화된 엘리트 집단의 존재가 불가피하다. 요컨대 야훼의 루아흐는 위기 상황에서 특정인을 지도자로 위임했으나, 지도자는 위기를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상화된 권력의 메커니즘 속으로 빠져든다. 아마도 이런 상황에서 개념화된 초기의 ‘루아흐’는 권력화를 억제하는 반권력적 예언자들의 신학적 압력수단이기도 했을 것이다. 기드온이나 사울이 그렇듯이 지도자들은 이러한 신학에서 결코 정신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현실은 그것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사울이 블레셋 족속과 싸울 때, 전투 직전까지 도착이 지체된 사무엘 대신 제의를 행한 것으로 인해 사무엘과 사울이 갈등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이러한 갈등의 한 현상일 것이다.
한데 이러한 딜레마에 빠져 있는 존재가 사사라고 한다면, 왕권은 카리스마적 지도자에게 부여된 하느님의 영을 상설화, 제도화함으로써 성립한다. 그러려면 왕은 사사시대의 루아흐의 개념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이스라엘 지파동맹의 소외자로서 그 사회의 규범에서 일탈적 존재였고, 심지어 블레셋의 용병이기도 했던 인물 다윗은 그런 점에서 적임자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다윗이 비이스라엘계 용병 대장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아 낳은 아들 솔로몬 또한 그렇다. 다윗에서 솔로몬으로 가는 권력 승계의 길은 이스라엘 지파동맹의 루아흐 개념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과정을 수반했다. 물론 여기에는 왕실의 사제들과 예언자들의 재개념화 노력이 수반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루아흐는 일시적인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임명하는 야훼의 특별 은총이라기보다는, 상시적으로 그 지도자를 지지해 주는 야훼의 일반 은총이 된다. 또한 그 위임으로 인해서 모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야훼의 일반 은총이, 이제는 왕과 그 가문에게만 배타적으로 부여되는 특별 은총이 된 셈이다.
바로 이러한 군주제 사회에서 주목할 만한 두 유형의 예언운동이 있다. 하나는 엘리야-엘리사를 잇는 대중전설 속에 담긴 예언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문서로서 기억된, 즉 대중 기억보다는 엘리트 기억으로 유대 역사에서 깊이 각인된 예언운동이다. 전자는 루아흐가 비교적 많이 사용되는 반면, 후자의 이야기에서는 사용이 억제되어 있다.
엘리야-엘리사 이야기에서는 왕실의 녹을 먹는 사제와 예언자들에 의해 발전한 야훼의 루아흐를 거부한다. 그러나 루아흐 개념 자체를 거부한 게 아니라, 루아흐의 오용을 거부한다. 엘리야, 엘리사 자신이 대중에게 야훼의 루아흐에 사로잡힌 이들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루아흐는 왕실에 있는 게 아니라, 고통받는 대중, 기근과 착취로 고통당하는 대중을 구원하는, 하느님에게 부름받은 이에게 있다.
반면 문서 속에 기억된 예언운동은 보다 지적이고 보다 세계적 지평을 지닌다. 국제 정세를 잘 알고 왕실에서 벌어지는 교묘한 신학의 담론화 방식을 알고 있다. 물론 그러한 신학 담론 속에 정당화되고 있던 권력의 부당한 대중 착취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해서 그들의 과제는 그러한 루아흐를 거부하는 것이다. 더구나 왕실 예언자들이 황홀경 속에서 신탁을 하는 양식, 대중 선동의 양식을 저주한다. 하여 그들은 야훼의 ‘말씀’을 강조한다. 야훼의 루아흐는 그들이 볼 때 사이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루아흐 개념의 투쟁사에서 식민지의 역사는 새로운 지형을 낳는다. 식민지화된 역사에서, 고통의 외적 규제력이 너무 막강하여 내적인 희망을 상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적인 담론은 더 이상 말씀을 강조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하여 이제 모든 담론은 루아흐에 기대게 된다. 루아흐는 모든 이에게 모든 상황에서 자신의 일상적 의지를 표현하는 사람들의 말 속에 깊게 스며든다. 그리고 이 시기에 재건공동체를 구축하려는 체제 당국자도, 그 체제의 지지자인 예언자도, 그리고 그러한 체체의 형성에 비판적인 예언자도 모두 제각기 루아흐를 통해 말을 한다.
그 많은 예언들, 시가들, 지혜의 말들 속에서 루아흐가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이제 루아흐가 모든 성향을 제각기 대변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일일이 얘기하는 것은 이 글에선 그리 요긴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개념의 발전사에서 주목할 요소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고, 그것이 훗날 예수운동 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의 담론만을 언급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자 한다.
그 후에 나는 내 루아흐(영)를 모든 살(肉)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아들과 딸들이 예언하리라.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리라.
또한 그 날들에 남녀 종들에게도 내 루아흐를(영) 부어주리라.
―〈요엘서〉 3,1~2
여기에 의하면, 야훼의 루아흐는, 특별한 영웅이나 왕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체험 영역으로 다가온다. 루아흐로 부음받은 이, 그이는 남자일 수도 여자일 수도 있다. 또 노년의 사람, 성인이 되고 늙은이가 되어 지혜가 풍부한 사람만이 아니라, 천방지축인, 세상을 아직 잘 모르는 젊은이 혹은 아이에게도 부어진다. 아니 심지어 말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인성을 지닌 존재로 보지도 않았던 종들에게까지 선사되는 특별한 체험이다. 이는 특정인에게만 한정되었던 영의 정치를 ‘민주화’하는 담론적 모색들과 연계되는 체험이다.
이때 영이 부어진 이들은 당연히 하나의 획일적 주체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몸에 각자의 모습으로 부어진 영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하여 하나의 주체로 부름받는 것이 아니라, 다중적 주체로 서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남자든 여자든, 성인이든 아이든, 주인이든 종이든 간에 말이다. 그러려면 때로 영들은 잘 화합되기도 하겠지만, 엇갈리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굳이 예언자는 이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루아흐의 대중화, 다중화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필경 에즈라-느헤미야로 대변되는 원리주의적 체제, 배타적이고 순수성만을 강조하는 체제의 원리가 재건공동체를 주도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대항담론이 제기된 것이 아닐까. 물론 거기에는 루아흐에 대한 신학적 대응이 수반되어 있다. 바로 앞에서 인용한 〈요엘서〉 텍스트가 그런 것이겠다.
‘루아흐’는 특히 식민지 시대에 오면 많은 지적인 담론들로 추상화되고 심미화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 개념은 체험의 언어라는 함의가 담겨 있다. 이후의 역사에서, 그리고 앞서 언급한 평양대부흥운동 같은 데서도 그러한 체험, 강렬한 불과 같은 체험이 공동체를 추동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그것은 어떤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정서적 변화를 동반한다. 그리하여 일상을 압도하는 체험의 강렬함을 수반한 현상이 루아흐적 체험인 것이다. 그 체험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한데 다른 이의 체험은 미신이요 주술에 지나지 않는 반면, 공동체 지도자들만이 루아흐를 독점하는 왕조시대나 식민지 시대를 포함해서 오늘 우리 시대에까지 늘 존재한다. 그것을 독점함으로써, 대중을 단일한 주체로 흡수하는 경향이다. 하여 대중의 아픔으로 다가가기보다는, 대중을 하나의 ‘큰 뜻’에만 복무하게 하려 한다. 물론 이 경우 항상 그 대의(大義)는 루아흐를 독점한 이의 사적 권력을 풍부하게 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루아흐 독점의 정치, 영 독점의 정치는 루아흐의 도구화, 영의 도구화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요엘서」의 예언자는 그것을 문제시한 것이 아닐까.
아무튼 재1성서 속의 나오는 루아흐의 정치는 이렇게 획일성을 극복하려는 운동을 내포하고 있으며, 권력화에 대한 저항을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루아흐를 도구화하고, 제도에 순응하게 한 한국 교회의 영의 정치는 도대체 재1성서의 어떤 이해에 기반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 대답은 물론 저들, 영을 독점하는 저이들, ‘어게인 1907’을 외치는 이들이 해야 할 것이다.
제2성서(=신약성서)와 프뉴마, 그리고 그 속에 함축된 영의 정치
제2성서에서 루아흐에 해당하는 낱말은 ‘프뉴마’(πνευμα)다. 제2성서에서 이 낱말은 총 379회 사용되는데, 이중 ‘하느님의 영’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은 275회다.
유대교가 처음 루아흐를 프뉴마로 번역한 이후, 유대교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신앙에서 프뉴마도 루아흐의 개념사적 발전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는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재1성서 시대 후기 루아흐의 개념사에 나타난 것처럼, 하느님의 역사 개입 수단이라기보다는 하느님 자신으로 의인화되어 사용된 것처럼, 프뉴마는 이미 재1성서의 헬라어 번역 과정에서 그러한 의미 변화까지 담은 채 수용되었고, 또 제2성서에서도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어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즉, 프뉴마는 사람들의 일상에 개입하는 하느님 자신을 가리키는 양식으로 일찍부터 이해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복음서에서 ‘벙어리 악령’(프뉴마 알랄론, πνευμα αλαλον)에 사로잡힌 아이(〈마가〉 9,17)나 〈사도행전〉에서 ‘점귀신’(프뉴마 퓌토나, πνευμα πυθωνα: 16,17)에 사로잡힌 소녀처럼, 하느님의 영이 아닌, 사악한 힘에 사로잡힌 상태를 말할 때도 프뉴마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경우 프뉴마는 하느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요엘서〉의 전통을 이어서 그 임재가 모든 이의 몸에 부어지는 신성처럼 이해되고 있다.
특히 고대 로마제국의 대도시 상황에서 유대교 회당의 주변부로 밀려난 대중들을 주된 기반으로 하여 예수운동을 전개했던 바울 같은 이를 포함해서, 초기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그러한 대중화된 영이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대중의 몸에 부어지는 것에 관한 많은 논의를 발전시켰다. 한데 다른 한편에서 그는 그러한 대중,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 다소 지나쳐 보이는 광적인 신앙 정서에 대해 경계하기도 한다. 바울은 그것이 공동체의 결속을 흔들고 있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작은이들에게까지 차별 없이 나누어지는 프뉴마는, 서로를 갈라지게 하고 증오하게 하기보다는 서로 대화하고 화합하게 하리라고 믿었다. 요컨대 프뉴마를 받아 주체화된 이는 사회적 질서의 연장선상에 있는 공동체의 질서를 해치기보다는 더욱 강화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하여 그러한 질서에 반하는 프뉴마를 주장하는 이를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다소 정리되지 않은 바울의 프뉴마 개념이 좀더 후기로 내려가면 그 함의가 제도화에 대한 태도에 있어 훨씬 명료하게 신학화되어 사용되는데, 아래에서는 두 상반된 유형의 예수운동에서 ‘프뉴마’의 정치가 어떻게 담론화되고 있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두 상반된 유형이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제도화에 대한 일종의 ‘공동체주의’ 대 ‘자유주의’ 간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전자는 초기 제도화 경향의 주류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고, 후자는 비주류적이고, 다소 급진적인 해체주의적 성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 배후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얘기하면 이렇다. 서기 50년대에 활동했던 바울 당시에는 아직 예수 추동자들의 운동은 유대교권 내에서 벌어진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방인에 대한 선교도 바울이 그 선구자라 할 수 없고, 실은 이미 유대교 회당 내에서 다양하게 시행되어온 선교 모델들에 기반하고 있었다. 한데 서기 66~72년의 유대전쟁으로 팔레스티나는 쑥대밭이 됐고, 유대교 신앙의 중심인 성전 또한 잿더미가 되었다. 바야흐로 유대교의 재구성을 위한 새로운 시도가 필요했고, 그 시도들 가운데 로마 당국으로부터도 환영받고 유대인들에게도 성공적으로 다가온 것은 이른바 바리새적 라삐들이 주도한 일련의 운동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막 벌어지던 초기인 서기 1세기 말, 2세기 초에 이 운동은 원리주의적 폐쇄성을 기반으로 하는 율법종교로의 재구성이라는 양상을 띠었다. 이 과정에서 이질적인 것을 색출하고 제거하려는 폐쇄주의적 욕망이 분출되었는데, 그 추방 1순위가 바로 예수 추종자들(과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들)이었다.
이렇게 유대교는 새롭게 제도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추방당한 예수 추종자들 또한 제도화되기 시작한다. 명실상부 교회가 회당과 변별적 실체로 부상하여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여기서 교회 제도화의 주된 모델이 유대교 회당과 지중해 도시 사회의 가부장제적 가족(파밀리아)이었다.
이러한 제도화 과정에 대해 두 유형의 그리스도교 운동이 각기 프뉴마의 해석을 통해 이에 개입하고 있음을 우리는 제2성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나가 「사도행전」 속에 반영된 제도화 운동이라면, 다른 하나는 〈요한복음〉 속에 반영된 반제도화 그룹이다.
각기 다른 방언으로―〈사도행전〉의 프뉴마 정치
먼저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프뉴마의 개념사를 살펴보겠다. 알다시피 예수의 처형 직후부터 그의 부활 소문이 유포된다. 그 진원지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를 추종했다던 막달라 마리아를 포함한 몇 명의 여인들이었음은 역사적으로 의문의 여지없다. 그런데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간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소문과 더불어 예수의 측근들이었던 일단의 사람들이 지하당을 만들어서 예루살렘 성 안팎을 오가며 예수운동을 지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딱히 예수 추종자는 아니었으나, 예루살렘에서 며칠간 그를 접하면서 혹은 멀리서 보거나 소문을 들으면서 마음에 동요를 일으킨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팔레스티나 출신이 아닌, 해외 유대인 출신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각자 유대인들의 회당이나 디아스포라 출신 회당 1에서, 혹은 회당 밖 모처에서 모임을 가졌던 듯하다. 아무튼 이들 각자는 명절이 지나도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소집단을 이루며 예루살렘에서 메시아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것은 이들이 이 시기에 유달리 비상한 체험을 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사도행전〉은 이들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의 체험에 관해서, 그들 사이의 비상한 흥분 상태에 대하여 흥미로운 서술을 하고 있다. 텍스트는 이러한 흥분 상태를 ‘프뉴마’라는 낱말로서 표현한다. 가장 초기의 부활 이야기에서 주의 현현은 개별적 만남의 체험으로만 묘사되었다. 한데 이것이 누구에게든 현현할 수 있는 상태로의 질적 전환은 부활 담론이 ‘프뉴마’ 담론으로 전환됨으로써 가능하게 됐던 것이다.
〈사도행전〉 2,1~13은 이러한 성령 체험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모처에 모여서 기도하던 이들이 프뉴마를 받자, ‘여러 나라 사람들의 말’로 방언을 하게 됐다는 내용으로 텍스트는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프뉴마 체험은 개별적인 주의 부활 체험이 아니라 집단적인 체험이다. 마치 2002년 월드컵 당시 “Be the Reds!”라는 문구와 더불어 온 국민이 하나로 뭉쳤듯이, 다시 말해서 다양한 욕망을 하나의 욕망으로 대체하는 상징적 총체화가 하나의 표상어를 공유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처럼, 다양한 부활 체험이, 각자의 다양한 욕망이 하나로 연계되게 하는 사건이 프뉴마 체험으로 표상되고 있는 것이다. 즉, 프뉴마 담론은 ‘개체들 간의 연대 실천’을 낳았다. 그런 점에서 이것을 초기 예수 공동체들 간의 연대 사건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 저기 흩어진 다양한 공동체들이 예수의 이름 아래 모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간의 연대를 추구하는 〈사도행전〉은 프뉴마 체험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특기할 것은, 본문은 그것을 “각기 다른 방언으로”라고 묘사한다. 연대하게 된 사람들 각자의 말로 프뉴마/성령의 사건이, 예수의 부활이, 예수 자신이 선포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번역’의 문제에 접하게 된다. 신앙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다른 체험, 다른 욕망 속으로 ‘번역’됨으로써 연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연대는 ‘차이’를 전제하며, 차이들 간의 ‘연대’가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의 첫 예수 제자들 사이에서 있었다는 게 〈사도행전〉 저자의 프뉴마 해석의 골자다.
바람 같은 그이―〈요한복음〉의 프뉴마 정치
앞서 간략히 언급했듯이 〈요한복음〉은 제도화를 통해 생존을 모색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물결치는 현장 한 가운데서, 그러한 생존 게임에 휘말려 있는 주변부 공동체들 사이에서, 그런 제도화에 이의를 제기하는 공동체의 산물이다. 제국 뿐 아니라 유대교, 그리고 다른 주류의 제도화 모델들은 한결 같이 제도화의 중심에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한 공동체 통합을 추구하는 이른바 메시아니즘을 부르짖고 있었다. 이 흥미로운 텍스트는 ‘그 메시아니즘’에 문제를 제기하는 ‘어떤 메시아니즘’의 텍스트라는 점이 우리의 관심을 자극한다. 즉, 이 텍스트에는 두 유형의 메시아니즘이 대립되어 있다. 복음서의 서언에 나오는 다음 본문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혈통에서나 육욕에서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요한복음〉 1,13
요컨대 이들의 메시아주의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대한 믿음은 종족주의도 혈통주의도 아닌, 힘의 게임이 아닌 데서 온다는 것이다. 모두가 혈통적, 육욕적, 남성주의적 메시아니즘에 몰두해 있을 때, 대중적 구원담론이 패권주의와 겹쳐지고 있을 때, 이 공동체의 멤버들은 거기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그 모두를 비난하는 제3자로서 남아 있으려 했다. 그것은 자발적으로 소수자가 되려는 선택이다. 그것은 권력 게임의 정당한 비판자로 남아 있기 위함이다. 그것은 혹 자신에게도 피할 수 없이 남아 있는 권력 욕망이라는 본능으로부터 자신을 해체시키려는 것이다.
이러한 반골적 기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는 ‘프뉴마’에 대한 복음서의 해석에서 볼 수 있다. 이들의 생각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구절 하나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프뉴마(성령)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요한복음〉 3,8
‘니고데모’라는 이름의 제자와 예수가 대화를 하고 있다. 복음서는 그가 유대사회 지도자 중 한 사람임을 밝히고 있다(3,1: “유대인들의 의회의원”). 2 곧 유대 사회의 질서관을 누구보다도 잘 보존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그 체제의 미학을 가장 잘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 체제의 추함을 가장 잘 은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가 ‘밤’에 예수를 찾아왔다는 사실은 예수와의 접촉이 그가 대변하는 체제의 시선에서 불온한 것임을 시사한다. 물론 여기에는 예수 동시대와 〈요한복음〉 공동체의 시대가 오버랩되어 있다. 필경 로마 제국하의 세계 속에서 그리고 유대공동체 내에서, 요한계 공동체는 그렇게 불온한 집단이었으며, 동시대 교회 내에서도, 그리고 이후 얼마간 그렇게 취급되고 있었다. 아무튼 예수 시대와 복음서 시대, 이 두 시대의 지배적인 유대사회 체제는 ‘다름’에 대해서 폐쇄적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필경 이러한 배경 설정은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유대주의의 내적 동요를 또한 드러내고 있다. 그런 이유로 회당은 내부의 이러한 동요에 대해서 더욱 편집증적으로 반응했다.
이러한 상황 설정 위에서 편집증적 체제의 질서관을 대변하는 사회 종교적 위치의 인물, 그러나 내적으로 예수에 대한 동요를 숨길 수 없는 그를 향해 예수가 말을 건넨다. ‘거듭나지 않고서는 하느님 나라를 결코 볼 수 없다’라고(3절). 니고데모는 이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되묻는다. ‘어떻게 다 자란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인가’라고.(4절) 그러자 예수는 위에서 인용된 본문처럼 대답하였다고 한다. ‘바람이 부는 소리만으로 풍향을 알 수 없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렇소.’
‘소리’는 말을 상징한다. 곧 인습적 의식을 뜻한다. 그것은 세상의 질서에 관한 이치가 이렇고 저렇다고 하는 식의 사유 틀이다. 곧 닮은 것과 다른 것을 인식하는 사고틀이다. 수용할 것과 배척할 것을 가르는 인식틀이다. 한데, 인습적 의식만으로는 풍향을 알 도리가 없다. 그것은 ‘느껴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말은, 인습은 단지 그 느낌들을 표현하는 하나의 그릇일 뿐이다. 그럼에도 말이, 그것에 함입된 인습이 진리를 충분히 담고 있다는 집착이 말 속에 들어 있다. 태초에 존재했다는 ‘로고스’라는 인식틀은 바로 그러한 욕망을 대변한다. 만약 그것이 살덩이가 되었다는 선언이 없었다면, 〈요한복음〉 저자의 메시지는 기존의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말과 인습, 그것으로 모든 것을 다 담아낼 수는 없다. ‘영’은 바로 이런 바람과 같다.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것, 인습을 넘어서는 자유로움, 닮은 것을 가려내는 사고틀로부터 자유로운 것, 바로 그것에 성령의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같은 것, 다른 것을 가려내려면 항상 척도가 필요하다. 척도란 크기를 재는 기준이다. 모든 것을 그 척도에 따라 견주어야 하고, 무엇이 더 큰지, 무엇이 더 의미가 있는지, 무엇이 더 유익한지, 무엇이 더 우월한지, …… 를 가려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욕망을 낳는다.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모든 경험을 척도로 측량하려는 욕구로 가득한 세상, 그 욕구로 인해 모든 경험을 계량 가능한 것으로 환산하는 기술들로 가득한 세상, 그리하여 그 환산된 평가에 따라 포용과 배제를 제도화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세상, 결국 닮음꼴에 대한 욕망은 자유를 앗아간다. 모두를 척도의 노예로 만들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영’조차도 말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이 말하는 바, 영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과 같다. 미리 세워진 규칙만으로는 알 수 없는, 느껴야만 비로소 알 수 있는 바람 말이다. 그것은 자유로움이다. 규격화시킬 수 없음이다. 형상화할 수 없음이다. 그 움직임을 추적하고 예측하고 재단할 수 없음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이”라는 표현은 신앙적 삶의 꼴을 규정하는 일체의 인습적 규범화에 대한 해체선언이다. 그것은 규격화된 인습에 따라 모범형을 추구하고 그것을 향한 복제 욕망에 몰두하고 있는 문화에 대한 도발이고 저항이다. 곧 성령은 닮은 것을 구하는 문화/제도를 향한 반신학적 전복의 담론인 것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사도행전〉과 〈요한복음〉은 서로 다른 공동체 이상을 대변하고 있고, 뚜렷한 논쟁의 기반 위에 있지만, 양자는 프뉴마 이해에 있어 공통의 지평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타자의 이질성에 대한 두려움이나 적대감이 아니라, 그 반대의 신앙정서를 향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양자의 차이를 굳이 얘기하자면 「사도행전」은 자기의 정체성을 타자를 향하여 열어놓으면서 그것을 전 세계적 지평에서 연대의 기조로 엮어내고자 한다면, 〈요한복음〉은 그것을 연대성이라는 틀로도 묶이지 않는 개체의 다름을 강조하는 소수자 공동체의 지향이 담겨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아무튼 양자의 영의 정치는 자폐적인 원리주의를 넘어서, 낯선 자를 그 모습대로 수용함으로써 로마제국이나 유대교 등 기성의 메시아주의, 그 영웅주의를 넘어서고자 한다는 점에서 공통의 기조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맺음말 : 위반과 순치와 정치 사이
이상의 성령에 대한 성서의 논의에서 보듯, 루아흐나 프뉴마는 점차 ‘영’ 혹은 ‘기’와 같은 무차별적의 감성적 에너지에서 ‘성령’과 같은 신이 주체화된 열정의 함의를 지닌, 심지어 일상의 시공간 속에 현현한 신 자체를 나타내는 신학적 개념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리고 그러한 전개 과정에서 그것을 전유하려는 다양한 논쟁과 투쟁이 전개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한 것은, 루아흐든 프뉴마든, 그것은 자폐적인 열광을 가리키거나, 혹은 이런 기조와 한패거리 개념인 영웅주의적 획일주의를 나타내기보다는 모든 이에게 열린 영, 강자의 주권 이해를 가로질러 모든 이에게 열린 영, 그 누구에게도 독점되지 않는 영, 해서 차별화의 근거 혹은 열기로서 도구화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경계들을 해체하는 역설적인 도전, 그러한 동력으로서 해석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성령’이라는 화두는 그런 점에서 ‘위반’를 함축하고 있다. 규제와 척도를 넘어서, 상투적인 인습의 차별화 담론을 해체하는 신의 열정이며, 신앙적 열정이다. 한데 그러한 열정이 역사 속에서 누군가에 의해 전유되고, 다시 차별화의 질서로서, 배제의 근거이자 힘으로써 재설정되는 것을 보곤 한다. 평양대부흥운동은 그러한 성령을 통한 순치의 정치를 보여준다. ‘어게인 1907년’의 슬로건 속에도 세상의 고통들을 돌아보기는커녕, 그러한 고통을 도구화하여 교회주의를 재강화하려는 전략이 숨어있음을 우리는 우려한다.
물론 위반은 공동체의 위기를 드러내지만, 그것으로 공동체를 의미 있게 구현하지는 못한다. 위반의 영은 다시 연대의 영과 마주해야 한다. 〈사도행전〉과 〈요한복음〉이 대화해야 하는 것처럼, 위반의 정치는 연대의 정치와 마주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섣불리 하나가 다른 하나를 식민화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바람 같은 영은 늘상 우리의 인습화를 향해 도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
- 〈사도행전〉 6,9의 ‘리베르티논 회당’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런 해외 출신 유대인들이, 주로 아람어나 히브리어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익숙한 언어로 신앙을 나누는 장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 이 인물은 〈요한복음〉 밖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다. 아마도 그는 요한계 공동체 내에서만 알려진 인물이거나 혹은 가상의 설정이겠다. 어떤 경우든 분명한 것은, 예수를 따르기 전에 ‘바리새파’요 ‘의회의원’이었다고 묘사한 데서 볼 수 있듯이, 그를 본문의 맥락에서 유대사회의 질서를 대변하는 존재로 등장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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