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백신학교실 시즌4 - 혐오와 억측의 성서 다시 읽기: 동성애에 대한 개신교의 페이크뉴스 맞서기'의 <제1강: 페이크뉴스1 - "남자와 동침하면 사형에 처하라"(레위기 20,13) -유대귀환공동체의 순결주의 정치학>(2017 06 18) 강의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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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강의_남자와 동침하면 사형에 처하라(레위기 20,1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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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06.18)
페이크뉴스1_“남자와 동침하면 사형에 처하라”(〈레위기〉 20,13)
:유대귀환공동체의 순결주의 정치학
남자가 같은 남자와 동침하여, 여자에게 하듯 그 남자에게 하면, 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한 것이므로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죄값으로 죽는 것이다.
―〈레위기〉 20,13
어느 방송 강연에서 아무개 목사는, 성서는 동성애에 반대한다고 말하면서 ‘반드시 죽여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다. 물론 그가 동성애자 살해를 선동하거나 스스로 그 일을 실행에 옮기는 이력의 소유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너무나 섬뜩하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는 믿고 있기에 이 표현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그에게 마땅한 일이겠다. 다만 그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대신 동성애자를 ‘개조’하는 운동에 전념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신앙과 사회적 행동 사이의 간극을 조정하려 했을 것이겠다. 그런 점에서 그의 폭력적인 언사는 분명 부적절한 것이지만, 그는 증오범죄의 직접적 가해자가 되지는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함부로 남발했던 ‘예언자들’에게 동화된 어떤 이들 혹은 정치세력이 동성애자에 대한 증오범죄를 저질러 왔다는 지난 역사를 반추해 본다면 이런 ‘거짓 예언‘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며 하여 의당 논박되어야 한다. 나아가 그런 폭언들을 자행한 이들 혹은 세력, 특히 특정 종교집단들에 대한 사회적 탄핵이 엄중히 일어나야 한다.
이 글에선 성서가 동성애를 반대하고 있다고 주장되어 온 몇 안 되는 성서 구절 가운데 가장 폭력적인 언사를 담은 텍스트인 〈레위기〉 20,13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구절을 담고 있는 성서 텍스트는 동성애 문제와 아무런 관심이 없다. 동성 간의 사랑은 당시 지중해 지역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흔히 일어나는 성적 행위에 속했고, 어떤 남녀가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누구도 화들짝 놀라지 않는 것처럼 동성 간의 사랑에 대해서도 그랬다. 그런 점에서 남자와 남자가 사랑한 것을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규정한 본문은 동성애에 대한 반대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표현되었으니 그 의미를 해명할 필요가 있다. 그 역사적 내막, 그 의미의 가능성을 살피는 것이 이 글의 목표다.
극형에 관한 두 가지 텍스트: 〈레위기〉20장과 〈출애굽기〉 21,12~17
〈레위기〉 20장에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에 대하여 16가지를 열거하고 있다. 이것은 사형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또 다른 성서본문인 〈출애굽기〉 21,12~17과 대조된다. 아래 표에서 보듯 〈출애굽기〉는 사형죄 항목을 5개로 열거한다. 이 5개의 항목은 극형에 해당하는 죄를 패륜적 범죄로 단순명료하게 함으로써 법적 논란을 최소화하는 짜임새 있는 정상국가적 법의 형식을 띤다. 이 극형죄목은 필경 그 이전부터 일반적으로 전승되어 왔던 것을 명문화한 것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보인다. 반면 〈레위기〉의 항목들은 그 수도 많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항목이, 사회의 패륜범죄로 당연시되어 왔던 것이라기보다는, 가족 내의 일부 성적인 요소들을 특정하여 공공의 안정을 해치는 심각한 범죄로 취급하는, 일종의 공안통치적 법의 형식을 띤다. 즉 특정한 요소들이 공안을 해친다는 이데올로기를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비상체제의 법이 바로 〈레위기〉 20장에 반영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출애굽기 | 레위기 |
|
사람을 때려죽인 자 사형해 처해야 한다 | 21,12 | 20,2 |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경우, 정하여 준 곳으로 피신할 수 있다. | 21,13 | 20,2~3 | 이스라엘인, 외국인 모두. 자식을 몰렉에게 제물로 바치는 자. 그 지방 사람들이 돌로 쳐죽여라. |
홧김에 이웃을 죽인임 자, 제단으로 피하여 오더라도 죽여야 한다. | 21,14 | 20,4~5 | 자식을 몰렉에게 바친 자를 눈감아준 모든 자. 내(주님)가 직접 모든 자들을 죽이겠다. |
부모를 때린 자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 | 21,15 | 20,6~7 | 혼백을 불러내는 여자와 마법을 쓰는 사람에게 다니면서 음란한 짓을 하는 자 죽이겠다. |
유괴한 자는, 팔았든 데리고 있든, 사형에 처해야 한다. | 21,16 | ||
20,9 |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 사형에 처하라. | ||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 | 21,17 | 1,10 | 남자가 타인의 아내와 간통하면, 둘을 사형에 처하라. |
| 1,11 |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한 자는, 둘을 사형에 처하라. | |
1,12 | 시아버지가 며느리와 동침하면, 둘을 사형에 처하라. | ||
1,13 | 남자가 남자와 동침하면, 둘을 사형에 처하라. | ||
1,14 | 남자가 아내의 어머니를 취하면, 남자와 아내, 아내의 어머니를 사형에 처하라. | ||
1,15 | 남자가 짐승과 교접하면, 남자와 짐승을 사형에 처하라. | ||
1,16 | 여자가 짐승과 교접하면, 여자와 짐승을 사형에 처하라. | ||
1,17 | 남자가 아버지의 딸 혹은 어머니 딸과 동침하면, 남자와 그의 누이를 사형에 처하라. | ||
1,18 | 남자가 월경하는 여자를 범하면, 그 둘을 사형에 처하라. | ||
1,19 | 남자가 이모나 고모들과 동침하면, 그들을 사형에 처하라. | ||
1,20 | 남자가 숙모와 동침하면, 그들을 사형에 처하라. | ||
1,21 | 남자가 형수나 제수를 취하면 그들을 사형에 처하라. | ||
1,23~24 |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낼 민족의 풍속을 따라서는 안 된다. 그들이 바로 그런 풍속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싫어하였다.” “너희가 그들이 설던 땅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땅을 너희가 가지도록 주겠다. ...... 나는 너희를 여러 백성 가운데서 골라낸 주 너의의 하느님이다.” |
〈출애굽기〉 21,12~17은, 문맥상 보면 이집트에서 탈출해서 광야를 유랑하던 시절에 모세가 신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유랑민 공동체에서 성문법이 필요할 리는 없다. 또 그 항목에 있어서도 ‘이웃’을 죽인 죄나 유괴범죄 등은 정착민들 사이에서나 있을 법한 범죄다. 과실치사 범죄자의 경우 ‘정하여 준’ 곳으로 도피하게 했다는 내용도 유랑민의 현실보다는 정착민의 현실을 전제로 한다.
〈출애굽기〉 21장이 포함된 법전을, 학자들은 ‘계약법전’이라고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그 원형으로 볼 수 있는 텍스트는 〈신명기〉 시대보다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원형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는 현재로선 추정불가다. 나의 생각으로는 〈신명기〉 텍스트의 최초본이 만들어진 요시야 시대보다 더 오래된 유다국의 법전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왜냐면 유다국은, 요시야, 아무리 앞으로 올라가도 그의 조부나 증조부인 히스기야나 아하스 왕 이전으로 갈 수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 이전까지 유다국은 원시국가 수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시국가가 법전을 만들었다는 사례는 전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빈약하나마 추정해보면 ‘계약법전’(〈출애굽기〉 20,22~23,33)의 원형은 보다 이전에 발전된 국가체제를 이룩했던 이스라엘국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튼 〈출애굽기〉의 계약법전은, 그 원형이 이스라엘국에서 유래했고, 아마도 요시야 왕실에서 신명기 법전 작업을 실행에 옮기기 전쯤(요시야 왕실 혹은 그 선왕의 왕실에서)에 이스라엘 국의 법전을 조금 다듬어 사용했을 것이라고 보는 게 설득력이 있을 듯하다.
아무튼 〈출애굽기〉 21장의 법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단순하면서도 명료하게 극형에 해당하는 법률을 보여준다. 그것은 이 법률이 국가운영에서 실제로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이 법률은 실정법적 법률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레위기〉 20장의 역사적 자리
그렇다면 〈레위기〉 21장의 역사적 자리는 어디로 추정할 수 있을까? 이 텍스트는 일반적으로 ‘성결법전’이라고 알려진 법전(〈레위기〉 17~26장)의 일부로 이해된다. 이 이름은 “너희의 하느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19,2; 20,726; 21,8; 22,35)는 구절이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데서 따온 것으로, 다른 법전들을 포함한 텍스트들에 비해 유난히 ‘성결’(holiness)을 강조하고 있다. 이때 성결의 문제는 주로 ‘제사’와 ‘예물’에 집중되고 있고 그것을 주도하는 이들은 ‘제사장들’이다. 특히 ‘아론계 제사장’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땅’에 관한 것이다. ‘땅’은 성결법전에서 율법을 둘러싼 상벌에서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을 거스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과, 그래서 내가 그들을 원수가 사는 땅으로 보냈다는 것을 깨닫고, 할례 받지 못한 그들의 마음이 겸손해져서, 자기들이 지은 죄로 벌을 기꺼이 받으면, 나는, 야곱과 맺은 언약과 이삭과 맺은 언약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또 그 땅도 기억하겠다. 그들에게 버림받은 그 땅은, 오히려 그들이 없는 동안 폐허로 있으면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 기간에 그들은 내가 명한 법도를 거역한 죄값과 내가 세운 규례를 지키지 않은 죄값을 치를 것이다. 비록 그들이 죄값을 치르고 있더라도, 그들이 원수의 땅에 잡혀가 있는 동안에, 나는 절대로 그들을 버리지 않겠다. 미워하지도 않고 멸망시키지도 않겠다. 그래서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을 깨뜨리지 않겠다. 내가 주 그들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레위기〉 26,41~44
이 텍스트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로 가서 노예로 살다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내용처럼 들리지만, 동시에 유다국이 멸망하고 유배된 자들이 귀환해서 돌아와 ‘땅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의 정당성에 관한 얘기이기도 하다. 실은 초점은 후자에 있다. 왜냐면 (군주가 아니라) 제사장들이 중심이 되었고 제사가 모든 문제의 중심이 된 것, 그러한 논조의 역사적 배경은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에 관한 원초적 이야기의 초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원초적 이야기의 핵심 기조는 ‘해방’이지 ‘제사와 정결’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탈출기는 역사라기보다는 신화에 가깝다. 그 신화는 역사의 반영물이지만 역사를 신화적으로 기술한 것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그렇게 역사의 신화화는 아마도 이스라엘 부족동맹 시대(기원전 13~11세기경)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러한 신화가 문서 텍스트로 자리잡은 것은 군주제 시대였다. 아마도 이스라엘국에서 먼저 수행되었을 법하고, 그것이 얼마 후 남하해서 유다국(아마도 요시야 왕실 서기관들에 의해)의 선사(先史)적 기억으로 정착했을 것이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과 같은 〈레위기〉의 해석은 군주시대가 몰락하고 제국의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말한 것처럼 유배된 유다국 엘리트들이 귀환해서 자치공동체를 만들던 때가 이 해석의 역사적 맥락이라는 얘기다.
좀 더 그 배경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바벨로니아 제국에 의해 멸망한 유다국은 전 국토가 초토화 되다시피 했다. 최근의 고고학적 조사에 바탕을 둔다면 왕국 몰락하던 기원전 7~6세기를 거치면서 유다국 인구의 85%가 유출되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정착지의 80%가 파괴되었고 특히 도시들 대부분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사치품 사용의 흔적이나 이렇다 할 건조물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지배층을 대체한 세력이 이 땅 안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한편 바벨로니아로 유배된 이들은 지배층 일부와 군인, 장인집단 등으로, 〈열왕기상〉 24,14과 24,16에는 두 차례에 걸쳐 각각 1만 명과 8천 명으로 말하고 있지만 〈예레미야서〉 52,28~30에는 4,600명(=3,023+832+745)이라고 되어 있다. 〈예레미야서〉의 수치가 더 구체적이고 신빙성이 가지만 아무튼 4,600명과 18,000명 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들은 바벨로니아 중원지역의 공터 이곳저곳에 분산된 채 정착하여 살았다.
그런데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에 의해 바벨로니아가 멸망하고, 페르시아의 황제 고레스는 아시리아와 바벨로니아 제국 시대에 강제 이주되었던 이들의 본국으로의 귀환을 허락하였다. 이후 페르시아 시대에는 팔레스티나로 귀환한 유다계 이민자들의 행렬에 대해서 우리는 최소한 4번을 알고 있다.
첫째와 둘째는 그룹은 세스바살과 스룹바벨이라는 구 왕족 출신 인사가 중심이 된 귀환자 집단인데, 그들은 대략 기원전 6세기 중후반에 유다 지역으로 돌아왔다. 이중 스룹바벨은 학개와 스가랴 등의 예언자와 아론계 제사장인 예수아(여호수아의 축약형) 등의 보좌를 받으며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 성전을 다시 건축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귀환공동체의 정착은 녹록치 않았고 그 존재감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주 미약한 정치세력으로, 필경 사마리아와 암몬족의 하위정치세력 정도로 존립하고 있었던 듯이 보인다. 그러니까 이때까지는 유다사회의 재건은 군주제로의 재건에 초점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시간을 건너뛰어 기원전 5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에 또 다시 두 번의 유력한 귀환운동이 벌어지는데, 각각 느헤미야와 에스라를 중심으로 귀환공동체 재건운동이 다시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 두 인물은 유대계 페르시아 관료로, 느헤미야는 정무적 직책을, 에스라는 종교적 직책을 맡았던 인사들인 듯하다. 느헤미야의 귀환운동에서 주목할 것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것인데, 이로써 유다귀환공동체는 명실상부한 정치세력으로서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스라 귀환운동은 율법의 반포하여 귀환공동체의 내적 통합을 도모한 통치자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느헤미야의 성벽건축 프로젝트가 유다귀환공동체의 ‘정치적 국경’(political territoriality)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한다면, 에스라의 율법화 프로젝트는 유다(유대아)의 ‘사회종교적 국경’(socio-religious territoriality)을 구축하는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에스라는 사독계 제사장인데, 페르시아 제국 관료로서 유다계 이민자 집단의 제사장직을 수행했던 자로 보인다. 그는 페르시아 황실의 명을 받고 유다 지역으로 귀환한 이후 지도자로서 율법을 반포했는데, 이 법은 매우 강력한 배타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이것은 인근의 강력한 정치세력인 사마리아와 암몬에 대한 분리주의 정책이었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목표로 한 것은 유다귀환공동체를 명백한 친페르시아 세력으로 재편하려는 의도였고, 동시에 유다공동체를 독립적인 정치적 세력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물론 이때 유다국경 내의 친사마리아-친암몬파도 거세시키고자 했다. 그 와중에서 이제까지 유다사회를 주도하던 구제사장세력인 아론계 제사장계열도 축출되었다.
느헤미야-에스라 이후 유다귀환공동체는 사마리아아 암몬으로부터 사실상 독립적인 정치세력으로 부상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느헤미야-에스라 정책을 추구하는 이들이 지속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치열한 권력투쟁이 계속되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의 전선은 점점 모호해졌을 것이다. 이중 아론계 제사장 세력과 사독계 제사장 세력도 여전히 유력한 경쟁세력이었다. 그러한 어느 편이 프레임을 장악하든 분리주의적 아젠다는 여전히 강고했다. 그것은 유대사회를 분리주의 이데올로기의 사회로 고착화시키는 담론적 장치가 그 반대의 흐름을 압도했던 탓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문헌들의 집필과 편찬이다. 물론 〈욥기〉 〈전도서〉 〈잠언〉 등 개인주의적이고 냉소적 성격이 강한 지혜문학적 텍스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문헌들은 분리주의 성격이 매우 강한 편이었고, 그 반대적 성격의 문헌들은 〈이사야서〉 후반부에 덧붙여진 ‘제2, 제3이사야 텍스트들’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분리주의적 해석을 주도한 이들로는 후기 신명기계열과 제사장계열의 서기관들이 대표적이다. 그중 아마도 〈레위기〉나 그것에 수록된 ‘성결법전’은 제사장계열의 대표적인 문서다. 특히 아론계 제사장들의 문서다. 한데 위에서 보았듯이 아론계 제사장들은 제1, 제2차 귀환자 물결 이후 유다귀환공동체를 주도하는 제사장 세력으로 사독계 사제 에스라의 분리주의 정책에 의해 숙청되었는데, 이후 여전히 사독계 제사장 계열과 치열한 권력쟁투를 계속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레위기〉와 ‘성결법전’에서 보듯 그들이 어찌 보면 사독계보다 더 열심히 분리주의적 신학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레위기〉와 그 속에 포함된 성결법전은 후기 페르시아 시대인 기원전 4세기 전기부터 초기 헬레니즘 시대인 기원전 3세기경에 형성되었고 보완 발전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비용이 많이 들고 필사와 해석의 전문가 집단(서기관)이 대대적으로 양성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작업을 수행하기엔 유다국이 멸망한 뒤부터 바벨로니아를 거쳐 페르시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다사회는 인구도 영역도 아주 빈약한 보잘 것 없는 공동체였다. 그런 정도의 약한 정치세력으로선 불가능한 일이다. 반면 후기 페르시아 시대, 특히 초기 헬레니즘 시대에 유사사회는 지리적으로나 인구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상당히 팽창하였고 안정화되었다. 즉 문헌운동이 일어나는 것이 가능한 여건이 이 시기에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왜 남자끼리 동침하면 죽어야 할까
이제 우리는 〈레위기〉가 페르시아 후기에서 초기 헬레니즘 시대에 아론계 사제들의 문서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남자끼리 동침하면 죽는다고 말하는 20,13을 살펴보자.
우선 드는 질문은 여자끼리 동침하는 문제는 왜 빠졌을까, 하는 것이다. 흔히 주장되는 것처럼 이것이 동성애에 대한 구절이라면 남녀 간의 사랑 외의 모든 사랑을 예외 없이 처벌하는 게 상례일 텐데, 여성끼리의 사랑은 처벌 항목에서 배제되어 있다. 어떤 이는 여성을 법적 주체로 간주하지 않은 탓이라는 말할 수도 있다. 또 실수로 누락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15~16절을 보면 수간의 경우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죽이라는 문장이 각각 따로 명시되어 있으니 그런 주장들은 타당성이 없다. 실제로 남녀 간의 사랑 외에도 사형에 처할 ‘부적절한’ 사랑들이 20장에는 여러 가지가 명시되어 있다. 타인의 아내와 동침하는 경우, 아비의 아내와 동침하는 경우, 시아버지가 며느리와 동침하는 경우, 사위가 장모와 동침하는 경우, 남자가 아버지의 딸인 이복누이나 어머니의 딸인 이복누이와 동침하는 경우, 남자가 월경하는 여자와 동침하는 경우, 남자가 고모나 이모와 동침하는 경우, 남자가 숙모와 동침하는 경우, 남자가 형수나 제수와 동침하는 경우, 남자와 여자 모두를 처형하라고 한다. 그러니 남자끼리 동침하는 것만 언급된 것은 여성을 법적 주체로 간주하지 않은 탓도 아니고 실수로 누락한 것도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극형에 관한 법들은 〈출애굽기〉의 중범죄들처럼 명약관화한 것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범죄에 대한 처벌이 마찬가지지만 특히 극형이란 누구나 그런 범죄는 동일하게 처벌된다는 사회적 합의가 필수적이다. 만약 어떤 이는 극형에 처해지고 다른 이는 다른 형을 받거나 아예 처벌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면 그 법은 신뢰를 상실할 것이고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한데 〈레위기〉 20장에 언급된 범죄들이 과연 명약관화하게 다루어질 수 있는 것들인가? 말할 것도 없이 이런 것들 중 대다수는 범죄를 색출하지조차 못한 채 넘어갈 가능성이 농후한 것들이다. 그러니 이 항목들은 실정법으로서는 거의 무의미한 것에 가깝다. 다만 일부 시범케이스들에 대한 색출, 처벌이 가능했을 것이고, 그러한 공포의 퍼포먼스를 벌이기 위한 법적 알리바이 정도로만 유용한 것이었겠다. 그렇다면 〈레위기〉 20장은 실정법이라기보다는 집권세력의 이데올로기용 법인 셈이다.
다시 13절, 남자끼리 동침하는 것에 대해 집중해보자. 왜 남자끼리 동침하면 죽어야 할까? 여기서 나는는 ‘히에로스 가모스’(ἱερὸς γάμος)라는 지중해 지역 도처에서 일반적으로 수행되던 예배전통을 연결시키고자 한다. 직역하면 ‘거룩한 결혼’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인데, 성소에서 남자 사제들이나 여자 사제들이 신의 역할을 하여 신도들과 가상 결혼식을 하고 최종으로 성관계를 맺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제의를 가리킨다. 이 의례는 가상 결혼식을 수행하는 이들과 거기에 모인 이들이 함께 열광적으로 잔치를 벌이는 한편의 소란스러운 축제 같은 의례다. 여기서 사람들은 사제와 신도 가릴 것 없이 서로 얽혀 노래하고 춤추며 함께 식사하고 성관계까지 수행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의례는 기본적으로 다신교적이라는 점이다. 풍요와 관련된 모든 신적인 것들이 이 축제에 참여한다. 특히 남신과 여신이 커플이 되어 참여하는 경우가 흔하다. 여기서 대표적인 여신들로는 가나안의 아세라(Asherah)나 아스다롯(Astaroth), 바벨로니아의 이슈타르(Ishtar), 아시리아의 아낫(아나투, ‘nt / ‘anatu), 그리스의 아프로디테(Ἀφροδίτη), 로마의 베누스(Venus) 등이 있다. 이들은 대체로 금성으로 상징하는 여신들로 풍요와 다산을 표상한다. 야훼는 아세라나 아스다롯 등과 부부로 등장한다.
〈호세아서〉는 야훼와 아스다롯이 부부로 등장하는 히에로스 가모스 의식이 이스라엘국의 성소들에서 흔히 벌어졌음을 시사하고 있다. 필경 유다국에서도 도처에서 이런 의례들이 횡행했을 것이다. 지중해 인근 사회에서 흔히 벌어지는 의례가 유다국에서만 없었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근데 유다국에서 요시야 왕이 개혁정책을 펼 때 지방에서 벌어지는 일체의 의례를 폭력적으로 중지시켰다. 그리고 예루살렘 의례만을 정당한 것으로 결정했다.
이 그림은 시나이반도 북쪽의 이스라엘군 요새인 쿤틸렛 아주루드(Kuntillet`Ajrud)에서 발견된 벽화다. 여기엔 황소와 암소 모습을 한 야훼와 아세라가 부부로 등장한다.
이때 예루살렘 의례는 흥미롭다. 야훼가 다른 여신과 부부로 등장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되었다. 해서 이런 우상숭배의 전거로 해석할 수 있는 예언자인 호세아가 이스라엘 예언자임에도 유다국 서기관들이 엮은 열두 예언자 묶음집에 포함되었다.
이제 야훼는 홀로 성전 안에 있다. 게다가 난교의식들이 수행되고 축제가 벌어지는 성전이 아닌, 엄숙하게 폐쇄적인 성전에 있다. 이 성전은 구역이 나뉘는데, 백성의 뜰, 제사장의 뜰, 성전 건물이 그것이다. 성전 건물 안에는 대제사장만이 정해진 때에만 들어갈 수 있다. 그 안은 어떤 조명도 없으니 신이 있다고 해도 대제사장조차 신을 볼 수 없다.
이렇게 철저히 폐쇄적인 야훼예배가, 아마도 그 원초적 형태가 요시야 왕실에서 수행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성서 텍스트들을 보면 야훼가 있다던, 그러나 볼 수 없는 그 성전 안에 야훼가 안 계신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그이의 ‘영광’(kabod)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요시야 개혁은 시도만 되었을 뿐 성공하지 못했다. 여전히 전국 곳곳에서 히에로스 가모스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유다국이 바벨로니아에 의해 멸망하고 고위급 제사장을 포함한 지배층 다수가 유배되었고 그중 일부가 귀환하여 귀환공동체를 구축하려는 역사가 수세기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런 역사 과정은 지방에서 히에로스 가모스 의례를 방해하는 세력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귀환공동체 형성기라고 해도, 요시야 시대보다도 훨씬 약한 수준의 제의 중심화 프로젝트가 수행되었을 뿐이었다. 하여 히에로스 가모스는 대중 사이에서 계속되었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느헤미야가 정치적 국경을 구축하고 에스라는 국경 내에 사회종교적 국경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대는 군주가 아니라 사제들과 귀족들이 중심이 되는 체제였다. 이 과정에서 가장 빠르게 바뀐 것은 사제들의 남성화다. 이 시기에 성서의 거의 모든 텍스트들이 편찬되거나 저술되었는데, 두드러진 것은 여성 엘리트가 사라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배의 주도권을 쥔 백성도 남자였다. 여자는 소극적 역할만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히에로스 가모스 관행까지 사라지진 않았던 듯하다. 그것은 귀환공동체의 고위사제들의 세력이 강력히 영향을 미치고 있던 예루살렘을 제외한 지역의 수많은 성소들 안에서 남자사제들이 거룩한 결혼 의식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이들과 결혼은 여성인 백성이 아닌 남성이 맡았다. 당시 사회는 남성끼리의 성관계가 흔한 때였으니 그것이 별로 이상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에스라와 그를 이은 대제사장들은 이런 지역성소들에서 벌어지는 히에로스 가모스 관행을 척결하고자 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나아가 지역성소 자체를 와해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남자끼리 성관계를 한 자들을 처형한다는 법령의 함의였을 것이다.
한편 이 법령의 부가효과도 있었다. 보다시피 이 법령은 지방성소 예배를 금한다거나 히에로스 가모스를 금한다고 표기된 것이 아니라 남자끼리의 성관계를 금한다고 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백성들이 거룩한 결혼의례를 풍요의례로 믿고 있는 터에, 또한 그런 의식이 진행되는 성소가 중앙성소가 아닌 지역성소인들인 터에, 당국이 명시적으로 그 관행을 금한다거나 성소를 폐쇄한다거나 하는 조치를 내리면 대중의 원성을 사게 될 것이었다. 중앙의 권력이 아직 취약한 상황에서, 강제력의 동원이 별로 여의치 않은 데다, 이스라엘과 암몬의 군대가 간섭할 명분을 제공할 조치를 내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여 당국은 의도한 것을 명시적으로 주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남자끼리의 성관계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사회 속에 흔했다. 일반적으로 성인 남자가 소년과 성관계를 맺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관행은 지중해 전역에서 고루 나타난다. 설화이지만 사울의 궁중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소년 다윗의 표상은 성인인 왕과 소년의 성적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다.
한데 문제는 이런 관행이 실제로는 폭력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가난한 계층의 소년들이 권력과 부를 거머쥔 귀족들의 성적 노리개로 선택되곤 했다. 물론 가난한 계층의 소녀들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금령의 목적은 히에로스 가모스를, 결국에는 지방성소를 척결하는 것이고, 그와 함께 유다사회에 들어와 있는 이스라엘과 암몬이 권력층을 견제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니, 남자와 남자의 관계를 문제시하는 것만이 당국의 관심거리였겠다. 그러니 게다가 소녀와의 성관계를 억제하는 것은 자신과 같은 당파의 사람들에게까지 화살을 날리는 셈이니 그건 금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이런 범죄에 대한 처벌은 상징적이다. 견제할 자이거나 그 세력을 상징하는 누군가를 이 명분으로 처벌하면 될 일이지 실제 모든 지방의 관행을 처벌하는 데 관심은 없었고 당국은 그럴 능력도 없었다. 다만 그런 조치들이 상징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만은 분명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우리 유다사회는 야훼의 정통성을 획득한 이들이다. 해서 귀환한 이들은 이 땅을 다시 찾을 권리가 있고, 누구도 그 권리를 두고 우리와 다툴 수 없다는 것이다.
〈레위기〉 20,13 다시 읽기
이제 우리는 이 구문이 동성애 반대의 구문이 아님은 이야기할 수 있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따라야 하는 이들은 성서를 그 맥락 속에서 깊게 숙고하여야 할 것이다.
한데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읽는 것은 성서에 대한 올바른 독서법이 아니다. 가령 이 구절처럼, 문자 그대로 따르려면 유다귀환공동체의 이데올로기를 하느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구절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그 대답은 모든 이들이게 열려 있다. 모든 이들이 이 텍스트와 대화하면서 그 의미를 해독해 내야 한다. 이 글은 그런 이들에게 해석을 돕기 위해 주는 보조자료에 지나지 않다. 그러니 이런 글, 저런 글을 참조하고, 우리 사회에서 마주치게 되는 이런 사정, 저런 사정을 살피며, 나의, 우리의 현장에서 이 구절을 성찰적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꼭 역사적으로 텍스트를 공부할 필요는 없지만 나 같은 역사학 연구자에게는 역사적 읽기가 성서 해석에 필요한 한 가지 접근 방식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이 구절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권력이 개입한 성관계에 대해 반대하는 것, 그것이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성서적 의미라고 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 이 구절이 남자끼리의 성관계를 다룬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런 전략의 산물임에도 이 구절 속에 공공적인 가치가 살아 있다는 점을 주목해본다면, 그것은 권력이 사랑의 이름으로 정당성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남자와 남자든, 여자와 여자든, 남자와 여자든 간에 권력이 개입된 성관계를 문제시하는 하느님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연예인 성상납으로 자살한 한 여성 배우를 떠올린다. 교회는 그런 범죄를 처벌하지 않고 넘어간 국가에 반대해서 싸울 때 이 구절이 그 근거라고 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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