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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강좌

한백신학교실 시즌4 - <제3강: 페이크뉴스3 -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 두셨소"(로마서 1,26)

이 글은 '한백신학교실 시즌4 - 혐오와 억측의 성서 다시 읽기: 동성애에 대한 개신교의 페이크뉴스 맞서기'의 <제3강: 페이크뉴스3 -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 두셨소"(로마서 1,26) - 로마 귀족사회의 포퓰리즘 정치에 대한 비판>(2017 07 02) 강의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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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acebook.com/pg/HBThSch/posts/?ref=page_inte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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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27)

페이크뉴스3_“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 두셨소(로마서1,26)
:로마 귀족사회의 포퓰리즘 정치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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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한 행동으로 진리를 가로막는 사람의 온갖 불경건함과 불의함을 겨냥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납니다. 19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20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21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없는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22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23그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 발 짐승이나 기어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니,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25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숭배하고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26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바르지 못한 관계로 바꾸고, 27또한 남자들도 이와 같이, 여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서로 욕정에 불탔으며,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잘못에 마땅한 대가를 스스로 받았습니다. 28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타락한 마음자리에 내버려 두셔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도록 놓아 두셨습니다.

29사람들은 온갖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으며,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수군거리는 자, 30중상하는 자,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 불손한 자, 오만한 자, 자랑하는 자, 악을 꾸미는 모략꾼이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 31우매한 자, 신의가 없는 자,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입니다. 32그들은,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자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공정한 법도를 알면서도, 자기들만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

―〈로마서1,18~32

 

최근 반동성애적 신앙을 강조하는 이들은 이 단락에서 26~27절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즉 문맥보다는 이 두 구절만 주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단락의 구성은 아래와 같다.

위의 표에서 보듯, 이 단락에서 핵심은 영원한 하느님의 형상을 썩어 없어질 형상으로 대체한 죄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의 결과가 현상1’(26~27)로 나타났다. 한데 뜬금없이 29절 이하에선 다시 현상에 대해 열거한다(현상2). ‘현상1’현상2’를 보면 전자는 구체적이고 적나라한 묘사라면, 후자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항목들을 두서없이 늘어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 그것은 필경 서신을 쓰는 이가 죄의 결과로 현상1’을 이야기한 후, 너무 특정한 것에 한정된 이야기를 한 것이 부족하다 싶어 보다 추상화되고 일반적인 항목들을 이야기한 것으로 보인다. 필경 현상2’에 열거된 항목들은 저자가 보기에 수신자들이 그 사람들의 현상들로 익히 공감하는 것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 항목 하나하나는 체계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두서없는 열거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상1’은 그런 사람들로 가장 인상 깊게 꽂힌 내용이었을 것이다. 즉 바울은 그 사람들들을 이야기하고 싶었고, 그것은 현상1’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나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순간 그는 현상1’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저들의 죄를 나타내는 데 너무 제한적인 혹은 너무 선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해서 그는 보다 일반적인 항목들을, 하지만 그가 보기에 수신자들은 익히 저들 죄인들이 그런 자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만한 항목들을 이야기하였다.

그렇다면 이 단락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항은 사람들( ʿο ανηρ)이라고 표기된 자가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그들이 인간 일반이라고 한다면, 27절의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하게 되었습니다라는 비판은 남성동성애자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 일반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해석은 간단치 않다. 그들이 누구인가가 해독되는 것이 먼저이고, 그 단서는 현상1’현상2’이다. 즉 이런 죄들과 연관된 자들이 누구일까를 추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데 이 문제는 수신자와 연관해서 볼 필요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바울은 수신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항목들을 열거한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바로 이것을 해석함으로써 사람들의 정체를 추정해보고, 거기에서 26~27절의 부끄러운 짓의 실체를 해명해보려는 데 초점이 있다.

 

초기 예수운동에서 바울

 

2성서로 분류된 27개 텍스트 가운데 바울의 이름으로 쓰였다고 주장하는 문서들은 13개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많은 이들이 여기에 히브리서를 더해서 14개가 바울의 편지들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학자들은 히브리서가 바울의 서신이 아니라는 데 이견이 없다. 또한 저자가 바울이라고 명기된 13개 중 친서는 일부에 지나지 않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장 많은 이들이 동의하는 바울의 친서는 7개다. 아래 도표는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바울의 친서와 위서 목록이다.


친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빌레몬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디도서, 데살로니가후서

 

그런데 현대 제2성서 연구자 중 최고의 스타학자의 하나이고 전문연구자들에 의해서도 그의 가설이 크게 주목받고 있는 크로싼(John Dominic Crossan)에 의하면, 친서 속의 바울이 급진적 바울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위의 도표에서 위서 중 윗줄의 세 편 속의 바울은 친서 속의 바울의 급진성이 크게 후퇴하여 반동적 바울로 묘사되고 있고, 아랫줄이 세 편에선 아예 보수주의자 바울처럼 그려져 있다고 한다. ‘반동적 바울보수적 바울의 차이가 미묘하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 6편의 위서들은 친서 속의 바울을 왜곡시켜 해석되게 했던 진앙이라는 점이다. 해서 바울을 이해하는 데 있어 위서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한편 사도행전바울베드로’, 그리고 빌립의 행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세 사도의 이야기에 거의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한다. 아래 표는 사도행전이 다루는 사도들의 분량과 그들의 주요 활동 공간을 보여준다. 물론 그 지리적 배치는 저자의 기획의 산물이다.


베드로

빌립

바울

1~7

8~12

13~28

예루살렘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

25%

14%

61%


위에서 보듯 바울은 사도행전중에서도 절반을 훨씬 넘는 비중으로 다루어진다. 이는 이 문서가 저작된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 무렵 바울이 가장 중요한 사도로 부상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앞서 보았듯이, 오늘 우리가 제2성서로 묶어낸 27개 텍스트에서 바울의 이름으로 된 서신들의 비중과 상응한다. 27 문서가 최초로 정전으로 인정된 것은 367년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에 의해서다. 그렇지만 이미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 이후 바울의 위상은 급상승하여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탄생에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인물로 평가되어왔다. 그 결과가 27개 정전 목록 가운데 13~14개가 바울의 문서들로 모아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의 친서들로 가 보면 바울은 결코 예수운동의 중심인물이 아니다. 아니 실은, 활동력에 있어서는 누구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역동적인 사도였지만, 그는 당대에 예수운동 그룹들 사이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그를 알고 있는 이들 사이에서도 베드로나 주의 형제 야고보, 아볼로 등에 비해 위상이 아주 낮은 존재였다. 해서 바울은 시시때때로 매우 과시적으로 자신을 부각시키고자 했고, 그의 서신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이러한 그의 인정투쟁의 요소들은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아무튼 이와 같이 사도행전은 후대에 급부상한 바울의 위상을 반영하고 있어 그 내용이 바울 자신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한데 최근 이 문서에 대한 연구에서 저자의 의도에 의해 과장된 바울 묘사에도 불구하고 묘사의 디테일들이 바울 자신을 이해하는 데 있어 굉장히 중요한 정보들을 담고 있음이 인정되고 있다. 사도행전은 실존 인물 바울 이해에 중요한 정보를 많이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파, 그리스도파 그리고 그리스도교

 

한편 최근 바울 이해에 있어 중요한 반전이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교 탄생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다. 한데 그리스도교의 등장은 서기 90년 어간 이후이다. 그 시기부터 이스라엘 종교로부터 분리된 독자적인 종교로서 탄생했다는 점이다. 그 시기는 유대교의 등장과 맞물린다. 즉 서기 90년 어간 이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독자적인 종교로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내막은 서기 66년 이스라엘인들의 반로마 항쟁이 일어났고 그 전쟁은 70년 예루살렘성과 성전이 잿더미가 되면서 처참하게 일단락되었다. 사마리아성전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으나 이 전쟁 이후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성전 중심의 종교는 모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한데 80년경 전후 복구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고, 그중 블레셋 지역의 성읍인 얌니아(Jamnia)를 중심으로서 하여 로마 황제의 재가 아래 진행된 이스라엘 복원 프로젝트가, 과장할 수는 없어도, 여러 복원 프로젝트 중 가장 큰 획을 긋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마도 90년경 이후 얌니아 중심의 이스라엘 재건 운동은 원리주의적 유대주의화 경향으로 경도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질적인 요소들이 색출 배제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그리스도파(나사렛파)인데, 마태복음요한복음은 바로 이 그리스도파 축출의 뼈아픈 경험이 반영된 문서다. 그렇게 해서 (랍비적) 유대교가 탄생했는데, 현대 유대교 연구의 최고 권위자의 하나인 제이콥 뉴스너(Jacob Neusner) 이래 유대교의 형성을 2~3세기부터 시작해서 6~7세기에 와서야 하나의 종교체계로서 정착하게 되었다는 입장이 학계를 주도한다. 뉴스너는 그 기간의 유대교를 Formative Judaism이라고 불렀는데, 이 견해와 보조를 맞추어서 그리스도신학계에서도 초기그리스도교를 Formative Christianity 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는 뉴스너가 말한 Formative Judaism의 보다 조금 앞선, 얌니아 중심의 이스라엘 복원 프로젝트가 시작된 1세기 말부터 독자적 종교로서의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출발을 가정하고자 한다.


 


그렇게 본다면 그리스도교의 탄생이 바울을 재평가한 것과 함께 시작하였음에도,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교의 사도가 아니다. 그는 대략 서기 30년대 후반부터 예수운동의 활동가로서 행적을 시작했고 60년대 초쯤 사망한 인물이다. 특히 후대에 그가 주목받은 지역인 그리스, 터키, 마케도니아, 로마 등 지중해 북부 지역에서 활동한 시기는 40년대가 끝나는 시기 즈음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첫 번째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다. 그는 이스라엘 종교권에 속한 사람이었고, 그중 그리스도파에 속한 인물이었다. 나사렛 예수를 추종한 예수운동은 30년대 말 이후부터 크게 네 부류의 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예루살렘 중심의 예수운동과 갈릴래아 중심의 예수운동, 그리고 다마스쿠스 계열의 그리스도운동과 안디옥 계열의 그리스도운동이 그것이다. 이중 비팔레스티나 계열의 두 운동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룹에 의해 전개된 것으로, 다마스쿠스 계열은 나바태아 국(지금의 시리아와 요르단 지역의 국가)과 그 동편으로 활동을 펼쳤고, 안디옥 계열은 북시리아와 그 서쪽(터키,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으로 펼쳐나갔다.

바울은 전기에는 다마스쿠스에서 시작해서 아라비아에서 활동을 했고, 후기에는 안디옥에서 시작해서 터키,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에서 활동을 펼쳤다. 한데 제2성서에 포함된 그의 친서들은 모두 안디옥에서 시작된 그리스도파 운동의 흐름 속에서 저작된 것들이다.

 

로마서

 

바울은 에베소에서 체류하고 있던 52~55년 사이에 갈라디아서를 썼다. 아마도 54~55년경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로마서를 쓴다. 한데, 2성서에 포함된 바울의 친서들은 모두 그가 방문해서 만든 공동체에 보낸 서신들인데, 로마서만은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이미 존재하던 이스라엘계 공동체에 보낸 서신이다. 로마시의 이스라엘계 사회에도 그리스도파가 공동체가 있었다. 하지만 바울과는 무관한 공동체였다.

여기서 하나 전제할 것은, 앞서 말했듯이, 그리스도파는 하나의 독자적인 종교가 아니었다. 이스라엘 종교권에서 예수파나 그리스도파의 공통점은 나사렛 예수를 가장 중요한 예언자로 모시고 그를 섬기는 집단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아직 그리스도교처럼 예수에 대한 공통된 교리적 이해가 확립되기 전이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즉 예수를 따르는 운동들이지만 그 예수에 대한 이해는 너무나 편차가 컸다. 게다가 예수파든 그리스도파든 지역을 달리하는 이들 간의 공동체 의식은 매우 낮았다. 약간의 공감대가 있었겠지만 그 공감대가 이스라엘 종교권 내의 다른 파보다 거의 더 밀접한 유대감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던 때였다.

그런데 로마시의 이스라엘계 교포사회에서 그리스도파는 어떤 이들이었을까? 수에토니우스(Gaius Suetonius Tranquillus, 69~122년경)가 쓴 황제전(De vita Caesarum, 120년경)이라는 역사책의 클라우디우스의 생애 편을 보면, 네로의 부친인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에 수많은 이스라엘인들이 크레스투스(Chrestus)의 선동으로 야기된 소요로 추방되었다고 말했다.

이 책에서 추방된 이들은 유대인으로 표기되었지만 로마인들에게 유대인이라는 것이 반드시 이스라엘계 중 사마리아파 사람들이 아닌, 유다계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사실 로마사회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계 사람들 가운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기타 다른 범주의 족속들을 나누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은 오랜 이주생활 속에서 혈통이 뒤섞여 있었고 생각도 뒤섞인 이들이 많았다. 다만 소수의 유대주의자들과 사마리아주의자들이 파벌을 지어 갈등을 하곤 했다. 한데 그중에는 또 다른 소수파인 그리스도파도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수에토니우스가 말한 크리스투스란 로마시 이스라엘계 사람들 중 그리스도파를 가리킬 것이다. 한데 그들은 추방된 이유는 소요죄 때문이다. 아마도 이스라엘계 사회에서 그리스도파가 주동하여 일으킨 모종의 집단행동에 대한 처벌로 추방을 당한 것이었겠다.

이 집단행동에 대한 처벌이 추방에 그친 것인지 처형된 자들과 추방된 자들이 섞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만약 후자라면 반란 같은 극단적 저항일 가능성이 있고, 전자라면 합법적 틀 내에서 벌어진 일련의 집단행동일 가능성이 있다. 아무튼 이 일로 부리스카-아굴라 부부도 추방된 이들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은 바울의 가장 중요한 동료가 되었다. 아마도 로마시의 이스라엘계 사회에 대한 정보의 대부분은 이들 부부로부터 얻은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만약 내 추정이 맞는다면, 바울이 로마서를 쓴 동기는 로마시의 이스라엘 사회 내에서 벌어지는 어떤 상황에 그가 개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어떤 상황이란 이런 것이다.


 

 

강한 자

약한 자

귀속의식

도시사회

높음

낮음

교포사회

높음

높음


14장에는 연일 벌어지는 축제 음식 먹는 문제를 둘러싸고 강한 자약한 자가 대립적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약한 자는 축제 음식 먹기를 거절하고 축제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을 말하고, ‘강한 자는 그런 데서 자유로운 자를 가리킨다. 옆의 도표는 나의 책 리부팅바울에 나온 것으로 14장의 강한 자는 도시사회든 교회사회든 귀속의식이 모두 강한 자를 가리키는 반면, ‘약한 자는 도시사회에 대해서는 귀속의식이 낮고 교회사회에서는 귀속의식이 높은 자를 말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교포사회 내에서 강한 자약한 자로 표상된 두 집단이 대립하고 있었다. 나는 이중 강한 자가 그리스도파였을 것으로 본다. 왜냐면 20, “모든 것이 다 깨끗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먹음으로써 남을 넘어지게 하면,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해롭습니다.”라는 구절을 보건대, 자신을 포함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먹는 것에서 자유로워서 무엇이든 먹어도 되지만, 자신이 먹는 걸로 누군가 상처받는다면 그 먹는 것이 해로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11,11을 보자.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져서 완전히 쓰러져 망하게끔 되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의 허물 때문에 구원이 이방 사람에게 이르렀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질투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두 그룹의 대립이 전제되어 있는데, 하나는 이스라엘에서 하느님의 변혁행위가 먼저 일어나야 한다는 입장이고(I), 다른 하나는 그 기획은 실패했고 이제 각 지역에서 먼저 하느님의 변혁행위가 일어날 수 있다는 입장(II)이다. 여기서 바울은 뜻밖에도 후자에 반대하고 전자를 지지한다. 같은 시기에 저작된 또 다른 서신인 갈라디아서3,26~4,1을 보면 사라의 계보와 하갈의 계보로 나누고 전자는 약속의 자녀, 후자를 율법의 자녀로 보면서, 후자는 현존하는 예루살렘을, 저자는 도래할 예루살렘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변혁관이 현존하는 예루살렘이 아닌 각자 자신의 곳에서 이룩될 새예루살렘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위의 11,11에서 그리스도파는 (II)의 입장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파를 지지하는 게 아니라 반박하고 있다.

하나 더 얘기하면 13장을 보면 바울은 로마시의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 권력에 대항하고 세금에 거부하는 이들과 대립하고 있다. 이를 11장과 연결시키면 그리스도파가 권력에 대항하고 세금 거부운동을 일으키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를 다시 14장과 연계시키면 강한 자’-그리스도파-반예루살렘파임을 의미한다.

바울은 여기서 로마시의 이스라엘계 공동체 내의 그리스도파를 향하여 경고의 말을 하고 있다. 필경 그는 브리스카-아굴라 부부로부터 전해들었을 법한 로마시의 그리스도파의 위험한 행보에 제동을 걸고자 한다. 그러면서 이 도시의 이스라엘 사회를 향하여 자신을 추천하고 있다. 조만간에 여건이 닫는다면 가겠지만 지금은 그럴 형편이 아니고, 다만 지금 그리스도파를 향하여 당장 모험적 행보를 중단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까지 다른 공동체에서 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그리스도파와 다른 이들 간의 통합을 권고한다. 로마서는 그런 내용을 담은 서신이다.

 

황제 그리스도의 등장[각주:1]

 

49년 크레스투스의 소요로 일부 이스라엘인이 추방당한 지 5년이 지난 54년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죽었다. 그의 죽음이 황비인 아그리피나(Agrippina, 15~59)의 독살로 인한 것인지는 불확실하지만, 그런 소문은 그의 말년의 치세가 여의치 않았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하여 클라우디우스와 아그리피나 사이에서 난 아들 네로(Nero, 재위 54~68)가 그를 이었을 때 선황제의 많은 포고는 흐지부지되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로마로 되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 그러니까 이 부부가 추방되어 고린도에서 머물던 때에 그들은 바울의 동료가 되었다.

바울이 로마서를 집필했을 때(55/56년경)는 네로가 즉위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다. 그리고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로마에 온 지 얼마 안 된 때다. 새 황제는 아직 어렸고(17) 집권 기반이 탄탄하지 않았지만, 그의 측근에는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기원후 65), 티겔리누스(Ofonius Tigellinus, ?~69), 부루스(Sextus Afranius Burrus, 1~62) 등 유능한 신하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즉위 직후 아르메니아를 침공한 서아시아의 대제국인 바르티아(Parthia)의 군대를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군사정치적 업적도 있었다.

주목할 것은 이 새 황제는 전임자와는 달리 보다 친 대중적 이미지를 강화하려는 데 특별히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가 원로원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원수정 이후 원로원은 지속적으로 최고통치자의 경쟁자였다. 하여 황제들은 적지 않은 회유책을 쓰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많은 원로원 의원들을 숙청했고, 속주 출신의 신흥귀족들을 원로원에 위촉하곤 했다. 네로 황제 치하에서 속주 출신으로 원로원 의원에 위촉된 이는 무려 42명이나 되었다. 선대황제 때 15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무려 세 배 가까운 가감한 인적 교체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도미티아누스 황제(Titus Flavius Domitianus, 재위 81~96) 시대의 풍자시인인 유베날리스(Decimus Junius Juvenalis, 60~140년경)가 대중은 빵과 서커스, 두 가지만을 열망한다고 비아냥댄 것처럼, 대중을 적극적으로 만났고 대중의 지지를 호소하는 친 대중적 정치를 폈다. 심지어 그는 로마 엘리트들이 그렇게 경멸했던 직업인 배우가 되어 친히 무대에 서기도 했고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 당대 명문가의 대표적 인물로, 철학자이자 법률가이고 행정가인 소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Caecilius Secundus, 61~112, 대 플리니우스의 조카)는 네로를 가리켜 딴따라 황제라고 조롱했다.[각주:2]

또한 네로 황제는 제전과 검투를 포함한 축제를 대폭 늘렸다. 앞서 인용한 유베날리스의 비난은 이러한 대중적 축제의 일상화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매일 벌어지는 귀족들의 축제를 비난한 적이 없다. 그는 단지 대중이 즐기는 여흥만을 비난했다. 반대로 네로는 대중에게 축제를 통해 많은 음식과 여흥을 베풀었고, 이를 통해 대중은 잠시나마 부자의 향락적 생활에 동참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원로원에 대항하는 그의 일관된 정치의 일환이다.

아무튼 그 덕에 네로는 대중적 지지도가 대단히 높은 황제가 되었다. 그가 살해된 직후 잠시 집권했던 군벌들인 오토(Marcus Salvius Otho. 재위 691~4)나 비텔리우스(Aulus Vitellius. 694~12)가 네로의 무덤에 참배하는 제스츄어를 취했던 것도 그의 대중적 인기 때문이다. 그의 치세기에 그리스 방문을 기획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그를 지지하는 로마의 대중들이 황제여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라고 외쳐대자 포기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심지어 그의 대중주의는 속주지역까지 확산되어, 그가 죽은 뒤에도 서부 속주들의 대중 사이에서는 네로가 살아 있고 때가 되면 그가 되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네로 부활설). 요컨대 네로는 대중적 메시아론의 주인공이기까지 했다.

그런 황제가 즉위했고, 초기부터 아직 그리 과감하지는 않았어도 그의 대중주의는 로마시 대중의 공간 구석까지 신속하게 퍼져나갔다. 귀족들과 유력층들의 공간에서 살았고 그들 사이에서만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던 다른 황제들과는 달리 그는 대중 현상의 주인공이었다. 요컨대 그는 황제 중심의 대중주의를 퍼뜨리고 있었다.

 

부끄러운 욕정

 

그렇다면 로마서1장의 사람들은 네로 황제인가? 우선 복수표현이라는 점에서 황제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은 의심의 여지없다. 그러나 앞의 황제 중심의 대중주의를 염두에 둔다면 썩어 없어질 형상이라는 표현과 딱 맞아 떨어질 대상은 황제다. 그러니 황제는 분명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도시 대중은 네로 황제에게 커다란 지지와 환호를 보냈다. 전임자들과는 달리 대중을 위한 여러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던 덕이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 재위 기원전 27기원후 14) 때보다도 많은 공공건설사업을 벌임으로써 부를 재분배하는 데 힘썼고, 연극, 검투, 기타 축제 등 각종 대중문화 장려책을 통해 대중의 정치적 능동성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또한 상인들의 농간에도 불구하고 곡물가격을 낮은 가격으로 유지하기 위해 식민지로부터 들여오는 식량의 안정된 물류체계를 구축하는 데도 큰 노력을 쏟았다.

뿐만 아니라 대중에 대한 귀족의 횡포를 통제하는 데도 네로는 적지 않은 관심을 기울였다. 공화정 말기에 오면 로마의 귀족과 부유한 평민들의 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지며, 빈부 간에는 그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졌다. 원수정기와 제정기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공화정기 말기의 정치가였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기원전 106~43)는 귀족층은 최소1년에 60만 세스테르티우스(15만 데나리온)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제정기 초기인 1세기의 텍스트인 마태복음20장에 의하면 농업노동자는 최소한 1데나리온이 필요했다. 이것은 귀족 가문 하나가 기본적 삶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 15만 개의 농업노동자 가족의 생계비만큼의 비용이 필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각주:3]

 

이 인용문에서 보듯 로마시에는 계층 간의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졌다. 2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귀족층의 부는 어마무시하네 증가했고 소농과 이민자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몰락했다. 그나마 로마시는 소농과 소시민층이 살아 있었다. 그것이 네로가 추구했던 로마시의 대중주의의 핵심 맥락이다. 그들의 몰락을 저지하기 위해 황제는 그들에게 무상의 식량을 공급하고, 또한 그들을 착취하는 귀족을 합법적으로 징계하는 방식을 통해 대중주의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것은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계층으로 하여금 네로에 대해 적대하게끔 했고, 그들 사이에서 복잡한 권력게임이 벌어지는 상황이 바로 로마시의 정치적 지형이었다. 바울은 그런 상황을 어느 정도는 간파했고 그래서 네로에 대한 급진적 그리스도파의 반네로 투쟁의 부적절함을 주장한 것이다. 나아가 바울이 주목한 것은 그러한 반()네로 투쟁은 황제의 공권력이 그리스도파뿐 아니라 이스라엘계 사회 전체를 공격하도록 자극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내가 보기엔 바로 이런 맥락에서 118~32절이 주목되어야 한다. 가령 앞의 현상1’에 해당하는 죄악들을 보자. 고대그리스 사회는 소년애이데올로기가 팽배한 사회였다. 가령 용맹스럽고 성숙한 남자 성인은 소년을 사랑함으로써 그 성숙함이 완성되며, 소년은 성숙한 남자와 교합함으로 통해 완전한 어른에 다가가는 관문을 통과하게 된다는 통념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한데 그런 관습은 그리스를 통경했던 로마의 지배층들에게 전수되었지만 그 이데올로기가 자리잡지는 못했다. 실은 로마의 법제들을 통해 보면 기원전 3~2세기경에 노예소년이나 매춘남을 이용하는 것은 허용했지만 자유인간의 소년애 풍조는 금지되었다. 하지만 이런 법률은 관행을 금지시키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여전히 그런 풍조는 횡행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런 풍조가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이 법제들은 시사하고 있다.

한데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1세기경은 로마가 지중해 최고의 패권국가로 부상하고, 이와 발맞추어 귀족층들의 부가 극한적으로 확장되어 공화정의 이상이 더 이상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워지는 시대가 도래했다. 하여 이 시대는 독재체제와 군주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정치변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네로는 이런 시기 한복판에서 시민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해서 귀족을 견제하려 했던 독재적 정치가였다.

네로는 위에서 보았듯이 원로원 귀족의 인적 교체를 과감하게 시도한 황제였다. 이때 그에게 원로원 귀족을 숙청하는 하나의 도구가 바로 법이었다. 특히 부를 주체하지 못하는 귀족층들의 소년애 관습을 제제하는 것이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귀족들은 노예여자나 남자, 혹은 빈민 남녀를 성적으로 농락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바울이 로마서1,26~27에서 부끄러운 짓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것을 로마법의 소년애 금지법을 적용한 것이다. 그것은 부끄러운 짓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 법이 자유인 사이의 법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이스라엘 교포사회에서 농락당하는 소년은 법에 저촉하는 사안은 아닐 수 있다. 그럼에도 황제는 가능하면 시민층의 범위를 넓히려고 하기 때문에 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적용하면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바울이 기대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즉 이 텍스트는 동성애 일반을 문제시한 것이 아니라, 귀족층의 권력 남용을 비판한 것이고, 그중 하나의 관행인 귀족의 폭력적 소년애 현상을 문제제기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싶은 요점은 약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정신이라는 점, 바로 그것이다.

 

  1. 이 단락은 나의 책 《리부팅 바울》의 같은 제목의 단락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본문으로]
  2. 유베날리스와 소 플리니우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반대했던 귀족들로, 과거에 황위를 찬탈당하고 ‘악한 통치자’로 규정되어 버린 네로를 도미티아누스가 빼어 닮았다고 말하고자 네로에 대한 이런 악평을 남긴 것이다. [본문으로]
  3. 이 인용문은 내 책 《리부팅 바울》의 176~177쪽에서 옮겨온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