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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정당성, 분단국가 체제들과 우리의 공모

[반신학의 미소]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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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성, 분단국가 체제들과 우리의 공모

 

 

 

한 아기가 버려졌다. 탯줄 잘라 줄 사람도 없어 태반과 연결된 채 흉측한 것이 길게 아이 배꼽 밖으로 늘어져 있다. 엄마 뱃속에서 묻은 태지(胎脂)가 흙과 뒤범벅이 되어 아기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있다. 찢어지게 가난한 부모의 원치 않은 자식, 특히 딸들의 운명이다.

지나던 사람 하나가 피투성이로 몸부림하던 아기를 데려다가 키운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다. 어느덧 그 아기는 처녀가 된다. 고운 옷을 입고, 아름답게 화장한, 팔찌와 목걸이와 귀고리와 온갖 귀한 장신구로 치장한 그녀의 자태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녀를 데려다 키운 이는 그 모습에 반해서 아내로 맞아들인다. 그런데 그가 왕이었으니, 그녀는 이제 왕비인 것이다.

 

이 우화는 에제키엘서 16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아마도 에제키엘 예언자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떠돌던 이야기인 듯하다. 예언자는 이 우화를 끌어들여, 내용을 약간 변형하고 그 이야기의 후속부분을 창작함으로써 한 편의 풍자극을 만들어낸 것이다.

왕비가 된 여자가 은혜를 저버리고 마구 아무 남자들과 놀아났다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버려진 아기는 이스라엘이고, 그 아기를 데려다 정성껏 키우고 아내로 맞아들이기까지 한 이는 하느님을 가리킨다. 호세아서,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이런 유의 결혼을 소재로 하는 예언자적 풍자는 새로울 것이 전혀 없다. 여성 비하적인 이런 풍자를 성해방주의적인 문제의식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은 다른 지면으로 미루고 여기서는 에제키엘의 의도에만 초점을 맞춰서 그 말하는바 취지를 조명하는 데 집중하기로 하겠다.

다른 예언자들에 비해 에제키엘에게서 주목할 것 하나는, 버려진 아기의 부모를 아비는 아모리인이요 어미는 헷 여자라고 하는 표현이다(3). ‘아모리와 헷 족의 후손이라는 말은 예루살렘을 비아냥거리는 상징적 표현이다. 고대의 강대국인 헷 제국이 한때 에집트를 정복했을 때 그들 족속의 일부가, 마치 고대 중국의 한나라가 고조선을 정복하고 그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한 것처럼, 예루살렘에 이주하여 식민지를 건설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지역 원주민의 비칭어(卑稱語)인 아모리와 혼혈화되었던 것이다.

한데, 예루살렘은 지명을 가리킬 뿐 아니라, 은유적 표현으로서 다윗 왕가 내지는 왕국의 지도층을 시사하기도 한다. 에제키엘서 16장에서 예루살렘이 후자로 사용되었음은 의문의 여지없다. 요컨대 유대의 왕가/지도층이 하느님을 배신하고 간음을 일삼았다는 것을 에케키엘 예언자는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아비를 배신한 간음행위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흔히 우상숭배라고 단순하게 말한다. 그런데 의인화된 유대가 간음한 상대로 특별히 에집트, 앗시리아, 바빌론 등이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나라들은 유대 멸망기의 세계적 강대국들이다. 이들에게 몸을 팔았다는 것, 더구나 화대를 받은 게 아니라 도리어 선물을 갖다 바쳐가며 음란한 짓을 했다는 비난은 간음이 단순한 이방 종교를 수입한 게 아니라 유대 왕국의 굴욕적 국제관계에 대한 예언자의 비아냥거림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33).

세 번째로 주목할 것은 에제키엘 예언자는 유대의 죄를 소돔이나 사마리아의 죄와 견주고 있다는 것이다(46절 이하). 사마리아란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이란 하느님을 배신한 대표적 국가를 뜻했다. 한편 소돔은 구체적인 지명이 아니라 전설상의 장소다. 잘 알려져 있듯이, 죄악으로 인해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대표적 상징이 바로 소돔인 것이다. 아무튼 유대인들에게 이들과 비교한다는 것은 더 없는 모멸이요 수치다.

그런데 에제키엘의 말인 즉, 네 죄가 소돔의 죄보다 더 중하다고 한다(48). 이때 소돔의 죄라는 게, 단지 태평세월을 즐기면서 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주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49). 지배층들이 권력 게임에만 몰두한 나머지 가난한 백성을 돌보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그러나 유대는 그뿐 아니라 외세에 주권을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가난한 백성을 돌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외세와 결탁하는 방식의 권력 게임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비난인 것이다.

그리하여 에제키엘은 이렇게 충격적인 발언을 내던진다.

 

사마리아가 죄를 지었다고 하지만 네가 지은 죄의 절반밖에 안 된다. 너는 네 언니나 아우보다 역겨운 짓을 더 많이 하였다. 네가 저지른 온갖 역겨운 짓을 생각하면 네 언니나 아우는 도리어 죄가 없는 편이다.

에제키엘서 16,51

 

말인즉, 사마리아나 소돔이 지은 죄는 바로 네 죄로 인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 정도라는(‘정당화된다는) 것이다. 유대인에게 이보다 더 치욕적이고 수치스런 말은 없을 것이다.

에제키엘 당시 유대 국가는 몰락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적 혹은 준강제적으로 이주된 상태였다. 더구나 예언자의 청중은 바로 이산집단이었다. 민족적 자긍심을 단단히 가져도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닌데, 그런 사람들을 향해 소위 사제이자 예언자인, 그들의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의 한 사람이라는 자가 이렇게 저주의 말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인 2000년은 한민족이 분단된 지 반세기를 넘어서는 해다. 민족의 비극 가운데 가장 으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도 올해로 꼭 50년이 된다. 성서에서 50년이란 희년을, 모든 역사의 굴곡을 원점으로 되돌려놓는 것을 상징한다. 그처럼, 2천년은 한민족에게 정말 뜻 깊은 한 해였다. 남과 북의 최고지도자의 극적인 만남이 있었고 두 차례의 이산가족의 감동적인 상봉이 있었다. 1970년대 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작금의 상황은 이전과는 달리 희망적인 전조처럼 보인다.

이제 이산의 비극은 어느 정도 완화될 것 같다. 남북의 사람들이 만나 해후를 풀 만남의 광장이 조만간에 세워질 것이 예상된다. 이미 남과 북의 교역이 활발해졌고, 위기를 맞고 있는 북한의 동포들을 위한 여러 모양의 지원이 훨씬 가능해졌다. 분단 반세기 이래 이와 같은 희망의 징후는 일찍이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작년 8.15 직전 방북한 언론사 사장단 앞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했다는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이제까지 남과 북의 정권이 모두 분단을 이용해왔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학계에서야 이미 상식이 된 것이지만,[각주:1] 최고통치자의 입에서 이런 고백이 나온 것은 아마도 남과 북을 통틀어 처음이 아닌가 한다.

알다시피, 민족의 분단은 기본적으로 우리 내부에 원인이 있다기보다는 냉전으로 치닫고 있던 강대국들의 이해에 이리저리 휩쓸린 결과였다. 유대의 지도층 인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반도의 지도자들은 무책임하게도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이런 외부 제국들의 이해관계를 이용했다. 그래서 분단 정권이 탄생했다.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냉전의 보금자리로 말이다.

한국전쟁은 무책임한 정치꾼들의 협잡 행위의 소산인 냉전체제의 필연적 귀결인 동시에, 그것을 한층 고조시킨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 비극적 사태로 인해 양자는 서로를 더 이상 동족을 바라보듯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들어선 박정희 정부는 이런 맹목적인 냉전 상황을 이용해서 국가 전체를 준전시적 총동원체제로 만들었고, 이것을 자양분 삼아 산업화를 이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바로 그 성공의 이면에서 비극의 씨앗이 배태되었다. 성공 때문에 냉전의 정신은 더욱 굳어졌고 내면화된 것이다. 냉전주의적 체제가 정당화됐고, 전 국민이 냉전주의자가 됐다. 그리고 그 정권이 추진한 산업화는 재벌 중심적 노동통제형 사회를 탄생시켰다.

국가는 총량적 성장을 위해 빈부 격차를 극대화했고, 그로 인한 자본의 위기를 무마시키기 위해 파행적 노동관행을 정착시켰다. 그 결과 천민화된 자본이 자라났고, 그들이 주도한 문화는 걷잡을 수 없이 추잡한, 물욕과 부패와 이기심으로 가득한 사회를 키워버린 것이다. 이제 이런 추악한 현실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를 공범자로 만들었다.

분명 남한의 국가는 분단을 이용해서 체제를 확고히 했고, 분단을 이용해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소비사회를 만들어냈다. 산업화에는 실패했으나 북한 체제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고백대로, 적개심의 정치를 통해 체제를 굳건하게 구축해 왔다. 그러나 북한이 소돔이라면, 남한은 에제키엘이 비난하고 있는 유대/예루살렘과 같다. 남한은 극도로 심각한 외세 의존형 사회다. 정치 군사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종속의 정도는 매우 심각한 상태다.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점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예속사회의 다양한 길 가운데 최악의 경우만을 선택해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 남한 자본주의의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많은 지성들이 신자유주의의 암울한 미래를 걱정해왔던 바로 그런 모습들을 골고루 답습하면서 우리는 암울한 미래를 향해 달리고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세계에서 가장 추잡한 사회의 하나가 되어버린 한국, 그리고 그 중심인 서울이 통일 한국의 비전을 이끌고 있다. 물론 그 점에서 북한도 예외는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경직된 사회의 하나인 북한이 통일의 추동자라면 그것도 그리 환영할 것이 못되니 말이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희망하는바 통일은, 내가 보기엔 문제의 해결이 전혀 아니다. 그러기엔 우리의 두 체제는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러왔다. 양 체제의 구조화된 위기의 모습은 통일이라는 대안으로 자동적으로 해소될 것 같지 않다남북의 지도자들이 분단을, 냉전체제를 이용해서 정권의 안보를 구축하려 해왔던 것을 진작 반성할 수 있었다면 모르지만.

그런 죄악을 아직 청산하지 못한 우리의 과오는 한반도의 비극을, 나아가 아시아와 세계의 위기를 야기한 제국주의 세력의 패덕을 가려주는 구실을 해왔다. 아니 오히려 그들을 정당화해왔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 시작된 과거 청산의 물줄기가 희망의 전조다. 그것을 발전적으로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남북분계선의 철폐를 뜻하는 통일은 그다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게 아니니 말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도 있다.’

  1. 박명림이 ‘대쌍관계동학’(interface dynamics)이나 ‘적대적 의존’(antagonistic dependence) 개념이나, 임현진이 ‘분할국가’(partitional states)나 ‘분단국가’(divided states)가 아닌 ‘결손국가’(abroken nation-state)로 남북한을 설명하는 것은 모두―비록 그 세세한 함의는 조금씩 다르지만―남북 정권의 적대적 상호의존상태를 함축하고 있다. 또 송두율이 “상호침투성을 갖는 두 부분체제이면서 상대방 체제를 각각 자기의 환경으로 경계짓는 체체‘라는 설명이나, 백낙청의 ’분단체제‘ 개념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