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신학의 미소]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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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정치를 넘어서
〈요나서〉의 반냉전주의적 실천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인조인간’ 대 기계보다 더 기계 같은 ‘인간’의 갈등. 리들리 스코트의 SF영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는 2019년의 인간 사회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미래 그리기’가 아니라 이 영화가 만들어진 1980년대의 시점에서 ‘미래를 투시하는 거울에 반사된 인간’의 자화상이다. 이 영화는 미래 세계를 그렇게 보여줌으로써 현대 세계 문명의 모습을 비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세상은 이와 같이 인간의 모습을 상실해 가고 있으며, 인간이 서 있어야 할 그 자리에는 정해진 명령에 따라서만 작동하는 기계와 같은 경직된 규칙의 노예들이 서 있다는 것이다.
야훼의 백성보다 더 야훼의 백성 같은 ‘이방인’ 대 이방인보다 더 이방인 같은 ‘야훼 백성’의 대조, 이것은 「요나서」가 그리고 있는 문명 비평의 소재다.
이 문서는 문학 장르상으로는 하나의 단편소설로 분류할 수 있다. 구약성서는 이것을 예언서에 포함시키고 있지만, 다른 예언서들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형식과 주제가 이 텍스트를 지배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것은 야훼의 말이다” 등과 같은 상투적인 어투로 시작되는 ‘예언자의 선포’가 거의 들어 있지 않다. 오히려 저자는 예언자의 ‘예언자다운 진지함’을 한갓 웃음거리로 냉소하고 있을 뿐이다.
소설의 저자는 이러한 웃음거리가 될 주인공으로 ‘요나’라는 인물을 선택한다. 열왕기에 의하면 이 사람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 2세(주전782~752) 시대의 예언자였다(〈열왕기하〉 14,25).
여로보암 왕은 북왕국의 제2차 전성시대를 구가한 통치자였다. 그는 이웃나라들을 정복하여 영토의 확장을 도모한다. 〈열왕기〉에 의하면 그는 “하맛 어귀로부터 아라바 해에 이르는 이스라엘 영토를 되찾”았다고 한다(〈열왕기하〉 14,25). 하맛 어귀란 남부 시리아 지역을 말하며, 아라바 해는 사해를 가리킨다. 또 동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전제하고 있는 아모스서에 따르면, 요르단 동편의 상당한 지역이 이스라엘에 복속되었다. 여로보암 시대는 이스라엘이 시리아-팔레스틴 지역의 최강국이었던 오므리-아합 왕 시대에 버금가는 강대국으로 부상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요나는 왕의 이러한 팽창주의 정책을 열렬히 지지하는 자로 알려져 있는 저명한 예언자였다(〈열왕기하〉 14,25). 이런 인물을 〈요나서〉 저자는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것이다. 요컨대 국력이 극도로 신장하고 국가 이데올로기가 최고조에 달할 무렵, 최고의 명성을 날리던 이데올로그의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여 이 텍스트가 쓰여진 것이다.
야훼가 요나에게 명한다.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심판을 선포하라.”(1,2) 앗시리아는 여로보암 시대 직후에 팔레스틴 강토를 유린했던 세계적인 대제국이었고, 정복된 지역의 항거자들에 대한 잔인한 보복으로 더욱 그 이름이 유명을 떨친 나라다. 그리고 북왕국 이스라엘을 지도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했던 장본인이다. 그 당시에 관한 자료가 희박한 탓에, 우리는 이스라엘의 대중이 앗시리아에 의해 얼마나 잔혹하게, 얼마나 많이 희생되었는지를 밝혀낼 수 없다. 그러나 이 대제국이 벌였던 일반적인 정복 전쟁의 모습에서, 그들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몸서리치는 것이었으며 그 증오심이 얼마나 맹렬했을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실존인물 요나보다 4세기나 후대의 사람인 〈요나서〉 저자는, 당대에는 이미 존재하지도 않는 과거의 나라인 아시리아에 대한 인상을 요나 시대와 겹쳐놓고 그것을 통해 자기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 삼고 있는 것이다. 마치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2019년의 ‘미래’를 배경 삼아 자기 시대를 향한 한 편의 문명비평극을 전개하듯이, 〈요나서〉도 ‘과거’를 배경 삼아 자기 시대를 향한 한 편의 풍자극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요나는 야훼의 명과는 반대편 서쪽 땅에 있는 다르시스를 향해 멀리 떠난다.(1,3) 니느웨 사람들이 혹 회개할까 두려워서였다. 그런데 큰 풍랑이 불어닥친다. 배가 위태롭다. 뱃사람들은 온갖 수단을 다해 이 격랑을 막아보려 하지만 허사였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신을 향해 구원을 빈다. 그러나 결국 요나가 그 원인임이 밝혀졌고, 그는 자원하여 물속으로 뛰어든다. 얼마나 숭고한 희생정신인가!?
하지만 더 생각해보자. 그가 뱃사람들을 구할 방도가 과연 그것밖엔 없었을까? 우선 떠오르는 것은, 그가 니느웨로 가겠다고 하는 것이다. 필시 저자는 요나가 하느님으로부터 이렇게 생각하게끔 강요당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도록 독자들의 판단을 유도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다. 목숨을 버릴지언정, 니느웨 사람들이 심판을 모면하게 할 수는 없다는 심사였던 게다. 하지만 야훼도 포기하지 않는다. 큰 물고기가 그를 삼키고, 사흘 만에 땅 위로 내뱉는다. 그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서, 그 죽음 같은 칠흑의 공간 속에서 마지못해 그는 니느웨로 가겠다고 자술하고야 말았다.
요나는 니느웨에서 심판을 선포한다. 그리고 도시 바깥, 한 눈에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잡아 심판 장면을 구경하려 한다. 하느님에게 승복했으면서도, 여전히 온전히 승복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가 지나치게 고집불통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사실 인간의 편견이란 이토록 지독하지 않은가? 요나는 바로 그런 인간의 전형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기다리던 것은 오지 않고, 오히려 니느웨 백성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요나는 하느님을 향해 불평한다. 그리고 이 소설은 다음과 같은 야훼의 대답으로 끝을 맺는다.
이 니느웨에는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만 해도 십이만이나 되고 가축도 많이 있다. 내가 어찌 이 큰 도시를 아끼지 않겠느냐?
―〈요나서〉 4,11
요나는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 소설의 독자들은 누구나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오히려 그는 의인 중의 의인이요, 예언자 중의 예언자다. 그는 그 사회의 가치관의 가장 의로운 표상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는 ‘야훼가 공의로운 분임’을 믿고 있다. 악을 행하는 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야훼의 뜻이고, 이것이 ‘야훼의 법’이다. 이 법은 곧 이스라엘 야훼 신앙의 체계요, 이스라엘 야훼 신앙의 제도다. 그러므로 이 법을 지키는 것은 야훼의 백성들의 체제와 제도를 지키는 의로운 자의 신실한 행위인 것이다.
요나가 대표하는 이스라엘의 정통적 신앙체계는 야훼의 심판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 아니 벗어나서는 안 되는 존재의 하나로 앗시리아를 지목한다. 〈요나서〉―요나가 아니라―의 시대에는 이미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없는 나라를 말이다. 그러나 마치 한국전쟁이라는 과거의 경험이, 그 이후 오랜 시간 동안을 무수한 사람들에게 해도 되는 일, 해도 되는 생각과 해서는 안 되는 일, 안 되는 생각을 강제하는 ‘법’을, 그러한 ‘규범체계’를 낳았듯이, 죽은 것이 유령처럼 살아서 산 자들의 행위와 사고를 구속하는 일은 〈요나서〉 시대 이스라엘 족속들 사이에도 분명 존재했다. 아시리아를 향한 이스라엘의 저주는 그 저주를 뒤집어 쓸 대상을 찾아 두루 헤매는 유령이 되었다. 그리고는 혹 누군가 희생양이 발견되면 온 이스라엘의 저주를, 오물통을 뒤집어씌우듯, 그 위에 덮어 버린다. 아시라아의 저주가 풍기는 그 악취는 이 희생양에게 누구도 친근하게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한다. 어느덧 희생양은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로 누구에게나 자명하게 인식된다. 그리고 당국은 그를 향해 맘껏 화풀이한다―마치 모든 사람들의 적개심을 대리하듯.
‘편견’이다. 지극히 치졸한 편견의 체계다. 엄정 공대한 법임을 자임하고, 그것에 기초한 공의로운 제도를 주장하건만, 이스라엘의 법은, 그 체계는 한갓 과거의 경험에 붙들린 채 그 과거가 규정하는 규범의 노예가 된 것이다. 이 법은, 이 체계는 하나의 자아 중심주의다. 결코 타인을 받아들일 수 없게 하는 배제주의적 사고체계인 것이다.
〈요나서〉는 이러한 자아 중심주의, 배제주의적 사고체계를 하느님의 명령과 대립시킨다. 하느님 명령의 요체는 타인을 포용하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저주해마지 않는, 조금의 자비심도 허용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자들이라고 여겨지던 이들 가운데는 실상 무고한 사람들이―심지어 가축들까지―너무나도 많다는 것이다. 그들까지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단순한 증오심을 증폭시켜온 역사의 ‘단절’을 선언하는 것이다.
요컨대 하느님의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자아 중심주의의 해체를 주장하고 있다. 하느님의 명령과 자기 사회의 규범(편견을 수반하는 규범)의 대립, 이것을 어느 성서학자는 ‘요나 콤플렉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요나 콤플렉스는 ‘자아 중심주의 대 타자 포용주의’로 갈등하는 인간의 내면을 가리키는 말이다. 동시에 이것은 인간 개인을 넘어서, 사회 전체의 심리적, 정신적 갈등이기도 하다.
국가보안법은 우리 민족 내부의 배타주의적 가학성의 제도적 상징이다. 너무도 깊은 증오심이 터잡고 있어, 쉽사리 개정 혹은 폐지되지 않는다. 지난 세월 동안 무수한 사람들의 인생을 잔혹하게 찢어발긴 그 법적 장치는, 그 혹독한 가학성만큼이나 오·남용 투성이인 운용의 흔적으로 얼룩진 야만성의 대표적 표지였다. 지난 1998년 UN이 개정을 권고했을 만큼 그것은 이미 국제사회의 치욕스런 얼굴로 자리잡고 있다. 그럼에도 개정/폐지 논의가 있을 때마다 우리 사회의 법 운용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국제사회의 시선에 누구보다도 익숙한 지식사회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쌍수를 들고일어나 반대논지를 펼친다.
그러나 이런 대단한 이들의 오랜 시간에 걸친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 법의 개정/폐지에 공감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때 많은 사람들의 문제의식의 핵은 그것이 심각한 ‘인권 유린’을 낳고 있다는 데 있다. 반세기 동안이나 우리의 사고를 지배해온 이러한 증오심의 장치가 무수한 희생양들의 피를 탐욕스럽게 먹어치우는 괴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뿌리 깊은 반공주의가 그리 순순하게 물러가지는 않는 법이다. 여전히 우리의 또 다른 한 편에는 유치한 충동에도 쉽게 분노하는 비성찰적인 모습이 있다.
아직 분단체제를 극복하지 못한 우리는 ‘냉전적 반공규율사회’라는 배타주의적 자아 중심주의와 ‘대화적 민주주의’라는 포용주의적 관계주의간의 긴장/갈등을 경험하고 있다. 요나 콤플렉스는 지난 시대의 유제를 간직한 채 21세기를 맞이하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야훼가 지금 그러한 콤플렉스 아래 있는 우리를 향해 말을 건넨다. 온 몸으로 자신을 불사르는 한반도의 작은 예수의 입으로 말한다. 전투적 반공주의의 투사 ‘요나’를 풍자하고 냉소하는 이 땅의 또 다른 「요나서」 저자의 입으로 말한다. “이제 그만 너희의 자아 중심주의적 적개심을 버려라! 그 배제주의를 포기해라!” 사랑을 잃은 법과 체계는 결코 완전한 공의를 이룰 수 없다. 공의를 온전히 하려면, 타인을 받아들이려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야훼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가 된 것처럼, 너희도 너희의 적개심의 대상, 너희의 희생양의 안으로 들어가라! 이것이 인간기계의 법과 대립하는 나의 사랑의 계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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