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비평] 21(2003.봄)의 머리글. 이 호부터 [당비]는 삼인에서 생각의나무로 출판사를 옮겼고, 내가 주간직을 맡게 되었다.
-----------------------------------------
‘국민 참여’ 시대의 비국민의 목소리
이제 얼마 후면 새 정부가 출범한다. 지난해 월드컵에서 기적을 일구어냈던 대중의 열기가 ‘대선’으로 이어지면서 희망의 불꽃은 꺼질 줄 모르고 작열하고 있다. 어떤 후배는, 이른바 명문 대학 입학에 성공한 때, 사랑하는 이와 결혼에 골인한 때, 장장 19시간여 동안 아내의 진통을 함께 아파한 끝에 아이의 가느다란 눈을 처음으로 바라보던 때, ..., 줄줄이 계속되는 이런 개인사적 기억을 뒤로하고,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과 성취감에 내내 깨어날 줄 모르고 취해있던 생애 최고의 해로 2002년을 기억할 거라고 단언하였다. 또 중년의 남자인 한 선배는 2002년의 이벤트들 덕분에 대학 다니는 딸과 몇 년간의 불화를 끝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부녀는 이제 정치적 동지가 되었다. 그들은 오늘도 아침밥을 먹으면서 신문에 나오는 기사를 중심으로 대화의 꽃을 피웠을 것이다.
얼마 만에 누려보는 집단적인 ‘즐거움’이던가? 1980년대 말 이후 우리 일상 구석으로 본격 스며들기 시작한 ‘쾌락의 정치’는 ‘나만의 소중한 감성’의 소비자로서 호명되어온 개체화된 우리만이 아니라, 지난해엔 ‘국민’이라는 집단적 우리까지도 주체화시켰다. 한 동료는 “엄마, 난 대한민국 국민인 게 너무 자랑스러워!”라고 말한 초등학생 딸의 고백을 내게 소개해 주었다. 국민의 권리를 아직 부여받지도 못한 아이마저도 집단적인 즐거움에 동참하고 있다.
이러한 국민적 즐거움과 더불어 출범한 정부는 공식 명칭으로 ‘국민참여정부’라는 이름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출범할 새 정부의 인수위원회의 ‘국민참여센터’로 가장 많이 접수된 이름이다. 노무현 당선자는 “국민참여센터 기능을 청와대로 이관,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국민참여 시스템을 구축하라”는 지시를 전달했다. 같은 맥락에서 청와대에 신설되는 주요 직제의 하나로 ‘국민참여공보비서관’을 둘 계획이라는 소식도 들린다. 나아가 이러한 ‘국민참여’ 바람의 최대 희생자인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당 쇄신 방안의 하나로 ‘국민참여경선제’의 도입이 주장되고 있단다. 바야흐로 ‘국민참여’라는 합성어가 2003년 봄의 한국 정치 지형을 둘러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작금의 한국 민주화는 ‘아래’로부터의 바람에 의해 강력하게 추동되고 있다.
오늘 나는 한 연예인이 그녀의 남편으로부터 심하게 구타당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이와 더불어 가정폭력에 대한 몇몇 뉴스기사들은 국민참여의 시대에도 여전히 가족 간의 사랑이 권력의 불균등한 배분과 권력의 불합리한 행사로 물들어 있음을 내게 상기시켜주었다.
국민참여의 시대라는 장밋빛 낭만에 빠질뻔 했던 나는 아름답게 보이는 일체의 것에 의심을 품는 예전의 고약한 습성에로 돌아가고 말았다. ‘국민’이 아래로부터의 민주화의 ‘아래’를 의미한다면, 그보다 더욱 ‘아래’인 이는 국민참여라는 담론으로 말미암아 더욱 그 존재를 부정당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의문이다. 혹시 사람들은 자신들이 관여된 민주화의 성과에 좀 더 길게 취하고 싶은 나머지, 분신자살한 어느 노동자, 강제철거를 당한 무적의 유랑자, 노동 현장을 찾아 부유하는 (국제)이주노동자, 일상화된 가정폭력의 희생자, 국민의 권리를 유보당한 불완전한 존재인 ‘미성년’ 등등, 이른바 비국민들의 기분 잡치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미국의 전투적 내셔널리즘은 지구화와 더불어 다시금 강력해지는 국가주의적 욕구를 한층 강화시켜 놓고 있다. 국제정치는 외부에 대한 배타성이 강화됨에 따라 국경 외부의 타자를 향한 폭력과 테러로 물들어버렸고, 국내정치는 더욱 폐쇄적으로 된 ‘내적 국경’들로 인해 배척된 내부의 타자들의 시체로 즐비해졌다. 이러한 정세 아래서 경계 바깥의 존재를 비존재화하고 국민적 즐거움만을 탐닉하는 ‘천민적 희열’은 국민참여 시대를 잿빛으로 물들게 한다. 요컨대 국민참여라는 아름다운 개념에 불순함을 주장하는 것이고, 국민참여 시대를 아름답게 만드는 일의 유의미성을 역설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당대비평》이 지금 여기에서 할 일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당대비평》은 지난해에 겨울호를 내지 못했다. 지난 4년 동안 《당대비평》을 물심양면으로 뒷받침해준 ‘도서출판 삼인’이라는 안식처를 떠나야 했던 부득이한 사정 탓에 순조롭게 진행을 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작은 출판사가 잡지를 감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럼에도 한마디 불평 없이 《당대비평》과 고락을 같이 해준 삼인의 노고는 우리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다. 한편 어려운 출판가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새 둥지가 되어준 ‘생각의 나무’ 기대서 21호를 합본호로 준비했다. 언제나 그래야 하지만, 독자께 결례를 범한 것에 사과를 드리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정성을 120% 발휘하고자 정말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울러 곧 출간될 특별호 또한 그러한 우리의 의지를 담고 있다.
향후 《당대비평》의 지향하는 바는 전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제까지보다 더욱 효과적인 담론 생산 메커니즘을 위해 우리의 환경 개선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철학자인 윤평중 님, 문학평론가인 황종연 님이 편집위원으로 새롭게 참여하게 된 것과, 문화컬럼니스트인 김보경 님이 편집실무 책임자로 일하게 된 것은 이러한 우리에게 이미 결정적인 보탬이 되고 있다. 또 편집위원회를 보다 내실 있게 운영하기 위해 편집주간직을 신설하였고, 부족하지만 내가 그 직을 위임받아 일정기간 봉사하게 되었다. 능력이 모자라는 만큼 두 배의 노력을 기울여서 지금까지의 성과에 누가 되지 않게 하도록 최선을 다해야지.
한편 권혁범 님, 김은실 님, 김창엽 님이 편집위원직을 사임하였다. 이들이 없었다면 《당대비평》은 너무나 누추한 책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혹 이것을 정파적으로 해석하고 이상한 억측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떠나는 세 사람도 그러한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달했고, 사퇴의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를 아끼고 격려하는 마음을 표했으며 《당대비평》을 위해서 기탄없는 대화를 나누었으니 말이다.
이번 21호는 우리에겐 새로운 시작이다. 독자들과의 소중한 만남을 지속할 수 있어 감사하고, 독자들의 날카로운 충고를 더 들을 수 있어 가슴 설렌다. 이 책이 오늘 우리의 세상에 가치 있는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교회의 ‘신앙적 신민성’이라는 문법 - 정치적 개입주의와 정교분리 신앙 사이에서 (0) | 2018.07.15 |
---|---|
포스트근대적 보수주의로의 파괴적 날개짓 (0) | 2018.07.15 |
‘대로’(大路)에서 헤매기 - 2004, 민중신학의 길 찾기 혹은 해체하기 (0) | 2018.07.14 |
분노의 정치를 넘어서 -〈요나서〉의 반냉전주의적 실천 (0) | 2018.07.13 |
정당성, 분단국가 체제들과 우리의 공모 (0) | 2018.07.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