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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한국교회의 ‘신앙적 신민성’이라는 문법 - 정치적 개입주의와 정교분리 신앙 사이에서

[기독교사상] 제51권 제11호(통권 제587호)(2007.11)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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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신앙적 신민성이라는 문법

정치적 개입주의와 정교분리 신앙 사이에서

 

 

 

불안한 접속정치적 개입주의와 정교분리의 신앙

 

1990년대 초, 한창 대선 공방이 있을 때, 후보인 양김씨지지를 둘러싸고 교회 간에 정치적 세몰이 경쟁이 제법 치열하게 벌어졌었다. 당시 나는 한 후보를 지지하는 측이 주관하는 대규모 조찬모임의 실무팀으로 차출되었다. 서울의 한 대형 호텔 컨벤션홀에서 전국 각 지역에서 온 수백 명의 목사, 장로들이 모여, 그 후보를 지지하는 행사를 가졌다. 그때 들은 얘기로는 기독교 다수파의 지지를 받던 다른 후보 측의 조찬 모임에는 1천 명이 훨씬 넘는 사람이 왔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때가 오랜 침묵 이후 교회가 정치의 전선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던 기점이 아닌가 한다. 바야흐로 권위주의 시대가 지나고 민주적 제도화가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권력 자원의 할당(allocation) 기능이 독점적으로 수행되던 시대가 끝나고, 사회의 여러 행위자들이 교섭하고 경쟁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 경쟁의 규칙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민주적 제도화의 주요 내용이겠다. 그리고 그 출발선에서 한국 개신교의 두 블록이 격돌한 것이다.

한 편은 이른바 개신교의 주류 세력으로, 권위주의 시대의 체제의 협력자(collaborators)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였다. 그리고 다른 한 편은 줄곧 체제와 대항하면서 민주주의를 외쳤던 소수였다. 그런데,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민주화와 더불어 본격화된 양자의 정치적 행보는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자원 배분을 위한 사회적 협상의 유리한 위상을 형성하는 유효한 수단이었음이 사후적으로 판명되었다. 결국 이후 건 20년 가까이 전개된 교회의 공공연한 정치적 개입의 역사는 변화하는 사회의 새로운 합리성을 학습하는 시간이었다. 하여 이후 교회의 정치적 행보 속에는 그 학습 효과, 즉 새로운 합리성에 준한 전략적 행위를 체화한 요소가 함축되어 있다. 비록 대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은 스스로가 노골적인 이익추구자의 태도로서 자신의 정치적 행위가 구성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다. 전략적 행위란 매순간 이익을 계산한 결과로서 실행되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더 많은 경우에는 체화된 시대적 합리성에 따른 가치 판단과 결합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들처럼 이익 지향성보다는 가치 지향성이 강한 사회적 역할의 수행자들에게도 이익추구행위의 전략적 합리성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한데 교회의 공공연한 정치 개입이 실행되는 데 중요한 장애물이 신앙 속에 내재해 있다. 이른바 정교분리라는 신앙 교의가 그것이다. 실상 이것은 근대서양의 특수한 정치사회적 지형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한 편에서는 법적으로, 다른 한 편에선 신앙 규범의 형태로 제도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역사적 기원은 은폐되고 신화적 기원이 만들어짐으로써, 기독교도이건 비기독교도이건 정교분리는 마치 본래적인 것인 양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물론 해방기에서 한국전쟁기 전후까지 한국교회는 정교분리의 신앙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전선의 전면에 나서 있었다. 하지만 이미 식민지 시대부터 꽤나 확고히 자리잡은 비정치적인 교회의 위상에 관한 신앙이 재고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엔 이 시기에 교회는 너무 흥분해 있었다. 증오의 정치가 휘몰아치던 해방기~한국전쟁기의 교회는 역사에 관한 신학적 성찰을 최소한으로도 구비하는 데 실패했다. 그런 점에서 이 시기 교회의 정치 개입은 정교분리의 신앙과 진지한 갈등을 야기하지는 않았다.

1960년대 이후 한국에서의 근대적 국가체제는 급속한 안정기에 접어든다. 위에서 말한바 권위주의적 체제가 꽤 성공적으로 안착한 것이다. 이 시기 대다수 교회들은 식민지 시대처럼 비정치적 영역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정교분리의 신앙과 헌법은 권위주의적 체제의 안보를 지탱하는 하나의 동력이었다. 그러므로 정교분리의 신앙은 설명될 필요가 없는 당연한 신앙적 덕목이자 사회적 상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민주화로의 이행 초기인 1990년 초 대선 상황에서, 위에서 말했듯이, 다시 교회의 정치 개입이 시작됐다.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그러한 이행을 마치 종말론적 변화처럼 느끼고 있었다. ‘이행의 비상성’, 이것은 당시의 변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기조였다. 너무 특별한 것이기에 이 시기 교회의 정치 참여는 예외적인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었고, 이는 정교분리 신앙과의 갈등을 유예시킬 수 있는 조건으로 충분했다. 즉 정치참여라는 행위 선택과 정교분리라는 신앙적 규범은 아직 그리 큰 갈등을 야기시키지 않았다.

문제는 종말은 기다림을 지속시키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시대의 비상성 또한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결국 교회는 다시 비정치적 영역에로 복귀하지 않으면 정교분리의 신앙과의 갈등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만약 민주적 제도화가 역진(逆進)하여 다시 권위주의로 회귀한다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교회는 그 동안 익숙했던 제도 공간으로 돌아갈 수 있고, 정교분리의 신앙은 잘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적 체제에로의 이행은 비가역적인 과정(irreversible process)이다. 돌이킬 수 있는 구조적 요소들은 거의 제거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은 것은 어떤 방식의 민주적 제도화가 추진될 것이냐에 있다. 그리고 그 미지의 과정에서 최근 교회의 정치적 행보가 있다. 하여 앞에서 1990년대 초의 대선 공방이 교회의 정치 참여가 본격화되는 계기적 기점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민주화 시대에 비정치 영역에로 복귀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민주화의 시대는 교회만이 아니라, 훨씬 많은 행위자들이 약진하여 제도화 과정에 적극 개입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아니 실은 놀랍게도 교회는 민주화 시대에 그 역량에 비해 가장 더디게 정치세력화하는 세력의 하나다. 그것은 이제까지, 심지어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던 시대에도 정교분리의 신앙이 재해석되지 않은 채 굳건히 견지되어 왔던 탓이기도 하다. 정교분리의 신앙은 교회의 정치개입에 관한 신학적 성찰을 방해한다.

아무튼 이렇게 다중의 정치적 행위자들이 민주적 제도화에 개입하면서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부적절한 권력 자원의 할당 메커니즘을, 그 은폐되어 왔던 것들을 폭로하고 개선하려는 시도들이 잇따랐다. 우리 정치사에서 개혁이라는 담론이 가장 적절하게 자리잡은 지점이 바로 여기다. 권위주의적 권력 자원의 할당 체계를 개혁함으로써 새로운 권력 자원의 배분 체계가 구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음성적인 것들이 양성화되고, 공개적인 경쟁의 장에서 배분의 규칙이 만들어지는 것, 그것이 민주적 제도화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그러한 내용을 규정하는 가장 유력한 규준은 시장적 규칙이었다. 즉 한국에서의 권위주의의 지양으로서의 민주화는 시장화와 깊이 연동되어 있다.

최근의 큰 논란을 빚었던 사학법 파동은 바로 이 개혁의 과정에서 제기된 정교분리적 체제의 낡은 자원 할당 체계가 새로운 다중적 행위자에 의해 색출되고 도전을 받게 된 데서 비롯된다. 이러한 상황은 교회로 하여금 심각한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게 했음이 분명하다. 교회는 전례 없이 강한 결속력을 통해 이러한 도전을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연 이런 식의 대응이 향후 얼마나 계속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너무 많은 부분에서 교회는 사회의 신망을 상실했고, 그러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민주적 제도화의 게임의 규칙 속으로, 즉 민주화 시대의 합리성에 몸을 싣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최근 교회가 정치세력화의 본격적인 행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점에 주목한다. 이는 외형상 과거의 정치개입과 같은 양상이지만, 유의미한 특이성 또한 유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최근의 정치적 행보의 배후에 신학적 성찰은 여전히 부재하지만, 뚜렷한 징후의 하나는 정치개입에 있어 미국교회를 모방하는 현상이 역력하다는 점이다. 1970년대 말 레이건 정부의 등장기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던 미국교회의 정치세력화는 2천 년대 초 부시 정부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을 한국교회의 정치적 선각자들은 매우 노골적으로 모방하고 있다. 이것은 신학적 성찰의 결핍에도 불구하고 정교분리의 신앙 규준에서 한국교회가 점차 벗어나고 있음을 시사한다. 요컨대 정교분리의 신앙은 오늘날 신앙 규준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해가고 있으며, 그것은 미국 기독교에 대한 모방 욕망에서 가능해진 것이다.

하나의 행위는 그것을 둘러싼 의미와 상호관련됨으로써 실천의 제도화가 수행된다. 한국교회의 정치적 참여는, 종말론과 같은 의미 해체적인 비상성이 압도하는 특정 국면이 아닌 한, 그 행위와 상호관련된 의미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 참여의 의미화, 즉 정치 참여의 신학화를 방해하는 요소가 한국교회에는 매우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어 왔다. 바로 정교분리의 신앙이다. 과거의 비정치적 교회의 신앙 행위와 상호관련된 의미틀인 정교분리의 신앙이 새로운 행위를 통해 대체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의미 형성이 필요한데, 낡은 의미체계가 너무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탓에 새로운 의미 형성이 용이하지 않은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정치에 관한 다른 양식의 행위가 절실해진 상황에서도 새로운 신학적 성찰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한데 흥미롭게도 한국교회의 대안적인 행위의 제도화에 결정적인 동력은 의미 형성이 아니라 모방에 있었다. 선망하는 미국 교회의 모방에서 새로운 행위의 실천적 제도화의 가능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한국적 신학으로의 고민들이 신앙의 실천적 제도화에 대해 무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교회의 행위가 신앙적 제도화로 발전하는 데 보다 중요한 요인은 한국신학이 아니라 미국 교회의 행보에 대한 모방인 것이다. 결국 한국교회의 반지성주의는 이러한 맥락에서 작동하는 셈이다.

이상에서 나는 한국교회의 최근의 정치적 행보의 표층을 살펴보았다. 정치적 행보의 배후에 있는 교회의 전략적 차원을 읽어 보려했고, 그러한 전략 행위를 제도화하려는 노력이 방해받는 신앙 내적 요소와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요소를 살피고자 했다. 여기서 실천적 제도화를 향한 행위와 의미의 일반적인 변증법이 실패하고, 대신 한국 특유의 제3의 요소, 즉 식민주의적 모방 욕망이 개입함으로써 실천의 제도화가 구성되는 측면을 이야기했다.

 

표층에서 심층으로한국교회의 정치 행위의 신앙적 문법을 찾아서

 

논의가 이렇게 전개되면 이제 정치적 행보에 관한 신앙의 표층적 문제는 좀 더 깊은 차원에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표층에서 벌어지는 행위 이면에 놓인 신앙 문법(faith grammar), 그 심층의 신앙적 의미 체계에로 관심이 옮겨가게 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정교분리의 신앙을 이제 다른 차원에서 살펴보자. 여기서 그것이 실천의 제도화로 정착되는 과정은 그 역사적 맥락이 은폐되고 신화적 기원으로 포장되는 과정과 맞물려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사람들은 특정한 맥락에서 형성된 것임에도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원래부터 그랬다고 믿게 됨으로써 그러한 신앙을 내면화/일상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의 형성 과정과 그것 주변의 역사사회학적 배후를 탐구해 봄으로써, 은폐된 역사성을 조명해보려 한다. 그 과정에서 정교분리 신앙이 기초하고 있는 신앙문화적 요소를 조명하고자 한다. 즉 그러한 신앙문화적 요소가 형성, 발전하는 과정에서 정교분리 신앙이 제도화되었음을 보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물음은 신앙 문법에 다가가기 위한 일종의 문화고고학적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교분리의 신앙이 작동하는 데는 하나의 사회학적 전제가 필요하다. 국가가 안정된 체제를 구축하고 사회적 체제적 통합(social and system integration)을 추동하는 힘이 있어야 하며, 교회 또한 국가에 대한 압력수단을 일정하게 갖춘 상황에서 국가가 교회의 영역에 개입하지 않고, 교회 또한 국가의 영역에 개입하지 않아도 양자는 상대의 독점적 영역의 자원을 일정하게 할당받을 수 있다는 상호신뢰가 가능한 곳에서만 실행될 수 있는 근대적 권력 분점 모델이 정교분리의 체계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보면 한국에서 정교분리 신앙이 제도화되는 것은 설명하기 어렵다.

식민지 조선이나 해방 후 미군정기와 자주적 근대국가체제 아래서 기독교는 매우 빈약한 사회적 압박수단밖에 갖고 있지 못했다. 이러한 능력만으로는 국가가 정교분리 모델을 수용할 이유는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국가는 다른 종교제도가 아닌 기독교의 종교제도로서의 교회에 대해서 정교분리의 원리를 적용하였다. 왜 국가는 자신이 독점할 수 있는 자원의 일부를 은밀하게 할당해줄 대상으로 교회를 선정했던 것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미국혹은 미국 기독교라는 배후가 조선/한국의 교회 뒤에 버티고 있었다는 점에 있다. 이는 조선/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미국에 대한 신뢰와 동일시할 때만 가능하다. 또한 당국이 미국 혹은 미국 기독교를 의식하면서 조선/한국의 교회를 대할 때만 가능하다.

여기서 제국주의 일본에게 미국은 모방하고자 하는 서구의 상징이었으며, 미군정 당국과 한국의 제1, 2공화국이 미국과 미국 기독교에 가장 우호적인 정치세력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없다. 반면 조선/한국의 친미주의와 신앙의 동일화의 문제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

나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이러한 신앙적 특성이 형성되는 결정적인 계기적 사건으로 본다. 이 사건에 대해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평양에서의 교인수와 교회의 팽창이 대부흥운동의 결과라고 단순화할 수 없다는 점이다. 1903~4년의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진군루트에 있던 관서지역에서의 군대폭력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로 찾아들게 한 원초적 배경이다. 그런데 주로 미국계 선교사들과 그들의 열렬한 지지자 집단인 교회 지도자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당황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대부흥운동의 결과로 나타난 열광적 체험을 간증하듯이 고백한 자전적 기록들을 통해 역추론할 수 있는데, 내용인즉슨, 첫째로 교회로 몰려온 이들이 비신앙적 동기, 즉 생존의 동기에서 기독교 신앙을 찾았으며, 둘째로 그들에게 도덕적 아노미 현상이 매우 심했고, 셋째로 그러한 도덕의 아노미 상황이 이웃이나 동료 등에게 자주 폭력적으로 표현되었으며, 마지막으로 그러한 폭력적 행위는 공동체 내부의 분쟁을 심화시켰고 분열을 조장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필경 이것은 일상의 폭력을 훨씬 넘어서는 야만성이 일본 군대를 통해 자행된 결과일 것이다. 결국 전쟁의 체험으로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을 입은 탓에 사람들에게 집단적으로 그런 징후가 나타났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에 직면한 교회 지도자들의 대응 방식은 기도였다. 이것 역시 사후의 자전적 기록들을 통해 역추론할 수 있는데, 그들은 교회의 통합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의 폭력으로 인한 외상을 이해하고 그것과 대면하려는 노력보다는 공동체 내로 들어온 이들의 강팍한 행위를 통제하여 단일대오로 결속하게 하려는 데 더욱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비체험들이 속속 일어나고 사람들이 회심을 하며 도덕적으로 재무장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를 교회는 성령사건이라고 규정했다. 분명 여기서 일어난 숱한 신비 체험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상처를 능히 극복할만한 신앙적 동력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한데 문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선교사들의 헤게모니가 결정적으로 강화되었다는 데 있다. 신앙제도의 독점적 지위가 그들에게 부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체험의 다양성을 일체 고려하지 않고 종교체험의 획일성을 통해 삶의 획일화를 강변했다. 또한 이런 맥락에서 신앙의 비정치적 해석이 규범화되었다.

이 사건은 평양의 교회들을 일사분란하게 통합시켰고, 곧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그에 이어 상당한 양적인 팽창이 뒤따랐다. 성령 체험으로 사람들의 고통이 치유되었고, 선교사의 헤게모니가 확고해졌고, 다양성에 대해 배타적인 획일주의적 신앙이 자리잡았으며, 신앙의 비정치성이 교리화되는 일련의 과정이 기독교 신앙의 의미코드로서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 요소는 빠르게 제도화되었다. 그 결과는 에서나, 결속도와 충성도에 따른 의 차원에서의 성공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성령에서 성공으로 이어지는 의미코드는 이후 한국 기독교의 공통감각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교회는 성령을 호출하고, 획일주의적 교권화, 배타성의 강화를 통해 위기의 극복을 도모하였다. 그런 점에서 평양 대부흥운동은 한국 기독교의 초석적 사건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근데 이 사건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은 교회가 미국적 공간이라는 점이다. 그랬기에 사람들이 전쟁기에 교회로 몰려듦으로써 사건이 시발되었으며, 성령 사건을 통해 미국의 대리인인 선교사들에게 충성함으로써 사건이 마무리된 것이다. 시작과 종결이 교회가 미국적 공간임을 확인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즉 이 사건이 함축하게 된 의미 체계의 배후에는 미국적 공간이라는 공간감각이 교회와 결착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간감각 속에는 신앙적 성공과 세속적 성공이 합류하는 지점이 있다. 선교사들이 전자를 대표하고 있다면, 강력한 서구라는 제국의 이미지는 후자를 대표한다. 하여 그곳은 삶의 원본성(originality)이 담겨 있다. 원본성은 훼손될 수 없는 것이며 모두가 모방(copying)해야 유일 대상이다. 역시 신적 이미지와 미국적 이미지, 신앙적 요소와 세속적 요소가 합류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토착성이라는 것은 이 공간에서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체내의 이본적 요소(different versions)를 배제하는 것이 신앙에서 중요하다. 미국적 공간이란 바로 이런 요소들을 함축한다.

한국 역사에서 교차적으로 나타나는 교회의 정치 개입이나 비정치적 태도는 서로 정반대의 자세인 듯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측면이 있다. 미군정기와 한국전쟁 전후기에 광적으로 활성화된 교회의 정치 참여는 미국적 공간인 교회가 이본적 요소들에 의해 침해되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올랐던 배후에는 그들이 교회를 물리적으로 훼손시켰기 때문일 뿐 아니라, 원본성을 주장한 또 다른 주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몇 년 전 시청집회에서 한국의 한 대표적 목사는 주최측이 10만이라고 추산한 대중 앞에서 영어로 기도했다. 그랬기에 반미집회를 신앙의 위기로 여기며, FTA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지지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또 그랬기에 정교분리의 신앙이라는 오래된 신앙 교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신학적 성찰 과정 없이 미국교회의 경향을 곧바로 모방함으로써, ‘침묵하는 다수로서 만족하던 수동적이고 비정치적 자의식에서 민주적 제도화 과정의 적극적 행위자로 전화하는 정치세력화의 길을 갈등 없이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신앙적 사유의 배후에는 아메리카주의라는 식민주의적인 하위주체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함으로써 형성되는 획일주의, 배타성, 성공주의 등의 문화적 문법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신앙적 문법의 폭력성을 넘어서기

 

신앙 문법은 신앙적 실천의 제도화의 배후이다. 즉 신앙 문법은 신앙의 의미 체계 속에 흡수된 모든 사람들 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면서 특정한 것을 선호하게 하고 특정한 행위를 선택하게 하며 거기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게 하는 내적 계기인 것이다. 하여 신앙 문법은 태도와 행위의 가능성을 제약한다.

하지만 동시에 신앙 문법은 신앙적 실천의 제도화의 결과이다. 신앙적 문법은 구체적인 역사적 행위의 산물이지 신화적이고 본질적인 요소가 아닌 것이다. 즉 신앙 문법은 상이한 역사, 상이한 주체, 상이한 대상물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창조적인 사유와 실천의 가능성에 열려 있다. 마치 바둑게임처럼 말이다. ‘19×19’의 정방형 판의 점 위에서 무수한 창조적 기보가 생성될 수 있듯이, 그리고 그 창조성의 근저에는 여러 우연적 요소들의 특정한 결합에 상관되는 우연적 수읽기가 있듯이, 신앙 문법은 끊임없이 타인, 타집단, 타문화와의 접촉과정에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시키며, 더 나아가 자기 스스로 변형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후자의 차원, 즉 변형 가능성에 대해 신앙 문화는 닫혀 있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신앙 문화의 원본성이 병적으로 강조되기 때문이다. 문화적 문법에 대한 논의는 문화 속에 내재하는 무수한 정전들(canons)을 해체시켰다. 문화는 다양한 주체들간의 상호행위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주체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상호관계에 따라 분열되어 있으며, 분열된 주체들이 교접하는 시공간 편차에 따른 상호관계의 복합성은 문화의 범주성 자체조차 해체시켰다. 그런데 신앙 문화는 여타 문화들에 비해 훨씬 더 사고를 정지시키는 요소들을 발전시켜 왔다. 폐쇄적인 정전이 그렇고, 정전에 관한 폐쇄적인 독서법이 그렇다. 고정된 교회 공간, 고정된 예전의 시간, 고정된 찬송, 고정된 기도문 등은, 생각을 닫히게 하고, 관계의 양식을 닫히게 한다. 바로 이러한 요소들은 신앙적 문법을 경직된 것으로 만들며, 폭력적인 것으로 들끓게 한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신앙적 문법은 기독교인의 사유와 실천의 배후이지만, 동시에 기독교인의 사유와 실천의 창조적 가능성의 배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후자가 제약되도록 신앙의 장치들이 제도화됨으로써 기독교 신앙은 점점 폐쇄적인 문법에 지배당하는 것처럼 보이게 됐다.

그런데 나는 이 글에서 기독교 신앙의 정치적 개입을 둘러싼 표층의 논의에서 그 심층에 있는 신앙적 문법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밝혀보고, 거기에서 신앙적 문법 자체의 문제적 요소를 읽어내고자 했다. 자칫하면 신앙적 문법 자체가 부정적인 사유와 실천을 파생시키는 필요충분조건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신앙 문법이라고 할 만한 심층의 요소들과 표층의 신앙적 사유와 실천들 사이에는 매우 많은 중개 요소들이 매개된다. 이 모든 매개 요소들, 매개하는 역사적 정황들 등을 거의 생략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짧은 글 한 편 속에서 다 담아내기엔 너무 방대한 작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여 여기서는 단지 최근의 기독교의 정치적 행보와 그 이면의 신앙 문법 사이의 불온한 접속에만 초점을 두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 글에서 나는 신앙적 문법들을 부정적으로 옭아매는 요소를 교회와 미국적 공간사이의 감각적 동일시에서 찾고자 했다. 그것은 신앙 속에 내재된 식민주의이며, 그것이 신앙의 폭력성과 긴밀히 결탁될 수 있음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한국 기독교의 정치적 태도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모색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