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을림] 5(2004.11)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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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에 대한) 살해’와 ‘존속(에 의한) 폭력’
우리의 이 기억은 가족주의적 악을 합리화한다
추석날 깊은 새벽, 가족과 함께 달을 보며 소원을 빌어본다. 아니 실은 무심코 달만 바라봤다. 뭔가를 빌기엔 중천에 뜬 보름달은 너무 멀다. 달인데도 내려다보는 빛의 강렬함이 눈부셔 마주보기도 벅찬 탓이다. 대화하기보다는 노려보는 자태다. 마음을 나누기보다는 법 집행자 같은 근엄함이 빛난다. 밤까지도 환하게 드러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달의 시선’, 아니 ‘법의 시선’이 문뜩 두렵다. 대화 없는 저 시선의 번뜩임이 부당한 가치를 대표할 경우를 떠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집 옥상에서 보이는 추석 야경은 한적하다. 불 켜진 창의 개수가 손꼽을 만큼 드문드문하다. 모두들 ‘큰집’으로 몰려가느라 빈 집이 많은 모양이다. 흩어진 가족들이 한데 모이는 절기임을 새삼 실감케 한다. 그런데 반갑지 않은 기사가 인터넷 매체에 어김없이 오른다. ‘패륜범죄’ 운운하는 기사다. (직계)존・비속 간의 물리적 폭력들이 이 밤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나보다. 보름달처럼 밤을 드러내는 감시의 눈초리는 그래서 필요한 모양이다. 특히 패륜 범죄는 추석 밤을 비추는 달의 시선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형법〉 제250조 2항, 존속살해죄 규정이 일반 살인죄 규정과는 별도로 필요했던 것처럼, 추석 밤의 보름달 빛의 시선은 패륜범죄를 더욱 눈여겨보도록 번뜩인다.
‘패륜범죄!’ 그 명칭이 섬뜩하다. 편견 없이 볼 수 없게 하는 절묘한 작명이 돋보인다. 더 심한 비난이 가해져야 마땅하며, 더 중한 처벌이 내려야 마땅하다는 메시지가 강렬하게 울려 퍼진다. 또한 그 이름 속에는 범주를 가르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다. 그 경계 외부의 다른 것과 구별되게 하고, 내부의 것들을 동질화하는 가치 부여의 힘이 넘친다. 패륜범죄는 사연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그 결과만을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한데 〈형법〉 제250조 2항이 존속살해의 패륜성을 감안한 가중처벌 규정인 반면, 비속살해는 패륜범죄로 취급하지 않음으로서 형법상의 가중처벌의 대상이 아니다. 요컨대 패륜범죄라는 작명의 범주적 이미지는 법속에서는 존속살해범죄에서만 유지된다. 지난 2002년 3월 29일 헌법재판소가 ‘직계존속의 상해치상죄에 대한 가중처벌’ 조항이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이러한 법의 시선은 가족들의 밤을 비추는/감시하는 유효성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지난 2002년에 개봉되어 많은 관객을 끌어 모운 영화 〈공공의 적〉은 ‘(직계)존속 살해범’에 대한 이러한 법적이고 사회적인 이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두 부류의 사람을 선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한 사람은 부유하고 학력 높고 깔끔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재산도 배운 것도 별 볼일 없고, 성질도 한마디로 ‘더러운’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 사람들은 전자에게 좋은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영화는 이러한 이미지를 뒤집음으로써 관객에게 가치 전도의 즐거움을 준다. 이 영화는 ‘보통 나쁜 놈’과 ‘지독히 나쁜 놈’간의 대결이 아니라 단순명쾌하게 ‘나쁜 놈’과 ‘좋은 사람’의 대결구도를 갖고 있다. 그리고 ‘가질 것을 다 가진 그 나쁜 놈’은 살인을 밥 먹듯이 하고, 특히 부모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패륜아다. ‘부유함-고학력-존속살해’라는 고리는 최근 들어 세간에 크게 화제가 됐던 두 건의 존속살해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는 2000년 5월 과천에서 일어난 토막살인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2002년 6월 분당에서 일어난, 살해 후 집에 불을 지른 사건이다. 두 사건 모두 대학생인 아들이 교수인 아버지와 할머니를 살해한 사건이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파렴치하게도 시신을 훼손시킨 사건이라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그리고 범인이 부유하게 자란 모범생 이미지의 대학생이라는 점도 동일하다.
‘부유하게 자라고 배울 만큼 배운 놈이 그런 패륜을 저지르다니!’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부’와 ‘학력’에 대한 이른바 ‘가문적 집착’이 한 개인을 얼마나 무자비하게 파괴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 사건을 접한 사람들은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누적된 폭력이 그를 얼마나 절망하게 하고, 어떻게 존재 부정의 상황으로 몰아갔는지에 대한 예측 가능한 저간의 사정을 사람들은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리학자인 이훈구는 과천 토막살인 사건의 범인인 이은석을 소재로 저술한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라는 책에서 그는 ‘무죄’라고 단언한다. 오히려 그의 존속살해 행위는 20여 년간 비정상적인 욕구에 사로잡힌 부모가 저지른 무자비한 폭력에 대한 ‘무의식적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 청년은 어린 시절부터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소박한 꿈조차 바로 자신의 부모로부터 유린당했으며, 부모의 욕구에 미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온갖 폭언과 모멸을 받아야 했고, 이런 좌절감으로 인해 인생을 철저히 파괴당했다는 것이다. ‘미안하다’고 자식에게 사과할 수 없는 부모의 병든 욕구는 결과적으로 자식을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으로 내던져버렸고, 또 그 가족 자체를 붕괴시켜버렸다는 것이다.
이훈구 교수는 미국의 존속살해 연구가인 하이드 박사의 연구를 인용하여 한 해 3백여 명이 부모를 살해한 것으로 기소되며, 이 가운데 90% 이상이 부모의 학대를 경험하였다는 미국의 통계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70% 이상이 백인 중산층 가정 출신이라는 것도 알려주고 있다.
한국 사회의 경우 중산층의 계층적 편중성은 확인되고 있지 않지만, 부모의 과도한 상실감 혹은 병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인 상습적 가정폭력과 연관성이 대단히 높다는 점에서는 미국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법학자 조국의 글(〈‘존속살해죄’는 패륜아들의 범죄인가?〉)에 인용된 최인섭과 김지선의 책인 《존속범죄의 실태에 관한 연구》(1996)는 상습적 가정폭력과 범죄자의 정신증적 요인이 존속살해 사건의 주된 원인임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범죄자의 정신증적 이상이 살해라는 존속에 대한 극한적 적대감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은 정신증적 요인의 경우도 심각한 가정폭력과 깊은 연관성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존속살해를 일반적으로 패륜이라는 윤리적 잣대로 단순화하여 가중처벌을 하겠다는 형법의 조항은 가족 내에서의 서열을 중요시한 나머지 존재를 파멸시키게도 하는, 존속에 의한 심각한 폭력까지도 정당화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는 우리의 형법이 비속에 대한 살해의 경우 일반 살인범죄 규정에 준해서 사안별로 처벌의 정도를 결정하고 있다는 사실과 짝패를 이룬다.
그러므로 헌법재판소의 합헌 판결은 가족주의를 위해 폭력을 방조하는 반민주적인 법적 완고성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 사안에 관한 한 헌법재판소만이 인권유린의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다. 특히 기독교 신앙은 이런 사건에 접한 사회의 당혹감을 존속살해자에 대한 사회적 분노로 몰아가는 증오의 분출구 역할을 한다.
성서는 그러한 신앙적 인습에 원인 제공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특히 〈출애굽기〉는 직계존속인 부모를 때린 자, 심지어 업신여기는 자까지도 극형에 처하라고 단호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것의 죄질은 유괴범의 그것과 동류의 것으로 취급된다.
부모를 때린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유괴범은 유괴한 사람을 팔아버렸든, 잡아 두었든 간에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부모를 업신여기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출애굽기〉 21,15~17
이 구절 직전에 언급된 일반 살인에 관한 법령과 대조해보라.
남을 때려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만일 일부러 죽인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겨주어 그리 된 것이면 그런 사람이 ‘피신할 곳’(도피처)은 내가 정하여 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악의로 흉계를 꾸며 이웃을 죽였을 경우에는 그가 나의 제단을 붙잡았더라도 끌어내어 죽여야 한다.
―〈출애굽기〉 21,12~14
이와 같이 일반 살인은 범죄동기를 고려하여 처벌하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살인 사건이 터지면 피해자의 가족은 복수의 권한(‘피의 복수’)을 가진다. 그러므로 범죄자는 법의 처벌이 없더라도 항상 죽음을 예감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성소로 달려가 ‘제단의 뿔’을 붙잡으면 죽임을 면한다(〈열왕기상〉 1,51 참조). 그러나 이것은 예감된 죽음의 공포를 해소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도피처는 후에 보다 상시적인 안전 구역인 이른바 ‘도피성’ 제도로 발전하게 된다(〈민수기〉 35,9~34). 이곳은, 교도소처럼 범죄자의 위험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격리의 기관이라기보다는 범죄자를 ‘피의 복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던 것이다. 단 그 살인 사건이 의도하지 않은 우발적 사태일 경우에 말이다.
반면 직계존속에 대한 상해나 살해, 심지어 모독 사건에 대해서는 어떤 유보 조항도 없다. 만약 존속에 대한 폭력 범죄의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앞서 보았던 것처럼 가정폭력이 가장 유력하다. 그럼에도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극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주장은 부모 특히 아버지의 가정폭력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을 저하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자녀에 대한 부모의 폭력은 없었을까? 성서는 부모의 자녀 폭력에 대해 수없이 많은 전거를 보여준다. 입다처럼 자신의 위신을 위해 딸의 목숨을 내걸기도 하고, 족장 아브라함이나 남왕국 유다의 왕 아하즈(〈역대기하〉 28,3)처럼 재앙을 막기 위해 아들을 재물로 바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폭력에 대해서 성서는 이상하리만큼 무심하다. 아하즈에 대한 비난은 그가 비속살해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우상숭배자였기 때문이었다.
존 스타인벡이 소설 《에덴의 동쪽》에서 〈창세기〉의 타락 신화를 해석하면서, 한 가족의 위기에서 자기 시대의 문명사적 피폐성을 읽어내고, 그 가족의 문제가 바로 부모의 자녀에 대한 정신적 폭력이었다는 점을 제시하는 것을 우리는 유념해야 한다. 즉 성서에 나오는 신화 속의 가족 해체의 위기를, 시간을 가로질러 모든 가족들의 위기 특히 저자 자신의 시대인 근대화가 급속도로 추진되는 사회의 가족 해체의 위기의 원형으로 읽고, 거기에서 사회 전체의 문명사적 위기를 발견하고 있으면서, 이 위기가 바로 자기를 닮은 자에 대한 욕구, 아니 자기 자신이 욕구하는 자신의 이미지를 자식에게서 발견하려는 욕구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나는 부모 살해라는 것을 절대악으로 상정하는 가치관을 우리가 성서에서 배운다면, 바로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위기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점을 얘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부모 살해는 정말 잘못된 것이지만, 그것이 부모의 폭력에 대한 은폐의 기재로서 작동되고 있다면, 바로 그러한 숨겨진 폭력으로 인해 우리 가족은 끊임없이 ‘이유 모를’ 위기에 놓일 것이다. 숨겨진 것이기에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최근 한국의 주요 신문 몇 개를 선정해서 직계존속살해에 관한 기사를 찾아보았다. 읽은 기사들은 거의 예외 없이 그 범죄를 패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상당수의 기사들은 부모의 폭력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마도 실제는 더 많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한데 이상한 것은, 거의 대부분의 기사는 이러한 패륜적 범죄와 부모의 폭력을, 함께 이야기할지라도, 연결시켜 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사실 보도에 강세가 있는 기사에 비해 논설 같이 주장에 더 강세가 있는 기사는 훨씬 더 강고하게 패륜적 범죄성만을 언급할 뿐이다. 요컨대 존속 살해 사건 앞에서 부모의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기자들에게조차도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존속살해의 관념은 명백히 가족주의 속에 내재된 수많은 악을 숨기는 기재로서 작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존속살해는 잘못된 것이지만, 바로 그러한 잘못에 대한 균형 잡히지 못한 우리의 집단적인 아집은 다른 악을 숨기고 정당화하게 된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존속살해는 더 큰 악이 아니라 하나의 악이어야 한다. 우리가 더 이상 가족주의의 악을 합리화하여, 악에 대해 무감각하게 되지 않을 때까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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