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교육] 2004년에 게재된 것(몇월호인지는 확인 안됨)을 수정보완하여 한백교회 2004년 11월 14일의 하늘뜻나누기 원고로 쓰였고, 이를 다시 수정하여 백찬홍, 최형묵, 김진호 공저의 [무례자 자들의 크리스마스]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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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겐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선발대형교회의 시대가 지나가고 후발대형교회의 시대가 온다면
강의석 씨에 의해 촉발된, 예배선택권을 둘러싼 논란은 교회가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와 대면하는 데 얼마나 많은 장애를 갖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식민지 시대 이래 한국 교회의 선교는 국가의 양해(諒解)를 무엇보다도 중요시하였다.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엄청난 선교적 성공은 불의한 체제의 ‘협력자’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국가의 양해를 우선시한 선교 전략의 대가였다.
한편 시민사회나 개인은 거의 양해의 대상이 아니었다. 어디서나 자기주장만을 앞세우고 다른 견해나 입장을 무시해버리는 무례함은 이미 기독교인의 신앙적 심성(mentality)이 되었다. 미션스쿨의 선교방식도 그런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어떤 이를 ‘학생’이라고 이름붙이는 것은, 그가 ‘훈육의 대상’이라는 시각에 의해 압도적으로 규정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아직 자기 발언권을 덜 가졌으며, 행동의 자율권도 제약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인식이다. 몇몇 위대한 사상가들은 권위주의 체제를 곧잘 학교에 비유한다. 시민사회나 개인을 훈육의 대상으로, 곧 일종의 학생으로 대하는 체제다. 이것은 학교가 지체된 민주화, 근대의 전근대적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미션스쿨의 선교는 그 무례함이 훨씬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민주화가 본격화되는 1990년대 이후, 시민사회나 개인은 훈장(訓長)처럼 회초리를 든 국가의 무례함에 더 이상 참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더욱이 기독교의 무례함에 대해서는 더 말 할 것도 없다. 심지어 ‘근대의 전근대적 공간’인 고등학교의 ‘학생’까지도 기독교의 무례함에 정면으로 맞서기에 이르렀다. 강의석 씨의 항의는, 필경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기독교 선교 위기의 밑바닥까지 건드렸다.
최근 시청을 떠들썩하게 한 대형교회 중심의 시위는 정치적 보수주의의 위기 탓만은 아니다. 바로 신앙적 심성이 낳은 일상 속의 무례함에 대해 한국의 시민사회와 개인이 화를 내고 있는 데서 오는 선교의 위기가 그 근저에 있다.
오히려 정치적 보수주의는 시청집회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그 과정적 결과로 더욱 명료화, 강화되는 추세에 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물론 한국 교회가 정치적으로 보수, 반공주의적이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군정 시대에서 이승만 정권을 거쳐 군부 권위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는 반공주의적이고 위계서열적인 질서의식을 신앙적 자의식으로 내재화하였다. 특히 근대적 성공신화와 교회 성공신화는 한국 근대의 보수주의적 주류 담론으로 자리잡아 왔다.
여기에 친미주의적 요소 또한 한국 교회의 주된 심성 구조로서 간과할 수 없다. 개신교 선교의 역사는 수적으로 압도적인 미국계 선교사들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불타는 열성에 비해 다른 세계를 향한 선교에 관해 신학적으로 거의 준비되지 못한 이들의 행보는 불행하게도 한국 개신교 신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중 가장 불행한 것은 성서의 신과 미국 중심주의적 이상이 모순 없이 중첩된 신앙이 그들에 의해 파종되고 양육되었다는 점이다. 신앙에서나 학문에서나 한국기독교의 미국기독교 표절은 거의 일상화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보수・반공・친미주의적인 신앙 성향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또한 ‘정교분리’라는 서양 근대의 경험에서 유래한 신앙 원리를 재확인해왔다. 이러한 정교분리적 신앙의 제도화로 인해, 비록 기독교 엘리트들은 권위주의적 지배연합에 가담하여 권력 자원을 배분받아왔지만, 교회의 공적인 담론은 거의 언제나 비정치적 입장을 견지해왔다. 한국기독교는 수차례의 대형집회들을 통해 엄청난 인적 물적 동원력을 과시해왔지만, 그것은 언제나 순수 선교집회의 성격을 지녔다. 친미적이고 보수 권위주의적 태도가 은연중 깔려있음에도, 공공연한 신앙담론으로 시의적인 현안에 개입하기 위한 집회는 한국기독교에선 매우 낯선 현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보수주의, 대형 옥외집회, 시의적인 현안에의 정치적 의사표시 등이 하나로 묶인, 최근의 이른바 기독교 시청 집회는 한국기독교의 어떤 변화의 조짐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주지할 것은, 이러한 교회의 정치적 의사표시가 한국기독교 보수주의를 단순히 대표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현재 한국의 대형교회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전반기에 급성장한 교회가 그 하나이고, 1980년대 후반기와 1990년대 이후 급성장한 교회가 다른 하나다. 거의 모든 교회가 대형교회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분류는 한국 교회의 선교적 태도를 양분한다고 할 수도 있다. 양자는 각기 그 시대 사람들의 감수성에 대한 호소력 높은 신앙 형태를 만들어냄으로써 각 시대를 대표하는 교회 제도를 구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청집회는 대체로 전자와 관련된다. 후발 대형교회들은 보수・반공・친미주의적이라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으나, 그것을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 훨씬 신중하고, 기독교 NGO 운동 등 종종 공공성을 대변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요컨대 시청집회나 최근 방송사 앞에서의 시위 등을 통해 드러나는 선발 대형교회 식의 천박한 시위 형태는 그들이 정치적 보수주의자로서 위기의식을 가져서가 아니라, 1980년대 후반 이후 급속히 변화하는 시대의 합리성을, 그 시대의 문법을 따라가지 못한 지체된 신앙 제도의 일상적 위기에 직면하여, 이들 교회들이 허둥대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1980년대 이래의 미국의 기독교 보수세력의 흐름이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신보수주의로 이르는 일련의 미국 기독교 보수파의 행보를 모방하여, 한국기독교는 일상화된 신앙의 위기를 정치적 의사표시를 통해 대응하려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밀실에서 광장으로 신앙의 무대를 옮겨가고 있다.
지체된 의식과 경험은 현재 한국 교회의 천박성을 드러내고 있다. 아마도 그들에겐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지난 2003년 시청 집회에 동원된 신자들 중 상당수는 집회의 성격이나 구호도 모르면서 신앙적 충성심 하나로 그곳에 모였다. 그러나 점점 그들은 신앙을 자신의 정치의식과 조화시켜 가고 있다. 여전히 타인과의 수평적 대화에는 서투른 모습이지만, 그리고 타인의 비판에 대해서 닫혀있지만 말이다.
바로 이 점이 나는 우려스럽다. 타인에 대한 무뢰함에서 기인한 위기를 그들은 정치 세력화함으로 해소하려 한다. 국가의 양해를 통해 선교함으로써 특권세력이 된 교회는 이제 정치적 주체로서 특권을 유지하려 한다. 후발 대형교회들은 바로 그런 선례가 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인간에 대한 예의를 신앙의 내적 언어로 갖추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여전히 세상은 선과 악의 대결 속에 있고, 악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단순한 이분법을 마치 신앙인 양 매일매일 되새기고 있다. 그리고 ‘악’이라고 낙인찍은 이들에 대해 교회는 지극히 냉정하고, 때로 대단히 공격적이다. 다만 좀 더 우회적이고 좀 더 부드러운 모습으로.
어느 정치학자의 표현대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민주화 시대의 폭력성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한다. 민주화 시대의 폭력성은 지체된 민주화의 인식을 숨기지 못한 천박한 자들의 천박한 행동보다 훨씬 부드러운 얼굴로 다가오며, 익명의 낯선 이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폭력 아닌 듯이, 심지어 액션영화의 짜릿한 추억처럼 우리에게 재현한다.
부끄러운 것을 숨길 줄도 모르는 바보들의 잔치를 노려보느라 놓쳐버린 다른 괴물의 자취는 이미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그놈은 우리가 벌써 토악질해버린 이물질과는 달리, 이미 우리 몸 안으로 달콤하게 스며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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